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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2월 1일, 목요일이었습니다.

미국 앨라배마 주의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여성이
퇴근길
버스에 올랐습니다.

잠시 후 비좁은 버스에 백인 승객이 오르자
버스 기사는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녀는 이를 거부했고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움직임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흑인 인권운동에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흑인에게 법적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870년이었지만,
흑인이 백인과 함께 버스를 타는 데는
그로부터 85년이 더 필요했고,
그 변화를 이끌어낸 힘은 바로 작은 '행동'이었습니다.

후에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여느 날과 똑같은 날이었지만
수많은
대중들의 참여가 그날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선거'는 바로 이런 '참여'의 상징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변화의 출발점에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시장선거는
부자 대 서민,
노인 대 젊은이,
강남강북의 대결이 아니고,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은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만은
이념과 정파의 벽을 넘어
누가 대립이 아닌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누구의 말이 진실한지,
또 누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 선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55년 전의 흑인여성 '로자 파크스'처럼,
우리가 '그날의 의미를 바꿔놓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거 참여야 말로
시민이 주인이 되는 길이며,
원칙이 편법과 특권을 이기는 길이며,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천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제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것이고
이른
아침 투표장에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해주시기를 간곡하게 청합니다.
감사합니다.

안철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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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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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지식인중의 하나!


가진 것 없어도, 그보다 더 가진것 없는 사람들을 더 희망차게, 살맛나게 만들어 주신 진정한 우리시대 리더! (시바 대통령보다 낫다)

봉사도 그냥 봉사가 아니라 시민들이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회적 디자이너! 박원순

그가 추천하는 도서는 내공의 산물이 되어 당신의 지적유희와 배경지식을 풍족하게 채워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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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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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 4인방


적진에 깊숙히 침투해서

혼자서 저 많은 독재정권 비호세력들을 날라서 상대하는 정봉주를 봐라!

부정부패에 찌들어서 지들끼리 해먹을꺼 다 돌려 해먹고는 점잖은척 하고 정의로운 척하는  人들을

날라서

제대로 박살내주는 진정한 홍길동이 아닌가?

일당백 정봉주! 짱이다~ 멋지다..

당신을 진정 "나는 꼼수다 4인방의 용사"로 인정합니다.






p.s. 써비쓰로 나경원의 초절정 엄살을 부록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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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님이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그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그의 책을 보는 것이 더 빠를지도...







그러나, 어버이연합은 또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아주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정권의 하수인들!
이명박이 집권초기에 만든 어버이 연합에서는 표적 시위를 한다. ㅋ


웃음이 절로 나와...
미래시대는 늙은이들의 시대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시대이다.
젊은이들의 뜻에 양보해주는 미덕도 함양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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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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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대통령 어록집

HERO 2011. 10. 14. 23:32

http://hrp2009.or.kr/ebook/netalbum.htm

해당 주소를 누르면 자동으로 책이 열립니다.

노무현이 꿈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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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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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대통령!

그나마

잘못한거보다 잘한게 많은 사람이지만,

그 잘못한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인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란다.

비겁함을 이용할줄 모르는 인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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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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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이 터졌다. 기존 정당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는 폭탄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가 출마할 가능성이 높단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할 결심을 굳혔단다. 한나라당은 희망이 없고, 야당은 대안이 될 수 없어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이란다.

자고나면 상황이 바뀌는 '다이내믹 코리아'이기에 추이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지만 그의 출마가 현실화 된다면 기존 정당에 미치는 여파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여야 후보에 안철수 교수가 가세하는 3파전 구도가 형성된다면 여야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안철수 교수가 높은 인지도와 합리주의적 면모를 앞세워 중도층을 대거 흡수할 뿐만 아니라 기존 정당 지지층까지 일부 확보할 경우 여야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입맛만 다시는 신세를 면치 못할 수도 있다.
▲ 안철수 교수. ⓒ연합

이것만이 아니다. 짚을 점이 더 있다. 안철수 교수의 당선을 전제로 할 경우 그가 이후에 선택할 길이다. 무소속 서울시장으로 시정에만 전념하는 경우와 시정 지원을받기 위해 기존 정당으로 들어가는 경우, 그리고 독자적으로 정당을 결성하는 경우다.

