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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쓰지 못하는 낡은 만년필 하나, 그리고 인간 김대중

가슴에만 묻어두었던,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그 때가 아마 그 분이 막 대통령에 당선되셨을 그 즈음,당선자 신분이었을 때의 일로 기억됩니다.물론 저는 이전에 그 분과 한번도 뵌 적이 없었습니다.7080세대가 그렇듯 먼 발치에서 의연하게 독재와 맞서는 그 분을 지켜보기만 했었지요.그 때 한 지인을 통해 그 분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대통령 당선자를 만난다는 설렘 보다 이 척박한 땅에도 자유와 민주의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증명해 보인 투사,그 분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쳤습니다.그 분이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그러면 저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이런저런 생각에 밤이 참 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대목에서 잠깐 왜 그 분이 절 찾으셨는지,짧은 배경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저는 현직 신문기자입니다.그 때도 신문기자였습니다.그 분이 마지막 선거에 나섰을 때,저는 한국기자협회 소속 단위 기자협회장이었습니다.그 때 양심있는 언론인들의 최대 고민은 공정한 선거보도였습니다.부끄럽지만 기자로서 양심을 파는 부류도 없지 않았던 시절이었고,그래서 그런 ‘장난질’을 막고 정말 유사 이래 처음으로 공정한 선거 한번 치르게 언론인들이 사명감을 가져보자는 묵언의 공감대가 이뤄졌었지요.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는 24시간 안기부의 감시 속에 있었습니다.제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들에게 포촉되었고,아마 윗선으로 보고도 됐을 것입니다.그건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기자협회의 단위 회장이라는 신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많지 않은 동지들이 모였습니다.“이건 소문 내서 될 일이 아니다.전격적으로 해치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언론계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나왔다는 ‘대통령선거 공정보도 준칙’이었습니다.물론 이 준칙이 정규 일간지에는 거의 실리지 않았습니다.이걸 보도한 매체는 당시 기자협회보가 거의 유일했습니다.내용은 이랬습니다.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어떤 주의·주장도 배제한다.역사적·시대적 양심에 반하는 어떤 시도도 보도하지 않는다.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보도로써 응징한다는,다소 도발적이고,일견 무식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부정하고 부당한 기도를 응징한다고 했지만 응징을 받은 쪽은 저희였습니다.이후 당시 안기부의 집요한 접근과 감시가 계속됐습니다.사주를 통해 관련 기자를 조치하라는 압력이 가해지기도 했고,회유도 끝이 없었습니다.다행히 고집 센 사주 덕에 짤리지는 않았지만 위태위태한 위기감은 대통령 선거 내내 계속됐습니다.그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만나자거나 밥 먹자,술 마시자 회유를 멈추지 않았고,틈만 나면 찾아와 족쇄를 채우려 들었습니다.그들로부터 온갖 질문이 쏟아졌습니다.일일보고를 해야 하니 내부 동향에 대해 한 마디만 해 달라는 청유에서부터,당신 기자 오래 할 사람 아니냐.협조해 달라는 협박까지 온갖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사람도 보도준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모두가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켰고,선거는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단언컨대 이전에 김대중 후보와는 어떤 교감도 없었고,저희가 내놓고 그 후부를 지원하지도 않았습니다.저희가 지키고자 한 가치는 기자로서의 양심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뜻밖에 그 분으로부터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난 곳은 동교동 자택이었습니다.조용하게 그 분과 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집안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그 인파 속에 묻혀 있자니 잠깐,나는 기자다,기자가 사적으로 권력자를 알현하려고 이런 곳에 와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일었고,얼른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엉거주춤 쭈볏거리고 있자니 비서관인 듯 한 사람이 저를 찾더군요.정확하게 약속한 시간이었습니다.비서관은 제게 “지금 선생님께서 찾으신다.”고 전했습니다.그래서 발디딜 틈도 없는 거실로 들어서니 그 분께서는 소파에 앉아계시다가 비서관의 소개를 받자 일어서서 반갑게 악수를 청하셨습니다.그리고는 좌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이 젊은이는 신문기잡니다.제 편을 드는 기자가 아니라 바로 보고,바로 쓰려고 애쓰는 기잡니다.이번 선거 중에 공정보도 준칙이라는 것을 통해 기자들의 양심적인 보도를 촉구해 제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아마 이런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입고 계신 윗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하나 꺼내 선뜻 제게 건네시더군요.“기자에게는 이 선물이 제일 어울릴 것 같습니다.”라면서요.그러고는 몇 마디 더 질문을 주시더군요.지금의 언론환경은 어떠냐,보도준칙 발표 당시 어려운 일 많았을텐데 용케 공표까지 했다는 등의 말씀을 주셨고,더러는 좌중이 너무 소란스러워 제가 알아듣지 못한 말도 있었습니다.그 북새통에 그 분의 시간을 뺏는 일이 면구스럽기도 해 일어서려는데,아마 부엌일 하시는 분인 듯 싶은 아주머니가 제게 작은 사발 하나를 건네시더군요.가만 보니 산 낙지를 다져 참기름소금에 버무린,요새 말하는 ‘탕탕이’였습이다.경황은 없었지만 맛있게 먹었습니다.그게 전부였습니다.열심히 하라는 그 분의 격려를 끝으로 동교동을 나섰고,이후 그 분과는 어떤 교분도 갖지 않았습니다.그 분은 바쁜 대통령이 되셨고,저는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기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날,돌아오는 길,기분이 참 좋았습니다.만약 그 분께서 항용 그렇듯 촌지 봉투를 건네셨다면 단호히 거절하리라 맘 먹고 갔는데,뜻밖에 쓰시던 만년필을 꺼내 주시니,기자인 제게 그보다 더 멋진 선물이 어딨겠습니까.굵고 무거운 몽블랑 만년필.그런 만년필은 사실 기자가 일상적으로 쓰기엔 불편한 필기구입니다.그러나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말라며 건넨 그 만년필이기에 제겐 소중하기 비할 데 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물론 제 손으로 잉크 한번 채워보지 않았고,그 걸로 기사 한 줄 쓰지 않았지만,지금도 그 분의 뜻이 따뜻한 체온으로 제게 전해지는 것만 같아 가슴 한 켠이 한없이 허전하고 슬픕니다.

그 분은 누가 뭐래도 우리 현대사에 형형한 큰 별이었습니다.과거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그 분의 태생이 어디였고,그의 정치적 기반이 어디였든,또 그의 성향이 어떠했든,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인 우리 정치 무대에서 그만큼 민족적 자의식이 강하고,민족의 미래에 대해 현철한 비전을 제시하며,온 몸으로 불의에 맞선 사람,숱한 음해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가장 시종여일한 평화주의자였으며,그의 평생의 좌우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이 말하듯 인간을 사랑한 투철한 인본주의자였으며,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끈질기고 영악하게 국익을 지켜낸 탁월한 외교가였고,대북 화해정책에서 보듯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일관되고 변함없는 통일론자,화합주의자였습니다.이런 거목을 다시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를 인동초에 비유합니다.결코 타협없이 엄혹한 겨울 같은 탄압의 시절을 견뎌낸 신념 때문에 얻은 별명일 것입니다.그런 신산의 삶을 살아온 그를 과거의 전체주의적 통치자와 맹신적 추종자들은 ‘빨갱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생각해 보십시오.우리보다 훨씬 보수적이어서 우익이 50년 넘게 일당독제 체제를 굳히고 있고,그 우익들을 앞세워 우리나라 국권을 침탈했던 일본 같은 완고한 나라에도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이 합법적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런 이념의 덫을 아직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리영희 선생이 말씀하셨듯 ‘새는 좌의 날개를 가져야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이 진보적 정치 사상을 가졌다고 섣불리 좌파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암튼 연방제 통일론이나 4대국 보장론 같은 그의 앞선 혜안은 정적들에게 언제나 큰 부담이었음이 틀림없고,이 때문에 그는 평생 형극의 수렁에서 헤매야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이제 우리도 서구의 선진국들처럼 유치한 이념의 진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우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세계 무대에서 구속없이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습니다.우라는 질곡의 세상을 살았지만 우리 아들과 딸에게는 그런 주눅든 유산을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고, 그 바람에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것까지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자의적 선택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다.이 나라엔 아직 당신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다.그러니 조금만이라도 더 버텨 주시라고 참 많이 기도하고,기원했습니다만,하늘이 그 분을 더 원하셨는지 무덥고 후텁지근한 날 이른 오후,그 분께서 그토록 아끼고,사랑하고,존경해 마지 않던 이 땅의 민초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핍박 속에서 더욱 강인했고,모함과 마주할수록 더욱 당당했으며,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이 시대의 사표를 이제 보내드려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 분을 경원합니다.더러는 사갈시하는 부류도 없지 않습니다.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좀 더 구체적으로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고 화해주의자며,목숨을 거로 통일을 지향한 이가 바로 김대중이었습니다.배 부른 소수를 결코 미워하지 않았으면서도 배 고픈 다수를 더 애처롭게 여겨 먼저 껴안은 이가 김대중이었습니다.성장론 보다 분배론에 무게중심을 뒀던 그의 치세에서 더러는 불이익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악의적인 지역감정의 망령에 세뇌되어 그 분이 ‘준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이제 그 분은 우리 곁에 없습니다.죽은 이는 모든 것에 관대하고,모든 이는 죽은 이를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 분이 생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폭정의 가해자까지 용서한 만큼 그를 미워한 모든 이들이 이미 고혼으로 세상을 떠난 그 분과 그의 삶,가치와 이상을 기꺼이 껴안아 주셨으면 합니다.고인의 명복을 빌며,다른 세상에서도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삼가 머리 숙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하며 혼령이나마 조국을 지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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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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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의연한 모습 생생"

 
18일 오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 될 당시 전담팀장으로 근무했던 강복기(67) 전 청주교도소 서무과장.

강 전 과장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이보다 더 힘든 수감생활도 의연하게 견디셨는데 이렇게 서거하셨다니 믿을 수가 없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1967년 인천소년교도소에서 교도관 생활을 시작한 강 전 과장은 청주교도소에 근무하던 지난 1981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로부터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로 감형돼 청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고 강 전 과장은 시국사건 수형자들에게 정통하다는 내부평가로 김 전 대통령을 담당하게 됐다.

가족 친지 면회, 서신, 영치금 등 민간인 창구 역할을 한 강 전 과장은 "당시 김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쓴 것에 대한 괴로움과 수형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하루종일 책을 놓지 않고 건강관리에도 신경쓰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했다"며 "특히 막내아들 홍걸 씨에 대한 애정이 강했고 홍걸 씨가 고려대 불문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복역 당시 생신 날에 이희호 여사와 아드님 세 분이 철망으로 차단된 접견실 시멘트 바닥에서 큰 절을 올리던 모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같은 인연으로 강 전 과장은 지난 2000년 12월 스웨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현직 공무원으로는 유일하게 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참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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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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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김前대통령님, 경청과 배려 많으셨던 분"
안철수 박사가 고(故)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짧지 않은 인연을 소개하면서 고인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안 박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최연소의 나이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에 임명된 바 있다.

안 박사는 그때를 회상하며 "고(故) 김대통령님과는 제가 30대의 나이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의 최연소 자문위원으로 임명 받으면서 만나 뵙고 짧게나마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기억을 되짚었다.

