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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이대로 진실을 영원히 묻어버릴 것인가? "

이승헌 미 버지니아대 물리학 교수는 국회 천안함 특별위원회 소속 최문순 의원의 자문 요청을 받고 최 의원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 후 이 교수는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기고문을 보내 이 문제를 집중 제기하고,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볼 수 있는 웹사이트에도 자신의 분석을 게재했다.

▲ 이승헌 버지니아대 물리학 교수
생소한 과학 용어가 등장하지만 이 교수의 결론은 간단하다. 폭발실험에서 나온 물질과 어뢰·선체에서 나온 물질이 같지 않기 때문에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합조단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세 가지 물질이 정확히 일치한다 해도 '폭발' 결론을 내리는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이 되기는 어려운데, 데이터가 다르고 서로 모순되는 상태에서 '폭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과학을 벗어난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프레시안>은 현재 일본 도쿄대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승헌 교수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프레시안 : 민군 합동조사단에도 윤덕용 민간 측 단장을 비롯해 최고 수준의 과학자가 있다. 그런데 흡착물 분석 결과의 불일치 같은 문제를 왜 검토하지 않았을까?

이승헌 : 합조단장인 윤덕용 전 카이스트 총장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훌륭한 연구 업적을 가진 분이라는 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만 해도 분야가 넓어서 자기 전공분야가 아니면 관련 데이타를 깊게 이해하기 어렵다.

윤덕용 단장이 하버드대 박사 과정 시절 썼던 페이퍼를 보니, 그 분은 시차열분석(Differential Thermal Analysis) 분야에 관한 전문가인 것 같다. 그런 분야를 전공한 분이 합조단장이 된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그 분은 엑스레이 산란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그 데이터에 드러나는 불일치를 잡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이승헌 교수는 선제 및 어뢰 추진체 흡착물에 대한 에너지 분광기 분석에서 나타났던 알루미늄이 엑스레이 회절기 분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합조단은 폭발 직후 생기는 알루미늄의 용해와 급냉각으로 비결정질(amorphous)의 알루미늄 산화물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그런 현상이 실제로 있다는 보고서와 논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헌 : 간단히 설명하자면, 폭약에는 상당량의 결정질 알루미늄이 들어가는데 이 알루미늄이 폭발 후 온도가 올라간 후 냉각이 되면 어떤 물질이 되는 지가 중요한 핵심 문제 중의 하나다.

합조단은 그 결정질 알루미늄이 폭발 과정에서 100% 비결정질 산화알루미늄이 되어 엑스레이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산화알루미늄은 비결정질화 되는 게 아주 어려워서 100% 비결정질화 됐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알루미늄의 일부만 비결정질물로 산화되면 나머지 결정질 알루미늄에서 나오는 뾰족한 피크가 엑스레이 회절에서 나와야 한다.

만일 100% 비결정질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엑스레이 회절에서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결정질 물질에서 나오는 뾰족한 피크는 아니지만 넓은 피크가 특정한 위치에서 보여야 한다. 천안함 선체 외 어뢰 추진체에서 나온 흡착물의 에너지 분광 데이터와 엑스레이 데이터는 서로 상충하며, 이 불일치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자세한 과학적인 논증은 내가 영어로 쓴 페이퍼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승헌 교수 영문 보고서 바로가기)

프레시안 : 폭발 상황은 평형상태가 아니라 매우 극단적인(extreme)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승헌 : 극단적이든 어떻든 원자들은 남아 있다. 극단적인 상황이 지나간 다음에 온도가 낮아지면 어딘가에 원자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다른 원자와 결합해 어떤 물질을 만들었더라도 엑스레이 회절기에서 나타나야 한다. 이 경우에는 에너지 분광기에는 나왔는데 엑스레이에서는 보이지 않을 수는 없다.

▲ 합동조사단이 화약 물질을 발견했다고 하는 어뢰 추진체의 모습 ⓒ뉴시스

프레시안 : 어뢰 추진체에 써 있는 '1번' 글씨에 관한 분석에서, 어뢰 추진체에 최소 325℃의 열이 발생했고, 잉크 성분 중 비등점이 가장 높은 크실렌의 비등점이 138.5℃이기 때문에 잉크가 다 타버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폭발은 물속에서 일어났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이 아직까지 나온다.

이승헌 : 복잡하게 얘기할 필요가 없는 반론이다. 결정적 증거물이라고 가져온 어뢰 추진체의 표면이 녹이 슬어 있었다. 그건 폭발이 나서 어뢰 밖에 칠해져 있던 페인트가 타 버렸다는 것이다. 잉크보다 비등점이 높은 페인트가 탔는데 잉크가 하나도 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있을 수는 없다.

프레시안 : 잉크와 흡착물 문제 외에 추가로 제기할 문제는?

이승헌 : 다른 전문가 분들이 여러 가지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이 없다. 나는 단지 합조단이 '과학적인 증거'라고 제기한 것들에 대해 그 분야의 전문가의 입장에서 그 '과학적인 증거'들의 타당성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천안함은 왜 침몰했다고 생각하나?

이승헌 : 정보가 충분치 않아서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합조단이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면, 여러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납득할 만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정보가 닫혀있는 상태이다.

프레시안 : 왜 합조단의 발표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이승헌 : 합조단이 과학의 이름을 내세워 결론을 내렸고, 그 파장이 대단하다. 그러면 과학자의 입장에서 결론이 타당했는지, 데이터가 타당했는지 검증을 해봐야 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최근에 민주당 최문순 의원이 나에게 자문을 구해서 일부 정보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만약 한국에서 이 분야를 전공하는 사람이 이 데이터를 봤다면 나와 같은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문제점이 나오고, 며칠만 공부해 보면 맞는지 틀린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정보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학계에 계시는 분들이 말씀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문순 의원이 천안함 특위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보를 다 받지는 못하는 걸로 알고 있다. 내가 본 정보조차도 특위에서 여러 차례 요청을 한 이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대부분의 자료가 비공개로 되어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열린 민주주의 사회라면 반드시 자정능력이 있어야 한다. 최대한 가능한 자료가 공개되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해 사회적인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를 합리적인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천안함 문제로 한국 사회의 이성과 합리성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말이 있다.

이승헌 : 사실 가슴이 아프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1980년대 초 고대를 다녔다. 정부에 대한 반대가 전혀 허용되지 않았을 때다. 학생들이 교정에서 유인물을 뿌리면 5분 이내에 교내에 상주하던 경찰들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갔다. 나는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었다.

그런데 요즘 다시 한국 사회가 그런 분위기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건 아니지만, 정부의 천안함 결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신상철 씨, 박선원 박사, 도올 김용옥 선생, 심지어 이정희 의원까지도 국회에서 했던 말 때문에 고소됐다.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도올 선생. 그 분의 주장을 전적으로 따르고 말고를 떠나서, 그처럼 생각이 깊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국에 있고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생각과 말에 100%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런 분들은 사회적으로 존중해줘야 한다. 그런데 그런 분이 자기와는 다른 생각을 강연에서 말했다는 이유로 고소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합리적인 사회라는 게 모두가 진보적이여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건전한 진보, 건전한 보수가 서로 존경하면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며 사회의 이성적인 토론 과정이 없이, 불일치하는 점이 많은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 후 그 결론으로 국제사회를 설득하려고 하고 있는데, 현재 진행 상황으로 보았을 때는 정부가 국제사회로부터 바라는 것을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김연아나 박세리 같이 뛰어난 국민 개개인이 그동안 세계무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드높여 왔는데 이번 일로 국격이 많이 손상이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프레시안 : 앞으로의 계획은?

이승헌 : 내 지식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문제를 푸는데 힘을 보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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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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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는 한나라와 민주의 역사

 

 

한나라

민주

보수

진보(진전)

폐쇄적

개방적

부패

분열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기득권

다수의 소유

부유층

서민층

대기업

중소기업

대형마트

소상공인 상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김구, 김대중, 노무현, 홍명희,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유인촌, 홍준표, 이문열, 이동관, 나경원, 김동길, 정몽준, 서세원, 변우민, 독고영재, 이봉원, 김건모, 임백천, 오영실, 이참, 김응석, 김재원, 배한성, 신동엽, 이정길, 윤다훈, 이경규, 이덕화, 이순재, 이지훈, 이휘재, 서유석, 백일섭, 김흥국, 이의정, 엄앵란, 김한국, 이자연, 윤형주, 박강성, 여운계, 양금석, 현석, 선우재덕

유시민, 한명숙, 정세균, 이광제, 안희정, 문국현, 노회찬, 권영길, 정동영, 엄기영, 심상정, 김삼웅, 박경철, 김제동, 강산에, 윤도현, 서태지, 신영복, 도울스님, 법정스님, 신해철, 리영희, 이문세, 정종철, 권해효, 양희은, 안성기, 김창렬, 방은진, 바비킴, 이외수, 김미화, 손석희, 남궁옥분, 심현섭, 박준형,  박혜경, 안치환, 문성길, 문근영, 이준기, 황현희, 스윗소로우, 박보영, 명계남, 유희열, 양동근, 임형주, 김디지, 김민선, 배두나, 남규리, 심은진, 조권, 메이비, 배슬기, 이승환, 김용만, 강호동, 원더걸스, , 채시라, 신현준, 박혜미, 이창동, 송강호, 전도연, 심형래

성장과 개발

안정과 복지

양적 성장

질적 성장

욕심, 파괴적, 다혈질,

도전, 침묵, 인내, 관용

회의 문화

독서 문화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학자

지식인

흑백논리

컬러논리

이기적

타협적

행동적

사색적, 사고적

친일적

민족적

독선적

합리적

권위적

실리적

이론적

실무적

계산적

논리적

선착순 줄서기

실력 검증

강압

대화

하드웨어 우선

소프트웨어 우선

북한경계

일본경계

부자감세

서민복지

건설, 토목, 전자, 생필품

우주항공, 인터넷, 나노, 생명

공교육, 영어

인성교육, 독서

성적별 등급 차별교육, 특목고, 영재교육

무상급식, 무상교육, 예체능교육, 특화교육

클래식

재즈, 국악

기독교

불교, 천주교, 민족종교, 동학, 일부 기독교

수입차

국산차

별장, 콘도, 휴양지, 리조트

명산, 바다, 유적지, 자연

독도 타협설득

독도 주권수호

북한 : 응징, 붕괴, 적대

북한 : 화해, 용서,  상생

메인스트림 문화

언더그라운드 문화

식민역사관 고집

대륙역사관 고집

살생

헌신

소의

대의

바둑 : 아다리

바둑 : 포석

확성기, 가스통, 군복전투시위

촛불시위

선거운동 : 북한 안보위협활용,

국가보완법 활용

선거운동 : 독재, 부정부패 활용,

언론자유, 표현자유 활용

대의제

민주주의

조직

시스템

총재

대표

친북사전편찬

친일사전편찬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뉴데일리, 네이버

한겨레,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프레시안, 다음

언론 장악으로 홍보효과

언론의 자유로 공격받음

섹스산업 인정

섹스산업 억제

스포츠 : 뇌물, 비리

스포츠 : 자율, 혼란

탈세 인정

복지자금, 근로장려금 지급

국제 : 행사, 컨소시엄 유치

국제 : 노벨상, 유엔 사무총장 배출

경찰, 검찰 소유단결

경찰, 검찰 갈등

공무원 권위 강조

공무원 봉사 강조

기회적

고집적

수직적

수평적

마이크로소프트 독점 경영

구글, 리눅스 오픈 경영

한나라당 지지자는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는척 하면서 지지하며, 남에게 공개하기를 꺼려하고, 대부분 남들 몰래 이중적, 기회적 마인드로 지지한다.

민주진영 지지자는 자신의 정당을 소신있게 표하고, 그들을 지지한다고 적극적으로 알리고, 행동하며, 남들에게 자신의 민주적 이념과 정신을 알리려 자부심이 투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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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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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라고 하는 아저씨도 개에서 태어난 새끼인가 보군요.

개눈에는 개로 보인다고...

취재기자가 아무리 봐도 난 사람새끼로 보이는데 ..

취재하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저리 광분을 하지? 저런 인간들이 북쪽에 북한보다 더무섭다는걸 우리는 언제쯤 알까??

한나라당 열성지지자들은 다 이렇게 드쉐고 거친 이유가 무엇인지 한나라에 살면서 무자게 쪽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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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이명박 대통령이 23일 낮 오찬 간담회를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전두환 전대통령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2010.4.23

이것은 이명박이 대선후보로 선거운동으로 활약할 당시 야당 후보인 정동영과 표 차이가 이미 크게 벌어져 이미 승리를 예상하고 이명박이 여유있게 활보하는 모습때 사진




[저는 어렸을때부터 전두환 각하가  최고 좋아요!]
그리고 이명박이 전두환한테 찾아가 세배하는 장면사진이 뉴스에 공개되었지만, 이명박이 대통령 된 이후, 그 사진은 여기저기 포털마다 보이지 않는다.



저런 간사한 대통령때문에 그리고 저러한 행동을 하고 다니기에 자라나는 국민들이 아무리 사회에 퍠륜아 같은 일이 저질러져도
금방 잊혀지고, 그것을 큰 죄약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철없는 저 대통령의 수많은 국민을 죽인 사람앞에서 희희 거리며 아첨하는 비양심적인 행동에서 무엇을 국민들이 배울까?

저런 행동에서 우리 어버이모임이나 이명박의 사사를 받은 수구보수꼴통 단체들, 그리고 이명박 정권들어서 무수히 생긴 인위적 시민단체들의 모임들(국가가 일부러 만든 시민단체모임; 진보진영의 시민단체들이 설자리가 없게 하려고 한나라당이 계획적으로 만든 시민단체들)이 저런것들을 배우고 무슨 행동들을 하겠는가?
 
그들은 조금도 사회의 양심이나 민족간의 유감이란 것은 이미 사라지고, 오직 적대적 논리와 아첨그리고 아부의 조직구조만이 익숙한 집단이다. 그 집단을 선망하는 우리 서민들도 무수히 많다.


우리나라에서 폭력정치, 군사독재, 장기집권, 살인정치를 해도 떳떳하게 활보하고
일본식민지 시절 일본놈에게 붙어서 우리민족 숙청시키게 도와주고 왜놈의 앞잡이로 우리국민을 괴롭히던 친일파들도
아직도, 아무도 어떠한 심판을 받지 않은채, 한나라당에 붙어서 기득권을 이미 확보한지 오래되었다.
그것에 더하여 대다수의 서민들은 그들을 대접하고 우러러 보는 사회구조가 이미 익숙해졌고, 그 역사는 이제 굳어져버린 상태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양심과 도덕은 사라진지 오래요!
한마리의 짐승과 같은 권력자가 가진 헌법만이 이 나라의 양심이요, 질서이다.

그래서 나는 거리낌이 없이 활동하는 대통령이오, 누구한테 부끄러울까봐, 양심이 다칠까봐 조심스러워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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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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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에 히트를 기록했던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기에 스쯔끼라는 악질 고등계 형사가 나오는데요, 

 이 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죽입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불량선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누명을 씌우기도 합니다. 정말 보면서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질 정도로 증오스러운 놈입니다. 주인공인 하림 역시 스즈끼에게 가족들을 잃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지요. 스즈끼는 하림 역시 엮어 넣으려고 계속 괴롭힙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

이 일어나고 하림은 징병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미군 특수부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합니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하림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림은 어느 날 경찰서에 들렀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경찰서에서 여전히 부하들을 호령하고 있는 스즈끼를 발견한 겁니다. 눈이 돌아간 하림은 뛰어가 스즈끼의 멱살을 잡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지릅니다.

  


"스즈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해방이 되었어! 스즈끼!"



멱살을 잡힌 스즈끼는 부하들을 시켜 하림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하림은 무력하게 경찰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즈끼는 침을 뱉듯 말합니다.  

 

"저런, 빨갱이 새끼."



"여명의 눈동자"에서 이 장면은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친일파는 해방이 되어도 처벌받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빨갱이로 몰려 두들겨 맞습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겁니다. 문제는 이게 그냥 드라마의 극적 구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국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미 군정을 뒤에 업은 이승만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를 모두 흡수합니다.

 

세상이 뒤집히고 처벌이 될까 두려워 덜덜 떨던 조선총독부의 관료들, 경찰들은 살기 위해 이승만에게 가서 붙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의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삽니다.

 

'빨갱이가 쳐들어온다.', '빨갱이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 '우리가 빨갱이로부터 너희를 지켜주겠다.'  


 


 



그렇게 친일파는 식민지 시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건국의 공로자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승만 독재 시대에 승승장구하던 그들은 그러나 다시 한번 위기를 맞습니다.

 

1960년 4.19혁명

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에 의해 5.16 군사 쿠데타

가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에게 다시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박정희의 공화당

에 투신합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자신이 일제시대 친일파입니다. 일본 육사 졸업하며 천황한테 혈서 쓰고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으로 공인받은 자이니까요.

 

 

 

 

그리고 박정희의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는 헌법 개정을 통해 자기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국회? 그까짓 거 필요 없습니다. 해산시켜 버립니다. 밤마다 비서실장 시켜 여대생들 바꿔가며 밤 문화를 즐기다가 1979년 10월 26일, 그날도 여대생 옆에 끼고 술 마시다 총에 맞아 죽습니다.


 


 

 

 



친일파에게 다시 위기가 왔습니다. 아, 이놈의 위기는 잊을 만하면 옵니다.


그러나 또 구원투수가 등장합니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

를 일으키며 정권장악한 겁니다.

 

친일파들은 이제 기꺼이 전두환의 품에 안깁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총질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지들끼리 모여 지들끼리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박정희 때 공화당 인사들은

 

 

 

 

 

 

 

이제 전두환의

민정을 구성

합니다.


 


 

 

 

 



1987년 6월. 또 위기가 옵니다.


전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겁니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통령을 니들끼리 뽑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겠다고 주장합니다.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선물하려던 전두환어쩔 수 없이 이에 굴복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역사적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친일파들은 긴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말 기적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왔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싸우다 후보단일화를 못 해 표를 갈라 먹은 겁니다.

 

 

 

 

결국, 노태우가 35.9%의 득표율로 턱걸이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친일파는 또 살아남았습니다. 아, 미칠 노릇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대통령 한번 해먹겠다고 결심한 김영삼은

마침내 노태우에게 항복합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

을 하여 민자당을 만듭니다.

 

 

 

 

 

 

 

 

유일한 민주화 세력이 된 김대중은 고립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대선에서 민주화 운동의 경력을 팔아넘기고, 양심을 팔아넘기며 친일파,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은 김영삼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 이름은 신한국당

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나라를 하나하나 말아먹다가 1997년 IMF 사태일으킵니다.

 

나라가 부도가 났습니다.

 

수많은 회사들이 망해 넘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주병을 들고 한강에 뛰어내리고 목을 맸습니다.

 

 

 

 

 

 

 

신한국당은 슬쩍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홍준표 얼굴을 잘 보십시요. 그리고 기억하십시요)
고작 당 이름을 살짝 바꾼 것만으로 나라를 부도 상태로 몰아넣은 그들은

대선에서 약 40%의 득표율을 기록

합니다.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티끌만 한 차이로 마침내 김대중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뤄냅니다.

 

 

 


친일파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그들은 그러나 5년만 참자고 다짐합니다.

 

5년 동안 열심히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욕합니다.

 

스즈끼가 하림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듯,

 

 

 

 

 

 

 

 

이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조건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겁니

다.



 





 

 

 

 


그러나 5년 뒤

 

 

선거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노무현에게 또 패합니

 

다.

 

 

 

미칠 것 같습니다.

 

 

다시 5년 동안 빨갱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경제가 망했다고 외쳐댑니다.

 

서민 경제가 파탄이라고 외쳐댑니다.

 

 

마치 IMF를 김대중이 일으킨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날 지경입니다.





어쨌든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친일파 명부를 만들고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친일파들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정치적 탄압이라고 마구 훼방을 놓습니다.

 

 과정에서 뉴라이트가 결성됩니다.



 





그냥 상대방을 빨갱이로 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감추려 들지 않습니다.

아예 맞불을 놓습니다.

 

 

식민지 시대가 좋은 시대였다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죠.

 

통계 자료를 가져와 식민지시대가 이렇게 경제 발전이 된 시기였다고 주장합니다.

근대화 시대였다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랍니다.

자신들을 군사독재 세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랍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친일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독재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

 

그리고 이명박을 밀어줍니다.

 

 

'범죄자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사기꾼이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이게 먹힙니다.

