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광일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 4·19가 일어나자 시위에 앞장서 등에 유탄을 맞고 경찰 유치장에서 구금 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진은 4·19 당시 시민 학생들이 부산 시가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를 벌이는 장면) 국제신문 자료사진 |
|
제1화 '강경식 전 부총리의 환란 이야기'에 이어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를 연재합니다. 김광일 변호사는 1970~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김영삼 정부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김 변호사는 이번 연재를 통해 자신의 인생 역정과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 문민정부 시절의 비화를 상세하고 흥미롭게 증언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 민족역사의 고비마다 이를 예사롭게 보내지 못하고 남다른 체험과 행보를 하며 68세의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이 일어나던 해 일본 땅에서 고물상을 하시던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 일본인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으며, 1945년 3월 해방을 앞두고 조선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 정착하였다.
만 6세의 어린 나이에 해방의 감격 속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로만 교육을 받고, 민주주의를 배우며 자라났다. 1950년 초등학교 5학년 때 6 ·25 전쟁이 일어나 시골에서 피란살이를 경험하였고, 인민군의 우익인사 처단을 바라보며 이념도 모른 채 반공의식이 깊어갔다.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였고, 1960년 대학 3학년 때 4 ·19를 맞이하였다.
4 ·19 그날 우리 서울대학생들은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면서 경무대 맨 앞에까지 진출했다. 바로 앞에 있던 동국대생이 시위진압용 소방차 2대를 운전하여 경무대 정문 쪽으로 돌진하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어 주변에 총을 맞아 피흘리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나는 유탄 한 발을 등에 맞은 줄도 모르고 부상한 학생들을 자동차에 태워 보내고 나서 시위대들을 보고 대법원으로 가자고 하였다.
당시 대통령선거 무효소송이 걸려 있었으므로 대법원에서 선거소송을 똑바로 처리하라고 시위하기 위해서였다. 사상 초유의 대법원 시위사건이었다. 대법원장 나오라고 소리지르면서 몇 시간을 버텼으나 당시 대법원장은 뒷문으로 사라지고 김연수 대법관이 분노한 학생들 앞에 나타났다. 선거소송을 공정하게 처리할 테니 학생들은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차분히 말하였다. 그 날 동숭동 근처의 친구 하숙집에 돌아와서야 등에 유탄 한 발을 맞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4 ·19를 통하여 독재와 불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회복하는 혁명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한 학생들은 제2차로 할 일은 남북통일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서울대학생 중 일부 통일지향적인 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서울대학교민족통일연맹이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통일의 문제점과 방법 등을 연구하자는 연구단체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고, 북한에 김일성정권이 있는 이상 남한처럼 간단하게 정권을 전복하고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대학 3학년 2학기 겨울방학이 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재실을 빌려 고시공부를 하는 한편 고려대학생인 조열래 (현재 변호사)군과 함께 합천읍내에서 중학 과정의 한벗야간학교 (그 후 25년간 계속)를 설립하여 무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1961년 대학 4학년이 되어 서울에 올라간 바로 이틀 후 이른바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그들은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라며 용공분자를 색출하여 체포했는데,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이 용공단체로 몰려 나도 그 간부의 몸으로 체포되어 마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내가 겨울방학 기간 고향에 머무는 동안 주로 문리대생들인 간부들이 충분한 검토없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판문점에서 남북학생들이 만나 통일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의를 하였던 것이 용공단체로 인정받은 이유였다. 나는 수감 초기 한번 조사를 받고는 40여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사도 받지 못했다. 3평 남짓한 경찰서 유치장엔 40명, 50명이 수감되어 절반은 앉아서 자고, 절반은 굴비두름처럼 옆으로 엮여 칼잠을 자야했다.
어느날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온다고 하여 나는 큰 기대를 했다. 과잉 수용으로 인한 인권유린과 나의 무기한 구금상태가 위법하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는데, 검사는 유치장 복도를 한바퀴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나는 허탈했지만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였다. 앞으로 내가 법조인이 된다면 적어도 내가 다루는 사건에 있어서는 절대로 억울하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6월 30일 수감된 지 41일만에 석방되었는데, 몸도 쇠약해졌지만 한 가지 통탄스러운 일은 제13회 고등고시의 지원 마감이 이미 사흘이 지났던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2> 법복을 벗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2> 법복을 벗다
유신시절 반공법 위반 학생 무죄선고 '파란'
北방송 듣고 전단 만든 영남대 박준성 재판
중정 압력에도 "고의성 없다" 판단 무죄 석방
인사 불이익에 사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
잊을 수 없는 일들
|
|
|
|
대구지방법원 판사 시절 재판정에서 심리를 진행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김광일 변호사. |
|
대학 4학년 말 군입대를 결심하고 있는데 마침 고시위원이시던 김도창 교수로부터 내년부터는 1년에 두 번씩 고시를 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동안 손을 놓았던 시험공부를 계속하여 이듬해인 1962년 8월에 제15회 고등고시에 합격하였다. 1964년 군법무관으로 임관되어 제5군단 사령부 검찰관으로 부임하였다. 군량미를 대량 횡령한 군단사령관 직속의 본부사령실 선임하사관을 긴급 구속한 일로 항명파동 (?)이라는 기이한 수난을 당한 후, 후방에서는 헌병학교의 군법교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1967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는데, 1972년 이른바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73년 구속된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400~500명에 이르자 그해 가을 각의에서는 구속된 학생들을 전원석방하기로 결의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있던 학생들은 모두 공소취소를 하였다. 그런데, 다만 북한방송을 듣고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는 사실때문에 반공법 위반사건으로 기소된 영남대생 박준성 (현재 교수) 1명만은 죄명이 반공법이기 때문에 석방에서 제외하기로 각의에서 결정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보고된 사건이었는데, 바로 그 사건을 내가 형사단독판사로서 재판을 맡은 것이다.
재판을 해 보니 그 학생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북한을 동조 찬양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서울의 학생시위사건을 언론 통제로 전혀 알 수 없게 되자 북한방송을 듣고, 북한방송에서 전하는 서울대학생들의 6개항의 민주화구호를 녹음하였다가 전단지에 쓰고, 마지막 제7항으로는 자기나름대로 "영구분단정책을 지양하라"는 주장을 한가지 보태었을 뿐인데, 그 전단지를 20여 장 작성하여 영남대학교 구내의 벽에 붙인 것이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대학생들이 법정을 가득 메우고 법정 바깥에까지 넘쳐나게 되자,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겨울방학이 될 때까지 재판을 늦추어 달라고 하였고, 법원의 윗사람을 통하여서는 무죄판결을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권고를 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2주일에 하던 재판을 1주일에 두 번씩으로 앞당겨 방학에 들어가기 전인 1973년 12월 14일 판결을 선고하였다.
판결의 요지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보를 수집할 자유도 있는데, 정부가 언론통제를 함으로써 정보수집의 자유가 통제되고, 달리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의 소식을 입수할 방법이 없게 된 피고인이 북한방송을 통해서 서울대학교 시위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알게 되고, 그 주장들이 자신의 마음에 합치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표현하였다고 하더라도 북한을 동조찬양할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범죄의 고의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 법정을 가득 메웠던 정보기관원들은 무죄판결이 선고되는 순간 학생들이 '와' 하고 지르는 우레같은 함성에 일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날 나의 판결은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에까지 보도되었다. 구속되었던 박 군은 그날로 석방되었다.
검사는 당연히 항소를 하였고, 항소심에서는 선고유예의 판결이 내려졌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항소심 재판부가 여러 차례 중앙정보부에 초청되어 만약 북한방송을 들어도 처벌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혼란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선고유예'라는 유죄판결이 선고되자, 검찰에서는 왜 유죄가 될 사건을 1심 판사가 무죄 판결을 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는지 특별검사가 지명되어 나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부정비리를 조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전주지방법원으로의 전보발령이었다.
뒷조사를 해봐도 아무런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표를 강요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판사가 올바로 재판하여 무죄판결을 한 것을 가지고 불이익을 준다면 유신 치하에서 나는 계속해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즉각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그 때만 하여도 2년 이내에 법관직에 있었던 지방법원 관할지에서는 3년간 변호사개업을 하지 못하도록 변호사법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개업할 수가 없어 나의 두 번째 고향인 부산으로 와서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때가 1974년 9월이었다. |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3> 이른바 '인권변호사'가 되어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3> 이른바 '인권변호사'가 되어
14년간 억울한 시국사범 무료로 변호
미문화원 방화 등 굵직굵직한 사건 당연한 듯 맡아
심리 때마다 학생·시민 격려로 법정 시위장 되기도
영남지역 대표 변호사로 명성… 도청 등 고통 겪어
|
|
|
|
1982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방화로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 김광일 변호사는 이 사건 연루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는 등 당시 꺼리던 시국사범 변호를 단골로 맡아 인권 변호사로 불렸다. |
|
내가 개업하던 1974년 9월께는 긴급조치가 잇달아 발표되어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몇 년씩 징역을 살던 시절이었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처단해 참으로 억울한 인권사범이 넘쳐 나던 시절이었다. 그 시대에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변호사법 제1조)이란 변호사의 사명을 다하자면 제일 먼저 수난을 당하는 자가 변호사 자신이어야 했으므로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그런 사건을 맡기를 꺼렸다.