이 세 갈래 길 가운데 두 번째 길은 일찌감치 제외된다. 언론 보도대로 그가 한나라당은 희망이 없고 야당은 대안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리고 서울시장 보궐선거 과정에서도 그같이 주장한다면 기존 정당에 들어가는 건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안철수 교수가 무소속 시장으로 정치에 거리를 두고 시정에만 전념한다면 굳이 짚을 필요가 없다. 그의 존재와 그의 이후 거취가 내년 총선과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굳이 따질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다. 세 번째 길, 즉 독자적으로 정당을 결성하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

만에 하나 안철수 교수를 축으로 한 세력이 독자정당을 결성해 중도층을 흡수한다면 총선판과 대선판이 달라진다. 안철수 교수를 내세워 총선 표를 잠식한다면 여야 구도가 흐트러질 수 있다. 간판 격인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정에 묶여 대선후보로 나서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당의 힘으로 캐스팅 보트행사할 수도 있다. 특정 정당과 정책연합을 하는 형식으로 여야 대선 후보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물론 안철수 급 이상의 인물을 영입해 대선 후보로 내세우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일방적인 평인지도 모른다. 안철수 교수의 잠재력을 과대평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다. 1992년 대선부터 2007년 대선까지 제3후보는 늘 있었다. 1992년엔 정주영·박찬종이 있었고, 1997년엔 이인제가 있었으며, 2002년엔 후보단일화로 마지막에 주저앉긴 했지만 정몽준이 있었으며, 2007년엔 문국현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한 때 국민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여야의 기성 정치질서에 눌려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갈라서 볼 필요가 있다. 안철수 교수를 축으로 하는 사람들이 정당을 만든 뒤에 독자 후보 전략이 아니라 연합전략으로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 네 번의 대선에서 제3후보가 독자적으로 꿈을 이룬 적은 없지만 20% 안팎의 무시못할 득표율을 기록한 점(문국현의 경우는 예외다)을 감안하면 연합전략을 구사하고,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힘은 충분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제3후보 안철수 교수가 '반짝'이 아니라 '지속' 현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기존 정당이 안철수 교수를 검증대 위에 올려놓고 그의 바람을 뺄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존 정당이 각각 오세훈과 곽노현이라는 악재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대로 안철수 교수가 진짜 출마한다면 정치판과 선거판에 메가톤급 폭탄이 떨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인물이 정치를 해야한다.
위기에서
그리고,
난세에서
영웅은 출몰해왔다.
역사는 항상 그래왔다.
대한민국의 21세기를 변화시키고 진화시킬 최적의 인물이다.
그간 과거의 썪은 유물 정치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우리나라 정치수준을 이제 한단계 발전 시킬 젊고 유능한 인물이다.
문화, 경제, 사회, 스포츠, 예술, 관광, 의식은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졌으나,
정치는 아직도 제5공화국 수준이다.
아직도 독재, 음모가 만연하고, 비방, 속임이 난무하며, 비리와 분열의 연속이다!
2012년, 내년은 세계적으로 큰 변화와 변혁이 일어날수 있는 징조가 들어오는 해이다.
그것은 마야시대부터 예언되어져 왔다.
그리고, 앞으로 20~30년 후에는 대한민국이 세계의 리더가 되는 강대국 반열에 오를것이라, 여려 현자들이 말하기도 한다.
그말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러한 길로 가야하는 대한민국의 운명에서
그길을 인도할 인물은 과연 누가 될것인가?
가 안철수 였으면 정말 좋겠다.
그는 깨끗함, 겸손함, 순수함, 똑똑함을 두루 갖추고,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논리 그 자체이다!
물론, 인간이라서 실수와 실패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큰 죄악으로 보지 말았으면 한다.
행여, 나중에 안철수가 힘들때, 그때 유시민, 조국, 박경철 등이 등장해서 그를 도와줬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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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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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는 백 의원, 그는 처음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보도될 때만해도 사실을 믿지 않았다. 관련 기사들이 나올 때마다 '등산하다가 미끄러져 머리를 다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문재인 비서실장의 기자회견 내용을 공항에서 접하고서야 현실로 받아들였다.
백 의원은 "눈물이 나오질 않더군요"라고 당신 심경을 털어놨다. "노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추억들이 너무나도 많다" 며 회상에 잠긴 백 의원은 부산선거 시절로 한참만에 말문을 열었다.

"2000년 부산 선거때 부산 화명동,금곡동 조직팀장을 맡았을 때 일입니다. 그곳에 연락사무소를 차려 10층이 넘는 건물에 노란바탕의 큼지막한 현수막을 걸었죠. 현수막에는 '기호 3번 노무현' 이라고 적었는데 스스로 '아이디어 좋다'고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본부에서 들어오라고 호출이 왔더라고요. 갔더니 속된 말로 "X창"나게 깨졌습니다. 당명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죠"

"제 딴에는 부산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김대중당이라고 통하는 만큼 당명을 넣지 않은 것이였는데 오히려 노 전 대통령은 '내가 부산에 출마하려는 의도를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다. 국회의원 한번 더 하고 싶으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된다. 그러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김대중당으로 부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길이다'
라고 말하시더군요. 크게 깨달았죠. 이 말이 제가 정치를 하고 있는데 있어서 아주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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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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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돈에만 집착하는 최근의 모습에 참 실망이 극도였다.
그런데, 한 앨범으로 그리 여러번 혼탕, 중탕, 분탕질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되었다.
처자식 먹여살리는 문제가 있었으니 그렇지..

