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義士의 구국 의열투쟁, 일제 간담 서늘케 해!

written by. 이현오

강 義士 의거 90주년 기념식, 의거 장소인 서울역 광장에서 열려... 추후 동상도 건립돼

  90년 전 오늘(1919. 9.2) 남대문 역(현 서울역)에서 일본 제국주의 치하 새로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 부부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는 물론, 3·1독립만세 운동 후 일제의 강압 등으로 다소 침체에 빠져 있던 국내 독립운동에 기름을 끼얹으며 한민족의 기개를 전 세계에 떨치게 한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의 의거 90주년 기념식이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다.

안중근·윤봉길 의사와 더불어 독립운동 3의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강우규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것은 정확히 90년 전인 9월2일 오후 5시 지금의 서울역 회현 고가 도로 아래에서다.

 ▲ 2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식. 이 날 기념식에서는 강 의사의 애국정신을 후대에 까지 길이 이어나가자고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편 강 의사 기념사업회는 내년 강 의사 동상을 서울역에 건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konas.net

그 날 오후 5시 당시 해군대장이었던 사이토 총독은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 그를 환영 나온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손을 들어 화답하고 마차로 향하던 중 군중 속에서 그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당시 65세의 강우규 의사가 튀어나오며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은 운 좋게도 그가 차고 있던 칼과 혁대에만 파편을 맞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환영 나온 일본 관료 등 37명이 부상을 입고 이후 2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 기념식에 참석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konas.net

2일 오전 10시 그가 의거를 일으켰던 서울역 광장에서 (사)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와 동아일보사 공동으로 기념식이 열렸다. 이 날 기념식에는 김학준 동아일보사 회장을 비롯, 강 의사 동상건립에 힘써운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과 이병구 서울보훈지청장, 남만수 광복회 부회장, 그리고 평안북도 도지사를 위시한 강 의사 출신지역인 평남 덕천군민회 대표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돼 강 의사의 구국의 애국혼을 기렸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지난 달 25일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학술세미나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의사의 출생지가 평안북도(덕천군)인데다 유일한 후손인 손녀마저 지난 1985년 세상을 떠난 이유도 있었다. 그러다 그의 의거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점은 의거 당시 강 의사의 나이가 65세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고령에 해당하는 나이였다는 점이다.

이 날 기념식에서 강인섭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후손으로서 동상하나 제대로 건립하지 못해오다 이번 90주년을 맞아 서울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동상건립을 위한 모든 사업계획이 완료되고 예산까지 확보해 의거 당시의 자리에 폭탄을 투척하는 모습의 역동적인 표현으로 동상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konas.net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기념사에서 강 의사의 구국을 향한 나라사랑정신과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불굴의 민족정신, 그리고 애국혼을 우리들이 이어 받고 후손에게도 길이 물려주자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강 의사님의 아호인 '왈우'에서 느껴지듯이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생각했기에 일제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보내는 역사적 의의를 깨닫게 된다"며 "자기 스스로를 현명하고 뛰어나며, 잘났다고 하는 오만함을 가진 인물은 역사에서 큰일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아호를 들어 겸손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김 회장은, 그 스스로도 어리석고 무지함을 깨닫게 된다며 "서울역 광장에서 기세 등등하게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사님의 독립의 혼이 일제는 물론 전 세계에 알리는 장소였음에도 평소 이를 잊고 지내왔다"고 말하고 "우리는 의사님과 같은 선열들의 애국정신으로 말미암아 지금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룸으로써 (세계의)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예측하지 못해 방침하고 자만하면 새로운 국난은 오게 마련"이라며 "국난을 회피하고 대한민국에 의한 민족의 평화통일 성업을 위해서도 위대한 애국정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후대에도 의사님의 유지를 보내 물질적 풍요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미래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병구 서울보훈지청장도 "의사님의 강인한 민족정신을 기리고 그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자랑스런 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자"며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듯이 위대한 창조의 역사를 위해 힘을 쏟아 나가자"고 말했다.

김영일 광복회장은 광복회 남 부회장이 대신 낭독한 기념사에서 "의사님은 위대한 우리시대의 선각자였다"며 "세월이 흘러도 의사님의 애국정신을 가슴에 새겨 젊은이들에게는 애국혼을, 지도층에게는 사회통합의 기회가 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강우규 의사는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근대화의 요구에 부응해 개화사상을 수용, 기독교에 입교한 근대 지성이다.

