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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귀한 사진이네요.


^^


과거 노무현대통령과 문재인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사무실, 빌딩의 골목 모습입니다. 


간판이 모두 통일되어 있는것이 신기하고, 


변호사 노무현의 간판이 가장 번쩍 빛나보이는거 보아서 가장 늦게 개업하신거 같습니다. 


남경복국집 간판도 보이는데요.


복어국 먹고싶네요.


오호 90년도 1월 24일 사진이네요.




모든 것은 근간과 행동 생각에서 부터 출발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 고생만 하시다가 가시는 분들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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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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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5일 원선영 대청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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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때 염수정 추기경의 눈빛

 

염수정 추기경은 솔직히 민중의 편이기보다는 정권의 편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그가 선출되기를 힘을 썼을것이다.

 

그는 사회의 부조리, 국가의 탄압, 독재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천주교인이다.

 

양심, 정의보다는

 

무서운 권력, 돈맛을 아는 분 같다.

 

최근 국가의 참 많은 악재에도 그는 메세지가 없다.

 

정권의 미운털이 아니고 착한털이 되고싶은것이다.

 

 

 

이상호 기자가

 

마음이 아픈게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이 되고자 했던 이상호

그에게, 마음에 담고만 있어라!

즉, 세월호때 나온 가만히 있어라!!

 

그 무서운말 "가만히 있어라" 의 편인 한국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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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7분과 비교되는

 

박근혜의 7시간

 

 

 

 

 

아직도 이 7시간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일본기자가 조선호텔에서 7시간동안,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랑 있었다는 기사만 나왔고,

 

그 기사로 그 일본기자는 고발 당하기만 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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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 역사의 장면들

어찌 잊으랴~~

 

불쌍한 피해자들의 부모를 이렇게 뭉개고 있는 한국의 공권력!

공권력은 이렇게 국민을 멸시하는 용으로 사용된다.

 

안경쓴 인간의 면상은 곧 나타나게 된다는데.....

 

 

 

 

 

 

 

 

 

에혀~ 어버이연합

 

국가가 키우는 악마들!!

 

노인이 되어서 이러한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나라가 개똥이네...

 

세월호침몰사건 이후 펼쳐진 만행이 더 악랄했던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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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와대의 자리값도 못하는 사람이 들어서면

 

이렇게 하늘에서 번개가 그리로 내리친다.

 

청와대로 내리친 번개

 

하늘도 노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대망신인  이명박은 반드시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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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조선시대까지 조용했던 이황이

갑자기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영웅미화화 되어졌다.

한사람의 독재가 여러사람들의 세뇌적 우상이 되어지는 사례이다.

 

 

현재 이황은 이황연구회까지 만들어서, 만인들이 그를 우러러 보도록 하였다.

 

 

 

알차고 재미있게 본 한국사인물통찰

 


한국사 인물통찰

저자
김종성 지음
출판사
역사의아침 | 2010-02-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한국사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와 인간의 내면적 본질을 간파하는 ...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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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대통령 이명박과 고졸대통령 노무현의 대한민국 경제 성적표.

 

대통령 임기 5년동안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것일까?

 

정말 국가를 한탕해먹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인가?

아니면, 백년대계를 위해 탄탄한 기초를 위한 시간으로 활용했는가?

 

 

성적표는 해당 첨부화일을 다운받아 비교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노무현경제성적표’ VS.‘이명박경제성적표’ 실증적 大비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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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이황이 뜬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가, 순식간에 영웅으로 미화된 사유는?

 

 

 

- 한국사 인물통찰 책에서 cut -

 

역사 속에서 이황의 위치는 나라를 그르친 사대부 맹신가일뿐이다.

그의 사상을 공부하다가는 그릇된 맹신가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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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9일

세월호 대학살사건이 터지기직전!

국정원의 선거개입사건, 국정원의 불법정치댓글 개입사건 등으로 온 도시와 사회는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때에도 이렇게 시국미사와 촛불집회가 연일 도시마다 개최되고 있었다.

그 집회에 한번이라도 참석을 하신 분들은 다 기억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국가기관의 선거와 정치개입사건은 확실한 불법이였다.

 

보수의 대표주자였던 표창원도, 이러한 부정과 불의에는 타협할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거리로 나가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국민들과 함께 싸울수 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양심이다. 그 옆에는 용암동 안치용카프로에 사장님!

 

나도 한컷~  살아있는 양심맨 표창원하고 찍은 사진 영광이다!

실물은 확실히 뽀얗고 친근감있는 얼굴이셨다.

 

엄청난 연설을 멋드러지게 토해낸 민변의 박주민 변호사!

항상 힘들고 어렵고 소외된 곳을 찾아다니면서 변호인을 자처하는 박주민변호사는 시민들의 자랑스러운 얼굴이다.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

저자
구영식, 김준현, 류제성, 박주민, 이재정 지음
출판사
스토리플래너 | 2012-10-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MB공화국 5년, 표현의 자유를말한다 사건별 전담 변호사의 생생...
가격비교

 

 

이윽고 시작된 표창원님의 연설!!

 

참 말씀 논리적으로 섬세하게 잘 하십니다.

 

 

 

 

 

 

 

연설을 듣고, 촛불을 들고, 함성을.... 소리를 질렀습니다.

 

박근혜 OUT!

 

잠시남아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저 먼 미래의 시대로 온거 같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후!!

" 어찌 그 시절 그리 멍충한 시대를 살았을까요? " 하면서 말입니다.

 

그때는 지금의 이 희생과 시민들의 고생을 아무도 몰라주겠지요?

 

 

집회가 끝난후 근처 애술가에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장고 하나로 술맛을 일캐워주는 창도 들었습니다.

 

그날 하루를 그렇게 풀었습니다.

 

일과를..

 

현실을..

 

생각을..

 

슬픔을..

 

 

 

 

 

 

 

 

 

 

 

 

그리고,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엄청난 부정이 들킨 시기에 절묘하게 말입니다.

 

 

 국가기관이 대통령선거에 조직적으로 관여하고 개입한 것을

세월호 배한척 뒤로 묻혀야만 했습니다.

절묘하게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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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844회 신호수사건

 

 

 

어느날 여수 앞바다 바위절벽에 동네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다는 바위절벽에 숨겨져있는 동굴속에서 발견된 시체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왜 그 험한 바위절벽에서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을 한 것일까?

 

자살하는 사람이 깜깜하고 어두운 곳에 찾아와 스스로 홀딱벗고 팬티만 입고 자살을 할까?

 

그가 자살하기전에 그는 어떠한 행적과 누구를 만났는가?

 

그것이 알고싶다. 레전드편중에 하나! 동굴속에 시체이야기

 

단순한 인간의 죽음이상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본다.

 

거짓속에 숨겨진 진실! 그것을 우리는 스스로 눈을 감으며 함께 거짓으로 덮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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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놈들의 역사왜곡을 크게 호통치지도 못하고, 시키지도 않아도 알아서 자연스럽게 고스란히 그것 이상으로 추종하는 보수우익놈들 참 비통하다.

역사를 왜곡하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폐간하고, 뉴라이트 친일모임을 이 땅위에서 분쇄시켜야 한다.

이명박과 박근혜도 뉴라이트 회원들이다. 썪어 문드러질 이상한 민족.

 

한민족의 한과 정기로 인해 머지않아 그런 년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김무성이나 새누리 친일파들의 선조가 일제침략시대 때문에 일약 부자가 되어 지금 상위1%가 되어진 케이스인데,

이 나라에서 그러한 친일매국세력을 좋다고 표주고, 지지하는 사람들, 그들을 국회의원 만들어주는 놈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이 나라가 암울하기만 하다.

 

지역주의갈등이 친일,매국,망국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당신의 하나뿐인 할머니, 눈물만 나는 어머니, 소중한 딸이라고 생각하고 보아라! 제발 이제 뒤늦게라도 깨닫기를 빈다.

 

 

 

 

 

 

그 와중에 일본 종군위안부 모델을 하면서 일본의 전쟁야욕을 일으키는 욱일승천기를 휘날려주는 이 한국배우들 이런 것들은 위험하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한민족 정체성이요, 지역갈등보다 더 나쁜 것이 친일매국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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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 모든 정치현상과 정치상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보여지는 진실이다.

 

 

 

日극우파는 뉴라이트에 기생해서 산다.

뉴라이트는 새누리당에 기생해서 산다.

새누리당은 보수에 기생해서 산다.

보수는 종북에 기생해서 산다.

종북은 진보에 기생해서 산다.
진보는 서민층에 기생해서 산다.

서민층은 기득권층에 기생해서 산다.

기득권층은 뉴라이트에 기생해서 산다.

뉴라이트는 日극우파에 기생해서 산다.

 

 

 

 

 

 

☞ 마우스로 넘겨보실 수 있습니다.

012345678910111213

우리나라 조상들이 피눈물 흘리며 통탄할 일!

 

 

 

 

 

 

일본이 이 나라 정치에 막후 영향력을

아직도 미치게 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이걸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들은 감사할 뿐이다.

 

 

 

☞ 마우스로 넘겨보실 수 있습니다.

012

이명박 뉴라이트

 

 

 

 

☞ 마우스로 넘겨보실 수 있습니다.

0123

뉴라이트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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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oh! NO

 

 

세계적 이데올로기의 지리적 유산물!

 

 

 

맨눈으로 보기에 너무 부끄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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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의 북방한계선(NLL) 공세는 지난 대선 때 시작되었다. 이명박 정권에서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낸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영토 포기’ 발언을 했다고 시동을 걸었다. 그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회담에서 ‘북방한계선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다. 남측은 앞으로 엔엘엘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엔엘엘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즉각 나서 ‘터무니없는 날조’라고 반박했지만, 보수진영은 대통령선거 기간 내내 이를 쟁점으로 제기하며 선거에 활용했다. 이른바 ‘신북풍공작’이다. 대선까지 실제 발언록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여권은 근거 없는 엔엘엘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의 외교·안보 관계자들도 뒤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말할 수 없지만 ‘깜짝 놀란 내용이 있다’며 새누리당의 공세를 뒷받침했다. 이런 분위기는 야당의 문재인 후보에게는 역풍, 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는 순풍으로 작용했다.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된 뒤 엔엘엘 문제는 물밑으로 잠복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대선 당시 댓글 공작이 밝혀지면서 국회의 국정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에 몰린 순간, ‘전가의 보도’처럼 다시 엔엘엘을 끄집어냈다. 그동안 비밀문서이므로 공개할 수 없다고 한 태도에서 돌변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전문과 발췌록을 공개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을 보면, 가장 핵심 내용인 노 전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 발언을 확인할 수 없다. 정 의원의 애초 발언이 얼마나 짜깁기 왜곡의 극치였는지 알 수 있다.
대화록에서 엔엘엘 문제를 먼저 꺼낸 쪽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그는 “우리가 주장하는 군사경계선, 또 남측이 주장하는 북방한계선, 이것 사이에 있는 수역을 공동어로구역, 아니면 평화수역으로 설정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북방한계선 아래의 현재 우리 쪽 수역이 남북 공동 관할로 들어가고, 사실상 영토를 포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라거나 ‘엔엘엘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다’라는 구절처럼, 정상으로서 세련되지 못한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런 제안을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엔엘엘이)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며 김 위원장에게 엔엘엘의 현실을 인정하도록 설득했다.