김 전 대통령을 평가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로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경청과 배려'가 있다. 안 박사도 김 전 대통령과 만남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임명장을 받고 테이블에서 김 전 대통령과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 자리가 있었던 것. 당시 안 박사는 김 전대통령이 연배가 많고 IT 분야의 큰 흐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이 테이블에서 여러 사람과 대화 도중에 안 박사에게 어떤 질문을 했고 안 박사는 질문에 여러 설명을 이어가면서 긴 시간 답변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안 박사는 "김 전 대통령은 IT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셨는데, 처음 만나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저는 그런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상태였다"며 "질문에 대한 답변을 김 대통령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열심히 경청하셨다"고 말했다.



안 박사는 "그런데 나중에야 이미 잘 알고 계신 내용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미 알고 계신 내용에 대해서도 아무 말씀 없이 열심히 경청하시던 그 당시 그 모습은 평생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고 슬픔을 전했다.

안철수 박사는 끝으로 "대한민국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고(故) 김대통령님께서 평안하게 영면하시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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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밥상'엔 고추장이 없다?

고추·양파 등 당시엔 없어 수군 음식 등 77가지 재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먹었던 음식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경남도는 13일 정오 통영시 태평동 세병관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먹었던 '이순신 밥상'을 재현해 공개한다고 12일 밝혔다.

이순신 밥상은 이순신 장군이 평상시 즐겨 먹었거나 백의종군 때 먹은 음식을 비롯, 조선 수군이 전투할 때나 평상시, 훈련 중에 먹었던 음식, 전쟁 승리 후 먹었던 음식 등 77종이다.

이순신 밥상은 난중일기에 언급된 재료들을 바탕으로 당시 통제영 소재지였던 통영과 전남 여수의 향토음식, 충남 아산의 덕수 이씨 종가 음식을 기초로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이 지난 6개월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이순신 밥상 77종 중 위로부터 ‘이순신 장군이 평상시 즐겨 먹었던 밥상’ ‘수군 이 전투 승리 후 먹은 음식’./경남도 제공
고추 감자 고구마 양파 등 임란 당시 국내에 없었던 식재료들은 배제됐고, 어육각색간랍(소 내장 부위와 생선을 이용해 만든 전), 와각탕(모시조개국), 과동침채(지금의 동치미), 생치편포(꿩고기를 다져 말려 만든 포) 등 당시 재료 이름과 조리법을 따 만들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평상시 장국, 어육각색간랍, 멸치젓, 제주(술) 등을 먹었고, 백의종군 때는 연포탕, 재첩국, 고사리나물, 취나물 등을 먹었던 것으로 고증됐다.

조선 수군은 전투시 주먹밥, 콩가루주먹밥, 된장주먹밥, 미역밥, 통영비빔밥, 산나물밥 등을 먹었고, 훈련 중에는 와각탕, 청어구이, 해탕(게살을 발라 끓인 탕), 전작(참새고기 볶은 것) 등을 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쟁 승리 후에는 숭어전, 설하멱(쇠고기 꼬치구이), 생치편포, 칠향계(닭찜), 약과 등과 함께 탁주를 곁들여 사기를 돋웠다.

경남도는 충무공밥상, 이순신밥상, 좌수영밥상, 우수영밥상, 통제영밥상 등 5종에 대해 특허를 출원한 데 이어 올해 말 통영시내 문화마당 주변에 이들 음식을 파는 '이순신 밥상' 1호점 문을 연다. 내년 전남 여수시와 수도권에 2·3호점을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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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원광대 명예박사 학위식 연설-민주주의에 관련된 노무현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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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고단함 뛰어넘은 풍운아 '리영희'

오마이뉴스 | 2007-06-21 17:23:09

[오마이뉴스 김언호 기자] <우상과 이성>의 저자 리영희 선생의 삶은 우리시대 민족주의적 지식인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이 책은 '우상'이 판을 치는 시대에 '이성'의 빛으로 그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책을 써낸 저자는 투옥되었지만 그 책은 한 시대의 역사로서,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키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것은 냉전시대의 비논리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시대'의 논리를 여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 권의 책'으로 상징되는 출판문화가 한 시대 한 사회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다시 그것은 그 시대 그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킨다는 명제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아울러 저자와 책 수난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국가사회 권력의 성격과 그 의식의 수준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1974년 6월에 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 비평사)에 이어 리영희 선생의 두 번째 평론집인 <우상과 이성>이 책으로서 세상에 나온 것은 1977년 11월 초순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아시아·한국·일본'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아시아 및 극동의 현대사와 그 변전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구조적 인식작업이라면, <우상과 이성>은 오늘 우리들의 삶을 조건짓는 이 '사회'에의 일반적 비평작업에 비중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책이 우리의 민족적 삶과 연관되는 대외적 시각 교정작업이라면 뒤의 책은 대내적 시각교정작업을 시도한다고 하겠다.

책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를 놓고 여러 날 고민했다. 이 시대 이 사회의 허위와 허구를 벗기고 진실을 밝힌다는 그런 뜻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이 선생이 제안한 <우상과 이성>으로 정했다. 그러나 <우상과 이성>은 책 제목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상'(偶像)의 개념도 쉽지 않고 '이성'(理性)은 고도의 추상적인 논리를 갖는다.

"나의 글쓰기 목적은 진실 추구에서 시작된다"

 
▲ 40년 동안 고통을 무릅쓰고 글을 써온 목적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는 진실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였다.
ⓒ2007 한길사
많은 사람들이 '우상과 이상(理想)'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우상과 이상이 아니고 우상과 이성입니다"고 고쳐주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제목이 호소력을 갖고 많은 독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민족적 삶을 규정하는 리얼리티를 제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추상성과 이론성을 뒷받침하는 상황성이 있기에 한 권의 책의 제목으로서 <우상과 이성>은 마력 또는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상과 이성>의 저자가 투옥당하고 책이 수난을 당함으로써, 이 책은 문제작 또는 명저로 '만들어지고' '역사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상과 이성>은 이제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서 이 시대 이 사회에 굳건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상'과 '이성'에 대해서 저자는 책 머리말 '읽는 이에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 알려진 노신의 글 가운데,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 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 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노신은 물론, 당시 중국의 사회와 중국인의 상태를 안타까워해서 쓴 것이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의 독자 가운데 의식의 깊은 중독증 상태에서 깨어나는 괴로움을 경험한 이야기를 나는 적지 않게 들었다. 이것이 독자에게 송구스럽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었다.

절대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잠을 깨는 괴로움을 준 것을 사과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역할을 다소나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현실에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책의 이름을 일컬어 <우상과 이성>이라고 한 이유이다."


<전환시대의 논리>로 이미 많은 독자를 가진 리영희 교수였지만 <우상과 이성> 역시 서점에 책이 깔리자마자 큰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상'의 시대를 파괴하는, '이성'의 힘을 발휘하는 한 권의 책이었다. 그러나 신문에 책이 나왔다는 소식 한 줄 실리기 전에 우상이 이성을 누르기 시작했다. 책 머리말이 예언한 것처럼 고통이 그에게 다가왔다.

1977년 11월 23일 오전 7시에 저자 리영희 교수는 연행되어 갔고 나흘 후에 리 선생의 편역서인 <8억인과의 대화>를 펴낸 창작과 비평사 대표 백낙청 교수(당시 해직교수)와 한길사의 발행인 박관순이 연행되어 갔다.(당초엔 아내의 이름으로 한길사를 등록했다. 나는 취직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책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저자와 두 출판사의 발행인에 대한 수사는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최초의 집단적 의사표시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로부터 나왔다. 12월 3일 조선투위는 성명을 내고 리 교수의 연행수사는 "언론에 대한 새로운 탄압의 일환"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는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역임하고 자유언론의 창달을 위해 헌신해온 리영희씨가 지난 11월 23일 오전 수사기관에 연행된 후 10여 일이 지나도록 계속 억류되어 있는 사태를 중시한다. 리영희씨는 그간 신문·잡지에 발표한 수많은 논설과 이를 엮은 <전환시대의 논리> 등 많은 저서를 통해 우리의 낙후된 인식을 깨우치고 경직된 현실감각의 국제적 지평을 넓혀준 탁월한 식견과 지조의 언론인이다."

'예정된 코스'에 따라 기소되고 재판받아

 
▲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온 <우상과 이성>
ⓒ2007 한길사
리영희 교수는 결국 풀려나지 않고 12월 27일 기소되었다(백낙청 교수는 불구속기소 되었고, 박관순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우상과 이성>에 실린 수필·평론 등 24편 가운데 '불효자의 변'을 빼고는 이미 신문·잡지에 발표된 글이었다. 전혀 문제가 된 바 없는 것들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예정된 코스'에 따라 기소되고 재판받고 만 2년 동안의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아무튼 <우상과 이성> 필화사건은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필화사건의 하나였던 것이고, 그 재판과정에서 반공법을 둘러싼 본격적인 토론이 개진되었던 점에서도 기록되어야 할 사건이었다.

경찰과 검찰이 문제를 삼았던 내용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나를 오늘의 시점에서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지식인의 예언적인 비판기능을 보게 되고, 이 시대의 권력 및 우상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나를 실제로 보게 된다.

우선, '제1부 부정의 부정:식민지시대의 극복'에 실린 글 가운데 하나인 '다나까 망언에 생각한다'가 문제가 되었다. 즉, 일본수상 다나까가 의회에서 "일본의 한국 통치교육이 한국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망언을 보고, 그것을 말한 일본 쪽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형식'과 그 '문제를 보는 시각'을 비판한 글이다. 리 교수는 우리의 지도적 인사들이 일본인과의 대화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식민지적 유산'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는데 그것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북한 대표가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우리말로 했다는 것이 작년 겨울 한때 화제가 되었지만, 긴 눈으로 높은 차원의 '효능'을 생각할 때,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떠나서 같은 민족으로서 이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경험으로도 약소국, 특히 식민지였던 민족의 대표가 구식민모국 외교관보다 더 '유창'한 외국어로 연설하는 것보다 차라리 서툴기는 하지만, 긍지를 지키면서 하는 연설에 대국 외교관들이 찬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

제2부 '현대 중국의 이해'에 들어 있는 '모택동의 교육사상' 또한 문제가 되었다. 지금은 폐간되어 없지만 1976년 12월호 <월간 대화>에 발표했던 이 논문에서 리 교수는, 외국인으로서는 모택동을 잘 안다고 하는 에드가 스노의 평을 인용했다. 물론 "각기의 사상의 입장과 현대 중국의 지식 정도에 따라서" 에드가 스노의 말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는 단서를 붙였다.

"대중 속에 있는 모택동의 오늘의 모습은 사형집행자의 그것은 아니다. 그를 위대하게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단순히 당의 보스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억의 중국인에게는 순수한 의미에서 교사, 정치가, 전략가, 철학자, 계관시인, 민족적 영웅, 가장,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방자라는 것을 합친 전부인 까닭이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모택동은 공자·노자·루소·마르크스, 게다가 석가를 합친 존재이다."

