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쓰지 못하는 낡은 만년필 하나, 그리고 인간 김대중
가슴에만 묻어두었던,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그 때가 아마 그 분이 막 대통령에 당선되셨을 그 즈음,당선자 신분이었을 때의 일로 기억됩니다.물론 저는 이전에 그 분과 한번도 뵌 적이 없었습니다.7080세대가 그렇듯 먼 발치에서 의연하게 독재와 맞서는 그 분을 지켜보기만 했었지요.그 때 한 지인을 통해 그 분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대통령 당선자를 만난다는 설렘 보다 이 척박한 땅에도 자유와 민주의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증명해 보인 투사,그 분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쳤습니다.그 분이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그러면 저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이런저런 생각에 밤이 참 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대목에서 잠깐 왜 그 분이 절 찾으셨는지,짧은 배경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저는 현직 신문기자입니다.그 때도 신문기자였습니다.그 분이 마지막 선거에 나섰을 때,저는 한국기자협회 소속 단위 기자협회장이었습니다.그 때 양심있는 언론인들의 최대 고민은 공정한 선거보도였습니다.부끄럽지만 기자로서 양심을 파는 부류도 없지 않았던 시절이었고,그래서 그런 ‘장난질’을 막고 정말 유사 이래 처음으로 공정한 선거 한번 치르게 언론인들이 사명감을 가져보자는 묵언의 공감대가 이뤄졌었지요.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는 24시간 안기부의 감시 속에 있었습니다.제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들에게 포촉되었고,아마 윗선으로 보고도 됐을 것입니다.그건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기자협회의 단위 회장이라는 신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많지 않은 동지들이 모였습니다.“이건 소문 내서 될 일이 아니다.전격적으로 해치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언론계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나왔다는 ‘대통령선거 공정보도 준칙’이었습니다.물론 이 준칙이 정규 일간지에는 거의 실리지 않았습니다.이걸 보도한 매체는 당시 기자협회보가 거의 유일했습니다.내용은 이랬습니다.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어떤 주의·주장도 배제한다.역사적·시대적 양심에 반하는 어떤 시도도 보도하지 않는다.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보도로써 응징한다는,다소 도발적이고,일견 무식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부정하고 부당한 기도를 응징한다고 했지만 응징을 받은 쪽은 저희였습니다.이후 당시 안기부의 집요한 접근과 감시가 계속됐습니다.사주를 통해 관련 기자를 조치하라는 압력이 가해지기도 했고,회유도 끝이 없었습니다.다행히 고집 센 사주 덕에 짤리지는 않았지만 위태위태한 위기감은 대통령 선거 내내 계속됐습니다.그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만나자거나 밥 먹자,술 마시자 회유를 멈추지 않았고,틈만 나면 찾아와 족쇄를 채우려 들었습니다.그들로부터 온갖 질문이 쏟아졌습니다.일일보고를 해야 하니 내부 동향에 대해 한 마디만 해 달라는 청유에서부터,당신 기자 오래 할 사람 아니냐.협조해 달라는 협박까지 온갖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사람도 보도준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모두가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켰고,선거는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단언컨대 이전에 김대중 후보와는 어떤 교감도 없었고,저희가 내놓고 그 후부를 지원하지도 않았습니다.저희가 지키고자 한 가치는 기자로서의 양심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뜻밖에 그 분으로부터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난 곳은 동교동 자택이었습니다.조용하게 그 분과 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집안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그 인파 속에 묻혀 있자니 잠깐,나는 기자다,기자가 사적으로 권력자를 알현하려고 이런 곳에 와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일었고,얼른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엉거주춤 쭈볏거리고 있자니 비서관인 듯 한 사람이 저를 찾더군요.