한방의술을 바탕으로 인술을 베풀고 재산을 모아 사립학교와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1915년부터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쳤고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9월2일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결행했으나 총독 암살은 무위에 그쳤다.

이후 한인 순사에게 붙잡혀(스스로 자수했다는 내용도 있음)1920년 11월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의사의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 이 날 기념식에 앞서 열린 강 의거를 재연한 퍼포먼스. 사이토 총독과 그 부인이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역 귀빈실에서 나오고 있다. ⓒkonas.net

 ▲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 부부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있다. ⓒkonas.net

 ▲ 폭탄이 던져지자 놀란 사이토 부부와 일 관헌들. ⓒkonas.net

 ▲ 취조하는 일본인 순사에게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강 의사. ⓒkonas.net

 ▲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 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조선 청년에게 나라위해 일심전력 힘을 키우라고 연설하는 강우규 의사.

 ▲ 평상시 흰색 두루마기 그 차림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의열투쟁으로 일생을 살다 돌아가신 강우규 의사. ⓒkonas.net

 ▲ 이 날 기념식에서 색동예술단 어린이 회원들이 '반달'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konas.net

 ▲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만세삼창.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을 맞아 오늘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 주최로 강 의사의 항일투쟁 의거와 애국적 삶을 되돌아보는 학술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독립운동 사학계의 원로이신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강우규 의사의 생애와 의거'를, 김형목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강우규 의사의 계몽활동과 현실인식'을, 그리고 제가 '강우규 의사의 서울역 폭탄투척 의거와 재판'을 각각 발표하였습니다. 토론자로는 박환 수원대 교수, 양성숙 경찰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참석했습니다. 제가 발표한 내용은 올 가을에 출간한 <강우규 평전>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앞서 8월 15일 실은 글과 유사합니다만, 여기 자료용으로 실어둡니다.... (필자 주)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윤병석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총독부의 식민통치가 10년째로 접어드는 1919년 8월 하순, 일제의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3.1만세의거로 타오른 독립운동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경성(京城, 현 서울)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가게 문을 닫고 무언의 항의시위를 벌였다. 9월 1일, 이날 경성(서울)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정보계통의 경찰들은 물밑에서 숨가삐 움직였다. 2일 신임 총독이 경성에 도착할 즈음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신임 총독 환영행사에 참가한 후 경성 서쪽에 있는 인왕산에 올라가 항의의 표시로 만세를 부르기로 한다는 ‘불온문서’가 시내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경찰은 심지어 상해 임시정부에서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파견한 암살단이 경성 시내에 잠입했다는 정보도 입수한 상태였다. 이 정보에 따르면, 암살단은 1차로 부산에서 거사를 결행한 후 실패할 경우 대구에서 다시 결행하고 최후에는 경성 남대문역에서 거사를 치르기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과는 별개로 경성시내 학생, 종교계 등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청년중앙단’ 명의로 조선은 3.1만세시위를 통해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새로 부임하는 총독은 즉시 도쿄(東京)로 되돌아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신임총독 부임을 앞둔 경성의 풍경

조선에 새 총독이 부임할 것이라는 얘기는 앞서 7월 5일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이 3.1만세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고 도쿄로 물러간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후임으로는 무단통치 대신 새로운 식민통치 전략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온건한 성향의 인물이 예상되었다. 마침내 8월 12일 일본 정부는 하세가와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예비역 해군대장을 임명, 발표했다. 당시 사이토는 이른바 ‘시멘스 사건’ 이후 예비역 상태였는데, 일황은 사이토를 ‘특별히 현역에 복귀’시켜 총독에 임명했다. 이 소식은 신문을 통해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항일 민족운동 진영에도 곧바로 알려졌다.

한편 8월 29일 도쿄를 출발한 사이토 총독 일행은 이튿날 오사카(大阪)을 거쳐 31일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다. 시모노세키에는 이들을 조선으로 태워갈 특별선(船)인 신라환(新羅丸)이 기다리고 있었다. 8월 31일 오후 9시, 사이토 총독 일행은 일본땅 시모노세키항을 출항해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향하였다. 이 배에는 신임 사이토 총독 다음으로, 총독부 내 제2인자인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신임 정무총감 일행도 같이 타고 있었다. 9월 1일 오전 8시 30분경 부산에 도착한 사이토 일행은 이날 부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오전 7시 30분 부산역에서 임시특별열차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다.