엔엘엘을 두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맥락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지금 시점에서 엔엘엘을 거론해봐야 논란만 가중시키니 서해의 해상 경계 문제는 양쪽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신뢰가 구축된 뒤에 협의하고, 일단 서해평화협력지대를 통해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공동 번영의 미래를 열어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발표된 10·4 남북정상선언을 봐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8개 항으로 이뤄진 이 선언의 다섯째 항에는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엔엘엘 포기론으로는 해주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들어간 것을 절대 설명할 수 없다.

조중동, 교묘하게 사실 왜곡해 (조중동은 죽은 사람도 끝까지 괴롭히는 이지매 악마집단)
결과적으로 이번에 공개된 정상회담 대화록은 노 전 대통령이 엔엘엘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해상분계선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엔엘엘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은 일제히 25일치 1면 머리기사 제목을 ‘엔엘엘 바꿔야…난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라고 뽑았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않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한 구절을 끄집어내 부각함으로써 전체 뜻을 왜곡하는 못된 수법이다. ‘선 서해협력지대 설치- 후 엔엘엘 문제 해결’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박 대통령이 25일 국무회의에서 “우리의 북방한계선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키고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노 전 대통령이 엔엘엘을 포기했다는 새누리당과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진영의 억지 공세에 교묘하게 편승하는 발언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엔엘엘 발언은 더 이상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을 평화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정 이 땅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사실을 호도하며 나라를 분열시키지 말고, 다시는 그런 불행이 재발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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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가 다른 이명박

 

자세가 반듯한 노무현

 

자세가 비굴한 이명박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실때 온 국민은 슬픔에 잠기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죽음으로 떠나간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참 그 나라에는 비극이고 슬픔이다.

같은 민족으로서 애도와 영민으로 고인의 넋을 위로해야 했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세력과 새누리, 이명박은 달랐다.

 

그런 와중에 이명박은 국정원을 자기 찬양을 위한 부속기관으로 활용하여, 죽은이를 조롱하고, 비방하고, 국민들 사이사이에서 국론을 분열시킨 원흉이다. 국민들앞에 화형대에 세워 능지처참감이다.

교회말로 심판할지어다!

 

이명박은 죽어서, 노무현대통령을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

 

교회다닌다는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미워할 수가 있나?

교회다닌다는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죽음으로 몰수가 있나?

교회다닌다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할 악질은 다 하고 책임없이 떠나는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편하게 임기를 마치고 편히 쉴수 있는가? 골프나 치면서...

 

죽어서, 영원히! 하늘나라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비명이나 지르며 고통을 즐겨야할듯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인터넷에 노 전 대통령과 당시의 추모 분위기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은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으로부터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범죄일람표’를 제출받아 살펴본 결과, 국정원 직원들이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추모 열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글과 댓글 수백개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게시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26일 밝혔다.

한 국정원 직원은 2009년 6월3일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노무현은 자살한 거지, 영웅적인 행위를 한 게 아니다’는 댓글을 달았다. 국정원 직원들은 같은 달 내내 ‘노 대통령은 자살했어도 이미 뇌물로 밝혀진 돈은 환수해야 한다’ ‘권양숙 여사가 노 전 대통령이 자살했는데도 월 700만원 가까운 연금을 꼬박꼬박 받는다’ 등의 글을 아고라 정치·자유·사회 게시판에 지속적으로 올렸다. 이러한 글은 같은 시기 네이버와 네이트 등 다른 포털사이트에도 올라왔다.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당시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댓글이 있었지만 설마 국정원이 그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면서 “천벌을 받을 일”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국정원이 이를 잠재우기 위해 댓글 작업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정원, 盧 서거 때도 '악성댓글'..MB정권 내내 정치개입

 

 
[뉴스토마토 박수현기자] 국가정보원이 지난 대선 뿐만 아니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부임했던 2009년 2월부터 '다음 아고라' 등에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국정원은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 날부터 조직적으로 노 전 대통령 추모 분위기에 비판적인 댓글을 단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예상된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이 서울중앙지검으로부터 제출받은 '범죄일람표'를 26일 확인한 결과, 국정원은 원 전 원장 부임 직후인 2009년 2월부터 댓글로 여론에 영향을 끼치는 형태로 정치에 관여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작성한 댓글들은 ▲이명박 대통령 ▲미디어법 개정 ▲경인운하 ▲4대강 ▲녹색성장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북정책 ▲전여옥 전 의원 등 광범위한 분야에 지지를 표시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 날인 5월24일부터는 노 전 대통령 서거 국면과 관련한 댓글이 집중적으로 게시됐다.
5월29일에 작성된 댓글은 백원우 전 의원이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고함을 친 것에 대해 "평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다가 그 자리에서 고함을 치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며 백 전 의원의 행동을 유치하다고 치부했다.
같은 날 작성된 "노무현은 자신이 깨끗했다면 끝까지 싸워서 결백을 입증했어야지요"라는 댓글도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된다.
5월31일 '다음 아고라'에 올라온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글에는 작성자를 "노빠~ 노빠~ 노빠~ 노빠~ 노빠~ 노빠~ 노빠~ 노빠~ 노빠~"라고 조롱하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 역시 국정원의 정치 개입 댓글로 판명됐다.
6월1일엔 "노무현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죽어버렸는데", 6월3일엔 "노무현은 자살"이라며 "전임 대통령으로서 영웅적인 행위를 한 게 아니다. 그냥 자살"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이에 대해 진선미 의원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내부의 적들에게 전면적으로 4년 내내 국가안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 개입에 올인한 증거"라고 지적했다.
진 의원은 국정원의 이같은 정치공작이 원 전 원장이 부임한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라며 "원 전 원장이 부임한 시기부터, 처음부터 그런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검찰의 공소장에 첨부된 국정원의 댓글들이 4년간 1000여쪽이 넘는다며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댓글들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김정현 민주당 부대변인은 "국정원이 노 대통령 서거 뒤 추모 열기를 비판하는 댓글 작업에 열중한 것은 반인륜적"이라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니 모골이 송연하다. 천인공노할 짓"이라고 탄식했다.
김 부대변인은 "국정원이 이처럼 무도한 집단이었다니 국정원 해체 주장은 당연하다"면서 "이명박 정권 내내 국정원은 음지에서 일하는 정권의 나팔수에 불과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라고 봤다.
 

노무현서거때도 국정원 국론분열댓글 선동노무현서거때도 국정원 국론분열댓글 선동

 

 

 

 

원본출처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76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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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진실의 목소리에 제발 귀를 기울여 주세요! "

 

 

거기에 극우파들은 경청없이 ......집단 이지매..

 

아래 동영상한번 보시죠?

 

 

 

 

http://youtu.be/5gP0F6y5ADc

 

 

 

 

 

일본에 살아있는 마지막 희망과 양심인 그녀!

 

일본에서는 모든 국민이 역사를 왜곡하고, 침략전쟁의 역사를 감추고, 시간에 묻히게 하려고 하는 속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스팔트위에 핀 꽃한송이 처럼 그 속에서 진실의 목소리를 내어 알리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0대의 젊은 여성 한명이였습니다.

 

그녀는 그들 국민들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저항과 똘아이라는 집단 협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녀는 진실에 대해서는 굽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국정원쿠데타 사건을 단무지 우파들과 새누리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진실'을 어떻게든지 압력과 협박이라도 쓰고, 공권력을 남용해서라도 묻히게 하려는 수작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와 별반다르지 않은 똑같은 상황입니다.

 

 

위 동영상에서 보듯이........

 

순수 일본인으로서, 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진실의 양심은 피어나는 것입니다.

 

극우파의 농락과 폭행들 보십시요. 우리나라에도 단무지 극우파들 저렇죠? 일본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무례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무조건 국가 원수에 대한 정의로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하거나, 북한을 멸하기 위한 행동과 심판이라고만 목청높혀 켁켁 거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콩을 보고 이건 팥이다! 시발 까불지말고 믿어달라!  이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그들은 단무지 극우파이다. (단순무식지랄)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는 한 역사의 진실과 정의는 되찾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이제껏 그래왔습니다.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봅시다. 감동적이네요.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시위에서 고독한 민들레여!

 

그 의로움은 우주의 섭리에 의해서 빛을 잃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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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잔존하고 있는 친일파는

2차대전 승리국인 미국 군정에 의해서 전후 통치를 위하여 친일파들을 기용하여 활용해왔는데, 그렇게 부여받은 자리가 현재의 대한민국 부와 권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들 친일파들은 죽다 살아난 심정으로 유지된 자리이기 때문에 그들은 뼈속까지도 친미,친일인 것입니다.

 

일본에 항복을 받아낸 그들 미국은 우리나라에 친일파들을 보고, 일본에 말 잘드는 사람들이 곧 우리 미국 군정들의 말도 잘 들을것이라고 하여, 즉시 그들 친일파들을 주요 직책에 앉혀서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친일파가 아닌 독립군측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의 말을 잘 안들을수 있기 때문인것이죠.

 

그래서 독립운동을 한 가족들은 가난과 궁핍으로 현재까지도 걸인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친일파들의 망국적 망언과 행동은 이제 종식되어야 합니다.

 

더이상 애국의 심정으로 친일파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짓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빨갱이야! 라고 하는 발언하는 사람의 얼굴이 우리 사회에서 창피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뉴라이트, 새누리당만 지지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노들은 스스로 회개하고 반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어떻게 부여받은 것인지를 알고, 조용히 이 대한민국을 살아가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 그리고 후세에도 이 나라의 불행한 전쟁이나 침략이 발생하면, 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생기지 않게하는 최고의 안전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집단으로 그들은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 친일파를 역사청산할 수 있는 기회로써 아주 좋습니다.

" 새누리당 청산이 친일파 청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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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가 ‘동교동계’로 꼽히는 한광옥, 한화갑 등 구 민주당계 인사들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데 대해 '변절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섭섭함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1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이 여사와 이틀 전 저녁식사를 한 자리에 나눈 대화를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오죽하면 이희호 여사께서도 저에게 선거 때는 항상 변절자가 나오기 마련이다”며 “어떻게 유신을 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겠느냐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굉장히 당혹스러웠다"면서 "이 여사가 그제는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저를 불러 여러가지 착잡한 말씀을 토로하셨다"고 전했다.

박 원내대표는 또‘박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동교동계 인사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따라 국민통합을 하겠다고 한다’고 묻자 “마지막 순간까지 김 전 대통령은 오직 민주당이 단합해서 새누리당 정권에서 이뤄지고 있는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 파탄을 정권교체로 심판해야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정당과 야권과 시민사회단체가 연합해야 된다. 그리고 꼭 정권교체를 해라”는 김 전 대통령의 과거 발언도 전했다.