혼자 사는 노총각이 그리 돈을 그토록 밝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내심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쯤되면 이제 배풀때도 됐는데?
월드컵송이라도 무료로 배포해줄 여유와 헌신이 있을텐데?
새로운 장르중 째즈는 왜 안할까?











ㅎㅎㅎ
여자는 현명했다. 돈에, 돈을 위해, 돈때문에 이 사건이 들쳐졌다.
오히려 잘된듯
이 고비가 지나고 나면,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멋진 모습을 기대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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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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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감사합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랑스러운 국민참여당, 제2기 당대표직을 수행하겠습니다.

이병완 창당준비위원장님, 이재정 당대표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당은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천호선 최고위원님, 이백만 최고위원님, 이광철 최고위원님, 김영대 최고위원님, 김충환 최고위원님, 오옥만 최고위원님, 그리고 권태홍 사무총장님과 중앙당 상근당원 동지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열정과 헌신 덕분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여섯 개 광역 시도당 위원장님과 당직자 여러분, 지난해 지방선거에 나섰던 삼백여 출마자 여러분, 여러분의 무모한 도전 덕분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창당준비를 하고 지역위원회를 하면서, 새벽에 플랫카드 걸고 출근하고, 저녁에 아이 데리고 선거운동 나오셨던 당원동지 여러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선출되신 신임 최고위원 여러분, 축하합니다. 힘과 지혜를 모아 국민참여당을 더 크게 성공하는 정당으로 만들어 나갑시다. 저를 믿고 따라 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국민참여당을 부탁합니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참여정부의 정책노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태어난 정당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서거하셨지만, 참여정부의 자산과 부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권력 문화를 민주화했습니다. 남과 북의 화해 협력과 한반도 평화를 진척시켰습니다. 국가균형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국민경제를 잘 관리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확대했습니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에 맞서 싸웠습니다.

국민참여당은 참여정부의 자산을 승계하려는 게 아닙니다. 참여정부의 자산은 대한민국의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국민 모든 정당이 그 자산의 합당한 상속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국민참여당은 오로지 참여정부가 남긴 부채만을 승계할 것입니다. 참여정부가 이루지 못한 것, 실패한 것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비정규직과 소득 격차 문제 등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막지 못했습니다. 복지지출을 확대했지만 대한민국을 토목건설국가에서 복지국가로 바꾸는 데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지역구도 정치를 타파하고 정당을 민주화하는 정치혁신 노력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남긴 부채입니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노 전 대통령이 실패했거나 포기했다고 말하지 맙시다. 그 분이 쓰러지신 그 자리에서 우리가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누군가 그분을 대신해서 참여정부가 남긴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 국민참여당이 그 일을 하겠습니다. 참여정부가 남긴 자산은 다른 사람과 다른 정당에 넘기고, 국민참여당은 오로지 부채만을 인수하여 갚아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옳았다는 것을, 불가능한 꿈을 꾼 게 아니었다는 것을, 성공했다는 것을 끝까지 보여줍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참여정부가 남긴 부채를 갚는 길은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어떤 부당한 특권과 반칙도 용납하지 않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그 누구도 헌법과 국민주권 위에 군림하지 못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와 더불어 시민 한 사람도 결코 버리지 않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그 누구도 생존을 위해 경제적 강자의 자비심에 의존하거나, 인간적 존엄을 포기하고 굴종하는 일이 없도록 보살피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확실하게 지키는 국가, 만인에게 똑같이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국가, 국민의 삶이 풍요로워지도록 애쓰는 국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확고히 세우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국가를 만들어야 시민의 삶도 훌륭해질 수 있습니다. 훌륭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가 훌륭해져야 하고, 정치가 훌륭해지려면 정당이 훌륭해야 합니다.

국민참여당은 작지만 훌륭한 정당입니다. 앞으로 더 크고 훌륭한 정당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국민참여당에 관심을 주시고, 국민참여당에도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당원으로 참여해 주십시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 앞에는 멀고 험난한 길이 놓여 있습니다.

비상한 각오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한 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실패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위험한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에 도전합니다.

