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한 땅 밑으로는 수십개의 북한땅굴이 지나가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국방부는 은폐만 하려 시급하다.
"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모른다 " 너무 쉽게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데로 생각하고 있다. 북한이 경제가 약체의 국가라고 해서 국사적으로도 너무 무시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안보가 소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될지도 모른다. "
ㅎㅎ 괜히 또 이런 글 남겼다고 . 제 2의 미네르바라느니 유명인이 되면 어쩌나? ㅎㅎㅎㅎㅎㅎ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김포 및 연천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이 ‘땅 속에서 돌 깨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는 신고를 했으며, 이를 계기로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북한의 장거리 땅굴 탐사에 매진해 온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 중 보안사 부사관 출신인 故 정지용씨(2002.12사망, 이하 亡者에 대한 존칭 생략)가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현역 재직 중이던 1980년대 말 우연히 땅굴 관련 제보를 받게 된 것을 계기로 숨질 때까지 북한의 장거리 땅굴 찾기에 매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생전의 정씨는 땅 속에서 들리는 ‘TBM 소리’는 물론 심지어 ‘북한 말투의 사람 목소리’까지 녹음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씨가 땅속의 소리를 녹음한 방법은 지극히 간단한데, 이는 통상적으로 지상에서 가수(歌手)의 목소리 등을 녹음할 때 사용하는 방법을 그대로 지하 세계에 적용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가수의 목소리 등을 생생하게 녹음하려면 마이크를 최대한 가수의 입 근처에 위치시켜야 하듯이, 정지용씨도 녹음기 마이크(청음기라고도 함)를 최대한 지하갱도 가까이에 위치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즉, 이상 징후가 발견된 지역의 땅속으로 지하수 개발용 시추기로 구멍(시추공)을 뚫은 다음, 해당 시추공 속에 마이크(지상의 녹음기와 연결된 것)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씨 녹음테이프 음질은 정씨가 ‘소리의 발원지’(지하 땅굴)에 얼마나 가까이 마이크를 위치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런데 지하 100m 이하 지역에 위치한 ‘소리의 발원지’(땅굴)를 지상의 시추작업으로 정확히 관통(시추봉이 갱도를 뚫는 현상)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개의 경우 정씨의 시추공은 지하 갱도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씨 녹음테이프의 소리는 그냥 들어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음질이 나빴다고 한다. 왜냐하면 해당 소리는 음원(땅굴)에서 출발하여 상당한 두께의 지하 암반을 통과한 다음에, 시추공 속에 위치한 마이크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일부 테이프에는 매우 선명한 기계소리와 사람목소리 등이 녹음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즉, 마이크(청음기)를 지하갱도 바로 근처에 위치시키는데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국방부가 ‘조작된 것’이라며 그 가능성을 일축함에 따라 정씨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렇다할지라도 정씨는 장거리 땅굴의 진실을 규명함에 있어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했는데, 이는 그가 지난 1992년 월간조선 취재팀에게 그간의 탐사결과와 물증 등을 제공함으로써 관련 사실을 공론화 시킨 것을 말한다. 즉, 그동안 국방부와 정지용씨간 상반된 주장에 대해 제3자인 월간조선 취재팀을 개입시킴으로써, 땅굴 문제와 관련 객관적인 입장에서 취재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에 정씨의 제보를 받은 월간조선측은 현장 답사를 통해 경기도 김포 및 연천 지역의 땅 속에서 착암기 소리가 들리는 등의 이상 징후가 실재했음을 확인하였고 그 결과를 기사화했는데, 다음은 당시 월간조선 5, 6, 7월호에 보도된 내용 중에서 우선 김포 지역과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 근교에서 들려오는 地下기계음의 정체〔5월호〕
3초마다 덜거덕거리는 갱차음
취재팀이 김포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김OO씨(35?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였다. 김씨는 88년 8월부터 자신의 집 앞 텃밭에서 정지용씨가 시추작업하는 것을 계속 지켜봤으며 전자기술자인 그는 89년 3월 정씨에게 청음기〔防水用 마이크〕를 제작해주며 시추작업에 깊숙이 빠지게 된 인물이다.
다음은 김OO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정지용씨와는 언제부터 알게 됐나.
“88년 8월경이다. 정씨는 그 당시 우리 집에서 3백-4백m 떨어진 야산에서 시추작업을 하고 있었다.”
- 언제부터 시추작업에 관심을 갖게 됐는가.
“내가 전자기술자인 것을 알게 된 정씨가 89년 3월쯤 청음을 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여러 가지를 궁리하다가 물〔지하수〕속에서도 녹음이 가능한 동 파이프로 싼 청음기〔마이크〕를 만들어주게 됐다.”
- 이상소음을 처음 들은 것은 언제인가.
“89년 4월초였다. 당시 나는 시추공에다 청음기〔마이크〕를 넣은 후 밖에다 스피커를 연결해놓고 있었다. 4월초에 다른 곳에 다녀왔더니 옆집 슈퍼의 할머니 등 여러분이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해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청음활동을 하게 됐다. 이후 갱차 지나가는 소리 등 여러 가지를 녹음하게 되면서 이 지역 지하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 어떤 소리가 녹음됐는가.
“착암기가 돌을 깨는 듯한 ‘타타타타’하는 소리, 당시는 뭔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TBM 장비가 돌 깨는 것으로 추정됐던 소리 등이 있는데 그중 탄광에서 쓰는 갱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듯한 소리가 가장 선명하다.”
- 이곳에서 시멘트로 추정되는 물질이 나왔다는데 사실인가.
“6, 7차 및 12차 시추공에서 시멘트 성분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검출됐다. 그것을 아시아시멘트 시험실에 성분조사를 의뢰했고 나는 별도로 한국화학시험연구소에 맡겼는데 지하 100m 지점에서는 이런 성분이 자연적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게 연구소측의 답변이었다.”
- 만일 그 같은 물질이 시멘트라고 확인되면 그것은 지하에서 만들어진 인위적 구조물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왜 그 시추공에 대해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지 않았는가.
“시멘트로 추정되는 물질에 대해 군 당국은 처음부터 믿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것의 증명가치가 원천봉쇄된 것이 〔정지용씨가〕다른 곳〔연천지역〕을 찾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집이 흔들렸다.
김OO씨는 우연한 기회에 정씨의 시추작업에 관련을 맺다가 그 후 이 작업에 전념하게 됐다. 김씨는 갱차음 등은 91년 상반기까지 들렸으나 그 후는 고압전기 유도음으로 추정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이라고 말한다〔장거리 땅굴의 막장이 이미 김포지역을 통과해서 남하한 상태라는 의미〕.
그 역시 정지용씨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인물이라 보다 객관적인 증언을 듣기 위해 김씨 집 앞에 설치해 놓은 스피커를 통해 처음으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박OO씨(여?57)를 만났다. 박씨가 운영하는 새마을 슈퍼는 김OO씨 집으로부터 30m 정도 떨어져 있다. 다음은 박씨의 증언이다.
“날짜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여하튼 소리가 난 날 오전 9시쯤 가게 앞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디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경운기도 지나가지 않는데 소리가 들리는 게 이상해 김OO씨 집 쪽으로 가보니 김씨 집 앞 텃 밭에 설치해 놓은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침 김씨가 없어 그의 아내와 마을 사람 몇 명과 함께 그 소리를 들었다. 2-3분간 계속된 그 소리는 뭔지 잘 모르겠으나 경운기가 멀리서 지나가는 듯한 감으로 느껴졌다.” 후평리는 북한측의 대남방송이 크게 들리는 접적지역이다. 이런 지형적 여건 때문인지 이 지역에선 예전부터 이상징후에 대한 신고가 많았고 주민들도 ‘땅이 울렸다’는 등의 표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지용씨의 녹음테이프와는 관계가 없지만 참고삼아 이상 징후를 체험했던 홍OO씨(여?37?김포군 하성면 시암리) 집을 찾았다. 홍씨 집은 김OO씨의 집으로부터 북쪽으로 1.5km 더 가야한다.
다음은 홍씨와의 일문일답이다.
-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게 언제인가.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으나 지난해 이맘때〔1991년 3월초〕였다”
- 당시 그 소리는 어떤 식으로 들렸는가.