 

 

 

마침내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고,

뉴라이트는 새로운 정부의 각료로 곳곳에 포진되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역사 교과서가 좌 편향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시대, 독재 시대를 근대화 시대로 바꾸겠노라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친일파-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들이 권력을 놓친 시기는

딱 지난 10년간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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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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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기를 써보고싶은데 종이에 쓰는것은 번거롭고 온라인에 써보자니 어디에 써야할지 모르고 왠지 소중해야할 일기가 가벼워보이기도 하는데. 2010-01-21 05:34:02

이 글은 째지님의 2010년 1월 21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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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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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수(74) 전 현대미술관장




해임 무효확인청구 소송 승소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윤수(74)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유인촌 장관이 나를 쫓아내려고 여러 사람이 모인 기관장 회의 때 반말로 지시를 하면서 모욕을 주기도 했다”며 “(재임시절) 막말과 삿대질, 회유와 압력 때문에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김 전 관장은 13일 ‘현대미술관장 해임 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뒤 <한겨레> 기자와 만나 관장 시절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 등의 퇴임 압력과 퇴임 과정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다.

김 전 관장은 유 장관의 퇴임 압력과 관련해 “첫 기자회견부터 ‘지난 정권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물러나는 게 순리’라고 내 이름을 콕 찍어서 말하더라”며 “내 발로 걸어나가게 하려고 유 장관이 일부러 모욕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유 장관은 2008년 3월 한 초청강연에서 “30여 개의 산하기관장 중 철학·이념·개성이 분명한 사람들은 본인들이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며 김윤수 전 현대미술관장 등을 겨냥해 자진사퇴를 종용했었다.




»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오른쪽)이 2008년 4월 1일 업무보고를 받으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해 김윤수 관장과 입장하고 있다.

김 전 관장은 관장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문광부 쪽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압박과 회유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광부 관계자들로부터 “‘이렇게 하면 재미없다’,‘김 관장에 대해 다 조사할 수 있다’ 등의 말을 들었다”며 “나를 몰아내는 데에 기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문광부 인사에서 불이익을 겪었다”고 전했다.

김 전 관장은 또 “‘퇴임식을 멋지게 해주겠다’거나 ‘퇴임 뒤 큰 프로젝트를 맡기거나 훈장을 주겠다’는 회유에도 시달렸다”고 말했다.

김 전 관장은 퇴임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현대미술관을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곳으로 만들어 정권이 바뀌어도 임기를 다 채우고 퇴임하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현대 미술관장 취임사에서 “민중 미술계의 대표로서 일하지 않고 한국 미술의 발전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언했다”며 ‘좌파 문화 인사 찍어내기’를 단행한 유인촌 장관에게 유감을 표했다.

김 전 관장은 2003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와 채용계약을 맺었는데 문화부는 임기 만료(2009년 9월)를 1년여 앞둔 2008년 11월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문화부는 당시 김 전 관장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인 <여행용 가방>을 사들이면서 계약 체결 전 결정 사실을 중개사에 알리고 관세청에 신고하지 않는 등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음은 김윤수 전 현대미술관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08년 10월 24일 오후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기자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막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해임무효 판결을 받았다. 지금 소감이 어떤가.

=내가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퇴출당한 지 꼭 1년 반 만에 해임 무효 판결을 받았다. 참 힘들었다. 스트레스가 심해 바깥에 잘 나가지도 못하고 친구도 못 만났다. 끙끙 앓았던 1년 6개월이었다. 이번 재판이 끝나니 ‘아. 이제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일했던 기간은 어땠나?

=이명박 정부에서 일했던 8개월을 잊을 수 없다. (퇴임) 압력과 회유, 협박에 시달렸다. 때론 공개적인 수모도 겪었다. 이런 수모를 견뎌가며 버텼는데 강제로 퇴출당했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유인촌 장관은 그의 첫 기자회견에서 ‘지난 정권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물러나는 게 순리’라고 했다. 내 이름을 콕 찍어서 말했다. 내가 나가지 않으면 재임 때 했던 일을 낱낱이 조사해 밝히겠다고 했는데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말하는 게 수치스러웠다.

-재임시절 어떤 압력을 받았나

=8개월 내내 사퇴압력을 받았다. 문광부 관계자들을 시켜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날 협박했다. ‘이렇게 하면 재미없다.’,‘김 관장 다 조사할 수 있다’며 날 압박했다. 문광부 소속의 국장들, 감사관들을 동원해 날 몰아내려고 경쟁을 시킨 것 같다. 내 흠을 찾기 위해 그 사람들이 미술관 전체를 다 뒤지게 했다. 말을 듣지 않는 (나를 교체하는 데 소홀한) 국장들은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나도 괴로웠지만 그분들도 괴로워했다.

-퇴임을 전제로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문광부 담당 국장들이 날 찾아와 퇴임하면 ‘아주 멋지게 퇴임식을 해주겠다’거나 ‘내가 나가 준다면 거대한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게 해준다’거나 ‘정부 훈장을 준다’고 하며 꾀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유인촌 장관에게 모욕도 많이 당했다고 하던데….

=각 기관장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인 모욕을 많이 당했다. 함께 참여했던 기관장들도 뒤에서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는 내게 반말도 서슴지 않았다. 문광부가 현대미술관과 관련한 사업을 논의할 때 나를 뺀 채 미술관 직원들을 따로 불러 회의하는 등 날 모욕하기도 했다.

-유 장관에게 섭섭한 게 많을 것 같다.

=대화와 소통이란 것이 없었다. 난 그게 서운하다. 날 불러서 ‘김 관장님. 이건 이래서 안 좋은 것 같은데 고쳐보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를 한다든지 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그의 제안을 내가 도저히 못 받아들인다면 좋게 헤어질 수도 있었다. 나라고 부득불 못 나간다고 버텼겠나. 그런데 이런 과정은 전혀 없이 기자회견을 열어 날 찍어 모욕을 줬잖나. 그런 다음 문광부 인사들 동원해 날 협박하는 이런 부분에 화가 났다.

-김 전 관장의 해임과정에도 문제가 많았지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의장 경력을 가진 김 전 관장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이를 어떻게 보나.

=나는 민중 미술이 유행하던 80년대 이전부터 미술계 전반에 걸쳐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물론, 내가 민중 미술을 대표하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민중 미술계를 대표해 현대미술관장직을 수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취임사에서도 ‘민중 미술계 대표로 파견된 사람이 아니다.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일했다. 되레 민중 미술계 사람들은 역차별 당했다고 내게 불만이 많았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여행용 가방>을 둘러싼 논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미술관장 마음대로 작품을 살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체심의위원회에서의 결정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다. 1차 심의위원회에서 구입을 결정한 뒤 중개사에 조건을 붙여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미술품의 진위 확인과 가격협상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뒷돈을 받고 미술품을 구입하기로 약속해준 것처럼 만들어간 것인데 누명을 씌운 것이다. 편지 내용만 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2심 재판부는 이 점을 잘 이해한 것이다.

-정부의 현대미술관장 인사 원칙은 어떻게 마련되는 것이 옳다고 보나.

=미술관장을 해보니 미술관장은 자주 바뀌어선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미슬관장은 임기나 채우는 사무관장이 아니다. 최소 5~6년 임기를 보장해 미술관장의 뜻이 잘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 김대중 정부 때 김 전 대통령은 ‘문화에 지원은 하되 간섭하면 안된다’고 늘 말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게 옳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미술관장을 바꾼다는 것은 외국에선 비웃음당할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생각인가

=일단 문광부가 대법원에 항소할 것인지 지켜보겠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당분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도 읽고 신문도 신나게 보고 싶다. 그간 못 나갔던 집회에도 나가서 얼굴을 내밀고 싶다.



유인촌 왜 이러나? 막나가네.........못배운 티를 내는건가? 

과거의 브라운관에서 연기하던 시절의 인격으로 돌아가는 것이 역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훨 좋아질 것이다.

역사의 악역으로 남지말기를~

악한 생각을 하는 자는 악이요! 악은 곧 반드시 역사의 기록에 심판을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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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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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희가 가슴속까지 슬퍼해야겠습니다. 우리 가슴속, 심장 속에 한 조각 퍼즐처럼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임의 뜻을 저희들이 운명처럼 받들고 가겠습니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 가슴속에도 조그만 비석 하나씩 세우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5월29일 한 줌 재로 떠났다. 서울시청 앞 추모문화제 무대에서 방송인 김제동씨는 자주 말을 흐렸다. “임은 떠난 것이 아니라, 이제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들어왔다”고 울먹였다. 운구차가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시민들은 흐느꼈다.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다들 외면했던 ‘바보 노무현’. 그 ‘바보’는 이제 지키고 간직해야 할 가치가 됐다. 모두가 지켜주겠다고 맹세하는 상징이 됐다. 죽어서도 구도를 바꾸고, 판을 흔드는 존재로 부활했다. 현직 이명박 대통령과 맞서는 혼이 됐다.

» 5월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헌화에 나선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과하라”고 외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의 입을 경호원들이 틀어막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야당들 전면적 파상공세 별러

그가 남긴 뜻의 ‘살고 죽음’은 49재인 7월11일까지가 첫 마당이다. 국회에서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개혁·진보 야당들이 6월1일부터 나선다. 민주당에서는 정세균 대표가 책임론을 정면으로 제기하게 된다. 정 대표는 이날 경기 수원시 연화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꼭 책임질 사람이 책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을 피하면서 문제를 제기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1단계는 국민들이 공분하는 ‘노무현 죽이기 수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간 입을 다물고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 측근들도 입을 열 예정이다. 당 공식 회의부터 각종 집회, 그리고 텔레비전 토론까지 핵심은 이 주제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당한 수모와 모욕, 그리고 검찰이 적용한 혐의 구성의 문제점. 윤호중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은 “검찰의 편파·보복 수사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처벌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정책 궤도 수정, 그리고 대대적인 개각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제 카드도 준비 중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진상 규명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을 중심으로 한 2007년 대선자금 의혹이 대상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 정당들도 방향이 일치한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도 영결식 당일 “이 땅의 민주주의는 고인께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이 대통령의 공개 사과와 내각 문책, 정치 보복 규명을 위한 특검 실시와 책임자 처벌, 국정 운영 기조의 근본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민노당·진보신당 3당은 이를 6월 임시국회 개원의 전제조건으로 내걸 예정이다. ‘반이명박 전선’의 1단계다. 최재성 민주당 의원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국회를 열 수는 없다”며 “민주당 의원들은 형식적인 투쟁이 아니라 요구 조건을 관철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최 의원은 “민주당은 좀더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나라당도 강성 기조로 맞설 예정이다. 6월8일부터는 개원하겠다는 방침이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삼우제(6월1일)까지는 추모 기간으로 보고 그 이후에는 개원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김형오 국회의장도 “현충일(6월6일)까지는 아무래도 애도 기간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6월8일부터 개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내 지도부 구성도 ‘강성’이다. ‘뉴라이트’ 출신의 신지호 의원이 원내 대변인을 맡았다. 신지호 의원은 독설로 유명하다. 강경파 ‘친이’(이명박 계열) 김정훈 의원이 원내 수석부대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5월28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아 참배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 반드시 이 나라 민주주의를 확실히 회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2라운드는 임시국회 ‘MB악법’ 싸움

치열한 공방 끝에 임시국회가 열리면 둘째 마당이다. 언론관계법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MB악법’(한나라당 표현으로는 개혁법안)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될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이명박 전선’도 자연스럽게 2단계를 맞게 될 것이다. 물론 국회 내에서는 쉽지 않다.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김형오 국회의장이 미디어악법들은 사실상 (본회의에) 직권상정한 상태라 국회만 열리면 한나라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며 “민주당은 모든 세력들의 힘을 모아 몸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이런 ‘모든 세력’의 힘을 모으고 있다. 먼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은 5월28일 서울역 분향소에서 참배한 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가 엄청나게 후퇴하고 있고 서민들은 어려움 속에 살고 있”다며 “남북관계도 초긴장 상태에 있어 국민은 속수무책인데 국민은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다며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 반드시 이 나라 민주주의를 확실히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심이 없는, 대안이 없는 야당의 위기 순간에 잠시라도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던 이해찬 전 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친노 핵심 인사들도 정치적으로 ‘복권’됐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유시민 전 장관과 이해찬 전 총리 등 열린우리당 해체 과정에서 탈당했던 이들도 곧 민주당으로 복당할 것으로 본다”며 “한명숙 전 총리도 정치적 비중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시민 전 장관의 한 측근은 “(정치적 복귀를) 일종의 운명이라고 본다”며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는 시대의 결정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적 복권’ 친노세력 행보 주목

10월 재보선 직전에 이뤄질 것으로 보이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복귀도 빨라질 전망이다. 손 전 대표는 5월28일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려 “고인을 떠나 보내는 국민들의 좌절과 슬픔을 존중해달라. 그동안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달라”고 강조했다.

진보·개혁 정당 사이에 유난히 강조되던 ‘차이’도 압착되고 있다. 정책에서의 연대를 정치로 이어가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지방선거가 그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호중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은 “내년 지방선거까지는 모르겠지만, 미디어악법 등 MB악법 저지를 위한 제야당·시민사회의 공조와 협력 체제는 10월 재보선을 거쳐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시민사회와 대화를 나눠보면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지안 진보신당 부대변인은 “반이명박 전선을 위한 선거연대는 내년 지방선거 직전에야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10월 재보선부터 논의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 지난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서해교전 당시 우리 해군 고속정(왼쪽)과 북한 경비정이 충돌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서해에서 충돌이 있었지만, 올해의 경우는 그 강도가 더 세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 한겨레 자료

시민사회 ‘6·10 항쟁 기념 대회’ 집중

시민사회에서도 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5월25일 만들어진 ‘시민사회단체 및 각계 인사 시국회의’(이하 시국회의)가 대표적이다. 이날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는 시민단체와 학계 단체 등 25개 단체 50여 명이 참여했다. ‘시국회의’의 실체와 주장은 아직 물밑에 있다. 시민단체, 학계, 종교계가 모여 ‘노무현 서거 이후’를 논의하는 협의체 수준이다. 더 많은 단체가 모이는 6월2일 2차 모임에서 성격이 더 구체화될 예정이다. 오광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책팀장은 “첫 번째 모임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강압적·일방적 국정 운영이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켰으니, 이의 전면적·근본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시민 진영은 일단 ‘6·10 항쟁 22주년 기념 대회’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후의 상황은 일단 지켜본다는 태도다. 개입하거나 지도하려 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지난해 촛불 이후 이번 조문 정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시민운동 진영)의 실력을 깨닫고 있다. 시쳇말로 ‘한 줌도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민분향소는 시민단체들이 아닌 ‘촛불시민연석회의’가 설치했다. 지난해 촛불 정국 이후 지역별로 형성된 ‘풀뿌리 촛불시민 모임’이 그 토대다. 온라인에서 연결된 평범한 시민들이 주력을 이룬다. 이들은 참여연대·민주노총·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전통적인’ 시민·사회·종교단체와 별다른 연결 고리가 없다. 촛불 모임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추모부터 시작해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반대를 거쳐 지난해 촛불 정국을 통해 형성됐다.

촛불 진영의 한 축에는 친노그룹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친노그룹과 전통적 진보 진영은 많은 갈등을 겪었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양쪽 모두 정교한 행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사모’ 그룹과 시민사회 진영의 거리를 좁히고 여기에 제도권 정당의 힘까지 보태려면 서로 양해하고 배려할 일이 많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런 연대가 내년 상반기에 결실을 맺으려면 ‘반이명박 전선’을 일궈낼 구심이 중요하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 1990년대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지도급 인사들의 ‘역할론’이 떠오르는 이유다. 박 상임이사는 2006년 희망제작소 창립 이후 “지역에 희망이 있다”는 모토를 내세워 풀뿌리 운동에 집중했다.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박 이사 개인의 행동에 큰 비중을 두진 않지만, 시민운동 진영 전체가 새로운 활력과 긴장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 내년 지방선거까지 내다보는 큰 틀의 ‘민주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핵심 당직자도 “박원순 상임이사가 민주당과 진보 정당 그리고 시민사회를 두루 묶어 대화의 장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 2009~2010년 정치 캘린더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여론 균형추 언제든 바뀔 수 있어

대한문을 지키는 ‘촛불’들은 대한문의 분향소 지키기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들은 일단 49재까지 이곳이 시민들의 추도 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본다. 대한문 분향소 일대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2km 가까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도 공간으로 거듭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추모글을 적은 광목 매듭부터 그를 기리는 그림과 글, 대형 걸개그림들이 가득하다. 그 자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장소다.

현 정부에 대한 반감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부는 이르면 6월1일부터, 늦어도 6월6일부터는 분향소 철거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영결식이 끝난 만큼 더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울 것이다. 철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민 20만 명 이상의 손길이 모여 만들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장을 주관한 한명숙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 기념사업이 어떤 형태로든 추진될 텐데 정부, 시민사회, 종교계 등이 추모한 모든 것들이 하나로 훼손되지 않게 그대로 수거해 기념으로 삼고 싶다”며 “(매듭과 리본에) 적힌 내용 자체가 조사다. 하나도 분실 없이 모아질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도 경찰이 분향소 철거를 강행한다면, 분향소가 훼손된다면 국민들의 분노와 반감을 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반대로, 촛불들이 경찰과의 마찰을 거듭하다 결국 폭력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경우는 국민들의 외면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촛불도 마지막의 폭력적 상황으로 대중적인 참여 동력을 잃었다. 여론의 균형추는 어디로든 바뀔 수 있다.

여기에 ‘북한 변수’가 있다. 노무현 서거가 진보·개혁 세력이 집중할 의제라면, 북한 핵실험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보수 세력이 집중적으로 내세울 의제다.

이중의 분단 상황 대처능력 중요

현재 상황을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내우외환’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5월27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 표현을 썼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같은 날 고위당정협의회에서 “(국민장을) 정치적으로 잘못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어 이를 변절시키고, 소요사태가 일어나게 될까 걱정”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한나라당은 6월1일 이후 안보 이슈에 집중할 예정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5월28일 의총에서 “지금의 한반도와 주변의 안보 환경은 6·25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선언한 바 있다.

민주당의 취약한 고리도 이 부분이다. 민주당의 핵심 당직자는 “북핵 이슈는 정부 당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이 풀어야 할 문제로, 야당으로서는 별다른 레버리지(수단)가 없지 않느냐”며 “민주당의 기본 정책인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민주당도 조만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당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발족할 예정이지만, 현역 의원 중 박지원 의원을 제외하고는 대북 문제 전문가가 없다는 점이 아프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북한이 또다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서해교전과 같은 국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5월29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2차 핵실험과 관련해 대북 제재책을 논의하는 것에 대해 “안전보장이사회가 더 이상의 도발을 해오는 경우 그에 대처한 우리의 더 이상의 자위적 조치가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남한의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가입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한 대북전문가는 “북한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경제적 안정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협조도 한몫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경제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도의 국지적인 충돌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서해교전 수준 또는 그 이상의 국지전이 발생하면 보수 세력들은 안보 이슈를 중심으로 단결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보훈·현충의 달인 6월에 이런 충돌이 발생할 경우 조문 정국과 안보 정국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남남과 남북 갈등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변호사는 “이명박 정부와 여당은 물론, 민주당과 진보 세력도 이런 ‘이중의 분단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야 한다”며 “국민들은 이 중요한 상황에서 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세력에 힘을 모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개혁 진영은 큰 인물 하나를 잃었다. 당장 인물이 없으면 먼저 세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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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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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과거와 싸우면 피해를 보는 것은 미래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3일 국무회의에서 존 에프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이 말을 인용했다. 이 대통령은 그러면서 “지금이 바로 미래를 향해 나가야할 역사적 시기”라고 취임 2돌을 맞는 소회와 각오를 밝혔다. 지난 2년간 과거 아닌 미래와 경쟁하며 정책 측면에서 선진일류국가의 초석을 다졌다는 게 청와대의 자평이다.


이 대통령은 과연 지난 2년간 ‘미래’와 싸운 것일까? 정치적 흐름을 되돌아 보면 그 반대에 가깝다. ‘정치인 이명박’의 2년은 과거와의 싸움, 특히 ‘노무현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임 첫 해의 쇠고기 촛불과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현재 최대 갈등 현안인 세종시 수정 논쟁 등 이 대통령을 중대한 정치적 시험대에 세운 의제들이 모두 노 전 대통령과 직접 연결돼 있다.