당원들이 서로를 믿지 않으면 국민은 우리당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확신이 없으면 우리당은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당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면 우리당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먼저 포용할 때 남들도 우리를 껴안아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믿고, 역사와 국민을 믿으면서, 함께 멀고 험한 길을 떠납시다.

국민참여당 대표로서, 저는 당원 동지들과 국민 앞에 선언합니다.

4월 27일, 우리 국민참여당은 첫 번째 국회의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012년 4월, 국민들은 진보개혁 정당들을 국회의 압도적 다수파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맞선 야권연대후보들이 국회의석 180석 이상을 차지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압도적인 개혁국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적어도 스무 명의 남녀 당선자들이 노란 넥타이와 스카프를 매고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제19대 국회의원 선서를 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을 사랑하고 참여정부의 부채만을 승계하겠노라 약속했던 국민참여당 당선자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2012년 12월 진보개혁 야당의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제압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하는 제2기 진보개혁 정권 수립을 확정하는 순간을 체험할 것입니다.

진보개혁 진영의 모든 정당들이 손잡고 공동의 정부를 만들어 대한민국을 자유국가, 복지국가, 평화국가의 반석 위에 다시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이루어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해내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당 운영의 기본방침을 정합시다.

첫째, 시민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시민들을 찾아갑시다. 우리의 소망을 말하기보다 국민의 소망을 듣겠습니다. 매주 토요일 이동당사!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만민공동회를 열겠습니다.

거대언론과 조직 뒤로 숨은 정치를 국민 앞으로 끌어냅시다. 한강변을 가득 메우고 독재타도를 외쳤던 민주주의의 꿈, 골목골목에서 즉석연설을 했던 민주주의의 꿈을 다시 꿉시다. 국민참여당 대표와 중앙당은 언제나 길 위에 서서 시민들과 만날 것입니다.

둘째,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 아래 당을 운영하겠습니다. 큰 정당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할 것 없습니다. 흉내 내지 맙시다. 우리방식대로 합시다.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을 다 하기에는, 우리 당의 역량이 너무 작습니다. 정책과 홍보, 조직과 교육을 하이브리드로 엮는 창조적 활동이 필요합니다. 우리 당의 당면과제는 성공적으로 국회의원 총선을 치러내는 것입니다.

일점돌파! 당 활동이 활발하고 당원이 많고 훌륭한 국회의원 후보가 있는 지역부터, 당의 역량과 활동을 집중해서 뚫고 나갑시다. 이길 수 있도록 싸웁시다.

셋째, 다른 정당과 어울리고 뒤섞이는 일에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임하겠습니다. 100% 순금이나 순은은 물러서 세공을 할 수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제대로 만들려면 여섯 일곱 가지 나무들을 섞어야 합니다. 미역국을 끓이는데 간장도 안 넣고 멸치도 안 넣고 쇠고기도 안 넣고 순수한 미역만으로 국을 끓인다면 사양하겠습니다.

진보의 힘은 순수가 아니라 섞임에서 나온다고, 정치는 동기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고 책임지는 활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당은 참여정부의 자산이 아니라 부채를 승계하는 정당입니다.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부채를 당장 갚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참여정부가 부채를 남겼다고 비판해 왔던 진보정치세력과 손잡고 힘을 모아, 국민에게 진 빚을 갚읍시다.

노 전 대통령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고 모색했던 진보의 미래는 소통과 통합, 그리고 폭넓은 연대를 통해서만 열어나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넷째, 장기적 전망과 과제를 소중하게 간직하되 지금 이 시각 국민의 간절한 요구를 먼저 받드는 자세로 활동하겠습니다.

지금 국민은 정권교체를, 한나라당 정권의 종식을, 뒤 돌아가는 역사를 앞으로 되돌릴 진보개혁 정권의 수립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국민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 우리당의 힘을 키우겠습니다.

진보개혁 진영의 모든 정당들이 튼튼하게 연합하여 2012년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선거에 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당대표부터 평당원까지 같은 정세인식, 같은 목표의식을 가지고 함께 실천합시다. 늘 여러분과 소통하면서 당을 운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 3. 19

국민참여당 대표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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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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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義士의 구국 의열투쟁, 일제 간담 서늘케 해!

written by. 이현오

강 義士 의거 90주년 기념식, 의거 장소인 서울역 광장에서 열려... 추후 동상도 건립돼

  90년 전 오늘(1919. 9.2) 남대문 역(현 서울역)에서 일본 제국주의 치하 새로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 부부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는 물론, 3·1독립만세 운동 후 일제의 강압 등으로 다소 침체에 빠져 있던 국내 독립운동에 기름을 끼얹으며 한민족의 기개를 전 세계에 떨치게 한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의 의거 90주년 기념식이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다.

