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가까이서 본 적이라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998년이던가, 그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 그것도 100여명이 넘는 시민단체 인사들을 초청해서 국정과제를 설명하던 그 때에 악수하느라 본 것 밖에는 없다. 그 때 악수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청와대에서 집으로 보내주었는데, 아버님은 그 사진을 이리저리 이사하면서 사라지기 전까지 한동안 당신의 방에 두고 계셨다. 아버님으로서는 아들로 인해 고통 받던 시절, 학생운동으로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문제를 거론한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굳이 꼽자면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세 번의 간접적 인연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나는 대학시절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이다. 독재정권 시절에 더구나 자식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으니 어느 곳에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여겼던 부모님들은 민가협을 찾았고, 민가협을 통해 야당의 두 지도자인 YS와 DJ를 방문하게 되었다. 석방 이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늘 두 사람을 비교하며 시원시원하게 약속을 한 사람은 YS였고, 그에 비해 DJ는 속 시원한 답을 주지는 않아서 조금 못미더웠다고 하신다. 근데 사실 돌아보면 그 시절 누가 양심수의 석방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DJ의 태도가 옳은 것이긴 하나 애타는 부모 마음에 비추어 보면 썩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난 선고 받았던 징역형을 한 달 정도만을 남겨 두고 나온 셈이니 DJ의 태도가 '현실적'이었던 셈이다.

▲ 1980년 옥중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두 번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던 시절, DJ가 찾는 젊은 피 300인이라며 어느 월간지에 제멋대로 만든 명단이 내 이름올라간 일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소위 386세대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주력으로 주목받았고, 나이로는 그 세대의 앞머리쯤에 있던 필자도 제멋대로인 그 300인 명단에 올라 있었다. 어차피 정치권 진입에 관심 없던 사람으로서 그러려니 했고 실제로도 DJ가 내게 관심 줄 일은 없었던 터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혹시나 DJ와 관련을 맺는 것은 아닌가 하는 눈으로 본 것도 사실이었다. 뭐 특별히 직접적 손해를 끼친 일은 없었으니 딱히 내게 나쁜 일로 기억될 일도 아니지만 그리 즐거운 기억도 아니다.

세 번째는 경실련에서 일하던 시절 경실련 창립기념 행사에 당시 야당 총재로서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시민단체 행사에 찾아 와 축사를 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 전이었으니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날 DJ의 축사는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축사는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연설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연설을 그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YS와 DJ가 민추협을 만들어 재야운동 단체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거리에 나설 수 없었던 그의 육성은 녹음테이프로 집회 장소에서 울려 나오는 것으로 들어야 했다. 물론 87년의 대통령 선거 연설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연설의 내용이 중요했다기보다 갇혀 있던 DJ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던 시절이었고, 대통령 선거 연설 역시 그 내용보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그의 변명으로만 다가오던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경실련 창립기념행사에서의 그의 축사가 온전히 그의 연설 내용만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첫 번째 경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행사에서의 정치인의 격려사나 축사가 대개 그렇듯이 그저 칭찬과 격려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딱히 그런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리 어울리는 일은 아니기도 할 것이라 칭찬과 격려 일색의 격려사나 축사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사 진행자의 일원으로, 찾아오는 손님 안내하기에 여념이 없던 나로서는 별반 귀 기울여 들을 이유가 없었고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러는 순간 자연스레 귀를 열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하는 순간,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나름 자기의 논리적 생각을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이 그저 그런 내용이라면 더 듣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고, 혹 그리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나마 있던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게 되었다. 그의 축사는 내내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철학과 구체적 견해가 잘 정돈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의 말은 시민운동에 대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김대중이란 사람을 단순한 정치인으로 보지 않게 된 시작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왜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중요한가? 시민운동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첫째, 둘째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에 감사하다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이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거나 자발적인 시민들의 노력이 지금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대의나 명분으로만 대중경제론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느 정치인들에 비해 참 영악하게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잘 만들어 가는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DJ가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에 어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비공식적인 자리라 남북관계에 대한 소위 비사를 포함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임장관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 전의 이야기인데,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DJ의 남북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는 데, 정확한 내용은 이제 기억에 없지만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나 일의 성과를 바라기보다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남과 북이 가까워지기를 염원하고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가 담긴 것이었다. 임 장관이 전해주는 기도의 내용은 남북관계에 대한 DJ의 진정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 준 것이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손을 마주잡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묘하게도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견주어 보면 오히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모습이 어떤 사회였나를 알게 해 준다. 현재의 이명박 정부가 펼치는 국정운영이란 거의 상거래 과정의 모습이 오버랩 되지, 정상적인 정치과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본래 의미의 정치도 정책집행도 또 진정성 있는 소신도 아니라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노정했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름의 철학에 기초한 정치와 정책 집행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이 새삼 느껴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같은 정치와 정책집행이라는 것이 그때그때의 대증적 처방이 아니라 일관되게 지녀온 자신의 철학과 정치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이 바탕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역설을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그리 많이 들어 보지 않았던 그의 연설이지만 나는 그가 '분석적'이라고 느낀다. 그만큼 치밀하게 문제를 파고들고 정치한 정책을 만들려는 노력을 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그저 '좋은 일이죠'를 넘어서 시민운동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그의 분석은 진보적 가치라는 지형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물론 그의 정치는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했다. DJP연합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정치가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지금의 연합정치의 본격적 시동도 그가 건 셈이었다. 본격적 의미의 연합정치였는가는 논란이 있는, 거대 정치세력들의 수장들의 합의에 의한, 연합이 이루어지기까지 논의가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그 결정을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시민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연합정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숙련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연합정치를 담론화 한 것은 아니지만 동물적으로 그의 필요와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까?
이런 점들이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가깝게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또한 그의 이런 태도들이 과거에 내가 생각해 왔듯 단순하게 권력욕만을 위한 정치적 행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지만, 돌아보면 앞서 말한 여러 지점에서 그러나 그가 보여준 가치와 그에 대한 그의 진정성은 그의 정치적 결정과 태도들이 단지 권력을 위한 명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우리가 그와 같은 대통령을 가졌었다는 것은 나라의 축복이다. 단지 노벨평화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발표했을 때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진영의 신문들은 우리 정치의 거목이 정계를 은퇴했다며 추켜세웠다. 무엇보다 그로 하여금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아두고 싶은 마음들이 앞선 것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우리 정치를 설명할 때 3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 구분일 정도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위치는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구분과 구분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뒤늦게 알게 된,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기의 정치에 대한 확신과 치열한 고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마련한 추모집회의 사회를 기쁘게 본 이유기도 하다.

본래 정치를 하려고 했던 목표와 이유는 팽개쳐 놓은 채 권력만을 위해 이합집산하고 삼국지 전략 짜듯, 혹은 장사치 장사하듯 정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하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김대중 이라는 정치인은 훌륭한 전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돌아보며 그를 넘어서는 정치인이 나오게 될 때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김대중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다.


출처 : 하승창 씽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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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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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1967년 서울 수유리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였다.

돌아가신 강원룡 목사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후에 독일 대통령이 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박사를 초대해 당시 소장 국회의원으로 정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김대중 의원과의 만남주선한 것이다. 이보다 3년 전인 1964년, 김대중 의원은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무려 5시간 19분 동안이나 의사진행발언을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바이츠제커 박사를 안내하면서, 젊은 나이에 이 거물들의 역사적인 회동에 배석할 수 있었다.

많은 대화 내용 중 지금도 기억 나는 것은, 북한의 도발에 서울 시민이 한강을 건너지 못해 갖은 고생을 했던 1950년 한국전쟁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한강에 다리를 더 많이 건설해야 한다는 김대중 의원의 말씀이었다. 상당한 신사 국회의원이었던 그가 당시에는 보기 드문 파란색의 미제 승용차를 타고 아카데미 하우스에 매끄럽게 도착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1964년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이 날의 만남이 1994년 가을 독일 본의 대통령 관저에서, 당시 야인이었던 김대중 선생과 독일 대통령이었던 바이츠제커 박사의 면담을 주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연이 이어져 퇴임한 바이츠제커 박사는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 나와 함께 참석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와의 인연은 내가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국장으로 일하던 1983년 미국에서 다시 이어졌다. 당시 그는 미국 워싱턴 D.C에 망명 중이었고, 내가 미국에 출장을 갈 때면 그가 머물고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의 최근 저서인 <WCC 창으로 본 70년대 한국 민주화 인식>에도 편지 사본이 공개되었듯이, WCC의 인권 자금이 당시 곤궁했던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이우정 선생 등의 생계에 보탬이 되면서 WCC와 김대중 대통령은 더욱 긴밀한 협력을 하게 되었다.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몇 가지만 추려서 기술하겠다.