9월 2일 오후. 이날 경성의 날씨는 무더웠다. 부산과 달리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더더욱 찌는 듯 했다. 이날 군 당국은 신임 총독의 경성 입성 환영식을 위해 기병 1개 중대를 의장대로 편성하였으며, 보병 제78연대 장굴전(長堀田) 대좌(현 대령)가 지휘하는 보병 2개 대대 병력을 도열병으로 동원하였다. 또 인근 한양공원에서 예포 19발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군 당국과는 별도로 경찰은 이날 아침부터 남대문역 주변은 물론 인근 남산 중턱 총독부 청사에 이르는 남산 주변 일대에 걸쳐 탐문과 삼엄한 경계를 폈다. 그리고는 출영객들에게 아래 다섯 가지 ‘주의사항’을 별도로 발표했다.

1. 출영자는 제 위치를 지킬 것
2. 출영자는 당일 오후 4시 50분까지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정차장 왼편 화물 반출 입구로부터 입장할 것
3. 출영자는 입장하기 전에 접수대 직원에게 명함을 교부할 것  
4. 플랫폼에서는 각자 지정한 위치에서 출영할 것
5. 출영자 일동은 총독 일행이 출발한 후에 이를 따라 퇴장할 것

이날 당국이 지정한 남대문역 출영자 배치도를 보면, 역장실 앞에는 총독부 본부 및 소속관서 직원들과 조선귀족들을, 그리고 귀빈실 앞에는 군인, 일반인 및 여성들을 배치하였다. 일반인들과 여성 출영자들은 접수대를 통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사전에 신분확인을 하려고 한 것이다. 경찰 당국은 이밖에도 이날 출영자들에게 예복을 착용하고, 또 각 가정에서는 경축의 의미로 국기(일장기)를 내걸라고 지시하였다. 3.1만세의거 이후 조선인들은 각종 기념일에 일장기를 잘 내걸지 않아 당국으로서는 별도의 독려가 필요했었다. 

오후 5시 정각이 되자 121호 기관차가 이끄는 임시 특별열차가 사이토 총독을 태운 채 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흰색 해군대장 복장에 군모(軍帽)를 쓰고, 가슴에는 훈(勳)1등 욱일장(旭日章) 부장(副章)을 패용한 사이토 총독은 출영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귀빈실을 거쳐 호위 경찰과 신문기자 등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남대문역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에는 사이토 총독 내외가 타고 갈 마차와 그 뒤에 미즈노 정무총감 내외가 타고 갈 마차가 각각 한 대씩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토 총독 내외는 앞 마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고 앞좌석에는 이토(伊藤) 비서관이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남산 왜성대(倭城臺) 총독 관저로 갈 예정이었다.

- 천지를 진동시킨 폭탄 소리

마부가 말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발을 내디뎌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마차가 겨우 몇 바퀴를 구른 순간 역 광장 내 다방 인근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마차 근처로 날아들었다.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는 현장에서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촬영하던 한 사진기자 바로 옆에서 폭발하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순간 역 광장 일대에는 비산(飛散)한 파편에 맞아 나뒹구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허벅지를, 또 어떤 사람은 가슴에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역 광장은 다친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마치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정작 폭탄의 표적이었던 마차에 타고 있던 사이토 총독 내외는 이런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나자 사이토 총독의 부인 하루코(春子)는 이 소리를 예포 소리로 착각한 채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 사이토 총독이 작은 소리로  ‘맞았소, 맞아!’ 하며 두 번이나 연거푸 마차가 폭탄을 맞은 사실을 알려주자 그 때에도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사이토 총독은 아내에게 ‘폭발탄!’이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루코는 의아한 나머지  시선을 마차 바깥으로 돌렸다. 순간 하루코의 눈에 흰옷을 입은 사람과 일본인 복장을 한 사람 서너 명이 쓰러지면서 시뻘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서야 하루코는 자신들이 탄 마차 주변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알아 차렸다.    