안중근·윤봉길 의사와 더불어 독립운동 3의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강우규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것은 정확히 90년 전인 9월2일 오후 5시 지금의 서울역 회현 고가 도로 아래에서다.

 ▲ 2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식. 이 날 기념식에서는 강 의사의 애국정신을 후대에 까지 길이 이어나가자고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편 강 의사 기념사업회는 내년 강 의사 동상을 서울역에 건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konas.net

그 날 오후 5시 당시 해군대장이었던 사이토 총독은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 그를 환영 나온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손을 들어 화답하고 마차로 향하던 중 군중 속에서 그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당시 65세의 강우규 의사가 튀어나오며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은 운 좋게도 그가 차고 있던 칼과 혁대에만 파편을 맞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환영 나온 일본 관료 등 37명이 부상을 입고 이후 2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 기념식에 참석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konas.net

2일 오전 10시 그가 의거를 일으켰던 서울역 광장에서 (사)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와 동아일보사 공동으로 기념식이 열렸다. 이 날 기념식에는 김학준 동아일보사 회장을 비롯, 강 의사 동상건립에 힘써운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과 이병구 서울보훈지청장, 남만수 광복회 부회장, 그리고 평안북도 도지사를 위시한 강 의사 출신지역인 평남 덕천군민회 대표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돼 강 의사의 구국의 애국혼을 기렸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지난 달 25일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학술세미나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의사의 출생지가 평안북도(덕천군)인데다 유일한 후손인 손녀마저 지난 1985년 세상을 떠난 이유도 있었다. 그러다 그의 의거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점은 의거 당시 강 의사의 나이가 65세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고령에 해당하는 나이였다는 점이다.

이 날 기념식에서 강인섭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후손으로서 동상하나 제대로 건립하지 못해오다 이번 90주년을 맞아 서울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동상건립을 위한 모든 사업계획이 완료되고 예산까지 확보해 의거 당시의 자리에 폭탄을 투척하는 모습의 역동적인 표현으로 동상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konas.net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기념사에서 강 의사의 구국을 향한 나라사랑정신과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불굴의 민족정신, 그리고 애국혼을 우리들이 이어 받고 후손에게도 길이 물려주자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강 의사님의 아호인 '왈우'에서 느껴지듯이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생각했기에 일제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보내는 역사적 의의를 깨닫게 된다"며 "자기 스스로를 현명하고 뛰어나며, 잘났다고 하는 오만함을 가진 인물은 역사에서 큰일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아호를 들어 겸손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김 회장은, 그 스스로도 어리석고 무지함을 깨닫게 된다며 "서울역 광장에서 기세 등등하게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사님의 독립의 혼이 일제는 물론 전 세계에 알리는 장소였음에도 평소 이를 잊고 지내왔다"고 말하고 "우리는 의사님과 같은 선열들의 애국정신으로 말미암아 지금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룸으로써 (세계의)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예측하지 못해 방침하고 자만하면 새로운 국난은 오게 마련"이라며 "국난을 회피하고 대한민국에 의한 민족의 평화통일 성업을 위해서도 위대한 애국정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후대에도 의사님의 유지를 보내 물질적 풍요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미래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병구 서울보훈지청장도 "의사님의 강인한 민족정신을 기리고 그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자랑스런 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자"며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듯이 위대한 창조의 역사를 위해 힘을 쏟아 나가자"고 말했다.

김영일 광복회장은 광복회 남 부회장이 대신 낭독한 기념사에서 "의사님은 위대한 우리시대의 선각자였다"며 "세월이 흘러도 의사님의 애국정신을 가슴에 새겨 젊은이들에게는 애국혼을, 지도층에게는 사회통합의 기회가 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강우규 의사는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근대화의 요구에 부응해 개화사상을 수용, 기독교에 입교한 근대 지성이다.

한방의술을 바탕으로 인술을 베풀고 재산을 모아 사립학교와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1915년부터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쳤고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9월2일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결행했으나 총독 암살은 무위에 그쳤다.

이후 한인 순사에게 붙잡혀(스스로 자수했다는 내용도 있음)1920년 11월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의사의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 이 날 기념식에 앞서 열린 강 의거를 재연한 퍼포먼스. 사이토 총독과 그 부인이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역 귀빈실에서 나오고 있다. ⓒkonas.net

 ▲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 부부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있다. ⓒkonas.net

 ▲ 폭탄이 던져지자 놀란 사이토 부부와 일 관헌들. ⓒkonas.net

 ▲ 취조하는 일본인 순사에게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강 의사. ⓒkonas.net

 ▲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 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조선 청년에게 나라위해 일심전력 힘을 키우라고 연설하는 강우규 의사.

