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예의를 알던 사람 | |||||||||||||||||||
김대중과 책/김대중 전 대통령은 소문난 애서가였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사 모았다. 그는 또 꼼꼼쟁이 필자이기도 했다. 원고 교정을 막바지까지 직접 챙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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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얘깃거리를 많이 남긴 대통령도 드물다. 김 전 대통령은 광복 이후 정치인 중 책을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은 책을 썼으며, 가장 많은 장서를 간직한 ‘3다(多)’ 기록의 보유자이다. 1993년에는 한국애서가협회가 주는 ‘애서가상’을 받은 일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독서 습관이 학력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목포상고를 수석으로 입학한 재목임에도 불구하고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가슴속에 늘 ‘배움에 대한 갈망과 대학에 대한 한’이 있었고(<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이를 떨치기 위해 더 악착같이 책을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삼상지학(三上之學). 곧 말 위(馬上)와 베개 위(枕上)와 화장실(厠上)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 평생을 따라다닌 그의 생활 신조였다.
김 전 대통령의 독서가 더 풍부해지고 깊어진 것은 감옥 생활을 통해서였다. 특히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생활하던 기간(1981~1983년)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적 행복의 나날’이었다. 이 기간 그는 철학 신학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다방면의 책을 동서양에 걸쳐 두루 읽으며 사상의 폭을 넓혀갔다. 일생 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으로 꼽은 <역사의 연구>(아널드 토인비 지음)를 읽은 것도 이때였다. 야당 총재나 대통령 시절 분주한 일상에 쫓길 때면 ‘감옥에라도 다시 갔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푸념 아닌 푸념이었다. 책 읽을 시간이 없음을 그만큼 아쉬워한 것이었다. 오늘날 공공도서관 네트워크에서 ‘정치인 김대중’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는 책은 80권가량이다. 이들 DJ 관련 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책과 남이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쓴 책이다. 남이 쓴 책은 또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DJ의 생애나 말글을 기록한 책이 그 첫째로 <김대중 수난사-인동초의 새벽>(김진배 지음),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일본 NHK 다큐멘터리팀 구성)가 이 분야 대표작으로 꼽힌다. 두 번째는 이른바 ‘김대중 죽이기’를 시도한 책이다. 이 책들은 DJ를 음해하려는 군사정권의 사주에 의해 쓰였다는 의혹을 받곤 했다. 이 부류 원조로는 1986년 경향신문사 출판국 이름으로 발행된 <김대중 정치방황 30년>이 꼽히는데, 그 뒤로도 <동교동 24시>(함윤식 지음), <김대중 X파일>(손충무 지음) 등이 풍파를 일으켰다(74~76쪽 ‘DJ 죽이기’ 기사 참조). 세 번째는 ‘김대중’이라는 코드로 한국 사회를 읽어낸 저작들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지식인 사회를 달궜던 ‘김대중 담론’은 선거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72쪽 상자 기사 참조).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책은 40권 남짓한데, 현재는 거의 절판된 상태이다. 기록에 따르면 DJ가 쓴 최초의 단행본은 1967년 숭문각에서 발행한 <분노의 메아리>라고 한다. 국회도서관 등에서 열람할 수 있는 이 책에는 ‘김대중 의원 국회연설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정치인 초년병 시절 DJ의 맨얼굴을 엿볼 수 있는 희귀한 사료인 셈이다. 이 책 서문을 쓴 박순천 여사는 DJ에 대해 “그는 지금 우리 정계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정치인이다”라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쓰던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용어가 이 책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 뒤 <내가 걷는 70년대> <대중경제 100문 100답> 등이 나왔는데, 이는 1970년 그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대권을 향한 비전을 선포한 책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책에서 ‘대중정치’ ‘대중경제’ ‘대중사회’를 골자로 하는 그의 대중민주체제론이 본격 제시된다. 1980년대에 나온 책은 대부분 군사정권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는 와중에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옥중서신> <행동하는 양심으로> <평화를 위하여> 등이 감옥 또는 해외 망명지에서 쓰였다. 김 전 대통령이 다시금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인 것은 1993년 14대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하면서였다. 당시 정치와 결별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날아가 은둔하던 DJ를 맨 처음 찾아간 출판인이 김영사 박은주 사장이었다. 박 사장은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는 자연인으로서 진솔하게 지난날의 체험을 정리해달라”며 DJ를 집요하게 설득했고, DJ는 결국 집필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인 김대중’이 아닌 ‘자연인 김대중’으로서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은 최초 대중 에세이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는 이렇게 탄생했다.
필자로서의 DJ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한마디로 ‘까다롭고 꼼꼼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DJ의 책을 내기까지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한길사 곽명호 이사는 말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완벽주의자였다. 김영사에서 첫 에세이를 쓰기로 한 뒤 김 전 대통령은 “책 쓰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푸념하곤 했다고 한다. 때로는 “박 사장이 원망스럽다”라고도 했다. 전문 서적을 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길 나의 사상> 출판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는 김삼웅씨는 DJ의 철저함과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 책에는 특히 DJ가 강만길 교수(고려대)와 6시간 30분에 걸쳐 나눈 대담이 실려 있는데, 이 대담에 앞서 DJ가 대학노트 12장 분량의 메모를 준비해왔더라는 것이다. 빨간펜 글씨로 가득했던 DJ의 교정지 초고를 넘겼다고 끝이 아니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의 에세이집 <나의 삶 나의 길>과 경제서 <대중참여경제론>을 잇달아 펴낸 도서출판 산하 대표 소병훈씨는, 선거가 임박했는데도 DJ가 ‘원고 OK’를 내주지 않아 애를 태웠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교정지를 빽빽하게 채운 빨간펜 글씨가 DJ 글씨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5고까지 퇴고를 거듭하던 중 확인해보니 DJ 자신이 직접 교정을 본 것이었다”라고 소 대표는 말했다. 그 결과 출판사는 선거를 앞둔 대목인데도 책 광고를 한두 번밖에 집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거운동 기간이 곧바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최종본 단계에서 DJ는 직접 표지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소병훈 대표에 따르면, DJ는 <대중참여경제론> 표지에 고풍스러운 건물 사진이 배경으로 깔린 것을 보고 “기왕이면 하버드 대학에도 비슷한 느낌의 건물이 있으니 그 건물 사진을 쓰면 더 좋을 것 같다”라고 했다고 한다(<대중경제론>의 개정 증보판이라 할 수 있는 <대중참여경제론>은 1985년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본으로 먼저 출간됐다). 소 대표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DJ가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책을 만드는 데도 대단한 예의를 차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출판사 대표쯤이야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일반 정치인과 달리 출판기념회에서 자신을 상석에 앉히고 발언 기회까지 준 사람이 DJ였다는 것이다. <대중경제론>과 <대중참여경제론>은 최근 대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등은 <대중경제론>이 경제학자인 고 박현채 교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직접 해명한 일은 없다. 그렇지만 소 대표는 “DJ가 박 교수와 공동 작업을 했을지언정 박 교수가 이를 완전 대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DJ의 완벽주의 성향상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자기 이름으로 그냥 나가게끔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DJ 관련 책이 절판됐다고 아쉬워할 것은 없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가면 DJ의 손때가 묻은 책을 볼 수 있다. 출판사들은 앞다투어 DJ 관련 서적을 재출간하는 중이다. ‘김대중 자서전 편찬위원회’가 2006년부터 준비해온 <김대중 자서전>도 조만간 출간된다. 그는 갔지만 책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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