첫째, 노벨 평화상 수상에 관한 사실이다. 내가 스위스 제네바의 WCC에 근무를 시작한 게 1982년 2월부터이다. 나는 그때부터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후보 자격이 충분하며, 잘하면 수상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985년 그가 귀국하고 나서, 내가 동북아 지역에 출장을 올 때면 서울의 동교동 자택을 늘 찾아갔다. 많은 경우 가택 연금의 시기로 기억된다. 그 때,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김대중 옥중 서신> 등을 읽게 되고 몇몇의 번역본은 제네바로 갖고 갔으며 그곳의 동료들에게 일독을 권하기도 하였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스위스 제네바의 에큐메니컬 센터에는 루터교 세계연합체 사무총장이었던 노르웨이 출신 주교 구나 스탈셋 목사가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1983년 이미 노벨평화상 최종 심사위원회의 5명 중 한사람이었고 심사위원회 부의장으로 수고하고 있어서 그 책들은 자연히 그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나는 작년 오슬로의 그의 자택에 초대받아 오랜 시간 당시를 회상하였다. 스탈셋 목사는 오슬로의 대주교를 마지막으로 은퇴해 지금은 동티모르의 민주화 정착에 기여하고 있다. 나 이외에도 많은 국내외 인사들도 김 대통령을 추천했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의 결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7년 8월 최종 3인의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올라 수상자가 될 가능성 매우 커졌다. 그런데 노벨 평화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이에 따라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수상자로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그를 수상 후보(short list) 3인에 넣었고 나는 이 문제를 밝혀야 했었다.

한국에 출장을 왔다. 동교동 조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에게 오랜 숙고 끝에 대통령에 더 뜻이 있어서 평화상은 뒤로 미룬다는 당신의 뜻을 전했고 나는 이를 서울에서 스탈셋 목사를 통해 최종 심사위원회에 통보하였다. 이날이 1987년 8월 14일이었다. 그래서 198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남미 코스타리카의 정치가 아리아스 산체스가 수상하였다. 산체스는 2006년 대통령이 됐으며 오스카르 플랜을 제창하여 남미의 평화 민주주의에 공헌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이유는 아직도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났으며, 금전이 영향을 주었다'는 억측이 남아 있어서다. 노벨상은 로비를 할수록 수상이 멀어지며 금전의 개입은 어불성설로 이러한 근거 없는 억측들은 우리의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이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는 그 후 2000년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2000년 12월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 연설을 하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두 번째 얘기는 체코슬로바키아 하벨 대통령과의 관계이다. 내가 이끌고 있는 WCC 아시아국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하고 영국캠브리지에 와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일행을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에 3박4일 일정으로 초청하였다. 그때가 1993년 6월로 기억된다. 많은 얘기가 오갔는데 특히 김 전 대통령은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과의 만남을 원하셨다. 그래서 나는 WCC 유럽국의 마이라 부라이스 국장을 통해서 하벨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두 분은 그 후 의기가 잘 투합이 되어 민주주의, 평화, 인권 등의 세계적인 프로그램에서 많은 협력을 했다. 특히 두 분이 각각 체코와 한국이라는 무대에서 겪은 고초들이 너무나 비슷하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의 세계적인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모시고 있던 박금옥 총무 비서관(현재 우석대학교 초빙교수)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사흘간의 제네바 방문 계획을 짰다. 당연히 알프스 몽블랑 산을 가보시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 후 다음날 프로그램을 말씀드렸더니 "박 박사는 내가 고소 공포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십니까? 나는 비행기는 타지만 산은 오르지 못합니다"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몽블랑 대신 제네바의 레만 호수 150㎞를 돌아보면서 스위스와 프랑스의 전원 도시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치했던 기억이 난다.

유럽 현대사를 전공한 내 아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여사를 모신 차에 동승했었다. 김 전 대통령에게는 구경이 아니라 공부 시간이었다고 내 아내는 지금도 얘기한다. 스위스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물어보시면서 하나하나를 당신의 수첩에 기록, 본인이 소화하신 일 등은 지금도 즐거운 회상으로 우리 부부에게 남아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둘째 날엔 WCC의 사무총장 이하 간부들과 2시간 동안 간담회를 가졌다. 사무총장 초청 오찬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왼쪽에 당시 보좌관으로 수행한 김상우 박사를 앉게 하고 오른쪽에는 나더러 앉아 혹 당신이 귀가 약하셔서 잘못 알아들으면 도와달라고 하셨고 나에게 통역을 부탁 하셨다. 그런데 처음 서두를 영어로 시작하더니 이후 1시간 동안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영어로 강연하시는 게 아닌가! 모든 간부들이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모임이 끝나고 '선생님은 어디에서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는 나의 물음에 긴 감옥살이 하시면서 영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대답에 나는 놀랬다. 많은 곳에서 인동초(忍冬草)를 좋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노력하는 분, 늘 공부하시는 분, 그리고 한 순간도 헛되게 주어진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세 번째 얘기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투철한 신념이다. 나아가 참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과 행동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발전이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몇몇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정면 승부를 마다하지 않은, 참으로 값지고 위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1994년 3-4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109~126쪽) 당시 싱가포르 수상이었던 리콴유 박사는 '서구에 뿌리를 둔 인권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들지 말라. 왜냐하면 유교의 전통을 가진 아시아의 가치는 서구식 인권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뜻이 깊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에도 국제 사회에서는 늘 있어왔던 주장이었다. 특히 1993년 6월 유엔 인권이사회가 주최한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 인권 특별 총회에서 당시 말레이시아 수상이었던 마하티르 박사가 리콴유 박사와 비슷한 연설을 하여 후진국과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박수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포린어페어스> 1994년 11-12월호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선생은 리콴유 박사 등이 유교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음을 지적하면서 유교의 가르침을 오용하여 인권의 위대한 가치를 경제 발전과 대치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교정하였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모델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경제 발전이 정답임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 웅변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주장으로 전 세계 민주 활동가와 인권운동가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그를 세계적인 지도자로 재도약 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네 번째 얘기는 버마와의 인연이다. 선생은 버마 아웅산 수지 여사의 민주주의를 위한 비폭력 평화운동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아주 중요한 우선순위로 실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수지 여사는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1988년 가족을 영국의 옥스퍼드에 두고 단신 귀국하여 22년을 비폭력 평화 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어 오면서 4000만 버마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그는 작년 11월 18년간의 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제한적 민주주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철저한 확신과 실천을 수지 여사의 고난에 접합시켰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돌아가시기 1년여 전인 2008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남북 6·15 합의문 기념행사를 열면서 한국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지 여사의 동지들을 전원 초청했다. 이날 밤 그는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수지 여사 그리고 그녀의 동지들을 격려 하시면서 그날 밤의 모금액 전부를 전달했다.

대통령 재직 중에는 전 세계 지도자가 참가하는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 국제 회의를 개최하면서. 개회 벽두에 수지 여사의 화상 메시지를 보여줘 참석자 전원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오늘까지 한국 정부는 근 10년 이상 유엔 인권이사회의 '버마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결의안'에 공동 제안국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4000만 버마인들의 민주화 염원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중국, 일본, 그리고 아시아 그 어느 나라도 못하는 일이다.

나 역시 인권대사 재직 중 수지 여사의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 연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당원들이면서 당시에는 학생 신분으로 1988~1989년의 버마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군부의 검거를 피해 지금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버마인 중 열한 사람을 우선 유엔이 인정하는 정치적 난민 지위를 획득하도록 도와주었던 적이 있다. 그 경험을 지금도 난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제네바에서 근무하던 1995년과 1996년 가택 연금 중이던 수지 여사를 두 번이나 만난 사실을 나는 지금도 귀하게 간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직간접으로 그들의 민주화 운동을 돕고 있다. 1970~80년대에 지금의 버마인들처럼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는 버마의 민주화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고 그들을 우리는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은 국가 과제로 한반도의 평화 정착,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평화 통일, 동북아시아 평화 공동체 탄생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경제 성장 하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 모두는 깨달아야 한다. 돈 이외에 자유 평화 인권 환경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대내외에 실천함으로써 선진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국내의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은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훨씬 높이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남아프리카에는 만델라가 있고, 버마에는 앞서 언급한 수지가 있으며, 스위스에는 앙리 뒤낭, 미국에는 링컨이 세계인의 인구에 회자되듯이 한국에는 김대중이 외국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음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업적을 앞서 말한 선진국 도약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본도 중국도 이루지 못한 우리가 만들어 낸 민주주의가 하루하루 뿌리를 내리는 데에 그는 분명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이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그가 평소에 꿈꾸었던 한반도 전체의 민주주의, 평화 통일, 자유, 인권의 발전을 위해 지구상에서 아직도 고생하고 애쓰고 있는 많은 개발도상국들의 고뇌에 동참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우리의 성공 스토리를 전파하면서 지도급 개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중요하듯이 국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 필자 박경서는 1939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 부원장을 거쳐 1982년 2월부터 1999년 12월말까지 18년간 스위스 제네바 소재 세계교회헙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아시아 국장과 아시아 정책위 의장으로 일했으며 초대 대한민국인권대사(2001-2007년)와 국가 인권위원회 상임위원(2001-2004),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2005-2008년), 진실과 화해위원회 자문위원(2007-2010) 등을 역임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박경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전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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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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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한민국에는 10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현 이명박 대통령. 이 가운데 현직인 이 대통령을 제외한 9명의 전 대통령 중 재임 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까지 가장 성공적이었던 대통령을 꼽는다면 김대중이 아닐까 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학생들의 유혈 시위 끝에 외국으로 망명해 쓸쓸한 최후를 맞았고, 박정희는 18년 장기 독재 끝에 부하에게 사살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군부 출신의 전두환ㆍ노태우는 퇴임 후 재판에서 쿠데타 주범으로 처벌받는
수모를 겪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년 찾아온 IMF 외환위기로 불명예 퇴임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불과 1년여만에 자신에 대한 부패수사와 관련,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반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3번의 낙선과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숱한 고난과 곤경을 겪었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게다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는 등 성공적인 정치행로를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그리 후한 것 같지 않다. 대체로 해외에 비해 국내의 평가가 크게 인색한 데다가, 그에 대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그의 집권을 시작으로 우리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권시대 10년을 맛보았지만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난 진보개혁정권에서 이루어놓았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발전이 후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남북관계가 역행하며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정권교체가 급선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더 우선적인 과제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부였던 김대중정부의 공과 과, 성과와 한계에서 대해 이제 한번쯤 찬찬히 되짚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시안>은 이런 의미에서 김대중정부로부터 계승할 것은 무엇이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점검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정치인, 시민운동가, 학자,
문화예술인 등 각계 인사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들을 연재하는 것이다. 우선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기념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과의 인터뷰로 이 연재를 시작한다. 이 인터뷰는 지난 2월 21일 오후 김대중도서관에서 있었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맡았다.