검찰은 특히 '농사꾼 임군에게 띄우는 편지'의 많은 부분을 문제 삼았다. 편지 형식으로 된 이 글을 통해 오늘의 농촌이 당하는 고통, 그 고통의 원인을 밝혀 보는 것이었다. 검찰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반공법 위반'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도시문화, 특히 농촌을 덮어버리고 있는 '서울문화'란 그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농민을 희생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화형태이고, 조금 더 크게는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지배에 대한 이 민족 대중의 저항감을 심정·심리적 측면에서 쓰다듬는 마취적·최면술적·아편적인 문화 내용이라고 생각하네."

"양심적인 지식인에 대한 탄압"

▲ 리영희 선생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2년 복역을 마치고, 1980년 1월 광주교도소 문을 나서고 있다.
ⓒ2007 한길사
리영희 교수에 대한 구속기소 및 백낙청 교수에 대한 불구속기소는 지식인사회로부터 잇단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2월 8일 성명을 발표하고 "일방적이고도 왜곡된 시각만을 강요해오던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국제적 시야를 넓혀준 용기 있고 양식 있는 언론인" 리영희 교수를 구속하는 것은 "양심적인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라고 규정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77 인권선언'에서 "언론의 위축상태가 이제 출판계에까지 확대되어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구속되고 창작과 비평사, 한길사 등 양심적인 출판사의 대표들이 입건"되었음을 지적,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는 것임을 믿고 모든 양심적인 지식인, 고난 받는 근로자, 시민, 학생들과 더불어 끝까지 분투할 것을 다짐한다"고 선언했다.

12월 16일에는 김동길·김용준·김찬국·노명식·안병무·이계준·한완상·김병걸·김윤수·남성길·성내운·염무웅·이우정 교수 등 해직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학문의 연구는 오직 진리의 탐구만을 목적으로 하는바, 이는 결코 어떤 일개 정파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 없으며, 학문적 오류는 순수한 이론적 비판에 의해서만 수정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인신에 대한 구속과 입건은 연구와 저술활동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며, 나아가 학문의 존립 근거 자체를 말살하려는 처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강단과 연구실에서 쫓겨난 교수에게 자유로운 발표와 저술의 기회마저 봉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생존권에 대한 탄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어 학계·언론계·문단의 인사 82명이 검찰총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리영희씨는 조선일보사와 합동통신사에 재직하는 동안 그의 냉철한 보도정신이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논평, 해설, 혹은 외국문헌의 번역을 통하여 변전하는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는 일에서 많은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아왔습니다. 또 중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분야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자료이용과 객관적인 문제접근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리영희씨는 사실탐구를 위하여 힘겨운 선구역할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이밖에 1978년 2월초에는 기독자교수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학생연맹 등도 리 교수의 구속을 항의하고 석방하라는 의견을 발표했다.

리영희 교수가 연행될 때 팔순의 노모가 병석에 계셨다. 리 교수는 병석의 어머니에게 "잠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집을 나섰다. 기소되던 이튿날인 12월 28일 새벽, 그 어머니가 아들을 찾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8일 오전 면회 온 부인 윤영자 여사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리 교수는 망연자실했다.

자유를 차단당한 아들은 그날 저녁 서울구치소 4사상(上) 6호 감방에 빈소를 차리고 '감방음식'으로 예를 올렸다. 역시 구속되어 있던 김지하 시인이 사탕을 보내주었다. 그는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는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냈다.

'불효자의 변'

"어머니의 영전에 바칩니다. 평소에 불효자식이더니 끝내 세상을 떠나시는 자리에서 임종도 못한 죄인이 되었으니 한만이 앞섭니다.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지금 이곳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그동안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소리와 그 몸짓을 늘 듣고 보는 듯하였습니다. 좁은 방 속에 주어지는 음식·과일을 고여 놓고 멀리서 하루 세 번 어머니의 명복을 비오니, 부디 극락 가셔서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시옵소서."


어머니가 별세하자 주위 인사들은 아들이 장례라도 치르고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국과 교섭했다. 송건호·이호철·임재경 선생 등이 소설가 이병주 선생을 앞세워 검찰총장을 방문하고 그 뜻을 전했다. 그렇게 될 것 같았지만 리 선생은 결국 감옥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상주 없는 장례가 친지들에 의해 치러졌다.

당초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나는 리 선생에게 이미 발표한 글들로만 엮지 말고 새 원고를 한두 편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새로 집필한 것이 '불효자의 변'이었다. '현대의 충효사상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는 이 글은, 이 시대에 충과 효가 어떠한 의미구조를 가지며, 권위주의 정치사회에서 그것이 어떠한 형식과 논리로 민중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가를 비판한 것이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했고 현재 살아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불효자이다. 선친의 마지막 병고 때에는 의사 한 번 불러 대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가족인데다가, 이름은 언론기관이라고 버젓하지만 안에서 뒷바라지하는 소위 '내근'인 나에게는,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없는 수입으로써는 가족의 세 끼를 보장하는 일조차 힘에 겨운 형편이었다.

이 쓰라린 경험은 나에게 효도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해방 후 내려오신 아버지를 10년 쯤 모시면서 그 회갑조차 못해 드리고 이렇게 세상을 뜨게 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철이 들어 아버지가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럴수록 조금 살게 된 후에는 만사에 선친 생각이 앞선다.

효는 아름다운 인간감정의 행동적 표현이다. 효를 다하지 못한 필자 같은 인간은 죽는 날까지 그 못다 함을 원한으로 품고 고민할 것이다. 필자도 자식들에게는 효의 도덕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 사회의 사회적 신앙, 교육의 근본정신, 인간관계의 범주로 강조하려 할 때에는 그것만이 아닌 더 중요한 근본적 사실을 아울러 생각해 보도록 권하고 싶어진다."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단 심정으로 상고이유서 집필

▲ 리영희 선생의 저작은 한길사에서 2006년 저작집으로 묶여 나왔다.
ⓒ2007 한길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의 내용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단 및 피고인들의 논전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재판정은 변호인단과 피고인들의 학문적 신념과 법적 이론들이 전개되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이돈명·정춘용·조준희·박두환·김강영·황인철·홍성우 변호사 등이 명변론을 폈다. 변호인단은 반공법의 적용에 대해 체계적인 반격을 가하는 장문의 변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감옥의 저자'는 200자 원고지 218매에 달하는 상고이유서를 남겼다. '예정된 코스'에 따라 진행되는 재판이었지만, 리 교수는 아무런 자료도 없는 면벽의 한계상황이지만, 적어도 '기록'이라도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상고이유서를 썼다고 했다. 이 상고이유서는 판결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한 진보적 지식인의 사상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한 시대의 중요한 '문헌'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다. 리 선생은 상고이유서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나라의 어려움이, 과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의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그 욕구를 억제하는 것으로 이익을 삼는 사람들의 권력욕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장기적 안목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오늘에 앞서는 30년 간의 억압적 언론·출판정책의 '역사적 결과'입니다.

반공법의 근본적 운용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론'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역사·사회적 배경과 주·객관적 조건 변화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현실주의'적 요청입니다. 그 모든 희망을 충족할 수 있는 만능약은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많은 것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있습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리영희 교수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의해, 검찰의 기소장과 꼭 같은, 기소장과 글자 하나 가감하지 않은 '판결문'을 받는 희한한 일을 당했다. 수많은 지식인들의 방청과 관심 속에 온갖 이론이 등장한 10여 차례의 재판과정이었지만,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처사를 남겼다.

물론 앞뒤에 붙인 형식은 다르지만. 그리하여 리 교수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 백 교수는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아야 했다. 리 교수는 2심에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으로 경감되었고 상고심에서는 기각당했다.

나는 <우상과 이성>의 필화사건을 계기로 하여 아내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발행인 명의를 즉시 내 앞으로 바꾸어 버렸다. 책 내는 일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속 책은 낼 것이고 그러다 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 교수의 반공법 위반사건'은 NCC 및 교회와 사회위원회의 주최로 1979년 6월 4, 5일 성북구 상지회관에서 공식적인 토론의 주제가 되어 리 교수가 수감되어 있는 가운데 토론되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될 만했다.

"나의 이야기는 상식이 될 것이다"

리 교수는 결국 1980년 1월 9일 2년 징역형이 만기되어 광주교도소로부터 출감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 2월 29일자로 "사면법 제5조 1항 제2호 단서의 규정에 의거, 형의 언도의 효력을 상실케 하는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사면되었다.

1980년의 서울, 그 봄날에 펼쳐진 '자유의 물결' 속에서 나는 판금되었던 책의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 '작전'에 나섰다.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아니 모든 출판물은 계엄사의 '검열인'을 받아야 했다. 이윽고 1980년 3월 <우상과 이성>의 '수정증보판'이 나왔다. '증보판을 내면서'에서 리 교수는 그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제, 하늘을 덮었던 짙은 먹구름의 한 모서리가 뚫리고 희미하게나마 밝은 햇빛이 내려비치기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안, 입을 다물고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사회생활과 인간생활의 진실에 관해서 말이 들려오고 글도 눈에 뜨인다. 이런 날을 위해서, 나름대로 몸부림쳐 왔던 필자로서는 너무도 벅찬 감격에 할말을 잃을 뿐이다.

몇 해 전에 세상에 내놓은 <전환시대의 논리>도 그렇고 이 <우상과 이성>도 그렇지만, 나의 글들이 이 사회에서 하루속히, 읽힐 필요가 없는 '구문'(舊聞)이거나 '넋두리'가 되어 버리면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들 평론집에 수록되어 있는 글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또 새로운 독자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이 사회에 가면을 벗지 않은 많은 우상이 버티고 서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그러한 까닭에, 진정한 인간해방과 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바라는 필자로서는, 이 책이 극복되는 날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리고 "그 정도의 이야기는 상식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필자의 기쁨은 크다는 역리(逆理)를 믿는 것이다."

<우상과 이성>이 약간의 손질을 거치고 다른 원고를 추가하여 세상의 빛을 받고(1988년 7월에 <우상과 이성>은 제2개정판이 간행된다) 또 대학으로 '복직'되었지만, 10·26 이후의 신군부는 '5·17 광주내란음모가담' 뒤집어 씌워 다시 구속되었고 결국은 1984년까지 해직교수가 되었다.

물론 리 교수뿐 아니라 5·17로 한길사의 많은 필자들이 해직교수가 되든가 수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0·26 이전보다 더 많은 지식인들이 수난을 당했다는 사실은 5·17의 성격, 그리고 그 이후의 정치사회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시대의 한계상황을 훌쩍 뛰어넘는 사상과 이론

 
▲ 한길사에서 2005년 출간된 <대화>
ⓒ2007 한길사
한길사는 리영희 교수가 '80년대 해직교수시절'에 집필한 글들을 중심으로 1984년 10월 제3의 평론집인 <분단을 넘어서>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82권으로 펴냈다. 이해 9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 큰 홍수가 있었고, 북한으로부터 쌀·시멘트 등 '수해의연물자'가 막혔던 휴전선을 넘어서, 40년의 '분단을 넘어서' 남녘으로 운송되었다. 저자는 '독자에게 구하는 양해'라는 부제를 붙인 책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침 책의 편집작업이 끝나 필자의 머리말을 쓰려는 날 아침에 남쪽의 수재민을 위한 북쪽으로부터의 의연물자가 휴전선을 넘어서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해방과 분단의 40년, 휴전선이 생긴 지 30여 년 만에, 민족을 갈라놓은 굳은 장벽에 통로가 열린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작은 통로에 불과하지만 민족사적으로는 큰 의미를 지닌 돌파구이다.