나는 변호사 개업 인사장에 "억눌리고 빼앗긴 사람들을 위한 억센 투사가 되고,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을 위해 참된 상담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나중에 나에 대한 정보담당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바로 이 글이 정보당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그날부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피선시까지 14년간 정보당국의 일일 감시대상자가 되어 24시간 나의 동태가 보고되었고, 내 집 전화는 항상 도청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개업하자마자 사형 폐지론을 주장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되어 있던 한승헌 (감사원장을 거쳐 현재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변호사에 대한 선임장을 낸 것을 비롯하여 부산지역과 경남북 등 영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시국사건은 거의 전부를 내가 담당하였고, 서울의 동아투위, 3·1 구국선언사건 등에는 영남을 대표한 유일한 변호사로서 변호인단에 참가하였다.
내가 14년 동안 맡아서 변론한 이른바 인권사건들 중 기억나는 사건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조선 변상윤 등 16인의 소요 △통사당 박인목의 대통령 명예훼손 △중부교회 조태원, 김영일 군 등 3인의 긴급조치 위반 △서울의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의 3 ·1절 민주구국선언 △대구 경북대생 여석동 등 5인의 정진회 사건 △부산대생 서연자, 전중근 등 3인의 긴급조치 위반 △부산대생 이상경 군의 긴급조치 위반 △동일방직 근로자 추송례 등 7인의 선거비방 △부산대생 정외영의 긴급조치 위반 △조화순 목사의 긴급조치 위반 △동아일보 언론투위 안종필 외 7인의 긴급조치 위반 △부마항쟁 주역인 이진걸 등 2인, 김백수 등 2인, 장정욱 등 2인, 김영일 등 2인, 황상윤 등 3인 등 도합 11인에 대한 긴급조치 및 포고령 위반 △부산 김희욱, 김재규, 송세경, 고호석 등 19인에 대한 부림사건 (나는 이 사건의 공범으로 되어 있어 다른 변호사를 주선,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변호사가 변론) △서울의 이석표의 카터방한 반대시위 △고신대생 문부식, 김은숙 등 미문화원 방화사건 △부산대생 정광모 시위 △부산대생 허판수 시위 △부산대생 하근 등 3인의 시위 △부산대생 신동일 등 3인의 시위 △박찬종 등 7인의 고대 앞 시위 △부산대생 권영대 등 4인의 시위 △부산대생 김정호 등 6인의 시위 △부산대생 김대곤 등 6인의 시위 △국회의원 유성환의 국가보안법 위반 △부산대생 배경열의 시위 △부산대생 정윤재의 시위 △변호사 이돈명 씨의 범인은닉 △노무현 변호사의 노동쟁의법 위반 △강신옥 변호사의 긴급조치위반 등.
당사자나 관계자들은 당연한 듯 내게 변론을 부탁해왔고, 나는 쾌히 변론을 수락했다. 이 중에서 선임료를 받고 변론한 것은 한 건도 없으며,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석방된 후에 집에 갈 차비까지 대주는 형편이었다. 이런 사건을 심리할 때마다 구 부산지방법원의 제1호 법정은 동료학생들과 가족들, 정보형사들로 메워졌는데, 유신헌법의 위헌성과 학생들의 우국충정에 대한 나의 거침없는 변론이 이어지면 학생 시민들이 큰 박수를 보내고, 함성을 지르는 바람에 법정이 또 한번 시위장으로 변하곤 하였다. 내가 겁도 없이 이런 사건들을 맡게 된 이유는 변호사의 사명을 다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네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고, 대학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어려운 시절을 잘 잊어 버린다. 그러나 유신헌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한 주장 때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10년씩 징역형을 받고, 정부를 반대하고 비판하였다 하여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스려져 가족들까지 자유를 잃었던 유신시절과 군부독재 시절이 불과 20여 년 전까지 존재하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 시절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독재와 불의에 항의하여 의거를 감행한 용기 있는 피고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자유로운 사회가 이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4> 7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4> 7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
1978년 앰네스티지부 결성 민주인사 결집
부산지부장 맡아 월례·강연회 개최, 바자회 열어
양서협동조합과 함께 79년부마항쟁 주도적 역할
|
|
|
|
1976년 마르틴 에널즈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환영회에 참석한 김광일 변호사(오른쪽 두번째) |
|
변호사개업을 하던 1974년 연말경부터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가 일어나자 나는 1975. 1. 15. "동아 죽으면 나라 죽고, 동아 살면 나라 산다.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김광일"이라는 10만원짜리 광고를 내었다. 그동안 부산지역에서 숨죽여 오던 민주화를 열망하는 인사들이 나의 광고를 계기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나를 찾은 분은 요산 김정한선생과 부산대 출신의 노경규 씨였다. 당시 국제앰네스티 (폭력에 의하지 아니한 양심수에 대한 석방운동을 하는 국제단체) 한국위원회의 부산지역 회원은 단 두 사람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었다.
요산 선생은 70 노구를 이끌고 서울 앰네스티에서 보내오는 부산구치소 수감자들에 대한 내복과 영치금 등을 혼자서 전달하고 있었고, 노경규는 요산선생의 지도 아래 부산의 민주세력들을 남몰래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요산선생이 하던 구치소 일을 떠맡기로 자청하였고, 영치금에 내 돈을 보태어 전달하였다.
그 무렵 부산 YMCA의 시국토론회 사회를 보게 된 것과 영락교회에서 교회 갱신에 대한 강연을 한 것을 계기로 개신교계의 민주인사들인 임기윤 심응섭 김봉배 차선각 목사 등과 유기선 우창웅 장로, 박상도 임동규 김희욱 선생 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민주화단체가 부산인권선교협의회, 정의구현기독자회 등이었다. 그 단체들이 모체가 되어 기도회와 시국강연회를 계속하였고, 부산 YMCA의 4 ·19 기념강연, 부산중부교회의 3 ·1절 기념행사 등을 통하여 민주와 자유의 의지를 되살려 나갔다. 보수동의 유기선 (전 서울대총장 유기천의 형) 소아과의 2층 응접실은 민주인사의 중역회의실이었고, 하단 갈대밭 속의 강나루촌은 민주청년들의 아지트였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1977년 10월 국제앰네스티의 노벨평화상 축하회에 300명 이상의 민주인사들과 청년학생들이 참석하여 앰네스티부산지부를 결성하기로 결의하면서부터였다. 1978년 1월 12일 부산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종교계에서는 심웅섭 (별세) 임기윤 (별세) 조창연 최성묵 (별세), 송기인 신부 등이, 법조계에서는 나와 이흥록 변호사, 학계에서는 김정한 교수 (별세), 언론계에서는 조갑제 임현모 기자, 문학계에서는 윤정규 작가 (별세), 청년계에서는 노경규 이길웅 박상도 김희욱 김재규 조태원 허진수 박점용군 등이, 여성계에서는 정은희 박홍숙 씨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송기인 신부는 그가 사목하는 전포성당에 "지학순 주교를 석방하라"는 현수막을 성당 꼭대기에 장기간 걸어 둔 것으로 유명했다.
내가 부산지부의 지부장을 맡았고, 김정한 교수 임기윤 목사 송기인 신부가 고문으로 추대되고, 간사는 박점용 군이 맡아 지부소식지를 간행하고 월례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며, 수감자들을 돕기 위한 바자를 열기도 하였다. 부산지부는 민주인사들을 결집하고, 청년들을 훈련하며, 각종 민주단체의 결성을 지원하는 등 그야말로 부산의 민주화운동의 총본부가 되어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을 성공시키는 데 근원적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앰네스티회원은 시국사건체포대상 영순위였고, 실제로 간부 중 반 이상이 구속되었다.
그무렵 (1977년) 서울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중형을 받았다가 석방되어 부산으로 온 김형기 군(지금은 목사)을 2년간 내 사무실 사무원으로 두었는데, 그는 낮에는 사무원 일을 하고, 밤에는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각종 그룹스터디와 MT를 통하여 청년들에 대한 민주의식 고취작업을 해왔다. 그 결과의 하나로 김형기, 김희욱 군 등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 1978년 4월의 부산양서협동조합이었다. 양서를 추천하고 읽자는 문화운동이었으므로 당장 당국의 눈길은 피할 수 있어서 회원들이 수백명으로 늘어나고, 책방 골목에 조그마한 서점도 내었다. 대표는 이흥록 변호사가 맡았고, 조합 간사들은 민주화교육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 민주의식을 고취시켰고, 여기서 배양된 젊은이들이 또 하나의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부마항쟁 이후 뒤늦게 눈치를 챈 당국은 계엄령선포와 더불어 앰네스티와 양서조합을 제1차로 해산조치를 한 것이다.