이 대통령은 2008년 2월 노무현 체제를 부정하는 정부 조직 개편과 ‘고소영·강부자’ 인사로 호기롭게 출범했다가 쇠고기 촛불이라는 거대한 민심의 저항에 부닥쳤다. 취임 첫해부터 이 대통령을 국민 앞에 두 번이나 고개 숙이게 한 쇠고기 촛불의 단초는 ‘노무현 뒤집기’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방침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17일 관계장관회의에서 논의돼, 한덕수 총리와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설득했지만 노 대통령은 반대했다.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도 노 대통령을 만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요청했으나 노 대통령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그해 4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 정상회담에 맞춰 한-미 쇠고기 협상을 타결지었다.


취임 첫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촛불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 대통령은 대대적 반격에 나섰다. 이 대통령은 그해 8월 지지그룹인 뉴라이트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하며 “나는 이제 누가 우리 편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의 한 참석자는 “참석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깜짝 놀랐다. ‘이 대통령이 드디어 정치를 하는구나’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이 시점 이후 <문화방송> ‘피디수첩’ 수사,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 퇴진, 언론관계법 등 입법전쟁,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 노 전 대통령 수사 등 반대세력 옥죄기가 폭풍처럼 전개됐다. 공안 통치 형태로 ‘집토끼’인 보수층을 결집시키며 촛불 수세를 만회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로 또다시 중대한 정치적 갈림길에 섰다.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잡는’ 형국이었다. 민심이반의 수렁에 빠진 이 대통령은 ‘친서민·중도실용’과 ‘국민통합’을 내걸어 반전에 나섰다. 대운하 포기선언도 이때 이뤄졌다. 중도실용 기조는 취임 첫해부터 참모 등이 지속적으로 건의했지만, 이 대통령은 노무현 서거라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서야 이를 받아들였다. 이 대통령은 취업후학자금상환제도, 보금자리주택, 미소금융 등 친서민 정책을 내놓으며 50% 안팎의 지지도 상승효과를 봤다. 역설적으로 ‘노무현의 교훈’이 이 대통령을 띄워 올린 격이다. 청와대 핵심 참모는 “노 전 대통령 서거 국면은 중도실용 카드가 아니었으면 돌파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 지지도 상승과 함께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화한 세종시 수정 논쟁은 노무현 뒤집기 시도의 결정판이다. 친이명박계의 한 핵심 의원은 “이 대통령은 대운하에 대한 집착보다도 노무현의 세종시를 바꿔야 한다는 소신이 훨씬 강하다”고 말했다. 세종시 문제에는 이 대통령의 향후 국정 장악력,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 다음 대선 구도, 6·2 지방선거 등 정치 함수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청와대와 친이계가 ‘노무현 대못’이라고 표현하는 세종시가 이 대통령을 또한번의 정치적 고빗길에 세운 셈이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이명박 정부는 지난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뒤 특히 ‘노무현 지우기’에 너무 많은 국가적 역량을 낭비했다”며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통합, 실질적인 일자리 창출 등으로 국정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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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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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 4·19와 5·16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 4·19와 5·16

대학시절 격동의 현대사 현장서 체험
4·19 경무대 앞서 시위하다 등에 유탄맞기도
5·16땐 유치장 구금당해 "法정의 세울것" 결심

 
  김광일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 4·19가 일어나자 시위에 앞장서 등에 유탄을 맞고 경찰 유치장에서 구금 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진은 4·19 당시 시민 학생들이 부산 시가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를 벌이는 장면) 국제신문 자료사진


제1화 '강경식 전 부총리의 환란 이야기'에 이어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를 연재합니다. 김광일 변호사는 1970~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김영삼 정부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김 변호사는 이번 연재를 통해 자신의 인생 역정과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 문민정부 시절의 비화를 상세하고 흥미롭게 증언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 민족역사의 고비마다 이를 예사롭게 보내지 못하고 남다른 체험과 행보를 하며 68세의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이 일어나던 해 일본 땅에서 고물상을 하시던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 일본인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으며, 1945년 3월 해방을 앞두고 조선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 정착하였다.

만 6세의 어린 나이에 해방의 감격 속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로만 교육을 받고, 민주주의를 배우며 자라났다. 1950년 초등학교 5학년 때 6 ·25 전쟁이 일어나 시골에서 피란살이를 경험하였고, 인민군의 우익인사 처단을 바라보며 이념도 모른 채 반공의식이 깊어갔다.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였고, 1960년 대학 3학년 때 4 ·19를 맞이하였다.

4 ·19 그날 우리 서울대학생들은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면서 경무대 맨 앞에까지 진출했다. 바로 앞에 있던 동국대생이 시위진압용 소방차 2대를 운전하여 경무대 정문 쪽으로 돌진하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어 주변에 총을 맞아 피흘리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나는 유탄 한 발을 등에 맞은 줄도 모르고 부상한 학생들을 자동차에 태워 보내고 나서 시위대들을 보고 대법원으로 가자고 하였다.

당시 대통령선거 무효소송이 걸려 있었으므로 대법원에서 선거소송을 똑바로 처리하라고 시위하기 위해서였다. 사상 초유의 대법원 시위사건이었다. 대법원장 나오라고 소리지르면서 몇 시간을 버텼으나 당시 대법원장은 뒷문으로 사라지고 김연수 대법관이 분노한 학생들 앞에 나타났다. 선거소송을 공정하게 처리할 테니 학생들은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차분히 말하였다. 그 날 동숭동 근처의 친구 하숙집에 돌아와서야 등에 유탄 한 발을 맞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4 ·19를 통하여 독재와 불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회복하는 혁명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한 학생들은 제2차로 할 일은 남북통일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서울대학생 중 일부 통일지향적인 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서울대학교민족통일연맹이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통일의 문제점과 방법 등을 연구하자는 연구단체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고, 북한에 김일성정권이 있는 이상 남한처럼 간단하게 정권을 전복하고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대학 3학년 2학기 겨울방학이 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재실을 빌려 고시공부를 하는 한편 고려대학생인 조열래 (현재 변호사)군과 함께 합천읍내에서 중학 과정의 한벗야간학교 (그 후 25년간 계속)를 설립하여 무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1961년 대학 4학년이 되어 서울에 올라간 바로 이틀 후 이른바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그들은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라며 용공분자를 색출하여 체포했는데,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이 용공단체로 몰려 나도 그 간부의 몸으로 체포되어 마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내가 겨울방학 기간 고향에 머무는 동안 주로 문리대생들인 간부들이 충분한 검토없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판문점에서 남북학생들이 만나 통일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의를 하였던 것이 용공단체로 인정받은 이유였다. 나는 수감 초기 한번 조사를 받고는 40여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사도 받지 못했다. 3평 남짓한 경찰서 유치장엔 40명, 50명이 수감되어 절반은 앉아서 자고, 절반은 굴비두름처럼 옆으로 엮여 칼잠을 자야했다.

어느날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온다고 하여 나는 큰 기대를 했다. 과잉 수용으로 인한 인권유린과 나의 무기한 구금상태가 위법하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는데, 검사는 유치장 복도를 한바퀴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나는 허탈했지만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였다. 앞으로 내가 법조인이 된다면 적어도 내가 다루는 사건에 있어서는 절대로 억울하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6월 30일 수감된 지 41일만에 석방되었는데, 몸도 쇠약해졌지만 한 가지 통탄스러운 일은 제13회 고등고시의 지원 마감이 이미 사흘이 지났던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2> 법복을 벗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2> 법복을 벗다
유신시절 반공법 위반 학생 무죄선고 '파란'
北방송 듣고 전단 만든 영남대 박준성 재판
중정 압력에도 "고의성 없다" 판단 무죄 석방
인사 불이익에 사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
잊을 수 없는 일들

 
  대구지방법원 판사 시절 재판정에서 심리를 진행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김광일 변호사.


대학 4학년 말 군입대를 결심하고 있는데 마침 고시위원이시던 김도창 교수로부터 내년부터는 1년에 두 번씩 고시를 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동안 손을 놓았던 시험공부를 계속하여 이듬해인 1962년 8월에 제15회 고등고시에 합격하였다. 1964년 군법무관으로 임관되어 제5군단 사령부 검찰관으로 부임하였다. 군량미를 대량 횡령한 군단사령관 직속의 본부사령실 선임하사관을 긴급 구속한 일로 항명파동 (?)이라는 기이한 수난을 당한 후, 후방에서는 헌병학교의 군법교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1967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는데, 1972년 이른바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73년 구속된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400~500명에 이르자 그해 가을 각의에서는 구속된 학생들을 전원석방하기로 결의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있던 학생들은 모두 공소취소를 하였다. 그런데, 다만 북한방송을 듣고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는 사실때문에 반공법 위반사건으로 기소된 영남대생 박준성 (현재 교수) 1명만은 죄명이 반공법이기 때문에 석방에서 제외하기로 각의에서 결정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보고된 사건이었는데, 바로 그 사건을 내가 형사단독판사로서 재판을 맡은 것이다.

재판을 해 보니 그 학생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북한을 동조 찬양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서울의 학생시위사건을 언론 통제로 전혀 알 수 없게 되자 북한방송을 듣고, 북한방송에서 전하는 서울대학생들의 6개항의 민주화구호를 녹음하였다가 전단지에 쓰고, 마지막 제7항으로는 자기나름대로 "영구분단정책을 지양하라"는 주장을 한가지 보태었을 뿐인데, 그 전단지를 20여 장 작성하여 영남대학교 구내의 벽에 붙인 것이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대학생들이 법정을 가득 메우고 법정 바깥에까지 넘쳐나게 되자,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겨울방학이 될 때까지 재판을 늦추어 달라고 하였고, 법원의 윗사람을 통하여서는 무죄판결을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권고를 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2주일에 하던 재판을 1주일에 두 번씩으로 앞당겨 방학에 들어가기 전인 1973년 12월 14일 판결을 선고하였다.

판결의 요지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보를 수집할 자유도 있는데, 정부가 언론통제를 함으로써 정보수집의 자유가 통제되고, 달리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의 소식을 입수할 방법이 없게 된 피고인이 북한방송을 통해서 서울대학교 시위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알게 되고, 그 주장들이 자신의 마음에 합치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표현하였다고 하더라도 북한을 동조찬양할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범죄의 고의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 법정을 가득 메웠던 정보기관원들은 무죄판결이 선고되는 순간 학생들이 '와' 하고 지르는 우레같은 함성에 일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날 나의 판결은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에까지 보도되었다. 구속되었던 박 군은 그날로 석방되었다.

검사는 당연히 항소를 하였고, 항소심에서는 선고유예의 판결이 내려졌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항소심 재판부가 여러 차례 중앙정보부에 초청되어 만약 북한방송을 들어도 처벌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혼란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선고유예'라는 유죄판결이 선고되자, 검찰에서는 왜 유죄가 될 사건을 1심 판사가 무죄 판결을 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는지 특별검사가 지명되어 나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부정비리를 조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전주지방법원으로의 전보발령이었다.

뒷조사를 해봐도 아무런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표를 강요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판사가 올바로 재판하여 무죄판결을 한 것을 가지고 불이익을 준다면 유신 치하에서 나는 계속해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즉각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그 때만 하여도 2년 이내에 법관직에 있었던 지방법원 관할지에서는 3년간 변호사개업을 하지 못하도록 변호사법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개업할 수가 없어 나의 두 번째 고향인 부산으로 와서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때가 1974년 9월이었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3> 이른바 '인권변호사'가 되어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3> 이른바 '인권변호사'가 되어
14년간 억울한 시국사범 무료로 변호
미문화원 방화 등 굵직굵직한 사건 당연한 듯 맡아
심리 때마다 학생·시민 격려로 법정 시위장 되기도
영남지역 대표 변호사로 명성… 도청 등 고통 겪어

 
  1982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방화로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 김광일 변호사는 이 사건 연루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는 등 당시 꺼리던 시국사범 변호를 단골로 맡아 인권 변호사로 불렸다.
내가 개업하던 1974년 9월께는 긴급조치가 잇달아 발표되어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몇 년씩 징역을 살던 시절이었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처단해 참으로 억울한 인권사범이 넘쳐 나던 시절이었다. 그 시대에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변호사법 제1조)이란 변호사의 사명을 다하자면 제일 먼저 수난을 당하는 자가 변호사 자신이어야 했으므로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그런 사건을 맡기를 꺼렸다.

나는 변호사 개업 인사장에 "억눌리고 빼앗긴 사람들을 위한 억센 투사가 되고,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을 위해 참된 상담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나중에 나에 대한 정보담당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바로 이 글이 정보당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그날부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피선시까지 14년간 정보당국의 일일 감시대상자가 되어 24시간 나의 동태가 보고되었고, 내 집 전화는 항상 도청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개업하자마자 사형 폐지론을 주장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되어 있던 한승헌 (감사원장을 거쳐 현재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변호사에 대한 선임장을 낸 것을 비롯하여 부산지역과 경남북 등 영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시국사건은 거의 전부를 내가 담당하였고, 서울의 동아투위, 3·1 구국선언사건 등에는 영남을 대표한 유일한 변호사로서 변호인단에 참가하였다.

내가 14년 동안 맡아서 변론한 이른바 인권사건들 중 기억나는 사건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조선 변상윤 등 16인의 소요 △통사당 박인목의 대통령 명예훼손 △중부교회 조태원, 김영일 군 등 3인의 긴급조치 위반 △서울의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의 3 ·1절 민주구국선언 △대구 경북대생 여석동 등 5인의 정진회 사건 △부산대생 서연자, 전중근 등 3인의 긴급조치 위반 △부산대생 이상경 군의 긴급조치 위반 △동일방직 근로자 추송례 등 7인의 선거비방 △부산대생 정외영의 긴급조치 위반 △조화순 목사의 긴급조치 위반 △동아일보 언론투위 안종필 외 7인의 긴급조치 위반 △부마항쟁 주역인 이진걸 등 2인, 김백수 등 2인, 장정욱 등 2인, 김영일 등 2인, 황상윤 등 3인 등 도합 11인에 대한 긴급조치 및 포고령 위반 △부산 김희욱, 김재규, 송세경, 고호석 등 19인에 대한 부림사건 (나는 이 사건의 공범으로 되어 있어 다른 변호사를 주선,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변호사가 변론) △서울의 이석표의 카터방한 반대시위 △고신대생 문부식, 김은숙 등 미문화원 방화사건 △부산대생 정광모 시위 △부산대생 허판수 시위 △부산대생 하근 등 3인의 시위 △부산대생 신동일 등 3인의 시위 △박찬종 등 7인의 고대 앞 시위 △부산대생 권영대 등 4인의 시위 △부산대생 김정호 등 6인의 시위 △부산대생 김대곤 등 6인의 시위 △국회의원 유성환의 국가보안법 위반 △부산대생 배경열의 시위 △부산대생 정윤재의 시위 △변호사 이돈명 씨의 범인은닉 △노무현 변호사의 노동쟁의법 위반 △강신옥 변호사의 긴급조치위반 등.

당사자나 관계자들은 당연한 듯 내게 변론을 부탁해왔고, 나는 쾌히 변론을 수락했다. 이 중에서 선임료를 받고 변론한 것은 한 건도 없으며,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석방된 후에 집에 갈 차비까지 대주는 형편이었다. 이런 사건을 심리할 때마다 구 부산지방법원의 제1호 법정은 동료학생들과 가족들, 정보형사들로 메워졌는데, 유신헌법의 위헌성과 학생들의 우국충정에 대한 나의 거침없는 변론이 이어지면 학생 시민들이 큰 박수를 보내고, 함성을 지르는 바람에 법정이 또 한번 시위장으로 변하곤 하였다. 내가 겁도 없이 이런 사건들을 맡게 된 이유는 변호사의 사명을 다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네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고, 대학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어려운 시절을 잘 잊어 버린다. 그러나 유신헌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한 주장 때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10년씩 징역형을 받고, 정부를 반대하고 비판하였다 하여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스려져 가족들까지 자유를 잃었던 유신시절과 군부독재 시절이 불과 20여 년 전까지 존재하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 시절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독재와 불의에 항의하여 의거를 감행한 용기 있는 피고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자유로운 사회가 이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4> 7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4> 7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
1978년 앰네스티지부 결성 민주인사 결집
부산지부장 맡아 월례·강연회 개최, 바자회 열어
양서협동조합과 함께 79년부마항쟁 주도적 역할

 
  1976년 마르틴 에널즈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환영회에 참석한 김광일 변호사(오른쪽 두번째)


변호사개업을 하던 1974년 연말경부터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가 일어나자 나는 1975. 1. 15. "동아 죽으면 나라 죽고, 동아 살면 나라 산다.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김광일"이라는 10만원짜리 광고를 내었다. 그동안 부산지역에서 숨죽여 오던 민주화를 열망하는 인사들이 나의 광고를 계기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나를 찾은 분은 요산 김정한선생과 부산대 출신의 노경규 씨였다. 당시 국제앰네스티 (폭력에 의하지 아니한 양심수에 대한 석방운동을 하는 국제단체) 한국위원회의 부산지역 회원은 단 두 사람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었다.

요산 선생은 70 노구를 이끌고 서울 앰네스티에서 보내오는 부산구치소 수감자들에 대한 내복과 영치금 등을 혼자서 전달하고 있었고, 노경규는 요산선생의 지도 아래 부산의 민주세력들을 남몰래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요산선생이 하던 구치소 일을 떠맡기로 자청하였고, 영치금에 내 돈을 보태어 전달하였다.

그 무렵 부산 YMCA의 시국토론회 사회를 보게 된 것과 영락교회에서 교회 갱신에 대한 강연을 한 것을 계기로 개신교계의 민주인사들인 임기윤 심응섭 김봉배 차선각 목사 등과 유기선 우창웅 장로, 박상도 임동규 김희욱 선생 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민주화단체가 부산인권선교협의회, 정의구현기독자회 등이었다. 그 단체들이 모체가 되어 기도회와 시국강연회를 계속하였고, 부산 YMCA의 4 ·19 기념강연, 부산중부교회의 3 ·1절 기념행사 등을 통하여 민주와 자유의 의지를 되살려 나갔다. 보수동의 유기선 (전 서울대총장 유기천의 형) 소아과의 2층 응접실은 민주인사의 중역회의실이었고, 하단 갈대밭 속의 강나루촌은 민주청년들의 아지트였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1977년 10월 국제앰네스티의 노벨평화상 축하회에 300명 이상의 민주인사들과 청년학생들이 참석하여 앰네스티부산지부를 결성하기로 결의하면서부터였다. 1978년 1월 12일 부산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종교계에서는 심웅섭 (별세) 임기윤 (별세) 조창연 최성묵 (별세), 송기인 신부 등이, 법조계에서는 나와 이흥록 변호사, 학계에서는 김정한 교수 (별세), 언론계에서는 조갑제 임현모 기자, 문학계에서는 윤정규 작가 (별세), 청년계에서는 노경규 이길웅 박상도 김희욱 김재규 조태원 허진수 박점용군 등이, 여성계에서는 정은희 박홍숙 씨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송기인 신부는 그가 사목하는 전포성당에 "지학순 주교를 석방하라"는 현수막을 성당 꼭대기에 장기간 걸어 둔 것으로 유명했다.

내가 부산지부의 지부장을 맡았고, 김정한 교수 임기윤 목사 송기인 신부가 고문으로 추대되고, 간사는 박점용 군이 맡아 지부소식지를 간행하고 월례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며, 수감자들을 돕기 위한 바자를 열기도 하였다. 부산지부는 민주인사들을 결집하고, 청년들을 훈련하며, 각종 민주단체의 결성을 지원하는 등 그야말로 부산의 민주화운동의 총본부가 되어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을 성공시키는 데 근원적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앰네스티회원은 시국사건체포대상 영순위였고, 실제로 간부 중 반 이상이 구속되었다.

그무렵 (1977년) 서울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중형을 받았다가 석방되어 부산으로 온 김형기 군(지금은 목사)을 2년간 내 사무실 사무원으로 두었는데, 그는 낮에는 사무원 일을 하고, 밤에는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각종 그룹스터디와 MT를 통하여 청년들에 대한 민주의식 고취작업을 해왔다. 그 결과의 하나로 김형기, 김희욱 군 등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 1978년 4월의 부산양서협동조합이었다. 양서를 추천하고 읽자는 문화운동이었으므로 당장 당국의 눈길은 피할 수 있어서 회원들이 수백명으로 늘어나고, 책방 골목에 조그마한 서점도 내었다. 대표는 이흥록 변호사가 맡았고, 조합 간사들은 민주화교육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 민주의식을 고취시켰고, 여기서 배양된 젊은이들이 또 하나의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부마항쟁 이후 뒤늦게 눈치를 챈 당국은 계엄령선포와 더불어 앰네스티와 양서조합을 제1차로 해산조치를 한 것이다.