돌이켜보면 1972년, 남·북의 지도자가 평화·자주·외세불간섭의 정신으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기약했었고, 최근에는 우리 사회 안에서 40년의 한 맺힌 이산가족의 대대적 재회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모두 이 겨레의 슬기를 세계만방에 과시한 민족적 쾌사였다. 이제부터 분단된 동포간의 장벽을 넘으려는 의지가 더욱 굳게 합쳐져야 할 것이다.

한 겨레는 갈라져서 살 수 없다. 안으로는 대립의 요소들을 해소하고, 밖으로는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조건들을 꾸준히 극복해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다른 누가 그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줄 것이며, 그 험난한 길을 대신 걸어 줄 것인가?"

이 민족분단의 진실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한 지식인으로서의 리영희 선생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지만, 때로는 그 현실의 한계상황 또는 고단함을 훌쩍 초월하는 정의와 진리의 협객같은 사나이였다. 그의 이론과 사상은 비수같이 동시대인들의 가슴과 머리에 각인되었다. '스스로 공부해서' 세계에 보편적인 이론과 사상을 창출해내는 참으로 '주체적이고' '토종적인' 넓이와 깊이였다.

한 동안 감옥에 가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복직되어 대학의 강단에 서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연행되고 수사받고, 때로는 권력에 의해 비판받았다. 시대를 호흡하는 풍운아의 기개였다. 그의 이론과 사상, 열정과 문제의식은 분단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의 것으로, 한 시대의 문제를 고뇌하는 양심적인 실천의 상징으로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존재가 되었다.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의 창간기념 방북 취재 '기획건'으로 안기부에 구속되었다가 160일 만에 석방되었다. 1998년에는 53년 전에 헤어진 형님과 둘째 누님의 생사확인을 위해 북한당국의 개별초청으로 방북했는데 두 분 다 별세했고 조카만 만났다.

1995년에는 한길사가 재정한 '단재상'을 수상했고, 1997년에는 '늦봄 통일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만해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6년에는 한국기자협회로부터 '제1회 기자의 혼 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자전적인 <대화>와 저작 전집 출간

나는 리영희 선생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낳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문화재'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한국적인 이론과 사상을 창출해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시대 이론과 사상의 인간문화재 리영희의 전모를 담아내는 출판기획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하나가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었다. 선생은 2000년 11월 집필 중에 뇌출혈로 우측 반신이 마비되어 글을 더 쓸 수 없게 되었다(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 나는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선생이 살아온 시대와 생애를 종합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문화재'와의 대담을 비디오로 모두 찍었다. 한 시대를 진동시키고 각성시킨 한 이론가와 사상가는 당연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46판 748쪽에 이르는 <대화>는 많은 매체와 기관으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우적인 비판'들이 으레 리영희 선생을 시도 때도 없이 '비이성적으로' 공격해대곤 했지만, 선생의 역사적인 삶과 사상, 그 이론과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독자들의 열띤 반향으로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선생은 <대화>에서 스스로의 삶의 자세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또 하나의 기획은 선생의 전집출판이었다. 선생이 남긴 글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가 창출해낸 탁월한 '문화유산'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한길사 창립30주년 기념기획의 일환으로 '리영희 저작집' 전12권을 작업하여 2006년 8월에 동시 간행했다. 강만길·고은·박석무·백낙청·이만열·이상희·이이화·임재경·최일남 선생이 간행위원으로, 김동춘·김주언·백영서·서중석·신학림·이삼성·임헌영·최영묵씨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선생의 전집은 사진작가 배병우 교수의 소나무 사진으로 커버를 장식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을 이 땅의 삶과 정신을 표상하는 늘 푸른 소나무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래, 배병우 교수의 아름답고 힘찬 소나무 사진이다!'는 생각이 나에게 떠올랐다. 역시 배병우 교수의 소나무로 표지를 꾸민 '리영희 저작집'은 이 시대를 진지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서가를 장식하는 살아 있는 아름다운 책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김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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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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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CNN의 유명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에서 마이클잭슨 생전의 생가였던 네버랜드를 촬영하는 찰라

순간 키커다란 유령의 형체가 지나가는 것이 카메라의 포착되었습니다.

당시 화면을 촬영한 CNN의 촬영기자는 "촬영 당시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떤 형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 유령의 장면은 너무도 선명하여 다른 어떠한 사후세계에 대한 의심을 일축시킬 만한 장면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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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 미제라블 - 노무현대통령이 가장 감동깊게 본 책
2. 백범일지 - 이것도 마찬가지로 감동깊게 본 책, 노무현이 존경하는 위인인 김구, MBC 느낌표에 추천한 책
3. 이순신의 난중일기
4. 칼의 노래 - 텔레비젼 상에서 대중에게 추천하는 책이라고 말씀하심.
5. 주식회사 장성군 -  얼마전에 공무원들에게 일독을 권했다던
6. 쾌도난마 한국경제
7. 유러피언 드림 - 제러미 리프킨 의 저서는 거의 다 좋아하셨다고 함. 이 책을 읽고 많은 걸 느끼셨다는..
8. 링컨 - 링컨 관련된 도서는 수집광이셨던 노태통령
9.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이 쓴 수작,
10.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11. 전환시대의 논리 - 리영희
12. 대화 - 리영희
13. 뿌리깊은 나무 - 한번 읽어봤던 소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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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며칠 전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백범일지’를 완독했다. 2주일 전쯤 한 지방 방송사의 TV 토론에서 “남북한이 모두 분열주의 세력”이란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는 “김구 선생도 같은 논리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는데 왜 노무현이 얘기하면 이상하다고 받아들이느냐”고 현장에서 답변한 뒤 백범일지를 다시 찾아 들었다.

그만큼 노 후보는 책을 손에 놓지 않는 스타일이다. 아들 건호(建昊)씨가 어렸을 때 속독법을 직접 가르쳐줄 정도다. 당내 경선과 대선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올해 들어서도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꾸준히 읽었다는 게 참모들의 얘기다. 한국의 국가비전을 상세하게 다룬 한국개발연구원의 ‘비전 2020보고서’와 서울대 윤영관(尹永寬) 교수의 ‘21세기한국 정치경제모델’이 관심있게 읽은 책이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노 후보 자택 거실에도 1000여권의 책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가 80년대 초 중반 시국 노동사건 변론을 하면서‘의식화’의 세례를 받았던 색바랜사회과학서적도 여전히 많다. 간간이‘게임이론’과 같은 경영학 서적도 눈에 띈다.

노 후보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사고를 지탱하는 세 가지 축으로 법률가로서의 논리적 사고, 인권변호사 시절 사회과학서적 탐독을 통한 ‘의식화’ 과정, 90년대 중반 이후의 원외정치인 시절 정보기술 분야에 빠져든 실용주의를 꼽는다.

특히 81년 부산지역 학생운동 조직사건인 부림(釜林)사건 변론을 맡아 이른바 ‘금서(禁書)’로 분류됐던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책을 읽고,운동권 청년들과 어울려 이념논쟁을 벌이면서 그는 재야변호사로 변신한다.

노 후보는 당시 읽었던 리영희 교수의 ‘베트남 전쟁’이나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 대해 “감동적인 책이었지만 사회주의에 찬동하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마도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87년 6월 항쟁 이후 그의 태도에는 실용주의적인 사고가 정착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정윤재(鄭允在)씨는 “노 후보는 87년 이후 우리들에게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나 ‘미래예측’ 같은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고 전했다.

그가 90년대 중반 이후의 원외 정치인 시절 정보기술 분야에 몰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차린 직후 당시 대기업에서 보기 드물었던 근거리통신망(LAN)을 사무실에 설치했고, 회원 관리를 위한 전산프로그램 개발에 나섰다가 인명 종합데이터프로그램인 ‘노하우2000’을 개발해 참모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2000년 4월 총선에서 낙선한 뒤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을 연구하는 데 골몰한다. 나아가 미국 역사 전반에 대한 탐구에 빠져들었고, 이를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란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5만부가넘게 팔렸다.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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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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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


1. 사건 개요

정권은 학생들의 반독재시위가 거세지자 기관원 및 프락치를 통한 학원사찰을 자행함.


2. 사건의 전개

84년 3월 29일에 연대에서 개최된 집회에서는 안기부 요원이 내외통신 기자를 사칭, 사진을 찍자 학생들이 이를 적발, 무전기와 신분증을 증거물로 압수했는데, 내외통신에 연락하여 그런 기자가 없음을 확인하였고, 이를 구출하러 온 또 한명의 안기부요원이 내외통신 기자를 사칭하고 기관원의 학내 출입에 항의하여 농성하는 200여명의 학생 앞에 나타나자 거짓 신분임을 다시 확인한 후 철야 농성을 풀고 이들을 귀가시킨 사건이 발생했음.


3. 시대적 배경

84년 한일외상회담 개최 및 전두환 대통령 방일, '대지'사건의 이정식의 거액 탈세, 대구에서 100억 부도쇼크, 이·장사건, 정래혁 부정축재 등 사건 속출하였는데, 전두환 정권은 2학기 개학 직전인 8월 21일 2학기부터는 정부당국이 시위학생에 대해 강력 처벌하겠다는 방침 발표하였으며, 29일 권이혁 문교부장관이 '과격학생'에 대한 학사징계 및 의법 처벌을 지시하는 등 저항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4. 사건내용

-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 창립대회 후 학원프락치 사건 발생.

- 1984년 9월 17일 제적과 강제징집으로 학교는 떠났다가 복학한 서울대생들은 9월 17일 교내에서 80여명의 회원과 50여명의 재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복학생협의회 창립 대회와 서울대출신 김상진, 김태훈, 한희철, 황정하 열사 추도식을 거행함. 이날 회의에서는 78학번 유시민이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회지 '전진'(격주간)의 창간호도 배포됨. 복학생들은 재학생들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학생회활동에 참가할 것임을 천명하고, 최근의 학원탄압에 대해 총장의 학자적 양심을 묻는 공개서한을 발송함.

- 이 과정에서 프락치사건이 발생하여 학원가 시위의 주요 쟁점이 되었는데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①임신현 사건(9.17∼18)

복학생협의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후 술자리에서 자신을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군에 강제징집되어 복학한 임신현'이라 소개. 학생들이 수상히 여겨 조사한 결과 가짜임이 밝혀지자 "나는 가짜학생이다. 복협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보려고 왔다"라고 말함. 9월 18일 오후 8시에 학생들이 폭행한 사실(특별한 상처를 입지 않았음)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고 가족에게 인계. 그러나 서울시경은 "학생들이 임신현을 감금한 채 철야심문하면서 기관원이라고 자백케 하고 구타했다"라고 발표.