“저녁 8시쯤인데 안방 옆에 있는 부엌바닥에서 갑자기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울리며 집까지 흔들렸다. 집안 식구가 모두 놀랐는데 3-4차례에 걸쳐 요란한 소리가 난 후 10여분 후에 조용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 같았나.
“쇠로 돌을 뚫는 듯한 소리였다. 집까지 흔들릴 정도로 강했다.”
-식구들이 모두 들었는가.
“그렇다. 시어머니와 남편도 같이 들었다.”
- 그 외의 이상징후는 없었나.
“주변 사람들이 혹시 우물에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라기에 마당의 우물을 들여다보니 평상시보다 물이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 우물물이 그 이전부터 줄었던 것은 아닌가.
“식구들이 매일 그 물을 쓰기 때문에 바로 그 소리가 나던 날 물이 줄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 물이 원래의 수준까지 다시 차올랐다...”
테이프는 조작되지 않았다
취재팀은 검증을 두 가지 방법으로 실시했다. 즉 테이프 내용이 신디사이저 등 전자기기로 합성될 가능성이 없는가 하는 검증과 테이프 녹음을 수록할 당시 의도적인 조작이 가능했는가 하는 상황에 대한 검증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녹음테이프는 전자기기로 합성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또 정지용씨가 녹음할 당시 주변에 있었던 현지 주민이나 관련자들은 정씨가 조작할 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고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다.
갱차음 규명을 요구한다
취재팀의 뇌리에 강하여 새겨져 있고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갱차음이다. 철로 위를 달리는 궤도차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면서 서서히 커지다가 청음장치 바로 앞을 ‘웽’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간 뒤 점차 약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장감 넘치는 이런 소리는 기계분석도 할 필요 없이 육청(肉聽)으로도 충분히 궤도차라는 결론을 내리게끔 해주고 있으며 그런 소리가 4-5회에 걸쳐 녹취되었다. 반경 수십km 안에는 지하철이나 철도가 안 다니는 후평리 지하에서 들려온 생생한 이 ‘소리’를 만약 방송국에서 틀어놓는다면 많은 한국인들은 잠을 설쳐야 할 것이다. 월간조선 취재팀은 이 갱차음의 철저한 규명을 정부당국에 요구하는 바이다...』
이상은 월간조선 5월호 기사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월간조선의 기사보도를 계기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경험했거나 알고 있던 내용을 월간조선측에 기고 및 제보하게 되었는데, 다음은 관련 내용을 보도한 월간조선 6월호 및 7월호 기사 내용이다.
[추적 : 한국의 심장부로 꽂히는 비수 6월호]
김포 북쪽 인민군 6사단 소대장 출신 귀순자의 기고문
나는 애초 귀순 당시 군 기관에 김포 일대 서울 근교에 북한 화곡리에서 출발한 남침용 장거리 땅굴이 있다는 것을 진술한 바 있다. 진술한 내용이 정부에 반영되어 구체적인 토의 대책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월간조선 기사를 읽고 나서 허탈감 비슷한 것이 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지난 번 월간조선에 났던 그 기사 내용과 내가 알고 있던 서울 근교 땅굴설이 너무도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근사한 면이 많아서 월간조선부를 찾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며칠간 귀순한 동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금이라도 의문되는 점들은 모조리 적어두었다가 이 글을 쓰는데 삽입하기로 했다.
가장 유력한 제공자는 1980년 6월에 월남 귀순한 이OO씨였다. 이씨는... 개성시 판문군 일대에서 당 세포비서, 직맹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아 수행하면서 지도사업차 화곡광산 갱에까지 들어가 본 유일한 증언자인바, 그가 말하는 징후를 소개한다.
첫째 본인(이OO)은... 화곡광산이 민간인 소속이었을 당시에 목격한 내용을 말한다. 76-77년경부터는 광산이 폐쇄되고 군부대가 광산본부를 인수하면서 민간인 출입이 일체 금지되었던 바 그것이 제일 의구심 나는 점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알고 있기에 북한에서도 내로라하는 광석(금, 아연, 연)이 채취되고 그 규모 또한 한 두 손가락에 꼽힐 만큼 1급 기업소였고(노동자 4천여명) 광산작업시 수입이 꽤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폐갱시켜서 군인들을 배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광산 당위원장 사무실에 들어갔던 일이 있는바 그때 벽에 걸린 지도에서 본 기본 진도현황은 한강중심, 즉 군사분계선까지 남하한 것이었다. 기본갱이 화곡광산에서 남쪽으로 직선으로 뻗어 있는바 높이, 너비가 2.5t 화물트럭 2대가 어길 수 있고 [폭 2차선 규모] 기본 갱에서 좌우로 수십개의 곁가지 광석채취굴이 있다. 그 굴의 너비, 높이는 일반 갱차가 서로 어길 수 있는 정도이다.
제1땅굴 목격자인 인민군 민경대 준위 출신 안OO씨의 증언
국군복장으로 굴진 작업
안OO씨는 북한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제3사단 민경대 준위로 있다가 지난 79년에 남한으로 귀순해왔다... 안씨는 중요한 증언을 하나 했다.
“땅굴 공사부대에 근무하는 간부가 친구였는데, 이런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땅굴 속으로 작업반을 들여보낼 때는 한국군 복장을 하도록 하고 말씨도 국군 말투를 교육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작업중 남한측에 붙들리는 일이 생길 때에 대비한 위장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의 땅굴 굴착 능력
김OO씨〔귀순자〕는 “1985년 평양 철도대학 재학중 ‘지금도 땅굴을 뚫고 있다’는 제대 군인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군대에서 제대한 후배들이 학교에 입학해왔습니다. 인민군 5군단지역(철원지역)에서 근무했던 후배들이 ‘탱크가 다닐 정도의 땅굴을 몇 군데씩 지금도 뚫고 있는데 이 공사에 동원돼 총은 별로 쏘지 못하고 일만 하다 제대했다’는 것이었지요. 후배들은 그 공사의 목적이 ‘대부대를 남조선 후방에 침투시켜 제2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으로 봐도 그 땅굴은 방어용 갱도가 아닌 ‘남침용’임이 분명합니다.”... 월간조선 취재반은 지난 한달 동안 수십명의 한국군 고위 관계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이들에게 정지용씨가 지하 시추공 내에서 녹음한 굴착음 소리와 갱차음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정씨에 대해서 부정적인 정보를 갖고 있던 이들도 너무나 생생한 기계음에,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도저히 지하 자연음이라고 볼 수 없는 그 소리에 충격을 받고 우리의 질문에 대체로 진지하게 답변하였다.
땅굴 탐사에 직접 관계한 적이 있는 전?현직 군 인사들은 거의 전부가 북한이 장거리 땅굴을 서울 근교까지 뚫었을 가능성에 동의하고 있었다. 현직 군 고위 인사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강 이런 하소연이 된다.
“땅굴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 근교에 장거리 땅굴이 진출했다고 발표하면... 국민들은 불안해할 것이고 그렇다고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물론 군의 땅굴 탐지부서는 기자들에게 ‘북한이 장거리 굴착을 할 능력이 없으며 1980년대 초반에 땅굴 굴착을 중단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것은 결코 군 전체의 합의된 견해가 아니다. 그렇다고 군이 내부적으로 ‘북한은 현재 장거리 땅굴 굴착중’이라는 판단을 내려놓고 체계적인 탐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포 관측병의 남하하는 지하굴착음 추적 수기〔7월호〕
저는〔당시 한국화성주식회사 사원〕 지난 88년 봄부터 90년 가을까지 경기도 김포군 OOO 관측소에서 육군 모 부대 소속 관측병으로 근무했었습니다.