앞으로 매주 화, 금요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회고와 평가의 글을 차례로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김대중 도서관의 내력, 그리고 '나와 김대중'

프레시안 : 올 8월이면 김대중 대통령 서거 2주년이 된다. 서거 1주년인 지난해 8월 <김대중 자서전>이 발간되면서 그의 일생이 공식적으로 정리됐지만, 아직 김대중에 대한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의 집권에서 시작된 진보개혁정권 10년 동안(1998-2008년) 진전됐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이명박 정부 이후 크게 후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김대중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그의 성취는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다시 말해 계승과 극복의 과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 인터뷰를 시작으로 각계 인사들은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우선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퇴임하면 재임시절 그의 통치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한데 모아 후세의 학자들이 그의 통치시기를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김대중 도서관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김대중 도서관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전 문화부장관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4년 설립한 '아태평화재단'(Asia-Pacific Peace Foundation)이 그 모체다. 대통령은 대통령재임시인 2002년 말,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본래의 정신에서 이 재단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했는데, 연세대학교가 이 건물리모델링해서 퇴임 직후인 2003년에 대통령기념도서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살고 있는 동교동 집 외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고 했다.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내게 일임했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께서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EU 공동체와 평화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것은 그분이 평생 가지고 있던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및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방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영국에서 귀국하신 후 94년 아태평화재단을 만드신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다. 아태평화재단을 만든 재원은 대통령께서 내게 맡긴 그 재산으로 했다. 나는 그 당시 영국에서 안식년으로 연구하던 중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프리오'(PRIO, Peace Research Institute Oslo, 오슬로국제평화연구소)에 초청이 돼 1주일간 방문했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프리오는 세계적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이 세운 연구소로 평화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께 프리오에 대한 소개와 함께 프리오 같은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의 긴 편지를 썼다. 대통령은 이 편지에 대해 아주 흡족해 했다. 대통령께서 구상한 것에 내가 조금 도움을 드린 것이다. 아태평화재단은 처음에 동교동의 한 빌딩에 임대해서 있다가 김대중대통령 사저 바로 옆에 건축되었는데, 이 자리는 중앙정보부가 김대중대통령을 비밀리에 감시하던 안가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연세대학교가 기증받은 건물을 김대중도서관으로 개관하자 매우 기뻐했고, 당신이 애장했던 1만 3000여 권의 도서와 일생동안의 정치활동, 대통령재임시 통치 메모,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민주화와 평화통일 관련자료 10만 여점과 노벨평화상 상금 중 3억 원도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대통령 기념도서관 겸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프레시안 : 김대중 도서관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는가?

김성재 : 김대중도서관은 민주주의, 평화, 빈곤퇴치의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김대중대통령이 퇴임 후 계속 활동한 일들이기도 하다. 김대중도서관은 이 목적을 가지고 크게 다섯 가지 사업을 한다. 첫 번째는 미국의 전직대통령들 기념도서관처럼 전시관을 만들어 김대중대통령의 일생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다. 출생에서 서거까지 모든 사적 자료와 문서, 사진, 영상 자료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 평화통일 관련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두 번째는 국내외에서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 관련 사료를 발굴, 수집하고, 해제, 연구하며, 중요한 인사들의 구술사 프로젝트수행한다. 세 번째는 도서관 목적에 따른 주제별 연구를 국내외 학자들과 함께 한다. 그리고 국제교류와 학술 심포지엄 및 세미나도 한다. 네 번째는 교육 과정인데, 미국의 케네디 스쿨과 같은 학술연구 및 교육과정으로 김대중평화아카데미 과정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고, 연세대 통일연구소와 협력하여 평화통일 관련 석박사 과정도 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지속적으로 디지털 아카이브구축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도서 및 자료를 출판하는 사업을 한다.

프레시안 : 김성재 관장과 김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은?

▲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한국신학대학의 명예학장인 장공 김재준목사님이 위원장이었고 김대중의원이 신민당 대표로 참석을 했다. 나는 학생회 대표였지만 이 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고 김재준목사님을 도우면서 김대중의원을 알게 됐는데 개별적인 만남은 없었다. 김재준목사님은 당시 김대중의원을 높이 평가하면서 '김대중선생은 훌륭한 정치인이니 자네들이 민주화운동을 할 때 김대중선생을 도우라'고 했다.

이후 나는 1971년 대선 때 김대중후보를 위해 부정선거를 막는 표지키기 참관인 운동을 주도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신구교 합동으로 드린 3.1절미사에서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을
준비할 때, 나는 문익환목사님 등 재야인사와 김대중대통령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연금 상태였고, 또한 이 일은 비밀리에 성사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복'이라는 암호를 가지고 연락했다. 예를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성명서 초안이 완성되면 '한복이 다됐다'고 연락하는 식이었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내가 교수로 있던 한신대에 김대중대통령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했었다. 1987년 김대중대통령께서 평민당을 만들 때는 나에게 정계에 입문하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이후에도 두 번 전국구 의원을 하라고 기회를 주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부터 사회복지와 교육 분야 등의 사회정책 자문역할은 계속했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고, 문화부장관도 했는데.

김성재 :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대통령자문새교육공동체위원회 상임위원과 일본 대중문화개방 등의 문화정책 자문을 위해 문화관광부자문위원장을 했다. 99년에 국민여론 수렴과 개혁 그리고 공직기장을 위해 신설된 민정수석을 했고, 2000년에는 정책기획수석을 했다. 정책기획수석은 인사, 예산, 정책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는데, 대통령께서 개혁적인 국정수행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했다. 이 때 대통령의 뜻을 따라 정보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고, 국민기초생활보장 등 인권에 의한 국가복지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학술진흥재단이사장을 하다가 문화관광부장관을 했다. 김대중대통령 재임 5년 동안 함께 일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프레시안 : 김 관장은 40년 이상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아 왔고,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내각에도 있었으므로, 그를 매우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겠다. 김대중은 해방 이후 최초의 수평적 권력 교체를 이뤘고,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했으며, 또 최초로 정권을 재창출한 대통령이다. 이 정도면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나?

김성재 : 정말 성공한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과 함께 성공했고, 대한민국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이것을 나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국가부도사태의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국가, 세계 최선두 정보화와 세계10위권 경제발전, 복지국가와 문화국가, 6.15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남북화해협력과 자주적 국제외교, 노벨평화상 수상 등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전세계가 감탄했다. 국민들도 역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고 박수를 보냈다. 지금 이명박정부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를 역주행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다시 방향을 전환할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맛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바람을 보라. 역사는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고, 경제가 발전하고, 인권으로 복지를 보장받고, 남북의 갈등이 고조되어도 평화롭게 살고, 국제사회 주변국에서 중심국으로 위상을 높이고, 우리 국민들이 세계에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국민들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프레시안 : 오랫동안 김 전 대통령을 봐 왔는데, 김대중 리더십,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나?