②손형구 사건(9.21∼26)

손형구를 수상히 여긴 학생 2-3명이 신분을 확인하자 1학년 5반 손호관이라고 대답. 조사 결과 가짜로 판명되어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실로 데리고 가 소지품 등을 조사. 자백에 따르면 성당에서 약점이 잡혀 윤요한으로부터 정원재라는 사람을 소개받아 유인물 등을 훔쳐 주었다고 하면서 그 동한 프락치활동을 시인. 9월 22일에 학생들이 조사장소를 총학생회실로 옮겨 어머니와 통화한 결과 문교부와 학교 그리고 정보기관이라는 데서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음. 9월 2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서울대 가톨릭 학생회와 관련이 있는 외국인 사제인 모 예수 신부가 손형구의 신상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 그러나 경찰은 "학생 2-3명이 손형구를 학도호국단실에 감금한 채 무수히 구타하고 고문하여 '프락치 활동을 했다'라는 허위 자술서를 쓰게 했다"고 발표

③전기동 사건(9.26-27)

3월 30일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다시 발견되어 학생 7-8명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자 83년도 학생들을 제시. 그래서 학생들이 총학생회실로 동행. 소지품을 조사한 결과 서울대병원 직원수첩도 갖고 있었음. 또 묻지도 않았는데도 "나는 가짜 학생들을 이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소속은 관악서 전투 중대이고 자신은 부분대장이며, 분대장은 이석규 상경이라고 밝힘. 심문을 계속한 결과, 봉천동에 있는 봉남파출소 백 아무개라는 순경으로부터 프락치 제의를 받고 세 차례에 걸쳐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 필름과 유인물 등을 백 순경에게 넘겨주었다고 자백. 그런데 학생이 조사할 때에 의자에서 갑자기 속옷과 겉옷을 찢는 등 자해행위를 하기에 몇 차례 때림. 그리고 화장실에 가겠다고 해서 동행하여 갔는데 거기에서도 세면대에 머리를 박는 등 자해행위를 하고 실신한 것처럼 행위를 함. 다음날 빵과 우유를 주고 상처난 부위에 약을 발라주면서 폭력에 대해 사과를 하고 풀어줌. 그러나 경찰은 "조사과정에서 물고문 등으로 실신케 하여 입원하였다"라고 발표.

④정용범 사건(9.26-27)

학생회관에서 집회 때에 수상한 청년이 서성거리기에 학생 수명이 확인을 요청하자 친구(김현기)를 만나러 왔다고 말함. 확인결과 거짓임이 드러남. 그래서 학생들이 심문을 하였는데, 그 결과 "형 정용섭이 서울대에 가서 시위 학생수, 주동자 이름, 구호 등을 알아오라고 했다"라고 말하면서 형의 배후는 김영태라고 밝힘. 그러면서 9월 26일 김영태가 "학생회관에서 '손형구 프락치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이 있으니 가서 알라보라고 하였다"고 자백. 그러나 경찰은 "조사할 때에 꿇어앉히고 무수히 구타했으며 정보원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자 버스 정류장까지 안내해주었다"라고 발표.

- 이와 관련하여 9월 28일 문교부가 서울대·고려대에 계고장 송부하였으며 서울대 교수회의 1백 10명 징계 방침을 시달.

- 9월 28일 서울대생 350명, 학원프락치사건과 관련 민한당사에서 진상규명, 호국단 폐지, 언론기본법·집시법·노동법 개정 등을 요구하며 농성 진행

- 9월 29일 서울대총학생회는 정부당국의 학원사찰 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서 '소위 교내 민간인 불법감금 및 폭행 고발에 관한 총학생회장단의 입장'을 발표하고 교내에서 시위를 하였는데 이 사건 주동혐의로 유시민등 5명이 구속됨.

- 이와 관련하여 10월 4일 서울시경이 외부인 감금·폭행 혐의로 학생 1명을 구속하고 8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하였음.

- 10월 10일에는 프락치사건으로 징계된 학생회 간부들에 대한 징계철회를 요구했으나 대답이 없자 비상총회를 연후 교내에서 시위를 진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한편 복학생 24명이 프락치 사건을 규탄하며 관악경찰서에서 농성하자 전원을 연행하였다.

- 이후 서울대생들은 제적생의 복교를 주장하며 시험거부를 하였는데 결시율이 85.3%에 달하였다. 이에 경찰병력의 학내투입을 요청하여 경찰 6천 2백여명이 서울대에 투입하였으며 16명이 연행되었다. 10월 25일 서울대 총학생회와 민주화투쟁위원회 주최로 학생 2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위를 벌였는데 이 사건으로 학생 2백 39명이 연행되었다


5. 관련자

유시민(경제 4, 복학생협의회장, 징역 1년 6월), 백태웅(공법 4, 총학생회장, 징역 1년 6월), 윤호중(철학 4, 징역 1년 6월), 오재영(인류 4, 징역 2년), 신윤남(인문계 1년 복학생, 유치장에서 정신이상으로 국립정신병원으로 이감) 등 다수.


6. 사건성격

- 학원사찰 등이 밝혀짐으로써 학원자율화 조치의 허구성을 들어냄.

- 이 사건은 학원에 총학생회가 구성되고 현 정권에 대한 저항에 위기의식을 느낀 정권이 학원사찰 등을 실시하고, 이후 사건조작과 물리력을 동원해 저항의 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

- 사건 진행 과정에서 언론사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 해직, 그리고 교육계 정화로 언론기관과 교육기관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 좌지 되고 있음을 드러냄.

- 언론을 통해 학생들이 부도덕한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세력을 억압하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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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이유서


*1985년 최초 유통된 <항소이유서> 복사본에는 원문과 달리 여러 곳 글자나 문장이 빠진 곳이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에 떠 있는 <항소이유서>는 당시 복사본을 옮긴 것이라 마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벌써 18년이 넘게 지난 사건이지만 관련자들의 이름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자칫 그분들의 명예에 누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본 항소이유서’는 필자인 유시민이 직접 오탈자를 바로잡고 새삼 거론되기를 원하지 않을 관련자들의 이름과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하는 등 부작용을 없앤 후, 2003년 1월 18일 다음카페 ‘시민사랑’ 자료실에 올린 것입니다. 바로잡은 부분은 고딕으로 표시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면 △△동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아파트 11동 △△호

성 명 : 유 시 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애소(哀訴)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선전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 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 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 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정권,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 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 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이었으므로, 조사 결과 그들이 정보원이었다고 해서 폭행까지도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 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추행사건 때처럼) 잇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 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 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을 겸직한 사회대 학생회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 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 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행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범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 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 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 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정△△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손△△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 내에 경찰을 수백 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학원사찰을 계속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 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 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 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러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 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 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면서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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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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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부검결과, 신체는 엉망진창

UCLA 메디컬 센터로 옮겨지던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사진이 공개됐다.미국 연예정보 프로그램 사이트인 ET온라인이 단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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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현지시각) 미국 LA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사망 당시 ‘해골’이나 다름없는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영국 등 해외 언론에 따르면 그가 숨진 뒤 이뤄진 첫번째 부검 결과는 그가 말년을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차 부검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 언론이 취재한 부검결과에 따르면 그의 신체에는 살이 거의 없이 뼈만 앙상한 채 마른 상태였다. 어깨, 엉덩이, 팔뚝, 허벅지는 온통 주사바늘 자국이 덮혀 있는 등 몸 전체가 엉망진창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부검을 담당한 LA카운티 검시소는 잭슨이 거의 매일 마취성 진통제를 맞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심장 주변에서도 4개의 주사바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미 언론들은 아마도 심장 박동이 멎으면서 구급요원들이 아드레날린 주사를 직접 심장에 주입하려 했던 자국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3번의 주사바늘은 그의 심장 벽을 찌르는 등 오히려 심장에 상처만 낸 것으로 지적됐다.

또 그가 병원에 호송됐을 당시 그의 위 속에는 음식물이 전혀 없었다. 다만 성분이 밝혀지지 않은 알약만 가득했다고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마이클 잭슨의 다리에는 여러 군데의 멍자국이 있었고, 양 무릎과 정강이에는 멍이 발견됐다. 최근에 넘어지면서 다친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등에는 베인 자국도 발견됐다.

다급한 응급처치로 인해 갈비뼈가 부러져 있기도 했다. 코 성형에 사용된 브릿지(인공보조물)는 사라져 버렸으며 코의 우측이 부분적으로 주저 앉아 있었다.

그는 병원 호송 당시 이미 대부분의 머리칼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으며, 대신 가발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잭슨의 가족들이 제2의 부검을 요구한 것은 바로 그의 심장에 남아 있는 주사바늘 자국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심폐 소생술을 위해 주사를 놓은 것이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미 언론들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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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이 팝 역사에 남긴 `큰족적`

 

사진제공=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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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팝 스타 마이클 잭슨(50)이 25일 오후 12시께(현지시간) 급성심정지(caediac arrest)로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으나 결국 사망했다.

○ 마이클 잭슨의 데뷔

`팝의황제`(King of Pop)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마이클 잭슨이 남긴 기록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58년 8월29일 미국 인디애나주 게이리시 태생의 마이클 잭슨은 5살 때 잭슨파이브의 멤버로 데뷔한다.

마이클 잭슨이 팝 음악에 남긴 역사는 1969년 10월 싱글 `I want you back`을 발표하자마자 전미 차트 1위에 오르는 것으로 출발한다. 두 번째 싱글 `ABC`가 비틀즈 의 `Let It Be`와 경쟁해 차트 1위를 차지함은 물론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까지 연속으로 4곡이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며 마이클 잭슨은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4곡이 연속으로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은 그룹 역사상 처음이며 당시 마이클 잭슨은 흑인최초, 최연소 뮤지션으로 롤링스톤즈의 표지를 장식한다.

○ 마이클 잭슨의 춤

1974년 16세의 마이클 잭슨은 `소울트레인`에 출연 `Dancing Machin`을 부르며 브레이크 댄스를 지상파 방송에서 최초로 선보였다. 당시 마이클 잭슨가 보여준 모습은 단순히 `Dancing Machin`의 인기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브레이크 댄스라는 새로운 춤을 유행시켰다.

마이클 잭슨의 상징과도 같은 춤인 `문워크`는 1985년 모타운25 주년 콘서트( Motown 25: Yesterday, Today, Forever)를 통해 최초로 세상에 공개됐다. 달에서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까닭에 문워크(Moonwalk)라는 이름이 붙은 이 춤에 대해 뉴욕타임즈에서는 `문화적인 혁명`이라고 표현했으며 플레이빌은 `천재의 탄생`이라고 극찬을 했다. 또 이 춤을 보기 위해 방송사 음악채널들은 모타운 25주년의 방영권을 따고 방송사의 인종차별적 조항을 없애기에 이르렀다.

마이클 잭슨의 춤과 퍼포먼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화제가 됐는데 특히 1991년 발표된 `데인저러스`(Dangerous) 앨범과 이후 선보인 퍼포먼스들은 `퍼포먼스 리뷰`라는 개념을 만들게 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양복을 터는 장면을 비롯해 찰리채플린이 골프 치는 장면 등 200여가지가 넘는 영화의 장면들을 안무에 응용했다고 한다.

○ 마이클 잭슨과 뮤직비디오

마이클 잭슨은 80년대 MTV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최대 수혜자이기도 하다. 마이클 잭슨이 1983년 발표한 `스릴러`(Thriller) 앨범 수록곡 `비트 잇`(Beat it)의 뮤직비디오는 전면에 리드 싱어가 서고 그의 뒤에 댄스팀이 함께 출연하는 형태의 최초의 뮤직비디오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실제 갱단이 출연하기도 했다. 또 같은 앨범 수록곡이자 뮤직비디오의 고전 `스릴러`는 14분이라는 파격적인 런닝 타임에 한편의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케일, 다양한 특수효과 등으로 뮤직비디오 역사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 최초의 뮤직비디오 메이킹 필름인 `스릴러 뮤직비디오 메이킹 비디오`는 약 100만장이 팔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악 비디오가 됐다.