처음 이상현상을 발견했을 때가 지난 88년 겨울. 관측소 오른 쪽에 있는 김포 시암리 앞 한강의 북한쪽 갯벌 가운데에 일직선으로 금을 그어놓은 듯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갯벌 한가운데가 일직선으로 약간 움푹 패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 현상은 남한 쪽 바로 앞에 있는 좀 작은 갯벌에도 나타났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제가 입대하기 이전에 시암리 맞은 편 북한측 지역인 관산포 앞 갯벌이 2백50-3백m 가량 함몰됐던 적이 있었지요. 부대 선임자들 얘기에 따르면 당시 함몰이 일어나자 북한은 병력을 동원해 메우기 바빴는데 함몰된 곳에서 레일과 갱차가 드러나 보였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현지주민 등 관련자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다수의 현지 주민들이 땅굴 굴착징후로 의심이 되는 이상현상에 대해 증언하고 있을 가운데, 각각의 증언 내용이 비록 동네는 다르다할지라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둘째, 전 육군 관측병도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포반도 앞 갯벌에 일직선으로 함몰되는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는데다, 특히 이전에 함몰사고가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갯벌 속에서 레일과 갱차를 건져 올린 적이 있다는 주장은, ‘땅속에서 갱차음이 들린다’는 김포 지역 주민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셋째, 김포반도 북쪽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귀순자들 역시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화곡광산의 갱도가 70년대 중반에 이미 한강 중간 지점까지 남하해 있는 상태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폐갱, 군관할로 이관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넷째, 국방부 관계자들조차 사석에서는 장거리 땅굴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국방부의 공식입장이라는 것이, 사실은 땅굴과 관계된 군관계자들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의 장거리 땅굴은 배수문제로(굴착과정에서 발생하는 지하수를 북쪽으로 흘려보내야 하므로) 휴전선 지역을 통과할 때에는 기존의 단거리 땅굴보다 훨씬 깊은, 최소 지하 300-400m 지점을 통과한 다음 후방지역으로 갈수록 지표면 쪽으로 상승하는 구조(北深南淺:북심남천)로 굴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를 찾으려면 땅굴이 지표면으로부터 깊이 들어가 있는 휴전선 일대보다는 지표면에 근접하게 되는 후방지역에서 탐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군이 ‘북한은 단거리 땅굴(총 길이 4km 이하)만을 팠다’는 스스로의 도그마에 사로잡힌 나머지, 휴전선 일대에 한해 기존의 땅굴 깊이(45-160m) 정도로만 탐사한다면, 아무리 ‘벌집 쑤시듯’ 해도 찾을 수 없는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국방부가 제4땅굴 이후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개의 땅굴조차 추가로 발견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한편 생전의 정지용씨는 김포지역보다는 연천 지역에 북한의 장거리 지하땅굴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았는데, 이는 정씨가 해당 지역 땅속에서 “막아, 막아”, “위에서 다 들려요”, “너는 이제 그만이다”, “알았어” 등과 같이 생생한 사람목소리를 녹음한 데 이어 해당 지역 땅 속에서 정체불명의 지하공간까지 발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천 지역에도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초 연천지역에서는 어떤 이상 징후가 있었기에 정지용씨가 이 지역을 주목하게 되었을까. 다음은 월간조선 기사 중에서 연천지역 주민들의 증언 내용만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 근교에서 들려오는 地下기계음의 정체〔5월호〕
“따따따따” 하는 착암기 소리
다음은 두일2리 박씨 할머니(이름이 없다고 함)의 증언이다.
“89년 겨울 어느 날인가 밤에 안방 아랫목에서 잠을 자는데 쿵하는 소리가 울리며 몸이 털썩 흔들렸다. 그때가 새벽 한시쯤이었는데 그런 쿵하는 소리가 가끔 나타나다가 2시간쯤에야 잠잠해졌다. 나는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 그게 포탄 터지는 소리인 줄은 짐작했지만 집 밖을 둘러봐도 별 일이 없는 것 같아 그날은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똑같은 소리가 새벽녘에 들렸다. 이때는 며느리(이OO?41)도 같이 들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또 찌그럭찌그럭 하며 뭔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그 소리는 안방 아랫목에서만 들렸고 옆방이나 안방의 윗목에서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소리는 처음에는 앞마당 쪽에서 오는 듯한 감이 들다가 며칠쯤 후엔 안방 바로 밑을 지나가는 듯했고, 7-8일쯤 후에는 뒷마당 쪽으로 지나가는 듯하다가 10일쯤 지나니까 소리가 그쳐버렸다.”
시추공에서 나는 경유 냄새
다음은 3월 21일 경기도 부천에서 만난 최OO-이OO씨부부의 증언이다.
이들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면서 구미리에 자주 왕래하고 있는데 구미리 집에는 아들 최OO씨(35)가 혼자 머물고 있다.
- 구미리 집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언제부터인가.
최씨〔남편〕=“90년 5월경이었다. 당시 집안에 우물이 없어 업자에게 우물을 파달라고 했는데 그 업자가 우물을 파다 말고 ‘지하에서 찬바람이 올라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물 시추구멍에다 얼굴을 대보니 시원한 찬바람이 올라오고 라이터불도 꺼지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인근 군부대에 신고했더니 군인들이 나와서 여러 번 시추한 후 ‘별 이상이 없다’면서 철수해 버렸다. 결국 우물은 못 팠다.”
- 정씨는 언제 만났는가.
최씨=“지난해〔1991년〕 8월이다. 하루는 정씨가 찾아와 우리 집 앞의 축사지역에서 시추작업을 해도 되느냐기에 거절해버렸다. 그 전 해에 군인들이 시추작업을 할 때〔우물 파던 중 찬바람이 올라왔을 때〕 소음과 진동 때문에 시달렸던 우리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정씨가 간청을 하고 또 우물을 공짜로 팔 수도 있을 것 같아 집에서 약간 떨어진 지역에서 시추공을 뚫도록 허락했다.”
- 당시 어떤 상황이 나왔는가.
이씨〔부인〕=“정씨는 8월15일부터 우리 집 부엌에서 왼쪽으로 7-8m 떨어진 지점에서 시추작업을 했다. 그런데 8월17일 밤 자정을 지나 새벽 1시쯤에 〔한여름 무더위로〕목욕을 하고 자려 하는데 갑자기 경유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집에 불이 난 게 아닌가 하고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냄새는 정씨측이 판 시추공 쪽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그 구멍 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냄새만 나는 게 아니라 ‘쉬익’ 하는 물이 세차게 뿜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안방에서 자는 남편을 깨웠는데 남편도 깨자마자 ‘이게 웬 석유냄새냐’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소리는 2분 정도 계속되다가 끝났는데 그 소리가 멈추자 석유냄새도 서서히 사라졌다.”
- 8월 19일 직후 어떻게 됐는가.
이씨=“그 직후 군인들도 조사하고 가는 등 한동안 시끄러웠다. 한번은 시추작업 중인 인부가 불러 가봤더니 뿌연 물이 시추공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인부는 ‘우물 파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나로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 그 이후는 별일이 없었는가.
이씨=“추석을 지난 직후인 10월 5일께도 새벽에 첫 번째 시추공에서 5m 정도 떨어진 곳에 다시 판 시추공에서 예전과 같은 석유 냄새가 난 적이 있다. 그 때는 친척들도 같이 있어 다들 냄새를 맡았었다. 다만 예전과 같은 ‘쉬익’하는 물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부터는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밤을 새는 일이 많았다. 정씨의 녹음기에다 스피커를 부착 해 놓으니 시추공 아래 장치된 청음기에서 잡힌 소리를 안방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장 부녀회장 등 동네 사람들이 라면 끓여먹으며 새벽 4-5시까지 소리를 들었다. 대개 ‘웅웅’거리는 소리와 ‘푸드득’하는 돌 깨지는 소리 등이 들렸다. 그때 이곳에 나와 있던 사병들도 ‘이상하다’고 했는데 보고가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다.”』
이상과 같은 증언을 계기로 월간조선 취재팀은 이후 김포 및 연천 지역에 대한 장거리 땅굴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월간조선측은 연천지역보다는 김포반도 지역에 북한의 장거리 땅굴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관련 경위는 다음과 같다. 생전의 정지용씨는 땅 속에서 나는 소리를 채록한 녹음테이프 약 200여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테이프 소리는 녹음상태 불량으로 그냥 들어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상당수의 녹음테이프들은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김포 후평리에서 녹음된 테이프 중 하나에서 ‘북한 말투’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음이 귀순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함경도 출신의 귀순자가 문제의 녹음테이프 소리를 듣는 순간, 테이프 중의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비록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 사투리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심증을 갖게 되면서 이를 월간조선측에 제보했던 것이다.