정확하게 약속한 시간이었습니다.비서관은 제게 “지금 선생님께서 찾으신다.”고 전했습니다.그래서 발디딜 틈도 없는 거실로 들어서니 그 분께서는 소파에 앉아계시다가 비서관의 소개를 받자 일어서서 반갑게 악수를 청하셨습니다.그리고는 좌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이 젊은이는 신문기잡니다.제 편을 드는 기자가 아니라 바로 보고,바로 쓰려고 애쓰는 기잡니다.이번 선거 중에 공정보도 준칙이라는 것을 통해 기자들의 양심적인 보도를 촉구해 제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아마 이런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입고 계신 윗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하나 꺼내 선뜻 제게 건네시더군요.“기자에게는 이 선물이 제일 어울릴 것 같습니다.”라면서요.그러고는 몇 마디 더 질문을 주시더군요.지금의 언론환경은 어떠냐,보도준칙 발표 당시 어려운 일 많았을텐데 용케 공표까지 했다는 등의 말씀을 주셨고,더러는 좌중이 너무 소란스러워 제가 알아듣지 못한 말도 있었습니다.그 북새통에 그 분의 시간을 뺏는 일이 면구스럽기도 해 일어서려는데,아마 부엌일 하시는 분인 듯 싶은 아주머니가 제게 작은 사발 하나를 건네시더군요.가만 보니 산 낙지를 다져 참기름소금에 버무린,요새 말하는 ‘탕탕이’였습이다.경황은 없었지만 맛있게 먹었습니다.그게 전부였습니다.열심히 하라는 그 분의 격려를 끝으로 동교동을 나섰고,이후 그 분과는 어떤 교분도 갖지 않았습니다.그 분은 바쁜 대통령이 되셨고,저는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기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날,돌아오는 길,기분이 참 좋았습니다.만약 그 분께서 항용 그렇듯 촌지 봉투를 건네셨다면 단호히 거절하리라 맘 먹고 갔는데,뜻밖에 쓰시던 만년필을 꺼내 주시니,기자인 제게 그보다 더 멋진 선물이 어딨겠습니까.굵고 무거운 몽블랑 만년필.그런 만년필은 사실 기자가 일상적으로 쓰기엔 불편한 필기구입니다.그러나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말라며 건넨 그 만년필이기에 제겐 소중하기 비할 데 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물론 제 손으로 잉크 한번 채워보지 않았고,그 걸로 기사 한 줄 쓰지 않았지만,지금도 그 분의 뜻이 따뜻한 체온으로 제게 전해지는 것만 같아 가슴 한 켠이 한없이 허전하고 슬픕니다.
그 분은 누가 뭐래도 우리 현대사에 형형한 큰 별이었습니다.과거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그 분의 태생이 어디였고,그의 정치적 기반이 어디였든,또 그의 성향이 어떠했든,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인 우리 정치 무대에서 그만큼 민족적 자의식이 강하고,민족의 미래에 대해 현철한 비전을 제시하며,온 몸으로 불의에 맞선 사람,숱한 음해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가장 시종여일한 평화주의자였으며,그의 평생의 좌우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이 말하듯 인간을 사랑한 투철한 인본주의자였으며,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끈질기고 영악하게 국익을 지켜낸 탁월한 외교가였고,대북 화해정책에서 보듯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일관되고 변함없는 통일론자,화합주의자였습니다.이런 거목을 다시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를 인동초에 비유합니다.결코 타협없이 엄혹한 겨울 같은 탄압의 시절을 견뎌낸 신념 때문에 얻은 별명일 것입니다.그런 신산의 삶을 살아온 그를 과거의 전체주의적 통치자와 맹신적 추종자들은 ‘빨갱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생각해 보십시오.우리보다 훨씬 보수적이어서 우익이 50년 넘게 일당독제 체제를 굳히고 있고,그 우익들을 앞세워 우리나라 국권을 침탈했던 일본 같은 완고한 나라에도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이 합법적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런 이념의 덫을 아직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리영희 선생이 말씀하셨듯 ‘새는 좌의 날개를 가져야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이 진보적 정치 사상을 가졌다고 섣불리 좌파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암튼 연방제 통일론이나 4대국 보장론 같은 그의 앞선 혜안은 정적들에게 언제나 큰 부담이었음이 틀림없고,이 때문에 그는 평생 형극의 수렁에서 헤매야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이제 우리도 서구의 선진국들처럼 유치한 이념의 진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우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세계 무대에서 구속없이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습니다.