우리는 또 순수한 사회봉사단체인 부산생명의전화를 만드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최성묵 목사와 김동수 박사, 이길웅 김희욱 오홍숙 등이 주도하여 부산생명의전화가 창설된 것은 1978년 12월이었고, 지금까지 30여년이 넘도록 발전해오고 있다. 초기에는 민주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교육과 상담원 등을 맡았으며, 나도 26년간 이사직을 맡아 봉사하였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5> 민주화운동의 자금 지원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5> 민주화운동의 자금 지원
부마항쟁 배후자금책 지목되기도
변호사 수입 털어 이곳저곳 도와 보안사 끌려가 고초
이후 겉으로는 거절… 김재규씨 통해서만 몰래 지원
잊을 수 없는 일들
|
|
|
|
김광일 변호사는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자금을 지원, 부산미문화원 사건 등이 촉발되는 데 일조했다.(사진은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모습) |
|
민주화운동을 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비용, 실무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건비와 활동비, 외래강사들에 대한 여비와 강사료 그리고 도망자들을 숨겨주는 비용 등 쓰임새는 한정이 없었다. 주로 내가 비용을 거의 다 부담하였다. 나는 일반사건도 많이 맡았지만, 변호사 수입의 절반 이상이 민주화 비용으로 들어 간 것으로 추측된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나는 변호사사무실에서 집총한 군인에 의하여 계엄사합동수사부에 강제연행되었다. 보안사 지하실에서 옷을 발가벗기고 작업복을 입힌 채 내가 이번 부마항쟁의 최고지령자라는 사실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와꾸'(틀)가 잡혀 있으니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들이 말하는 '와꾸' (사건의 전모)라는 것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전무이사 한승헌 변호사와 부산의 김광일 변호사가 공모하여 평소 김형기 등을 통하여 민주화운동으로 양성한 청년 학생들을 시켜 정부 전복을 기도하여 일으킨 소요사태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를 부인하자 그들은 영주동 고개턱에 있는 보안사 분실 (고문실이 설치되어 있는)로 옮겨서 철제의자에 앉히고 착검을 한 군인이 지키도록 하며, 화장실 가는 것 이외에는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잠을 재우지 아니하는 고문을 하면서 자백을 강요하였다. 그동안 아내는 나의 행방을 알지 못하여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생사를 걱정하였다니 두고두고 미안할 뿐이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먼저 나의 자금지원문제였다. 앞서 잡혀간 사람들에게서 밝혀 낸 1년 동안의 나의 자금지원액은 500만원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무렵 그룹스터디와 MT 등을 주관하고 있는 김형기 군에게 활동비, 최성묵 목사에게는 서울이나 부산 등지의 수배자들을 도와주는 비용과 그밖의 비용을 매달 일정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금지원사실이 밝혀졌으니 나는 부마항쟁의 배후 자금책인 동시에 최고지령자로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피살되는 바람에 함께 갇혀 있던 최성묵 목사, 박상도 김형기 군과 함께 그 며칠 후 석방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군법회의에서 최고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밖에도 가톨릭농민회의 문정현 군이 수배자들의 은신처가 필요하다고 하여 명지의 논 6000평을 임차하여 1년간 농사 짓는 비용 도합240여만 원 (당시 쌀 한 가마 3만8000원)을 지원했다. 문 군은 그해 120가마니의 벼를 수확하여 그 돈을 밑천으로 유통사업을 하고 오늘날 폐기물처리회사를 만들어 그 수익을 환경운동에 재투자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부마항쟁사건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준 돈 때문에 나 자신이 입건이 되면 다른 사람의 변호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1980년 1월부터는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자금지원 요청을 거절하는 것으로 하고, 가장 신임할 수 있는 김재규 (민주공원관장 역임) 군을 통해서만 지원하도록 비밀통로를 일원화했다.
그래도 김재규 군이 무언가 수입원이 있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대청동에 있는 탁구장을 경영하겠다고 하므로, 그 임대차보증금을 대여하는 형식으로 차용증을 만들어 지원했다. 그 탁구장을 거점으로 한 그룹스터디는 부산미문화원사건의 행동대를 길러내는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1981년 6월 서울대 농대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던 송세경 군이 나를 찾아와 부산대에서 유인물을 살포해 도망다니는 학생의 여비를 줘야 하니 5만 원만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송 군을 밖으로 내보낸 후 함께 온 김재규에게 "너를 통해서만 비밀리에 지원하도록 되어 있는데, 왜 송세경이가 직접 돈을 지원해 달라고 하느냐" 고 질책하고는 "송 군에게는 내게서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자네가 따로 돈을 구해서 주는 것으로 하게" 라고 말하며 10만 원을 주었다. 그런데, 그해 9월 부림사건이 일어나자 그 돈을 준 사실이 밝혀져 나는 범인도피죄의 공범으로 입건이 되었고, 그 바람에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부림사건은 부산지역에서 민주화활동을 하던 청년들을 불온서적 탐독 등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한 끝에 엮어 낸 대대적인 민주운동탄압사건인데, 처음에 8명, 두 번째로 8명이 구속되었고, 이흥록 장두경 정차두 박재봉 변호사가 변호를 맡게 되었으며, 세 번째로 구속된 이호철 등 3인에 대하여는 달리 변호인을 구할 수 없어 나한테 변호사시보 교육을 받았던 노무현 변호사에게 변호를 부탁했는데, 이것이 노 변호사의 첫 인권변론사건이 된다. 법정변론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들의 가족들 (특히 김재규의 어머니, 송세경의 처 구성애, 최준영의 처 홍젬마)은 나의 사무실에 모여 부산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6> 김대중씨에 대한 변호와 결별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6> 김대중씨에 대한 변호와 결별
87년 대선 후보단일화 과정서 DJ에 실망
1976년 긴급조치 9호위반 변호인단으로 인연맺어
동교동 모임때 "YS에 양보하라" 권유…끝내 출마
|
|
|
|
19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앞줄 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 |
|
나는 원래 정치지망생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김영삼 씨나 김대중 씨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57주년 기념예배에서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등 12명이 서명한 긴급조치철폐 등을 주장한 민주구국선언서가 낭독되었는데, 당국은 관련자 18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서울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는데, 영남지역을 대표하여 나 한 사람이 변호인단에 끼게 되었다.
1977년 3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자 김대중 씨는 서울구치소에서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 직후 부인 이희호 여사와 김옥두 비서 등이 부산의 내 사무실로 찾아와 김대중 씨의 생사를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일체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진주교도소로 가서 접견신청을 하였더니 정보부에서 접견을 시켜주면 안된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김대중 씨의 1971년도 대통령선거법위반사건이 서울고등법원에 미결로 계속중인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건의 변호인으로서 접견을 신청한다고 해도 역시 거절당했다. 몇 시간이나 다툰 끝에 변호인선임장에 무인만 받을 수 있었고, 그것으로 서울고등법원의 변호인증명을 받아 가서야 비로소 접견이 이루어졌다.
당국이 그를 이감한 것은 진주교도소가 서울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외신기자 등이 잘 찾아갈 수 없게 함으로써 세상에서 그를 잊혀지게 한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 달에 두 번 씩 접견을 하여 1년동안이나 통신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김대중 씨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견해를 그때마다 세상에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직접 운전하여 폭우 속에 진주까지 이희호 여사를 태우고 왕복한 일도 있었다.