이에 월간조선측이 관련 테이프에 대한 잡음을 제거한 결과, 문제의 테이프 중의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이거 만지면, 일만일천 감전되지”라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거 만지면 일만일천 감전되지”라는 말투는 상급자인 듯한 사람이 주의를 주는 것처럼 들렸고, “예,예”하는 것은 하급자인 듯한 사람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쩔쩔매는 말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만일천”이라는 것도 11,000에 대한 북한식 표현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월간조선 취재팀은 세계적 음향 전문가인 일본의 스즈키 박사(전자공학 및 의학)의 협조로 관련 테이프에 수록된 소리에 대한 음향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테이프에 녹음된 사람 목소리가 3.77m X 3.77m(또는 7.54m) 크기의 갱도 형태를 가진 폐쇄 공간의 막장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추정치도 얻을 수 있었다. 즉, 문제의 목소리 주인공들은, 김포 후평리 땅 속에 있는 3.77m X 3.77m 크기의 지하갱도 굴착 공사장(막장)에 위치해 있던 북한 군인들로 볼 수 있는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했던 것이다.
이어서 월간조선 취재팀은 문제의 테이프에 녹음된 ‘일만일천’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취재활동도 병행했다. 대화내용 중 ‘감전(感電)되지’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일만일천’이라는 숫자가 ‘일만일천 볼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한 월간조선 취재팀은, 당시로서는 국내에 1만1000V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전(韓電)을 통해 확인했다. 또한 전 북한 사회안전부 간부인 김정민씨(갱도 굴착작업 지휘 경험자)를 통해 북한의 배전용 전압 중에 1만1000V가 있다는 사실과, 북한이 과거에 TBM을 스웨덴으로부터 수입한 적이 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당시 월간조선측은 ‘(연천보다는) 김포 후평리에 TBM 공법에 의한 북한의 장거리 땅굴이 들어와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취재를 일단락 했던 것이다. 다만 월간조선 취재팀은 1만 1000V와 TBM과의 관계를 충분히 입증하지는 못했다. 북한의 배전용 전압 중에 1만1000V가 존재한다는 것과 북한이 TBM을 수입한 적이 있다는 귀순자의 증언은 확보했지만, 1만 1000V가 곧 TBM 전압이라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즉, 북한이 TBM을 사용한다는 단서는 확보했으나, 북한이 실제로 TBM을 사용해서 김포지역 땅굴을 굴착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국내에서 운용 중이던 TBM의 경우 모두 1만1000V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필자의 추적내용이다. 필자는 한 때 주(駐)남아프리카 공화국 한국 대사관 요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남아공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관계로 광산 개발과 그에 따른 장거리 갱도 굴착 분야에 있어 세계적 수준의 경험과 기술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필자는 2001년 6월 13일 TBM 전문가 K씨(R사 소속)를 만나 관련 사항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다음은 당시 필자의 질문에 대한 K씨의 답변 내용을 직접화법으로 정리한 것이다.
“R사는 세계적인 시추 및 터널굴착 전문회사로서 현재 진행 중인 스위스-이탈리아 국경간 57km의 Gotthard Tunnel 굴착 공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TBM은 Gotthard Tunnel 굴착 공사는 물론, ‘레소토’ 지하수로(1993년 완공)를 건설 할 때에도 사용되었을 만큼 장거리 갱도 굴착에 흔히 사용되는 장비이다.
TBM을 이용하여 지하갱도를 굴착할 경우 최대 직경12m짜리 갱도를 하루에 50m까지 굴착할 수 있으며, 단단한 화강암층이라 할지라도 Tungsten Carbide 비트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굴착이 가능하다. 갱도 길이는 최장 200km까지 가능한데, 이는 기술적인 한계가 아닌 경제적인 한계를 말한다. 어떠한 용도로 굴착하든 일단 지하갱도가 200km 이상을 초과하면 경제성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TBM은 좌우상하로 10도 범위 내에서 움직일 수 있어서 어떠한 모양의 갱도 굴착도 가능하며, 굴착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하수 문제 역시 기술적으로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우물물이 갑자기 줄어들었다가 다시 차오르는 현상에 대한 이유). 다만 환기 문제가 심각한데, 군사적 목적으로 지하갱도를 굴착할 경우 지상에 설치된 대형 송풍기를 돌려서 터널 속으로 공기를 공급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땅 속에서 찬바람이 올라오는 이유). 하지만 그러한 방식 역시 지하갱도가 일정 길이를 초과하게 되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기에, 장거리 갱도를 굴착할 때에는 갱도를 하나만 굴착하기 보다는 갱도를 둘로 나눠서(나란한 쌍둥이 갱도) 두 개의 갱도를 연결하는 환기용 통로를 중간 중간에 설치함으로써 환기문제를 완화시킬 수 있다. 이는 방안을 환기시킬 때 대형 창문 하나를 여는 것(단일 터널)보다 절반 크기의 창문 두 개를 열어놓는 것(나란한 두 개의 쌍둥이 터널)이 보다 효과적인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한편 TBM은 500-1000V의 전압을 사용하지만, 외부에서 TBM까지 전기를 공급할 때에는 보통 11,000V로 승압하여 송전하며, 보다 원거리를 송전할 경우에는 22,000V로 승압하기도 한다. 이는 직경 4m짜리 TBM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TBM은 고가 장비인 관계로 주문자가 원하는 대로 규격을 맞춰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만큼, 특정 TBM이 11,000V를 사용한다는 것을 근거로 해당 TBM의 제원을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TBM 가격은 약 2천만 Rand(당시 환율로 약 25억 원)로서 이는 우리 회사(R사)에서 사용하는 독일의 Wirth사 제품의 가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K씨의 설명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만일천’ 볼트를 사용하는 TBM의 직경이 4m라는 K씨의 설명과, 스즈키 박사가 추정한 수치(3.77m X 3.77m)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수치는 귀순자들이 증언한, 김포 북쪽의 화곡광산의 갱도 크기(2.5t 화물트럭 2대가 어길 수 있는 규모)와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셋째, TBM이 고압전기를 필요로 한다는 K씨의 설명은, ‘땅 속에서 고압전기 유도음만 들린다’는 김포지역 주민 김OO씨 등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세계적인 음향전문가의 분석 결과와 세계적 수준의 TBM 전문가 등의 설명 내용이 김포 지역 주민들의 증언 내용과 일치한다면, 이는 곧 정지용씨의 녹음테이프에 수록된 북한 말투의 목소리가 실제로 김포 후평리 땅 속에서 굴착 작업하던 북한 군인들의 대화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정지용씨가 관련 녹음테이프 소리를 조작했을 가능성인데, 이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겠다.
첫째, 정지용의 능력으로는 관련 녹음테이프 소리를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웅얼웅얼’ 하는 정도의 소리가 나도록 조작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당시 국내에 단 한 대밖에 없던 첨단 컴퓨터 시스템으로 잡음을 제거했을 때 “일만일천 감전되지”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조작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둘째, 정씨가 테이프소리를 조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정씨가 보상금을 노리고 테이프 소리를 조작했다고 하지만, 보상금이란 실제로 장거리 땅굴을 발견한 다음에나 가능하기에 국방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김포 후평리 지하에 TBM 공법을 이용한 직경 4m짜리 장거리 땅굴이 들어와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는 월간조선측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할 것이다. 다만 관련 지하갱도의 직경이 4m에 달한다는 점에서, 월간조선측이 장거리 땅굴 대신 ‘장거리 지하터널’로 호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이하 ‘지하터널’로 통일). 같은 맥락에서 지하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북한군의 규모 역시, 과거 단거리 땅굴의 경우처럼 단순한 경보병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무장 기갑부대로 확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1990년대 초에 김포 지역으로 들어와 있던 장거리 지하터널은 그동안 얼마나 더 남하했을까.