박 원내대표는 이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이) 박 후보가 대통령이 돼야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저도 몇십년 모셨지만,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모셨지만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출처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2121409261088270&linkid=20&newssetid=455&from=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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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대통령, 여성대통령, 박근혜여성대통령

민주주의가 덜 된 나라에서 여성대통령은 아직 위험하다.

 

대통령제가 아닌 내각제라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위험하다. 역사가 가르쳐준다.

 

 

역사스페셜에서 나왔던

 

 

女主不能善理(여주불능선리)

 

여자 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의역을 하면 '여자가 왕이 되면 사회가 도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이다.

 

이 말은 내(블로그 소유자)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경험으로만 살아오신 현명한 선조들이 후세의 운명을 위해 길이 내린 명구이다.

 

 

예로부터 선조들은 명구절을 후세에 남기곤 했다.

그들은 온갖 삶의 진저리를 다 겪고 나서

내 자손들에게는 이러한 고난과 고충을 물려주지 말자! 라고 해서

교훈과 격언을 남기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주불능선리' 명구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역사스페셜 - 김춘추편을 보시면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주불능선리 에피소드 part 1

 

 

역사스페셜 - 김춘추편을 보시면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주불능선리 에피소드 part 2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있는 방송!

몇 안되는 깨어있는 방송!

역사스페셜에서 하루 방영한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한번도 아니고 2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올 정도로 그 시대에는 민심이 혼란하고, 너무 사는게 사는것이 아닌 고통의 연속이였다. 그러다보니 여주불능선리라는 저런 깃발들이 여기저기 나붙게 될 정도였다.

물론, 그 당시 신라시대의 국민들은 새롭게 여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막연하게도 "여자가 대통령이 되어보면, 더 새로운 세상, 그러니까 여자니까 더 꼼꼼하게 해서 세상이 좋아지겠지" 하고, 왕이 되기전에는 많이들 낙관적으로 여겨졌을 것이였다.

그러나, 왠걸 그렇지 않았다. 여자가 왕(대통령)이 되고 나니 이건 역시였다!

그러면 그렇지! 였던 것이다.

 

역사의 명구는 오래 담금질이 되어진 내공속에서 나오는 법

 

 

사람은 죽어도, 명구는 살아있다.

그것은 후세의 운명을 굽어 살피기 위한 조상의 혼이다.

 

 

현대인들이여!

다시한번 명심하길 바란다.

 

 

1000년의 역사 신라가

1만년 역사의 韓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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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민주화운동가, 지식인들을 무차별하게 개처럼 고문한 이근안

썪어빠진 독재정권 비호아래에서 충견노릇이나 하는 개인줄 알았는데, 그의 이야기는 다르다.

 

" 그는 현재에도 절대 고문을 해본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를 둘러싼 논란과 주위의 비난이 두렵다.”

이근안 전 경감과의 단독 인터뷰가 보도된 직후인 지난 8일 그는 [일요서울]에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저 이근안 목사입니다”라고 말문을 연 그는 덤덤한 말투로 기자의 안부를 물은 뒤 “주말 부천의 모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마쳤다”며 자신의 근황도 전했다.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달해줘 고맙다”는 인사 말미에서야 이 전 경감은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나갈 인터뷰 내용 중 몇몇 인사들과 얽힌 일화는 빼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재직당시 공안사건 주역들 얘기다.

사건 비화가 담길 금주 보도를 염려한 듯했다. 이 전 경감은 지난호(제 824호 참고)를 통해 사건과 관련해 기존 알려졌던 주장들이 상당부분 과장됐거나 허위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근황과 과거 도피, 수감생활을 털어놨다. [일요서울]은 지난호에 이어 더욱 충격적인 이 전 경감의 격정토로를 지상 중계한다. 이 전 경감이 전하는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부터 목회자인 그가 십자가를 가슴에 대고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 김근태 전 장관 고문, 남민전 사건의 진실을 들어보자.

인터뷰 내용을 일부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이 전 경감의 부탁에 “본인의 인터뷰 내용이 거짓이었느냐”고 반문했다. 이 전 경감은 펄쩍 뛰었다. 그는 “이제 와서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면서도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근안’을 손가락질 하고 욕한다. 그 모욕감을 견딜 자신이 없다”고 긴 한숨을 토했다.

그동안 이어진 여러 고문피해자들의 증언은 이 전 경감이 [일요서울]을 통해 밝힌 당시 상황과 정반대다. 과연 누구의 입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로 몰렸던 이들은 DJ정권 이후 민주투사가 됐다. 그리고 빨갱이를 잡던 ‘파수꾼’은 17년간 도피와 수감생활 끝에 ‘고문기술자’라는 주홍글씨를 단 ‘죄인’이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다. 양쪽 모두 피해자라 주장하는 가운데 적어도 이들 중 한쪽은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 전 경감은 재직시절 피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강제심문’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끔찍한 고문기술은 없었다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잔혹한 고문이 동원된 적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강제심문과 고문,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과거의 피해자와 현재의 피해자가 엇갈리는 증언을 내놓고 있다.

다음은 이 전 경감과의 일문일답 전문이다.

※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전 경감과의 대화는 일문일답으로 엮었다.


“강압심문 있었지만 ‘고문기술’ 없었다”

- 심문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이 실제 있었나.
▲ ‘심문’은 혐의가 확실하고 물증이 있는 용의자를 조사하는 것이다. 문제는 72시간 안에 모든 심문을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피의자 대부분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자해를 하는 등 조사에 비협조적이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심문이 안 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

- ‘강압심문’이 고문 아닌가.
▲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거나 유도(柔道)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 한다면 변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

-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등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고문기술들이 상당히 다양하다. 이런 기술들을 단 한 번도 동원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 그 기술들이 어떤 것인지 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오랫동안 무도(武道)를 한 내가 그렇게 치사한 기술을 동원했다는 주장에 기가 막혔다. 내가 저지른 일은 당당히 “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기술들은 써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 이상의 고문기술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란 얘긴가.
▲ 그렇다. 일부 언론이 나를 ‘관절빼기의 명수’라고 부르던데 상식적으로 관절을 뽑으면 주위 인대가 늘어난다. 늘어난 인대는 관절을 다시 끼운다 해도 금방 회복되지 않아 상당기간 깁스 등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깁스하고 재판 받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 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 아마 이런 일화들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다.

- 고문피해자 상당수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가혹행위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 쫓기던 시절에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조사만 받고 나오면 ‘고문당했다고’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결국 그들 나름의 ‘자기합리화’ 때문이라고 여겼다. 공안사건에 연루되는 인사들은 비밀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 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나.

- 고문피해자로 나선 이들과 본인의 주장이 너무 상반된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 진실공방이 벌어진다 해도 내가 안 한 것은 안 한 거다. 화가 나면 쥐어박지 치사하게 뭘 접고, 꽂고 하겠나.


장관 김근태와 죄수 이근안의 포옹

- 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전기고문’ 파문도 그때 불거졌다.
▲ 처음부터 내가 그 사건을 수사한 것은 아니다. 당시 민청련 초대의장이었던 김근태씨는 수시로 정보기관에 연행된 전력이 있었다. 가족 중에도 이적 혐의가 짙은 인물이 있어 당국이 예의주시하던 인물이었다. 검거 된 그가 무려 12일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자 치안본부에서 내게 수사기록을 넘겼다. 하룻밤 꼬박 새며 수사기록을 본 뒤 “간첩이라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지하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를 하자 직접 심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절대 피의자 몸에 손대지 말라’는 특별지시가 내려온 상황에서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전기고문’이었다.

- 피의자 입을 열게 하려고 전기고문을 했다는 건가.
▲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 건전지 2개’라는 점이다.

- 건전지 2개로 전기고문이 가능한가?
▲ 그래서 고문이 아니라는 거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 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 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 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한 것이다. 한참후에 눈을 가린 뒤 맨 발바닥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 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 ‘잔혹한’ 전기고문에 대한 증언은 또 있다. 민병두 전 민주당 의원은 과거 언론 기고문에서 “이근안은 잡지 ‘선데이서울’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수를 올렸다 내렸다”라고 밝혔었다.
▲ 손가락만한 건전지 2개가 전부인데 어떻게 전압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 2005년 여주교도소 수감 당시 김근태 당시 복지부장관과 독대하며 과거의 잘못을 사죄했다고 알려졌다. 이것도 사실이 아닌가?
▲ 어느 날 교도소장이 불러서 갔더니 “복지부 장관이 영감님 면회를 오신다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하더라. 현직 장관이 직접 온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변호사들이 수감자를 만나는 ‘특별접견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니 김 장관이 들어왔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날 일은 죄송하게 됐다”고 하자 김근태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

- 당시 언론에는 ‘눈 감을 때까지 용서를 구할 것’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등의 내용이 실렸다.
▲ 김근태씨에게 종교에 심취해 있다는 나의 근황을 전하며 로마서 3장10절(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을 인용했다. 그랬더니 사흘 뒤 신문에는 내가 무릎을 꿇고 빈 것으로 묘사됐다. 사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무릎을 꿇거나 큰 절을 올린 일은 없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붓쟁이’들의 말장난에 웃었다. 동료 수감자들은 ‘김근태가 영감님을 이용해 정치적 쇼를 한 거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김근태씨가 그곳까지 날 만나러 왔을 때는 정말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릴 뜻으로 오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김근태씨가 정략적으로 날 이용하기 위해 만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얕은 수를 쓸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다.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니까.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 재직 당시 간첩검거에 능했다. 실제 잡아들인 간첩단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 그건 국가기밀이다. 당시 남한에는 북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상당히 많았다. 공식적인 간첩검거 유공은 4건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 정도만 밝히겠다.

- 2000년대 이후 이른바 ‘조작간첩’ 사건이 불거지며 상당수 인사들이 무죄를 선고받거나 민주화인사로 승격됐다. 이중엔 직접 담당했던 사건도 적지 않다.
▲ 일일이 할 말은 많지만 이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피의자들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이 충분했다는 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때 수사기록은 모두 쓰레기가 됐다.

- 평생을 ‘고문기술자’로 불리며 숨어 지냈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고문기술자’라는 명칭에 대한 솔직한 심경은.
▲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속된 말로 ‘선수끼리’의 대결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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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진실중국 동북공정, 일본 만선사관, 한국 강단사학에 던지는 도전장

 

글쓴이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출처: 신동아20079월호 권말부록 (p611 ~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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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인 기도처가 된 강화도 단단학회

 

 

   1-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신서인가?

 

 

 

일본 요코하마 출생으로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1925년생)씨가 번역한 것으로 돼 있는 양장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국회도서관에서 접한 순간 기자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실크로드 흥망사란 부제가 붙은 이 환단고기는 서기 1982년인 쇼와(昭和) 57, ‘역사와 현대사(歷史現代社)’를 발행인으로, ‘()신국민사(新國民社)’를 발매인으로 해서 도쿄에서 출간된 일본어 책이기 때문이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기자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밝혀놓은 환단고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위서(僞書)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 때문이다.