그러자 당국은 여러 경로로 나의 변호인 사임을 요구하였으나, 나는 의뢰인을 위해서 변호활동을 하는 것이 변호사의 사명이라고 하며 거절했다. 온갖 방면으로 나의 뒷조사를 하였으나 아무런 흠집을 발견하지 못하자 변호사법위반 사건을 조작하여 1978년 12월 나에 대한 비밀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법원에 의하여 청구가 기각되었다. 1년에 걸친 나의 노력이 주효하였던지 김대중 씨는 1년 만에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이 되었고, 얼마 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 5·18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나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한 달 동안 내 친구 임정명교수의 어머니집에 숨어 있어야만 했고, 정보부와 보안사의 두 번에 걸친 조사 끝에 혐의 없음이 밝혀졌다. 임기윤 목사는 나와 같은 혐의로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는 도중에 죽음을 맞이하여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내가 생면부지의 김대중 씨를 내 생명을 걸고, 또 부산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변호하고 도와준 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도와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민주 발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씨는 석방된 후 나를 민주헌정연구회의 9인 이사 중의 한명으로 추천하면서 나를 그의 정치적 동지로 포섭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1987년 8월께 그의 집에 인사차 들렀다가 당시 통일민주당의 동교동계 부총재급들이 모여서 김대중 씨의 대통령 독자출마문제를 논의하고 있던 현장에 참석한 격이 되었는데, 김대중 씨는 나에게도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서슴없이 이번에는 김영삼 총재에게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첫째, 1986년에 직선제가 되더라도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바를 지키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이며 둘째, 야권이 분열되면 필패인데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으면 이쪽이 양보하여야 한다, 셋째, 민주화를 위하여 역할분담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넷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지금까지 야당을 이끌어 온 당수가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느냐 라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김대중 씨는 다른 참모들에게 나의 말을 반박해 보라고 종용하였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고, 특히 좌장격인 이중재 씨는 시종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김대중 씨는 "이 부총재, 여기 잠자러 왔소" 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내게 "많은 사람들이 양보하라 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만두면 나이가 많아서 다음에는 대통령이 될 수가 없소" 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행동하는 양심'을 내세우며 민주화의 화신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에 큰 실망을 느꼈고 이런 사람을 내 생명을 걸고 변호해 왔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산으로 내려와 그에게 절교장을 보내고, 그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만약 그 때 김대중 씨가 양보하였더라면 김영삼 씨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고, 통탄스러운 민주세력의 지역분할도 없었을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7> 부민협에서 6월 항쟁까지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7> 부민협에서 6월 항쟁까지
노무현 구속적부심에 사상초유 99명 변호인
85년 요산선생 모시고 부민협 결성 본격 민주화 운동
박종철 추모대회 등 숱한 항쟁 6·29 선언으로 이어져
잊을 수 없는 일들
|
|
|
|
1987년 2월7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주최의 고 박종철군 추모 시민대회가 열린 부산 제일극장 앞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끌어내고 있다. |
|
1970년대 부산민주화운동의 핵심주도세력이던 청년들이 1981년 부림사건으로 일제 검거되고, 이어서 1982년에 발생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여파로 80년대 초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당국은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반미방화살인사건으로 규정하였지만, 그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나로서는 그 사건의 진상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부식, 김현장, 김은숙 등은 결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누구의 지령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 미군의 허락 하에 국군에 의하여 유혈 진압된 것과, 그 이후 성립된 군부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항의한다는 표시로 미문화원 정문에 살짝 불을 질러 세계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휘발유 사용에 무지하였던 학생들의 부주의로 미문화원 건물 전부에 불이 붙고 도서관에 있던 대학생 한 명이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보도와 인명이 살상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분위기에서 그들을 변호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1, 2, 3심의 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문부식과 김현장은 사형선고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이 감형되고 오랜 복역 끝에 석방되어 오늘날에는 모두들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음은 다행이다. 나는 그 사건을 피를 토하듯 열변으로 변론하였고, 미국대사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사형 집행이 되지 아니하도록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1981년 부림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청년들이 83년에 석방되면서부터 부산공해문제연구소를 온천성당(주임 손덕만 신부)에서 결성하면서 부활하였다. 1985년에는 부산공해문제연구소가 발전적 해체를 하고,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요산 선생을 정점으로 하여 최성묵 목사, 송기인 신부, 김희로 시인, 나를 비롯한 변호사들 이흥록, 노무현, 문재인 등이 발기인이 되었다. 송기인 신부가 초대회장을 맡고, 우리들은 상임위원이 되었으며, 김재규 군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시국사건에 대한 변론 활동은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가 가세하여 나로서는 짐을 덜었고, 부민협은 활발하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게 되자 당국의 압력을 받은 천주교 부산교구는 송기인 회장을 외국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나와 요산 선생이 이갑수 주교를 만나 간청하였으나 결국 송신부는 1987년 1월에 미국으로 강제유학을 떠나야 했고, 후임으로 최성묵 목사가 제2대 회장을 맡았다.
1987년 2월 7일 부민협 주최의 박종철추모 시민대회가 열렸다. 당초 계획하였던 원각사 앞이 경찰에 의하여 봉쇄되자 부산극장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전격적으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경찰이 사방을 둘러싸고 최루탄을 쏘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내가 "모두 앉자"고 하여 약 300여 명의 회원들과 시민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민주화 구호를 외쳤다. 약 1시간 동안 최루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속에서 버티었는데, 경찰은 한 사람씩 뜯어내어 경찰차에 태웠다. 마지막으로 나와 두 사람이 남았다가 시경대공분실로 호송되었다. 그곳에는 먼저 끌려 온 노무현, 문재인변호사가 있었다.
이틀 만에 우리는 석방되고, 노무현 변호사는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나의 요청에 따라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인 하경철 변호사 등 2명이 급거 방부하여 법원장과 담당법관을 만나 집시법 위반으로 변호사를 구속하는 일은 부당함을 강조해 결국 영장이 기각되었다. 그 사건으로 부민협부회장 김희로, 신민당원 김신부, 목사 김영수, 교회청년회장 손규호 등 4인이 구속되고, 우리는 불구속입건되었다.
부민협의 민주화투쟁은 계속되었고, 전두환의 4 ·3 호헌조치는 민주화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어 그해 5월 20일에는 부민협이 주동이 되어 민주헌법쟁취부산국민운동본부 (나도 공동대표 10여 명 중 1명이었다)를 결성하고,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희생으로 항쟁을 계속한 결과 이른바 노태우의 6 ·29선언을 받아내게 되었다.
그 무렵 대우조선노조대회에 참석하였던 노무현 변호사가 제3자 개입혐의로 구속되자 부산변호사회 회원들이 총출동하여 그의 적부심청구소송에 참여하였다. 재판에서 나의 요구로 재판장이 변호사의 이름을 전부 호명하게 되었는데, 100여 명의 변호인이 일치단결하여 노 변호사를 변호한다는 시위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단일사건에 99명의 변호인이 선임된 것도 초유의 일이었고, 변호인이 전원 법정에 출석하여 한 명씩 출석을 확인한 것도 우리나라 사법사상 처음이라고 할 것이다. 변론은 내가 하였고 노 변호사는 석방되었다. 그해 연말 제 13대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짐으로써 유신과 군부독재에 대한 민주화운동은 일단 대단원을 내렸다고 할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8> 제13대 국회의원 생활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8> 제13대 국회의원 생활
청문회 첫 도입 주도… 진실 밝힌 밀알로
유명무실 국회법 개정·탈권위 청산 의욕적 추진
5공 비리·광주청문회 팀장 활동 잊지 못할 기억
|
|
|
|
1988년 12월 31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전두환 씨가 계엄사의 자위권을 언급하자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뛰어나와 "살인마"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다. 1989보도사진연감 자료 |
|
1988년 3월 하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가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해 실질적인 군정 종식을 위해서는 나와 같은 민주화 인사가 국회의원으로 꼭 나서야 한다고 출마를 강력히 권유하였다. 나는 정치에는 전혀 뜻이 없었으나 김 총재의 강력한 권유와 시대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 끝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기로 하였다. 나는 나의 입당에 부산지역의 재야세력 영입이라는 명분을 부여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나 이외에 노무현 변호사와 김재규 군을 추천하였더니 김 총재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노 변호사는 처음에 출마를 승낙하였다가 공항에서 돌아가버린 일도 있고, 김재규 군은 자신이 없다면서 사양하였다. 나는 노 변호사를 겨우 달래 상도동으로 함께 데리고 갔다. 김재규 대신 추천한 부산대의 하일민 교수 역시 사양하는 바람에 나와 노 변호사만이 부산 재야 출신으로서 김 총재의 특별한 지원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의 첫 임무는 유신과 군부독재를 거치는 동안 국회를 입법부가 아닌 통법부로 전락시킨 국회관계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통일민주당의 국회법 개정위원으로 다른 세 당의 위원들과 함께 국회법 개정안을 만드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역대 국회법 개정연혁과 외국의 국회법을 참조해 나무랄 데 없는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국회법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청문회 제도가 도입되었고 국정감사와 국정조사에 관한 법률도 되살렸다.
두 번째 임무는 본회의에서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권위주의 체제의 청산과 참된 민주화는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조목조목 질문했다. 첫째 항은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민주공화국인 점에서 아무런 다른 점이 없는데, 당신들이 정부를 공화국의 번호를 붙여 부르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른바 제6공화국은 제5공화국과 어떤 점이 달라서 새 번호를 붙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현재 총리는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나의 대정부 질문이 있은 후로는 제6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정부가 공식적으로 쓰지 아니하였고, 다음 정부인 김영삼 정권부터는 공화국 번호를 아예 쓰지 않았다. 또 권위주의의 청산은 헌법과 법률 등 제도의 개선과 아울러 권위주의 시대의 인물들을 청산하고 권위주의적 정치 행태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인데, 과연 노태우 정부는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20개 항을 나누어서 질문하였다. 김영삼 총재는 지금까지 들어본 국회연설 중 최고의 연설 중 하나였다고 극찬해 주었다.
그 다음으로 이른바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야대'의 효력을 처음 실감한 것이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에 대한 표결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임명동의를 요청한 대법원장 후보자는 야당의 법조 출신 의원들이 볼 때 적격자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내가 의사진행 발언을 하겠다고 나서, 권위주의적인 경력 (유신과 군부정권에서 출세한 대법관)을 가진 사람은 민주화 시대에 부적절하므로 이에 대한 찬반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토론을 못하게 하는 것은 의사진행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사실상의 반대토론을 하였다.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공화당 의원들마저 나의 발언에 공감했는지 결과는 부결이었다.