우리는 또 순수한 사회봉사단체인 부산생명의전화를 만드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최성묵 목사와 김동수 박사, 이길웅 김희욱 오홍숙 등이 주도하여 부산생명의전화가 창설된 것은 1978년 12월이었고, 지금까지 30여년이 넘도록 발전해오고 있다. 초기에는 민주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교육과 상담원 등을 맡았으며, 나도 26년간 이사직을 맡아 봉사하였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5> 민주화운동의 자금 지원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5> 민주화운동의 자금 지원
부마항쟁 배후자금책 지목되기도
변호사 수입 털어 이곳저곳 도와 보안사 끌려가 고초
이후 겉으로는 거절… 김재규씨 통해서만 몰래 지원
잊을 수 없는 일들

 
  김광일 변호사는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자금을 지원, 부산미문화원 사건 등이 촉발되는 데 일조했다.(사진은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모습)
민주화운동을 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비용, 실무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건비와 활동비, 외래강사들에 대한 여비와 강사료 그리고 도망자들을 숨겨주는 비용 등 쓰임새는 한정이 없었다. 주로 내가 비용을 거의 다 부담하였다. 나는 일반사건도 많이 맡았지만, 변호사 수입의 절반 이상이 민주화 비용으로 들어 간 것으로 추측된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나는 변호사사무실에서 집총한 군인에 의하여 계엄사합동수사부에 강제연행되었다. 보안사 지하실에서 옷을 발가벗기고 작업복을 입힌 채 내가 이번 부마항쟁의 최고지령자라는 사실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와꾸'(틀)가 잡혀 있으니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들이 말하는 '와꾸' (사건의 전모)라는 것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전무이사 한승헌 변호사와 부산의 김광일 변호사가 공모하여 평소 김형기 등을 통하여 민주화운동으로 양성한 청년 학생들을 시켜 정부 전복을 기도하여 일으킨 소요사태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를 부인하자 그들은 영주동 고개턱에 있는 보안사 분실 (고문실이 설치되어 있는)로 옮겨서 철제의자에 앉히고 착검을 한 군인이 지키도록 하며, 화장실 가는 것 이외에는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잠을 재우지 아니하는 고문을 하면서 자백을 강요하였다. 그동안 아내는 나의 행방을 알지 못하여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생사를 걱정하였다니 두고두고 미안할 뿐이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먼저 나의 자금지원문제였다. 앞서 잡혀간 사람들에게서 밝혀 낸 1년 동안의 나의 자금지원액은 500만원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무렵 그룹스터디와 MT 등을 주관하고 있는 김형기 군에게 활동비, 최성묵 목사에게는 서울이나 부산 등지의 수배자들을 도와주는 비용과 그밖의 비용을 매달 일정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금지원사실이 밝혀졌으니 나는 부마항쟁의 배후 자금책인 동시에 최고지령자로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피살되는 바람에 함께 갇혀 있던 최성묵 목사, 박상도 김형기 군과 함께 그 며칠 후 석방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군법회의에서 최고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밖에도 가톨릭농민회의 문정현 군이 수배자들의 은신처가 필요하다고 하여 명지의 논 6000평을 임차하여 1년간 농사 짓는 비용 도합240여만 원 (당시 쌀 한 가마 3만8000원)을 지원했다. 문 군은 그해 120가마니의 벼를 수확하여 그 돈을 밑천으로 유통사업을 하고 오늘날 폐기물처리회사를 만들어 그 수익을 환경운동에 재투자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부마항쟁사건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준 돈 때문에 나 자신이 입건이 되면 다른 사람의 변호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1980년 1월부터는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자금지원 요청을 거절하는 것으로 하고, 가장 신임할 수 있는 김재규 (민주공원관장 역임) 군을 통해서만 지원하도록 비밀통로를 일원화했다.

그래도 김재규 군이 무언가 수입원이 있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대청동에 있는 탁구장을 경영하겠다고 하므로, 그 임대차보증금을 대여하는 형식으로 차용증을 만들어 지원했다. 그 탁구장을 거점으로 한 그룹스터디는 부산미문화원사건의 행동대를 길러내는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1981년 6월 서울대 농대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던 송세경 군이 나를 찾아와 부산대에서 유인물을 살포해 도망다니는 학생의 여비를 줘야 하니 5만 원만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송 군을 밖으로 내보낸 후 함께 온 김재규에게 "너를 통해서만 비밀리에 지원하도록 되어 있는데, 왜 송세경이가 직접 돈을 지원해 달라고 하느냐" 고 질책하고는 "송 군에게는 내게서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자네가 따로 돈을 구해서 주는 것으로 하게" 라고 말하며 10만 원을 주었다. 그런데, 그해 9월 부림사건이 일어나자 그 돈을 준 사실이 밝혀져 나는 범인도피죄의 공범으로 입건이 되었고, 그 바람에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부림사건은 부산지역에서 민주화활동을 하던 청년들을 불온서적 탐독 등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한 끝에 엮어 낸 대대적인 민주운동탄압사건인데, 처음에 8명, 두 번째로 8명이 구속되었고, 이흥록 장두경 정차두 박재봉 변호사가 변호를 맡게 되었으며, 세 번째로 구속된 이호철 등 3인에 대하여는 달리 변호인을 구할 수 없어 나한테 변호사시보 교육을 받았던 노무현 변호사에게 변호를 부탁했는데, 이것이 노 변호사의 첫 인권변론사건이 된다. 법정변론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들의 가족들 (특히 김재규의 어머니, 송세경의 처 구성애, 최준영의 처 홍젬마)은 나의 사무실에 모여 부산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6> 김대중씨에 대한 변호와 결별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6> 김대중씨에 대한 변호와 결별

87년 대선 후보단일화 과정서 DJ에 실망
1976년 긴급조치 9호위반 변호인단으로 인연맺어
동교동 모임때 "YS에 양보하라" 권유…끝내 출마

 
  19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앞줄 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
나는 원래 정치지망생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김영삼 씨나 김대중 씨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57주년 기념예배에서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등 12명이 서명한 긴급조치철폐 등을 주장한 민주구국선언서가 낭독되었는데, 당국은 관련자 18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서울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는데, 영남지역을 대표하여 나 한 사람이 변호인단에 끼게 되었다.

1977년 3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자 김대중 씨는 서울구치소에서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 직후 부인 이희호 여사와 김옥두 비서 등이 부산의 내 사무실로 찾아와 김대중 씨의 생사를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일체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진주교도소로 가서 접견신청을 하였더니 정보부에서 접견을 시켜주면 안된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김대중 씨의 1971년도 대통령선거법위반사건이 서울고등법원에 미결로 계속중인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건의 변호인으로서 접견을 신청한다고 해도 역시 거절당했다. 몇 시간이나 다툰 끝에 변호인선임장에 무인만 받을 수 있었고, 그것으로 서울고등법원의 변호인증명을 받아 가서야 비로소 접견이 이루어졌다.

당국이 그를 이감한 것은 진주교도소가 서울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외신기자 등이 잘 찾아갈 수 없게 함으로써 세상에서 그를 잊혀지게 한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 달에 두 번 씩 접견을 하여 1년동안이나 통신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김대중 씨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견해를 그때마다 세상에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직접 운전하여 폭우 속에 진주까지 이희호 여사를 태우고 왕복한 일도 있었다.

그러자 당국은 여러 경로로 나의 변호인 사임을 요구하였으나, 나는 의뢰인을 위해서 변호활동을 하는 것이 변호사의 사명이라고 하며 거절했다. 온갖 방면으로 나의 뒷조사를 하였으나 아무런 흠집을 발견하지 못하자 변호사법위반 사건을 조작하여 1978년 12월 나에 대한 비밀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법원에 의하여 청구가 기각되었다. 1년에 걸친 나의 노력이 주효하였던지 김대중 씨는 1년 만에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이 되었고, 얼마 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 5·18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나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한 달 동안 내 친구 임정명교수의 어머니집에 숨어 있어야만 했고, 정보부와 보안사의 두 번에 걸친 조사 끝에 혐의 없음이 밝혀졌다. 임기윤 목사는 나와 같은 혐의로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는 도중에 죽음을 맞이하여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내가 생면부지의 김대중 씨를 내 생명을 걸고, 또 부산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변호하고 도와준 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도와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민주 발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씨는 석방된 후 나를 민주헌정연구회의 9인 이사 중의 한명으로 추천하면서 나를 그의 정치적 동지로 포섭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1987년 8월께 그의 집에 인사차 들렀다가 당시 통일민주당의 동교동계 부총재급들이 모여서 김대중 씨의 대통령 독자출마문제를 논의하고 있던 현장에 참석한 격이 되었는데, 김대중 씨는 나에게도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서슴없이 이번에는 김영삼 총재에게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첫째, 1986년에 직선제가 되더라도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바를 지키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이며 둘째, 야권이 분열되면 필패인데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으면 이쪽이 양보하여야 한다, 셋째, 민주화를 위하여 역할분담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넷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지금까지 야당을 이끌어 온 당수가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느냐 라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김대중 씨는 다른 참모들에게 나의 말을 반박해 보라고 종용하였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고, 특히 좌장격인 이중재 씨는 시종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김대중 씨는 "이 부총재, 여기 잠자러 왔소" 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내게 "많은 사람들이 양보하라 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만두면 나이가 많아서 다음에는 대통령이 될 수가 없소" 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행동하는 양심'을 내세우며 민주화의 화신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에 큰 실망을 느꼈고 이런 사람을 내 생명을 걸고 변호해 왔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산으로 내려와 그에게 절교장을 보내고, 그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만약 그 때 김대중 씨가 양보하였더라면 김영삼 씨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고, 통탄스러운 민주세력의 지역분할도 없었을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7> 부민협에서 6월 항쟁까지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7> 부민협에서 6월 항쟁까지
노무현 구속적부심에 사상초유 99명 변호인
85년 요산선생 모시고 부민협 결성 본격 민주화 운동
박종철 추모대회 등 숱한 항쟁 6·29 선언으로 이어져
잊을 수 없는 일들

 
  1987년 2월7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주최의 고 박종철군 추모 시민대회가 열린 부산 제일극장 앞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끌어내고 있다.
1970년대 부산민주화운동의 핵심주도세력이던 청년들이 1981년 부림사건으로 일제 검거되고, 이어서 1982년에 발생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여파로 80년대 초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당국은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반미방화살인사건으로 규정하였지만, 그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나로서는 그 사건의 진상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부식, 김현장, 김은숙 등은 결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누구의 지령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 미군의 허락 하에 국군에 의하여 유혈 진압된 것과, 그 이후 성립된 군부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항의한다는 표시로 미문화원 정문에 살짝 불을 질러 세계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휘발유 사용에 무지하였던 학생들의 부주의로 미문화원 건물 전부에 불이 붙고 도서관에 있던 대학생 한 명이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보도와 인명이 살상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분위기에서 그들을 변호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1, 2, 3심의 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문부식과 김현장은 사형선고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이 감형되고 오랜 복역 끝에 석방되어 오늘날에는 모두들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음은 다행이다. 나는 그 사건을 피를 토하듯 열변으로 변론하였고, 미국대사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사형 집행이 되지 아니하도록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1981년 부림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청년들이 83년에 석방되면서부터 부산공해문제연구소를 온천성당(주임 손덕만 신부)에서 결성하면서 부활하였다. 1985년에는 부산공해문제연구소가 발전적 해체를 하고,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요산 선생을 정점으로 하여 최성묵 목사, 송기인 신부, 김희로 시인, 나를 비롯한 변호사들 이흥록, 노무현, 문재인 등이 발기인이 되었다. 송기인 신부가 초대회장을 맡고, 우리들은 상임위원이 되었으며, 김재규 군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시국사건에 대한 변론 활동은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가 가세하여 나로서는 짐을 덜었고, 부민협은 활발하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게 되자 당국의 압력을 받은 천주교 부산교구는 송기인 회장을 외국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나와 요산 선생이 이갑수 주교를 만나 간청하였으나 결국 송신부는 1987년 1월에 미국으로 강제유학을 떠나야 했고, 후임으로 최성묵 목사가 제2대 회장을 맡았다.

1987년 2월 7일 부민협 주최의 박종철추모 시민대회가 열렸다. 당초 계획하였던 원각사 앞이 경찰에 의하여 봉쇄되자 부산극장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전격적으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경찰이 사방을 둘러싸고 최루탄을 쏘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내가 "모두 앉자"고 하여 약 300여 명의 회원들과 시민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민주화 구호를 외쳤다. 약 1시간 동안 최루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속에서 버티었는데, 경찰은 한 사람씩 뜯어내어 경찰차에 태웠다. 마지막으로 나와 두 사람이 남았다가 시경대공분실로 호송되었다. 그곳에는 먼저 끌려 온 노무현, 문재인변호사가 있었다.

이틀 만에 우리는 석방되고, 노무현 변호사는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나의 요청에 따라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인 하경철 변호사 등 2명이 급거 방부하여 법원장과 담당법관을 만나 집시법 위반으로 변호사를 구속하는 일은 부당함을 강조해 결국 영장이 기각되었다. 그 사건으로 부민협부회장 김희로, 신민당원 김신부, 목사 김영수, 교회청년회장 손규호 등 4인이 구속되고, 우리는 불구속입건되었다.

부민협의 민주화투쟁은 계속되었고, 전두환의 4 ·3 호헌조치는 민주화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어 그해 5월 20일에는 부민협이 주동이 되어 민주헌법쟁취부산국민운동본부 (나도 공동대표 10여 명 중 1명이었다)를 결성하고,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희생으로 항쟁을 계속한 결과 이른바 노태우의 6 ·29선언을 받아내게 되었다.

그 무렵 대우조선노조대회에 참석하였던 노무현 변호사가 제3자 개입혐의로 구속되자 부산변호사회 회원들이 총출동하여 그의 적부심청구소송에 참여하였다. 재판에서 나의 요구로 재판장이 변호사의 이름을 전부 호명하게 되었는데, 100여 명의 변호인이 일치단결하여 노 변호사를 변호한다는 시위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단일사건에 99명의 변호인이 선임된 것도 초유의 일이었고, 변호인이 전원 법정에 출석하여 한 명씩 출석을 확인한 것도 우리나라 사법사상 처음이라고 할 것이다. 변론은 내가 하였고 노 변호사는 석방되었다. 그해 연말 제 13대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짐으로써 유신과 군부독재에 대한 민주화운동은 일단 대단원을 내렸다고 할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8> 제13대 국회의원 생활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8> 제13대 국회의원 생활
청문회 첫 도입 주도… 진실 밝힌 밀알로
유명무실 국회법 개정·탈권위 청산 의욕적 추진
5공 비리·광주청문회 팀장 활동 잊지 못할 기억

 
  1988년 12월 31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전두환 씨가 계엄사의 자위권을 언급하자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뛰어나와 "살인마"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다. 1989보도사진연감 자료
1988년 3월 하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가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해 실질적인 군정 종식을 위해서는 나와 같은 민주화 인사가 국회의원으로 꼭 나서야 한다고 출마를 강력히 권유하였다. 나는 정치에는 전혀 뜻이 없었으나 김 총재의 강력한 권유와 시대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 끝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기로 하였다. 나는 나의 입당에 부산지역의 재야세력 영입이라는 명분을 부여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나 이외에 노무현 변호사와 김재규 군을 추천하였더니 김 총재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노 변호사는 처음에 출마를 승낙하였다가 공항에서 돌아가버린 일도 있고, 김재규 군은 자신이 없다면서 사양하였다. 나는 노 변호사를 겨우 달래 상도동으로 함께 데리고 갔다. 김재규 대신 추천한 부산대의 하일민 교수 역시 사양하는 바람에 나와 노 변호사만이 부산 재야 출신으로서 김 총재의 특별한 지원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의 첫 임무는 유신과 군부독재를 거치는 동안 국회를 입법부가 아닌 통법부로 전락시킨 국회관계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통일민주당의 국회법 개정위원으로 다른 세 당의 위원들과 함께 국회법 개정안을 만드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역대 국회법 개정연혁과 외국의 국회법을 참조해 나무랄 데 없는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국회법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청문회 제도가 도입되었고 국정감사와 국정조사에 관한 법률도 되살렸다.

두 번째 임무는 본회의에서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권위주의 체제의 청산과 참된 민주화는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조목조목 질문했다. 첫째 항은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민주공화국인 점에서 아무런 다른 점이 없는데, 당신들이 정부를 공화국의 번호를 붙여 부르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른바 제6공화국은 제5공화국과 어떤 점이 달라서 새 번호를 붙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현재 총리는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나의 대정부 질문이 있은 후로는 제6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정부가 공식적으로 쓰지 아니하였고, 다음 정부인 김영삼 정권부터는 공화국 번호를 아예 쓰지 않았다. 또 권위주의의 청산은 헌법과 법률 등 제도의 개선과 아울러 권위주의 시대의 인물들을 청산하고 권위주의적 정치 행태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인데, 과연 노태우 정부는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20개 항을 나누어서 질문하였다. 김영삼 총재는 지금까지 들어본 국회연설 중 최고의 연설 중 하나였다고 극찬해 주었다.

그 다음으로 이른바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야대'의 효력을 처음 실감한 것이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에 대한 표결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임명동의를 요청한 대법원장 후보자는 야당의 법조 출신 의원들이 볼 때 적격자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내가 의사진행 발언을 하겠다고 나서, 권위주의적인 경력 (유신과 군부정권에서 출세한 대법관)을 가진 사람은 민주화 시대에 부적절하므로 이에 대한 찬반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토론을 못하게 하는 것은 의사진행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사실상의 반대토론을 하였다.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공화당 의원들마저 나의 발언에 공감했는지 결과는 부결이었다.

표결 이후 민정당의 독주는 견제되어 모든 안건은 대화와 타협으로 처리되었다. 또 각종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나는 가장 중요한 분야인 비민주악법개폐위원으로 선정되어 그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는 동안 5공비리조사특위와 광주항쟁진상조사특위가 만들어져서 청문회가 열렸다. 건국 이래 최초의 청문회인 5공 청문회가 진행되자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민주당의 노무현 의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청문회가 열리는 날 아침마다 노 의원을 찾아가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질문을 해 나가라고 부탁하였다. 과연 노 의원은 최초의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광주청문회에서도 통일민주당이 잘해야 한다면서 나를 광주청문회 5인 위원의 팀장으로 임명하였다. 나는 채택된 증인들마다 5명의 위원에게 주심위원을 정하고, 질문순서를 고르게 정해줌으로써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질문을 하도록 하였고, 관련 자료들을 소송기록 보듯이 정독하여 좋은 질문자료를 찾도록 지휘하였다. 그 결과 광주청문회에서도 민주당 의원들이 이른바 스타들이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5공 청문회와 광주청문회를 통합하여 1989년 마지막 날 4당이 한 명씩 질문자를 정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신문하기로 해 내가 통일민주당의 질문자로 선정되었는데 다른 위원들이 질문이 아닌 의사진행 발언을 다투어 하고 마침내는 노무현 위원이 전 전 대통령을 향하여 명패를 집어 던지는 사태가 일어나 청문회장이 그야말로 '깽판'이 되어 버린 일이었다. 전두환 씨는 퇴장해 버리고 정작 질문을 준비하였던 위원들은 단 한마디도 질문을 하지 못한 채 역사적인 청문회는 그렇게 끝이 나버린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9> 3당 합당 불참과 정치적 시련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9> 3당 합당 불참과 정치적 시련
이상좇던 초보정치인 4년반 만에 의정마감
90년 공화·민정·민주 합당에 반대… 꼬마 민주당 창당
정치개혁협 만들고 정주영 믿었으나 이용당한후 떠나
잊을 수 없는 일들

 
  지난 1990년 2월 9일 민주공화당과 통일민주당, 민주정의당 등 3당이 합당해 만든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씨 등과 건배하고 있다.


나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으로서 국회상임위활동을 열심히 하는 한편, 각종 신문 방송에 민주당 대표로서 출연해 정치적 소신을 밝히고 대학과 사회단체 등에서의 강연 등 원외 활동에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동남아제국과 북한 등 외국방문을 통하여 국제정치의 안목도 넓혔다. 당의 현대화와 합리적 운영은 차기집권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므로 당 총재에게 건의하여 기획조정실을 설치하게 하고, 그 책임을 맡아 당 운영의 쇄신을 기하는 한편, 여론조사와 전산실 운영체제를 갖추고 미국 일본 등 선진민주국가의 선거 기술을 견학하고 연구하였다.

