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1967년 서울 수유리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였다.

돌아가신 강원룡 목사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후에 독일 대통령이 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박사를 초대해 당시 소장 국회의원으로 정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김대중 의원과의 만남주선한 것이다. 이보다 3년 전인 1964년, 김대중 의원은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무려 5시간 19분 동안이나 의사진행발언을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바이츠제커 박사를 안내하면서, 젊은 나이에 이 거물들의 역사적인 회동에 배석할 수 있었다.

많은 대화 내용 중 지금도 기억 나는 것은, 북한의 도발에 서울 시민이 한강을 건너지 못해 갖은 고생을 했던 1950년 한국전쟁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한강에 다리를 더 많이 건설해야 한다는 김대중 의원의 말씀이었다. 상당한 신사 국회의원이었던 그가 당시에는 보기 드문 파란색의 미제 승용차를 타고 아카데미 하우스에 매끄럽게 도착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1964년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이 날의 만남이 1994년 가을 독일 본의 대통령 관저에서, 당시 야인이었던 김대중 선생과 독일 대통령이었던 바이츠제커 박사의 면담을 주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연이 이어져 퇴임한 바이츠제커 박사는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 나와 함께 참석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와의 인연은 내가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국장으로 일하던 1983년 미국에서 다시 이어졌다. 당시 그는 미국 워싱턴 D.C에 망명 중이었고, 내가 미국에 출장을 갈 때면 그가 머물고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의 최근 저서인 <WCC 창으로 본 70년대 한국 민주화 인식>에도 편지 사본이 공개되었듯이, WCC의 인권 자금이 당시 곤궁했던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이우정 선생 등의 생계에 보탬이 되면서 WCC와 김대중 대통령은 더욱 긴밀한 협력을 하게 되었다.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몇 가지만 추려서 기술하겠다.

첫째, 노벨 평화상 수상에 관한 사실이다. 내가 스위스 제네바의 WCC에 근무를 시작한 게 1982년 2월부터이다. 나는 그때부터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후보 자격이 충분하며, 잘하면 수상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985년 그가 귀국하고 나서, 내가 동북아 지역에 출장을 올 때면 서울의 동교동 자택을 늘 찾아갔다. 많은 경우 가택 연금의 시기로 기억된다. 그 때,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김대중 옥중 서신> 등을 읽게 되고 몇몇의 번역본은 제네바로 갖고 갔으며 그곳의 동료들에게 일독을 권하기도 하였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스위스 제네바의 에큐메니컬 센터에는 루터교 세계연합체 사무총장이었던 노르웨이 출신 주교 구나 스탈셋 목사가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1983년 이미 노벨평화상 최종 심사위원회의 5명 중 한사람이었고 심사위원회 부의장으로 수고하고 있어서 그 책들은 자연히 그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나는 작년 오슬로의 그의 자택에 초대받아 오랜 시간 당시를 회상하였다. 스탈셋 목사는 오슬로의 대주교를 마지막으로 은퇴해 지금은 동티모르의 민주화 정착에 기여하고 있다. 나 이외에도 많은 국내외 인사들도 김 대통령을 추천했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의 결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7년 8월 최종 3인의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올라 수상자가 될 가능성 매우 커졌다. 그런데 노벨 평화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이에 따라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수상자로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그를 수상 후보(short list) 3인에 넣었고 나는 이 문제를 밝혀야 했었다.

한국에 출장을 왔다. 동교동 조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에게 오랜 숙고 끝에 대통령에 더 뜻이 있어서 평화상은 뒤로 미룬다는 당신의 뜻을 전했고 나는 이를 서울에서 스탈셋 목사를 통해 최종 심사위원회에 통보하였다. 이날이 1987년 8월 14일이었다. 그래서 198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남미 코스타리카의 정치가 아리아스 산체스가 수상하였다. 산체스는 2006년 대통령이 됐으며 오스카르 플랜을 제창하여 남미의 평화 민주주의에 공헌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이유는 아직도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났으며, 금전이 영향을 주었다'는 억측이 남아 있어서다. 노벨상은 로비를 할수록 수상이 멀어지며 금전의 개입은 어불성설로 이러한 근거 없는 억측들은 우리의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이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는 그 후 2000년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2000년 12월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 연설을 하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두 번째 얘기는 체코슬로바키아 하벨 대통령과의 관계이다. 내가 이끌고 있는 WCC 아시아국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하고 영국캠브리지에 와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일행을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에 3박4일 일정으로 초청하였다. 그때가 1993년 6월로 기억된다. 많은 얘기가 오갔는데 특히 김 전 대통령은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과의 만남을 원하셨다. 그래서 나는 WCC 유럽국의 마이라 부라이스 국장을 통해서 하벨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두 분은 그 후 의기가 잘 투합이 되어 민주주의, 평화, 인권 등의 세계적인 프로그램에서 많은 협력을 했다. 특히 두 분이 각각 체코와 한국이라는 무대에서 겪은 고초들이 너무나 비슷하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의 세계적인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모시고 있던 박금옥 총무 비서관(현재 우석대학교 초빙교수)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사흘간의 제네바 방문 계획을 짰다. 당연히 알프스 몽블랑 산을 가보시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 후 다음날 프로그램을 말씀드렸더니 "박 박사는 내가 고소 공포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십니까? 나는 비행기는 타지만 산은 오르지 못합니다"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몽블랑 대신 제네바의 레만 호수 150㎞를 돌아보면서 스위스와 프랑스의 전원 도시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치했던 기억이 난다.