▲ 5번의 죽을 고비와 20여 년 간의 투옥, 망명, 연금의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분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투철한 신념과 의지를 말하고 싶다. 본래 김대중대통령은 본인도 그렇게 말했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5번의 죽을 고비와 20여 년 간의 투옥, 망명, 연금의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또한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자신을 죽이려했던 박정희,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용서하고 화해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음해한 모든 사람들도 용서했다. 햇볕정책도 이런 화해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대통령 장례식 때 장남 김홍일의원이 고문 후유증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박해는 용서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랑하는 아들에게 한 행위를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너무도 위대하다'고 추모했다. 김대중대통령은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난 직후 아들에게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으로 승리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김대중대통령이 옥중에서 쓴 메모가 있는데, 내용이 이렇다. '용서 없이는 우리 사회,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우리는 오랜 당쟁과, 식민지를 거치면서 원한이 너무 많다. 이것은 용서로 풀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똑똑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발전을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것은 우리 사회에 용서와 화해가 없으면 우리 국민과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대통령께서 서거 한 후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나는 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판했고, 나쁜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 진면목을 알게 되고, 또 여기 와서 보니 내가 (그동안) 잘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면서 더욱 존경을 표하고, 후원에 참여하는 분들도 꽤 많다.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정부에 제기됐던 비판적 지적들

프레시안 : DJ의 재임 5년간 성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관계 등을 그의 업적으로 꼽고 있다. 반면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비판이 경제 분야에서 신자유주의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부분이다. 물론 현재 상황에 대해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기는 좀 그렇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3년을 지내왔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같은 평가에 대해 어떻게 보나?

김성재 : 우리사회 양극화 문제를 잘 못 인식하는 것 같다. 우리사회를 양극화 체제로 만들고 항존하는 빈민계급을 탄생시킨 것은 박정희군사정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제발전은 박정희 대통령, 민주화는 김대중 대통령, 이렇게 얘기하는데, 절반만 맞는 잘못된 인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물론 경제개발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으로 빈민을 의도적으로 양산한 불의한 독재개발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박정희군사정권은 산업기술 집약이 아니라 단순노동집약 정책으로 수출주도형의 경제개발을 하면서 저임금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명분으로 저곡가정책을 했다. 저곡가정책은 농민을 빈민으로 만들었다. 빈민이 된 농민은 농토를 버리고 서울과 공업단지가 있는 도시로 이농해서 저임금노동자와 도시빈민이 되었다. 이미 저임금 노동인데도, 빈민농민이 대거 몰려들자 노동자 공급과잉으로 저임금이 정당화되고 더 낮아졌다. 당시 노동자 임금으로는 살 수가 없어 잔업을 포함해서 16시간씩 코피 쏟으며 화장실도 못가고 일해야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이런 비참한 살인적인 노동현실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런 극한에 처한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알리려고 '우리는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것이다.

박정희군사정권은 경제성장을 빌미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을 희생시켰다. 당시
노조결성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민중들의 정당한 권리와 분배요구는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심지어 빨갱이들의 짓이라고 반공법으로 처벌했다. 반면에 도리어 산업기술과 경제가 일본에 절대적으로 예속당하는 산업 체제를 만들어 일본 경제를 살찌웠다. 이 결과 지금까지도 IT 분야외의 기술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본에 더 많은 로열티를 주어야 한다. 현재도 1년에 수백억 달러의 로열티를 일본에 주고 있다.

또한 군사정권은 권력유지와 부정한 특혜로 재벌과
대기업들을 갑자기 만들어 내었다. 현재 재벌들과 대기업 상당수는 이렇게 군사정권과 유착한 특혜로 된 것이지 정당하게 땀 흘리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마치 자기들이 노력해서 된 것처럼 거짓 성공신화를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지금까지도 특혜, 탈법, 착취의 불의한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군사정권 때의 경제성장은 결코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때 우리나라 경제기반을 만들고, 성장시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것이 우리사회가 빈부로 양극화 된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김영삼정부가 도입했다. 김영삼정부의 최대 슬로건이 '세계화'였다. 1990년을 전후해서 구소련이 해체되고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세계는 국경 없는 단일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른 새로운 세계시장 질서를 만든 것이 세계무역기구(WTO)였다. 미국은 이 WTO를 통한 신자유주의로 세계경제를 지배했다. 이렇게 변화된 세계경제 상황에서 김영삼정부는 OECD에 가입하고 외화자유 정책을 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책도 없이 정치적 과시용으로 성급하게 경제 개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시장에 무작정
편입이 돼 버린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가 초래됐고, 국가 부도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이 때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프레시안 : 양극화 등 현재 드러나고 있는 여러 경제적 문제가 DJ의 잘못이기보다는 YS의 성급한 개방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김성재 : 그렇다. 김영삼정부가 어설픈 세계화를 통해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경제를 파탄 낸 것을 김대중대통령이 조기에 극복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게 10위권으로 발전시킨 것은 국민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런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 병폐를 막으려했다. 이미 세계화된 시장경제체제에서, 특히 우리나라 경제가 80% 이상 해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 폐해를 막기 위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추진했다. 민주적 시장경제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그리고 무너진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공공, 기업, 금융, 노사 등 4대 개혁을 했다. 당시 이런 개혁적 구조조정을 서서히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개발 이후 30 여 년간 쌓여진 적폐를 청산하는 과정과 준비없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김영삼정부의 실패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김대중대통령은 신자유주의 병폐를 예방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문제들을 해결하고, 국민의 존엄한 생존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생산적복지 정책을 함께 추진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와 중3무상의무교육 완성, 의료, 연금, 고용, 실업 등 4대 사회보험을 실현했다. 미국의 오바마대통령이 의료사회보험을 도입하려고 할 때, 이것은 미국 헌법정신, 곧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 반대한 것을 생각해 보면, 김대중대통령은 결코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은 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시켰다. 신자유주의라면 김영삼정부에서도 불법이었던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특히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시장개입을 못하게 하는데, 김대중대통령은 대통령직속으로 중소기업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직접 중소기업을 챙겼다. 재벌과 대기업문어발식 경영 체제를 개혁하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영역에는 진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진입 규제를 노무현정부 때 풀었고, 현 정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벌과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판국이 되었다. 또한 김대중대통령은 하청도, 납품도 다단계나 불공정하게 하지 않도록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해 엄격히 감시하고 수시로 보고 받았다. 그런데 현 이명박정부에서는 재벌들과 대기업들이 권력의 비호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중소기업으로부터 하청과 납품과정에서 몇 배 이상의 이윤을 챙기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자유민주주의도 시장 경쟁 논리도 아니다. 재벌과 대기업들의 막대한 이익실적은 정상적인 경영의 결과라기보다 상당액이 중소기업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중소기업인들과 소상공인들마저 빈민으로 전락시키고, 파렴치하게도 저들이 망하는 것은 무능하고 게으름의 부도덕한 결과라고 말한다.

▲ "김영삼정부가 어설픈 세계화를 통해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경제를 파탄 낸 것을 김대중대통령이 조기에 극복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게 10위권으로 발전시킨 것은 국민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런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 병폐를 막으려했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현재의 경제적 곤경에 DJ의 잘못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김성재 : 현재 서민과 빈민들의 고통이 김대중대통령의 잘못된 정책에 근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보수정권과 보수세력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데, 일부 진보진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물론 김대중대통령이 모두 다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대통령의 정책은 분명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내외 상황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책임전가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사실 정부수립 50년만에 자민련과 연합해서 첫 정권교체를 한 상황, IMF외환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정책들도 많았다. 국민과 시민단체들은 강하게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실업을 발생시키는 구조조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개혁과 실업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라는 요구를 했는데, 이런 요구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개혁에 대해 보수기득권세력만 저항한 것이 아니다. 진보개혁세력들도 자신들의 기존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노무현정부가 뒤를 이어 출범했을 때 미진했던 개혁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개혁은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정부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입장에서 새판짜기를 하면서 김대중정부가 이룩해놓았던 근간을 흔들고 무너뜨렸다. 사실 노무현정부를 김대중정부보다 더 진보적이고 심지어 좌파라고 말하는데, 경제와 사회정책만이 아니라 남북관계나, 한미, 한중, 한일 관계를 보면 원칙 없이 상항에 따라 상당히 좌우로 왔다갔다 했다. 노무현정부가 생각은 진보적으로 했지만 정책 추진과정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혼선을 빚었던 측면이 많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김 관장이 보기에 김대중 리더십의 단점이나 아쉬운 점은 없나?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도 사람인데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일반적으로 김대중대통령께 너무 완벽한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 같다. 국가 정책은 어느 한 영역이 아니기에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다양한 국민적 요구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영역 또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 할 것이 있다고 본다. 당시 개혁을 좀 더 시스템적으로 강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개혁 논쟁에서 수술환자가 비유로 등장 했는데, '환자가 체력이 약하면 수술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로 체력을 기르면서 개혁해야 한다. 아니면 기업이 죽는다'는 논리로 개혁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다. 평가는 열려있다.