한글은 1443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문자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 한자(漢字)만 해도 갑골문에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왔고 알파벳도 북셈문자와 페니키아문자를 거쳐 발전해왔다. 일본의 가나(假名)는 한자 초서 등에서 유래했지만, 일본에는 가나 이전에 고대 문자가 있었고 그것이 가나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조선 세종대에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 ‘원시 한글이라 할 문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시 한글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놀랍게도 환단고기는 그 해답을 제시한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삼성기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란 네 책을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녹도문과 가림토 문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는 환웅이 신지 혁덕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적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사람들은 녹도문은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글자이고, 갑골문에 앞서 한자의 근원이 된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녹도문이 어떻게 생긴 문자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녹도문은 표의(表意)문자일 가능성이 높고, 환단고기는 그 모양을 그려놓지 못했으므로 녹도문을 원시 한글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세 번째 단군인 가륵(嘉勒) 2, 가륵 단군이 삼랑 을보륵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로 된 지금의 한글과 아주 비슷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그 문자의 모양을 보여준다. 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은 단군세기를 인용해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리켜 가림다(加臨多) 문자라고 한다며 앞의 가림토와 같은 모양의 문자를 보여준다.

단군세기에는 가림토, 태백일사에는 가림다로 한 글자가 다르게 표기돼 있지만, 환단고기는 원시 한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은 이 문자를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국민은 모르는 아주 이상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삼척동자를 붙잡고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고주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의 이름이 과연 고주몽일까?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고주몽이다라고 밝혀놓은, 우리 민족이 펴낸 가장 오랜 사서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라고 기록하고, 바로 다음에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주몽은 추모로도 불릴 수 있고 중해로도 불릴 수 있다고 삼국사기는 분명히 밝혀놓은 것이다(원문 : 始祖東明聖王姓高氏諱朱蒙云鄒牟云衆解).

 

고구려 시조는 주몽인가, 추모인가

주몽추모중해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말은 중국어와 다르다. 신라시대 우리말을 한자로 적기 위해 이두향찰를 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유사한 방법으로고구려 말을 한자로 적었을 것인데, 어떤 이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적고, 어떤 이는 추모로, 또 어떤 이는 중해로 적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세 이름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했느냐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조 때인 서기 1145년 김부식이 편찬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서기 668년이니,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때로부터 477년이 지나 만들어진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또 하나를 살펴보자. 중국 길림성 집안에는 고구려 당대인 서기 414,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비문은 옛날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 당대에 세워진, 삼국사기보다 731년 앞선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이 추모로 기록된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바로 그 책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삼국사기는 조선 태조 3년인 서기 1394년 김거두란 사람이 그때까지 전해진 삼국사기를 토대로 새로 목판을 만들어 찍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삼국사기는 빠진 글자가 있어 완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 중종 때인 1512년 이계복이 김거두의 삼국사기를 개판(改版)해서 새로 찍어냈으며 이것이 오늘날 한글로 번역되고 있는 삼국사기다.

1512년에 인쇄된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사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고구려 당대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사실에 가까운 진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사실(史實)’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조작될 수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조작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광개토태왕릉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하기 위해 세운 것인만큼 시조의 이름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조 이름을 추모로 부르는 것이 옳은데, 현대에 나온 모든 사서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부르고 있다. TV 드라마까지 주몽으로 불러,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란 인식이 고착화된 상태다.

 

한글의 뿌리를 연구해야

추모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첫째, ‘고구려 시조 이름을 당대 이름에 가깝게 바로잡자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고대 우리 민족이 쓰던 말을 한자로 옮기다 보면 다르게 적힐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삼국사기에 북부여 속담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주몽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추모와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뜻하는 고구려 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고구려 말 발음을 한자로 옮길 때 추모로 적을 수 있고 주몽, 중해로도 적을 수도 있다. 추모와 주몽, 중해가 발음이 비슷하듯 원시 한글을 뜻하는 가림토가림다도 발음이 흡사하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고려 말의 이암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고려 말 우리 민족은 가림토와 발음이 비슷한 원시 한글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글자가 조선 세종조의 집현전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훈민정음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

위서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주목받는 것은 정확성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옛날의 사실(史實)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적해볼 수 있는데, 요즘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이 밝혀지는 사실 중에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렇다면 가림토와 가림다 문자도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이 입과 목을 이용해 발음하는 것을 보고 수년 사이에 훈민정음을 만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자는 쉽게 창안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학자들도 무엇인가로부터 힌트를 얻어야 역사적인 창조를 할 수 있다. 한글을 사랑하는 학자라면 한번쯤 환단고기의 진위부터 한글의 시원(始原)까지 모든 것을 연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집현전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제시된 가림토(가림다) 문자를 발굴해 그것을 토대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이 옳은지를 추적해보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치우 등장시킨 환단고기

사실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축구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는 치우천왕이 그려진 엠블럼을 들고 나왔다.

언제부터 우리는 치우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게 됐는가. 치우를 단군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바로 환단고기다.

물론 1911년에 편찬된 환단고기에 앞서 치우를 우리 선조로 규정한 책이 있었다. 1675(조선 숙종 1)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쓴 사람이 펴낸 규원사화(揆園史話)’가 그것이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사서(史書)가 아닌 사화, 역사 이야기책이란 이유로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규원사화에 담긴 내용이 100% 허구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일부는 분명 진실일 텐데 우리의 사학자들은 이를 위서로 단정짓고 아예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규원사화가 살려내지 못한 치우를 환단고기가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그것도 단군에 앞선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치우는 중국인의 조상?

그런데 치우가 우리 조상이 아니라 중국인의 선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다면 치우를 앞세우며 좋아했던 한국인은 정말 우스운 존재가 된다. 문제는 치우를 중국의 선조로 만들려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황제, 염제와 더불어 치우를 중국인의 3대 시조로 꾸미고 있다.

중국인을 가리켜 자칭, 타칭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한족은 진시황에 이어 한()고조 유방이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하고 난 다음에 생겨난 이름이다. 한나라가 등장하기 전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은 하화족(夏華族)’이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화족은 중국을 이룬 전설상의 인물인 35제 가운데 5제의 첫 번째 인물인 황제를 시조로 여긴다. 한민족 하면 단군의 후예를 지칭하듯, 하화족은 황제의 후손을 의미한다. 하나라는 5제 중 한 명인 우()가 세웠다고 한다.

중국인은 황제가 이끄는 황제족과 경쟁을 하다 황제족과 하나가 된 종족을 3황 가운데 마지막인 염제(신농)가 이끈 염제족으로 보고 있다. 염제가 이끄는 염제족을 황제족이 제압함으로써 거대한 황제족이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거대한 황제족을 중국인들은 염황족으로 부르거나 아니면 이들이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하화족으로 부른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을 거론할 때 치우가 이끄는 치우족은 배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사서는 황제(헌원)가 탁록이라는 지역에서 치우와 싸워 이김으로써 패권을 장악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탁록 전투에서 치우가 이끄는 종족이 황제가 이끄는 종족을 이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승패의 결과가 다르긴 하지만 중국 사서와 환단고기 모두 황제족과 치우족이 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흐른 지금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치우가 황제, 염제와 더불어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95, 중국인들은 치우와 황제가 역사적인 결전을 벌인 탁록에 귀근원(歸根苑)’이란 이름의 사당을 만들고 그 안에 황제와 염제, 치우를 모신 삼조당(三祖堂)’을 세웠다. 그리고 치우가 황제, 염제와 함께 중국 민족을 만들었다며 이들을 중화3(中華三祖)’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만일 치우가 중국인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우리는 중국인의 조상을 우리 조상이라고 주장한 바보 같은민족이 된다. 물론 환단고기도 쓰레기 같은 잡서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면

그러나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일컫는 동이족의 선조가 치우라는 주장은 점점 힘을 받고 있다. 환단고기가 없었으면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치우를 우리 조상으로 내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환단고기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이 환단고기가 등장한 후 초··고교 역사교과서에 단군이 실존인물, 단군조선이 실재한 나라로 적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환단고기는 환웅과 단군 시대에 관한 옛 기록이라는 뜻인데, 이 책은 단군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대통령과 같은 자리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밝혔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단군조선을 적시한 우리 교과서도 위서 시비에 빠질 수 있다. 환단고기의 위력은 비단 역사와 문화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종교계와 학계에 두루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림다 문자가 나오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소도경전본훈편이 있는데, 여기에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천부경은, 환단고기와 별도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천부경의 등장으로 한국철학사와 한국종교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철학은 중국에서 생겨난 유학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고 삼국시대에 이 땅에 전래된 불교는 한국화한 종교로 여겨져왔다. 우리 민족이 외래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여 우리화했다는 것이 한국철학과 한국 종교의 큰 줄기였는데, 환단고기와 함께 천부경이 등장하자 천부경이야말로 외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 조상이 만든 철학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양오행론과 다른 천부경적 세계관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환단고기에 실린 또 하나의 경전인 참전계경은 유학이나 불교와 다른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적, 또는 중국적 세계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음양오행론이다. 음양오행론은 다르게 발전해온 음양론오행론이 중국 전국시대에 합쳐짐으로써 생겨났다.

음양론은 전기의 플러스(+)와 같은 양()과 마이너스(-)와 같은 음()으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을 6개로 한정해 모아보면, 6개가 모두 양인 것에서부터 6개 모두가 음인 것까지 모두 64개가 만들어진다(2×2×2×2×2×2=64). 이러한 64괘 가운데 반쪽짜리’ 4괘가 바로 태극기에 들어 있는 ···.

()나라 시절 중국인들은 자연변화를 64괘로 압축했다. 그리고 미래를 살피는 점을 치면서 64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뽑게 했는데, 이때 뽑아낸 괘를 보면서 거꾸로 미래 상황을 펼쳐 보였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한자로는 ()’으로 표현하니, 주나라 때 만들어진 이 인식체계는 주역(周易)’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오행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에너지 원소를 수····토 다섯 가지로 본다. 이 다섯 가지 기운 가운데 물()과 불()처럼 충돌하는 관계도 있지만, ()이 나무()를 잘 자라게 하듯 도와주는 관계도 있다. 물은 불을 꺼버리므로 물은 불과 상극관계이고, 물이 있어야 나무가 잘 자라므로 물과 나무는 상생관계라고 본다.

그러나 상극이라고 해서 무조건 최악은 아니다. 물과 불이 이라는 매체로 분리돼 있다고 가정해보자. 물은 솥에 담겨 있고 솥 밑에 이글거리는 불이 있다면, 불은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해 탈 수 있고, 물은 설설 끓어 음식을 익힐 수 있게 된다. 솥으로 분리된 물과 불은 자기 성질을 극대화함으로써 음식을 익히는 새로움을 창출하니 이때의 물·불은 상극관계가 아니다.