우라는 질곡의 세상을 살았지만 우리 아들과 딸에게는 그런 주눅든 유산을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고, 그 바람에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것까지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자의적 선택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다.이 나라엔 아직 당신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다.그러니 조금만이라도 더 버텨 주시라고 참 많이 기도하고,기원했습니다만,하늘이 그 분을 더 원하셨는지 무덥고 후텁지근한 날 이른 오후,그 분께서 그토록 아끼고,사랑하고,존경해 마지 않던 이 땅의 민초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핍박 속에서 더욱 강인했고,모함과 마주할수록 더욱 당당했으며,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이 시대의 사표를 이제 보내드려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 분을 경원합니다.더러는 사갈시하는 부류도 없지 않습니다.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좀 더 구체적으로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고 화해주의자며,목숨을 거로 통일을 지향한 이가 바로 김대중이었습니다.배 부른 소수를 결코 미워하지 않았으면서도 배 고픈 다수를 더 애처롭게 여겨 먼저 껴안은 이가 김대중이었습니다.성장론 보다 분배론에 무게중심을 뒀던 그의 치세에서 더러는 불이익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악의적인 지역감정의 망령에 세뇌되어 그 분이 ‘준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이제 그 분은 우리 곁에 없습니다.죽은 이는 모든 것에 관대하고,모든 이는 죽은 이를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 분이 생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폭정의 가해자까지 용서한 만큼 그를 미워한 모든 이들이 이미 고혼으로 세상을 떠난 그 분과 그의 삶,가치와 이상을 기꺼이 껴안아 주셨으면 합니다.고인의 명복을 빌며,다른 세상에서도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삼가 머리 숙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하며 혼령이나마 조국을 지켜 주소서.
가슴이 뛰었습니다.대통령 당선자를 만난다는 설렘 보다 이 척박한 땅에도 자유와 민주의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증명해 보인 투사,그 분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쳤습니다.그 분이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그러면 저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이런저런 생각에 밤이 참 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대목에서 잠깐 왜 그 분이 절 찾으셨는지,짧은 배경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저는 현직 신문기자입니다.그 때도 신문기자였습니다.그 분이 마지막 선거에 나섰을 때,저는 한국기자협회 소속 단위 기자협회장이었습니다.그 때 양심있는 언론인들의 최대 고민은 공정한 선거보도였습니다.부끄럽지만 기자로서 양심을 파는 부류도 없지 않았던 시절이었고,그래서 그런 ‘장난질’을 막고 정말 유사 이래 처음으로 공정한 선거 한번 치르게 언론인들이 사명감을 가져보자는 묵언의 공감대가 이뤄졌었지요.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는 24시간 안기부의 감시 속에 있었습니다.제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들에게 포촉되었고,아마 윗선으로 보고도 됐을 것입니다.그건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기자협회의 단위 회장이라는 신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많지 않은 동지들이 모였습니다.“이건 소문 내서 될 일이 아니다.전격적으로 해치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언론계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나왔다는 ‘대통령선거 공정보도 준칙’이었습니다.