프레시안 : DJ에 대한 비판 중에 하나가 87년 대선 과정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것이다. 민주화가 됐음에도 정권을 군부세력에 내준 것은 물론이고 이후 민주화세력 자체를 분열시킴으로써 우리 정치에 두고두고 해악을 끼쳤다는 비판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은 후에 '그 때 내가 단일화를 양보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은 후보단일화 논의 과정에 2가지 불공정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당시 후보단일화를 위해 재야 모든 단체들은 고려대에서 두 후보를 초청해서 강연을 듣고 결정하기로 했다. 재야단체는 강연 후 거의 절대적으로 김대중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소수 김영삼후보 지지 재야단체의 반대 때문에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김대중대통령은 후보단일화 과정을 공개경쟁으로 하기를 원했는데, 정치적으로 진행된 것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병에 걸려 후보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통령병만으로 그 숱한 박해와 시련을 이기고 3전4기하며 대통령이 되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87년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께서 대통령이 된 후에, 그리고 퇴임 후에도 결코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려 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우리가 87년 후보단일화 실패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이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에 이에 대한 평가는 공정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에게만 역사적 멍에를 씌우는 것은 불공평하다.

남북 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비판들에 대해

▲ "물리적 흡수통일은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큰 민족의 비극을 가져 온다. 동서독의 예를 살펴보라."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김대중대통령은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 가치를 별로 높게 보는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보수 일각에서는 로비를 통해 받은 상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도 있다. 실제 노벨상 수상을 위해 돈이나 뇌물을 건네는 불법적 로비를 했나.

김성재 : 전혀 사실이 아니다. 며칠 전에 노벨위원회 자문인 한영우 박사가 언론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는데, '당시 김한정 부속실장이 와서 김대중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받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사실이 있고, 서양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김 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리기 위해 자료를 번역해서 설명을 하는 등의 활동은 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다 당연히 하는 것이고 로비가 아니다. 도리어 돈이나 뇌물을 건네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노벨위원회를 모독하는 것이고 이 노벨상 제도를 폄하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비판도 정도와 품격이 있고, 금기가 있는데, 시장모리배 같은 사고로 계속 떠드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다른 숨겨진 불순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에서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대통령을 정말 존경하고 있다.

프레시안 : 또 6.15정상회담도 김정일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한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있는데.

김성재 : 이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비아냥은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동서독의 관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독일이 통일된 것을 구서독의 흡수통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구서독과의 협상으로 구소련의 군대가 구동독지역에서 철수하자 구동독에서 촛불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이 결과로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되고 압승을 거둔 기독교민주당 의회가 구서독의 통일 절차에 따른 통합을 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구서독이 흡수한 것이 아니라 구동독주민들이 원해서 통일이 되었다. 구동독주민들이 구서독과 통일하도록 마음을 갖게 한 중요한 원인은 구서독정부의 동방정책 때문이었다. 구서독은 동방정책으로 매년 20억 달러씩 20여년간 구동독에 지원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소원인데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지 않고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나? 물리적 흡수통일은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큰 민족의 비극을 가져
온다. 따라서 남북화해와 협력을 주창한 김대중대통령이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은 동족에 대한 인도적 차원이었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1억달러 보내는 것을 야당과 협의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모들이 이것으로 논란을 하게 되면 정상회담도 불가능하게 되고,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의견을 제시해서 통치적 차원에서 결정했다.

프레시안 : 인도주의적 지원이라고 했는데, 정상회담 하기 직전에 5억 달러가 갔다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대가성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삼는다.

김성재 : 정상회담 전에 5억 달러 주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특검에서 문제된 것도 1억 달러였는데 5억 달러라고 하는 것은 현대아산의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뭉뚱그려 하는 말로 정략적인 것이다. 이런 논리로 말하자면 김영삼정부 때에 북한에 지원한 돈은 이 보다도 훨씬 더 많다.

프레시안 : 이런 비판도 있다. DJ의 남북화해가 이른바 보수세력을 포함한 '전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루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마뜩찮게 생각했던 보수를 등에 업고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완전히 대북정책을 거꾸로 돌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는데?

김성재 : 그런 주장이 아주 합리적이고 멋있는 것 같지만, 사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재와 같은 갈등의 정치상황에서 어떻게 여야가 남북관계에서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나? 또 컨센서스 없는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남남 갈등이 더 불거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책임 전가와 핑계일 뿐이다. 사실 김대중대통령은 정상회담 전에 야당대표와 대화하려고 했고, 정상회담하고 난 후에도 그 결과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야당이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들은 항상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것은 국민적 컨센서스가 분명히 있는 것 아닌가?

노무현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특검 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상호주의와 공개주의인데, 이것 때문에 남북관계가 더 발전하지 못했다. 후에 노무현정부도 상호주의와 공개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또 '컨센서스'를 말하는 사람들이 독일의 예를 드는데, 독일의 경우 구서독 사회민주당 정부의 동방정책을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이 보수당이지만 협력하고 자기들이 집권했을 때도 계속 추진한 것은 '하나의 독일' 정책을 국내 정치로 정략화하지 않는 정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은 동서독 간에 전쟁을 하지 않았고, 구서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와 구동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우리처럼 극과 극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비판을 보수세력이 하면 모를까, 소위 진보적인 인사라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책임전가 또는 사이비 진보의 자위의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국내에서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평가가 뚜렷이 대비되는 한편, 국내의 평가에 비해 외국에서의 평가가 훨씬 우호적인 것인 것 같다. 왜 그럴까?

▲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애증과 오해가 많은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그에게 덧씌운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호남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호남차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천형 같은 조작 선동은 정말 사악한 짓이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3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입시키고, 이에 편승한 보수세력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면서 이것이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애증과 오해가 많은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그에게 덧씌운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호남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호남차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천형 같은 조작 선동은 정말 사악한 짓이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3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입시키고, 이에 편승한 보수세력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면서 이것이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이에 반해 국제사회는 김대중대통령에 대해 이해관계를 넘어 객관적 평가를 하지 때문에 세계적인 훌륭한 지도자로 존경한다. 내가 만난 일본과 중국지식인들은 김대중대통령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없는 자기들은 부끄럽고, 한국이 부럽다고 했다.

프레시안 : 요약하면, 한국 국민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고, 그 이유는 김대중에 덧씌워진 군사독재시절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라는 말인가?

김성재 : 그렇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김대중대통령을 국내처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면 김대중대통령 생전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고, 미국, 중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세계주요 국가들의 유명한 대학들이 김대중대통령께 명예박사학위나 명예교수직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김대중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뉴스위크>는 세계와 사회를 변화시킨 11사람의 트랜스포머 중 한 사람으로,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될 36명의 인사 중 한사람으로 추모했는데, 이것도 국내 부정적 평가 기준으로 보면 <뉴스위크>가 잘못된 정보로 선정하고 추모했거나 거짓된 보도를 한 것이 된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해외의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용서와 화해에 바탕을 둔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중동 문제 등 국제적 분쟁에 중요한 해결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 미국의 대북특사인 보즈워스도 북핵문제 해결은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 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보수는 퍼주기라고 비판하고 진보는 컨센서스가 부족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박정희군사정권의 부정한 조작 이미지만이 아니라 김대중대통령에게 배 아픈 사람들이 만든 부정한 이미지도 있다고 본다. 상고 나온 주제에 잘난 척 한다고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다. 김대중대통령 재임 시에 한국의 빠른 발전 모습을 보고 전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인 제프리 존스가 '나는 한국이 두렵다'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이 이런 방향에서 이런 속도로 발전하면 30년내에 미국을 앞지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단한가지 조건을 해결해야 하는데,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병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너무도 뼈아픈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프레시안 : 지난 해 발간된 <김대중자서전>에 대해 일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솔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너무 정당화만 해서 차라리 자서전을 안 쓰는 게 나았겠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는데.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준비하기 전에 저명인사 몇 분들이 김대중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에 그 분에 대한 누명과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약 30여명 정도 글을 쓸 계획을 세우고 대통령께 의논한 적이 있다. 내가 간사 역할을 해서 김대중대통령께 이런 의견을 전했더니 대통령께서 '웃으며, 그런 것은 나 죽은 후에 해야지 내가 살아있을 때 하면 나를 의식해서 좋은 말만 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추진되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께서는 자서전도 사후에 출판하도록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국민과 역사가 자신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해주기를 바랐다.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말했다. 첫째는 신념과 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은 국민에게 솔직하게 자기 일생과 통치기록을 남기는 것이 의무라고 했다. 자서전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진솔하게 써서 매우 감동적이라고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본인이 서자라는 것도 밝혔다. 그러므로 이 자서전이 솔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와의 관계

프레시안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DJ가 권양숙 여사를 붙잡고 통곡한 장면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또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방 후 우리 국민이 가진 두 분의 진보개혁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 두 분은 어떤 관계였나?

김성재 :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김대중대통령은 참으로 좋아했다. 나에게 '이제 내가 마음 편히 청와대를 떠날 수 있게 됐다'고, 기쁜 마음으로 퇴임을 했다. 그런데 노무현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북송금 특검을 강행하자 크게 섭섭해 했다.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평생 헌신적으로 노력한 것이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보수세력에게 빌미를 주어 국가와 민족에게 초래될 불행을 염려했다.