표결 이후 민정당의 독주는 견제되어 모든 안건은 대화와 타협으로 처리되었다. 또 각종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나는 가장 중요한 분야인 비민주악법개폐위원으로 선정되어 그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는 동안 5공비리조사특위와 광주항쟁진상조사특위가 만들어져서 청문회가 열렸다. 건국 이래 최초의 청문회인 5공 청문회가 진행되자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민주당의 노무현 의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청문회가 열리는 날 아침마다 노 의원을 찾아가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질문을 해 나가라고 부탁하였다. 과연 노 의원은 최초의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광주청문회에서도 통일민주당이 잘해야 한다면서 나를 광주청문회 5인 위원의 팀장으로 임명하였다. 나는 채택된 증인들마다 5명의 위원에게 주심위원을 정하고, 질문순서를 고르게 정해줌으로써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질문을 하도록 하였고, 관련 자료들을 소송기록 보듯이 정독하여 좋은 질문자료를 찾도록 지휘하였다. 그 결과 광주청문회에서도 민주당 의원들이 이른바 스타들이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5공 청문회와 광주청문회를 통합하여 1989년 마지막 날 4당이 한 명씩 질문자를 정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신문하기로 해 내가 통일민주당의 질문자로 선정되었는데 다른 위원들이 질문이 아닌 의사진행 발언을 다투어 하고 마침내는 노무현 위원이 전 전 대통령을 향하여 명패를 집어 던지는 사태가 일어나 청문회장이 그야말로 '깽판'이 되어 버린 일이었다. 전두환 씨는 퇴장해 버리고 정작 질문을 준비하였던 위원들은 단 한마디도 질문을 하지 못한 채 역사적인 청문회는 그렇게 끝이 나버린 것이다. |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9> 3당 합당 불참과 정치적 시련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9> 3당 합당 불참과 정치적 시련
이상좇던 초보정치인 4년반 만에 의정마감
90년 공화·민정·민주 합당에 반대… 꼬마 민주당 창당
정치개혁협 만들고 정주영 믿었으나 이용당한후 떠나
잊을 수 없는 일들
|
|
|
|
지난 1990년 2월 9일 민주공화당과 통일민주당, 민주정의당 등 3당이 합당해 만든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씨 등과 건배하고 있다. |
|
나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으로서 국회상임위활동을 열심히 하는 한편, 각종 신문 방송에 민주당 대표로서 출연해 정치적 소신을 밝히고 대학과 사회단체 등에서의 강연 등 원외 활동에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동남아제국과 북한 등 외국방문을 통하여 국제정치의 안목도 넓혔다. 당의 현대화와 합리적 운영은 차기집권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므로 당 총재에게 건의하여 기획조정실을 설치하게 하고, 그 책임을 맡아 당 운영의 쇄신을 기하는 한편, 여론조사와 전산실 운영체제를 갖추고 미국 일본 등 선진민주국가의 선거 기술을 견학하고 연구하였다.
통일민주당과 평민당은 모든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였는데, 88올림픽 후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노 대통령을 상대로 공약 이행을 압박하면서 청문회 활동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통일민주당은 동해보궐선거에서 후보매수사건이 발생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평민당은 노태우의 재신임 공약불이행을 승인함으로써 민정당과의 연정설까지 나돌았다.
1990년 1월 김영삼 총재는 뜻밖에도 공화당·민정당과 함께 3당 통합을 선언하였다. 평소에 민주당 내의 많은 의원들이 평민당과 야당 통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지만, 막상 민정당과의 합당이 이루어지자 대부분의 의원들이 합류하였고, 나와 이기택 김정길 노무현 등 4명은 불참하였다. 불과 2년 경험의 정치초년생으로서 단순 소박한 이상주의자였던 나로서는 안개속 같은 '구국의 결단'을 선뜻 이해할 수도 없었고, 선거 때 군정 종식을 내세우고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던 약속을 어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발탁하고 지도를 아끼지 아니하였던 김총재를 따라가지 아니하는데 대한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은 컸었다. 김총재는 나의 불참을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우리 네 의원은 무소속의 박찬종 이철의원, 그리고 원외의 조순형 홍사덕 장기욱 전 의원들과 힘을 합쳐 이른 바 '꼬마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세대 교체와 체질 개선을 앞세운 우리들의 모임은 많은 국민들의 격려와 기대를 모았다. 나는 정책위의장을 맡아 도덕적 개혁정당·과학적 정책정당을 만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특히, 그 무렵 발생한 수서사건 진상조사를 통해 '수서 비리사건 조사백서'를 발간한 것은 역사적 과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충북 음성 진천의 보궐선거에서 공천자인 허탁 의원을 당선시키는 등 기세를 올리던 민주당은 지도력의 부재와 자금난으로 비틀거리다가 의원직 사퇴파동과 광역의원 선거 참패의 후유증 등으로 결국 김대중 씨의 신민당 (평민당의 개명 정당)에 흡수 소멸되고 말았다. 또 다시 남은 사람은 나와 박찬종 의원 두 사람뿐. 나로서는 비호남지역의 야당을 완전말살하는 흡수통합에 찬성할 수 없었고, 더구나 김대중 씨가 이끄는 정당에는 가기 싫었으며, 밀실 야합식 정치에 투항하는 동지들의 변신은 더욱 싫었다. 박 의원과 나는 새로운 정치진로를 모색하여 양순직 유제연 씨 등 깨끗한 옛 정치인들,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각계각층의 신인들과 의기투합해 '정치개혁협의회'를 만들어 세확장을 도모했다.
그 무렵 깃발론을 들고 정치 참여를 선언한 태평양시대위원회의 김동길 교수와도 만났으나 5, 6공 세력을 동참시켜야 한다는 그의 견해 때문에 영입이 되지 아니하였고, 우리 가운데서는 박찬종 의원이 김동길 씨를 의식하여 정당 창당과 대통령 후보 선언을 먼저 하려고 이탈하는 바람에 남은 사람들끼리 진로수정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있을 때 뜻밖의 제의를 현대그룹의 정주영 씨로부터 받았다. 정 씨가 일신의 영화를 다 버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그의 재력을 다 바쳐 야당정치를 후원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재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우리는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그와 직접 만났다. 정 씨가 한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노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하여 경제가 망하고 나라가 망한다, 기성정당은 기득권 보호를 위한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로 믿을 수가 없다. 뜻은 있어도 돈이 없는 훌륭한 인재를 모아 좋은 정당을 만들도록 뒷받침하겠다. 내가 야당을 하다가 '현대'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각오하고 나라를 살리겠다. 당신들이 사람들을 모아 정당을 운영하라. 나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로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의 말을 두 번 세 번 확인하였고, 그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정독한 결과, 나는 그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고, 업적으로 신용을 증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와 함께 하기로 하였다. 나는 정치의 마지막길에 들어섰다는 처절한 마음으로 국민당을 좋은 정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막상 그와 함께 정치를 시작해보니 정 씨 자신이 대통령 출마를 위하여 우리를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가 절대로 민주적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우직한 김광일의 정치인생은 그렇게 하여 4년반 만에 일단 끝난 것이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0> 초대국민고충처리위원장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0> 초대국민고충처리위원장
무보수 상근으로 민원 하루 50건 직접처리
행정상의 피해 구제…공직자 생활 중 가장 큰 보람
창립 1주년 행사 권리구제 받은 수백명 참석, 격려
|
|
|
|
김광일 변호사는 1994년 4월 9일 발족된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1년여 동안 1만여 건의 각종 민원을 처리했다. 사진은 지난 2일 열린 국민고충처리위 창립 기념식에서 직원들이 헌장을 낭독하는 장면. 국제신문 자료사진 |
|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발족한 지 2년째인 1994년 4월 9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발족되었고, 나는 그 초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당시 정치를 떠나 변호사업에 복귀하고 있었던 나에게 청와대의 김무성 비서관에게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통고가 왔다. 위원장은 비상임이니 1주일에 한 번 정도 나와서 결재만 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제도였기 때문에 각종 관련 자료를 받아서 그 제도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이 제도는 스웨덴에서 처음 도입됐으며, 의회의 대리인인 옴부즈맨 (Ombudsman)이 행정기관으로부터 입은 국민들의 피해를 구제해 주는 제도이다. 당시 세계 100여 국가에 널리 퍼져 운영되고 있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였다. 기존의 정부합동민원실 같은 민원제도는 별다른 실효성이 없었는데, 이 제도는 민간인이 주가 된 제3자의 입장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권리구제가 한층 실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였다.
또, 그 처리 대상은 행정기관의 위법부당한 처분뿐만 아니라, 행정기관의 부작위로 인한 피해 및 정책의 잘못으로 인한 국민의 부담과 불편까지를 시정하고 제도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행정작용 전반에 걸친 권리구제 제도였다. 잘만 운영된다면 국민의 권리구제를 위하여 획기적인 봉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꺼이 맡았다.
그런데, 법령에는 제도의 골자만 몇 개 조항으로 되어 있을 뿐이고, 구체적인 운영요강과 처리절차 등은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상세한 운영규정과 필요한 서식을 모두 직접 만들었다. 나의 방침은 모든 사건은 위원회가 직접 조사처리하며, 위원장의 결재를 받아 시행하도록 하고 설령 민원이 기각되는 경우에도 상세한 안내를 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한을 풀어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사관들에게 이 제도의 취지와 운영규정을 직접 교육하면서 억울하고 약한 국민의 편에 서서 성실하게 민원을 처리하는 자세를 강조하였다. 인원도 두 배로 늘렸고, 전문위원도 공채하였고, 법률전문가가 필요하여 검사와 법제관 각 1명을 파견 받았으며, 정부파견 공무원들에게는 파견수당을 지급하도록 조치하였다.