물론 이 준칙이 정규 일간지에는 거의 실리지 않았습니다.이걸 보도한 매체는 당시 기자협회보가 거의 유일했습니다.내용은 이랬습니다.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어떤 주의·주장도 배제한다.역사적·시대적 양심에 반하는 어떤 시도도 보도하지 않는다.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보도로써 응징한다는,다소 도발적이고,일견 무식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부정하고 부당한 기도를 응징한다고 했지만 응징을 받은 쪽은 저희였습니다.이후 당시 안기부의 집요한 접근과 감시가 계속됐습니다.사주를 통해 관련 기자를 조치하라는 압력이 가해지기도 했고,회유도 끝이 없었습니다.다행히 고집 센 사주 덕에 짤리지는 않았지만 위태위태한 위기감은 대통령 선거 내내 계속됐습니다.그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만나자거나 밥 먹자,술 마시자 회유를 멈추지 않았고,틈만 나면 찾아와 족쇄를 채우려 들었습니다.그들로부터 온갖 질문이 쏟아졌습니다.일일보고를 해야 하니 내부 동향에 대해 한 마디만 해 달라는 청유에서부터,당신 기자 오래 할 사람 아니냐.협조해 달라는 협박까지 온갖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사람도 보도준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모두가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켰고,선거는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단언컨대 이전에 김대중 후보와는 어떤 교감도 없었고,저희가 내놓고 그 후부를 지원하지도 않았습니다.저희가 지키고자 한 가치는 기자로서의 양심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뜻밖에 그 분으로부터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난 곳은 동교동 자택이었습니다.조용하게 그 분과 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집안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그 인파 속에 묻혀 있자니 잠깐,나는 기자다,기자가 사적으로 권력자를 알현하려고 이런 곳에 와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일었고,얼른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엉거주춤 쭈볏거리고 있자니 비서관인 듯 한 사람이 저를 찾더군요.정확하게 약속한 시간이었습니다.비서관은 제게 “지금 선생님께서 찾으신다.”고 전했습니다.그래서 발디딜 틈도 없는 거실로 들어서니 그 분께서는 소파에 앉아계시다가 비서관의 소개를 받자 일어서서 반갑게 악수를 청하셨습니다.그리고는 좌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이 젊은이는 신문기잡니다.제 편을 드는 기자가 아니라 바로 보고,바로 쓰려고 애쓰는 기잡니다.이번 선거 중에 공정보도 준칙이라는 것을 통해 기자들의 양심적인 보도를 촉구해 제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아마 이런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입고 계신 윗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하나 꺼내 선뜻 제게 건네시더군요.“기자에게는 이 선물이 제일 어울릴 것 같습니다.”라면서요.그러고는 몇 마디 더 질문을 주시더군요.지금의 언론환경은 어떠냐,보도준칙 발표 당시 어려운 일 많았을텐데 용케 공표까지 했다는 등의 말씀을 주셨고,더러는 좌중이 너무 소란스러워 제가 알아듣지 못한 말도 있었습니다.그 북새통에 그 분의 시간을 뺏는 일이 면구스럽기도 해 일어서려는데,아마 부엌일 하시는 분인 듯 싶은 아주머니가 제게 작은 사발 하나를 건네시더군요.가만 보니 산 낙지를 다져 참기름소금에 버무린,요새 말하는 ‘탕탕이’였습이다.경황은 없었지만 맛있게 먹었습니다.그게 전부였습니다.열심히 하라는 그 분의 격려를 끝으로 동교동을 나섰고,이후 그 분과는 어떤 교분도 갖지 않았습니다.그 분은 바쁜 대통령이 되셨고,저는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기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날,돌아오는 길,기분이 참 좋았습니다.만약 그 분께서 항용 그렇듯 촌지 봉투를 건네셨다면 단호히 거절하리라 맘 먹고 갔는데,뜻밖에 쓰시던 만년필을 꺼내 주시니,기자인 제게 그보다 더 멋진 선물이 어딨겠습니까.굵고 무거운 몽블랑 만년필.그런 만년필은 사실 기자가 일상적으로 쓰기엔 불편한 필기구입니다.그러나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말라며 건넨 그 만년필이기에 제겐 소중하기 비할 데 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물론 제 손으로 잉크 한번 채워보지 않았고,그 걸로 기사 한 줄 쓰지 않았지만,지금도 그 분의 뜻이 따뜻한 체온으로 제게 전해지는 것만 같아 가슴 한 켠이 한없이 허전하고 슬픕니다.