 ▲ 평상시 흰색 두루마기 그 차림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의열투쟁으로 일생을 살다 돌아가신 강우규 의사. ⓒkonas.net

 ▲ 이 날 기념식에서 색동예술단 어린이 회원들이 '반달'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konas.net

 ▲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만세삼창.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을 맞아 오늘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 주최로 강 의사의 항일투쟁 의거와 애국적 삶을 되돌아보는 학술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독립운동 사학계의 원로이신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강우규 의사의 생애와 의거'를, 김형목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강우규 의사의 계몽활동과 현실인식'을, 그리고 제가 '강우규 의사의 서울역 폭탄투척 의거와 재판'을 각각 발표하였습니다. 토론자로는 박환 수원대 교수, 양성숙 경찰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참석했습니다. 제가 발표한 내용은 올 가을에 출간한 <강우규 평전>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앞서 8월 15일 실은 글과 유사합니다만, 여기 자료용으로 실어둡니다.... (필자 주)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윤병석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총독부의 식민통치가 10년째로 접어드는 1919년 8월 하순, 일제의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3.1만세의거로 타오른 독립운동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경성(京城, 현 서울)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가게 문을 닫고 무언의 항의시위를 벌였다. 9월 1일, 이날 경성(서울)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정보계통의 경찰들은 물밑에서 숨가삐 움직였다. 2일 신임 총독이 경성에 도착할 즈음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신임 총독 환영행사에 참가한 후 경성 서쪽에 있는 인왕산에 올라가 항의의 표시로 만세를 부르기로 한다는 ‘불온문서’가 시내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경찰은 심지어 상해 임시정부에서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파견한 암살단이 경성 시내에 잠입했다는 정보도 입수한 상태였다. 이 정보에 따르면, 암살단은 1차로 부산에서 거사를 결행한 후 실패할 경우 대구에서 다시 결행하고 최후에는 경성 남대문역에서 거사를 치르기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과는 별개로 경성시내 학생, 종교계 등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청년중앙단’ 명의로 조선은 3.1만세시위를 통해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새로 부임하는 총독은 즉시 도쿄(東京)로 되돌아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신임총독 부임을 앞둔 경성의 풍경

조선에 새 총독이 부임할 것이라는 얘기는 앞서 7월 5일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이 3.1만세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고 도쿄로 물러간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후임으로는 무단통치 대신 새로운 식민통치 전략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온건한 성향의 인물이 예상되었다. 마침내 8월 12일 일본 정부는 하세가와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예비역 해군대장을 임명, 발표했다. 당시 사이토는 이른바 ‘시멘스 사건’ 이후 예비역 상태였는데, 일황은 사이토를 ‘특별히 현역에 복귀’시켜 총독에 임명했다. 이 소식은 신문을 통해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항일 민족운동 진영에도 곧바로 알려졌다.

한편 8월 29일 도쿄를 출발한 사이토 총독 일행은 이튿날 오사카(大阪)을 거쳐 31일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다. 시모노세키에는 이들을 조선으로 태워갈 특별선(船)인 신라환(新羅丸)이 기다리고 있었다. 8월 31일 오후 9시, 사이토 총독 일행은 일본땅 시모노세키항을 출항해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향하였다. 이 배에는 신임 사이토 총독 다음으로, 총독부 내 제2인자인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신임 정무총감 일행도 같이 타고 있었다. 9월 1일 오전 8시 30분경 부산에 도착한 사이토 일행은 이날 부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오전 7시 30분 부산역에서 임시특별열차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다.

9월 2일 오후. 이날 경성의 날씨는 무더웠다. 부산과 달리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더더욱 찌는 듯 했다. 이날 군 당국은 신임 총독의 경성 입성 환영식을 위해 기병 1개 중대를 의장대로 편성하였으며, 보병 제78연대 장굴전(長堀田) 대좌(현 대령)가 지휘하는 보병 2개 대대 병력을 도열병으로 동원하였다. 또 인근 한양공원에서 예포 19발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군 당국과는 별도로 경찰은 이날 아침부터 남대문역 주변은 물론 인근 남산 중턱 총독부 청사에 이르는 남산 주변 일대에 걸쳐 탐문과 삼엄한 경계를 폈다. 그리고는 출영객들에게 아래 다섯 가지 ‘주의사항’을 별도로 발표했다.

