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시기사 박기서씨
ⓒ2005 박도
"우리 나라 독립의 화신이요, 국부(國父)이신 백범 선생을 시해한 그 자는 인간 쓰레기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만고역적 안두희,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다 누린다면 다시는 이 땅의 교육이 안 되지요. 후손을 볼 낯이 없는 일이지요.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무렵 저는 천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왜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랄까 대의랄까, 국가 정의를 위해 그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모든 벌을 받을 각오하고 단죄하였습니다."

백범 선생 56돌 기일을 아흐레 앞둔 지난 6월 17일 오후 2시,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나무 그늘 의자에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56·택시기사)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박기서씨는 지난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안두희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몽둥이로 절명시켰다.

백범 묘소, 여기만 오면 아주 편해요

▲ 백범 김구 선생 존영
ⓒ2005 백범기념관
기자는 올 봄 조문기 선생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씨를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에게 안두희의 이 세상 마지막 모습과 그 뒷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에 면담을 부탁드렸는데 박기서씨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서로 사는 곳이 멀고, 그는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어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범 선생의 기일을 넘길 수 없어서 6월 17일로 어렵게 날짜를 잡았다. 우리는 효창원 백범 묘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지인과 점심을 나누면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법치국가에서 개인이 사형으로 보복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와 헤어진 뒤 백범 묘소로 가기 위해 신촌에서 택시를 탔다. "효창동 백범묘소로 갑시다"라고 하자, 기사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는 박기서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안가지만(그 기사의 이름은 안 아무개였다) 그 놈을 제 명대로 못 살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안두희가 제 명대로 다 살고 죽었다면 이 땅에 정의와 양심은 모두 다 땅에 묻혔을 테지요. 같은 택시기사로 박기서씨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 분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합니다."

백범 묘소 앞에서 박기서씨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대담에 앞서 먼저 묘소에 참배코자 산소로 갔다. 내가 앞장서고 박기서씨가 뒤따랐다. 묘소 앞에 이러르자 박기서씨는 묘소 어귀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았다. 마치 당신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는양.

"여기만 오면 마음이 정화되고 아주 편해요."

절을 두 번 드리고 일어난 박기서씨의 첫 마디였다.

"제가 지난번 백범 선생 암살 배후 관련 기사를 연재할 때, 몇몇 네티즌들이 '박기서는 미 정보부 끄나풀이 아니냐?'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쪽의 사주를 받아서 안두희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저 세상으로 보낸 거 아니냐? 마치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를 다른 자객들이 죽여 버린 거나 아키노를 암살한 하수인들을 또 다른 총잡이들이 사살해 버린 거와 같이 말입니다."

기자의 말에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입을 닫지 못했다.

"우와! 정말, 정반대 생각이네요. 야아 참, 안두희가 미국 정보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이 왜곡된 데는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안두희는 살려둬 봤자 더 이상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살려뒀다가 자연사하면 우리의 민족 정기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뒷날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이며 나중에 백범 선생을 어찌 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청소부 심정으로 안두희 '처단'했다"

▲ 안두희
- 안두희를 처단한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때 저는 버스기사였습니다. 버스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미리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속에 넣고 안두희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 무렵이더군요.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청 기다려도 아침 내내 문이 안 열려요. 그래서 틀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11시 무렵에야 문이 열려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두희 처가 슈퍼에 가려고 문을 따고 나왔다더군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두희 처를 밀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고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일어나서 노려보더라고요. '네가 백범 선생님을 암살했느냐?'라고 다시 다그치자 안두희가 뭐라고 말하는데 분명치가 않더군요.

사실 그때 나도 무척 흥분돼 있었기에 안두희의 말이 제대로 들릴 리도 없었지요. '내가 오늘 너를 처단하러 왔다'고 하는데 안두희 처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내 뒤를 쳐다 보더라구요.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그 순간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안두희는 키도 크고 주먹도 크더라고요. 그의 덩치와 큰 손을 보는 순간 위압감이 느껴지고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적개심이 불타오르더군요. 그래서 몽둥이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더군요.

안두희 처가 말로 하지 사람을 치느냐고 달려들더라고요.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해 간 끈으로 안두희의 처 손을 묶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당신도 다친다'고 위협한 뒤 다른 방으로 데려가자 안두희 처가 그제야 제 눈에서 살기를 눈치 채고는 벌벌 떨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다시 안두희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냥 복날 개 패듯이 팼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줄 게 아니라 아예 끝장을 내려고 작정하고 갔었지요."

"백범 선생 살아계셨다면 6·25 일어나지 않았을 것"

▲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박기서씨
ⓒ2005 박도
- 그 뒤 안두희가 꿈에 보이거나 응징에 대한 죄의식은 없는지요?
"안두희가 나타난 꿈은 한번도 꾸지 않았어요. 저도 피와 눈물이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제나 이제나 나는 안두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요.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6·25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단정'을 세웠던 이승만 일파가 백범 선생을 암살하자 민심이 7할 이상은 돌아 버린 거예요. 김일성이 그 반이(反李, 반이승만) 정서를 자기 지지로 오판하여 밀고 내려온 거지요. 또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백범 선생이 계셨더라면 아마 전선으로 달려가서 온몸으로 막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백범 선생을 깔아뭉개고 남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안두희와 그 일당은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죄를 진 반역자들입니다."

- 그 일로 형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살고 청주에서 6개월 정도 사는데 3·1절 특사로 풀어주더군요. 그런데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더라고요."

외람되지만 이는 마치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독립전사들이 감옥이나 형장에서 느끼는 행복과 같을 거라고 했다. 마침 가까운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원생들을 데리고 왔다. 언저리가 소란하여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묘소 언저리를 거닐었다.

백범이 살아계셨더라면...