날 폭발사고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은 없었지만, 다수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필시 신임 사이토 총독을 노린 것이었으나 사이토 총독은 오히려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굳이 피해라면 그가 탄 마차에 대여섯 조각의 파편이 박힌 것이 발견되었고, 그의 혁대에서 파편 몇 조각이 발견되었다. 사이토 총독이 폭탄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순전히 군복 덕분이었다. 해군복의 혁대는 다른 군복과 달리 유독 두터워 엔간한 물체도 뚫기가 어려웠다. 만약 그가 이날 해군복을 입지 않았다면 복부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강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이날 현장에서 신문기자,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경상자 가운데는 미국인 여성 1명도 포함돼 있었다. 중상자 가운데 2명은 나중에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경기도 순시(巡視) 스에히로(末弘又二郞)는 좌(左)대퇴부에 뚫고 들어간 탄편(彈片)으로 인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발생 9일만인 9월 11일 오전 9시에 사망했으며,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 경성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는 복부를 뚫고 들어간 탄편으로 장관(腸管)이 손상당해 부작용으로 복막염, 폐렴이 발병해 그해 11월 1일 오전 9시에 각각 사망했다.

한편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현장에서 범인 색출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범인 검거에는 실패하였고 아무런 증거물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초동수사에 실패한 경찰은 본정(本町)경찰서에 수사본부를 구성하여 현장에서 체포한 용의자를 대상으로 범인 색출에 나섰다. 일황을 대리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조선 내 최고권력자인 조선총독에 대한 일대 ‘불경(不敬)사건’이 발생한 만큼 경찰로서는 명예와 직(職)을 걸고 사건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던 중 사건발생 한 달 5일만인 10월 7일자 신문에 당국이 폭탄사건의 ‘범인’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당국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남대문역 폭탄투척사건의 ‘범인’은 65세의 강우규(姜宇奎)로, 지난 9월 17일 경성 시내 누하동에서 본정(本町)경찰서 경찰관이 체포하였으며, 그간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검사국으로 넘겼다고 밝혔다. 조선 최고통치권자인 총독을 겨냥해 폭탄을 던져 일제 당국과 세인을 놀라게 했던 폭탄사건의 전모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 ‘범인’은 65세의 노인 강우규

세인들은 특별히 주목한 점은 폭탄사건의 ‘범인’이 환갑을 넘긴 64세의 노인이라는 점이었다. 이 날짜 신문에는 강 의사의 얼굴사진이 처음 공개됐는데, 흰 두루마기 차림에 머리칼과 수염 모두 흰 색이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60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남자가 51.1세, 여자가 53.7세였으니 의거 당시 강 의사는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일자 <매일신보>가 전한 일제 당국의 발표내용 몇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강 의사의 간략한 이력사항 부분이다.

“폭발탄을 던진 범인 강우규는 당년 65세의 노인으로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한 이외에는 아무 학력이 없으며, 중년에 예수교 장로교회에 입교(入敎)하여 지금까지 그 종교를 믿는 중이며, 삼십 여 년 전에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거주하다가 그 후, 즉 십년 전에 북간도 도두구(道頭溝)로 이사하였다가 4년 전에 다시 지나(支那, 중국) 길림성 요하현(饒河縣)으로 이사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청년자제를 교육하며 한편으로는 예수교를 전도하였으며,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근방으로 돌아다니며 오로지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고취하기로 일을 삼았으며, 항상 과격한 조선인과 서로 교제하며 오랫동안 벽지(僻地)에 있어서 조선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자이라”

다음은 강 의사가 거사를 도모한 배경설명 부분이다.

“금년 봄 3월에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소요를 일으키자 이에 응하여 사방에서 일어나자 강우규의 거주지인 길림성 요하현 부근에 있는 조선이 이미 독립된 줄로 믿었다가 그 일이 허사임을 알고 통분함을 마지 아니 할 때 당시 해삼위에 거주하던 완고한 노인들이 조직한 소위 노인단(노인동맹단)에서 이동휘(李東輝) 부친 이발(李撥) 이하 7명이 대표자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왔으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경성 종로에서 제 목을 제 손으로 찌르고 관헌에게 붙들린 후 경찰서에서 독립운동이 무모함을 깨닫고 무사히 돌아가매 강우규는.....(일부 내용은 인쇄불량으로 독해 곤란) 늙은 팔을 뽐내며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한번 던져서 이름을 천하에 드러내리라 하고는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장곡천(長谷川) 총독이 갈린다는 말을 듣고 새 총독이 부임하는 때 한번 큰일을 해 보면 일이 만일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이름은 세상에 드러나리라 하고 결심을 한 모양이더라”

마지막으로, 의거 당일 상황과 피체 경위에 관한 내용이다.