 

   ··인의 3수론 

 

 

오행론은 수화목금토 사이에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어느 것과 어느 것이 어떤 조건으로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음양론과 오행론이 공자를 태두로 한 유교에 흡수됐고, 그러한 유학이 한반도로 유입됐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꽃을 피우는데, 퇴계의 성리학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1567~1618)에 의해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 등에게 전파됐다. 그 영향으로 500여 년에 걸친 내전(전국시대)을 종식한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퇴계의 성리학을 토대로 한 문()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러한 흐름이 있는 만큼 음양오행론은 한··일의 공통된 사유체계로 이해돼왔다. 이러한 사유체계를 거부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음양론이 음과 양 두 개의 수로 만물 변화를 설명한다면, 천부경적 사유체계는 천((() 세 개의 수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론은 두 개로 설명을 하니 대립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천부경적 사고는 변증법의 --(正反合)’ 이론처럼, 3의 방안을 제시해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천부경의 우주관은 불교의 우주관과도 다르다. 주목할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을 뿐 중국이나 인도에서 나온 서적에는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천부경적 사유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학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천부경을 입력하면 김백호 최민자 수월제 이중철 김현두 김백룡 최동환 문재현 유정수 권태훈 조하선 윤범하 등 수많은 학자가 주해한 천부경 관련 서적이 뜬다.

현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에서 비롯됐다. 단군교는 1910년 대종교로 개칭했는데, 이때 나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단군교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떨어져 나갔다. 앞에서 밝혔듯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에 의해 처음 편찬됐으니 천부경은 그때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종교와 단군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지 않았다. 대종교를 이끈 나철은 1916년 자살하고, 이듬해인 1917년 계연수는 대종교에서 떨어져 나간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제가 단군교를 없앰으로써 단군을 모시는 종교는 대종교만 남게 됐다. 이때 단군교를 따르던 많은 신자가 대종교로 넘어왔지만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55년이 흐른 1975년에 이르러서다.

 

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환단고기의 천부경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환단고기가 특정인이 지어낸 위서로 밝혀진다면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최치원은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은 최치원 사후 1000년 이상이 지난 1925, 집안에 전해오던 최치원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최문창후전집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고 한다. 천부경은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데, 최문창후전집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과 74자는 같고 7자가 다르다.

그러나 7자는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다른 한자가 아니라 거의 유사하게 해석되는 한자다. 이 때문에 천부경이 환단고기 쪽으로 전해지는 과정과 최치원 집안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7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조선 말의 기정진(奇正鎭·1798~1879)도 그때까지 구전되는 것을 전해 듣고 천부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천부경은 기정진 선생의 제자의 제자인 김형택씨가 단군철학석의(1957)’란 책에 남겨놓았다.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1자가 다르나, 역시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세 가지 천부경 가운데 정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환단고기의 천부경이다. 대종교도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자의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세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환단고기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최문창후전집에 나오는 천부경과 단군철학석의에 나오는 천부경은 환단고기를 참고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천부경도 위서가 될 수 있다.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와 천부경을 민족철학으로 여겨 해석한 학자들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황인데도 한국 지식인들은 환단고기의 실체를 제대로 추적하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4권의 책을 묶어 펴낸 환단고기는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1920년 중국 도교 전문가인 전병훈(全秉薰·1857~1927)정신철학통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이 책 서문에 천부경 전문을 싣고 해석을 달아놓았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지금 전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천부경을 실은채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계연수는 1911년 환단고기 필사본 30부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전병훈은 이를 보고 출간을 앞둔 정신철학통편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환단고기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출판됐다고 주장했다.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는 없고 그의 제자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출판사를 통해 인쇄해 내놓기 전에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나왔다면 이유립은 거꾸로 일본판 환단고기를 베껴 한국에서 출판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한국 출판사에서 출간된 환단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 김은수씨의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와 임승국씨가 19865월 정신세계사에서 내놓은 겨레를 밝히는 책들-한단고기이다. 임씨는 이유립씨와 함게 국사찾기 운동을 한 사람인데, 그는 환단고기가 아니라 한단고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쓴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환단고기1982역사와 현대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확인됐으니 기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가지마 노보루가 출판한 환단고기가 일본인들이 창작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환단고기를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역사서’ ‘민족의 철학을 밝혀주는 지침서로 흠모했다면 정말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이다. 다급해진 기자는 환단고기를 출간한 국내 출판사를 하나씩 접촉하며 어떤 경위로 이 책을 내게 됐는지 알아봤다.

환단고기는 참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앞에서 언급한 임승국씨의 한단고기(정신세계사) 외에도, 1987년 고려가라는 출판사가 다섯 권으로 펴낸 대배달민족사1권에 실린 환단고기, 1989년 김은수씨가 주해해서 기린원이 펴낸 환단고기, 1994년 민족문화사 편집부가 출간한 환단고기, 1996년 계연수를 편자로 해서 한뿌리출판사에서 내놓은 환단고기, 1998년 코리언북스출판사가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해서 출간한 환단고기, 2000년 바로보인출판사가 문재현씨의 풀이로 내놓은 환단고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와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원문(한자)과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의 원문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한편으로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해석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했다는 오해를 나을 수도 있으므로 기자의 마음은 다급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위서 시비가 있는 책인데.

조급함은 곧 불안감으로 증폭됐다.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에 접목시켜놓았기 때문이었다. 가지마는 일본 신도의 원류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는 모략위서(謀略僞書)라는 제목을 단 머리글에서 위서 시비가 있는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부인하며 환단고기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신도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교 조선 기치 내건 개화기 일본

가지마는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일본 신도의 정통성을 바로 세운다며 환단고기를 출간한 것일까. 그 답을 찾아준 이는 서울 청운동에 있는 국학연구소의 김동환 연구원이다. 일본 신도를 연구하는 김 연구원은 가지마를 의식 있는 일본의 재야사학자로 정의했다. 김 연구원으로부터 일본 신도의 역사와 가지마 노보루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불교의 절과 신도의 신사(神社)가 함께 있는 것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 퇴계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세계관과의 결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일본이 친()유교(성리학), ()조선이었다면,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의 일본은 반()유교 반()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봉건제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에도 고유한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줘야 했고, 메이지(明治)시절 일본의 엘리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고사기(古事記)’ 등 일본의 고유 자료를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은 성리학을 수용한 막부를 날려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상징하는 천황 중심으로 뭉치자는 주장으로 이어져, 천황 숭배가 강화됐다. 일본 천황의 위패는 대개 신궁에 모시니 신도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불교가 들어온 7세기부터 신사와 절을 공존, 융합시키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전통을 이어왔다. 신사와 절이 함께 있고, 가정에는 신도의 제단인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제단인 불단(佛壇)’이 함께 놓인 것이 바로 신불습합의 전통이다.

신도를 부흥하려 한 일본의 엘리트들은 불교도 봉건적이고 외래적인 것으로 보고 불상과 불경을 훼손하고 거부하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교는 신도만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라 척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엘리트들은 불교 탄압을 중단하고 신불습합을 인정하며 신도 부흥에 매진했다.

이 시기 일본은 총리대신 밑에 전국의 신궁과 신사를 관리하는 신기국(神機局)’을 뒀다. 신기국은 일본서기와 고서기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일본을 한국보다 오래된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로 바꾼 것이다. 신기국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도 일본의 토속신을 모시는 신궁과 신사를 만들게 했다.

 

신국민과 만선사관을 위해 번역

 

 가지마 노보루가 1982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한 환단고기와 서문. 표지에는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러한 운동이 일기 전, 일본 신도를 부흥시킨 인물로 꼽히는 고사기전(古事記傳)’의 저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가 일본 국학 부흥을 부르짖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국민(國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국민은 국가가 결정한 것을 그대로 따르는 민중이다. 이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자 했을 때 일본인들은 이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가지마 노보루는 비판 없는 맹종이 일본인에게 패전과 피폭(被爆)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일본 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패망시키고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다는 원칙에 따라 새로 만든 헌법(평화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을 넣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 신도는 메이지 시대 이전처럼 자력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때 신도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 일본인들은 신도의 위기는 비판 없는 일본인의 근성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이들은 국민이란 단어에는 무비판무조건 수용의 뉘앙스가 담겨 있으니 이제 일본인은 국민이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인민임은 부정할 수 없어 신국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일본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 가지마 노보루다. 다음은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배운 창해출판사 전형배 사장의 의견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일본은 동북아를 무대로 한 역사 주체 가운데 방계에 해당한다. 일본은 동북아 역사 무대의 중심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중심이 되자는 것이 신국민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다.

이는 미국과 영국의 관계와 비슷하다. 미국은 영국에서 갈려나온 방계이지만 지금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중심이 됐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동북아의 주무대에서 갈려 나온 방계이지만 지금부터는 동북아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그 일을 할 주체세력으로 신국민을 설정했다. 한반도와 만주에 살던 형님이 못한 일을 섬에 살던 일본인이 대신해서 하자며, 신국민을 그 일의 중추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중국에 문화적으로 편입돼 있는 조선은 물론이고 아예 중국의 영토가 된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일본과 같은 역사를 만들어온 공간으로 삼자는 만선(滿鮮)사관과 궤를 같이한다. 만주와 조선에 있는 형님이 잃어버린 정신을 일본에 살던 동생이 대신 세우겠다는 것이 만선사관과 신국민에 담긴 의지다. 가지마는 그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환단고기를 번역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영국 대신하듯 일본이 한국을 대신한다 

 

 

신국민은 비판능력이 있어 나라가 결정한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신국민은 메이지 시절의 엘리트가 조작한 일본 고대사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가지마 노보루의 책을 출간한 신국민사.

신국민사는 신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본 재야 사학자와 재야 국학자들의 모임이 됐다. 가지마는 이 모임의 핵심이기에 환단고기서문에 일본서기와 고서기는 모략위서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가지마 노보루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와 일본에는 고유한 종교가 있다고 봤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선도(仙道)라 하는데, 가지마는 일본의 신도와 한국의 선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여겼다. 중국에서는 유교 외에 신도나 선도와 비슷한 도교(道敎)가 생겼는데, 이 셋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게 가지마의 생각이다.

 

鬼道 檀君敎(괴도 단군교)’

가지마는 한··3국의 토속 종교 간의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일본 신도의 이론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초석이라고 여겨 한국인보다 먼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한 것이다. 그 후 가지마는 역시 신국민사를 통해 신도이론대계(神道理論大系)’라는 신도 교과서를 펴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선도를 연구한 속셈을 분명히 밝혔다.

신도이론대계의 제5장은 신교오천년사(神敎五千年史)’란 제목인데 여기에 귀도 단군교(鬼道 檀君敎)’란 문구가 있다. 가지마는 홍암 나철이 만든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단군교는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도 규정했다.

고대에는 일본의 신도가 한반도의 선도나 중국의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만 근대에는 거꾸로 일본의 신도가 한국과 중국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 가지마 노보루의 주장이다. 만주와 조선은 일본인의 역사공간이라는 만선사관으로 무장한 일본의 우익을 우리는 어떤 논리로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또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2-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김동환 연구원에게서 가지마 노보루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취재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밝혀보려던 목적은 잠시 접고,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먼저 번역 출간한 이유부터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란 인물이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유립이 이를 세상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연수와 이유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연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또 다른 일부는 이유립이 우회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극할 요량으로 가지마에게 먼저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유립도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허위로 이유립이라는 인물을 내세웠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 시급했다.