1년 동안 1만여 건의 사건을 처리했으니 하루에 50건 이상을 소화해야 하였다. 그 사건들을 나는 직접 모두 검토해 처리하였고, 필요하다면 현장조사를 반드시 시행하였다. 묵은 민원이나 집단민원일수록 현장에 가보면 그 해결책이 바로 보이는 것이었다. 서울시내는 물론이고, 전국을 찾아다니며 현장조사를 하였다. 현장조사를 나가면 청문회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지 모두들 나를 환영하였고, 질서 있게 조사에 응해 주었다. 위원장으로서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1주일에 엿새도 모자라는 형편이어서 나는 변호사 업무를 제쳐 놓고 매일 아침부터 밤늦도록 상근했다. 물론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사비를 사용해야만 하였다.
1년에 한 번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운영보고서는 운영상황 전반과 중요한 미결사항을 정리하여 위원 전원이 대통령의 면전에서 보고하고, 애로와 미결사항을 대통령이 직접 행정부에 지시해 주도록 요망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총리와 장관들에게 고충위원회의 업무에 협조하고, 그 처리 결과를 존중하여 실시하라고 특별히 지시해 주었다. 또 위원회의 결정은 강제력이 없고 대통령에 대한 보고와 더불어 언론에 공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수시로 언론과 회견하여 문제점을 공개하고, 위원회의 활동을 홍보하였다.
그리고 국정감사시에는 위원회는 별도로 감사를 받지 않고 총무처의 감사에 포함하여 받는 것으로 한다는 국회의 방침을 듣고, 나는 위원회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잘잘못을 감사받아야 하며 그 기회에 국회의원들에게 이 제도의 홍보와 애로사항의 호소를 해야 한다고 하여 단독감사를 받았다. 모두들 수고한다고 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격려를 해주었다.
그 결과 예산도 두 배를 받을 수 있었다. 창립 1주년 기념행사로 시민회관에서 개최한 위원회의 보고대회에는 그동안의 활동으로 권리구제를 받은 수백 명이 참석하여 격려를 해주었다. 어떤 날에는 길을 가다가 길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면서 수십 년 된 우리 동네 민원이 위원장 때문에 해결되어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만났다. 재임 1년6개월 동안 나는 정말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쏟았다. 좋은 제도가 정부와 국민 속에 굳게 뿌리 박혀서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평생의 공직자 생활 중에서 이때만큼 보람을 크게 느낀 적도 없었다. 나는 그 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근무할 때에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제도개선과 행정지원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대통령을 모시고 위원회의 심의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위원회의 활동을 확인하게 하고, 위원과 직원들을 격려하게 하였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1> 대통령비서실장 시절(1)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1> 대통령비서실장 시절(1)
각료·주요기관장 대통령과 만남 최대한 주선
YS 임기 중반에 개혁 피로감 쌓여 국면전환용 인사
퇴근 후·휴일에도 청와대 주변 안떠나 재직중 대형사고 전무
잊을 수 없는 일들
|
|
|
|
김광일 변호사는 YS임기 후반부(1995.12~1997.2)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으면서 틈나는 대로 많은 사람을 만나 현안에 대한 의견을 청취,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데 노력했다. 사진은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김 변호사(김영삼 대통령 뒤 우산 든 사람 오른쪽 뒤)가 한총련 학생들의 시위 농성으로 폐허가 된 연세대 시위현장을 둘러보는 김영삼 대통령을 수행하는 장면. |
|
국민고충처리위원장으로 직무를 수행한 지 1년 반이 지난 1995년12월 나는 뜻밖에도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임명 한 달 전께 대통령이 박세일 정책기획수석을 시켜 나를 만나 나의 비서실장으로서의 적격성 여부를 타진하였던 것 같고, 박 수석의 강력한 천거로 실장 인사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인 제4, 5차 연도를 준비하는 데,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 안보강화와 사회·경제 분야 등애서의 개혁 마무리 작업을 함에 있어서 비서실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나를 불렀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지 만 2년 10개월이 된 때였다. 취임초 90% 이상의 지지를 보내며 환호하였던 국민들은 개혁 피로감이 쌓여갔다. 거듭된 각종 대형사고로 높아진 국민의 원성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절정에 이르고 대북 쌀지원과 중단, 여기에 덧붙여 정부가 독선으로 흐른다는 반감 등이 혼합되어 1994년 몇 군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패배하는 등 김 대통령의 권위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전반적 국면 전환과 인사 쇄신책으로서 이수성 국무총리와 함께 내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된 것이다. 나는 임명내정 사실을 통보받자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등을 비롯한 대통령과 비서실에 관한 책자들을 읽고 연구하였으며, 초대 박관용 실장으로부터는 비서실장의 직무수행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박 전 실장은 "김 대통령이 당신을 임명한 것은 철저한 조직 장악력과 추진력 때문이었을 거요. 대통령의 전반적 업무를 상세히 파악하여 적절하게 건의하고 보좌하며,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을 잘 장악하여 감시 감독하여야 할 것이요. 또한 대통령이 실수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대통령의 생각까지를 잘 살피고, 필요한 경우에는 관계기관 연석회의를 통하여 내린 결론을 가지고 대통령의 생각을 바꿀 때까지 노력해야 할 것이요. 김 대통령은 참모들의 정당한 건의는 100% 받아들이는 분이요" 라고 말해 주었다.
국정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균형감각을 가지고 보편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제시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지도력을 발휘하여 부하들을 잘 통솔하고 진정한 애국심과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서실장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자질과 성품을 갖추어야 하고, 때로는 대통령의 대리자가 되어 국정을 조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통령의 방어자가 되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여야 한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다하여 보좌할 각오로 임하였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대통령에게 전날 밤에 생긴 일들과 언론보도 내용을 종합보고하고, 대통령의 일정에 따른 필요한 지시를 받는다. 이어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다.
나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형식적 보고를 생략하도록 하고, 수석비서관 전원이 공통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과 회의에서 토론하여 결론을 내야 할 사안만 안건으로 보고하게 하였고, 때로는 시간 제한 없이 충분한 토론을 거치게 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주재의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대통령을 긴 탁자의 중앙부위에 앉게 하여 모든 수석비서관들과 가까이에서 실질적인 회의를 하는 형태를 취하도록 하였다. 오전에는 주로 비서실 전체의 업무를 파악하고 지휘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수석이 아닌 일반 비서관들도 직접 자유롭게 비서실장을 만나도록 하였다
오후에는 정부 각료와 외국대사 등 국내외 중요 내방객들을 가급적 많이 만나 사안을 파악하고,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며, 때로는 비서실장이 직접 처리해야 할 과제들을 연구하고 매듭을 짓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통령의 직무에 관하여 폭 넓고 깊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게 되었으며, 최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의 접견을 원하는 각료들이나 중요 국가기관장들은 언제든지 최대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수석비서관과의 의견 차이로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던 공정거래위원장, 관세청장, 고속철도공단 이사장 등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주선하여 그 분야의 제도 개혁에 성과를 거두게 한 바가 있다. 나는 퇴근 후나 휴일에도 청와대에서 반경 2km 이상 떠난 적이 없으며, 항상 국정을 파악하고, 대기상태에 있었다. 대통령은 쉬어도 비서실장은 쉴 수 없고, 대통령은 몰라도 비서실장은 모두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기 때문에 관계 각료와 수석비서관 이외에 비서실장까지 굳이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대통령 부재중에는 특히 안전사고나 돌발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24시간을 깨어서 국정을 살폈다. 단순히 보고만 받지 아니하고 국무총리, 국방·건교·내무부 장관과 경찰청장 등에게는 수시로 직접 전화를 걸어 국가안보와 각종 재해에 대한 예방점검을 독려하고, 필요하면 내가 현장에 직접 나가보기도 하였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의 재직 중 대형사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2> 대통령비서실장 시절(2)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2> 대통령비서실장 시절(2)
노사·금융 개혁 의욕적 추진, 곳곳서 암초
96년 벽두 각 부처 의전 간소화·차관급 인사로 시작
노·사·정 합의 노동개혁 노력…날치기 통과로 변질
금융개혁법 국회 제출, 차기 대선 앞둔 정치권 외면
|
|
|
|
민주노총 지도부가 1996년 12월 26일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와 관련,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총파업을 선언하고 있다. 1997보도사진연감 자료 |
|
내가 비서실장이 되고, 1996년 새해부터 청와대와 정부의 행정 낭비를 줄이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신년벽두 정부 부처의 고위관리들이 자체 신년 시무식 후 다른 관계 부처에 신년인사 다니는 것을 금지하였고, 대통령의 연두순시도 폐지하였다. 정부 각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그 전해 9월부터 국회의 국정감사를 받느라 몇 달을 시달리다가 이어서 대통령의 연두순시에 대비하느라고 정상적 업무수행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폐지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회의시 꼭 필요한 직접 관련자 이외에 간접 관계자나 방청객 성격의 일반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밥을 먹고 하는 것을 폐지하였으며, 웬만한 의전적 행사는 국무총리에게 대행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시간을 아낄 수 있게 하였다.