이와 관련 월간조선 2003년 3월호가 경기도 화성지역에서도 장거리 지하터널 징후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한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해당 지역의 땅속에서도 기계소리와 사람 목소리가 들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굵은 와이어(wire)와 벽돌까지도 땅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땅속에서 와이어 등을 발견하게 된 경위는, 민간인 탐사자들이 시추작업을 하는 도중에 땅 속에서 누군가 시추기 로트(rod)를 끌어 올리지 못하도록 강력한 와이어로 묶은 것을, 강제로 끊는 과정에서 확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2003년 2월의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로부터 약 6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장거리 지하터널이 훨씬 더 남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조1
"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모른다 " 너무 쉽게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데로 생각하고 있다. 북한이 경제가 약체의 국가라고 해서 국사적으로도 너무 무시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안보가 소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될지도 모른다. "
ㅎㅎ 괜히 또 이런 글 남겼다고 . 제 2의 미네르바라느니 유명인이 되면 어쩌나? ㅎㅎㅎㅎㅎㅎ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김포 및 연천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이 ‘땅 속에서 돌 깨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는 신고를 했으며, 이를 계기로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북한의 장거리 땅굴 탐사에 매진해 온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 중 보안사 부사관 출신인 故 정지용씨(2002.12사망, 이하 亡者에 대한 존칭 생략)가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현역 재직 중이던 1980년대 말 우연히 땅굴 관련 제보를 받게 된 것을 계기로 숨질 때까지 북한의 장거리 땅굴 찾기에 매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생전의 정씨는 땅 속에서 들리는 ‘TBM 소리’는 물론 심지어 ‘북한 말투의 사람 목소리’까지 녹음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씨가 땅속의 소리를 녹음한 방법은 지극히 간단한데, 이는 통상적으로 지상에서 가수(歌手)의 목소리 등을 녹음할 때 사용하는 방법을 그대로 지하 세계에 적용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가수의 목소리 등을 생생하게 녹음하려면 마이크를 최대한 가수의 입 근처에 위치시켜야 하듯이, 정지용씨도 녹음기 마이크(청음기라고도 함)를 최대한 지하갱도 가까이에 위치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즉, 이상 징후가 발견된 지역의 땅속으로 지하수 개발용 시추기로 구멍(시추공)을 뚫은 다음, 해당 시추공 속에 마이크(지상의 녹음기와 연결된 것)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씨 녹음테이프 음질은 정씨가 ‘소리의 발원지’(지하 땅굴)에 얼마나 가까이 마이크를 위치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런데 지하 100m 이하 지역에 위치한 ‘소리의 발원지’(땅굴)를 지상의 시추작업으로 정확히 관통(시추봉이 갱도를 뚫는 현상)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개의 경우 정씨의 시추공은 지하 갱도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씨 녹음테이프의 소리는 그냥 들어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음질이 나빴다고 한다. 왜냐하면 해당 소리는 음원(땅굴)에서 출발하여 상당한 두께의 지하 암반을 통과한 다음에, 시추공 속에 위치한 마이크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일부 테이프에는 매우 선명한 기계소리와 사람목소리 등이 녹음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즉, 마이크(청음기)를 지하갱도 바로 근처에 위치시키는데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국방부가 ‘조작된 것’이라며 그 가능성을 일축함에 따라 정씨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렇다할지라도 정씨는 장거리 땅굴의 진실을 규명함에 있어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했는데, 이는 그가 지난 1992년 월간조선 취재팀에게 그간의 탐사결과와 물증 등을 제공함으로써 관련 사실을 공론화 시킨 것을 말한다. 즉, 그동안 국방부와 정지용씨간 상반된 주장에 대해 제3자인 월간조선 취재팀을 개입시킴으로써, 땅굴 문제와 관련 객관적인 입장에서 취재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에 정씨의 제보를 받은 월간조선측은 현장 답사를 통해 경기도 김포 및 연천 지역의 땅 속에서 착암기 소리가 들리는 등의 이상 징후가 실재했음을 확인하였고 그 결과를 기사화했는데, 다음은 당시 월간조선 5, 6, 7월호에 보도된 내용 중에서 우선 김포 지역과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 근교에서 들려오는 地下기계음의 정체〔5월호〕
3초마다 덜거덕거리는 갱차음
취재팀이 김포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김OO씨(35?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였다. 김씨는 88년 8월부터 자신의 집 앞 텃밭에서 정지용씨가 시추작업하는 것을 계속 지켜봤으며 전자기술자인 그는 89년 3월 정씨에게 청음기〔防水用 마이크〕를 제작해주며 시추작업에 깊숙이 빠지게 된 인물이다.
다음은 김OO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정지용씨와는 언제부터 알게 됐나.
“88년 8월경이다. 정씨는 그 당시 우리 집에서 3백-4백m 떨어진 야산에서 시추작업을 하고 있었다.”
- 언제부터 시추작업에 관심을 갖게 됐는가.
“내가 전자기술자인 것을 알게 된 정씨가 89년 3월쯤 청음을 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여러 가지를 궁리하다가 물〔지하수〕속에서도 녹음이 가능한 동 파이프로 싼 청음기〔마이크〕를 만들어주게 됐다.”
- 이상소음을 처음 들은 것은 언제인가.
“89년 4월초였다. 당시 나는 시추공에다 청음기〔마이크〕를 넣은 후 밖에다 스피커를 연결해놓고 있었다. 4월초에 다른 곳에 다녀왔더니 옆집 슈퍼의 할머니 등 여러분이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해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청음활동을 하게 됐다. 이후 갱차 지나가는 소리 등 여러 가지를 녹음하게 되면서 이 지역 지하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 어떤 소리가 녹음됐는가.
“착암기가 돌을 깨는 듯한 ‘타타타타’하는 소리, 당시는 뭔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TBM 장비가 돌 깨는 것으로 추정됐던 소리 등이 있는데 그중 탄광에서 쓰는 갱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듯한 소리가 가장 선명하다.”
- 이곳에서 시멘트로 추정되는 물질이 나왔다는데 사실인가.
“6, 7차 및 12차 시추공에서 시멘트 성분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검출됐다. 그것을 아시아시멘트 시험실에 성분조사를 의뢰했고 나는 별도로 한국화학시험연구소에 맡겼는데 지하 100m 지점에서는 이런 성분이 자연적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게 연구소측의 답변이었다.”
- 만일 그 같은 물질이 시멘트라고 확인되면 그것은 지하에서 만들어진 인위적 구조물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왜 그 시추공에 대해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지 않았는가.
“시멘트로 추정되는 물질에 대해 군 당국은 처음부터 믿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것의 증명가치가 원천봉쇄된 것이 〔정지용씨가〕다른 곳〔연천지역〕을 찾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집이 흔들렸다.
김OO씨는 우연한 기회에 정씨의 시추작업에 관련을 맺다가 그 후 이 작업에 전념하게 됐다. 김씨는 갱차음 등은 91년 상반기까지 들렸으나 그 후는 고압전기 유도음으로 추정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이라고 말한다〔장거리 땅굴의 막장이 이미 김포지역을 통과해서 남하한 상태라는 의미〕.
그 역시 정지용씨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인물이라 보다 객관적인 증언을 듣기 위해 김씨 집 앞에 설치해 놓은 스피커를 통해 처음으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박OO씨(여?57)를 만났다. 박씨가 운영하는 새마을 슈퍼는 김OO씨 집으로부터 30m 정도 떨어져 있다. 다음은 박씨의 증언이다.
“날짜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여하튼 소리가 난 날 오전 9시쯤 가게 앞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디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경운기도 지나가지 않는데 소리가 들리는 게 이상해 김OO씨 집 쪽으로 가보니 김씨 집 앞 텃 밭에 설치해 놓은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침 김씨가 없어 그의 아내와 마을 사람 몇 명과 함께 그 소리를 들었다. 2-3분간 계속된 그 소리는 뭔지 잘 모르겠으나 경운기가 멀리서 지나가는 듯한 감으로 느껴졌다.” 후평리는 북한측의 대남방송이 크게 들리는 접적지역이다. 이런 지형적 여건 때문인지 이 지역에선 예전부터 이상징후에 대한 신고가 많았고 주민들도 ‘땅이 울렸다’는 등의 표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지용씨의 녹음테이프와는 관계가 없지만 참고삼아 이상 징후를 체험했던 홍OO씨(여?37?김포군 하성면 시암리) 집을 찾았다. 홍씨 집은 김OO씨의 집으로부터 북쪽으로 1.5km 더 가야한다.
다음은 홍씨와의 일문일답이다.
-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게 언제인가.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으나 지난해 이맘때〔1991년 3월초〕였다”
- 당시 그 소리는 어떤 식으로 들렸는가.
“저녁 8시쯤인데 안방 옆에 있는 부엌바닥에서 갑자기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울리며 집까지 흔들렸다. 집안 식구가 모두 놀랐는데 3-4차례에 걸쳐 요란한 소리가 난 후 10여분 후에 조용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 같았나.
“쇠로 돌을 뚫는 듯한 소리였다. 집까지 흔들릴 정도로 강했다.”