통일민주당과 평민당은 모든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였는데, 88올림픽 후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노 대통령을 상대로 공약 이행을 압박하면서 청문회 활동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통일민주당은 동해보궐선거에서 후보매수사건이 발생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평민당은 노태우의 재신임 공약불이행을 승인함으로써 민정당과의 연정설까지 나돌았다.

1990년 1월 김영삼 총재는 뜻밖에도 공화당·민정당과 함께 3당 통합을 선언하였다. 평소에 민주당 내의 많은 의원들이 평민당과 야당 통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지만, 막상 민정당과의 합당이 이루어지자 대부분의 의원들이 합류하였고, 나와 이기택 김정길 노무현 등 4명은 불참하였다. 불과 2년 경험의 정치초년생으로서 단순 소박한 이상주의자였던 나로서는 안개속 같은 '구국의 결단'을 선뜻 이해할 수도 없었고, 선거 때 군정 종식을 내세우고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던 약속을 어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발탁하고 지도를 아끼지 아니하였던 김총재를 따라가지 아니하는데 대한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은 컸었다. 김총재는 나의 불참을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우리 네 의원은 무소속의 박찬종 이철의원, 그리고 원외의 조순형 홍사덕 장기욱 전 의원들과 힘을 합쳐 이른 바 '꼬마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세대 교체와 체질 개선을 앞세운 우리들의 모임은 많은 국민들의 격려와 기대를 모았다. 나는 정책위의장을 맡아 도덕적 개혁정당·과학적 정책정당을 만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특히, 그 무렵 발생한 수서사건 진상조사를 통해 '수서 비리사건 조사백서'를 발간한 것은 역사적 과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충북 음성 진천의 보궐선거에서 공천자인 허탁 의원을 당선시키는 등 기세를 올리던 민주당은 지도력의 부재와 자금난으로 비틀거리다가 의원직 사퇴파동과 광역의원 선거 참패의 후유증 등으로 결국 김대중 씨의 신민당 (평민당의 개명 정당)에 흡수 소멸되고 말았다. 또 다시 남은 사람은 나와 박찬종 의원 두 사람뿐. 나로서는 비호남지역의 야당을 완전말살하는 흡수통합에 찬성할 수 없었고, 더구나 김대중 씨가 이끄는 정당에는 가기 싫었으며, 밀실 야합식 정치에 투항하는 동지들의 변신은 더욱 싫었다. 박 의원과 나는 새로운 정치진로를 모색하여 양순직 유제연 씨 등 깨끗한 옛 정치인들,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각계각층의 신인들과 의기투합해 '정치개혁협의회'를 만들어 세확장을 도모했다.

그 무렵 깃발론을 들고 정치 참여를 선언한 태평양시대위원회의 김동길 교수와도 만났으나 5, 6공 세력을 동참시켜야 한다는 그의 견해 때문에 영입이 되지 아니하였고, 우리 가운데서는 박찬종 의원이 김동길 씨를 의식하여 정당 창당과 대통령 후보 선언을 먼저 하려고 이탈하는 바람에 남은 사람들끼리 진로수정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있을 때 뜻밖의 제의를 현대그룹의 정주영 씨로부터 받았다. 정 씨가 일신의 영화를 다 버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그의 재력을 다 바쳐 야당정치를 후원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재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우리는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그와 직접 만났다. 정 씨가 한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노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하여 경제가 망하고 나라가 망한다, 기성정당은 기득권 보호를 위한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로 믿을 수가 없다. 뜻은 있어도 돈이 없는 훌륭한 인재를 모아 좋은 정당을 만들도록 뒷받침하겠다. 내가 야당을 하다가 '현대'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각오하고 나라를 살리겠다. 당신들이 사람들을 모아 정당을 운영하라. 나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로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의 말을 두 번 세 번 확인하였고, 그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정독한 결과, 나는 그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고, 업적으로 신용을 증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와 함께 하기로 하였다. 나는 정치의 마지막길에 들어섰다는 처절한 마음으로 국민당을 좋은 정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막상 그와 함께 정치를 시작해보니 정 씨 자신이 대통령 출마를 위하여 우리를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가 절대로 민주적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우직한 김광일의 정치인생은 그렇게 하여 4년반 만에 일단 끝난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0> 초대국민고충처리위원장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0> 초대국민고충처리위원장
무보수 상근으로 민원 하루 50건 직접처리
행정상의 피해 구제…공직자 생활 중 가장 큰 보람
창립 1주년 행사 권리구제 받은 수백명 참석, 격려

 
  김광일 변호사는 1994년 4월 9일 발족된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1년여 동안 1만여 건의 각종 민원을 처리했다. 사진은 지난 2일 열린 국민고충처리위 창립 기념식에서 직원들이 헌장을 낭독하는 장면. 국제신문 자료사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발족한 지 2년째인 1994년 4월 9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발족되었고, 나는 그 초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당시 정치를 떠나 변호사업에 복귀하고 있었던 나에게 청와대의 김무성 비서관에게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통고가 왔다. 위원장은 비상임이니 1주일에 한 번 정도 나와서 결재만 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제도였기 때문에 각종 관련 자료를 받아서 그 제도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이 제도는 스웨덴에서 처음 도입됐으며, 의회의 대리인인 옴부즈맨 (Ombudsman)이 행정기관으로부터 입은 국민들의 피해를 구제해 주는 제도이다. 당시 세계 100여 국가에 널리 퍼져 운영되고 있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였다. 기존의 정부합동민원실 같은 민원제도는 별다른 실효성이 없었는데, 이 제도는 민간인이 주가 된 제3자의 입장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권리구제가 한층 실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였다.

또, 그 처리 대상은 행정기관의 위법부당한 처분뿐만 아니라, 행정기관의 부작위로 인한 피해 및 정책의 잘못으로 인한 국민의 부담과 불편까지를 시정하고 제도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행정작용 전반에 걸친 권리구제 제도였다. 잘만 운영된다면 국민의 권리구제를 위하여 획기적인 봉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꺼이 맡았다.

그런데, 법령에는 제도의 골자만 몇 개 조항으로 되어 있을 뿐이고, 구체적인 운영요강과 처리절차 등은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상세한 운영규정과 필요한 서식을 모두 직접 만들었다. 나의 방침은 모든 사건은 위원회가 직접 조사처리하며, 위원장의 결재를 받아 시행하도록 하고 설령 민원이 기각되는 경우에도 상세한 안내를 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한을 풀어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사관들에게 이 제도의 취지와 운영규정을 직접 교육하면서 억울하고 약한 국민의 편에 서서 성실하게 민원을 처리하는 자세를 강조하였다. 인원도 두 배로 늘렸고, 전문위원도 공채하였고, 법률전문가가 필요하여 검사와 법제관 각 1명을 파견 받았으며, 정부파견 공무원들에게는 파견수당을 지급하도록 조치하였다.

1년 동안 1만여 건의 사건을 처리했으니 하루에 50건 이상을 소화해야 하였다. 그 사건들을 나는 직접 모두 검토해 처리하였고, 필요하다면 현장조사를 반드시 시행하였다. 묵은 민원이나 집단민원일수록 현장에 가보면 그 해결책이 바로 보이는 것이었다. 서울시내는 물론이고, 전국을 찾아다니며 현장조사를 하였다. 현장조사를 나가면 청문회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지 모두들 나를 환영하였고, 질서 있게 조사에 응해 주었다. 위원장으로서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1주일에 엿새도 모자라는 형편이어서 나는 변호사 업무를 제쳐 놓고 매일 아침부터 밤늦도록 상근했다. 물론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사비를 사용해야만 하였다.

1년에 한 번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운영보고서는 운영상황 전반과 중요한 미결사항을 정리하여 위원 전원이 대통령의 면전에서 보고하고, 애로와 미결사항을 대통령이 직접 행정부에 지시해 주도록 요망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총리와 장관들에게 고충위원회의 업무에 협조하고, 그 처리 결과를 존중하여 실시하라고 특별히 지시해 주었다. 또 위원회의 결정은 강제력이 없고 대통령에 대한 보고와 더불어 언론에 공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수시로 언론과 회견하여 문제점을 공개하고, 위원회의 활동을 홍보하였다.

그리고 국정감사시에는 위원회는 별도로 감사를 받지 않고 총무처의 감사에 포함하여 받는 것으로 한다는 국회의 방침을 듣고, 나는 위원회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잘잘못을 감사받아야 하며 그 기회에 국회의원들에게 이 제도의 홍보와 애로사항의 호소를 해야 한다고 하여 단독감사를 받았다. 모두들 수고한다고 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격려를 해주었다.

그 결과 예산도 두 배를 받을 수 있었다. 창립 1주년 기념행사로 시민회관에서 개최한 위원회의 보고대회에는 그동안의 활동으로 권리구제를 받은 수백 명이 참석하여 격려를 해주었다. 어떤 날에는 길을 가다가 길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면서 수십 년 된 우리 동네 민원이 위원장 때문에 해결되어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만났다. 재임 1년6개월 동안 나는 정말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쏟았다. 좋은 제도가 정부와 국민 속에 굳게 뿌리 박혀서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평생의 공직자 생활 중에서 이때만큼 보람을 크게 느낀 적도 없었다. 나는 그 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근무할 때에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제도개선과 행정지원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대통령을 모시고 위원회의 심의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위원회의 활동을 확인하게 하고, 위원과 직원들을 격려하게 하였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1> 대통령비서실장 시절(1)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1> 대통령비서실장 시절(1)
각료·주요기관장 대통령과 만남 최대한 주선
YS 임기 중반에 개혁 피로감 쌓여 국면전환용 인사
퇴근 후·휴일에도 청와대 주변 안떠나 재직중 대형사고 전무
잊을 수 없는 일들

 
  김광일 변호사는 YS임기 후반부(1995.12~1997.2)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으면서 틈나는 대로 많은 사람을 만나 현안에 대한 의견을 청취,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데 노력했다. 사진은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김 변호사(김영삼 대통령 뒤 우산 든 사람 오른쪽 뒤)가 한총련 학생들의 시위 농성으로 폐허가 된 연세대 시위현장을 둘러보는 김영삼 대통령을 수행하는 장면.
국민고충처리위원장으로 직무를 수행한 지 1년 반이 지난 1995년12월 나는 뜻밖에도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임명 한 달 전께 대통령이 박세일 정책기획수석을 시켜 나를 만나 나의 비서실장으로서의 적격성 여부를 타진하였던 것 같고, 박 수석의 강력한 천거로 실장 인사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인 제4, 5차 연도를 준비하는 데,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 안보강화와 사회·경제 분야 등애서의 개혁 마무리 작업을 함에 있어서 비서실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나를 불렀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지 만 2년 10개월이 된 때였다. 취임초 90% 이상의 지지를 보내며 환호하였던 국민들은 개혁 피로감이 쌓여갔다. 거듭된 각종 대형사고로 높아진 국민의 원성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절정에 이르고 대북 쌀지원과 중단, 여기에 덧붙여 정부가 독선으로 흐른다는 반감 등이 혼합되어 1994년 몇 군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패배하는 등 김 대통령의 권위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전반적 국면 전환과 인사 쇄신책으로서 이수성 국무총리와 함께 내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된 것이다. 나는 임명내정 사실을 통보받자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등을 비롯한 대통령과 비서실에 관한 책자들을 읽고 연구하였으며, 초대 박관용 실장으로부터는 비서실장의 직무수행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박 전 실장은 "김 대통령이 당신을 임명한 것은 철저한 조직 장악력과 추진력 때문이었을 거요. 대통령의 전반적 업무를 상세히 파악하여 적절하게 건의하고 보좌하며,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을 잘 장악하여 감시 감독하여야 할 것이요. 또한 대통령이 실수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대통령의 생각까지를 잘 살피고, 필요한 경우에는 관계기관 연석회의를 통하여 내린 결론을 가지고 대통령의 생각을 바꿀 때까지 노력해야 할 것이요. 김 대통령은 참모들의 정당한 건의는 100% 받아들이는 분이요" 라고 말해 주었다.

국정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균형감각을 가지고 보편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제시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지도력을 발휘하여 부하들을 잘 통솔하고 진정한 애국심과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서실장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자질과 성품을 갖추어야 하고, 때로는 대통령의 대리자가 되어 국정을 조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통령의 방어자가 되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여야 한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다하여 보좌할 각오로 임하였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대통령에게 전날 밤에 생긴 일들과 언론보도 내용을 종합보고하고, 대통령의 일정에 따른 필요한 지시를 받는다. 이어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다.

나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형식적 보고를 생략하도록 하고, 수석비서관 전원이 공통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과 회의에서 토론하여 결론을 내야 할 사안만 안건으로 보고하게 하였고, 때로는 시간 제한 없이 충분한 토론을 거치게 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주재의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대통령을 긴 탁자의 중앙부위에 앉게 하여 모든 수석비서관들과 가까이에서 실질적인 회의를 하는 형태를 취하도록 하였다. 오전에는 주로 비서실 전체의 업무를 파악하고 지휘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수석이 아닌 일반 비서관들도 직접 자유롭게 비서실장을 만나도록 하였다

오후에는 정부 각료와 외국대사 등 국내외 중요 내방객들을 가급적 많이 만나 사안을 파악하고,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며, 때로는 비서실장이 직접 처리해야 할 과제들을 연구하고 매듭을 짓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통령의 직무에 관하여 폭 넓고 깊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게 되었으며, 최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의 접견을 원하는 각료들이나 중요 국가기관장들은 언제든지 최대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수석비서관과의 의견 차이로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던 공정거래위원장, 관세청장, 고속철도공단 이사장 등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주선하여 그 분야의 제도 개혁에 성과를 거두게 한 바가 있다. 나는 퇴근 후나 휴일에도 청와대에서 반경 2km 이상 떠난 적이 없으며, 항상 국정을 파악하고, 대기상태에 있었다. 대통령은 쉬어도 비서실장은 쉴 수 없고, 대통령은 몰라도 비서실장은 모두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기 때문에 관계 각료와 수석비서관 이외에 비서실장까지 굳이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대통령 부재중에는 특히 안전사고나 돌발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24시간을 깨어서 국정을 살폈다. 단순히 보고만 받지 아니하고 국무총리, 국방·건교·내무부 장관과 경찰청장 등에게는 수시로 직접 전화를 걸어 국가안보와 각종 재해에 대한 예방점검을 독려하고, 필요하면 내가 현장에 직접 나가보기도 하였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의 재직 중 대형사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2> 대통령비서실장 시절(2)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2> 대통령비서실장 시절(2)
노사·금융 개혁 의욕적 추진, 곳곳서 암초
96년 벽두 각 부처 의전 간소화·차관급 인사로 시작
노·사·정 합의 노동개혁 노력…날치기 통과로 변질
금융개혁법 국회 제출, 차기 대선 앞둔 정치권 외면

 
  민주노총 지도부가 1996년 12월 26일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와 관련,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총파업을 선언하고 있다. 1997보도사진연감 자료

내가 비서실장이 되고, 1996년 새해부터 청와대와 정부의 행정 낭비를 줄이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신년벽두 정부 부처의 고위관리들이 자체 신년 시무식 후 다른 관계 부처에 신년인사 다니는 것을 금지하였고, 대통령의 연두순시도 폐지하였다. 정부 각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그 전해 9월부터 국회의 국정감사를 받느라 몇 달을 시달리다가 이어서 대통령의 연두순시에 대비하느라고 정상적 업무수행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폐지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회의시 꼭 필요한 직접 관련자 이외에 간접 관계자나 방청객 성격의 일반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밥을 먹고 하는 것을 폐지하였으며, 웬만한 의전적 행사는 국무총리에게 대행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시간을 아낄 수 있게 하였다.

나는 비서실장에 취임한 직후 대통령으로부터 1996년도 정부의 차관급 정기인사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관급 이상은 대부분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결정하였으나 차관급 인사안은 비서실장에게 실질적으로 맡기다시피 한 것이다. 나는 공직기강 비서관이 초안한 복수 인사안을 토대로 관계 수석비서관, 또는 관계부처 의장들과의 협의를 거쳤다. 인사에 대해 만약 부정적 평가가 나오면 관계 수석비서관을 문책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지연 학연 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실력과 신망을 위주로 선발하였다. 대통령은 거의 100% 그대로 재가를 하였다. 나는 대통령의 임명식 후 차관들을 따로 불러 인선과정을 설명하고, 해당 부처에서의 하위직 인사에도 같은 과정을 거쳐줄 것과 이후 직무수행 사항을 계속 주시할 것이니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의 장·차관급 인사에 대하여 정부나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 이후의 인사도 같은 원칙과 정신으로 하였다고 자부한다.

1996년부터 대통령이 주력한 일은 경제구조를 개혁하여 경제발전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과 남북관계의 근본적 개선을 위한 노력이었다. 우선 재벌경제를 올바로 감독하기 위하여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장관급으로 승격시켰다.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하여 중소기업청을, 해양입국과 수산업 발전을 위하여 해양수산부를 각각 신설하였으며, 국제적으로는 선진국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다음으로, 고질적 노사문제 해결을 위하여 대통령 직속의 노사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정 대표들과 최고의 학계인사들을 위원으로 선정했다. 대결과 투쟁의 노사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합리적 노사관계로 만들기 위하여 1년 가까이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대통령은 시일이 걸리더라도 노·사·정 간에 완전한 합의를 이루라고 수차 지시하였는데, 마지막까지 정리해고·변형근로제의 도입과 복수노조의 인정 문제등은 합의가 잘 되지 아니하였다. 끝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정부에 넘겨 정부안을 만들어 국회에 상정하여 여야의 토론과 여론의 평가를 받아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 씨의 야당은 사용자 편도 들 수 없고 노동자 편도 들 수 없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아무런 대안도 만들지 않은 채 노동법개정안의 국회 상정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여 국회의장을 공관에 감금하는 등 원천봉쇄를 하였다.

12월 25일 박세일 수석이 나한테 "당정이 합의하여 정부안에다가 복수노조는 금지하고 정리해고제를 3년간 유예하는 등 몇 가지 변경을 가하여 전격 통과시킨다는 정보가 있는데, 실장이 좀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나는 "오늘은 크리스마스 휴일인데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나. 내일 알아보자"고 하였다. 그 다음날인 26일 새벽 5시에 이원종 정무수석이 지금 막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보고해왔다. 나는 새벽 5시면 야당의원들에게도 의사일정을 통지하였느냐고 물었더니, 통지와 동시에 통과시켰다는 것이었다. 의회주의를 존중하는 문민정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대통령이나 비서실장도 모르는 가운데 변칙통과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내부적으로 인책문제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언론에서 국회의 변칙통과에 대하여 별다른 비난이 없었고, 노동계에서도 특별한 반대 투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얼마 후 김 대통령을 위기로 몰아간다.

김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에 주력하였던 또 하나의 중요한 경제개혁은 금융개혁이었다. 금융개혁 없이는 건강한 경제체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청와대와 정부는 관련 금융관계법 개정안을 신중히 마련하여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뜨거운 감자인 금융개혁법안을 아예 안건으로 상정하지도 않고, 국회를 폐회하고 말았다.

노사 개혁과 금융 개혁 문제만 정치권의 협력으로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1997년 말의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는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IMF 사태 발생 후, 정치권과 김대중 대통령 정부가 경제구조개선을 위하여 취한 조치들이 모두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마련한 노사개혁과 금융개혁안을 그대로 시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3> 대통령비서실장 시절(3)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3> 대통령비서실장 시절(3)
YS, 클린턴과 남-북-미-중 4자회담 이끌어내
세계 언론 "한반도 긴장완화 위한 획기적 제안"
1996년 한총련 사태 엄정한 법 집행으로 해결
잊을 수 없는 일들

 
  김광일 변호사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재직하던 1996년 4월 16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 내외가 제주 신라호텔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내외의 한국방문을 환영하며 인사말을 나누고 있다. 이날 두 정상은 단독회담을 갖고 한반도 4자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국제신문 자료사진
1996년 4월 16일 제주도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수립을 위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 회담을 공동으로 제의했다. 북한은 1994년 미·북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제1차 핵개발 위기와 식량지원 도중 드러낸 배신행위, 그리고 1996년 초의 일방적 정전협정 불준수 선언 및 비무장지대 내의 무력시위 등을 통해 대남적화통일전략에 아무런 변함이 없고, 오직 식량난과 경제적 곤경의 해소를 위해 화해 또는 협박의 몸짓을 번갈아 하면서 남북의 근본문제를 미국과만 직접 협상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끊임없이 식량지원과 경제지원을 여러 통로로 간청해왔다. 김 대통령은 관계당국 간의 기본적 평화협정체결을 통해 평화공존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모든 문제는 공식회담에서 거론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보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한·미 두 정상의 4자 회담 공동 제의였다.