나는 비서실장에 취임한 직후 대통령으로부터 1996년도 정부의 차관급 정기인사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관급 이상은 대부분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결정하였으나 차관급 인사안은 비서실장에게 실질적으로 맡기다시피 한 것이다. 나는 공직기강 비서관이 초안한 복수 인사안을 토대로 관계 수석비서관, 또는 관계부처 의장들과의 협의를 거쳤다. 인사에 대해 만약 부정적 평가가 나오면 관계 수석비서관을 문책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지연 학연 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실력과 신망을 위주로 선발하였다. 대통령은 거의 100% 그대로 재가를 하였다. 나는 대통령의 임명식 후 차관들을 따로 불러 인선과정을 설명하고, 해당 부처에서의 하위직 인사에도 같은 과정을 거쳐줄 것과 이후 직무수행 사항을 계속 주시할 것이니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의 장·차관급 인사에 대하여 정부나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 이후의 인사도 같은 원칙과 정신으로 하였다고 자부한다.
1996년부터 대통령이 주력한 일은 경제구조를 개혁하여 경제발전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과 남북관계의 근본적 개선을 위한 노력이었다. 우선 재벌경제를 올바로 감독하기 위하여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장관급으로 승격시켰다.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하여 중소기업청을, 해양입국과 수산업 발전을 위하여 해양수산부를 각각 신설하였으며, 국제적으로는 선진국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다음으로, 고질적 노사문제 해결을 위하여 대통령 직속의 노사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정 대표들과 최고의 학계인사들을 위원으로 선정했다. 대결과 투쟁의 노사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합리적 노사관계로 만들기 위하여 1년 가까이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대통령은 시일이 걸리더라도 노·사·정 간에 완전한 합의를 이루라고 수차 지시하였는데, 마지막까지 정리해고·변형근로제의 도입과 복수노조의 인정 문제등은 합의가 잘 되지 아니하였다. 끝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정부에 넘겨 정부안을 만들어 국회에 상정하여 여야의 토론과 여론의 평가를 받아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 씨의 야당은 사용자 편도 들 수 없고 노동자 편도 들 수 없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아무런 대안도 만들지 않은 채 노동법개정안의 국회 상정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여 국회의장을 공관에 감금하는 등 원천봉쇄를 하였다.
12월 25일 박세일 수석이 나한테 "당정이 합의하여 정부안에다가 복수노조는 금지하고 정리해고제를 3년간 유예하는 등 몇 가지 변경을 가하여 전격 통과시킨다는 정보가 있는데, 실장이 좀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나는 "오늘은 크리스마스 휴일인데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나. 내일 알아보자"고 하였다. 그 다음날인 26일 새벽 5시에 이원종 정무수석이 지금 막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보고해왔다. 나는 새벽 5시면 야당의원들에게도 의사일정을 통지하였느냐고 물었더니, 통지와 동시에 통과시켰다는 것이었다. 의회주의를 존중하는 문민정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대통령이나 비서실장도 모르는 가운데 변칙통과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내부적으로 인책문제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언론에서 국회의 변칙통과에 대하여 별다른 비난이 없었고, 노동계에서도 특별한 반대 투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얼마 후 김 대통령을 위기로 몰아간다.
김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에 주력하였던 또 하나의 중요한 경제개혁은 금융개혁이었다. 금융개혁 없이는 건강한 경제체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청와대와 정부는 관련 금융관계법 개정안을 신중히 마련하여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뜨거운 감자인 금융개혁법안을 아예 안건으로 상정하지도 않고, 국회를 폐회하고 말았다.
노사 개혁과 금융 개혁 문제만 정치권의 협력으로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1997년 말의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는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IMF 사태 발생 후, 정치권과 김대중 대통령 정부가 경제구조개선을 위하여 취한 조치들이 모두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마련한 노사개혁과 금융개혁안을 그대로 시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3> 대통령비서실장 시절(3)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3> 대통령비서실장 시절(3)
YS, 클린턴과 남-북-미-중 4자회담 이끌어내
세계 언론 "한반도 긴장완화 위한 획기적 제안"
1996년 한총련 사태 엄정한 법 집행으로 해결
잊을 수 없는 일들
|
|
|
|
김광일 변호사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재직하던 1996년 4월 16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 내외가 제주 신라호텔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내외의 한국방문을 환영하며 인사말을 나누고 있다. 이날 두 정상은 단독회담을 갖고 한반도 4자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국제신문 자료사진 |
|
1996년 4월 16일 제주도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수립을 위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 회담을 공동으로 제의했다. 북한은 1994년 미·북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제1차 핵개발 위기와 식량지원 도중 드러낸 배신행위, 그리고 1996년 초의 일방적 정전협정 불준수 선언 및 비무장지대 내의 무력시위 등을 통해 대남적화통일전략에 아무런 변함이 없고, 오직 식량난과 경제적 곤경의 해소를 위해 화해 또는 협박의 몸짓을 번갈아 하면서 남북의 근본문제를 미국과만 직접 협상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끊임없이 식량지원과 경제지원을 여러 통로로 간청해왔다. 김 대통령은 관계당국 간의 기본적 평화협정체결을 통해 평화공존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모든 문제는 공식회담에서 거론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보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한·미 두 정상의 4자 회담 공동 제의였다.
세계의 언론들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제안이라고 찬양했다. 김 대통령은 경제지원 요청에 대하여는 북한이 회담에 응하기만 하면 지원문제는 별도로 협의하여 처리하겠다며 회담 참가를 촉구했으나, 북한은 참가를 미루다 1997년 연말 제1차 예비회담에만 응했다. 이듬해 정권이 바뀌면서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대해 일방적 퍼주기를 하던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한 번 가졌을 뿐, 4자 회담 제의는 묵살했다. 김대중 씨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김정일에게 준 4억5000만 달러는 김정일의 체제유지비와 핵무기 개발자금으로 쓰여졌고, 그 대가는 개인적 노벨평화상이었다.
1996년 8월에 한총련사태가 일어났다. 한총련의 이른바 '96범청학련통일대축전' 행사와 관련한 폭력 시위 및 연세대 불법점거 농성사태는 8월 12일~ 20일 9일간 계속됐다. 한총련은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인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을 추종하는 NL 주사파계열이 지도부를 장악함으로써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연방제통일'을 목표로 미국과 정권 타도를 위한 결정적이고도 직접적인 행동은 인민의 무장봉기밖에 없다는 전략전술지침을 채택했다. 한총련의 '투쟁선봉대'는 도시게릴라식 특수훈련을 받고 쇠파이프와 화염병, 그리고 돌을 사전에 준비해 복면을 쓰고 학원가의 폭력시위를 선도했다.
그러한 한총련이 8월 13~ 15일 3일간 연세대에서 8·15 통일대축전을 강행하였다. 집결하는 과정에서 한총련시위대는 경찰차량의 파괴·방화, 경찰관에 대한 폭행과 납치, 대로의 점거와 교통마비 등을 거침없이 감행했고, 경찰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었다. 8월 12일부터 연세대를 포위한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를 염려해 더 이상의 진압을 하지 않았다. 나는 8월 15일, 16일 밤 두 차례에 걸쳐 연세대 외곽 현장을 둘러 보고, 경찰청에도 들러 상황을 파악한 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관계관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점거 농성중인 학생들에게 먼저 자수를 권유, 불응하면 전원체포키로 방침을 정했다.
그 방침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이수성 총리가 나타나 강제진압 과정에서 인명피해라도 나는 경우 김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불명예가 될 것이니 포위망을 일부 풀어서 슬그머니 빠져 나가도록 하여 해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하였다. 이 총리의 말에 솔깃한 태도를 보이는 대통령에게 나는 "민주주의 정부일수록 공권력은 강력하고 범법자는 엄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폭력불법시위에 대하여 공권력을 엄정하게 행사하지 않으면 법질서는 파괴되고, 대통령의 권위는 실추되어 더이상 통치행위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대통령은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이틀 연속 대통령에게 공권력의 엄정 집행을 강조했다. 드디어 8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경찰의 강제 진압이 실시되었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종합관 건물은 불타고, 학교의 기자재는 파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경 1명이 학생들이 던진 벽돌에 맞아 사망했고 864명의 경찰관이 중경상을 입었고, 수십억 원의 재물피해가 있었다. 시위자들은 총 6095명이 연행돼 550명이 구속되었다.
다음날 나의 건의에 따라 대통령은 병원 방문과 연세대 현장 점검을 하였다. 이때부터 공권력과 법질서는 되살아났고, 한총련의 기세는 꺾였으며 학원은 정상화되었다. |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4>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4) |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4>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4)
한보사태로 YS 위기 - 비서실장직 사퇴로 돌파구
삼성자동차 공장 허가 민주공원 건설 등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 올바로 평가해야
|
|
|
|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부산민주공원 건설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9년 10월 부산민주공원 준공식 당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현직 대통령으로 참여해 악수를 하고 있다. 국제신문 자료사진 |
|
1997년 1월초, 2년 만에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이 이루어졌다. 그 전해인 1996년에도 연두기자회견을 준비하였으나 취임 초부터 제기되어 온 대선자금 의혹에 관한 불씨가 되살아날 것을 염려한 일부 참모의 잘못된 건의로 담화문 발표로 대치되고, 기자회견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1997년의 연두기자회견은 대통령의 기본 연설도 좋았고, 다른 질문에 대한 답변도 좋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통령의 답변이 너무 고압적이고 독선적이라 하여 국민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 전해 연말에 변칙 통과된 노동법 개정을 재론할 생각이 없고, 정국 현안에 대한 여야영수회담을 거절하며, 연말에 있을 대통령후보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답변하였던 것이다.