프레시안 : 당시 반응을 들은 것을 말해줄 수 있나?

▲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압박으로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은 아직 젊은데,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라도 검찰로부터 매일 모욕당하고 여론으로 압박당하는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직접적이라기보다, 포괄적으로 얘기하겠다. 대북 특검은 정치적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DJ정부를 딛고 일어서야 된다는 정치적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내부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도 들었다. 처음에는 (대북송금 특검을) 안 할 것이라고 했다. 국무위원도 다 반대했고, 주변 참모들도 다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특검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노대통령 최측근인 청와대 고위인사가 내게 특검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접 말했다. 그래서 내가 김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께서 안심했는데, 뒤집어진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을 분당 했을 때 김대통령께서 정말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속으로 감추고 이렇게 말했다. '김장관, 어쩌면 노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그렇게 분노를 했음에도 '김 장관 그러나 우리가 참읍시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이 큰 틀에서는 결국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갈 거요. 한나라당에서 대통령이 됐다면 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을 거 아뇨. 그걸로 위안을 삼읍시다' 이것이 당시 대통령의 말씀이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자시절에 대통령께 찾아와서 대통령님의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고, 대통령께서는 흡족해했다. 그러나 계승보다 판을 엎어 놓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로 사분오열되고 분당으로 몰려가는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대북특검을 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한나라당은 얼씨구나 하고 뭉쳐서 공격했고, 민주당과 개혁세력은 분열됐다. 결국 이것이 분당으로까지 치달렸고,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을 승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께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믿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할 것을 권유했고, 정상회담 후에는 관계가 좋아졌다. 특히 이명박정부가 민주주의, 남북관계, 민생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힘을 합쳐 이명박대통령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압박으로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은 아직 젊은데,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라도 검찰로부터 매일 모욕당하고 여론으로 압박당하는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 김대중대통령께서 얼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아꼈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내가 정책기획수석을 할 때 노무현 전 의원이 부산 총선에서 낙선한 후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나는 노무현 전 의원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같이 한 친숙한 관계였다. 인사동 음식점에서 만났는데, '김수석 내가 대통령후보로 나가려고 하는데 나를 좀 도와주소'라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 같은데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했더니, '대통령하려면 국정 수행경험이 필요해요' 했다. 이후 대통령께 노무현 당시 전 의원을 만난 보고를 했다. 대통령께서 '노무현 의원은 참으로 정의롭고 소신있는 유능한 정치인이요. 앞으로 기회를 봅시다'고 했다. 얼마 후에 노무현 전 의원은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되었다.

▲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은, 복지를 인권에 의한 국민의 권리로 인식해서 시민권, 사회권으로서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대중정부에서 복지는 분야별 복지와 함께 통합적인 경제사회정책으로 추진되었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요즘 복지가 정치판의 최대 화두가 됐다. 대체로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의 시작은 김대중 정부부터라고 얘기 하는데,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을 확대 계승 했다고 보나?

김성재 : 솔직하게 말하면 노무현정부는 복지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고, 따라서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인가?

김성재 :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은, 복지를 인권에 의한 국민의 권리로 인식해서 시민권, 사회권으로서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대중정부에서 복지는 분야별 복지와 함께 통합적인 경제사회정책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노무현정부는 복지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복지를 국민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로 생각하지 않고 지방정부로 이관했다. 국가의 책무를 방기했고 지역이 경제, 사회, 문화적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정부의 2/3정도가 한나라당 정부라는 것도 간과했다. 그리고 지방의 복지재벌, 토호세력들이 정치권과 결탁하고 정부 지원예산을 거의 독식하고 있다는 현실도 외면했다.

그리고 노무현정부가 복지예산을 많이 증액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복지예산 총액에 당시 건교부 서민
주택 예산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의 일반 예산에서의 복지예산은 줄었고, 기금 등의 특별예산으로 일부 보충됐다. 특별예산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기금 운용에 따라 언제든지 가변적이 된다. 특히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 인권의 원칙에 근거하지 않고 재정의 한계선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장애인 차별에 대한 시정 권리가 축소되어 이 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계는 노무현정부를 비판하고, 이 법이 통과된 직후부터 개정운동을 시작했다. 보육도 시장에 맡겼고, 의료민영화도 추진하려고 했다. 그래서 시민, 복지단체와 장애인계로부터 노무현정부는 복지를 도리어 후퇴시켰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재벌과 대기업중소기업소상공인 업종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한 규제를 풀었고, 한미 FTA도 강행하려 했다. 결국 안타깝게도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길을 닦아 준 셈이 되었다.

프레시안 : 김 관장은 DJ정부 시절 복지와 관련해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복지정책을 놓고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까지 들어와서 갑론을박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코멘트를 하신다면?

김성재 : 박근혜 전 대표가 복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발표된 박근혜 전 대표의 복지정책은 안타깝게도 무늬만 복지이고, 속빈강정 같은 그야말로 포퓰리즘의 전형 같다. 진정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변화된 시대와 우리 현실에서 복지를 말하려면 인권에 의한 복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는 공동체정신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복지는 소득보장 한 분야만이 아니라 의료, 교육, 주거, 일자리 등 통합적인 사회정책으로써의 복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복지인식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 정책팀이 발표한 것을 보면, 재원문제는 둘째치고 여전히 과거적이다. 특히 생애주기별 복지라는 것은, 현재도 영유아복지와 노인복지가 서로 중요성과 재원 면에서 우선순위의 정치적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통합이 아니라 연령별, 세대별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으로 복지보다 반사회정책으로 귀결될 우려를 갖게 한다. 박근혜 전 대표가 국민과 국가를 위해 훌륭한 복지정책을 제시하면 좋겠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시대를 산 정치인인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화시대에 정치를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과의 교감 능력이 탁월했다. 게다가 자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택하면서 일반인들의 정서 속에서 김대중보다는 노무현에 대한 감정이 울림이 훨씬 큰 것 같다. 어떻게 보나?

김성재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극적이고 비극적이어서 국민들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크다고 본다. 또한 소탈했던 인간미에 대한 향수가 있다. 탈권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의 역사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프레시안 : 노무현 재단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고 연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대중 도서관과 상호 협동을 하나?

김성재 : 그렇다. 도서관에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여기서 정책 토론회도 한다.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을 처음 만들 때도 같이했다. 나는 노무현정부의 공과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하려고 했다. 잘 못한 것은 극복하고 잘 한 것은 더 발전시켜 가야 노무현대통령의 역사가 산다. 김대중대통령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찬양가도, 잘못된 비판도 삼가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김 관장과 인터뷰하면서 느낀 느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는 아직 김대중이라는 정치 지도자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가 될 것 같다. 아직도 박정희 시대라는 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일부 민주화 됐지만 박정희 시대를 완전히 극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김대중 도서관이 해야 할 역할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인가?

▲ 이야기 나누는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와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대통령의 진면목을 잘 모르면서 겉으로, 정치적으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김대중대통령의 책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심지어 자서전도 정부여당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김대중대통령 서거 이후 김대중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한 달 평균 1500명 정도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녀들과 함께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방문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시관을 둘러보고 김대중대통령을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역사가는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후 10년이 지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김대중대통령의 진가는 더욱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의 특별기획으로 올해 8월 김대중대통령 서거 2주기 때 학술 심포지엄과 '김대중연보'를 발간할 계획이다. 3년 동안 준비했는데, 항목으로는 약 2만 정도,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연보이다. 김대중대통령이 일생동안 만난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이 연보를 보면 대통령께서 언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준비를 했는데, 김대중전집을 5개년 계획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그동안 나왔던 전집과 30여권의 단행본 그리고 출판되지 않았던 국회발언록, 강연원고, 인터뷰 내용 등과 사진 자료들도 모두 포함시킬 계획이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교류 및 공동연구 제안도 상당수 있어 적극적으로 수행할 계획이다. 김대중도서관의 본래 목적사업인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빈곤퇴치를 위한 김대중평화아카데미 등의 제반 연구, 교육 사업들도 지속적으로 할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 사업을 하는데 국고 지원은 있나?