1. 출영자는 제 위치를 지킬 것
2. 출영자는 당일 오후 4시 50분까지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정차장 왼편 화물 반출 입구로부터 입장할 것
3. 출영자는 입장하기 전에 접수대 직원에게 명함을 교부할 것  
4. 플랫폼에서는 각자 지정한 위치에서 출영할 것
5. 출영자 일동은 총독 일행이 출발한 후에 이를 따라 퇴장할 것

이날 당국이 지정한 남대문역 출영자 배치도를 보면, 역장실 앞에는 총독부 본부 및 소속관서 직원들과 조선귀족들을, 그리고 귀빈실 앞에는 군인, 일반인 및 여성들을 배치하였다. 일반인들과 여성 출영자들은 접수대를 통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사전에 신분확인을 하려고 한 것이다. 경찰 당국은 이밖에도 이날 출영자들에게 예복을 착용하고, 또 각 가정에서는 경축의 의미로 국기(일장기)를 내걸라고 지시하였다. 3.1만세의거 이후 조선인들은 각종 기념일에 일장기를 잘 내걸지 않아 당국으로서는 별도의 독려가 필요했었다. 

오후 5시 정각이 되자 121호 기관차가 이끄는 임시 특별열차가 사이토 총독을 태운 채 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흰색 해군대장 복장에 군모(軍帽)를 쓰고, 가슴에는 훈(勳)1등 욱일장(旭日章) 부장(副章)을 패용한 사이토 총독은 출영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귀빈실을 거쳐 호위 경찰과 신문기자 등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남대문역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에는 사이토 총독 내외가 타고 갈 마차와 그 뒤에 미즈노 정무총감 내외가 타고 갈 마차가 각각 한 대씩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토 총독 내외는 앞 마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고 앞좌석에는 이토(伊藤) 비서관이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남산 왜성대(倭城臺) 총독 관저로 갈 예정이었다.

- 천지를 진동시킨 폭탄 소리

마부가 말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발을 내디뎌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마차가 겨우 몇 바퀴를 구른 순간 역 광장 내 다방 인근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마차 근처로 날아들었다.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는 현장에서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촬영하던 한 사진기자 바로 옆에서 폭발하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순간 역 광장 일대에는 비산(飛散)한 파편에 맞아 나뒹구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허벅지를, 또 어떤 사람은 가슴에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역 광장은 다친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마치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정작 폭탄의 표적이었던 마차에 타고 있던 사이토 총독 내외는 이런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나자 사이토 총독의 부인 하루코(春子)는 이 소리를 예포 소리로 착각한 채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 사이토 총독이 작은 소리로  ‘맞았소, 맞아!’ 하며 두 번이나 연거푸 마차가 폭탄을 맞은 사실을 알려주자 그 때에도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사이토 총독은 아내에게 ‘폭발탄!’이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루코는 의아한 나머지  시선을 마차 바깥으로 돌렸다. 순간 하루코의 눈에 흰옷을 입은 사람과 일본인 복장을 한 사람 서너 명이 쓰러지면서 시뻘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서야 하루코는 자신들이 탄 마차 주변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알아 차렸다.    

날 폭발사고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은 없었지만, 다수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필시 신임 사이토 총독을 노린 것이었으나 사이토 총독은 오히려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굳이 피해라면 그가 탄 마차에 대여섯 조각의 파편이 박힌 것이 발견되었고, 그의 혁대에서 파편 몇 조각이 발견되었다. 사이토 총독이 폭탄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순전히 군복 덕분이었다. 해군복의 혁대는 다른 군복과 달리 유독 두터워 엔간한 물체도 뚫기가 어려웠다. 만약 그가 이날 해군복을 입지 않았다면 복부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강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이날 현장에서 신문기자,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경상자 가운데는 미국인 여성 1명도 포함돼 있었다. 중상자 가운데 2명은 나중에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경기도 순시(巡視) 스에히로(末弘又二郞)는 좌(左)대퇴부에 뚫고 들어간 탄편(彈片)으로 인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발생 9일만인 9월 11일 오전 9시에 사망했으며,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 경성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는 복부를 뚫고 들어간 탄편으로 장관(腸管)이 손상당해 부작용으로 복막염, 폐렴이 발병해 그해 11월 1일 오전 9시에 각각 사망했다.