사진제공=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마이클 잭슨이 1987년 발표한 `배드`는 영화감독 마틴스코세즈의 당시로써는 충격적일만큼 놀라운 속도감과 비주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1년 발표한 `데인저러스` 앨범에서는 `블랙오어화이트`(Black or White)에서 당시 최첨단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었던 몰핑기법을 사용했다. 1997년 마이클 잭슨은 세계에서 가장 긴 뮤직비디오 `고스트`를 제작했다. 뮤직비디오에서 1인 5역을 연기한 `고스트`의 러닝타임은 38분이다.

○ 마이클 잭슨의 음반

마이클 잭슨은 솔로 뮤지션으로 Got to Be There(1972), Ben (1972), Music and Me (1973), Forever, Michael (1975), Off the Wall (1979), Thriller (1982), Bad (1987), Dangerous (1991), HIStory (1995), Invincible (2001)까지 총 10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총 10장의 앨범 총 판매집계는 약 7억 5천만장.

마이클 잭슨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은 1984년 발표한 ‘스릴러`(Thriller)다. `스릴러` 발매당시 당시기록 1억 400만장이 팔리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the biggest selling album)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으로 37주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87년 발표된 `배드`(Bad) 앨범은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Man In The Mirror`까지 총 5개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앨범은 예약판매만 225만장. 전세계 25개국에서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제공=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1991년 발표된 `데인저러스`(Dangerous) 앨범은 발매 후 6주만에 1천만장이 팔렸다. 앨범발매 당일 L.A. 공항에서는 무장강도가 `데인저러스` 앨범 3만장을 강탈하려는 사건도 발생했다.

마이클 잭슨이 발표한 2CD 베스트 앨범은 지금까지 발매된 모든 2CD 앨범 중 판매 5위를 기록했으며 1997년 발표된 `Blood on The Dance Floor` 리믹스 앨범은 리믹스 앨범으로서는 최대 판매량인 600만장이 팔렸다.

한편 마이클 잭슨의 아이들은 고스란히 잭슨의 빚만 물려받을까. 지난 3월 보도에 따르면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집필자인 이언 할퍼린에게 "자녀들을 위한 유산으로 미공개 곡을 남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5년 여 간 잭슨의 자서전을 집필해온 할퍼린은 "발표되지 않은 곡들의 수에 놀랐다. 잭슨은 그 노래들을 바로 발표하지 않고 나중에 유산으로 아이들을 위해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한 바 있다. 마이클 잭슨은 100곡 이상을 녹음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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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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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재정상태, 빚만 '2000억원'
‘팝의 황제’로 세상에 군림했던 고(故) 마이클 잭슨은 인생 말년에 아동 성추문 소송과 피부암 등 건강 악화로 인해 매우 불우하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했다.

잭슨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몇 달 동안 월세 10만 달러짜리 임대주택에서 세 자녀와 함께 거주해왔다. 한때 잭슨의 ‘꿈의 왕국’으로 불렸던 미국 산타바바라의 대저택인 ‘네버랜드’는 2003년~2005년까지 이어진 잭슨의 아동 성추문 소송 등으로 약 1억 파운드(2033여억 원)에 이르는 거대한 빚과 함께 경매 위기에 처했다가 부동산 투자회사가 인수하기도 했다. ‘네버랜드’는 잭슨이 한창 잘 나가가던 시절에 건물 유지에만 1년에 150명 일꾼과 1000만 달러가 소요됐던 곳이다.

2000억 원이 넘는 빚더미를 진 마이클 잭슨은 말년의 임대주택 월세를 사모펀드 회사로부터 대출을 받아 유지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출금은 앞으로 발매되는 새 음반 및 순회 공연 수입으로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빚을 갚고 재기하기 위해 잭슨은 미국 라스베가스에 ‘스릴러’(Thriller)라는 이름의 카지노를 열 계획이었다. 좀비를 주제로 한 이 카지노는 잭슨의 새 앨범과 출연 영화를 상영하고 박물관도 운영할 예정이었다.

또한. 10년 만의 컴백 콘서트도 준비 중이었다. 잭슨은 지난 2개월간 미국 LA 지역에서 다음 달 13일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컴백 콘서트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애초 50회 공연으로 예정됐던 잭슨의 컴백 콘서트는 리허설을 위한 시간 부족 등을 이유로 스케줄이 조정되면서 오는 7월과 2010년 3월에 나뉘어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잭슨은 25일(현지시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재기의 꿈을 접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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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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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미, 이순신 매력 세계에 소개” [중앙일보]

영어 다큐 제작 위해 한국 찾은 게이코 방 전 CNN 서울특파원
디스커버리 채널서 방영하는 한류 프로 ‘힙 코리아’ 만들어

게이코 방(44·사진). 일본계 미국인이다. 성이 방씨인 것은 남편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는 1990~92년 CNN방송의 서울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최근엔 한류 관련 프로그램인 ‘힙 코리아(Hip Korea: 신나는 한국)’를 만들어 다큐멘터리 전문 케이블방송인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젠 임진왜란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 왔다.

아직은 자료수집을 하고, 한국 관계자들과 협력을 모색하는 단계.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촬영지와 촬영 기법에 대한 아이디어로 가득했다. 임진왜란을 부르는 이름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영어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식대로 ‘임진왜란’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15년 동안 준비해왔다”며 “임진왜란에 대해 외국인이 영어로 만드는 첫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진왜란은 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전쟁 중 제2차 세계대전 다음으로 규모가 컸어요.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도 비중 있게 다룰 예정이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세계적으론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제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순신을 세계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출발은 순조롭다. 얼마 전 한국뿐 아니라 미국·프랑스·독일 등의 방송국과 방영 계약을 맺었다. 아이디어의 참신함만으로 일궈낸 성과다. 그는 다큐멘터리 제작의 키워드를 ‘신뢰’라고 했다.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재현하겠다는 의지도 다졌다.

“일본군은 일본인 배우를, 한국군은 한국인 배우를 기용할 거예요. 북한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북한에서 촬영을 할 계획도 잡아놓고 있고요. 예산 및 언어 소통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편리함을 위해 타협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전체 전투 장면을 촬영으로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애니메이션 기법도 활용할 생각이다.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 역시 중시하는 부분이다.

“한국만의 입장, 일본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전체의 객관적 사실과 역사적 중요성을 조명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저는 일본계지만 미국에서 자랐고, 한국인과 결혼한 만큼 객관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제작팀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꾸려갈 생각입니다.”

그는 일본인 아버지로부터 한국에 대한 사랑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주말마다 아침엔 항상 패티김 노래를 틀어놓곤 하셨어요. 그 소리에 잠이 깨곤 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84년엔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의 이화여대에서 여름학기를 수강하기도 했었어요. 그러다가 점점 한국 전문가가 됐지요.”

그는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부르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한국을 흥미로운 극단의 상황이 존재하는 재미있는 나라라고 했다.

“일단 임진왜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음, 계속해서 한국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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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보기 좋은 장면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정치인들이 앞으로도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상황에서 이명박같았으면 도도하게 앞만 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ㅎㅎ  농담이고요.

문국현과 노회찬 .. 야당에서 참 고생 많이 하는 두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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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난 딛고 입지전을 쓰다


ⓒ국민장장의위원회 판사직을 7개월 만에 그만둔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내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말이 달리는 모양처럼 생긴 바위산이 있다. 옛날에 봉화를 올렸다 하여, 이름이 봉화산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봉화산 아래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아들 건호군, 딸 정연양과 가족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순조롭게 넘어간 기억이 없었다. "어릴 때는 동그랗고 뽀얀 얼굴이어서 집안 사랑을 독차지했다"라고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주장하곤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진 한일자 주름, 푹 파인 볼이 신산했을 그의 성장기를 추측하게 했다. 훗날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처음 하게 된 대정부 질문에서 그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사는 세상이다"라고 말했다. 가난을 뼛속 깊이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노 전 대통령과 아들 건호군이 선산에 앉아 장난감총으로 장난을 치는 모습.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나이 서른에 이르러 입지전을 새로 썼다. 상고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딛고 1975년 늦깎이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아내 권양숙씨는 노 전 대통령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7개월간의 짧은 판사 생활 끝에 변호사로 전업한 그는 제법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전문 분야(조세)가 탄탄하고 승률도 제법 높았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그는 '개천에서 용 난' 세속적 성공 모델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변호사 생활 초기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은 취미 생활을 즐기고 개인 안위를 추구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

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국민장장의위원회 부산상고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노무현 전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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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만난 책, 노무현을 만난 책'

기사입력 2009-05-28 16:45 |최종수정 2009-05-28 17:11 기사원문보기


'사람사는 세상' 홈피에 공개돼 눈길

[노컷뉴스 김민수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책을 좋아하고 또 나누기를 좋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직설적 화법이나 논리정연한 화술은 때로 책에서 왔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서거 직전 까지도 직접 책을 쓰기 위해 집필중이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근까지 읽었던 책, 그리고 읽고자 했던 책들이 '사람사는 세상 봉하마을' 홈페이지에 올라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 '노무현이 만난 책, 노무현을 만난 책' 전문 -

노무현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대통령님이 얼마나 책을 가까이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방문객 인사를 마감했던 12월 이후 독서량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랜 시간 앉아있기 힘드셨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관심 분야는 더욱 넓어졌고 선택하는 책의 깊이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서거하기 1주일 전에도 여러 권의 책과 자료를 구해달라고 주문하셨습니다. 클린턴 집권 초기 개혁을 한국에 소개한 책들, 클린턴 정부 정책관련 자료, 과거에 읽었던 「디 브리핑」(이철희), 「신군주론」(딕 모리스), 「해밀턴 프로젝트」 등이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대통령님께 전해드렸고 나머지는 찾고 있던 중에 대통령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대통령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 가운데 어느 한 대목 가슴을 치지 않은 게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동안 책과 자료를 수집해 전달했던 사람들에겐 “책을 읽을 수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는 말씀이 그 어떤 구절보다 강한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언론의 무차별적인 손가락질 속에서 칩거 동안 유일하게 마음 편히 하실 수 있는 일이 책읽기였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그조차 할 수 없었다면 그 아픔과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까요.

이제 더 이상 대통령님은 책을 읽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훌륭한 책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제 가장 최근에 대통령님이 읽으셨던 책, 대통령님을 만날 기회를 가졌던 책들을 소개합니다. 오래오래 기억해 주십시오. 대통령님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책들입니다.

* 몬드라곤에서 배우자

- W.F. 화이트(1992)


봉하마을로 귀향하신 뒤 대통령님이 가장 애정을 쏟았던 일은 봉하마을을 생태마을로 가꾸는 일이었습니다. 생태농업으로 오리쌀을 재배하고, 화포천을 가꾸고, 봉화산을 가꾸고, 생태연못을 꾸미는 일련의 작업도 봉하마을을 생태마을로 가꾸고 싶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모든 주민이 공동체를 이루는 이상적인 생태마을의 조성에 관심을 갖다 보니 관련한 책들을 찾아 읽는 일도 많았습니다. 특히 관심을 가졌던 책은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와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었습니다.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스페인의 작은 도시인 몬드라곤을 조명한 책입니다. 몬드라곤은 노동자 생산협동조합을 통해 모든 것을 소유, 분배하며 대기업보다 빠르게 성장해 온 도시인데 이 책은 몬드라곤의 성장 비결과 경영체제, 조직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이 자주 꺼내 읽으신 책입니다.