계연수는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911년대의 사람으로 이미 고인이 됐을 것이니 이유립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립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기자는 환단고기를 펴낸 출판사를 상대로 이 질문을 던졌는데, 1996년 환단고기를 출간한 바 있는 한뿌리출판사의 권태흥 대표가 이유립을 알고 싶으면 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을 만나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전형배 사장을 만나면서 이유립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전형배(全炯培·48) 사장은 보성고, 고려대 정외과 79학번 출신의 출판인이다. 전 사장은 1998년 창해출판사의 자회사로 코리언북스를 만들어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한 역주본(譯注本장구본(章句本)’이라는 부제를 단 세 권짜리 환단고기를 내놓은 바 있다(장구본은 환단고기를 장과 구로 나눠 정리했다는 뜻).

 

 5·16 반혁명 사건 연루자 박창암

그는 환단고기와 이유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교 시절 그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지금은 간도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엔 간도가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사시간에 그는 선생님에게 간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가 시험을 앞둔 놈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쥐어박혔다고 한다. 국사 선생도 간도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국사 찾기운동을 펼치는 박창암(朴蒼巖·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가 펴내는 월간지 자유를 접하게 됐다. 박씨는 아호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3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립과 박창암의 만남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씨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그가 생각해온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박창암씨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주제어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1차적인 계기는 그가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 계기는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이유립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이유립씨는 자유지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

이를 계기로 이유립씨는 주요 언론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해 197810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만주 지역 역사와 고토(故土) 회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전형배씨는 1979년 여름 어느날 박창암씨를 찾아갔고 그의 소개로 의정부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자일동에 있는 이유립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전씨는 경주법주를 사들고 갔는데, 그를 맞은 이유립씨는 대뜸 술 사올 돈 있으면 책을 사보거나 책을 사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지 몰라도 전씨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모시는 시봉 노릇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이유립씨를 지원하는 일을 많이 했다.

전형배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유립이 실존인물임을 확인한 기자는 취재 폭을 확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먼저 취재에서 확인된 이유립이란 사람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유립 집안은 환단고기와 깊이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 그와 환단고기, 그리고 계연수, 가지마 노보루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이유립(李裕?·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5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53078;·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선우휘 주필이 국사 문제를 놓고 이유립씨와 대담한 기사를 실은 19781022일자 조선일보.

 

이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의 나라인지라 우리 고유의사상을 공부해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불교식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서경(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묘청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암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의 지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불교와 선도를 공부한 것은 고려 말의 사상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세조·예종·성종 때의 고대 사서 수거령

이러한 사상적 유연성은 성리학만을 숭상한 조선시대로 들어가면서 꽉 막히게 된다. 조선은 세조와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아주 강력한 고대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고대 사서란 성리학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기록해놓은 책으로 추정된다.

1469년의 일을 기록한 예종실록에는 서울에서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10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갖다 바치고, 지방에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의 관가에 바쳐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맥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과 중종 때 암행어사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고조부인 이암의 예로 볼 때 이맥의 집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사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맥은 지금은 실전(失傳)된 발해사 기록물인 조대기등 많은 책을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다. 그는 고대 사서를 관가에 바쳐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이러한 사서를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을 수도 있다.

조선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을 이었다고 자칭한 나라인지라, 평양에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기자 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 것은 그 후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는 한반도였다반도(半島)사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도사관을 형성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대륙)에 저항하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게 된다.

만주 대륙은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니라는 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맥은 일찍이 반도사관을 거부하며 대륙사관을 수용한 인물이다. 태백일사를 남긴 이맥의 손자가 조선 인종·명종 때 활동한 이방(李滂)이다. 이방은 인종 1년인 1545년 국경지방인 평안도 삭주도호부의 부사로 발령받았다. 고성 이씨 종중의 이영규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방이 삭주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것을 좌천성 인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의 문인이었던 계연수 

 

이방은 삭주에 눌러 살며 자손을 잇게 됐는데, 그로부터 20세손이 바로 계연수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아 세상에 내놓는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데는 조선말에 활동한 또 한 명의 고성 이씨인 이기(李沂·1848~1909)가 큰 역할을 했다.

이기도 단군세기를 남긴 고려말 이암의 후손인데, 그의 선조가 전북지방으로 이주해 그는 김제에서 태어났다. 이기는 호남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기는 민씨 정부를 쳐부숴야 한다며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을 만났으나 김개남과 의견이 갈려 떨어져 나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농민군이 양반을 욕보이고 민가를 약탈하자 그는 거꾸로 농민군 토벌에 앞장서 공을 세운다. 1902년부터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국가를 바로잡으려면 민족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 5적을 죽이자는 선언문과 악인(惡人)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적은 참간장(斬姦狀)’을 만들어 돌리다 체포돼 1년간 진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1909년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와 단학회를 세우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러한 이기의 문인이 바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이맥이 쓴 태백일사는 이기에게서 얻었다라고 밝혔다. 계연수는, 자신의 집안에 안함로가 쓴 삼성기가 있는데 이것과 평안도 태천에 사는 백관묵 진사에게서 구한 삼성기를 합쳐 삼성기전(三聖紀全)’을 만들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또한 계연수는 이암이 쓴 단군세기는 태천의 백관묵 진사와 삭주 뱃골에 사는 이형식 진사에게서 얻었는데, 두 책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고 기록해놓았다. ‘북부여기는 범장이 지은 것인데 단군세기를 전해준 태천의 백관묵 진사에게서 얻었다고 밝혀놓았다. 이어 계연수는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자신이 환단고기로 옮겨 적었고, 홍범도와 오동진이 자금을 마련해 환단고기를 인쇄했다고 밝혔다.

 

 

 

··선에 능통했고 단군세기를 지은 고려말의 이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초상화다.

 

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계연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전형배 사장은 계연수가 실존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데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란 책을 보여줬다 이 책의 ()’권에 계연수가 등재돼 있는데 이를 옮기면 이렇다(사진참조)

계연수(桂延壽)의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 군데가 틀렸다. 첫째는 무술년에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간행했다는 부분인데,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묶어 환단고기를 낸 1911년은 신해년이다. 둘째, 계연수가 태백유사 등을 간행했다고 했으나 계연수는 태백유사가 아닌 태백일사를 환단고기 안에 집어넣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5) 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 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환단고기는 신해년(1911)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해동인물지에서 계연수가 몸을 의탁한 것으로 돼 있는 이상룡은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는 독립운동가인데, 그 또한 고성 이씨였다. 환단고기는 고성 이씨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

 

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유립씨는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데다 단단학회 대표를 자칭한 조병윤씨에 대해 파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병윤씨는 승려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단을 겪었지만 조병윤씨가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는 1948(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이유립씨는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한자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오자가 있는데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로 이러한 오자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원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이유립 선생이 오자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구한 환단고기의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이 사본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한국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그러나 거기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가지마의 환단고기에서는 원문이 실려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 실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형기씨 본()을 구한 가지마는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풀어준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일까. 이 의문도 전형배씨가 해답을 주었다.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유립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이 원고를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환단고기에는 誤字가 있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시중에는 한때 이유립씨에게서 환단고기를 배운 사람이 이씨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주해한 것과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해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주해본이 나와 있다. 전형배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분명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 선생 필사본의 오자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이유립 선생도 알지 못한 오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씨는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군인 출신과 5공화국의 실세들이 있었다. 이유립이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 서점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80년까지 이유립은 의정부 자일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편을 안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그를 서울 상계동으로 모셨다. 의정부 시절의 이유립씨에 대해 전형배씨는 한겨울 끼니가 없어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집이 워낙 추워서 점심때가 되면 삶은 라면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 선생은 이 얼음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으로 드시며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셨다. 어렵게 사는 것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외풍이 센 방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개천절 때 이유립은 배달문화상을 받고 제자들 덕분에 김포를 거쳐 서울 화곡동에 살게 되었다. 화곡동 시절 이유립은 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자주 강의했는데 그로 인해 군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전형배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씨의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전형배씨가 김낙천(金洛天) 고려가 사장을 만나 부탁을 하자, 김 사장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득실을 따지지 말자며 즉석에서 이유립 문집을 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환단고기는 물론이고 자유지 등 여러 곳에 쓴 이유립의 글을 모아 5권짜리 대배달민족사출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에 강의를 하던 이유립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타계했다(1986418). 그의 타계는 독립유공자 이유립옹 별세라는 제목으로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이석영씨 도움으로 강화도에 단단학회 건물 마련

생전의 이유립 선생과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개천민족회를 이끄는 송호수 박사다. 경신년은 서기로 1980년이다.

일각에서는 조병윤씨도 이 말을 들었기에 1979년 환단고기를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형배씨는 계연수 선생이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고 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어도, 이유립 선생으로부터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생전에 이유립은 5·16 군사정변을 예언한 명리학자이자 사주첩경저자로 유명한 같은 고성 이씨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씨와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유립은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이 산을 마리산으로 불렀다. 그는 이석영씨의 도움으로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간판을 내걸었다.

 

 

이기와 이유립의 스승인 계연수는 단학회를 이끌었다.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는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후 대종교로 나가지 못한 세력이 유지한 단군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제에 의해 폐교 위기에 몰린 단군교를 단학회에 다시 합친다는 뜻으로 광복 후 이유립이 만든 것이 바로 단단학회(檀檀學會). 마리산에 허름하긴 하지만 단단학회 건물을 만든 이유립 선생은 열정을 갖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지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우리말로 개천각을 묘사한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을 인류를 만든 하느님으로, 환웅을 우리 민족의 계조로, 단군은 우리 민족을 토대로 국가를 만든 시조로 그렸다. 이 때문에 이유립은 우리 민족은 환웅부터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이유립은 개천각 중앙에 환웅을 놓고 그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단군을 놓았다.

 

금나라 시조 모신 커발한 개천각

커발한 개천각에 모신 인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다. 중국 정사(正史) 모음인 25() 가운데 하나인 금사(金史)’ 등은 아골타를 고려 사람 또는 신라 사람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원()나라에 패망했다.

이러한 금나라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조선 중기 때 만주에서 후금을 세웠고 뒤를 이은 아들(태종)은 국호를 으로 바꾸고 중국과 조선을 지배해 들어갔다. 최근 재야사학계에서는 금과 후금-청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유립은 일찌감치 금 태조를 커발한 개천각에 모심으로써 금과 후금-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은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아골타가 대금제국 태조인 대성무원(大聖武元) 황제라는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환단고기와 관련된 인물들은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집안 근처 한중 국경선 부근에 살았다. 선천에는 계연수가, 삭주엔 이유립과 단군세기를 계연수에게 준 이형식이, 태천엔 삼성기단군세기’ ‘북부여기를 계연수에게 제공한 백관묵이 살았다.

