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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김대중 후보를 찍을 수 없었습니다
[DJ와 나] 그때, 군사독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습니다
이윤기 (ymcaman)
 
  
마산시청 합동분향소
ⓒ 이윤기
김대중

 

가족들과 함께 마산시청에 설치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 시청대강당 앞에 설치된 분향소에 공무원 두 분이 황량한 빈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이고 이른 아침 시간이기는 하였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빈소를 찾는 시민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분향소를 지키는 공무원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방명록이나 헌화된 국화꽃 송이 숫자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분향소의 썰렁함은 오랫동안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전국 곳곳에 시민들이 만든 분향소에는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상주'들이 빈소를 지키는데, 시청 분향소에는 달랑 공무원 두 사람 뿐이라는 것이 참 서글프더군요.

 

국장 분향소라고 하기엔 참 초라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엔 시청 정문 현관 앞에도 얼마든지 분향소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였습니다. 그런데, 분향소는 시청 한쪽 구석진 자리 대강당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마산시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는 국화축제 행사장과 전직 대통령으로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치러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분향소를 비교해보니 참 마음이 씁쓸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지역 민심이 반영된 일이라고 본다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제 주변 지인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mb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전장에서 일어난 비통한 죽음이었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은 군대를 제대한 장수의 죽음이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분노도 슬픔도 덜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가 배우는 민주주의의 현장과 책속에 늘 함께 있는 역사의 증인이었습니다.

 

  
마산시청 분향소 가는 길
ⓒ 이윤기
김대중

 

학생운동에서 만난 김대중 '선생님' 그리고 87년 대통령 선거

 

노무현 대통령과는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반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냥 '전설'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 시절, 그 분은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학생운동 선배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부르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의 통일노선이 북한의 영향을 받기 전만 하더라도 그의 통일론은 운동권을 대표하는 통일운동 노선이었습니다.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김대중은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민주화 운동 이론가 중 한 사람이더군요.

 

85년 대학 입학 후 막 학생운동 발을 들여 놓은 저는 86년 5월 중순 경 원치 않는 군입대를 하였습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부대 철책 안에서 지켜보던 저는 87년 6월항쟁, 그 뜨거운 순간 투쟁의 마지막 며칠 동안  동지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양심의 가책을 삼키며 지냈습니다.

 

실탄을 가득 실은 육공 트럭이 연병장에서 대기중인 가운데 군복을 입고 전투화조차 벗지 못하고 긴박한 대기상태에서 새우잠 자면서 보냈습니다. 내 손으로 탄약고에서 실탄상자를 옮겨 실으며, 실제로 동료 병사들에게 실탄이 지급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다행히 6.29선언이 이루어졌고, M16총 소총과 실탄을 들고 서울시내로 출동하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부재자 투표가 시작되고 며칠 후 부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웃 중대원 중에서 누군가가 백기완 후보에게 투표를 하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비밀투표가 헌법에 보장된 나라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군대내 서신검열은 이런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고 합니다.

 

모든 일과가 중단되고 전 장병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훈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부재자 투표를 위한 우편물이 오면 중대장이 직접 투표용지를 꺼내 놓고 해당 장병을 불러서 투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행정병으로 근무중이던 저는 중대장실에서 벌어지는 이 장면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저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투표를 해야했구요. 책상 위에 투표용지를 펴 놓은 중대장은 투표하러 온 장병에게 반드시 누구를 지지하는지 물어봅니다.

 

"자네는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가?"

"예, 상병 OOO, 노태우 후보를 지지합니다."

 

이렇게 문답이 이루어지면 중대장은 투표용지를 내 주면서 투표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곧장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고 머뭇거리거나 김대중, 김영삼, 백기완 후보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나오면 이내 분위기가 삭막해집니다.

 

곧바로 정신교육이 시작됩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학생운동권 출신, 학생운동권 출신이 아니어도 대학 재학중에 군대에 온 장병들, 호남출신들은 모두 이른바 '관심사병'이었습니다.

 

부재자 투표용지가 오면 투표를 하기 전에 개별적으로 이른바 '정훈교육'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끝내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는 대답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참 기가 막힌 투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중대장은 투표용지에 나머지 이름을 모두 손바닥으로 가리고, 노태우 후보 칸만 보이도록 해놓고서는 장병들에게 투표를 하라고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대신 투표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부대의 조치에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려던 몇몇 장병들도 이 대목에서 대부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군사독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습니다.

 

손바닥으로 투표용지를 가리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투표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냥 내무반으로 돌려보내더군요. 저는 이런 장병의 투표용지가 정말로 무효가 되었는지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대리투표가 되어서 지역 선관위로 발송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무튼,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 많은 군장병들의 투표권이 군사정권에 의하여 농락 당하였으며, 수 많은 장병들의 민주주의와 양심이 유린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양심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기억을 평생 간직해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과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출마하였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DJP 연합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늘 부정선거로 선거에서 패배하였으며, 그의 대통령 당선은 이 땅에서 '부정선거'를 몰아내는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그에게 투표할 수 없었던 취약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그가 중심이된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적어도 국민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로 발전하였던 것 입니다.

 

돌이켜보면 그의 삶이 바로 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였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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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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