김성재 :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매칭펀드 방식으로 일부 지원받고 있다. 김대중대통령께서 재임 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화해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위해 200억을 지원했는데, 최근 다행하게 기념도서관이 건립되고 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념관도 지어지고, 노무현 전 대통령 측도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 11월 2일 개관 7주년을 기념해서 전직대통령 기념관, 도서관의 역사적 필요성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많은 관심과 호응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기념관들이 건립되면 대통령 정치문화도 발전되고,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들도 국민과 역사를 의식해서 더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도서관은 연세대 자율운영기관이기 때문에 대학본부에서 건물유지 및 관리비만 지원해주고 모든 프로그램과 사업은 후원금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돈이 없어서 할 일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을 제대로 하면 필요한 재원은 충당된다. 감사한 것은 자발적인 후원회원들이 약 1000명 있고, 직원들도 적은 인원수이지만 김대중대통령의 뜻을 이어서 펼쳐간다는 사명감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관심을 가져준 프레시안에도 감사한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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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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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2년, 현재의 관점에서도 진취적이고 다소 파격적인 공약들을 내세우며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때 선거에서 90만 표 차이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지만 당시 발표된 공약들은 그의 국가관과 통일에의 의지, 애민의식 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1971년 3월 24일 발표된 대통령 선거 공약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선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 계획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며 "대통령 3선 조항의 1차 중임제 환원과 부칙에 다시 개정 불가능 조문의 삽입"을 약속했다.

또 '무소속 출마금지 조항 삭제', '완전한 선거공영제 실시', '전국구제의 폐지' 등이 공약 사항으로 올랐다.

현재까지 논란이 되는 검찰 중립 문제와 관련해 '검찰의 엄중중립과 처우의 개선'도 약속했고, '중앙정보부 폐지', '일체의 정치보복과 소급법 제정 금지', '농협의 민주화 단행', '언론의 자유보장을 위한 특별 조치' 등도 눈에 띈다.

특히 '대통령의 단독책임 아래 일정시간 내 부정부패의 일소'라는 공약을 통해서는, 당시 얼마나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이를 척결하기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국회의원을 포함한 고급 공무원 재산등록제 실시'와 '공무원의 생활보장과 제한되어 있는 노조활동의 허용' 등의 공약은 현재 실시 중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 공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 정책으로는 '남북간의 전쟁에 의한 문제해결의 포기와 파괴활동의 지양으로 긴장완화의 실현', '기자교류, 서신교환, 체육교환 등 비정치적 교류의 실시', '미 소 일 중공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에 대한 보장확보' 등을 공약했다.

경제 정책으로는 '경제성장의 결과에 따른 대중 소외와 사회적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과감한 소득재분배 정책의 집행', '부유세, 특별행위세 등의 신설로 새로운 세원의 확보와 소비의 억제', '농가수입의 극대화를 위한 강력조치로 농촌의 부흥과 국민경제 전반의 기초확립 및 식량의 자급자족 실현'과 같은 내용이 약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밖에 호화주택 건설 금지, 노조운동의 자주성 보장, 교민청 설립, 교과서 무상공급 등의 공약도 발표했다.
70년대 DJ "공무원 재산등록·호화주택 금지" 공약


그럼에도 그당시에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북한의 속국으로 전략할까봐! 빨갱이가 그리 쉽게 될까봐! 이 공약을 포기하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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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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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정직하고 올바른
선거로 인해 정권을 획득하고, 당이
추구하는 이념으로 정치를 집행하는 것이 정당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당인들 궁극의 목표인 정권 쟁취를 하여야만 한다. 실패하면 또 오랜시간 고통받고 가슴앓이하며 많은 소모와 비용을 버려가면서 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의 인생을 더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거대 딴나라당을 상대로 각각의 진보 정당들이 자신만의 작은 정당 사이즈로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한민국 정권을 획득하겠다는 모습은 공상과학소설을 읽는 듯하고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분명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진보진보 하고, 진보의 위인은 있지만 보수의 위인은 누가 있느냐? 등등의 말들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큰 변화를 진정 두려워하는 보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미 김대중대통령, 노무현대통령을 겪었는데도 말이다.)


지금 여러 진보당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보의 분열된 정당들이 연대하고 연합하여 대한민국 정권을 진보정당들의 손에 넣고 나서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잘난 진보 정당들 이념과 관념을 논해보는것이 어떨까?


지금의 수구보수정당 딴
나라당을 선거로써 이기고 나서 말이다.




우리가 그동안 받은 수모를 되돌아 보도록 하자.  뭉치면 이기는데 흩어져서 아래와 같은 고통과 탄압을 받는 것입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노회찬 - 삼성 X파일 공개하고 여러모로 음지의 힘에 눌렸을 때
강기갑 - 국회 폭력사태라고 한나라당이 우겨서 불리우게 된 웃지못할 시원하고 통쾌한 사건 (결국, 무죄로 판결)이 일어났을 때
한명숙 - 뇌물 5만불 받았다고 구속시키려던 사건 (다 아시죠?)
노무현 - 결국은 사망으로 이르게 할때
김대중 - 노무현대통령의 사망과 이명박 독재정치에 쇼크를 먹고 일찍 서거하셨을 때
문국현 - 제대로 정치활동도 사회운동도 하지못하도록 새싹부터 짤라버리려던 수구보수세력의 음모로 자행되었을 때

왜 우리는 단합하여 똘똘 뭉쳐 투쟁하지 않았나요? 서로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건가요?

글을 써보고 보니 민주당은 정말 기운없는, 힘이 없는, 저항정신이 비교적 약한 정당이군요. 진보당이라고 불리우기보다는..중도세력 정당이 어울릴듯 합니다.

이렇다 할 만한 국민을 대변한 투쟁과 사건을 만들어 내려 하지 않았네요. 김대중대통령 서거한것을 제외하고는...... 민주당은 이빨빠진 호랑이로 전략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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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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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못한 추도사를 대신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 당일 끝내 못한 추도사. 김 대통령님께서 그 추도사를 대신한 추모의 말씀을 3일 보내오셨습니다. 동교동에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신간 추천사 형식을 통해 보내주신 추모의 메시지를 공개합니다.” <관리자 주>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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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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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를 읊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잔인한 달'의 아픈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다투고 헤어졌거나 영영 잃었을 경우가 그러하다. 한반도 평화통일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2009년 봄과 여름은 '잔인한 계절'로 다가왔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8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가뜩이나 "한국엔 존경할만한 원로가 많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한탄이 들리는 한국사회에서 두 인물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인물의 공통점은 이 땅의 억눌린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특히 민족화해와 평화적 통일의 길을 닦기 위해 힘썼다는 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잡고 내놓은 두 개의 선언(2000년 6.15선언, 2007년 10.4선언)은 지구상의 유일분단국가를 60년 넘게 살아온 우리 한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반통일 냉전수구세력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하면서 6.15선언과 10.4선언이 지닌 의미를 깎아내려 해도 어려운 일이다. 훗날 민족통일이 이뤄져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들어서는 날, "한반도를 전쟁의 살얼음판에서 구해내고, 나아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젖힌 역사적인 선언"이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저 아저씨들 왜 그래요?"

문제는 이 땅의 일부 극우보수들이 김대중-노무현을 보는 눈길이 너무나 싸늘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6.15와 10.4 남북공동성명을 '반역적인 선언'이라고 매도해왔고,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깎아내렸다. 두 정치지도자의 죽음을 맞아 많은 이들이 슬퍼하는 마당에, 일부 극우보수 인사들은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전직교수 A는 노무현의 죽음 뒤 김대중을 향해 "뒷산에 올라가 투신자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언론인 B는 지난 5월엔 "왜 국민장으로 국민세금을 낭비하느냐"고 딴죽을 걸었고, 8월엔 "국장이 국가 분열의 촉발제"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국장이 치러지던 날도 조용히 넘어가질 않고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는 김대중 정권의 국가반역혐의 50개 항목'이란 글을 내놓았다.

또 있다. 자칭 군사평론가 C는 "두 빨갱이 수장(首長)이 3개월 차이로 운명했다"고 두 사람의 죽음을 규정하면서, "역적이자 빨갱이, 역적 간첩을 현충원에 보내면 그 순간부터 국가는 소용돌이 칠 것"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땅의 극우보수들은 북한 조문단이 서울로 오는 것조차 반대했고, 김포공항여의도 국회로 몰려가 목청을 높였다.

이들의 돌출발언과 행동을 뉴스로 보면서 자라나는 세대들도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다. 고교 1학년인 이웃집 학생은 골목길에서 나를 붙들고 "저 아저씨들 왜 저래요?"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왼쪽에 선 사람은 모두 좌파?

생전에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죽은 뒤엔 고인의 명복까진 빌지 않더라도 조용히 보내주는 것이 한국적인 미덕이자 인지상정이라 들었다. 그런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를 갖추길 이 땅의 극우보수에게 바라기란 애당초 무리일까. 그저 "너 죽고 나 살자"는 강퍅함만이 남은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향한 극우보수들의 공격은 이 두 인물이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평화롭게 풀어나가려 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북한과의 대화=빨갱이 동조'라는 비뚤어진 인식이 깔려 있다. 극우보수파들의 왜곡되고 꽉 막힌 답답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의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모두 좌파일 뿐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색깔 공세다.