 

그러나 지금 커발한 개천각과 단단학회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마니산은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고 싶어하나,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기도처를 지을 수 없다. 이러한 무속인들의 사정과 심각한 생활고에 직면한 86세의 신매녀 할머니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단단학회와 커발한 개천각은 무속인들이 거처하며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생전의 이유립 선생은 단군이 무속인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현실은 그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중국의 동북·탐원·단대공정과 일본의 만선사관

이유립을 추적하면서 기자의 머리에서 맴돈 의문은 왜 우리 사회에서 이유립은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을까하는 것이었다. 지금 재야사학계에서 거론되는 주장은 대부분 환단고기와 맥을 같이한다.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무대가 반도와 대륙이었다는 대륙 사관으로 씌어졌다. 반면 일제 때 시작된 과학적인 강단(講壇)사학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한 반도사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제작된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4~20세기에 청동기 문명이 꽃핀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요하 상류에서는 기원전 25~20세기에 만들어진 청동기문명과 그 이전에 꽃핀 신석기 후기문명 유적이 발굴되었다.

중국 문명은 황하문명을 뿌리로 한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은 모두 황하나 황하 중하류의 중원(中原)을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 황하문명보다 500여 년 이상 오래된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역사학계는 요하문명도 중국 문명의 일부이고 황하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요하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치우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국의 조상이라며 중화 3조당을 지었다.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발굴되는 청동기는 황하가 아닌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다. 고인돌의 분포 역시 그곳에서 시작돼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음을 보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모는 매우 비슷하지만 언어는 전혀 다른 것을 쓰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따진다면 한국과 가까운 것은 일본이다. 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인종인데도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갖게 됐을까. 그 이유는 문명의 뿌리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인은 황하를 중심으로 무대를 넓혀갔고 한민족은 요하에서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한민족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족은 만주를 지배했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중원을 넘어 전 중국을 점령하고 티베트(서장)와 위구르(신장)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족과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중국사로 편입될 이유를 만들고 말았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책인데 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이유립과 계연수를 실존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려 하는 것일까.

 

압록강은 고속도로였다

만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중국 문명에 고개를 숙이는 문명을 만들었기에 이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환단고기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계연수와 이유립은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평북)에 살았다. 계연수가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줬다고 한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줬다고 한 이형식도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인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 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전해진 것일까.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의 이영규씨는 조선시대 서울 경기·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평양과 전라 경상 충청까지 한양의 권력이 철저히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리면 그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북 지방은 다르다. 그곳은 국경지역인지라 한양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평북은 귀양도 보내지 않던 곳이니 관가의 영향력이 작아 환단고기 류의 사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유립이 태어난 삭주엔 압록강이 흐른다. 지금은 수풍댐이 있어 압록강이 넓어졌지만 댐이 있기 전엔 그리 넓지 않았다. 댐이 건설되기 전 삭주 지역의 압록강 폭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하구 폭과 비슷했다. 삭주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요녕성의 집안(集安) 지역을 만날 수 있다.

철도나 도로 같은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배를 만들 수 있게 된 신석기 시대 이래 고속도로기능을 해왔다. 평북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배를 저으며 수시로 고구려 유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것을 본 조선인들은 만주를 무대로 한 대륙사관을 갖게 됐을 터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을 심적으로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 문서

중국은 25사를 비롯한 방대한 역사서와 사서오경을 필두로 한 유교 경전, 그리고 음부경을 비롯한 도교의 경전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 ‘풍토기(風土記)’ 같은 수많은 책이 신도의 경전이자 일본 고대사를 적은 역사서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잦은 병란으로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서와 경전이 멸실된 상태다.

교토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로 꼽는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뒤편의 정창원(正倉院)은 고대 일본의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잖은 학자는 정창원에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우리 민족이 만든 자료들도 보관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을까. 문서를 공개하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일본은 100여 년 전 만주와 조선을 그들의 역사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滿鮮) 사관을 만들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만주국을 세웠다. 만선사관으로 압축된 일본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꺾이긴 했지만 일본 우익들은 이를 다시 내세우려고 한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없는 시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펼쳤다. 그리하여 하나라와 은나라는 물론이고 35제 시절까지도 역사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고구려가 있던 만주를 중국의 역사 공간으로 끌고 오는 (세칭)서남공정과 동북공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비롯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탐원(探源)공정도 펼치고 있다.

소중화 사상이 판치던 시절 환단고기 류의 사서는 인쇄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필사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위서 시비를 받는다면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에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기자는 이유립은 실존인물이고 그가 남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는 것, 오형기씨 필사본에는 오자가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전형배씨가 밝히는 이유립 사관영락대통일은 오늘날의 민족통일 사상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사진)은 이기 선생이 만든 단학회를 이끌고 있다. 단군교와 합치기 전의 단학회는 1909년 이기를 회장으로 해 설립됐다고 한다. 2대 회장은 계연수 선생이 맡았고, 3대는 최시흥, 4대는 이덕수, 5대는 이용담, 6대는 이유립, 7대는 전형배씨가 회장이다. 전씨에게서 이유립의 사관에 대해 들어보았다.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은 3개의 조선으로 돼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유립 선생도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그렇다. 신조선과 막조선 불조선이 있었는데, 만주의 신조선이 가장 강력했다. 그리고 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연나라에서 온 위만에게 쿠데타를 당해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했다. 이 기준의 무리가 한강 이남에 삼한을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은 단군조선의 세 조선을 ()삼한’, 기준 무리의 3한을 ()삼한’, 고구려·백제·신라를 ()삼한으로 불렀다. 이 선생은 이러한 3국 체제는 3수론을 가진 천부경 사상과 일치한다고 하셨다.환단고기에 북부여기가 별도의 책으로 들어 있는 이유는.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지역의 우리 민족은 열국시대로 들어가는데 이때 북부여가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본다. 단군조선처럼 전권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것을 북부여로 보는 것이다. 북부여는 여섯 왕이 내려가다가 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바뀐다. 이 때문에 이유립 선생은 북부여를 원시고구려, 고구려를 본고구려, 대진국(발해)을 중고구려, 고려를 후고구려로 보았다. 북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보면 이 나라는 900년을 이어간 것이 된다. 발해라는 이름은 중국이 부른 것이지 우리가 부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진국으로 불렀다.”이유립 선생은 광개토태왕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안다.이유립 선생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광개토태왕을 매우 높게 평가해 영락대통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다. 광개토태왕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고 신라 백제와도 사실상의 통일을 이룩한 군주다. 그러나 3조선 개념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존속시켜주었다.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음에도 백제를 멸하지 않았고, 신라 왕자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 신라를 존속시킨 것이 바로 영락대통일 개념이라고 이유립 선생은 강조하셨다.영락대통일은 지금으로 말하면 연방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고구려는 말갈족과 함께 중국과의 전쟁에 나섰는데 이는 말갈족이 고구려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 속에 있던 연방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영락대통일은 연방제국 개념이유립 선생은 중국인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고 봤나.고구려 제국 안에 있던 우리 민족을 말갈 여진 옥저 읍루 등 별도의 이름을 붙여 기록해놓은 것을 대표적인 왜곡으로 보았다. 말갈은 고구려 말로 강가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중국의 역사서는 이들을 말갈족이라고 적어 놓음으로써, 마치 고구려족과는 별종인 것처럼 묘사했다고 비판하셨다.”이유립 선생의 사관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만일 중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영남인과 호남인이 자꾸 싸운다는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다고 가정해보자. 먼 훗날 이 기록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영남인과 호남인은 종족이 달랐던가 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선생은 중국의 사서들이 옥저 여진 말갈 읍루로 자꾸 나눠서 기록해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지금 우리가 유의할 것은 일본이 우리 민족을 둘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북한 사람은 조선인, 남한 사람은 한국인으로 적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이 쌓이다 보면 남북한 사람은 별개의 종족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 영락대통일은 남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과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까지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거대한 통일 사상이라고 생각한다.”계연수 선생은 묘향산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탁본해 대종교에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이유립 선생께서는 계연수 선생이 약초를 캐서 서울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때 대종교에서는 천부경을 인정하지 않아 계연수 선생이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탁본했다는 말을 약초를 팔면서 퍼뜨렸다고 하셨다. 그런 소문을 내야 대종교가 천부경을 빨리 인정할 것으로 보고 그렇게 했다고 이유립 선생은 웃으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학자들의 임무

 그렇다면 이젠 학자들이 보다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한다. 환단고기 실증 작업은 북한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북한에는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환검(1대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묘향산에는 단군사라는 사당이 있다.

과거 북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요하에 있었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최근에는 평양의 단군릉 건립을 계기로 고조선은 대동강에 있었다는 쪽으로 역사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황하문명이나 요하문명과 구분되는 대동강문명을 만들어, 김일성-김정일 체제 구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의 연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위축된 북한 사학을 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강단(講壇)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환단고기 연구를 피해간다면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만선사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소중화 류의 반도사관이 환단고기 류의 대륙사관을 억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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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사가 있는 북한 묘향산에 단군사란 사당이 있다. 보현사 입구의 안내도 앞에서 단군사를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

 가운데 환웅, 좌우에 치우와 단군을 모신 커발한 개천각. 제단 맨 오른쪽에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를, 맨 왼쪽엔 세종대왕을 그 오른쪽엔 광개토태왕을 모셨다.

 강화도 마니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단단학회의 커발한 개천각. 이유립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이 쓴 태백일사 발문 다음에 오형기씨가 1949년 이유립씨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기록해놓은 발문(오른쪽 사진 중간의 桓檀古記跋이라고 된데서부터 왼쪽 사진 끝까지). 각 글자 옆에 연필로 쓴 글자는 이유립씨가 오자라고 지적한 것을 전형배씨가 받아 적어놓은 것이다.

 1979년 조병윤씨가 출판한 환단고기의 판권 부분. 조씨가 단단학회의 대표로 돼 있다.

 1984년 이유립씨가 수상한 배달문화상 상패를 들고 촬영에 응한 이유립씨 부인 신매녀 할머니. 강화도 마니산의 단단학회 건물에 거주하고 있다.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는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사진까지 전하는 실존인물이다. 오른쪽은 이기의 문인으로 태백일사등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의 초상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고성 이씨와 환단고기 사이의 관계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에 실린 계연수에 대한 기록. 그러나 이 책자에 실린 계연수 기록엔 틀린 부분이 있다.

이유립씨가 쓴 고대사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1970년대의 월간 자유.

반혁명사건으로 법정에 선 박창암씨와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

 월간 자유를 창간해 국사 찾기 운동을 벌인 고() 박창암 장군.

 이유립 선생이 타계한 후인 1987년에 출간된대배달민족사’(5).

 치우를 엠블럼으로 한 대형 깃발을 내세운 붉은악마 응원단.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등에 실려 있는 가림토 문자. 원시 한글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의 이름을 추모로 밝히고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환단고기를 전한 이유립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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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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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한국 땅’ 日지도 첫 공개

김문길 교수, 日교토 기타노덴만구서 원본 확인

대마도(對馬島·일본명 쓰시마)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옛 지도 2점이 처음으로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 28일 공개된 ‘대마여지도’. 에도시대 일본 지리학자가 제작한 이 지도의 점선안에는 ‘부시준조선국지지례칙부향군령지470리(釜示准朝鮮國地之例則府鄕郡令之470里:대마도의 부·향·군 모든 법칙은 조선국 부산에 준한다. 거리는 470리다.)’라고 적혀 있다.
마산 연합뉴스

 

부산외국어일본어학부 김문길 교수는 28일 경남 마산문화원에서 열린 ‘대마도 고지도 전시회’에서 대마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여지도(對馬與地道)’와 사본을 전시했다. 대마여지도는 1756년 6월 일본 지리학자 모리고안(森幸安)이 에도시대 막부의 명을 받아 제작한 뒤 공인을 받은 것으로 현재 원본이 교토 기타노덴만구(北野天滿宮)에 소장돼 있는 것을 김 교수가 찾아냈다.