세계의 언론들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제안이라고 찬양했다. 김 대통령은 경제지원 요청에 대하여는 북한이 회담에 응하기만 하면 지원문제는 별도로 협의하여 처리하겠다며 회담 참가를 촉구했으나, 북한은 참가를 미루다 1997년 연말 제1차 예비회담에만 응했다. 이듬해 정권이 바뀌면서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대해 일방적 퍼주기를 하던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한 번 가졌을 뿐, 4자 회담 제의는 묵살했다. 김대중 씨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김정일에게 준 4억5000만 달러는 김정일의 체제유지비와 핵무기 개발자금으로 쓰여졌고, 그 대가는 개인적 노벨평화상이었다.

1996년 8월에 한총련사태가 일어났다. 한총련의 이른바 '96범청학련통일대축전' 행사와 관련한 폭력 시위 및 연세대 불법점거 농성사태는 8월 12일~ 20일 9일간 계속됐다. 한총련은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인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을 추종하는 NL 주사파계열이 지도부를 장악함으로써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연방제통일'을 목표로 미국과 정권 타도를 위한 결정적이고도 직접적인 행동은 인민의 무장봉기밖에 없다는 전략전술지침을 채택했다. 한총련의 '투쟁선봉대'는 도시게릴라식 특수훈련을 받고 쇠파이프와 화염병, 그리고 돌을 사전에 준비해 복면을 쓰고 학원가의 폭력시위를 선도했다.

그러한 한총련이 8월 13~ 15일 3일간 연세대에서 8·15 통일대축전을 강행하였다. 집결하는 과정에서 한총련시위대는 경찰차량의 파괴·방화, 경찰관에 대한 폭행과 납치, 대로의 점거와 교통마비 등을 거침없이 감행했고, 경찰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었다. 8월 12일부터 연세대를 포위한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를 염려해 더 이상의 진압을 하지 않았다. 나는 8월 15일, 16일 밤 두 차례에 걸쳐 연세대 외곽 현장을 둘러 보고, 경찰청에도 들러 상황을 파악한 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관계관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점거 농성중인 학생들에게 먼저 자수를 권유, 불응하면 전원체포키로 방침을 정했다.

그 방침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이수성 총리가 나타나 강제진압 과정에서 인명피해라도 나는 경우 김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불명예가 될 것이니 포위망을 일부 풀어서 슬그머니 빠져 나가도록 하여 해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하였다. 이 총리의 말에 솔깃한 태도를 보이는 대통령에게 나는 "민주주의 정부일수록 공권력은 강력하고 범법자는 엄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폭력불법시위에 대하여 공권력을 엄정하게 행사하지 않으면 법질서는 파괴되고, 대통령의 권위는 실추되어 더이상 통치행위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대통령은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이틀 연속 대통령에게 공권력의 엄정 집행을 강조했다. 드디어 8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경찰의 강제 진압이 실시되었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종합관 건물은 불타고, 학교의 기자재는 파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경 1명이 학생들이 던진 벽돌에 맞아 사망했고 864명의 경찰관이 중경상을 입었고, 수십억 원의 재물피해가 있었다. 시위자들은 총 6095명이 연행돼 550명이 구속되었다.

다음날 나의 건의에 따라 대통령은 병원 방문과 연세대 현장 점검을 하였다. 이때부터 공권력과 법질서는 되살아났고, 한총련의 기세는 꺾였으며 학원은 정상화되었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4>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4)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4>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4)
한보사태로 YS 위기 - 비서실장직 사퇴로 돌파구
삼성자동차 공장 허가 민주공원 건설 등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 올바로 평가해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부산민주공원 건설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9년 10월 부산민주공원 준공식 당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현직 대통령으로 참여해 악수를 하고 있다. 국제신문 자료사진
1997년 1월초, 2년 만에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이 이루어졌다. 그 전해인 1996년에도 연두기자회견을 준비하였으나 취임 초부터 제기되어 온 대선자금 의혹에 관한 불씨가 되살아날 것을 염려한 일부 참모의 잘못된 건의로 담화문 발표로 대치되고, 기자회견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1997년의 연두기자회견은 대통령의 기본 연설도 좋았고, 다른 질문에 대한 답변도 좋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통령의 답변이 너무 고압적이고 독선적이라 하여 국민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 전해 연말에 변칙 통과된 노동법 개정을 재론할 생각이 없고, 정국 현안에 대한 여야영수회담을 거절하며, 연말에 있을 대통령후보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답변하였던 것이다.

노동법 개정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불법시위자들에 대한 체포와 수배 등 강경조치로 맞섰고, 정국현안에 대한 여야의 관계는 경색되었다. 참모들은 나름대로 그 해법에 관한 건의를 하였으나, 대통령은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이 나에게 대통령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문민정부와 김 대통령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평소에 선의의 충고와 건의를 해왔던 김 추기경이 나라의 위기 해소를 위하여 나선 것이다. 두 시간에 걸쳐 단독 대화를 하고 나오는 김 추기경의 모습은 대통령을 설득하느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얼굴은 창백하였고, 입가에는 거품까지 묻어 있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나에게 대통령은 즉각 여야영수회담을 가지고 모든 현안을 논의하겠다고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김 추기경의 설득이 주효한 것을 반기면서 나는 개신교와 불교의 지도자들도 만난 후에 발표를 하도록 건의했다. 대통령이 특정 종교지도자만을 만난 후 태도가 돌변한 것으로 되면 다른 종교계가 반발할 수도 있고, 대통령의 결정이 경솔하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개신교와 불교 지도자를 잇달아 만나고 나서 바로 여야 영수회담을 가졌다. 대통령은 변칙 통과된 노동법 개정을 백지화할 것과 시위자들에 대한 체포와 수배를 취소할 것과 모든 정치 현안은 야당의 의견을 존중하여 적법하게 처리할 것을 합의하여 발표함으로써 위기는 해소되었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다소 회복되었다.

그것도 잠깐뿐이었고, 잇달아 터진 한보사태는 대통령을 더 큰 위기로 몰았고, 분노한 국민 여론을 달랠 길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 취임 4주년 기념사를 통하여 그동안 국민의 비판을 받았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더욱 겸손하고 솔직한 대국민사과와 함께 남은 임기 1년을 새로운 각오로 국정에 임하기 위한 인사 쇄신을 단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민심의 소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국내 주요언론의 중진들에게 기념사에 실을 내용에 관하여 자문을 하기로 하였다. 두세 사람에게 만약 당신이 이 시점에 대통령으로서 취임 4주년 기념사를 한다면 어떤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 것인지 원고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그들이 작성해 준 원고의 내용을 기념사에 최대한 반영하였다.

그렇게 하여 발표된 대통령의 취임 4주년 기념사가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서 여론이 많이 좋아졌다. 바로 그 다음날 나는 기념사에서 말한 대로 인사 쇄신을 실효성 있게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최측근, 최고위 보좌책임자인 비서실장부터 경질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건의드렸다. 대통령은 임기말까지 함께 하자고 몇 번이나 만류하였으나, 나는 그해 2월 말에 비서실장직을 사임하였다.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한다. 다만, 부산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다. 김 대통령은 부산의 산업 발전을 위하여 삼성자동차공장을 허가하였고, 부산신항의 개발과 선물시장의 설치를 위하여 특별히 노력하였으며, 도시기반시설이 취약한 부산을 위하여 2002년 월드컵 유치와 함께 2002년 아시안게임을 부산에 유치함으로써 사전에 도시기반시설을 확장하고 강화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비 80억 원과 부산시비(문정수 시장) 80억 원을 지원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세계에 유례가 없는 민주공원이 건설된 것은 오로지 김영삼 대통령 덕택이다.

전·현직 대통령이 함께 참석한 1999년 10월의 준공식에서 민주공원조성추진위원장인 송기인 신부가 경과보고를 하면서 민주공원 건설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현직 김대중 대통령의 배려로 민주공원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고하면서, 막상 절대적인 공헌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에 관하여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랜 민주화의 동지이던 송기인 신부를 바로 보지 않는다. 그 송 신부가 오늘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5> 대통령 정치특보 시절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5> 대통령 정치특보 시절
여당 후보가 대통령 공격…대선 패배의 길로
이인제·박찬종 탈당 만류
독자정당 만들어 여권 표 분산
YS·이회창 화해 주선
이씨 측 거부로 끝내 무산
잊을 수 없는 일들

 
  김광일 변호사는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이 한창이던 1997년 5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 정치특보를 맡아 공정한 경선관리를 위해 노력했다. 사진은 신한국당 상임고문단 회의에 앞서 이회창 대표(사진 왼쪽)가 박찬종 상임고문과 악수를 하는 장면.
1997년 5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난 나를 그 전해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 당시 빠졌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파나마 도미니카 등 4개국 대통령특사로 임명하여 그 네 나라의 정상들을 만나 외교활동을 하게 하였다. 6월에는 대통령정치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퇴임시까지 상근하면서 대통령을 다시 보좌하게 하였다.

나는 정치특보로서 대통령의 중요한 정치문제를 보좌하고, 대통령이 명하는 특별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최대의 정치문제는 차기 대통령선거였다. 내가 정치특보가 되어 당면한 첫 임무는 신한국당의 경선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른바 '9룡'으로 불리는 신한국당 경선주자 9명을 모두 개별적으로 만나 그들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싶은 말들을 들었다. 이회창 후보는 민주계의 독자경선기구인 '정발협'을 해체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후보들은 이회창 후보의 당대표 겸직을 해제해 달라는 것이 공통된 건의사항이었다. 그들의 건의대로 대통령은 이회창 씨로 하여금 당대표를 사임하게 하고, 민주계로 하여금 정발협을 해산하게 했다.

경선에서 이회창 씨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회창 씨에 대한 당 안팎의 지지도는 높았고, 김 대통령도 흡족해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이 후보의 두 아들에 대한 병역문제가 불거지면서 국민의 지지는 급속히 하락, 야당후보의 지지율을 밑돌게 되었다. 게다가 이 후보의 경선 패배자들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 박찬종 이인제 등 경선 경쟁자들이 당을 떠날 조짐을 보였다.

나는 이인제 씨를 만나 민주적 절차의 경선에서 패배했다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해야지 탈당하거나 따로 독자후보가 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로 정치적인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충고했다. 박찬종 씨에 대하여는 정치적 변신을 거듭해 온 박 의원이 이번에 신한국당에 뼈를 묻겠다고 약속하면서 입당하였으니, 당에 남아 최대한 이 후보를 도우라. 그가 당선되면 일등공신이 되는 것이고, 만약 낙선하더라도 박 의원이 다음에 당을 이끌어갈 유력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간곡하게 권고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인지 갑자기 당 총재직을 이 후보에게 물려주었다. 후보 교체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판단한 이인제 씨는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박찬종 씨는 이인제 진영에 합류했다.

결과는 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었고, 이인제와 박찬종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정치적 표류를 계속하고 있다. 당시 대통령 선거일이 가까워지는데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올라가지 않았다. 특히 김 대통령을 지지해왔던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의 마음이 혹시 이인제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헷갈려 하였으나, 대통령은 그 점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도 표명하지 않았다.

신한국당은 야당후보인 김대중 씨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수십개의 비자금계좌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여 검찰에 고발하였다. 검찰수사를 회심의 승부수로 기대하고 있던 이 후보는 돌연 검찰이 수사중단을 선언하자 이는 김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에 격분한 나머지 김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였고, 이에 격노한 김 대통령은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그때부터 이 후보는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고 야당후보보다는 김영삼 대통령을 공격하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심지어는 김 대통령의 형상을 만들어 몽둥이로 내려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김 대통령과 이 후보간 갈등과 반목은 점차 심화되었다. 나는 김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더라도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와 적대관계에 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념이 다른 야당후보에게 반사적 이익을 주고, 여당 성향의 표를 분산시킬 우려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총재로서 지명한 대통령 후보를 심정적으로라도 지원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이고, 또한 원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여당의 정치세력을 잃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거막판에 김 대통령과 이 후보 간 화해의 자리를 은밀하게 만들었으나 이 후보가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선거운동 마지막날 김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부산에서 김 대통령을 공격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김 대통령 지지성향의 표들이 이인제에게 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김 대통령은 철저하게 엄정중립이었으니 선거관리는 공정하기 짝이 없었다. 선거결과는 이인제가 490여만 표를 얻었고, 이회창은 990여만 표를 얻어 1030여만 표를 얻은 김대중에게 불과 40여만 표 차로 패배하였다. 그 이후 김대중·노무현 코드의 정치가 10여년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5회에 걸친 나의 글을 마치면서, 대통령의 자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첫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고, 그 실천의지가 강력하여야 하며, 둘째 건전한 상식에 입각한 품격높은 언행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자신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여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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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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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daum.net/yamuzindream/6984605

일본에서나 대한민국 흠잡는 가십으로 팔리는 김영삼의 인터뷰

 

 

김영삼씨! 한때 당신을 괜찮게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 나라 돌아가는 상황에 관심을 가질 무렵에 당신은 대통령이 되었으니까요.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던 시기에 당신은 조금 신선하게 보였습니다. 하나회 척결과 하룻밤 사이의 금융실명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형 판결 등은 그 시절 나름대로 당신에게 호의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그런 것들마저 좋게 볼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떠나 국가 차원으로서 문제를 두루 살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영달에 관한 일신상의 문제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한때 야당 총재로서의 지위로 인해 국가 차원의 문제들이 곧 김영삼 당신 자신에 대한 핍박과 고난으로는 다가갈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오로지 자신에 대한 핍박으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국가 차원의 역사적 문제로서 고민했던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삼당합당으로 군사독재 세력과 융합할 수도 있었겠지요. 한나라당의 잡탕같은 구정물은 바로 당신의 권력욕이 이루어낸 작품 아닙니까? 군사독재 찌끄러기들의 생명력을 오늘날까지 연장시켜준 장본인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러니 한나라당에는 변절자들이 수두룩하지요. 정의와 신념으로 굳건했던 자들도 한나라당에 들어가서는 모두 이익이나 쫓고 영달이나 추구하는 정치적 치한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보면 군사독재도 마땅찮게 부정할 수 없고 그렇다고 민주화 정신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고 결국은 자신들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 그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역주의와 돈냄새 아니겠습니까? 굳건한 신념 없이 국민들로부터 표를 얻을려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서민을 윽박지르고 적당히 농을 치며 사기를 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생적으로 근본이 없으니 사기질로 연명하는 정당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삼당합당이 없었다면 군사독재 세력은 일정한 근절이 벌써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87년 6월 항쟁의 의의를 날려먹은 것도 그러고 보면 김영삼씨 당신의 업적이지요. 이승만이 한 일과 똑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친일세력에 대한 단죄 없이 권력욕으로 친일세력의 생명력을 뿌리깊게 굳혀놓은 이승만과 같이 김영삼씨 당신은 군사독재 세력이 이 땅 위에서 떵떵거리게 만들어놓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권력욕이 국가의 역사마저 비틀어 다시 한번 올바른 역사의 길을 막다른 골목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선택을 어떻게 묵묵히 따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올바른 역사관과 투철한 신념은 그 당시 오직 노무현 대통령님 하나 뿐 아니었습니까?

 

몇 십년 동안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들어 반대를 외쳤던 것을 보면 그때부터 김영삼 당신들 패거리가 외쳐오던 민주주의는 거죽만 남은 죽은 호랑이였을 뿐이었습니다. 뼛 속까지 진짜 민주주의로 절절한 호랑이는 노무현 대통령님 하나 뿐이었습니다.

 

오늘 김영삼씨가 일본의 한 잡지 발행인과 인터뷰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영삼씨가 속마음을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닌 일본 사람에게 터놓는 것을 보고 우습기도 했습니다. 언론 플레이는 당신이 고단수였지요. 당신이 대통령인 시절에도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모습을 잘 감춘 채 줄곧 잘 정리된 메세지만을 국민들에게 남겨놓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국민과 투박하게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님 한분 뿐이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을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는 김영삼씨 당신의 말은 이미 인격이 바닥난 당신에게 더 바랄 것도 없지만 그나마 당신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인내마저 바닥나게 만듭니다. 저 영감탱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아무리 닭 모가지 비틀어지는 소리를 내더라도 정신나간 자의 헛소리겠거니 하고 신경쓰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당신 무덤에 침을 뱉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게 만듭니다.

 

"내가 발탁해서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라는 김영삼씨 당신의 생각은 그야말로 이 자는 깡패두목 정도의 치기어린 생각으로 민주주의를 논했구나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당신의 케케묵은 관념과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님은 그것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국회의원이 일인 보스의 결정으로 인해 발탁된 인사들로 채워지는 실상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 시절 야당은 군사독재를 비판하였지만 실상 야당조차도 그 내부구조는 일인독재나 마찬가지인 정당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훈련받고 성장시킬 순간은 거의 없었고 그 기회마저 김영삼씨 당신의 삼당합당으로 상실시켜 버렸습니다. 군사독재의 어두운 이면이기도 하지요. 군사독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똘똘 뭉칠 수 밖에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이 피를 흘려 넘겨준 민주주의를 권력욕으로 인해 홀라당 태워먹고 군사독재 세력과 샴페인을 터뜨린 장본인이 바로 김영삼씨 당신입니다.  

 

결국은 한나라당이 이명박 같이 저질의 돈냄새나 풍기며 사기를 치거나 박근혜 같이 독재의 향수나 뿌리며 혼자 고고한 척 나댕기고 그저 그 졸개들은 술과 여자나 찾아 불나방처럼 사고치면서도 책임은 하나 지지않고 싸돌아다니는 집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친일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군사독재도 스스로 부정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내세울 수도 없어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인생 한번 드럽게 살더라도 풍족하면 그만이지 하는 류의 양아치 당풍으로 흐를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현재 집권하고 있는 대통령이나 정당이 그러하니 국가가 사망의 골로 가는 것이지요. 국가재정이 파탄날 수 밖에 없지요. 백년대계는 고사하고 있는 것으로 한탕 실컷 처먹는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지요. 서민들로부터 표를 얻을려면 사기치는 수밖에 없지요. 적절한 기준도 없이 환심사듯이 사면하고 떡값 돌리듯이 푼돈 깨나 나눠주는 것처럼 정치할 수 밖에 없지요. 자신들 위해 100조 감세하고 국민들에게는 슬그머니 물가로 그 부담 전가시키면서 유명무실한 증세는 말로만 거창할 뿐이지요.

 

국가 재정 파탄내고 국민 경제가 박살나도 이미 챙길 것 몇 갑절로 다 챙긴 당신들은 정권 넘겨준 이후에는 챙긴 것으로 떵떵거리고 뻐팅기며 갖은 발목을 잡고 농성하면서 세월을 보내면 국민들이 또 속고 실증나서 도로 당신들에게 정권 넘겨줄 것이라 이미 계산하고 있습니까? 영혼도 팔고 신념도 묻어버린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알량한 계산 뿐이겠지요.

 

국민들 피로 허물어버린 독재의 전당에 기둥 하나 둘러메고 들어가 일정 지분을 챙기며 지금까지 그렇게 영혼도 신념도 모두 내팽개친 채 남은 것이라고는 똘똘 뭉쳐 고착된 아집만으로 뻐팅기며 살고 있는 게 바로 김영삼씨 당신이랍니다. 그런 집단의 한축을 만들어 대한민국 역사의 변절에 혁혁한 공을 세운 당신의 속마음을 일본 잡지 발행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겠지요.