“강우규는 지난 9월 2일 오후 5시에 새 총독이 남대문(역)에 도착하자 이보다 먼저 환영하는 사람과 구경꾼 틈에서 구경꾼인 체 하고 미리 준비한 폭발탄을 가지고 남대문역 귀빈실 현관에서 인력거와 구경꾼이 늘어선 곳에 가까이 서서 신문에서 본 총독의 얼굴을 기억하고 새 총독이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를 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폭발탄으로 총독을 겨눠 던졌으나 총독이 무사하였음을 보고 낙심천만하여 그곳에서 도망하여 잠시 경성 시내에 잠복하려고 수염을 깎고 복식을 고치고 이름을 강영일(姜寧一)이라고 가칭(假稱)하고 이곳저곳으로 교묘히 피하여 다니다가 드디어 9월 17일 누하동에서 체포되어 본정경찰서에서 취조중이더니 이번에 검사국으로 넘어 갔다더라”

한편 강 의사 사건은 검사국 및 법원의 취조 등 사법기관 내부에서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던 관계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노출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에서는 공범 혐의자 11명 가운데 8명을 체포하여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대정(大正) 8년(1919년) 10월 5일자 고경(高警, 고등경찰) 제28453호(‘총독에 대한 흉행(兇行) 범인 체포 건’) 비밀문서에는 강 의사를 비롯해 공범 혐의자 8명의 인적사항과 사건 관련내용이 나와 있다. 이들 가운데 최자남, 허형(일명 허일영) 두 사람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나머지 6명은 풀려났다.

의사 사건의 예심을 맡고 있던 나가시마(永島) 판사는 서둘러 예심결정서를 마무리 짓고 그 해 12월 27일 쯤 발표해 이 사건을 연내에 종결지을 만반의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이와 함께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 부상자 30여 명에 대한 심문이었다. 그래서 법원에서는 사전에 각 관할 경찰서에 해당자에 대한 심문을 지시해 놓았으나 그 결과가 제 때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해를 넘겨 1920년 1월 28일에야 비로소 예심종결을 발표했다.

이틀 뒤인 1월 30일자 신문에 예심종결서 전문(全文)이 보도됐는데, 주요 골자는 범행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충분한 만큼 피고 강우규는 ‘폭발물취체(取締)규칙’ 제1조 및 형법 제199조, 동 제54조, 피고 최자남은 폭발물취체규칙 제5조, 피고 허형은 폭발물취체규칙 제8조, 피고 오태영은 폭발물취체규칙 제8, 9조를 적용하여 형사소송법 제167조 제1항에 따라 ‘주문(主文)’ 대로 피고 4명을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부친다는 것이다.