-식구들이 모두 들었는가.
“그렇다. 시어머니와 남편도 같이 들었다.”
- 그 외의 이상징후는 없었나.
“주변 사람들이 혹시 우물에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라기에 마당의 우물을 들여다보니 평상시보다 물이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 우물물이 그 이전부터 줄었던 것은 아닌가.
“식구들이 매일 그 물을 쓰기 때문에 바로 그 소리가 나던 날 물이 줄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 물이 원래의 수준까지 다시 차올랐다...”
테이프는 조작되지 않았다
취재팀은 검증을 두 가지 방법으로 실시했다. 즉 테이프 내용이 신디사이저 등 전자기기로 합성될 가능성이 없는가 하는 검증과 테이프 녹음을 수록할 당시 의도적인 조작이 가능했는가 하는 상황에 대한 검증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녹음테이프는 전자기기로 합성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또 정지용씨가 녹음할 당시 주변에 있었던 현지 주민이나 관련자들은 정씨가 조작할 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고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다.
갱차음 규명을 요구한다
취재팀의 뇌리에 강하여 새겨져 있고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갱차음이다. 철로 위를 달리는 궤도차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면서 서서히 커지다가 청음장치 바로 앞을 ‘웽’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간 뒤 점차 약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장감 넘치는 이런 소리는 기계분석도 할 필요 없이 육청(肉聽)으로도 충분히 궤도차라는 결론을 내리게끔 해주고 있으며 그런 소리가 4-5회에 걸쳐 녹취되었다. 반경 수십km 안에는 지하철이나 철도가 안 다니는 후평리 지하에서 들려온 생생한 이 ‘소리’를 만약 방송국에서 틀어놓는다면 많은 한국인들은 잠을 설쳐야 할 것이다. 월간조선 취재팀은 이 갱차음의 철저한 규명을 정부당국에 요구하는 바이다...』
이상은 월간조선 5월호 기사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월간조선의 기사보도를 계기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경험했거나 알고 있던 내용을 월간조선측에 기고 및 제보하게 되었는데, 다음은 관련 내용을 보도한 월간조선 6월호 및 7월호 기사 내용이다.
[추적 : 한국의 심장부로 꽂히는 비수 6월호]
김포 북쪽 인민군 6사단 소대장 출신 귀순자의 기고문
나는 애초 귀순 당시 군 기관에 김포 일대 서울 근교에 북한 화곡리에서 출발한 남침용 장거리 땅굴이 있다는 것을 진술한 바 있다. 진술한 내용이 정부에 반영되어 구체적인 토의 대책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월간조선 기사를 읽고 나서 허탈감 비슷한 것이 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지난 번 월간조선에 났던 그 기사 내용과 내가 알고 있던 서울 근교 땅굴설이 너무도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근사한 면이 많아서 월간조선부를 찾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며칠간 귀순한 동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금이라도 의문되는 점들은 모조리 적어두었다가 이 글을 쓰는데 삽입하기로 했다.
가장 유력한 제공자는 1980년 6월에 월남 귀순한 이OO씨였다. 이씨는... 개성시 판문군 일대에서 당 세포비서, 직맹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아 수행하면서 지도사업차 화곡광산 갱에까지 들어가 본 유일한 증언자인바, 그가 말하는 징후를 소개한다.
첫째 본인(이OO)은... 화곡광산이 민간인 소속이었을 당시에 목격한 내용을 말한다. 76-77년경부터는 광산이 폐쇄되고 군부대가 광산본부를 인수하면서 민간인 출입이 일체 금지되었던 바 그것이 제일 의구심 나는 점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알고 있기에 북한에서도 내로라하는 광석(금, 아연, 연)이 채취되고 그 규모 또한 한 두 손가락에 꼽힐 만큼 1급 기업소였고(노동자 4천여명) 광산작업시 수입이 꽤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폐갱시켜서 군인들을 배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광산 당위원장 사무실에 들어갔던 일이 있는바 그때 벽에 걸린 지도에서 본 기본 진도현황은 한강중심, 즉 군사분계선까지 남하한 것이었다. 기본갱이 화곡광산에서 남쪽으로 직선으로 뻗어 있는바 높이, 너비가 2.5t 화물트럭 2대가 어길 수 있고 [폭 2차선 규모] 기본 갱에서 좌우로 수십개의 곁가지 광석채취굴이 있다. 그 굴의 너비, 높이는 일반 갱차가 서로 어길 수 있는 정도이다.
제1땅굴 목격자인 인민군 민경대 준위 출신 안OO씨의 증언
국군복장으로 굴진 작업
안OO씨는 북한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제3사단 민경대 준위로 있다가 지난 79년에 남한으로 귀순해왔다... 안씨는 중요한 증언을 하나 했다.
“땅굴 공사부대에 근무하는 간부가 친구였는데, 이런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땅굴 속으로 작업반을 들여보낼 때는 한국군 복장을 하도록 하고 말씨도 국군 말투를 교육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작업중 남한측에 붙들리는 일이 생길 때에 대비한 위장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의 땅굴 굴착 능력
김OO씨〔귀순자〕는 “1985년 평양 철도대학 재학중 ‘지금도 땅굴을 뚫고 있다’는 제대 군인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군대에서 제대한 후배들이 학교에 입학해왔습니다. 인민군 5군단지역(철원지역)에서 근무했던 후배들이 ‘탱크가 다닐 정도의 땅굴을 몇 군데씩 지금도 뚫고 있는데 이 공사에 동원돼 총은 별로 쏘지 못하고 일만 하다 제대했다’는 것이었지요. 후배들은 그 공사의 목적이 ‘대부대를 남조선 후방에 침투시켜 제2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으로 봐도 그 땅굴은 방어용 갱도가 아닌 ‘남침용’임이 분명합니다.”... 월간조선 취재반은 지난 한달 동안 수십명의 한국군 고위 관계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이들에게 정지용씨가 지하 시추공 내에서 녹음한 굴착음 소리와 갱차음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정씨에 대해서 부정적인 정보를 갖고 있던 이들도 너무나 생생한 기계음에,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도저히 지하 자연음이라고 볼 수 없는 그 소리에 충격을 받고 우리의 질문에 대체로 진지하게 답변하였다.
땅굴 탐사에 직접 관계한 적이 있는 전?현직 군 인사들은 거의 전부가 북한이 장거리 땅굴을 서울 근교까지 뚫었을 가능성에 동의하고 있었다. 현직 군 고위 인사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강 이런 하소연이 된다.
“땅굴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 근교에 장거리 땅굴이 진출했다고 발표하면... 국민들은 불안해할 것이고 그렇다고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물론 군의 땅굴 탐지부서는 기자들에게 ‘북한이 장거리 굴착을 할 능력이 없으며 1980년대 초반에 땅굴 굴착을 중단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것은 결코 군 전체의 합의된 견해가 아니다. 그렇다고 군이 내부적으로 ‘북한은 현재 장거리 땅굴 굴착중’이라는 판단을 내려놓고 체계적인 탐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포 관측병의 남하하는 지하굴착음 추적 수기〔7월호〕
저는〔당시 한국화성주식회사 사원〕 지난 88년 봄부터 90년 가을까지 경기도 김포군 OOO 관측소에서 육군 모 부대 소속 관측병으로 근무했었습니다.