앞의 B씨가 한 보기다. 그는 올해 7월 박근혜 의원이 미디어법 강행처리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자, 그녀에게까지 색깔 공세를 폈다. "박 의원이 2002년 초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온 뒤로 북한정권의 만행에 대한 본질적 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박 의원이) 김정일을 만난 뒤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걱정을 하는 애국투사들이 지금도 많다"고 했다.
▲김대중 전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국장에서 어린이들이 그림으로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아냈다. ⓒ김재명

미국에선 매카시 광풍이 사라졌으나…

이쯤 되면 지난 1950년대 초 미국 정치판을 얼음장처럼 만들었던 '마녀 사냥꾼'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망령이 태평양을 넘어 60년 뒤 한반도에 출현한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매카시는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수백명의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몰아붙이면서 한껏 기세를 올렸었다. 그러나 곧 정치판에서 왕따를 당했고, 술로 아픈 속을 달래다가 끝내는 알코올 중독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로 미국에선 매카시즘의 극우광풍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한국에선 지금까지도 색깔공세가 힘을 쓴다.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도 대통령에 오르기 전부터 색깔공세로 마음 고생들을 많이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남북화해정책은 극우보수세력으로부터 "북한에 수천억원을 퍼주었다"느니, "북한의 핵무기개발 자금을 대주었다"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정치적 공세에 시달렸다.

진실을 알고 보면 '퍼주었다'는 그 금액은 비료와 식량을 비롯한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 민간기업이 북한과 정상적인 상거래, 남북경협의 안정적 추진을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기반시설 건설비용이다. '퍼주었다'는 말보다는 '투자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민족화해와 평화통일로 가려는 투자다.

지금 고인이 된 김대중-노무현 두 분의 생각도 그러했기에, '두 빨갱이 수장' 운운하는 극우보수의 비난을 의연하게 흘려 넘겼을 것이다. 물론 투자는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 어려울 때 조금 나누는 것을 퍼주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행태다.

"저놈, 빨갱이야!"라는 한마디

돌이켜 보면, "저놈, 빨갱이야!"라는 한마디는 좌우와 남북이 갈린 분단시대를 60년 넘게 살아온 우리 한국인에게 큰 힘을 발휘해왔다. 1945년 8.15 광복 뒤 좌우가 갈려 싸우던 해방정국(1945-48년)에서 민족분단을 막고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사람들을 가장 미워한 것은 남한의 극우보수세력이었다.

많은 경우 친일이라는 감추고 싶은 더러운 과거를 지녔던 그들은 '부자들(지주와 자산가)의 정당' 소릴 들었던 한민당을 신변보호막 삼아 뭉쳤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추진'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이승만과 손을 잡고는 좌파와 중도파(통합파)를 싸잡아 "저놈, 빨갱이야!"라고 공격했다.

역사는 늘 약삭빠른 현실주의자들에게 선점당하는 탓에 진통을 겪는 것일까. 1948년 5.10 총선거를 거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한 보기다. 이미 동서냉전의 첨예한 실험장으로 떠오른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에게 단정 수립은 하나의 '현실적인' 노선으로까지 여겨졌다.

5.10 선거가 한반도의 항구적인 민족분단 상황을 가져올 것으로 걱정한 백범 김구가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피끓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당시 한독당을 이끌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의 우사 김규식을 비롯, 김성숙 김창숙 원세훈 장건상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등 여러 지사들이 이른바 '남북협상'을 추진하며 평양으로 갔던 것은 그 시대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테면 우사 김규식을 보자. 1948년 4월21일 아침 일찍 서울 서대문 무악재 고개를 넘어선 김규식은 임진강나루와 개성을 거쳐 11시50분쯤 38선에 이르렀다. 자동차에서 내린 그는 따라나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짚고 있는 38선 푯말을 뽑아버려야만 하겠소.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요. 온 겨레가 합심만 한다면 곧 뽑아버릴 수가 있을 것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납북협상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2년 뒤 한반도는 피를 나눈 같은 형제끼리 총을 겨누는 엄청난 전쟁을 겪어야 했다.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얼굴을 맞대는 데 5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것도 전쟁으로 깊이 패인 갈등과 미움 탓이었다.

투옥 당하고 가난에 시달리고

그 50년 동안 남쪽의 민족통일운동가들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들과 부딪쳐야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게 '빨갱이'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 했고,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요행히 살아남았다 해도 대부분 가난에 시달렸다(이에 대해선 김재명,『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년 선인, 참조 바람).

일제시대에 의열단 고문으로 활동하다 잡혀 모진 옥고를 치른 탓에 하반신이 마비된 심산 김창숙(1879-1962)이 한 보기다. 심산은 1948년3월 이른바 '7거두 공동성명'(김구ㆍ김규식ㆍ김창숙ㆍ조소앙ㆍ조완구ㆍ조성환ㆍ홍명희)을 통해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지지했기에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받았다. 유족의 증언대로라면, 그는 말년에 '숫벼룩 한 마리 꿇어앉을 땅도 없이' 궁핍한 삶을 살았다.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김성숙(1898-1969)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평양의 남북협상을 다녀온 뒤로 줄곧 혁신정당운동에 몸 담았던 그는 이승만과 박정희정권의 탄압으로 감옥에 갇혔고 풀려난 뒤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살다 갔다.

김성숙과 같은 통일노선을 걸어온 소해 장건상(전 중경임시정부 국무위원, 제2대 국회의원, 1883-1974)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서울 정릉의 오두막집에서 눈을 감았을 때, 유가족들은 시신을 모실 관을 살 돈조차 마련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뒤 시민들이 남긴 추모리본. 고문과 탄압이 없는 곳에서 영면하시길 바란다는 글귀가 보인다. ⓒ김재명

김대중과 노무현이 남긴 귀한 자산

이렇듯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정치신념으로 삼아온 이 땅의 양심적 지사들은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정치인 김대중-노무현도 지난날 마찬가지로 극우보수세력으로부터 '빨갱이 공세'에 시달렸다.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안에 따라 비판받을 대목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양심세력의 계보를 잇는 지도자들이란 점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두 사람은 한국 평화통일운동의 큰 줄기를 이으면서, 한국전쟁 뒤 남북 사이를 흐르던 미움과 불신의 강물을 막고 평화와 화해의 댐을 세웠다. 6.15선언과 10.4선언이 그런 평가의 바탕이다. 김대중-노무현이 21세기에 일구어낸 민족화합 통일정신은 우리 모두가 앞으로 더욱 키워내야 할 한반도의 귀한 자산이다. 그들의 전해준 자산을 어찌 잘 살려야 하는가는 뒤에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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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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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은 11일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 150여명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했다”며 관련자 철저 수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민주당 김현 부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이들은 어제(10일) 국립 서울 현충원 앞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했다.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현충원 안장을 ‘친북세력의 알박기’라고 성토하며 당장 이장하라고 주장했다”며 이 같이 밝힌 뒤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대한문 분향소를 파괴하겠다며 난동을 피우더니 이제는 김대중 대통령을 욕보이는 천인공노할 짓을 벌이다니 참담할 뿐”이라고 질타했다.

김 부대변인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국립묘지 앞에서 수구집단이 무도한 짓을 하는데도 경찰이 질서유지라며 수수방관했다는 것”이라면서 “경찰이 백색테러를 방치하는 동안, 국민이 눈물로 보내드린 두 분 대통령이 능멸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분노했다.

그는 “200여 명도 안 되는 조직원을 가진 ‘어버이 연합회’의 배후가 누구인지 국민은 알고 있다”면서 “더는 국론을 분열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반인륜적 범죄를 좌시할 수 없다.아울러 경찰은 관련자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두 분 대통령에 대한 수구세력의 망동을 인내하는 것도 한계가 있음을 명심하라”고 덧붙였다.

국민들의 정서와 정반대로 나가는 막가파식 단체군요. 어버이 연합회 " 이명박정부가 출범할때 비영리협회나 단체에 지원하는 국가집행자금에서 설정된 예산을 지급하기 위해(소진하기 위해) 기존의 민주 협회 모임들은 다 거부하고 mb측에 협조하는 협회들만 예산을 주려고 찾다가 없으니까, 아주 급하게 날조해서 만든 협회 이미지가 다분하죠? ㅎㅎ 사실입니다. 국민들을 개껍데기로 보는 mb측의 정략적 정치형태가 보여지는 단편적인 모습이며, 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매번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 이제는 치가 떨리지도 않습니까?
한나라당이 여당이였다면 벌써......탄핵탄핵 하고 외쳤을 텐데 말이죠.. 이놈의 민주당이 꺼벙해서 --; 쯔쯔

하여간, 저 정신나간 정신병 단체는
국가에서 지원받은 자금으로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국가원수로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짓만 하고 다니네요.
저들의 행동을 영면하신 김구선생님이 보고 있을것이라 생각하면 참으로 통탄의 눈물을 흘리고 계실것을 확신합니다.
당신의 모습은 죽어서 심판을 받습니다. 이제 알바짓은 그만하고 본 생계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외국에서 볼까바 창피해 죽겠습니다.
외국에서는 한국보다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대통령의 대한 평가가 훨씬 더 높거든요??? 책도 많이 나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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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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