유럽 현대사를 전공한 내 아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여사를 모신 차에 동승했었다. 김 전 대통령에게는 구경이 아니라 공부 시간이었다고 내 아내는 지금도 얘기한다. 스위스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물어보시면서 하나하나를 당신의 수첩에 기록, 본인이 소화하신 일 등은 지금도 즐거운 회상으로 우리 부부에게 남아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둘째 날엔 WCC의 사무총장 이하 간부들과 2시간 동안 간담회를 가졌다. 사무총장 초청 오찬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왼쪽에 당시 보좌관으로 수행한 김상우 박사를 앉게 하고 오른쪽에는 나더러 앉아 혹 당신이 귀가 약하셔서 잘못 알아들으면 도와달라고 하셨고 나에게 통역을 부탁 하셨다. 그런데 처음 서두를 영어로 시작하더니 이후 1시간 동안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영어로 강연하시는 게 아닌가! 모든 간부들이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모임이 끝나고 '선생님은 어디에서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는 나의 물음에 긴 감옥살이 하시면서 영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대답에 나는 놀랬다. 많은 곳에서 인동초(忍冬草)를 좋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노력하는 분, 늘 공부하시는 분, 그리고 한 순간도 헛되게 주어진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세 번째 얘기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투철한 신념이다. 나아가 참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과 행동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발전이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몇몇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정면 승부를 마다하지 않은, 참으로 값지고 위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1994년 3-4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109~126쪽) 당시 싱가포르 수상이었던 리콴유 박사는 '서구에 뿌리를 둔 인권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들지 말라. 왜냐하면 유교의 전통을 가진 아시아의 가치는 서구식 인권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뜻이 깊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에도 국제 사회에서는 늘 있어왔던 주장이었다. 특히 1993년 6월 유엔 인권이사회가 주최한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 인권 특별 총회에서 당시 말레이시아 수상이었던 마하티르 박사가 리콴유 박사와 비슷한 연설을 하여 후진국과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박수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포린어페어스> 1994년 11-12월호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선생은 리콴유 박사 등이 유교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음을 지적하면서 유교의 가르침을 오용하여 인권의 위대한 가치를 경제 발전과 대치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교정하였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모델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경제 발전이 정답임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 웅변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주장으로 전 세계 민주 활동가와 인권운동가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그를 세계적인 지도자로 재도약 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네 번째 얘기는 버마와의 인연이다. 선생은 버마 아웅산 수지 여사의 민주주의를 위한 비폭력 평화운동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아주 중요한 우선순위로 실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수지 여사는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1988년 가족을 영국의 옥스퍼드에 두고 단신 귀국하여 22년을 비폭력 평화 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어 오면서 4000만 버마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그는 작년 11월 18년간의 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제한적 민주주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철저한 확신과 실천을 수지 여사의 고난에 접합시켰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돌아가시기 1년여 전인 2008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남북 6·15 합의문 기념행사를 열면서 한국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지 여사의 동지들을 전원 초청했다. 이날 밤 그는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수지 여사 그리고 그녀의 동지들을 격려 하시면서 그날 밤의 모금액 전부를 전달했다.

대통령 재직 중에는 전 세계 지도자가 참가하는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 국제 회의를 개최하면서. 개회 벽두에 수지 여사의 화상 메시지를 보여줘 참석자 전원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오늘까지 한국 정부는 근 10년 이상 유엔 인권이사회의 '버마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결의안'에 공동 제안국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4000만 버마인들의 민주화 염원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중국, 일본, 그리고 아시아 그 어느 나라도 못하는 일이다.

나 역시 인권대사 재직 중 수지 여사의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 연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당원들이면서 당시에는 학생 신분으로 1988~1989년의 버마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군부의 검거를 피해 지금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버마인 중 열한 사람을 우선 유엔이 인정하는 정치적 난민 지위를 획득하도록 도와주었던 적이 있다. 그 경험을 지금도 난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제네바에서 근무하던 1995년과 1996년 가택 연금 중이던 수지 여사를 두 번이나 만난 사실을 나는 지금도 귀하게 간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직간접으로 그들의 민주화 운동을 돕고 있다. 1970~80년대에 지금의 버마인들처럼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는 버마의 민주화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고 그들을 우리는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은 국가 과제로 한반도의 평화 정착,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평화 통일, 동북아시아 평화 공동체 탄생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경제 성장 하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 모두는 깨달아야 한다. 돈 이외에 자유 평화 인권 환경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대내외에 실천함으로써 선진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국내의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은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훨씬 높이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남아프리카에는 만델라가 있고, 버마에는 앞서 언급한 수지가 있으며, 스위스에는 앙리 뒤낭, 미국에는 링컨이 세계인의 인구에 회자되듯이 한국에는 김대중이 외국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음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업적을 앞서 말한 선진국 도약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본도 중국도 이루지 못한 우리가 만들어 낸 민주주의가 하루하루 뿌리를 내리는 데에 그는 분명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이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그가 평소에 꿈꾸었던 한반도 전체의 민주주의, 평화 통일, 자유, 인권의 발전을 위해 지구상에서 아직도 고생하고 애쓰고 있는 많은 개발도상국들의 고뇌에 동참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우리의 성공 스토리를 전파하면서 지도급 개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중요하듯이 국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 필자 박경서는 1939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 부원장을 거쳐 1982년 2월부터 1999년 12월말까지 18년간 스위스 제네바 소재 세계교회헙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아시아 국장과 아시아 정책위 의장으로 일했으며 초대 대한민국인권대사(2001-2007년)와 국가 인권위원회 상임위원(2001-2004),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2005-2008년), 진실과 화해위원회 자문위원(2007-2010) 등을 역임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박경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전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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