- 거사 보름만에 피체... ‘공범’ 2명도 유죄

이 무렵 강 의사의 감옥생활도 언론에 일부 공개됐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강 의사와 연루자 3명은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여서 미결수 신분으로 서대문감옥 종로 구치감에 구금돼 있었는데, 예수교 신자인 강 의사는 매일 성경을 외우며 간수의 말을 잘 듣는다고 전해졌다. 아울러 장차 강 의사가 재판에서 적용될 법규는 ‘폭발물 취체규칙’이라고 알려졌다. 이 규칙에 따르면, 비록 미수에 그친 자라고 할지라도 무기형이며, 만약 폭발물을 사용했으나 부상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도 사형이 선고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 의사의 경우 2명의 사망자와 3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니 사형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2월 14일 오전 10시 경성지방법원에서 강 의사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강 의사의 장남 중건을 비롯해 방청석에는 내외국인 등 1백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워 이 재판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을 반영했다. 최자남, 허형, 오태영 피고 등이 출정한 후 오노(大野) 간수장의 안내로 강 의사가 회색 무명옷 차림에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출정했다. 재판장의 심문에 대해 강 의사는 당당한 기개로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하였으며, 또 자신의 국가관, 교육관, 세계관 등에 대해서도 솔직담백하게 밝혔다. 이날 재판정에서 폭탄 투척 전후의 상황에 대한 심문내용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재판장
-(폭탄 투척을)기다리고 있을 때의 광경은 어땠나?
강의사-마침 내가 표 파는데 서 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주워들었는데, 총독이 정거장에 들어오면 우선 귀빈실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다기에 정거장 귀빈실 근처로 가서 기다렸다. 처음에는 기병들이 서 있는 근처에서 기다렸는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귀빈실 동편으로 가서 나무가 하나 앞에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이어 많은 인력거가 늘어선 곳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나와 약 5~6간(間) 떨어져 있는 거리에 마차 한 대가 나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내가 그 마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부인 한 사람이 먼저 타는 것을 보았다. 이 부인에 이어 마차에 오른 사람은 총독이었고, 그 다음으로 젊은 청년이 탔다. 나는 매일신보에서 사진을 봐서 총독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금 마차에 오른 사람이 신임 총독이라는 것을 알고 허리에 차고 있던 폭탄을 끄집어내 손수건으로 싸가지고 있다가 고리에 낀 빗장을 뺀 후 곧 던졌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 가운데 총독이 탄 마차가 남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그 때 하느님께 ‘하느님이여,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올렸다.
재판장-폭탄을 어떻게 던졌는가?
강의사-폭탄을 바른손에 잡고 총독이 마차를 타자 가슴을 향해 던졌다.
재판장-그런데 그 폭탄이 총독에게 맞지 않고 어떻게 떨어진 줄 아는가?
강의사-어디로 떨어졌는지는 몰랐다.
재판장-폭탄 조각이 총독의 혁대로 들어가서 구멍이 뚫어지고 신문기자인 다치바나 이외에 36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을 아는가?
강의사-중경상자가 났는지는 모른다.
재판장-(폭탄 투척 후)현장에 한참 서 있었는데도 그걸 모른단 말인가?
강의사-한참동안 서 있기는 했지만 내 앞에 사람들이 겹겹으로 써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재판장-군중들이 모인 곳에 폭탄을 던지면 어떻게 되는 줄 몰랐나?
강의사-나는 오직 총독을 행해 폭탄을 던졌을 뿐 그 밖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고, 또 다른 영향이 미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사 직후 강 의사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담담한 자세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체포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체포하지 않았다. 강 의사의 진술에 따르면, 현장에서 순사 한 사람과 젊은 소년 하나가 자신을 주목하였지만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강 의사는 이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이어서 일부러 묵인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이토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는데 폭발소리도 나지 않고 또 총독도 죽지 않자 강 의사는 이는 하나님이 총독을 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체포당하지 않자 이 역시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곧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굉음을 내며 폭탄이 터진 것이다.

-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가슴 향해 폭탄 투척

  이날 오후 5시 10분경 강 의사에 대한 제1차 공판이 모두 끝났다. 폐정을 앞둔 순간 강 의사는 재판장에게 할 말이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이 이를 허락하자 강 의사는 이 재판은 일본 천황이 시켜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선총독이 시켜서 하는 것인지를 따져 물었다. 이에 재판장은 ‘법률은 천황의 재가를 받을 뿐이고 재판은 재판소 독립으로 한다’고 답하자 강 의사는 ‘그러면 어째서 나만 신문하고 또 귀찮게 구느냐, 저 죄(罪) 덩어리인 총독은 어째서 잡아가두지 않느냐’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제1차 공판이 ‘주범’인 강 의사에 대한 공판이었다면 18일 열린 제2차 공판은 ‘공범’ 최자남, 허형, 오태영 등 3명에 대한 심문이었다. 비록 거사는 강 의사가 단독으로 기획하고 준비하고 또 결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이들의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한편 이들은 공판정에서 예심 때 한 진술내용을 상당수 번복하였다. 그 이유는 경찰조사나 예심 때 혹독한 고문을 받고서 이에 못이겨 할 수 없이 거짓진술을 했다고 털어놨다. 최자남의 경우 부부가 모두 원산경찰서에 붙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최자남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강 의사 등 피고 4인에 대한 심문이 끝나자 검사는 피고 모두에게 실형을 구형했다. 강 의사에 대해서는 살인미수죄를 적용, 형법 제199조 제203조 제54조 및 폭발물취체규칙 제1조 제12조에 의거하여 사형을, 허형에 대해서는 폭발물취체규칙 제8조에 의거하여 징역 1년 6개월을, 최자남에 대해서는 정상(情狀)은 자세하지 않지만 동 규칙 제5조에 의거하여 징역 3년을, 마지막으로 오태영에 대해서는 동 규칙 제9조 제12조에 의거하여 징역 1년을 각각 구형하였다. 이날 검찰의 구형에 대해 강 의사 등  피고 전원은 모두 불복의 뜻을 내비쳤다.