처음 이상현상을 발견했을 때가 지난 88년 겨울. 관측소 오른 쪽에 있는 김포 시암리 앞 한강의 북한쪽 갯벌 가운데에 일직선으로 금을 그어놓은 듯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갯벌 한가운데가 일직선으로 약간 움푹 패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 현상은 남한 쪽 바로 앞에 있는 좀 작은 갯벌에도 나타났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제가 입대하기 이전에 시암리 맞은 편 북한측 지역인 관산포 앞 갯벌이 2백50-3백m 가량 함몰됐던 적이 있었지요. 부대 선임자들 얘기에 따르면 당시 함몰이 일어나자 북한은 병력을 동원해 메우기 바빴는데 함몰된 곳에서 레일과 갱차가 드러나 보였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현지주민 등 관련자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다수의 현지 주민들이 땅굴 굴착징후로 의심이 되는 이상현상에 대해 증언하고 있을 가운데, 각각의 증언 내용이 비록 동네는 다르다할지라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둘째, 전 육군 관측병도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포반도 앞 갯벌에 일직선으로 함몰되는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는데다, 특히 이전에 함몰사고가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갯벌 속에서 레일과 갱차를 건져 올린 적이 있다는 주장은, ‘땅속에서 갱차음이 들린다’는 김포 지역 주민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셋째, 김포반도 북쪽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귀순자들 역시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화곡광산의 갱도가 70년대 중반에 이미 한강 중간 지점까지 남하해 있는 상태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폐갱, 군관할로 이관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넷째, 국방부 관계자들조차 사석에서는 장거리 땅굴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국방부의 공식입장이라는 것이, 사실은 땅굴과 관계된 군관계자들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의 장거리 땅굴은 배수문제로(굴착과정에서 발생하는 지하수를 북쪽으로 흘려보내야 하므로) 휴전선 지역을 통과할 때에는 기존의 단거리 땅굴보다 훨씬 깊은, 최소 지하 300-400m 지점을 통과한 다음 후방지역으로 갈수록 지표면 쪽으로 상승하는 구조(北深南淺:북심남천)로 굴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를 찾으려면 땅굴이 지표면으로부터 깊이 들어가 있는 휴전선 일대보다는 지표면에 근접하게 되는 후방지역에서 탐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군이 ‘북한은 단거리 땅굴(총 길이 4km 이하)만을 팠다’는 스스로의 도그마에 사로잡힌 나머지, 휴전선 일대에 한해 기존의 땅굴 깊이(45-160m) 정도로만 탐사한다면, 아무리 ‘벌집 쑤시듯’ 해도 찾을 수 없는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국방부가 제4땅굴 이후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개의 땅굴조차 추가로 발견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한편 생전의 정지용씨는 김포지역보다는 연천 지역에 북한의 장거리 지하땅굴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았는데, 이는 정씨가 해당 지역 땅속에서 “막아, 막아”, “위에서 다 들려요”, “너는 이제 그만이다”, “알았어” 등과 같이 생생한 사람목소리를 녹음한 데 이어 해당 지역 땅 속에서 정체불명의 지하공간까지 발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천 지역에도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초 연천지역에서는 어떤 이상 징후가 있었기에 정지용씨가 이 지역을 주목하게 되었을까. 다음은 월간조선 기사 중에서 연천지역 주민들의 증언 내용만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 근교에서 들려오는 地下기계음의 정체〔5월호〕
“따따따따” 하는 착암기 소리
다음은 두일2리 박씨 할머니(이름이 없다고 함)의 증언이다.
“89년 겨울 어느 날인가 밤에 안방 아랫목에서 잠을 자는데 쿵하는 소리가 울리며 몸이 털썩 흔들렸다. 그때가 새벽 한시쯤이었는데 그런 쿵하는 소리가 가끔 나타나다가 2시간쯤에야 잠잠해졌다. 나는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 그게 포탄 터지는 소리인 줄은 짐작했지만 집 밖을 둘러봐도 별 일이 없는 것 같아 그날은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똑같은 소리가 새벽녘에 들렸다. 이때는 며느리(이OO?41)도 같이 들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또 찌그럭찌그럭 하며 뭔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그 소리는 안방 아랫목에서만 들렸고 옆방이나 안방의 윗목에서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소리는 처음에는 앞마당 쪽에서 오는 듯한 감이 들다가 며칠쯤 후엔 안방 바로 밑을 지나가는 듯했고, 7-8일쯤 후에는 뒷마당 쪽으로 지나가는 듯하다가 10일쯤 지나니까 소리가 그쳐버렸다.”
시추공에서 나는 경유 냄새
다음은 3월 21일 경기도 부천에서 만난 최OO-이OO씨부부의 증언이다.
이들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면서 구미리에 자주 왕래하고 있는데 구미리 집에는 아들 최OO씨(35)가 혼자 머물고 있다.
- 구미리 집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언제부터인가.
최씨〔남편〕=“90년 5월경이었다. 당시 집안에 우물이 없어 업자에게 우물을 파달라고 했는데 그 업자가 우물을 파다 말고 ‘지하에서 찬바람이 올라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물 시추구멍에다 얼굴을 대보니 시원한 찬바람이 올라오고 라이터불도 꺼지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인근 군부대에 신고했더니 군인들이 나와서 여러 번 시추한 후 ‘별 이상이 없다’면서 철수해 버렸다. 결국 우물은 못 팠다.”
- 정씨는 언제 만났는가.
최씨=“지난해〔1991년〕 8월이다. 하루는 정씨가 찾아와 우리 집 앞의 축사지역에서 시추작업을 해도 되느냐기에 거절해버렸다. 그 전 해에 군인들이 시추작업을 할 때〔우물 파던 중 찬바람이 올라왔을 때〕 소음과 진동 때문에 시달렸던 우리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정씨가 간청을 하고 또 우물을 공짜로 팔 수도 있을 것 같아 집에서 약간 떨어진 지역에서 시추공을 뚫도록 허락했다.”
- 당시 어떤 상황이 나왔는가.
이씨〔부인〕=“정씨는 8월15일부터 우리 집 부엌에서 왼쪽으로 7-8m 떨어진 지점에서 시추작업을 했다. 그런데 8월17일 밤 자정을 지나 새벽 1시쯤에 〔한여름 무더위로〕목욕을 하고 자려 하는데 갑자기 경유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집에 불이 난 게 아닌가 하고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냄새는 정씨측이 판 시추공 쪽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그 구멍 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냄새만 나는 게 아니라 ‘쉬익’ 하는 물이 세차게 뿜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안방에서 자는 남편을 깨웠는데 남편도 깨자마자 ‘이게 웬 석유냄새냐’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소리는 2분 정도 계속되다가 끝났는데 그 소리가 멈추자 석유냄새도 서서히 사라졌다.”
- 8월 19일 직후 어떻게 됐는가.
이씨=“그 직후 군인들도 조사하고 가는 등 한동안 시끄러웠다. 한번은 시추작업 중인 인부가 불러 가봤더니 뿌연 물이 시추공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인부는 ‘우물 파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나로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 그 이후는 별일이 없었는가.
이씨=“추석을 지난 직후인 10월 5일께도 새벽에 첫 번째 시추공에서 5m 정도 떨어진 곳에 다시 판 시추공에서 예전과 같은 석유 냄새가 난 적이 있다. 그 때는 친척들도 같이 있어 다들 냄새를 맡았었다. 다만 예전과 같은 ‘쉬익’하는 물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부터는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밤을 새는 일이 많았다. 정씨의 녹음기에다 스피커를 부착 해 놓으니 시추공 아래 장치된 청음기에서 잡힌 소리를 안방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장 부녀회장 등 동네 사람들이 라면 끓여먹으며 새벽 4-5시까지 소리를 들었다. 대개 ‘웅웅’거리는 소리와 ‘푸드득’하는 돌 깨지는 소리 등이 들렸다. 그때 이곳에 나와 있던 사병들도 ‘이상하다’고 했는데 보고가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다.”』
이상과 같은 증언을 계기로 월간조선 취재팀은 이후 김포 및 연천 지역에 대한 장거리 땅굴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월간조선측은 연천지역보다는 김포반도 지역에 북한의 장거리 땅굴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관련 경위는 다음과 같다. 생전의 정지용씨는 땅 속에서 나는 소리를 채록한 녹음테이프 약 200여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테이프 소리는 녹음상태 불량으로 그냥 들어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상당수의 녹음테이프들은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김포 후평리에서 녹음된 테이프 중 하나에서 ‘북한 말투’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음이 귀순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함경도 출신의 귀순자가 문제의 녹음테이프 소리를 듣는 순간, 테이프 중의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비록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 사투리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심증을 갖게 되면서 이를 월간조선측에 제보했던 것이다.
이에 월간조선측이 관련 테이프에 대한 잡음을 제거한 결과, 문제의 테이프 중의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이거 만지면, 일만일천 감전되지”라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거 만지면 일만일천 감전되지”라는 말투는 상급자인 듯한 사람이 주의를 주는 것처럼 들렸고, “예,예”하는 것은 하급자인 듯한 사람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쩔쩔매는 말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만일천”이라는 것도 11,000에 대한 북한식 표현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월간조선 취재팀은 세계적 음향 전문가인 일본의 스즈키 박사(전자공학 및 의학)의 협조로 관련 테이프에 수록된 소리에 대한 음향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테이프에 녹음된 사람 목소리가 3.77m X 3.77m(또는 7.54m) 크기의 갱도 형태를 가진 폐쇄 공간의 막장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추정치도 얻을 수 있었다. 즉, 문제의 목소리 주인공들은, 김포 후평리 땅 속에 있는 3.77m X 3.77m 크기의 지하갱도 굴착 공사장(막장)에 위치해 있던 북한 군인들로 볼 수 있는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했던 것이다.