노동법 개정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불법시위자들에 대한 체포와 수배 등 강경조치로 맞섰고, 정국현안에 대한 여야의 관계는 경색되었다. 참모들은 나름대로 그 해법에 관한 건의를 하였으나, 대통령은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이 나에게 대통령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문민정부와 김 대통령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평소에 선의의 충고와 건의를 해왔던 김 추기경이 나라의 위기 해소를 위하여 나선 것이다. 두 시간에 걸쳐 단독 대화를 하고 나오는 김 추기경의 모습은 대통령을 설득하느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얼굴은 창백하였고, 입가에는 거품까지 묻어 있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나에게 대통령은 즉각 여야영수회담을 가지고 모든 현안을 논의하겠다고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김 추기경의 설득이 주효한 것을 반기면서 나는 개신교와 불교의 지도자들도 만난 후에 발표를 하도록 건의했다. 대통령이 특정 종교지도자만을 만난 후 태도가 돌변한 것으로 되면 다른 종교계가 반발할 수도 있고, 대통령의 결정이 경솔하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개신교와 불교 지도자를 잇달아 만나고 나서 바로 여야 영수회담을 가졌다. 대통령은 변칙 통과된 노동법 개정을 백지화할 것과 시위자들에 대한 체포와 수배를 취소할 것과 모든 정치 현안은 야당의 의견을 존중하여 적법하게 처리할 것을 합의하여 발표함으로써 위기는 해소되었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다소 회복되었다.
그것도 잠깐뿐이었고, 잇달아 터진 한보사태는 대통령을 더 큰 위기로 몰았고, 분노한 국민 여론을 달랠 길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 취임 4주년 기념사를 통하여 그동안 국민의 비판을 받았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더욱 겸손하고 솔직한 대국민사과와 함께 남은 임기 1년을 새로운 각오로 국정에 임하기 위한 인사 쇄신을 단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민심의 소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국내 주요언론의 중진들에게 기념사에 실을 내용에 관하여 자문을 하기로 하였다. 두세 사람에게 만약 당신이 이 시점에 대통령으로서 취임 4주년 기념사를 한다면 어떤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 것인지 원고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그들이 작성해 준 원고의 내용을 기념사에 최대한 반영하였다.
그렇게 하여 발표된 대통령의 취임 4주년 기념사가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서 여론이 많이 좋아졌다. 바로 그 다음날 나는 기념사에서 말한 대로 인사 쇄신을 실효성 있게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최측근, 최고위 보좌책임자인 비서실장부터 경질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건의드렸다. 대통령은 임기말까지 함께 하자고 몇 번이나 만류하였으나, 나는 그해 2월 말에 비서실장직을 사임하였다.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한다. 다만, 부산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다. 김 대통령은 부산의 산업 발전을 위하여 삼성자동차공장을 허가하였고, 부산신항의 개발과 선물시장의 설치를 위하여 특별히 노력하였으며, 도시기반시설이 취약한 부산을 위하여 2002년 월드컵 유치와 함께 2002년 아시안게임을 부산에 유치함으로써 사전에 도시기반시설을 확장하고 강화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비 80억 원과 부산시비(문정수 시장) 80억 원을 지원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세계에 유례가 없는 민주공원이 건설된 것은 오로지 김영삼 대통령 덕택이다.
전·현직 대통령이 함께 참석한 1999년 10월의 준공식에서 민주공원조성추진위원장인 송기인 신부가 경과보고를 하면서 민주공원 건설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현직 김대중 대통령의 배려로 민주공원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고하면서, 막상 절대적인 공헌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에 관하여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랜 민주화의 동지이던 송기인 신부를 바로 보지 않는다. 그 송 신부가 오늘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이다.
|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5> 대통령 정치특보 시절
김광일 변호사의 민주화, 그리고 문민정부 <15> 대통령 정치특보 시절
여당 후보가 대통령 공격…대선 패배의 길로
이인제·박찬종 탈당 만류
독자정당 만들어 여권 표 분산
YS·이회창 화해 주선
이씨 측 거부로 끝내 무산
잊을 수 없는 일들
|
|
|
|
김광일 변호사는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이 한창이던 1997년 5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 정치특보를 맡아 공정한 경선관리를 위해 노력했다. 사진은 신한국당 상임고문단 회의에 앞서 이회창 대표(사진 왼쪽)가 박찬종 상임고문과 악수를 하는 장면. |
|
1997년 5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난 나를 그 전해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 당시 빠졌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파나마 도미니카 등 4개국 대통령특사로 임명하여 그 네 나라의 정상들을 만나 외교활동을 하게 하였다. 6월에는 대통령정치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퇴임시까지 상근하면서 대통령을 다시 보좌하게 하였다.
나는 정치특보로서 대통령의 중요한 정치문제를 보좌하고, 대통령이 명하는 특별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최대의 정치문제는 차기 대통령선거였다. 내가 정치특보가 되어 당면한 첫 임무는 신한국당의 경선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른바 '9룡'으로 불리는 신한국당 경선주자 9명을 모두 개별적으로 만나 그들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싶은 말들을 들었다. 이회창 후보는 민주계의 독자경선기구인 '정발협'을 해체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후보들은 이회창 후보의 당대표 겸직을 해제해 달라는 것이 공통된 건의사항이었다. 그들의 건의대로 대통령은 이회창 씨로 하여금 당대표를 사임하게 하고, 민주계로 하여금 정발협을 해산하게 했다.
경선에서 이회창 씨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회창 씨에 대한 당 안팎의 지지도는 높았고, 김 대통령도 흡족해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이 후보의 두 아들에 대한 병역문제가 불거지면서 국민의 지지는 급속히 하락, 야당후보의 지지율을 밑돌게 되었다. 게다가 이 후보의 경선 패배자들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 박찬종 이인제 등 경선 경쟁자들이 당을 떠날 조짐을 보였다.
나는 이인제 씨를 만나 민주적 절차의 경선에서 패배했다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해야지 탈당하거나 따로 독자후보가 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로 정치적인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충고했다. 박찬종 씨에 대하여는 정치적 변신을 거듭해 온 박 의원이 이번에 신한국당에 뼈를 묻겠다고 약속하면서 입당하였으니, 당에 남아 최대한 이 후보를 도우라. 그가 당선되면 일등공신이 되는 것이고, 만약 낙선하더라도 박 의원이 다음에 당을 이끌어갈 유력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간곡하게 권고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인지 갑자기 당 총재직을 이 후보에게 물려주었다. 후보 교체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판단한 이인제 씨는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박찬종 씨는 이인제 진영에 합류했다.
결과는 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었고, 이인제와 박찬종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정치적 표류를 계속하고 있다. 당시 대통령 선거일이 가까워지는데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올라가지 않았다. 특히 김 대통령을 지지해왔던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의 마음이 혹시 이인제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헷갈려 하였으나, 대통령은 그 점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도 표명하지 않았다.
신한국당은 야당후보인 김대중 씨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수십개의 비자금계좌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여 검찰에 고발하였다. 검찰수사를 회심의 승부수로 기대하고 있던 이 후보는 돌연 검찰이 수사중단을 선언하자 이는 김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에 격분한 나머지 김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였고, 이에 격노한 김 대통령은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그때부터 이 후보는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고 야당후보보다는 김영삼 대통령을 공격하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심지어는 김 대통령의 형상을 만들어 몽둥이로 내려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김 대통령과 이 후보간 갈등과 반목은 점차 심화되었다. 나는 김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더라도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와 적대관계에 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념이 다른 야당후보에게 반사적 이익을 주고, 여당 성향의 표를 분산시킬 우려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총재로서 지명한 대통령 후보를 심정적으로라도 지원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이고, 또한 원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여당의 정치세력을 잃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거막판에 김 대통령과 이 후보 간 화해의 자리를 은밀하게 만들었으나 이 후보가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선거운동 마지막날 김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부산에서 김 대통령을 공격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김 대통령 지지성향의 표들이 이인제에게 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김 대통령은 철저하게 엄정중립이었으니 선거관리는 공정하기 짝이 없었다. 선거결과는 이인제가 490여만 표를 얻었고, 이회창은 990여만 표를 얻어 1030여만 표를 얻은 김대중에게 불과 40여만 표 차로 패배하였다. 그 이후 김대중·노무현 코드의 정치가 10여년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5회에 걸친 나의 글을 마치면서, 대통령의 자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첫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고, 그 실천의지가 강력하여야 하며, 둘째 건전한 상식에 입각한 품격높은 언행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자신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여야 한다.
-끝-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