강 의사 등 4명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은 2월 25일 열렸다. 이날 다치가와(立川) 재판장은 강 의사 등 피고 4명을 불러 세우고는 판결문을 읽어내려 갔다. 재판장은 피고들의 진술내용, 목격자 및 피해자들의 증언, 폭탄 감정 결과, 그리고 폭탄 파편 등 여러 증거물을 토대로 판단할 때 유죄가 입증된다며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강우규(姜宇奎)    사 형
최자남(崔子南)    징역 3년
허  형(許  炯)    징역 1년6개월
오태영(吳泰泳)    무 죄

검사의 구형과 비교해볼 때 강 의사, 최자남, 허영 등 3인은 형량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오태영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오태영이 강 의사가 폭탄투척 ‘범인’임을 알고도 이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또 강 의사의 부탁으로 가회동 82번지 장익규의 집으로 은신하도록 도와준 점 등은 인정되나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오태영은 이날로 석방되었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이른바 ‘남대문역 폭발사건’은 이리하여 사건 발생 근 6개월 만에 일제당국의 사법처분을 받고 일단락되었다.

- ‘동지’ 최자남 변호를 위해 공소 제기

한편 1심 판결에 대해 강 의사는 판결 당일 즉시 공소(控訴)를 제기하였다. 강 의사가 공소를 제기한 가장 큰 이유는 ‘동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강 의사는 공소 공판에서 ‘내가 공소를 다시 한 것은 결단코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최자남은 판결 하루 뒤인 2월 26일 역시 공소를 제기하였다. 반면 허영은 1심 판결에 승복하고서 공소 제기를 포기하였다. 강 의사와 취자남의 공소 기록은 3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심 법원인 경성복심(覆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이 사건은 제2막을 맞게 됐다. 4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심 재판이 열렸다. 이날 방청객 속에는 낯선 얼굴이 한 사람 있었다. 남편의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강 의사의 부인이 멀리 중국 땅에서 건너와 아들 중건과 함께 재판을 지켜보았다.

판은 사실 심문, 검사 논고, 변호사 변론 순으로 진행됐다. 먼저 재판장이 강 의사에 대해 연령, 본적지 등을 확인한 후에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재판장은 1심과 유사한 내용, 즉 강 의사의 이력, 거사를 결심한 계기, 폭탄 구입 경위, 거사 당일의 행적 등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강 의사는 대개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 라고 짧게 답했다. 그러나 폭탄의 위력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는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요지는 폭탄의 위력을 자세히 몰랐고, 사이토 총독 한 사람만을 살상하기 위해 던졌을 뿐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재판장의 심문이 끝나자 검사의 논고를 시작했다. 데라다 검사는 강 의사가 백주에 폭탄을 던져 총독을 살해하려한 것은 범죄의 구성요건을 확실히 갖추고 있을뿐더러 폭탄을 던지면 군중에게 피해가 있을 줄 몰랐다고 하나 이는 구실에 불과할 뿐 실지로 수 십명의 사상자가 난 만큼 ‘살인미수범’과 ‘살인기수범’을 범했다고 주장했다. 또 최자남에 대해서는 경찰 및 검찰 조사, 예심, 제1심 등에서 한 진술이 일치하는 점으로 봐 폭탄 건에 대해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아 방조범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라다 검사는 논고를 마친 후 두 사람에 대해 1심 동일한 형량인 ‘피고 강우규 사형’, ‘피고 최자남 징역 3년’을 구형했다. 4월 26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은 강 의사에게는 사형, 최자남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의 형량과 동일한 형량이다. 다만 재판부는 총독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상해치사 또는 상해 범죄에 대해서는 법 적용을 배제시켰다. 최자남의 공소에 대해서는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강 의사는 이날 고등법원에 상고(上告)했다.