2003년 출간된 모리고안 지도에 수록된 이 지도에는 ‘부시준조선국지지례칙부향군령지470리(釜示准朝鮮國地之例則府鄕郡令之470里·대마도의 부·향·군 모든 법칙은 조선국 부산에 준한 것이다. 거리는 470리다.)’라고 적혀 있다.

김 교수는 “지난여름 일본에서 이 지도를 찾아냈는데 사본으로만 볼 수 있어 아쉬웠지만 일본의 지리학자가 공식적으로 직접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 1834년에 제작된 청구도 동래부 기장현 지도는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데 김 교수가 직접 확인해 사본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이 지도에는 ‘본예신라수로470리재동래부지동남해중지실성왕7년무신왜치영어차도(本隸新羅水路四百七十里在東萊府之東南海中至實聖王7年戊申倭置營於此島)’라고 적혀 있다. 이는 ‘대마도는 원래 신라 땅에 예속되어 있고, 실성왕 7년까지 동래부에 속한 섬으로 470리 거리 동남쪽 바다에 있다. 무신년에 왜(일본인)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이 지도는 동래부 기장현을 중심으로 그린 것으로 대마도가 지금의 부산 동래부 기장현에 예속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역사를 되짚어 각종 자료와 고증을 통해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그 땅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후세에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대마도의 실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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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6.2지방선거는 이명박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판 싸움으로 비유하는 이들이 많다. 천안함  사고가 발생한 지 2개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대통령)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1주기가 지난지 1주일이 되었다. 6.2지방선거운동도 막바지에 이른 지금, 우리 현대사에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두 사건에서 여러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사건들은 당국자들이 사건들의 전모를 공식적으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많은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노대통령 죽음의 직접 원인에 대하여 일각에서 줄기차게 '의문사'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필자는 이 사건들을 일으킨 주체나 배경, 원인,  의미 등에 대해 논하기보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팩트 중심으로 두 사건의 공통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노대통령에 대한 '의문사'라는 용어는 '사고'로 하겠다, 사실이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 
 
  첫째, 조사(수사)당국 이 발표하는 사건발생 시간이 수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천안함 사고는 사고 당일 21:45분에서 21:30, 21:25, 21:23 등으로 바뀌었고. 정확한 시간이 언제냐하는 데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노대통령이 사고 당일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한 시간은 당초 6시 12~13분에서 6시 40분대로, 다시 6시 20분경으로 바뀌었다.
 
   둘째, 조사 주체가 이들 사건에 대한 중립적, 객관적 조사를  담보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찬안함 사고의 경우 문책대상인 군 지휘부가 조사를 주도한 것은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게 사실이다. 노대통령의 경우 경남도경 특별수사본부가 제대로 수사할 수 있었는가하는 문제 제기가 많았었다. 경찰의 조사 협조요청에 대해 경호관(들)이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하는 보도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셋째, 사건 발생 초기 조사에 소수의 특정 사고관련자들의 진술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천안함 참사는 함장과 지휘라인에 있는 일부 지휘관의 진술로 제한되였고, 사고 당일 21:15경 수병들과 통화한 지인들의 증언은 무시되었다. 생존 장병들은 엄격한 통제하에 제한적인 증언만 허용되었고, 유가족들은 감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노대통령의 '투신' 당일 산중에서의 행적에 대한 증언도 수행 경호관의 오락가락하는 진술에 크게 의존하였고 노대통령을 목격했다고 하는 등산객, 마을 주민, 선법사, 보살, 의경 등의 증언은 무시되거나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졌거나 혹은 왜곡되었던 것 같다.  
 
   넷째, 극한적 위기 상황에서 상용통신망(핸드폰)으로 교신을 하였다는 점이다. 천안함 사고의 경우핵심 관계자들이 군 통신망 대신 상용통신망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의혹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을 찾아헤매던 경호관이 그 위급한 상황에서 무전기를 놔두고 핸드폰을 사용한 것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의혹을 사게 했던 것 같다. 
 
   다섯째, 증거자료의 외부공개가 차단, 통제, 왜곡된 의혹이 많다는 점이다. 천안함 사고는 군사기밀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여론에 떠밀려 TOD영상자료가 조금씩 공개되었고,  항적기록, 교신일지 등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5월 19일 건저낸 가스터빈도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노대통령 사고의 경우도 비슷하다. 여론에 밀려 노대통령 장례 후에야 공개한 CCTV편집영상에 대해 많은 네티즌 및 시민들이 조작된 게 아니냐 하는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부엉이바위를 향하고 있었던 CCTV, 세영병원의 CCTV 등도 당국에 의해 고장 등의 이유로 존재 자체가 부인되었다.    
 
   여섯째, 객관적인 조사 여부가 의심받고 있다는 점이다. 엄격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진행된 천안함 사고 민관합동조사단의 조사활동은 과학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만 하겠지만 과연 '객관적'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노대통령 사고의 경우 사고 당일 급파된 국립과학수사팀이 활동을 하지 못하고 되돌아 간 이유가 석연치 않다.  
 
   일곱째, 시신을 부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천안함 사고의 경우 부검으로 사고 원인을 밝혀줄 중요한 증거를 찾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함수를 인양할 때 발견된 희생장병의 경우 더욱 부검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노대통령 사고의 경우 그 분이 초VIP라는 점을 감안하였다면 가족이나 측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당연히 부검을 하여 어떠한 의혹이나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말았어야 한다고 본다.(케네디대통령, 마이클 잭슨 등 참조)    
 
   여덟째, 사고 초기 공영TV매체에 의혹을 살만한 장면이 전파를 탔다는 점이다. 천안함 생존자를 구조할 당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콧머리가 잘려나간 듯한 함수가 파도 위를 둥둥 떠돌던 장면, 사고 초기 '좌초', ' 침수' 등의 자막이 들어 있는 영상화면, 제3부표 위를 날던 헬기 등이 그것이다. 노대통령의 경우 사고 당일 오전 10시 30분경 YTN 카메라에 노대통령의 상의를 들고 소나무숲 비탈길을 뛰어다니며 촬영을 하던 경찰(?)의 모습은 당국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고현장을 조작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혹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고 하겠다.
 
   아홉째, 어느 누구도 지휘라인에서 사고로 문책을 당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천안함 사고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사고였음에도  아직까지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문책당한 지휘관이 아무도 없다. 노대통령 사고의 경우 일선 경호관들에게 가벼운 징계 조치를 한 정도로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이 정리해 본 두 사건의 공통점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그동안 각종 미디어를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을 나열한 글일 뿐이다. 정리한 내용 중에 일부 부정확한 점도 있을 것이다.  이점 양해하여 주기를 다시한번 부탁드린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하여 남아 있는 의혹들이 어서 속히 말끔하게 해소되어 진정한 국민통합이 이루어 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  또 다른 글 -




1. 논리적 상식적으로 타당성이 높은 수많은 증거들은 언론에서 철저히 무시되면서,
상대적으로 타당성이 낮은 소수의 증거들은 언론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네티즌과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수긍할만한 뉴스가 나오면 바로 간판 내리고...
타당성도 떨어지고 국민한테 개무시 당하는 뉴스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2. 정부보다 언론이 먼저 결정하고, 결국 '언론의 결정'를 '정부가 보도'한다.

노무현 의문사에서는 언론이 먼저 자살이라 결론내리고 발표했다.
물론 자살이란 뉴스가 나온 시간에는 노무현은 자살한 것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직 사망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부는, 처음 언론의 발표대로 닥치고 자살로 결론 지었다.
 
천안함 사태에서는 언론이 먼저 북한공격에 의한 침몰이라고 결론내리고 '발표'했다.

물론 침몰이란 뉴스가 나온 시간에는, 아직 침몰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정부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최종적으로 북한공격이라고 결론지어 '보도'한다.



3. 없던 증거물이 나타나고, 있던 증거물도 없어진다. 심지어는 없어졌던 증거물이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네티즌이 의문만 제기했다 하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증거가 발견된다.
 
노무현의 혈흔과 유서는 있다가 없다가 있다가를 반복한다.
노무현 서거일이 5월23일인데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조선일보의 배너파일명은 하루전 날짜인 '20090522' 이다. 물론 증거인 배너파일도 금방 없어졌고, 조선일보의 배너파일명 표시방법도 완전 바뀌었다.
 
천안함에서는 절대 없었다던 화약냄새가 어뢰가 되어 돌아오고..
눈으로 본적은 없다던 물기둥이, 본적은 없지만 얼굴에 튀는 감촉으로 돌아온다.
쌍끌이 어선으로 바닥을 긁다가 어망이 찢어져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던 백령도 바다 밑바닥에서, 다시 굳이 죽음을 무릅쓰고 쌍끌이를 투입해서 결국은 건져낸 어뢰 파편..
 
TOD동영상이 있지만 군사기밀이라 공개불가였는데, 공개하려고 보니 사라지고 없더라...
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원래부터 찍힌 게 없었다 하더니, 나중엔 3시간짜리 풀버전으로 재등장!! (편집이 끝났을만한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심지어는 증거물이 발견되는 순서도, 네티즌이 의문을 제기하는 순서와 일치한다.
증거물들이 발견되는 순서는 무작위적이어야 하는데, 생각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간다.

뭐든 의문만 제기하면 없어지고, 의혹만 제기하면 나타나는 수많은 증거들..
다음에는 사건현장에 황금송아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문을 제기해야겠다!!


 
4. 있다 없다를 반복하는 증거물과 함께 공식 발표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처음엔 북한이 그랬다고 하다가, 북한만은 아니라고 했다가, 북한만이 아닌것은 아니라고 했다가,북한 아닌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한다.
 
(자작극이라 하니까) 폭발물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가, 암초일 수도 있다고 했다가,
(해군이 암초 위치도 모르냐니까) 너울파도에 의한 피로파괴라고 했다가,
(4대강 세금갈취로 인한 정비불량이라 하니까) 피로파괴는 절대 아니라면서,
결국은 다시 어뢰(폭발물)라고 했다가, (천암함 상태가 멀쩡하다 하니까) 직접타격이 아닌 버블젯 어뢰란다. (증거가 없다니까) 구형어뢰 프로펠러 발견되고,

(버블젯은 최첨단 어뢰만 가능하다더니) 닥치고 어뢰란다.
그것도 독일제 화약으로 정체를 숨긴 거란다.

(정체를 숨겼다더니..) 자랑스런 한글 '1번'으로 정체를 숨긴 어뢰?
 
지금까지 정부 발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있지 않은 것은 아닌데, 없지 않다고 볼수만은 없다고 한다.
참으로 말장난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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