 

김영삼씨 당신이 어디 맑고 깨끗한 영혼과 굽히지 않는 신념의 노무현 대통령님에게 깜이라도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해두건데 노무현 대통령님이 국회의원이 되셨고 후에 대통령까지 되셨던 것은 우리 국민이 그분을 진실로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국민에게 빚을 진 것이고 그 빚에 대해 항상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스스로 그 빚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여 생명까지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국민들은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님에게 막중한 빚을 지고 있었고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그에게 너무 많은 책임만 떠넘겼는 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과 국민은 서로에게 서로가 막중한 빚을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서로 갚지 못해서 항상 부끄러워했던 그런 아름다운 관계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국민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이를 갚아야할까를 고민하셨고 국민은 이제 또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님께 빚진 일을 어떻게 갚아나가야 할 지 막중한 책임감에 눈물 흘리며 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김영삼씨 당신이 국화꽃 한송이 마저 던져버리는 더렵혀진 영혼을 드러냈다면 국민은 노무현 대통령님에게 고이고이 국화꽃 한송이 바치며 눈물로 추모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노무현 대통령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갚지 못한 채 빚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씨 우리는 당신에게 빚진 일이 없습니다. 당신에게서 돌려받고 싶은 부채만이 잔뜩 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며 주절거리는 당신의 모습에 질렸습니다. 대한민국 역사가 빨리 당신을 지워버리길 바라는데 유독 당신 혼자 발버둥치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김영삼씨! 당신의 주절거리는 이야기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쫓겨나 시기어린 이웃나라에서나 우리의 국격에 대한 조롱거리로 떠도는 한심한 꼴로 전락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말이 취급되는 서글픈 처지나 똑바로 쳐다보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게 당신의 존재감을 떠벌리는 마지막 남은 수단인가본데, 당신을 대통령으로 가졌던 국민에게는 슬프게도 대단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출처 : 북새통 선생 (http://blog.daum.net/yamuzin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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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정권실세 오자와 이치로 "천황가는 한국에서 왔다!" 폭탄발언

사실상 일본총리라고 불리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이 "천황가는 한국에서 왔다"는 폭탄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 났습니다. 12일 방한중 국민대에서 가진 강연회였는데요. 어떻게 이런 뉴스가 한국과 일본의 전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네요.

<주간신초>의 신년특대호에 실렸는데 너무나 구체적으로 실려 있어서 감히 오보라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주간신초> 편집부에 확인해 본 결과 "100%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네요. 쉬쉬 하고 넘어갈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간만에 일본에서도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보니 흐뭇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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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디어법 가결 관련해서, 저도 사기쳐도 무죄인가요?
형식  공개  진행상태 접수중 → 처리중 → 처리완료 
이름 정준용  날짜 2009-10-29

 

안녕하세요. 오늘 언론 보도를 통해

헌법재판소에서 미디어법을 가결된 것으로 판결헀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잘못 생각하고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나라 사법기관 최고의 권위가 있는
헌법재판소에서 이런 판결을 내렸는데,
도대체 왜 나는 그동안 멍청하게 정직하게만 살아왔나 하는 후회가 듭니다.


그럼 저도 이제,

수능시험 대리로 쳐도 합격 인정 되는건가요?

토익시험도 대리로 봐도 되는거네요?

임용고시, 사시, 행시 준비하는 친구들에게도 적극 대리시험을 권해야겠네요.


하다못해 제가 위조지폐를 찍어내서 사용해도,

'제조 절차상 위법성은 인정하나, 화폐 가치는 무효로 볼 수 없는'거네요?


하긴 뭐, 아무리 사기를 쳐도 대통령 당선만 되면 유효한거니까 그렇겠죠.

헌법재판소라고 용빼는 재주 있나요. 권력 앞에 개처럼 굴종해야지 뭐.

 

아 바보같이 왜 여태까지 이걸 몰랐을까요?

이나라 최고 사법기관인 헌재에 앉아계신 판관 나으리들도

모두가 그런 편법과 반칙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가신건데 말입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여쭙습니다. 장난이 아니고요.


제가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르든,

'과정에서 위법성은 인정되나, 결과는 무효로 볼 수 없다'고 해주실거지요?


헌법재판소가 말하는 '법 원칙'이라는걸 믿겠습니다.

'법 원칙'이란건 양심이랑은 별 상관이 없나봐요?

 


정말,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김종대, 민형기, 목영준, 이동흡, 이강국, 이공현, 김희옥,

이상 일곱 분의 위대하신 판관님들, 역사에 길이 길이 남으십쇼.

 

당신들의 거룩한 판결을, 2009년 10월 29일 이날을

역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두고 두고 잊지 않을겁니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겁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분통 터진 누군가가 당신들을 살해한다 해도

살해 과정상 위법성은 인정하나, 이미 뒈진것은 무효라 볼 수 없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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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주민번호, 휴대전화번호까지 당당하게 다 적었습니다. -_-

 

x발 잡아갈테면 잡아가라 그래라.

나도 혹시 뭐 글 올리는 과정중 위법성이 있었을진 몰라도

이미 글이 올라가버린건 어쩌겠어. 무효하다 볼수는 없잖아?

 
국민 여러분! 헌법재판소 너무 미친거 아닌가요?? 국민들의 심판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요??

퍼옴 : 가칭) 국민참여정당 홈페이지 www.handyp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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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말리는 MB정부 '도덕불감증'
고위공직자 위장전입 클럽?…"위법 안하면 장관 못해" 심각


지난 22일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와 임태희 노동부장관 후보자를 끝으로 열
흘간의 인사청문회가 모두 마무리됐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장관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위장전입' 이력이 드러났다.
정치권에선 '위장전입 없이는 장관 등 고위공직자에 오르지 못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들릴 정도다. 뿐만 아니라 후보자들의 탈세 의혹, 다운계약서 작성
등도 드러났다.

고위공직자의 세계가 위법·불법 천지여서 '국민들의 도덕불감증을 정부가
조장한다'는 따가운 비판의 소리가 국민들 사이에서 터져나온다.

이전 정부 때 실시된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낙마로 귀결됐던 사안들이 이제는
'사과' 한 마디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돼 버렸다.

'사과'를 말하는 그들에게서는 '사과해주길 원해? 그럼 사과해줄게'라는 표정
이 묻어난다. 진실된 반성의 기미는 안보이고 '그 땐 다들 그랬어, 관행이었어'
라는 뉘앙스로 치부하는 모습들이다.

현 정부가 내세웠던 '법과 원칙'이 일반 시민들에게는 가혹하지만 고위공직
자의 세계에서는 무력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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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텔레비젼 역사스페셜에서는 중국의 금나라를 세운 민족이 신라인이였고 그의 이름은 아골타라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 ~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러한 금나라가 우리의 역사와는 차별을 두려고 하였습니다.

서로 형제이며 부모라고 하는 관계였는데도 말이죠. 참 이해하기 힘든 민족이라는 생각이 안 듭니까?

그 방송이 나가고 나서 어떤 네티즌이 우리 민족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라고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더군요.

그러자 그 밑에 답변 리플입니다.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인거 같습니다. 못내 씁쓸했지만...


( 클릭하셔서 내용을 더 볼 수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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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이 원천 무효인 이유는 국제법상 승산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일본이 한반도 침탈을 성공했다면 그 협약이 효력이 있다 하나, 전쟁에서 패망하고 미국에게 절대적인 항복을 외친 나라이기에 간도는 다시 원래되로 한국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자고로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노트북을 중고로 싸게 매입을 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그 판매한 자가 훔친 물건이라서 장물로 거래를 했다고 하면 장물취득에 관한 법에 조촉되어 아무런 권리주장없이 그 장물은 압수를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그 장물을 아직까지도 쉬쉬~ 하면서 사용한 것을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한민족의 요하문명과 고조선, 발해 문명의 역사까지도 빼앗아 가려고 하니 참 이제는 그냥 볼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한민족의 성질은 자기들끼리 내분하고 갈라서고 남과 북도 갈리고, 서와 동도 갈라스고 싶어하는 민족이기에 그러한 대외적인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오직 자기 물건 안뺏기기만 하면 역사든, 정치든, 미래든 관심밖이라는 것이 한심할 노릇입니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고서도 자기 선거 텃밭에만 관심있지 어디 대외적인 애국적사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본적이 있나 말입니다.

결과로, 이제 모든 이들은 그들이 가지고 싶어 갈구하는 잇속들은 당장 잊어버리고,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넓은 안목으로 모든 국민과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간도협약 무효 주장에 대한 근거와 당위성"을 세상에 공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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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4년에 아태재단의 이사장이던 시절에 아태재단의 사무총장이셨던 조영환씨의 소개로 초광력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조영환씨가 먼저 초광력을 받고 자신의 오랜 고질병이었던 비염과 투통이 해소된것을 체험 한 후 김대중 대통령에게 초광력을 소개하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처음 빛(초광력)을 받은 자리에서 항상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잠시나마 놓고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수차례 초광력을 받은 후에 지팡이를 짚지 않고 중국의 이붕총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그 감격스러운 마음을 자신이 카톨릭 신자이기에 자신이 초광력을 받으면서 떠올랐던 문구 '믿기만 하여라 네 딸이 살아날 것이다' 를 직접 휘호로써 남겨 주셨습니다.

 

 그 후 김대통령은 대선에 당선되어 재임기간에 지팡이 없는 모습으로 국정에 임하였구요~

 

세상사람들이 초광력과 만나면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담은 책 '행복을 주는 남자'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간중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 책의 내용에도 역시 김대중 대통령의 사례가 실명으로 쓰여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초광력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면 과연 현직 대통령의 이름이 실명으로 베스트셀러 책에 실릴 수 있었을까요?

 

 글보다도 동영상을 보시면 이해가 빠를 실 거 같네요 ^^

동영상 링크 넣을 테니 한번 보세요~ 이해가 좀 빠르게 되실거 같네요~

 

http://video.naver.com/200803302359207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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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9일 신무문(경복궁 북문) 개방 행사 동영상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경복궁 향원정을 가리키며,

"저기가 <뿌리 깊은 나무>의 첫 번째 무대죠"라고 소개합니다.

짧지만 절대 놓칠 수 없는 대목, 함께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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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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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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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오는 2일 열릴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항일 독립운동사 및 고구려, 발해사 등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공동 연구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입니다. 특히 행정자치부는 북한이 보유한 항일운동 및 고구려, 발해 관련 기록물 등 북한기록물 보존사업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행자부는 북한기록물 보존지원 사업은 항일독립운동사 및 고구려, 발해사 등에 대한 남북공동 연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그러나 북한기록물 보존지원사업과 역사 공동연구 방안의 성사여부는 아직 단정 짓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나라의 예전 부속국가일뿐이고 그들의 역사라고 대외적으로 널리 홍보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유적지들은 모두 문화재의 훼손이 심각하게 될 정도로 한민족 문화재에 대한 처우가 형편이 없다.
이미 고구려 장군총에 관관객들의 무분별한 왕래로 생긴 열기로 습기가 차서 벽화의 그림이 흘러내려졌기 까지 해도 대책은 없다.
옛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에 빼앗기게 되면 우리의 고조선, 부여도 덩달아 뺏기게 되며
환인, 환웅, 단군 등의 모든 역사도 중국의 역사로 넘어가게 된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요체인 요하문명론은 이미 새롭게 중국의 역사를 새로 작성하고 있었고, 이미 완료가 끝난 상태이다.
자라나는 새로운 중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이러한 역사를 가르치게 되면 추후 50년 후에는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귀속되어질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올바른 역사를 지키기위해서는 우리 한국과 북한부터 올바른 역사책을 저술해야 하고, 그러한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통합해야 할 필요도 있다.
우리나라 내부에서 분열된 역사가 외국에서도 그것들을 인정하기는 싶지 않을 것이다.

친일 식민시절의 밑에서 육성된 역사학자들은 과거의 역사의 기록을 고집하지 말고, 새롭게 대두되고 증거가 노출된 그러한 역사를
겸허히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친일역사가들의 역사학이야 말로 이 나라의 역사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암적요소라 여겨진다.

역사의 왜곡에 있어서 물론, 중국만큼 심한 나라는 일본일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일일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잘 아실거라 믿는다.
그것들을 거론하자면 본 페이지로는 터무니없을 것이고 분노가 극에 치달을 꺼라 여겨져서 생략하기로 한다.

현재 일본에는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책 오래된 조선의 고서들 5만권이 일본에 지하벙커에 비밀리에 보관중이라고 일본 역사학자가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 중의 대부분의 책은 아직 우리나라에서도 없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책들도 무수히 많다고 한다.

남과 북은 이념은 달라도 역사만큼은 하나이기에 함께 공동연구하고 공동대응하는 어떠한 합의가 있고, 그것을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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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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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증거유물 나와
금제관식·황후호칭 墓誌, 中 지린성 고분군서 발굴, 中 동북공정 논리 정면 반박

중국 지린성 허룽시 룽터우산 발해 고분군 M14묘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의 앞뒷면(왼쪽)과 랴오닝(遼寧)성박물관 소장 5세기 고구려 조우관.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 룽하이(龍海)촌 룽터우(龍頭)산 고분군에서 발해가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인 효의황후(孝懿皇后)와 순목황후(順穆皇后)의 묘지(墓誌)가 발굴됐다.

이와 함께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의 전통을 잇는 금제관식이 발해 무덤에서는 최초로 발견됐다. 룽터우산 고분군은 지난 1980년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貞孝公主·757~792) 묘가 발굴됐던 곳이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2004~2005년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발해 무덤 14기를 발굴했던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와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문물관리위원회 판공실이 최근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발간한 ‘고고(考古)’(2009년 제6기)지에 ‘지린(吉林) 허룽(和龍)시 룽하이(龍海) 발해왕실묘장 발굴 간보’를 게재해 발굴성과를 공개함으로써 밝혀졌다. 8세기 후반~9세기 전반 조성된 룽터우산 고분군 등은 중국 정부가 발해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굴한 것이며, 이번에 처음으로 간략한 보고 형태로 발굴성과가 공개됐다.

발해사 전공자인 송기호(국사학) 서울대 교수는 “고구려 계승을 보여주는 금제관식이나 ‘황후’라는 호칭을 쓴 묘지 등은 ‘발해는 말갈족이 세운 당(唐)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해온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고고’지에 따르면, 금제관식은 룽터우산 고분군 룽하이 묘구(墓區)에서 발굴된 14기의 발해 무덤 중에서도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은 M13·M14(부부합장묘 추정)묘에서 출토됐다. 여성의 무덤으로 보이는 M13묘에선 금제 팔찌와 비녀 등이, M14묘에서는 금제관식과 함께 금으로 받침한 옥대 등이 출토됐다. 이한상(역사문화학) 대전대 교수는 “새 날개의 이미지를 세 가닥의 식물 이파리처럼 도안화한 금제관식은 고구려 조우관의 전통이 발해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물자료”라며 “금제관식에 새겨진 물고기알 모양이나 구름무늬, 인동당초문 등의 정교한 문양은 발해 금속공예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3대 문왕의 부인인 효의황후 묘지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인 순목황후 묘지는 각각 대형 돌방무덤(석실묘)인 M12와 M3 묘에서 출토됐다. 묘지 사진과 비문은 아직 검토 중이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홍갈색의 사암에 새겨진 순목황후 묘지(너비 34.5㎝, 높이 55㎝, 두께 13㎝)에는 세로로 총 9행, 141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 중에는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씨(泰氏)다” 등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송 교수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밖으로는 왕으로 불리면서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던 ‘외왕내제(外王內帝)’의 이중적인 체제를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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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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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기사 박기서씨
ⓒ2005 박도
"우리 나라 독립의 화신이요, 국부(國父)이신 백범 선생을 시해한 그 자는 인간 쓰레기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만고역적 안두희,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다 누린다면 다시는 이 땅의 교육이 안 되지요. 후손을 볼 낯이 없는 일이지요.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무렵 저는 천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왜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랄까 대의랄까, 국가 정의를 위해 그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모든 벌을 받을 각오하고 단죄하였습니다."

백범 선생 56돌 기일을 아흐레 앞둔 지난 6월 17일 오후 2시,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나무 그늘 의자에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56·택시기사)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박기서씨는 지난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안두희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몽둥이로 절명시켰다.

백범 묘소, 여기만 오면 아주 편해요

▲ 백범 김구 선생 존영
ⓒ2005 백범기념관
기자는 올 봄 조문기 선생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씨를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에게 안두희의 이 세상 마지막 모습과 그 뒷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에 면담을 부탁드렸는데 박기서씨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서로 사는 곳이 멀고, 그는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어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범 선생의 기일을 넘길 수 없어서 6월 17일로 어렵게 날짜를 잡았다. 우리는 효창원 백범 묘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지인과 점심을 나누면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법치국가에서 개인이 사형으로 보복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와 헤어진 뒤 백범 묘소로 가기 위해 신촌에서 택시를 탔다. "효창동 백범묘소로 갑시다"라고 하자, 기사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는 박기서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안가지만(그 기사의 이름은 안 아무개였다) 그 놈을 제 명대로 못 살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안두희가 제 명대로 다 살고 죽었다면 이 땅에 정의와 양심은 모두 다 땅에 묻혔을 테지요. 같은 택시기사로 박기서씨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 분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합니다."

백범 묘소 앞에서 박기서씨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대담에 앞서 먼저 묘소에 참배코자 산소로 갔다. 내가 앞장서고 박기서씨가 뒤따랐다. 묘소 앞에 이러르자 박기서씨는 묘소 어귀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았다. 마치 당신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는양.

"여기만 오면 마음이 정화되고 아주 편해요."

절을 두 번 드리고 일어난 박기서씨의 첫 마디였다.

"제가 지난번 백범 선생 암살 배후 관련 기사를 연재할 때, 몇몇 네티즌들이 '박기서는 미 정보부 끄나풀이 아니냐?'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쪽의 사주를 받아서 안두희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저 세상으로 보낸 거 아니냐? 마치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를 다른 자객들이 죽여 버린 거나 아키노를 암살한 하수인들을 또 다른 총잡이들이 사살해 버린 거와 같이 말입니다."

기자의 말에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입을 닫지 못했다.

"우와! 정말, 정반대 생각이네요. 야아 참, 안두희가 미국 정보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이 왜곡된 데는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안두희는 살려둬 봤자 더 이상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살려뒀다가 자연사하면 우리의 민족 정기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뒷날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이며 나중에 백범 선생을 어찌 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청소부 심정으로 안두희 '처단'했다"

▲ 안두희
- 안두희를 처단한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때 저는 버스기사였습니다. 버스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미리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속에 넣고 안두희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 무렵이더군요.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청 기다려도 아침 내내 문이 안 열려요. 그래서 틀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11시 무렵에야 문이 열려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두희 처가 슈퍼에 가려고 문을 따고 나왔다더군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두희 처를 밀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고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일어나서 노려보더라고요. '네가 백범 선생님을 암살했느냐?'라고 다시 다그치자 안두희가 뭐라고 말하는데 분명치가 않더군요.

사실 그때 나도 무척 흥분돼 있었기에 안두희의 말이 제대로 들릴 리도 없었지요. '내가 오늘 너를 처단하러 왔다'고 하는데 안두희 처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내 뒤를 쳐다 보더라구요.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그 순간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안두희는 키도 크고 주먹도 크더라고요. 그의 덩치와 큰 손을 보는 순간 위압감이 느껴지고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적개심이 불타오르더군요. 그래서 몽둥이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더군요.

안두희 처가 말로 하지 사람을 치느냐고 달려들더라고요.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해 간 끈으로 안두희의 처 손을 묶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당신도 다친다'고 위협한 뒤 다른 방으로 데려가자 안두희 처가 그제야 제 눈에서 살기를 눈치 채고는 벌벌 떨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다시 안두희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냥 복날 개 패듯이 팼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줄 게 아니라 아예 끝장을 내려고 작정하고 갔었지요."

"백범 선생 살아계셨다면 6·25 일어나지 않았을 것"

▲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박기서씨
ⓒ2005 박도
- 그 뒤 안두희가 꿈에 보이거나 응징에 대한 죄의식은 없는지요?
"안두희가 나타난 꿈은 한번도 꾸지 않았어요. 저도 피와 눈물이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제나 이제나 나는 안두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요.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6·25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단정'을 세웠던 이승만 일파가 백범 선생을 암살하자 민심이 7할 이상은 돌아 버린 거예요. 김일성이 그 반이(反李, 반이승만) 정서를 자기 지지로 오판하여 밀고 내려온 거지요. 또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백범 선생이 계셨더라면 아마 전선으로 달려가서 온몸으로 막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백범 선생을 깔아뭉개고 남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안두희와 그 일당은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죄를 진 반역자들입니다."

- 그 일로 형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살고 청주에서 6개월 정도 사는데 3·1절 특사로 풀어주더군요. 그런데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더라고요."

외람되지만 이는 마치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독립전사들이 감옥이나 형장에서 느끼는 행복과 같을 거라고 했다. 마침 가까운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원생들을 데리고 왔다. 언저리가 소란하여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묘소 언저리를 거닐었다.

백범이 살아계셨더라면...