- 우국충절로 넘치는 ‘상고취지서’

앞서 언급했듯이 강 의사는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았으나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재판 준비를 본인이 직접 감당해야 했다. 결국 ‘상고취지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강 의사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 장문의 상고취지서는 총 9개 항을 담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한 배경, 폭탄 입수 및 국내 반입 등 거사의 경위, 최자남과의 ‘공모’ 여부, 상고 이유, 1, 2심 법원의 처사에 대한 비판, 동양 3국의 평화론 등이다. 다시 말해 상고취지서에는 거사를 도모한 배경에서부터 재판 과정에서의 논쟁 및 재판부에 대한 충고 등을 총망라하고 있어 강 의사의 우국충절은 물론 세계관이나 동양평화 사상까지도 엿볼 수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상고취지서 내용 가운데는 강 의사의 언사로 보기 어려운 구절이 몇 군데  없지 않다. 한 예로 일본 천황과 관련하여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 ‘어지(御旨)’ ‘聖旨(성 지)’ ‘성덕(聖德)’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천황주의자들이 천황의 신민(臣民)을 자임하며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밖에도 일황이 ‘천의(天意)에 순종하고 세계 대세인 평화회의에 동의하여’라는 표현 등은 당시 강 의사가 국제정세 등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부족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강 의사에 대한 상고심 1차 공판은 5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 구사바(草場) 검사는 강 의사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폭탄을 던지면 다수의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을 것이므로 이는 범죄성의 의사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 대목과 관련해 유죄를 선고한 1심의 판결을 뒤엎은 복심법원의 판결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다. 상고심 선고 공판은 5월 27일 다나베(渡邊) 재판장 이하 4명의 배석판사, 그리고 구사바(草場) 검사가 열석한 가운데 재판이 열렸다. 다나베 재판장은 피고가 총독 외에 다른 사람을 살해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총독이 탄 마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예견하였고, 또 사람이 밀집한 상황에서 폭탄을 던져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점은 피고가 그 피해를 희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원심 판결, 즉 사형을 수용하였다.


재판부는 또 1심 재판부가 강 의사가 요구한 총독의 법정 출석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사건 자체의 재판 절차에는 하자가 없으므로 원판결의 당부(當否)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점, 또 피고가 주장한 내용들은 정치, 도덕에 관한 논의들로서 상고의 적법(適法)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최종적으로 강 의사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강 의사에 대한 일제 사법당국의 사법적 절차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오직 사형집행 절차만을 남겨 두었다. 중건은 재판 당일 부친을 면회하였는데, 강 의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아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사실상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 나 죽는다고 조금도 엇지않게(언짢게) 생각하지 마라.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실허하는(싫어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 세상에 대하여 한 일이 너무 없어 도로 북그럽다(부끄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내가 죽느니만 못할 것 같다. 즉 이번에 내가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이제 내가 이만큼 애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조선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백인다면(박힌다면) 그만이다. 내가 죽을 지라도 내 가슴에 한이 되는 것은 내가 죽은 후에 조선청년들의 교육이다...”

- 거사 이듬해 순국... 공동묘지에 유해 가매장


운명의 날인 1920년 11월 29일이 마침내 다가왔다. 강 의사는 이날 오전 서대문형무소 내 사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형을 집행하기 전 형리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자 강 의사는 짧은 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남겼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이날 일제 당국은 강 의사의 장남 중건을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시켰다가 강 의사의 형 집행 후에야 풀어주었다. 오후 2시경 장남 중건은 서대문형무소 시체실에서 사각형 궤짝 하나를 인계받았다. 그 속에는 부친의 시신이 앉은 채로 들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중건은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한편 강 의사의 유해는 순국 직후 유족들이 선영으로 모시고자 했으나 일경의 불허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일경은 강 의사의 유해를 내줄 경우 조선인들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결국 빈소 조문은커녕 장례 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만이 강 의사의 유해를 운구하였다. 강 의사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감시 차 일경 2명이 따라오자 중건은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네놈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감시하여야만 속이 쉬원하냐!”며 울부짖었다. 강 의사의 유해는 이날 오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소재 서대문형무소 공동묘지에 임시로 가매장 되었다.

해방 후에도 강 의사의 묘소는 10년 가까지 이곳 공동묘지에 쓸쓸히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가 1954년 봄 유지들의 발기로 이장문제를 논의한 후 마침내 서울 우이동 산록(山麓)으로 이장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일정에 차질이 생겨 당초 계획보다 2년 뒤인 1956년 10월 18일 수유리 산 109번지에 묘지 이장과 함께 육당 최남선이 쓴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우이동에 마련된 강 의사의 묘소는 덕천군민회에서 관리하였는데, 부지 문제를 놓고 서울시 관재국과 송사(訟事)에 휘말리는 등 곡절을 겪다가 1967년 6월 26일 현재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로 이장하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강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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