*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작은나라 쿠바의 커다란 도전

- 요시다 타로 (안철환 옮김) (2004)


미국의 경제봉쇄로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돼 있던 쿠바의 아바나 시민들이 맨손으로 도시를 경작하여 220만 명의 자급을 이뤄낸 신화는 유명합니다. 이러한 생태도시 아바나가 탄생한 배경을 다루고 있는 책이 요시다 타로의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입니다. 대통령님은 봉하마을을 생태마을로 가꾸는 지혜를 이 책에서 배우고자 했습니다.

* 거의 모든 것의 역사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 빌 브라이슨 (이덕환 옮김) (2003)


대통령님의 관심은 법률과 정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 독서대를 발명했고 인명관련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을 정도로 과학 영역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과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역사와 현재를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이런 관심의 반영입니다. 대통령님은 수시로 인터넷 서점을 방문해 읽을 만한 책을 찾아보곤 하시는데 2003년에 나온 이 책도 그런 과정을 통해 구입해 읽으셨습니다.

*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Transforming Leadership

-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조중빈 옮김) (2006)


대통령님의 역사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습니다. 지난 겨울 읽으셨던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은 역사와 리더십에 대한 관심에서 대통령님이 고른 책입니다. <변혁의 정치 리더십 연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원시 아프리카 부족장과 중세유럽 절대군주, 미국의 여러 대통령들 사례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리더의 임무와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정동영 국회의원 등 현실 정치인의 추천도 대통령님의 눈길을 끈듯합니다.

*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 (2009)


대통령님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보내온 <후불제 민주주의>도 관심 있게 읽으셨습니다. <후불제 민주주의>는 대한민국 헌법을 유시민 장관 특유의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있는데, 저자와의 개인적 인연이 각별한 만큼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셨던 책입니다.

* 유엔미래보고서 - 미리 가본 2018년

- 박영숙, 제롬 글렌, 테드 고든 (2008)


재임 시절 비전2030을 제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대통령님은 우리 사회 미래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30년간의 보수시대가 저무는 징후가 나타나면서 미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유엔미래포럼이 매년 발간하는 <유엔미래보고서>도 그런 이유로 찾아 읽으셨습니다. 이 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변화에 대한 주요 예측과 더불어 기후변화, 물 부족, 인구와 자원, 빈부격차 등 지구촌 미래를 위협하는 15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에 대한 방대한 분석과 전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유러피언 드림 The European Dream

- 제레미 리프킨 (이원기 옮김) (2004)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은 폴 크루그만의 <미래를 말하다>와 함께 대통령님이 퇴임 뒤 가장 가까이 두고 읽었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책은 “개인의 자율성과 부의 축적이 핵심인 아메리칸 드림은 급변하는 미래 사회를 지탱할 수 없으며, 긴밀히 연결된 네트워크 세계에서 타인간의 관계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유러피언 드림이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비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통령님이 퇴임 후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권했던 책입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던 책이 바로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입니다.

*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

- 제레미 리프킨 (이희재 옮김) (2001)

* 수소혁명 - 석유 시대의 종말과 세계 경제의 미래

- 제레미 리프킨 (이진수 옮김) (2003)


유러피언 드림에 대한 대통령님의 호감은 저자 제레미 리프킨에 대한 호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러피언 드림>에서 나타난 리프킨의 시각이 어떻게 구체화됐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셨습니다. 이전 저작까지 정독하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소유의 종말>, <수소혁명-석유시대의 종말과 세계 경제의 미래> 등이 그러한 책들입니다.

리프킨의 책을 가까이 하셨던 것은 내용에 공감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학문의 영역을 넘나들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논지를 펼쳐가는 리프킨의 서술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으셨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정리하는 책을 한번 써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도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 슈퍼자본주의 Supercapitalism

- 로버트 라이시(형선호 옮김) (2008)


미국 클린턴 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도 대통령님이 자주 언급하셨던 책입니다. 라이시는 1970년대 이후로 모든 것들이 급격하게 변했으며 대기업들은 훨씬 더 경쟁적이고 지구적이고 혁신적이 되면서 소위 슈퍼자본주의가 탄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같은 변화의 과정에서, 소비자와 투자자인 우리의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으로서 능력은 퇴보했다고 지적합니다. 라이시는 이 책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려는 기업, 민주주의에 침투하려는 슈퍼자본주의를 경고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대통령님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더 플랜 The Plan

- 람 에마뉴엘, 브루스 리드 (안병진 옮김) (2008)


미국 민주당의 전략가인 람 메마뉴엘과 브루스 리드의 <더 플랜>은 미국의 변화를 위해 미국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젠다로 정리하고 이에 대한 정책적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대통령님은 재임 시절 읽었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와 이 책의 관점 차이를 말씀하시곤 했는데,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읽었던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 장하준 (이종태, 황해선 옮김)(2006)


지난 겨울 대통령님의 주된 관심사는 ‘국가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국가는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는 게 대통령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하여 관련 서적들을 주문하여 탐독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할>이었습니다.

* 시장인가, 정부인가?

- 김승욱, 김재익, 유원근, 조용래 (2004)


국가의 역할에 관심은 <시장인가, 정부인가?>라는 경제학의 오랜 논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통령님은 예전에 읽었던 여러 책을 다시 꺼내들어 자유주의 성립과 몰락, 케인즈주의의 등장,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고전적 자유주의가 부활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 한편, <시장인가, 정부인가?> 등의 국내 서적도 참고로 하여 ‘시장’을 바라보는 보수적 시각과 진보적 시각의 차이를 구명해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 사회정책의 제3의 길 - 한국형 사회투자정책의 모색 (2008)

- 김혜원, 양재진, 이종태, 정형선 (2008)


<사회정책의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의 발전모델이나 전통적 복지국가 모델이 아닌 새로운 사회투자정책을 모색하는 책입니다. 대통령님은 <시장인가, 정부인가?>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 제 3의 길 (The)Third way

- 앤서니 기든스 (한상진 옮김) (2001)


보수, 진보에 대한 관심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케인즈주의를 대체하여 경제학을 지배하게 된 근본 배경 탐구로 이어졌습니다. 1980년을 전후하여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보수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보가 실패했기 때문인가 대응을 잘못했기 때문인가?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던 노무현대통령은 유럽 사민주의 진영의 제3의 길 또는 신중도노선을 전면으로 재검토해 보기로 합니다. 가장 먼저 꺼내 든 책이 앤서니 기든스의 <제 3의 길>이었습니다.

* 노동의 미래 Where Now for New Labour

- 앤서니 기든스 (신광영 옮김) (2002)

*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Over to You, Mr. Brown

- 앤서니 기든스 (김연각 옮김) (2007)


대통령님은 <제3의 길>을 시작으로 기든스의 <노동의 미래>, <이제 당신차례요, Mr. 브라운> 등을 순서대로 다시 읽으셨습니다. 이미 읽으신 책을 다시 찾아 읽으신 이유는 토니 블레어로 대표되는 유럽 진보진영의 리더들이 제3의 길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탐구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이러한 지적 호기심의 배경에는 진보진영에게 ‘제3의 길 이외 선택은 없었던가?’라는 의문이 자리잡고 있던 듯합니다. 최근까지도 대통령님은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종류의 책을 주문하셨기 때문입니다.

* 생각의 오류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 토머스 키다 (박윤정 옮김) (2006)


최근 대통령님은 사람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하게 되는 심리적 배경에 대해 궁금해 하셨습니다. 또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으려 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셨습니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 하던 중 추천 받은 책 가운데 하나가 <생각의 오류>였습니다.

이 책은 누구나 구조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생각의 오류’를 6가지 유형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으려고 하는데 “통계수치보다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더 솔깃해한다”, “내 생각에 의문을 품기보다 확신하려 든다”, “세상에는 운과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있음을 간과한다”, “인간의 기억은 이따금 부정확하다” 등이 이러한 생각의 오류를 낳는 이유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Opening Skinner's Box

- 로렌 슬레이터(조증열 옮김) (2004)


이 책도 심리학에 대한 대통령님의 관심에서 선택된 것입니다. 20세기 심리학이 인간 행동을 관찰한 끝에 던진 질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복종의 문제, 사랑의 본질, 군중 심리와 방관자 효과, 기억의 메커니즘 등 인간 심리와 관련된 핵심 주제를 파헤치는 실험을 통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예리하고 중요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디케의 눈

- 금태섭 (2008)


법률가로서 대통령님의 관심을 반영하는 책입니다. 18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일반 국민을 비롯하여 약자와 소수를 위한 법체계가 진정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출처=사람사는 세상 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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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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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 프로필
⇒ 노 무 현(盧 武 鉉)
⇒ 생년월일 : 1946년 8월 6일(음력)
⇒ 주민번호 : 460806-********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1가 22 현대하이츠빌라 302호
⇒ 본관 : 광주 노씨
⇒ 본적 :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658번지
⇒ 혈액형 : O형
⇒ 신장, 체중 : 168cm/68kg
⇒ 군복무 : 육군 상병 만기제대(을지부대)

● 주요학력
1959년 경남김해 진영 대창초등학교 졸업
1963년 경남김해 진영중학교 졸업
1966년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53회)

1998년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
1999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

● 약력
1946년 경상남도 진영에서 출생
1959년 경남 김해 진영 대창초등학교 졸업
1963년 경남 김해 진영중학교 졸업
1966년 부산 상고 졸업(53회)
1968년 육군 입대
1971년 육군 상병 만기제대(을지부대)
1973년 권양숙 여사와 결혼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 합격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1978년 변호사 개업(現, 법무법인 부산)
1981년 부림사건 변론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 시작
1984년 부산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6월민주항쟁 주도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통일민주당, 부산 동구)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청문회 스타'로 각광
1989년 국회 노동위원회(간사) 활동
1990년 민자당이 탄생하게 된 3당 합당 거부, 민주당 창당에 나섬,
민자당의 방송관계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 김정길, 이철, 이해찬 의원 등과 함께 의원직 사퇴서 제출(7월)
1991년 신민, 민주 야권통합 주도(통합협상 대표),
통합민주당 대변인
1992년 제14대 총선 출마(민주당, 부산동구), 낙선
조선일보 왜곡보도 관련 소송에서 승소
제14대 대통령선거 청년특위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 지방자치실무연구소 개소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출마
1996년 제15대 총선 출마(민주당, 서울 종로), 낙선, 통추회의 활동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수도권 특별유세단(파랑새유세단)단장
SBS 라디오 뉴스대행진 진행자
1998년 15대 종로구 보궐선거 출마, 당선(새정치국민회의)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
1999년 종로구 지역구 포기와 부산출마 결단, 동남특위위원장
2000년 제16대 총선 출마(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지구당위원장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2000년 8월 - 2001년 3월)
2001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최고위원, 부산후원회에서 대권 도전 선언
대우자동차 서포터 광고모델(154,451번째 서포터)
2002년 국민경선을 통해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됨(4월)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 후보단일화(11월)