▲ 1949. 7. 5. 백범 장의 행렬이 서울 소공동을 지나고 있다.
ⓒNARA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받아준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 (1948. 2. 10.)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 김구 주석 '남북동포에 격(檄)' (1948. 4. 21.)


우리 나라 근현대사를 살펴 보면, 일년 열두 달 가운데 슬프고 아프지 않은 달은 없다. 그 가운데 6월은 가장 슬프고도 가슴 아픈 달이다. 1950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일까지 3년여를 끌었던 동족상잔의 이 전쟁은 남북한 동포 5백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울러 1백여만 명의 외국군인(유엔군과 중공군)도 희생되었지만,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여태 쉬고 있는 '휴전' 상태로 있다. 어느 미국인 종군기자는 "한국전쟁 기간 중, 폭격으로 한반도 전역은 마치 석기시대로 되돌아간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해방 후 국토가 분단되자 백범 선생은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미리 예측했다. 백범 선생은 국토의 영구 분단을 막고 동존상잔의 전쟁을 막고자 38선을 넘나들며 온몸으로 겨레의 비극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반통일 세력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만일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만은 막아 내지 않았을까?
* 백범 김구 선생 제56주기 추모식 *
• 일시 : 2005. 6. 26(일). 10 : 00
• 장소 :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 묘전(우천시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백범 선생은 내 삶의 나침판"
[백범 56주기 추모 인터뷰] 김구 암살범 안두희 응징한 박기서씨
텍스트만보기    박도(parkdo) 기자   
▲ 백범 묘쇼 앞에 선 박기서씨
ⓒ2005 박도
박기서. 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시 산외면 참시내(진계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일찍이 전봉준 장군이 머물기도 했고, 마을 뒷산에는 동학농민전쟁의 김개남 장군 묘소도 있다.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전주로 유학 갔지만 그는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내렸다고 했다.

기자가 뒤늦게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지고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독립운동 관련 책을 펼쳐보거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독립전사로 앞장서거나 독립운동 성금을 보낸 이들은 의외로 가난하고 못 배운 무지렁이들이 더 많았다.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이는 하와이나 멕시코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태반이었다. 기자가 연전에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성금을 모을 때도 대부분 서민들이 쌈짓돈을 보내 주셨다. 독립전선의 선봉장에 선 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포수에서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이 된 홍범도 장군, 소작농에서 조선혁명군총사령이 된 양세봉 장군, 신돌석 장군 등….

단군 이래 이 나라를 지켜온 이는 기층 민중들이었지 결코 지배 계급은 아니었다고 한 역사학자는 말했다.

시간 되돌려도 안두희 응징할 것

▲ 박기서씨(백범 묘쇼 앞에서)
ⓒ2005 박도
- 출감 후의 전과자로서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출감 후 취직이 잘 안 되더라고요. 박기서라는 사람은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던 모양이에요. 운전대로 먹고 살려면 오너가 되는 수밖에 없데요. 그래서 개인택시를 샀습니다. 여태 그 빚 갚는다고 허리가 휘어집니다."

- 가족 관계는?
"처와 두 딸과 아들입니다. 제가 안두희를 처단할 때가 맏딸이 대입 수능 시험을 20일 앞둔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유치장이다 교도소다 재판 받는다고 마음 고생이 많았나 봐요. 늘 그 점을 미안케 생각합니다. 지금은 출가했고 네 식구가 살고 있어요."

- 요즘 택시 요금이 올라서 손님이 없어서 어렵다고 하던데요.
"서울에는 올랐지만 제가 사는 부천에는 아직 오르지 않았습니다. 택시기사가 가장 경기에 민감하다고 하는데 어려운 때가 어제 오늘이 아니지요. 외환 위기 후 늘 어려웠어요. 우리들 어려운 것보다 젊은이들이 일감이 없는 게 더 걱정이지요."

- 택시 손님들 중에 박기서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요?
"하루에 50분 정도 손님을 모십니다. 개중에는 앞좌석에 이름도 있으니 알아 보는 이도 있습니다. 격려해 주시는 분도 있고,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분도 있습니다."

-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회개 반성하는 삶이 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박기서, 그는 <백범일지>를 줄줄 외웠다. 백범(白凡)은 '백정(白丁) 범부(凡夫)'의 준말로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출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백범을 알고부터는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지 않고, 못 배워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늘 백범의 진정성과 역사관, 겨레와 나라에 대한 헌신적인 백범 정신에 감격한다고 했다. 또 백범을 통해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면서 백범은 겨레의 스승이요, 우리 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다.

-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동학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나라가 달라졌을 겁니다. 백성들이 깨어 있어서 다시 민족 반역의 무리나 그 후손들이 지도자가 되거나 외세에 빌붙는 이들을 이 땅에 지도자로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백범 선생은 내 삶의 나침판이었습니다. 그 어른을 위하는 일이라면 남은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 효창원 백범 묘소
ⓒ2005 박도
- 다시 그런 기회가 와도 안두희를 몽둥이로 내리치겠습니까?
"그러믄요. 마음 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인데, 제 행위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긴 겁니다. 그를 처단하고 내 발로 자수해 교도소도 갔지만 복역 기간 내내 제 행동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교도소에 있었던 그 기간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기뻤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피는 좀 묻혔지만 민족정기를 말살한 인간 쓰레기를, 젊은이들의 정신을 썩게 하고, 고약한 냄새로 세상을 더럽히는 자를 자기가 처치했다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었다.

기자에게 굳이 밥 한 끼를 대접하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뿌리쳤다. 그러면 전철역까지 당신 택시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그마저 거절할 수 없어서 남영동 역까지 신세를 졌다. 그 때문에 택시를 타고도 요금을 내지 않고 내리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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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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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김대중 후보를 찍을 수 없었습니다
[DJ와 나] 그때, 군사독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습니다
이윤기 (ymcaman)
 
  
마산시청 합동분향소
ⓒ 이윤기
김대중

 

가족들과 함께 마산시청에 설치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 시청대강당 앞에 설치된 분향소에 공무원 두 분이 황량한 빈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이고 이른 아침 시간이기는 하였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빈소를 찾는 시민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분향소를 지키는 공무원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방명록이나 헌화된 국화꽃 송이 숫자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분향소의 썰렁함은 오랫동안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전국 곳곳에 시민들이 만든 분향소에는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상주'들이 빈소를 지키는데, 시청 분향소에는 달랑 공무원 두 사람 뿐이라는 것이 참 서글프더군요.

 

국장 분향소라고 하기엔 참 초라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엔 시청 정문 현관 앞에도 얼마든지 분향소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였습니다. 그런데, 분향소는 시청 한쪽 구석진 자리 대강당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마산시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는 국화축제 행사장과 전직 대통령으로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치러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분향소를 비교해보니 참 마음이 씁쓸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지역 민심이 반영된 일이라고 본다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제 주변 지인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mb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전장에서 일어난 비통한 죽음이었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은 군대를 제대한 장수의 죽음이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분노도 슬픔도 덜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가 배우는 민주주의의 현장과 책속에 늘 함께 있는 역사의 증인이었습니다.

 

  
마산시청 분향소 가는 길
ⓒ 이윤기
김대중

 

학생운동에서 만난 김대중 '선생님' 그리고 87년 대통령 선거

 

노무현 대통령과는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반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냥 '전설'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 시절, 그 분은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학생운동 선배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부르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의 통일노선이 북한의 영향을 받기 전만 하더라도 그의 통일론은 운동권을 대표하는 통일운동 노선이었습니다.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김대중은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민주화 운동 이론가 중 한 사람이더군요.

 

85년 대학 입학 후 막 학생운동 발을 들여 놓은 저는 86년 5월 중순 경 원치 않는 군입대를 하였습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부대 철책 안에서 지켜보던 저는 87년 6월항쟁, 그 뜨거운 순간 투쟁의 마지막 며칠 동안  동지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양심의 가책을 삼키며 지냈습니다.

 

실탄을 가득 실은 육공 트럭이 연병장에서 대기중인 가운데 군복을 입고 전투화조차 벗지 못하고 긴박한 대기상태에서 새우잠 자면서 보냈습니다. 내 손으로 탄약고에서 실탄상자를 옮겨 실으며, 실제로 동료 병사들에게 실탄이 지급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다행히 6.29선언이 이루어졌고, M16총 소총과 실탄을 들고 서울시내로 출동하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부재자 투표가 시작되고 며칠 후 부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웃 중대원 중에서 누군가가 백기완 후보에게 투표를 하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비밀투표가 헌법에 보장된 나라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군대내 서신검열은 이런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고 합니다.

 

모든 일과가 중단되고 전 장병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훈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부재자 투표를 위한 우편물이 오면 중대장이 직접 투표용지를 꺼내 놓고 해당 장병을 불러서 투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행정병으로 근무중이던 저는 중대장실에서 벌어지는 이 장면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저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투표를 해야했구요. 책상 위에 투표용지를 펴 놓은 중대장은 투표하러 온 장병에게 반드시 누구를 지지하는지 물어봅니다.

 

"자네는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가?"

"예, 상병 OOO, 노태우 후보를 지지합니다."

 

이렇게 문답이 이루어지면 중대장은 투표용지를 내 주면서 투표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곧장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고 머뭇거리거나 김대중, 김영삼, 백기완 후보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나오면 이내 분위기가 삭막해집니다.

 

곧바로 정신교육이 시작됩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학생운동권 출신, 학생운동권 출신이 아니어도 대학 재학중에 군대에 온 장병들, 호남출신들은 모두 이른바 '관심사병'이었습니다.

 

부재자 투표용지가 오면 투표를 하기 전에 개별적으로 이른바 '정훈교육'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끝내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는 대답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참 기가 막힌 투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중대장은 투표용지에 나머지 이름을 모두 손바닥으로 가리고, 노태우 후보 칸만 보이도록 해놓고서는 장병들에게 투표를 하라고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대신 투표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부대의 조치에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려던 몇몇 장병들도 이 대목에서 대부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군사독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습니다.

 

손바닥으로 투표용지를 가리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투표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냥 내무반으로 돌려보내더군요. 저는 이런 장병의 투표용지가 정말로 무효가 되었는지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대리투표가 되어서 지역 선관위로 발송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무튼,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 많은 군장병들의 투표권이 군사정권에 의하여 농락 당하였으며, 수 많은 장병들의 민주주의와 양심이 유린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양심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기억을 평생 간직해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과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출마하였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DJP 연합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늘 부정선거로 선거에서 패배하였으며, 그의 대통령 당선은 이 땅에서 '부정선거'를 몰아내는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그에게 투표할 수 없었던 취약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그가 중심이된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적어도 국민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로 발전하였던 것 입니다.

 

돌이켜보면 그의 삶이 바로 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였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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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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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끼 밖에 안 먹고 비서관 대화도 기피 … 우울증세 보여”

 

평소와 달랐던 노 전 대통령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노무현 전 대통령은 4월 7일 홈페이지에 직접 글을 올려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에게서 돈 받은 사실을 밝혔다. 사진은 이틀 뒤인 9일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유령회사가 동원되는 등 대통령 기록물과 원본 하드디스크 유출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뤄졌다”(청와대)

“경제위기에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란 사실은 잘 알고 계시지 않느냐”(노무현 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께 드리는 글’ 중에서)
 
이명박 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적지 않은 갈등을 빚어왔다. 첫 충돌은 청와대 기록물 유출 사건이다.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하며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통치자료를 가져갔다며 반환을 요구했다. 노 전 대통령 측이 이를 거부하자 청와대는 지난해 7월 노 전 대통령을 검찰에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이 곧바로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은 지난해 정상문·이호철 전 청와대 비서관을 포함한 10여 명을 소환하고 노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인 ‘사람사는 세상’ 서버, 경기도 성남시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 등을 압수수색하며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다.

열람권부터 보장하라며 강하게 맞서던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중순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겠다”고 몸을 낮췄다. 검찰이 국가기록물 무단유출 사건을 수사하던 지난해 7월부터 11월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을 세무조사 했던 때와 같은 시기다. 국세청이 박 회장을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기록물 유출 사건 수사는 후순위로 밀렸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노 전 대통령은 현 정권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노사모 총회에서 퇴임 후 사실상 처음으로 시국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문제로 불거진 촛불시위가 ‘이명박 대통령 퇴진 요구’로 비화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청와대에 살아봐서 아는데 청와대 행진은 별다른 소득이 없는 만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핵심지지층인 노사모 회원들을 설득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권퇴진 주장은 헌정질서에 맞지 않고 민주주의 질서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에게 요구할 게 많겠지만 적절한 수준에서 밀어붙여야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도 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촛불시위대를 독려하던 분위기에선 의외의 발언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검찰의 수사망이 자신과 주변 인물로 좁혀오자 정면대응으로 바뀌었다. 그는 “끝까지 진실을 밝히겠다”며 선제공격을 했다. 검찰에 소환된 4월 30일 이후에는 “검찰에 증거가 하나도 없더라”며 자신감을 보였다는 얘기가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그랬던 노 전 대통령이 소환 조사가 끝나고 20여 일 만에 진실 규명에 대한 검찰과의 법리 다툼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을 택한다. 이와 관련, 검찰 핵심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몇 차례 이상 징후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사전구속영장이나 불구속기소 여부에 대한 검찰 결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리라는 예상까지는 아무도 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 우울증세 보여
검찰 내 정보 담당 부서에서는 몇 주 전부터 노 전 대통령의 신상에 이상 기류가 있음을 감지했다. 특히 최근 들어 부쩍 노 전 대통령이 집에서 나오지 않고 혼자만 있으려 하고 측근들이나 비서관들과도 대화를 기피한다는 정보가 계속 올라왔다고 한다. 대검 범죄정보팀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과 관련해 이상 징후를 예측할 수 있는 정보들이 최근 계속 올라왔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특히 밥을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을 정도로 식욕을 잃은 상태였다”고 전했다. 우울증세가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 화장해라.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라.”

노 전 대통령이 컴퓨터에 남긴 유서에서 검찰 수사를 받는 동안 자신도 힘들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했다고 자책했다. 내용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박연차 게이트로 인한 검찰 수사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에 대한 미안함이 배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유서 내용은 자신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을 연상케 한다.

남 전 사장은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이 전국에 중계되는 TV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직접 거론하며 인사 청탁을 하지 말라고 지적하자 그 길로 자택에서 나가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남 전 사장은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에게 찾아가 대우건설 사장 연임을 청탁하며 돈을 준 혐의로 조사를 받았었다. 노 전 대통령은 남 사장의 죽음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주검으로 변한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은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현 정권이 표적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법정 투쟁을 통해 무죄를 입증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 공식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인터넷 홈페이지 통해 결백 주장
노 전 대통령의 가족 연루 의혹이 있는 박연차 게이트가 터진 직후, 노 전 대통령의 방어 공간은 인터넷 홈페이지였다. 글이 무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고비마다 자신의 생각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의 지지자들은 검찰이 몰아붙이기식 수사를 하고 있다며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노 전 대통령은 4월 7일 자신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첫 번째 글을 올렸다.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글은 부인인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2006~ 2007년 박 회장에게서 100만 달러와 현금 3억원을 받은 혐의로 대검 중수부에 체포된 직후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글에서 “그 혐의는 정 비서관의 것이 아니고 저희들의 것”이라면서 “저의 집(권양숙 여사)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검찰은 그 돈이 노 전 대통령 측에 갔다는 데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돈을 받았다고 먼저 시인하고 나서자 검찰은 당황했다. 정 전 비서관에 대해 그달 10일 검찰이 청구한 영장은 ‘범죄에 대한 소명 부족’이라는 이유로 법원이 기각했다. 권 여사가 현금 3억원은 내가 받아 쓴 것이지 정 전 비서관이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 것도 작용했다.

검찰은 바로 다음 날인 11일 권 여사를 부산지검으로 비공개 소환해 조사했다. 권 여사는 “100만 달러와 3억원은 청와대에서 내가 받았다. 무슨 빚을 졌는지, 왜 달러로 받았는지는 얘기할 수 없다”고 사용처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이 즈음 대검 중수부에 소환된 아들 노건호(36)씨도 “박 회장이 2008년 2월 연철호(36·노 전 대통령 조카사위)씨에게 송금한 500만 달러는 나와는 상관없는 돈”이라고 부인했다.

노 전 대통령도 거들었다. 12일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아내가 한 일이고 나는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고 구차해 ‘내가 그냥 지고 가자’고 사람들과 의논도 해 봤지만 결국 사실대로 가기로 했다”면서 “몰랐던 일은 몰랐던 것이고 중요한 것은 증거”라고 말했다.“저는 박 회장이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무슨 특별한 사정을 밝혀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할 것”이라며 “그의 진술을 들어볼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7일 글에서는 2007년 8월 열린 3자 회동(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박 회장, 정상문 전 비서관)을 설명하면서 “퇴임 후 바로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각종 조사와 수사가 시작되고 박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도 시작되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전직 대통령 후원자에 대한 표적 수사라는 주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나 그달 22일 정 전 비서관이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자 ‘사람 사는 세상’을 폐쇄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소환조사 직후에도 “증거 없었다” 자신감
노 전 대통령 소환 조사 D-데이는 4월 30일이었다. 대검 중수부와 노 전 대통령 측은 소환을 앞두고 한 바탕 설전을 벌였다. 소환 며칠 전 노 전 대통령이 2006년 9월 회갑 때 박 회장으로부터 1억원짜리 피아제 시계 2개를 선물로 받았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것이 발단이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을 망신주기 위한 목적으로 흘렸다면 나쁜 검찰”이라고 비난했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도 “노 전 대통령 측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쁜 빨대를 색출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노 전 대통령은 소환 당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주변에는 경찰 병력이 출동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노란 풍선을 든 노사모들과 노 전 대통령 구속 수사를 주장하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대치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쯤 청사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하실 말씀이 없느냐”는 질문에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면목 없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묻자 그 질문을 한 기자를 쳐다보았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 이호철 전 국정상황실장 등에 둘러싸인 노 전 대통령의 얼굴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이날 10시간 이상 조사를 받았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운 뒤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사에서 우병우 중수 1과장이 “특가법상 뇌물수수 피의자로 조사받게 된다”고 고지하고 조사동의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 석자를 쓰는 노 전 대통령의 손이 떨렸다고 한다. 검찰 간부들은 폐쇄회로 TV를 통해 이 장면을 봤다고 한다. 이후 그는 담담하고 평온한 어조로 조사에 임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 과장과 심한 언쟁을 벌일지 모른다며 걱정했던 검찰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한 대검 간부는 “임채진 검찰총장은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다가 갑자기 가겠다고 할 경우에 대비해 검찰 고위 간부들을 상대로 긴급체포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기도 했었다”고 소개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9월 회갑 때 박 회장이 선물로 줬다는 1억원짜리 피아제 시계 두 개에 대해서도 “집사람이 받아서 나는 모른다. 이번 사건이 불거지고 나서 봉하마을 어딘가에 버렸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조사 때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의 대질은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과 박 회장은 대질신문을 원했지만 노 전 대통령 측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마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박 회장을 만나 진술을 들어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던 것과는 다른 행보여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사가 끝나고 검찰은 “조사가 충분히 이뤄졌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노 전 대통령 측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검찰이 증거가 전혀 없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소환 조사 이후 수사팀은 노 전 대통령의 딸인 정연씨에게 박 회장이 40만 달러를 보낸 사실을 밝혀냈다. 정연씨는 검찰 조사에서 40만 달러는 미국 뉴저지주의 160만 달러 아파트 ‘허드슨 클럽’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썼고 계약은 아직 해지되지 않은 상태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권 여사가 정연씨에게 보낸 20만 달러가 계약금이고 박 회장이 2007년 6월 청와대로 보낸 100만 달러가 통째로 이 아파트 중도금으로 지불된 것으로 보고 있다. 40만 달러는 잔금일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가 권 여사와 건호씨에 이어 정연씨에게까지 미쳐 전 가족이 수사대상이 된 상황에 처했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는 보고를 받은 것도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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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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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서거후에도 어김없이

전에 노무현 대통령 서거했을 때와 똑같이

밤하늘에 달이 보이지가 않는군요.

하늘에서도 신성한 인간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는 듯이

달마저 보이지 않는 칠흑의 밤이네요.

전에 노무현대통령 서거하셨을 때도 몇일 동안 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두 고인의 짧지만 소중했던 민주 대통령들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의 행적과 정신을 기억하며 후세에 대물림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책과 가치는 오래오래 민중들 속에서 퍼져 나가야 하며,

항상 곁에 두고 봐야할 정신이며, 등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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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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