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통수의 꿈 中에서>
“옳은 길을 걷는 자가 승리한다”
‘가지 않는 길’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다. 시를 보면 두 가지 길이 나온다.
하나는 사람이 많이 다녀 잘 닦인 길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바위나 벼랑 등 위험 요소가 많은 길이다.
시인은 다니지 않은 길에 애정을 보인다.
정도는 쉬운 길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도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끈기 있게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기업도 ‘정도경영’이란 말을 쓴다.
경영의 원칙대로 장애물을 제거하며 밀고 나가는 경영방식을 이르는 말이다.
원칙을 무시하고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간혹 요행수가 있기도 하지만 얕은꾀는 금세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정치에서 요행수는 통하지 않는다. 어려운 길도 자청해야 한다.
정도로 승부하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대선 후보는 정도로 갔다.
항상 정면 돌파로 장애물을 해결해 나갔다.
그는 경선을 치르고 나서도 장애물 경주를 해야 했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대선의 고지를 향해 나갔다.
불요불굴의 의지가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월드컵에서 4강 신회를 이룩하자 정몽준 의원의 인기가 올라갔다.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는 후보를 교체하자는 여론이 비등했다.
뿐만 아니었다. 후보 문제를 빙자해서 당을 탈퇴하는 의원도 나왔다.
한마디로 ‘혼란의 소용돌이’였다.
이 와중에도 대선은 점점 다가오고 이었다.
나는 노무현 후보 대선 캠프의 기획실장을 맡았다.
새천년민주당 당사에 있으면 혼란만 가중 될 것 같았다.
나는 당사 옆에 사무실을 얻어 기획팀을 운영해 나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혼자 사무실에서 앉아 대선 전략을 짜나갔다.
내가 중점을 둔 것은 두 가지 였다.
첫째, 토론에 대비해 후보가 공부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한다.
둘째, 미디어 시대에 맞는 홍보 전략이 중요하다.
나는 홍보 전략을 짤 유능한 기획자를 찾기로 했다.
이전부터 광고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을 몇몇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찾아간 사람은 광고계의 몇 안 되는 베테랑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는 회사 일이 바쁘다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다른 사람을 찾았다. 그는 맥주 광고로 히트를 쳤다.
광고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카피라이터였다.
돈도 없이 그냥 도와달라기엔 염치가 없었다.
그래도 부탁이나 해보자고 찾아간 것이었다.
내가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처음에 그는 거절했다.
나는 그치지 않고 찾아다녔다. 어느 토요일 오후2시에 약속을 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의자에 앉아 짐깐 졸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깜짝 놀라 깨어보니 2시 반이었다.
1시간 이상 정신없이 잤던 것이다. 깨어나서 도 한번 놀랐다.
그는 약속대로 오후2시 정각에 왔고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형! 내가 너무 피곤해서 졸았군요. 진작 왔으면 나를 깨우지 않고.”
나는 오래 전부터 그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를 스스럼없이 ‘형’이라고 불렀다.
“너무 피곤해 보여서 더 자라고 놔뒀어.”
그는 빙그레 웃었다.
“형! 나 노 의원 보좌관으로 15년간 고생했다. 고생 좀 그만하게 해줘요!”
그는 “생각해 보자”라며 뜸을 들였다. ‘실패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전화가 왔다. 그는 말했다.
논리를 동원해서 부탁했으면 안 했을 텐데 인간적으로 부탁했으니 도와주겠노라고.
다음 날부터 그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수억 원대의 연봉도 포기하고 노무현 캠프의 대선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홍보 전략을 검토했다.
우리는 한나라당의 홍보 방안을 대충 예상해보았다.
첫째, 초호화 연예인과 고급 영상물을 동원하여 물량공세로 나갈 것이다.
둘째, 불안을 조성하여 흑색선전을 하는 등 네거티브 전략으로 나올 것이다.
셋째. 선거전에 많은 소품들이 쓰이게 될 것이다.
이런 예상을 토대로 우리의 대응책을 세웠다.
첫째, 연예인들보다는 노무현 후보를 직접 내세웠다.
둘째, 포지티브 전략으로 나간다.
셋째, 논리가 아니라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한다.
첫 광고로 ‘노무현의 눈물’편이 나갔다. 공전의 히트였다.
두 번째 광고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개인이 만든 것인데 10원도 안 받고 무료로 해주었다.
세 번째는 ‘기타를 치는 노무현’이다. 1천만 원의 제작비가 들어갔다.
중년층 여성들에게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네 번째는 박재동 화백의 미화원 만화 광고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이회창 후보, 수고 하셨습니다’ 란 광고였다.
상대 후보를 배려하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또 인구에 회자되는 카피를 내놓았다.
‘국민 대통령입니다.’
이 카피는 국민과 노무현 후보의 이미지를 직렬로 연결했다.
서민적 대통령이란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정몽준 씨와의 단일화 문제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7월부터 단일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후보가 경선으로 하자고 제의하자 정몽준 씨는 즉각 거부했다.
수정안으로 나온 것이 여론조사였다.
양측이 전격으로 수용했다. 단일화 문제는 급진전했다.
합의에 따라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결과를 발표하게 되었다.
나는 노무현 후보에게 졌을 때와 이겼을 때의 멘트를 생각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는 졌을 때는 ‘깨끗하게 승복하겠다’ 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이겼을 때의 멘트는 생략했다.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단일화가 확정되었을 때, 노무현 후보는 자고 있었다.
내가 깨워 후보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당사로 직행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 명동 유세가 끝났다. 막 회의를 하려고 할 때였다.
정몽준 씨의 단일화 철회 소식이 날아들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선거였다.
TV에 정몽준 씨의 단일화 철회 뉴스가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날 밤 11시부터 그 이튿날 12시까지 2천 5백만 회의 전화 통화가 폭주했다.
이것이 단일화 철회와 노무현 지지를 전하는 통화였으리라.
마침내 투표일 아침, 다른 때보다 훨씬 일찍 당사에 나갔다.
북적대던 당사가 썰렁했다. 인심이란 이런 것인가······.
참모진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노무현을 살리자, 투표를 하자’ 라는 쪽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투표를 하고 선영으로 내려가는 노무현 후보를 배웅했다.
나는 제주도로 갔고 삼방사 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 박복한 분을 도와주십시오. 인간으로서 할 노력은 다 했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나는 빌었다. 마지막으로 빌고 또 빌었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왔다.
여의도 맨하탄 호텔로 가서 노무현 후보를 만나 것은 저녁 7시 30분이었다.
이미 출구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이겼다.
그러나 개표 초반에는 이회창 후보가 앞서고 있었다.
역전은 뒤에 이뤄졌다. 당선이 확실시될 즈음, 노무현 당사로 갔다.
나는 혼자 구기동 집으로 돌아와 잠에 빠져들었다.
노무현 후보는 선거전에서 편법을 쓰지 않았다.
정도를 지켰다. 그리고 이겼다. 정도가 지름길이었다.
다음 날 아침, TV를 보니 노 후보는 당선자가 되어 있었다.
나의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가 완성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