● 가족관계
노판석(盧判石) : 부, (76년 별세)
이순례(李順禮) : 모, 1904년생(98년 별세)
권양숙(權良淑) : 배우자, 1947년생
경남 김해 대창초등학교, 부산 혜화여중,
부산 계성여상(3년 중퇴)
노건호(盧建昊) : 장남, 1973년생
연세대 법대 졸(2002.8),
병장 제대(93/3/16~95/5/18 이기자 부대)
LG 전자 근무
노정연(盧靜姸) : 장녀, 1975년생
홍익대 역사학과 졸(2000.2),
현 주한 영국대사관 근무
노명자(盧明子) : 누나, 주부, 부산 거주
노영현(盧英鉉) : 형, (사망)
노영옥(盧英玉) : 누나, 주부, 경남 김해 거주
노건평(盧建平) : 차형, 1942년생, 농업
권오석(權五石) : 장인 (별세)
박덕남(朴德南) : 장모, 1920년생
권창좌(權昌左) : 처형, 1945년생
권진애(權珍愛) : 처제, 1950년생
권기문(權奇文) : 처남, 1954년생


● 기타 사항
⇒ 좌우명 : 자신에겐 엄하고 타인에겐 너그럽게
⇒ 홈페이지 주소 : www.knowhow.or.kr
⇒ e-mail : mhroh@knowhow.or.kr
⇒ 취미 : 독서
⇒ 흡연 : 지난해 9월 금연했다가 최근 다시 흡연
⇒ 주량 : 소주 반병, 맥주 1병 반 (폭탄주는 싫어함)
⇒ 기호음식 : 삼계탕(맑고 담백한 음식을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잘 먹는다)
⇒ 재산 신고액(현재 2002.11.26 기준) : 2억6천263만3천원
⇒ 자택 평수 : 65평
⇒ 소득세 : 2,689,000원(2000년) / 1,700,000원(2001년) / 72,000원(2002년 현재)
3년 합계 : 4,461,000원
⇒ 국민연금 : 290,700원
⇒ 건강보험 : 136,120원
⇒ 월급 : 500만원(부산 법무법인)
⇒ 애창곡 : 작은 연인들, 부산갈매기, 상록수
⇒ 외국어 능력: 영어(中)
⇒ 좋아하는 책 : 링컨 전기, 클린턴의 '희망과 역사사이'
⇒ 감명받은 책 : 레미제라블, 백범일지
⇒ 존경하는 인물 : 링컨, 김구
⇒ 좋아하는 스포츠 : 등산, 볼링
⇒ 골프 경력 및 핸디 : 구력 3년, 핸디 20정도
⇒ 평소하는 운동 : 요가(하루 30분 정도)
⇒ 수면시간 : 6시간
⇒ 스트레스 해소법 : 주로 잠을 잔다
⇒ 기억에 남는 영화 : 라이언의 딸(Ryan's daughter), 엘 시드, 닥터 지바고, 인디아나 존스, 오아시스
⇒ 좋아하는 연예인 : 남자 - 한석규, 문성근, 차인표
여자 - 노사연, 이경실
⇒ 종교 : 없음(천주교 영세는 받음, 세례명 : 유스토)
⇒ 별명 : 노짱(노사모 회원들이 부르는 별명), 노천재, 돌콩(어릴적 별명),
노변(부산인권 변호사 시절)
⇒ 즐겨 입는 옷 색깔 : 감색
⇒ 어려울 때 의논상대 : 아내
⇒ 인터넷 : 매일 자주 함
⇒ 특허 : 개량독서대(75년, 공고번호 75-466, 허리를 굽히지 않도록 높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든 독서대)
⇒ 개발 컴퓨터 프로그램 : 노하우 2000 (인명 종합 데이터 프로그램)(1994)
⇒ 저서 : 여보 나 좀 도와줘(1994),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공저, 2002), 노무현의 리더십이야기(2002)
⇒ 자격증 : 주산 2급, 부기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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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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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음반 열풍, 지속 가능한 이유는?
입력 : 2009-03-10 14:50:07
▲ 가수 서태지



[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가수 서태지가 다시 한번 음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서태지 8집 두번째 싱글 ‘아토모스 파트 시크릿’이 발매된 10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 점 앞은 음반을 사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모여든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가운데는 밤을 새서 기다린 팬들도 있었다. 교보문고 내 핫트랙스 매장 출구인 광화문 역사는 음반 매장 개장 한 시간 전부터 200여 명이 넘는 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10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긴 행렬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풍경은 서태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지난해 서태지가 4년 만에 8집 첫 싱글 ‘모아이’를 발매한 날도 그랬고, 서태지의 새 음반이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같은 풍경이 되풀이되어 왔다. 이같은 일은 이제 서태지 음반 발매일을 기념하는 통과 의례로도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올해에는 그 의미가 여러모로 남다르다. 시장 자체가 음반에서 디지털 음원시장으로 개편된지 오래이고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아닌 가요계 전체가 음반 불황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 서태지 새 음반을 사고 흐뭇해하는 팬들

 
그렇다면 왜 유독 서태지만이 음반시장 불황의 여파를 피해갈 수 있었던 걸까.
 
서태지는 지난 2007년 음반시장이 음원시장의 6분의 1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지난 해 발매한 싱글 ‘모아이’로 2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물론 1990년대만 해도 ‘100만장’ 가수였던 가수 서태지의 명성에는 현격히 못미치는 수치다. 하지만 2007년 이후 ‘10만장’ 돌파가 음반 대박 기준으로 바뀐 현실에서는 평가가 달라야 한다. 이번 싱글 또한 선주문만 ‘10만장’을 기록했고 새 싱글 발매 당일 서울 광화문 교보 핫트랙스의 경우는 두 시간 만에 10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서태지의 음반을 사갔다.

서태지가 이처럼 음반 판매에서 강세를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데뷔 16년간 확실히 다져온 팬층이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음원 시대에 음반을 구매한다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일종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가 됐다. CD를 산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앨범 재킷에 담긴 디자인과 글 등을 보며 해당 가수의 모든 것을 즐기는 행위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간편하게 음원으로 들을 수 있음에도 음반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가수의 음악에 대한 신뢰와 충성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해 음반 판매 ‘50만장’을 돌파한 동방신기도, 별다른 음악 활동 없이 ‘10만장’을 돌파한 김동률도 그들의 음악을 지지하는 확고한 팬층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음반판매가 가능했다. 적극적인 팬덤으로 유명한 서태지의 팬들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날 교보문고 광화문점 핫트랙스 매장에서 만난 한 여대생은 “서태지의 음악을 가장 먼저 그리고 음원 조각이 아닌 CD라는 완전체로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여대생은 음반 발매 하루 전인 9일 밤부터 서태지의 새 싱글을 사기 위해 매장 앞을 지켰다.

가요계 한 관계자는 “밤새 줄을 서며 음반을 사는 풍경은 서태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고 말할 정도로 서태지 팬들의 충성도를 높게 샀다. 

서태지만의 신곡 유통 과정도 팬들의 음반 판매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서태지는 대부분의 가수들이 음반 발매에 앞서 온라인으로 음원 선공개를 하는 것과 달리 ‘선음반 발매, 후음원 공개’ 방식을 고집해왔다. 이번 새 싱글의 경우도 음원은 음반 발매 후인 오후부터 인터넷에 공개된다. 한시라도 빨리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싶은 팬들은 그래서 직접 발품을 팔아 음반 매장에서 CD를 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음반 발매시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축제를 벌이고 있는 서태지와 팬들. 이들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음악적 유대감을 형성해가며 축제 분위기를 이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 서태지 음반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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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2집 발매를 앞둔 가수 서태지가 '암호 마케팅'으로 팬들의 관심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다.

서태지는 8집 두번째 싱글 발매를 앞두고 23일 ‘미싱 태지’(Missing Taiji)란 의문의 사이트를 오픈했다. 이 사이트는 기존 공식 홈페이지인 ‘서태지닷컴’의 메인페이지 화면 중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원에 그려진 블랙홀을 클릭하면 접속할 수 있다. 서태지 컴퍼니측에 따르면 이 사이트 안에는 이번 새 싱글에 대한 정보, 발매일 등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담겨있다.

그러나 해당 사이트에서 8집 싱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험난한 여정을 넘어야 한다. 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해선 암호를 알아내야 하고 해당 정보를 얻기까지 몇 단계의 퀴즈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연이은 퀴즈를 풀어야만 새 음반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서태지컴퍼니 측의 설명이다.

서태지의 이 같은 미스터리 음반 마케팅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7년 15주년 기념 음반 발매 당시 벌인 프로모션에서도 새 음반 관련 암호 마케팅을 펼친 바 있다. 당시 음반 발매 전 자신의 개인 서버를 해킹하는 방식의 게임을 만들어 3단계로 제시한 퀴즈를 풀면 자신의 개인 자료를  다운받아 볼 수 있게 하는 이벤트로 화제를 모았다. 또 이 사이트를 통해 팬들이 퍼즐 형태의 지도를 획득하면 이를 조합해 코엑스 내 서태지 15주년 기념관 위치를 알 수 있게 하고 오픈 당일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같은 서태지의 신비주의 마케팅에 대한 네티즌 평가는 엇갈린다. 서태지 마니아들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에 흥미를 표시하고 있다. 한 네티즌은 "항상 팬과 함께하는 이벤트를 마련해 즐겁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또다른 네티즌은 "음악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 음반 홍보를 하는게 좋아보이지는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반응에 서태지컴퍼니 측은 이런 미스터리 마케팅을 "서태지가 음악관련 메시지로 팬들과 게임을 하듯 유기적으로 즐기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전했다.

폭발적인 네티즌의 반응 속에 서태지는 이번 이벤트를 통해 두번째 싱글 앨범 발매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그는 이어서 오는 3월 14일과 15일에는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웜홀'(WORMHOLE)'이라는 타이틀로 두번째 싱글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연다.


ㆍ그 시작은 ‘WORMHOLE(웜홀)’ 콘서트


 미스터리한 ‘실종 이벤트’로 싱글 2집 활동을 시작한 가수 서태지가 8집 두번째 싱글 발매 기념공연을 연다.

 서태지의 8집 두번째 활동은 내달 14·15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개최될 ‘WORMHOLE(웜홀)’ 공연을 필두로 시작된다. ‘벌레구멍’으로 통칭되는 ‘웜홀’은 벌레가 사과의 한쪽 면에서 다른 면으로 이동할 때 표면을 기어가는 것보다 사과를 파먹으며 관통하는 것이 빠르다는 사실에서 만들어진 용어로 일반적으로 우주의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로 알려져 있다.

 서태지는 공연을 열기에 앞서 티저사이트를 열고 팬과의 본격적인 두뇌싸움을 시작한다. 서태지의 홈페이지를 통해 입장이 가능한 티저사이트는 여러 단서를 갖고 사이트를 열 수 있는 키워드를 찾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를 다 맞출 경우 서태지 8집 두번째 싱글의 발매 일정과 타이틀곡, 싱글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미 ‘미씽태지’ 포스터를 통해 공개적으로 대중에게 ‘실종’을 알린 서태지가 티저이벤트와 컴백공연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해 또 하나의 메시지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서태지컴퍼니 측은 “두번째 싱글음반의 ‘실종 이벤트’를 통해 음악 팬들은 인류의 기원과 문명의 진화, 경고의 메시지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웜홀’ 공연의 예매는 25일 오후 8시 예매사이트 옥션을 통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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