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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독서가의 책 읽는 이유
 



지난 한 해 동안 몇 권의 책을 읽으셨습니까? 올해 독서량 목표치는 잡으셨나요?

지난해 한국출판연구소가 발표한 국민독서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25%는 1년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1인당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이 채 안되는 연 11.9권. 경제위기의 여파로 휘청거린 지난해의 출판 시장을 한 출판사 대표는 '우 생 불-우리 생애 최고의 불황'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읽는 사람은 없고, 만드는 사람들은 쓰러져 가는데. 새해가 되자 각종 언론매체와 사회 유명인사들은 입을 맞춘 듯 '책' 이야기를 꺼냅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 책 읽는 국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든다, 독서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책보다 위대한 스승은 없다...

속은 비고 껍질만 남은 듯한-실제로 읽는 사람은 적은데 독서의 미덕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책 예찬론'을 듣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왜 그토록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독서를 해야 하는, 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뭘까.

사회,문화적으로 권장되고 있는 행위이며 모두가 그 가치를 당연시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당신은 책을 읽어야 하는 '나만의 이유'를 갖고 있습니까?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책 속에 담긴 이치와 취지를 잘 맛보게 되니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흘러 들어와 몸이 진정되고 추위도 잊을 수 있게 된다.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은 글자와 함께 하나가 되고 마음은 이치와 더불어 모이게 되니, 천만 가지 근심이 사라져버린다.
기침이 심할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을 뚫어 막히는 것이 없게 되니 기침이 순식간에 그쳐 버린다."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癡, 책만 보는 바보)’라 칭한 조선 후기의 독서가 이덕무(1741~1793)가 제시한, 책을 읽는 이유들입니다.

당시의 선비들에게 독서는 관료가 되기 위한 수단, 즉 고시 합격을 위한 학습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서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반쪽짜리 양반'이라는 그림자 때문에 관료로서의 출세길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던 이덕무에게 책과 학문은 명예와 출세를 위한 도구가 아닌, 오롯이 '즐김'의 의미였습니다.

독서를 하는 동안에는 '서파(庶派, 서자 집안 출신을 차별하여 일컫는 말)'라는 자신의 처지도, 가난한 집안 살림에 대한 고민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 서파들은 문관으로 나갈 벼슬길도 막혀 있었지만, 농사 지을 땅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장에 좌판을 벌여 장사꾼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양반들은 평민의 피가 섞였다며 차별을 하고, 평민들은 양반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서파를 멀리했습니다. 그래도 양반 쪽에 가깝고 싶다는 미련 때문에 선뜻 서민의 삶으로 뛰어들 수 없었던 탓도 있겠지요.

이덕무는 같은 서자 집안 출신의 박제가, 유득공과 함께 연암 박지원의 제자로서 실학을 연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정조 때 서얼들에게도 제한적으로나마 벼슬길이 열리게 되어, 서른아홉의 나이로 규장각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는 그저 '책 읽는 백수'였던 셈입니다. 아내의 삮바느질로 겨우 온가족이 죽을 끓여먹거나, 끼니를 건너뛰기 일쑤였지요.

현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삶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로지 '책'으로만 이루어진 그의 삶의 기록들은,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이덕무의 저서 ‘사소절(士小節·위)’과 ‘아정유고(雅亭遺稿)’의 본문.

"...스무 살 무렵, 내가 살던 집은 몹시 작고 내가 쓰던 방은 더욱 작았다. 그래도 동쪽, 남쪽,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오래도록 넉넉하게 해가 들었다. 어려운 살림에 등잔 기름 걱정을 덜해도 되니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온종일 그 방 안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상을 옮겨 가며 책을 보았다. 동쪽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어느새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면 펼쳐 놓은 책장에는 설핏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책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면 얼른 남쪽 창가로 책상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 다시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책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었다. 날이 저물어 갈 때면, 해님도 아쉬운지 서쪽 창가에서 오래오래 햇살을 길게 비껴 주었다..."

"내 집안에 있는 물건 중 가장 좋은 것은 다만 <맹자> 7편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돈 2백 닢에 팔아 버렸네. 밥을 배불리 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유득공)의 집으로 달려가 크게 자랑했네.
그런데 영재 역시 오랫동안 굶주린 터라, 내 말을 듣더니 그 즉시 <춘추좌씨전>을 팔아 버렸네. 그리고 술을 사와 서로 나누어 마셨는데, 이것은 맹자가 손수 밥을 지어서 내게 먹이고, 좌구명(<춘추좌씨전>의 저자)이 친히 술을 따라서 내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이덕무, '청장관전서' 이낙서에게 주는 편지(與李洛瑞書)>

"이덕무는 두보(杜甫)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해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병자의 앓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깨치면 기쁜 나머지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곤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혹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한 겨울에도 장작을 떌 수 없어 냉방에서 기침만 하다가,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올려덮고, '논어'를 병풍처럼 쌓아 바람을 막고 겨우 잠이 들었다는 이덕무.

"남산 아래 바보가 살았다. 눌변이라 말을 잘하지 못했고, 성격이 졸렬하여 세상일을 알지 못했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더욱 몰랐다. 남들이 욕을 해도 따지지 않고, 칭찬해도 뻐기지 않았고, 오직 책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도 더위도 주림도 아픈 줄도 아주 몰랐다."라는 그의 자기 소개에는 모든 욕심을 버린 선비의 청렴함이 묻어납니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지식인, 독서가로서 그의 명성은 장안에 자자했습니다. 양반 장서가들은 그가 책을 빌리러 오는 것을 내치지 않아고,  "이덕무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라면 어찌 책구실을 하겠는가"라면서 먼저 빌려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덕무가 검서관으로 일했던 서울 창덕궁 내 규장각 건물인 주합루.

이렇게 책에만 매달려 살아온 그의 인생이 책으로 보답받을 일이 생겼으니, 정조 3년인 1779년 이덕무는 절친한 친구인 유득공,박제가와 더불어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됩니다.

이 세 사람과 서리수 등 서얼 출신으로 처음 규장각에 진출한 4명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 불리며 조선의 사상계를 주도해 나가게 됩니다. 비록 5∼9품에 해당하는 중하위 직급이었지만, 이들은 오랜 독서로 지식을 쌓아왔으며 이미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검서관은 독서를 일생의 낙으로 여겨온 이덕무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직업이었지요. 낮에는 서고에 쌓인 책을 정리하고 새로운 책을 만들거나 교정하는 일로 바빴으며, 밤에는 좋아하는 책을 읽느라 늦게 잠들곤 했습니다. 

1793년 1월 25일 쉰셋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규장각과 책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올해 몇 권의 책을 읽을지 고민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TV를 끄고 책을 읽으라고 소리치기 전에. 왜 책을 읽어야 하고, 독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가만히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출처 : Tong - 폭설님의 도서박물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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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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