이어서 월간조선 취재팀은 문제의 테이프에 녹음된 ‘일만일천’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취재활동도 병행했다. 대화내용 중 ‘감전(感電)되지’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일만일천’이라는 숫자가 ‘일만일천 볼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한 월간조선 취재팀은, 당시로서는 국내에 1만1000V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전(韓電)을 통해 확인했다. 또한 전 북한 사회안전부 간부인 김정민씨(갱도 굴착작업 지휘 경험자)를 통해 북한의 배전용 전압 중에 1만1000V가 있다는 사실과, 북한이 과거에 TBM을 스웨덴으로부터 수입한 적이 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당시 월간조선측은 ‘(연천보다는) 김포 후평리에 TBM 공법에 의한 북한의 장거리 땅굴이 들어와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취재를 일단락 했던 것이다. 다만 월간조선 취재팀은 1만 1000V와 TBM과의 관계를 충분히 입증하지는 못했다. 북한의 배전용 전압 중에 1만1000V가 존재한다는 것과 북한이 TBM을 수입한 적이 있다는 귀순자의 증언은 확보했지만, 1만 1000V가 곧 TBM 전압이라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즉, 북한이 TBM을 사용한다는 단서는 확보했으나, 북한이 실제로 TBM을 사용해서 김포지역 땅굴을 굴착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국내에서 운용 중이던 TBM의 경우 모두 1만1000V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필자의 추적내용이다. 필자는 한 때 주(駐)남아프리카 공화국 한국 대사관 요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남아공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관계로 광산 개발과 그에 따른 장거리 갱도 굴착 분야에 있어 세계적 수준의 경험과 기술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필자는 2001년 6월 13일 TBM 전문가 K씨(R사 소속)를 만나 관련 사항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다음은 당시 필자의 질문에 대한 K씨의 답변 내용을 직접화법으로 정리한 것이다.
“R사는 세계적인 시추 및 터널굴착 전문회사로서 현재 진행 중인 스위스-이탈리아 국경간 57km의 Gotthard Tunnel 굴착 공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TBM은 Gotthard Tunnel 굴착 공사는 물론, ‘레소토’ 지하수로(1993년 완공)를 건설 할 때에도 사용되었을 만큼 장거리 갱도 굴착에 흔히 사용되는 장비이다.
TBM을 이용하여 지하갱도를 굴착할 경우 최대 직경12m짜리 갱도를 하루에 50m까지 굴착할 수 있으며, 단단한 화강암층이라 할지라도 Tungsten Carbide 비트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굴착이 가능하다. 갱도 길이는 최장 200km까지 가능한데, 이는 기술적인 한계가 아닌 경제적인 한계를 말한다. 어떠한 용도로 굴착하든 일단 지하갱도가 200km 이상을 초과하면 경제성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TBM은 좌우상하로 10도 범위 내에서 움직일 수 있어서 어떠한 모양의 갱도 굴착도 가능하며, 굴착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하수 문제 역시 기술적으로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우물물이 갑자기 줄어들었다가 다시 차오르는 현상에 대한 이유). 다만 환기 문제가 심각한데, 군사적 목적으로 지하갱도를 굴착할 경우 지상에 설치된 대형 송풍기를 돌려서 터널 속으로 공기를 공급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땅 속에서 찬바람이 올라오는 이유). 하지만 그러한 방식 역시 지하갱도가 일정 길이를 초과하게 되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기에, 장거리 갱도를 굴착할 때에는 갱도를 하나만 굴착하기 보다는 갱도를 둘로 나눠서(나란한 쌍둥이 갱도) 두 개의 갱도를 연결하는 환기용 통로를 중간 중간에 설치함으로써 환기문제를 완화시킬 수 있다. 이는 방안을 환기시킬 때 대형 창문 하나를 여는 것(단일 터널)보다 절반 크기의 창문 두 개를 열어놓는 것(나란한 두 개의 쌍둥이 터널)이 보다 효과적인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한편 TBM은 500-1000V의 전압을 사용하지만, 외부에서 TBM까지 전기를 공급할 때에는 보통 11,000V로 승압하여 송전하며, 보다 원거리를 송전할 경우에는 22,000V로 승압하기도 한다. 이는 직경 4m짜리 TBM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TBM은 고가 장비인 관계로 주문자가 원하는 대로 규격을 맞춰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만큼, 특정 TBM이 11,000V를 사용한다는 것을 근거로 해당 TBM의 제원을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TBM 가격은 약 2천만 Rand(당시 환율로 약 25억 원)로서 이는 우리 회사(R사)에서 사용하는 독일의 Wirth사 제품의 가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K씨의 설명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만일천’ 볼트를 사용하는 TBM의 직경이 4m라는 K씨의 설명과, 스즈키 박사가 추정한 수치(3.77m X 3.77m)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수치는 귀순자들이 증언한, 김포 북쪽의 화곡광산의 갱도 크기(2.5t 화물트럭 2대가 어길 수 있는 규모)와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셋째, TBM이 고압전기를 필요로 한다는 K씨의 설명은, ‘땅 속에서 고압전기 유도음만 들린다’는 김포지역 주민 김OO씨 등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세계적인 음향전문가의 분석 결과와 세계적 수준의 TBM 전문가 등의 설명 내용이 김포 지역 주민들의 증언 내용과 일치한다면, 이는 곧 정지용씨의 녹음테이프에 수록된 북한 말투의 목소리가 실제로 김포 후평리 땅 속에서 굴착 작업하던 북한 군인들의 대화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정지용씨가 관련 녹음테이프 소리를 조작했을 가능성인데, 이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겠다.
첫째, 정지용의 능력으로는 관련 녹음테이프 소리를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웅얼웅얼’ 하는 정도의 소리가 나도록 조작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당시 국내에 단 한 대밖에 없던 첨단 컴퓨터 시스템으로 잡음을 제거했을 때 “일만일천 감전되지”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조작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둘째, 정씨가 테이프소리를 조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정씨가 보상금을 노리고 테이프 소리를 조작했다고 하지만, 보상금이란 실제로 장거리 땅굴을 발견한 다음에나 가능하기에 국방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김포 후평리 지하에 TBM 공법을 이용한 직경 4m짜리 장거리 땅굴이 들어와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는 월간조선측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할 것이다. 다만 관련 지하갱도의 직경이 4m에 달한다는 점에서, 월간조선측이 장거리 땅굴 대신 ‘장거리 지하터널’로 호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이하 ‘지하터널’로 통일). 같은 맥락에서 지하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북한군의 규모 역시, 과거 단거리 땅굴의 경우처럼 단순한 경보병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무장 기갑부대로 확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1990년대 초에 김포 지역으로 들어와 있던 장거리 지하터널은 그동안 얼마나 더 남하했을까.
이와 관련 월간조선 2003년 3월호가 경기도 화성지역에서도 장거리 지하터널 징후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한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해당 지역의 땅속에서도 기계소리와 사람 목소리가 들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굵은 와이어(wire)와 벽돌까지도 땅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땅속에서 와이어 등을 발견하게 된 경위는, 민간인 탐사자들이 시추작업을 하는 도중에 땅 속에서 누군가 시추기 로트(rod)를 끌어 올리지 못하도록 강력한 와이어로 묶은 것을, 강제로 끊는 과정에서 확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2003년 2월의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로부터 약 6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장거리 지하터널이 훨씬 더 남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조1
김한식 목사 미국서 “북 남침용 새 땅굴 팠다” 주장 | |
레이번빌딩에서 설명회를 갖고 북한이 오산과 군산 미 공군기지 인근까지 땅굴을 팠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목사는 땅굴이 "이미 서울 밑을 지나 서울 남쪽 깊숙이 도달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디펜스 포럼은 미 의회 보좌진 등을 위한 안보.외교정책 토론회 등을 주최하는 단체로 최근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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