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낸 한 시민의 말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불과 몇 달 만에 우리는 두 민주개혁 정권의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묻습니다. 포스트 김대중, 포스트 노무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기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혹 남겼을지도 모를 유언을 찾기 위해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 매일 기록했다는, 한자로 쓰인 '김대중 메모'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그곳에 유언이 남겨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언'(遺言)이 무엇인가요? 죽음에 이르러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이미 분명하게 유언을 몇 차례 남기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제가 지난 6월 27일 그분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동교동 자택에서 약 한 시간 동안 단행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대한 추천사를 구술받기 위해 뵀을 때입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몸도 이렇고…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세요.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85세. 천수를 다 사셨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조금 더 사셔서 큰일을 더 할 수 있었는데 우리와 이렇게 작별했기 때문입니다. 국내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가 된 그 자리에서 제가 느낀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구나, 한 번 병원에 가게 되면 쉽게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오시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는 불규칙했습니다. 인터뷰 중간에 우리에게 수박을 내주시면서 함께 드실 때에도 손이 떨렸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전까지는 식사도 잘하시고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는데 그 후에 왜 그렇게 갑자기 기력이 떨어졌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인터뷰 자리에서 저는 그것이 일종의 화병이구나 싶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꿈만 같다"고 했습니다.
그 화병은 자신의 내부를 다스리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국민이 불쌍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왜 계속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이로 보나 현재 내가 정치권 외에 있다는 것으로 보나, 한마디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바람직하진 않는데, 한마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불쌍해서 안 할 수 없어서 합니다. 국민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국민이 불쌍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렇게 "국민이 불쌍"하게 된 상황에 대해 "분하다, 참으로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주에서 얼마나 죽었고 박종철, 이한열 학생들하고 또 얼마나 죽었습니까. 그런 사람들 죽은 일 생각하면, 그래가지고 50년 만에 겨우 민주주의를 이뤄서 이제 좀 그런 일이 없겠다 하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어요.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고, 꿈 같애. 꿈 같애."
그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후배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제 그것은 유언이 되었습니다.
"내가 몸도 이렇고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 아니냐. 그런 얘기를 간혹 하는데,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세요. 내가 자랑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 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제가 덧붙여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맙시다. 나는 몸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도 요즘 내 몸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기 바랍니다,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살아남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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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자랑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 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
ⓒ 안홍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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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마지막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상당히 허전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다음 대선 때 민주 정권을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려면 국민 사랑받는 정치인들이 하나 둘 커가야 할 텐데. 정치인들이 사랑받는 거목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생각해야 돼요. 행동하는 양심은 손해를 볼 때가 많아요. 그 손해를 보면서 행동할 때 국민들이 알아준단 말이에요. 국민은 바보가 아니에요. 속지 않아요. 가령 내가 사형선고 받은 뒤 '살려줄테니 우리하고 협력하자'고 했을 때, 내가 '나라를 위해 협력하고 국가 안전을 위해' 뭐 이런 식으로 했다면 국민들이 나를 대통령 시킬 사람으로 생각했겠어요? 국민에게 지지받고 싶으면 자기 양심이 하라는 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때 그 말씀은 비단 정치계의 거목으로 성장하고픈 정치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양심이 하라는 대로 해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바르게 살았다면 그것만은 무덤에 갈 때도 자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태도를 갖고 살았다'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에요. 그게 성공이고, 나쁜 일 하면 출세는 하겠지만 죽을 때는 '내가 이 나쁜 짓도 하고 저 나쁜 짓도 했는데' 하면서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 아니에요. 또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도 될 것이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산다는 것은 "일생동안 실천해야 하는 것이어서 참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대중의 눈높이를 생각하는 그답게 일반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행동하는 양심'을 예로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은 꼭 모험을 하면서, 감옥 가면서, 고문당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하면 됩니다. 투표부터 잘하세요."
그 무거운 짐, 우리가 나눠 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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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동하는 양심은 꼭 모험을 하면서, 감옥 가면서, 고문당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투표부터 잘하세요." |
ⓒ 안홍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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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기의 양심이 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 인생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육신은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졌는데 그가 짊어진 짐은 젊었을 때의 무게 그대로였습니다.
그보다 젊으면서도 그보다 더 가벼운 짐을 지고 있었던 저는 그의 죽음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함)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달라."
"후배 여러분, 뒷일을 부탁합니다".
오마이TV가 녹화한 그 말씀 다시 보는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인터뷰 중간에 내주셨던 수박 참 맛있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당신께서 주신 수박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텐데, 어떡하지요?
마지막까지 당신께서 지셨던 그 짐 우리 모두가 나눠 지겠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짐 내려놓고 이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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