그 분은 누가 뭐래도 우리 현대사에 형형한 큰 별이었습니다.과거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그 분의 태생이 어디였고,그의 정치적 기반이 어디였든,또 그의 성향이 어떠했든,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인 우리 정치 무대에서 그만큼 민족적 자의식이 강하고,민족의 미래에 대해 현철한 비전을 제시하며,온 몸으로 불의에 맞선 사람,숱한 음해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가장 시종여일한 평화주의자였으며,그의 평생의 좌우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이 말하듯 인간을 사랑한 투철한 인본주의자였으며,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끈질기고 영악하게 국익을 지켜낸 탁월한 외교가였고,대북 화해정책에서 보듯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일관되고 변함없는 통일론자,화합주의자였습니다.이런 거목을 다시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를 인동초에 비유합니다.결코 타협없이 엄혹한 겨울 같은 탄압의 시절을 견뎌낸 신념 때문에 얻은 별명일 것입니다.그런 신산의 삶을 살아온 그를 과거의 전체주의적 통치자와 맹신적 추종자들은 ‘빨갱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생각해 보십시오.우리보다 훨씬 보수적이어서 우익이 50년 넘게 일당독제 체제를 굳히고 있고,그 우익들을 앞세워 우리나라 국권을 침탈했던 일본 같은 완고한 나라에도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이 합법적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런 이념의 덫을 아직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리영희 선생이 말씀하셨듯 ‘새는 좌의 날개를 가져야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이 진보적 정치 사상을 가졌다고 섣불리 좌파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암튼 연방제 통일론이나 4대국 보장론 같은 그의 앞선 혜안은 정적들에게 언제나 큰 부담이었음이 틀림없고,이 때문에 그는 평생 형극의 수렁에서 헤매야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이제 우리도 서구의 선진국들처럼 유치한 이념의 진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우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세계 무대에서 구속없이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습니다.우라는 질곡의 세상을 살았지만 우리 아들과 딸에게는 그런 주눅든 유산을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고, 그 바람에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것까지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자의적 선택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다.이 나라엔 아직 당신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다.그러니 조금만이라도 더 버텨 주시라고 참 많이 기도하고,기원했습니다만,하늘이 그 분을 더 원하셨는지 무덥고 후텁지근한 날 이른 오후,그 분께서 그토록 아끼고,사랑하고,존경해 마지 않던 이 땅의 민초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핍박 속에서 더욱 강인했고,모함과 마주할수록 더욱 당당했으며,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이 시대의 사표를 이제 보내드려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 분을 경원합니다.더러는 사갈시하는 부류도 없지 않습니다.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좀 더 구체적으로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고 화해주의자며,목숨을 거로 통일을 지향한 이가 바로 김대중이었습니다.배 부른 소수를 결코 미워하지 않았으면서도 배 고픈 다수를 더 애처롭게 여겨 먼저 껴안은 이가 김대중이었습니다.성장론 보다 분배론에 무게중심을 뒀던 그의 치세에서 더러는 불이익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악의적인 지역감정의 망령에 세뇌되어 그 분이 ‘준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이제 그 분은 우리 곁에 없습니다.죽은 이는 모든 것에 관대하고,모든 이는 죽은 이를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 분이 생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폭정의 가해자까지 용서한 만큼 그를 미워한 모든 이들이 이미 고혼으로 세상을 떠난 그 분과 그의 삶,가치와 이상을 기꺼이 껴안아 주셨으면 합니다.고인의 명복을 빌며,다른 세상에서도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삼가 머리 숙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하며 혼령이나마 조국을 지켜 주소서.
'HERO'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DJ의 서거가 억울하고 분하다" --- 그의 죽음이 헛되이지 않으려면 꼭 읽어보세요 (0) | 2009.08.20 |
---|---|
김대중 전 대통령 6.15 기념행사 발언 [ 2009년 서거직전 연설 ] (0) | 2009.08.20 |
김대중대통령 이렇게 오열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0) | 2009.08.20 |
★ 故 김대중대통령에게 노벨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 위원장이였던 군나르 베르게의 '이상한 한국' (6) | 2009.08.20 |
마지막 통역사가 지켜본 김前대통령 (0) | 2009.08.20 |
"김대중 전 대통령 의연한 모습 생생" (2) | 2009.08.19 |
안철수 "김前대통령님, 경청과 배려 많으셨던 분" (0) | 2009.08.19 |
사람사는 세상 고 노무현대통령 홈피에 올린 명계남씨의 명필입니다. (0) | 2009.08.19 |
최근에 한을 품고 죽은 명사들 (0) | 2009.08.18 |
'이순신 장군의 밥상'엔 고추장이 없다? (0) | 2009.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