▲ 1949. 7. 5. 백범 장의 행렬이 서울 소공동을 지나고 있다.
ⓒNARA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받아준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 (1948. 2. 10.)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 김구 주석 '남북동포에 격(檄)' (1948. 4. 21.)


우리 나라 근현대사를 살펴 보면, 일년 열두 달 가운데 슬프고 아프지 않은 달은 없다. 그 가운데 6월은 가장 슬프고도 가슴 아픈 달이다. 1950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일까지 3년여를 끌었던 동족상잔의 이 전쟁은 남북한 동포 5백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울러 1백여만 명의 외국군인(유엔군과 중공군)도 희생되었지만,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여태 쉬고 있는 '휴전' 상태로 있다. 어느 미국인 종군기자는 "한국전쟁 기간 중, 폭격으로 한반도 전역은 마치 석기시대로 되돌아간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해방 후 국토가 분단되자 백범 선생은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미리 예측했다. 백범 선생은 국토의 영구 분단을 막고 동존상잔의 전쟁을 막고자 38선을 넘나들며 온몸으로 겨레의 비극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반통일 세력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만일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만은 막아 내지 않았을까?
* 백범 김구 선생 제56주기 추모식 *
• 일시 : 2005. 6. 26(일). 10 : 00
• 장소 :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 묘전(우천시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백범 선생은 내 삶의 나침판"
[백범 56주기 추모 인터뷰] 김구 암살범 안두희 응징한 박기서씨
텍스트만보기    박도(parkdo) 기자   
▲ 백범 묘쇼 앞에 선 박기서씨
ⓒ2005 박도
박기서. 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시 산외면 참시내(진계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일찍이 전봉준 장군이 머물기도 했고, 마을 뒷산에는 동학농민전쟁의 김개남 장군 묘소도 있다.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전주로 유학 갔지만 그는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내렸다고 했다.

기자가 뒤늦게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지고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독립운동 관련 책을 펼쳐보거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독립전사로 앞장서거나 독립운동 성금을 보낸 이들은 의외로 가난하고 못 배운 무지렁이들이 더 많았다.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이는 하와이나 멕시코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태반이었다. 기자가 연전에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성금을 모을 때도 대부분 서민들이 쌈짓돈을 보내 주셨다. 독립전선의 선봉장에 선 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포수에서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이 된 홍범도 장군, 소작농에서 조선혁명군총사령이 된 양세봉 장군, 신돌석 장군 등….

단군 이래 이 나라를 지켜온 이는 기층 민중들이었지 결코 지배 계급은 아니었다고 한 역사학자는 말했다.

시간 되돌려도 안두희 응징할 것

▲ 박기서씨(백범 묘쇼 앞에서)
ⓒ2005 박도
- 출감 후의 전과자로서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출감 후 취직이 잘 안 되더라고요. 박기서라는 사람은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던 모양이에요. 운전대로 먹고 살려면 오너가 되는 수밖에 없데요. 그래서 개인택시를 샀습니다. 여태 그 빚 갚는다고 허리가 휘어집니다."

- 가족 관계는?
"처와 두 딸과 아들입니다. 제가 안두희를 처단할 때가 맏딸이 대입 수능 시험을 20일 앞둔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유치장이다 교도소다 재판 받는다고 마음 고생이 많았나 봐요. 늘 그 점을 미안케 생각합니다. 지금은 출가했고 네 식구가 살고 있어요."

- 요즘 택시 요금이 올라서 손님이 없어서 어렵다고 하던데요.
"서울에는 올랐지만 제가 사는 부천에는 아직 오르지 않았습니다. 택시기사가 가장 경기에 민감하다고 하는데 어려운 때가 어제 오늘이 아니지요. 외환 위기 후 늘 어려웠어요. 우리들 어려운 것보다 젊은이들이 일감이 없는 게 더 걱정이지요."

- 택시 손님들 중에 박기서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요?
"하루에 50분 정도 손님을 모십니다. 개중에는 앞좌석에 이름도 있으니 알아 보는 이도 있습니다. 격려해 주시는 분도 있고,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분도 있습니다."

-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회개 반성하는 삶이 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박기서, 그는 <백범일지>를 줄줄 외웠다. 백범(白凡)은 '백정(白丁) 범부(凡夫)'의 준말로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출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백범을 알고부터는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지 않고, 못 배워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늘 백범의 진정성과 역사관, 겨레와 나라에 대한 헌신적인 백범 정신에 감격한다고 했다. 또 백범을 통해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면서 백범은 겨레의 스승이요, 우리 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다.

-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동학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나라가 달라졌을 겁니다. 백성들이 깨어 있어서 다시 민족 반역의 무리나 그 후손들이 지도자가 되거나 외세에 빌붙는 이들을 이 땅에 지도자로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백범 선생은 내 삶의 나침판이었습니다. 그 어른을 위하는 일이라면 남은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 효창원 백범 묘소
ⓒ2005 박도
- 다시 그런 기회가 와도 안두희를 몽둥이로 내리치겠습니까?
"그러믄요. 마음 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인데, 제 행위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긴 겁니다. 그를 처단하고 내 발로 자수해 교도소도 갔지만 복역 기간 내내 제 행동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교도소에 있었던 그 기간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기뻤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피는 좀 묻혔지만 민족정기를 말살한 인간 쓰레기를, 젊은이들의 정신을 썩게 하고, 고약한 냄새로 세상을 더럽히는 자를 자기가 처치했다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었다.

기자에게 굳이 밥 한 끼를 대접하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뿌리쳤다. 그러면 전철역까지 당신 택시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그마저 거절할 수 없어서 남영동 역까지 신세를 졌다. 그 때문에 택시를 타고도 요금을 내지 않고 내리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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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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