한편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현장에서 범인 색출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범인 검거에는 실패하였고 아무런 증거물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초동수사에 실패한 경찰은 본정(本町)경찰서에 수사본부를 구성하여 현장에서 체포한 용의자를 대상으로 범인 색출에 나섰다. 일황을 대리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조선 내 최고권력자인 조선총독에 대한 일대 ‘불경(不敬)사건’이 발생한 만큼 경찰로서는 명예와 직(職)을 걸고 사건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던 중 사건발생 한 달 5일만인 10월 7일자 신문에 당국이 폭탄사건의 ‘범인’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당국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남대문역 폭탄투척사건의 ‘범인’은 65세의 강우규(姜宇奎)로, 지난 9월 17일 경성 시내 누하동에서 본정(本町)경찰서 경찰관이 체포하였으며, 그간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검사국으로 넘겼다고 밝혔다. 조선 최고통치권자인 총독을 겨냥해 폭탄을 던져 일제 당국과 세인을 놀라게 했던 폭탄사건의 전모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 ‘범인’은 65세의 노인 강우규

세인들은 특별히 주목한 점은 폭탄사건의 ‘범인’이 환갑을 넘긴 64세의 노인이라는 점이었다. 이 날짜 신문에는 강 의사의 얼굴사진이 처음 공개됐는데, 흰 두루마기 차림에 머리칼과 수염 모두 흰 색이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60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남자가 51.1세, 여자가 53.7세였으니 의거 당시 강 의사는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일자 <매일신보>가 전한 일제 당국의 발표내용 몇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강 의사의 간략한 이력사항 부분이다.

“폭발탄을 던진 범인 강우규는 당년 65세의 노인으로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한 이외에는 아무 학력이 없으며, 중년에 예수교 장로교회에 입교(入敎)하여 지금까지 그 종교를 믿는 중이며, 삼십 여 년 전에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거주하다가 그 후, 즉 십년 전에 북간도 도두구(道頭溝)로 이사하였다가 4년 전에 다시 지나(支那, 중국) 길림성 요하현(饒河縣)으로 이사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청년자제를 교육하며 한편으로는 예수교를 전도하였으며,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근방으로 돌아다니며 오로지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고취하기로 일을 삼았으며, 항상 과격한 조선인과 서로 교제하며 오랫동안 벽지(僻地)에 있어서 조선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자이라”

다음은 강 의사가 거사를 도모한 배경설명 부분이다.

“금년 봄 3월에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소요를 일으키자 이에 응하여 사방에서 일어나자 강우규의 거주지인 길림성 요하현 부근에 있는 조선이 이미 독립된 줄로 믿었다가 그 일이 허사임을 알고 통분함을 마지 아니 할 때 당시 해삼위에 거주하던 완고한 노인들이 조직한 소위 노인단(노인동맹단)에서 이동휘(李東輝) 부친 이발(李撥) 이하 7명이 대표자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왔으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경성 종로에서 제 목을 제 손으로 찌르고 관헌에게 붙들린 후 경찰서에서 독립운동이 무모함을 깨닫고 무사히 돌아가매 강우규는.....(일부 내용은 인쇄불량으로 독해 곤란) 늙은 팔을 뽐내며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한번 던져서 이름을 천하에 드러내리라 하고는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장곡천(長谷川) 총독이 갈린다는 말을 듣고 새 총독이 부임하는 때 한번 큰일을 해 보면 일이 만일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이름은 세상에 드러나리라 하고 결심을 한 모양이더라”

마지막으로, 의거 당일 상황과 피체 경위에 관한 내용이다.

“강우규는 지난 9월 2일 오후 5시에 새 총독이 남대문(역)에 도착하자 이보다 먼저 환영하는 사람과 구경꾼 틈에서 구경꾼인 체 하고 미리 준비한 폭발탄을 가지고 남대문역 귀빈실 현관에서 인력거와 구경꾼이 늘어선 곳에 가까이 서서 신문에서 본 총독의 얼굴을 기억하고 새 총독이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를 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폭발탄으로 총독을 겨눠 던졌으나 총독이 무사하였음을 보고 낙심천만하여 그곳에서 도망하여 잠시 경성 시내에 잠복하려고 수염을 깎고 복식을 고치고 이름을 강영일(姜寧一)이라고 가칭(假稱)하고 이곳저곳으로 교묘히 피하여 다니다가 드디어 9월 17일 누하동에서 체포되어 본정경찰서에서 취조중이더니 이번에 검사국으로 넘어 갔다더라”

한편 강 의사 사건은 검사국 및 법원의 취조 등 사법기관 내부에서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던 관계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노출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에서는 공범 혐의자 11명 가운데 8명을 체포하여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대정(大正) 8년(1919년) 10월 5일자 고경(高警, 고등경찰) 제28453호(‘총독에 대한 흉행(兇行) 범인 체포 건’) 비밀문서에는 강 의사를 비롯해 공범 혐의자 8명의 인적사항과 사건 관련내용이 나와 있다. 이들 가운데 최자남, 허형(일명 허일영) 두 사람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나머지 6명은 풀려났다.

의사 사건의 예심을 맡고 있던 나가시마(永島) 판사는 서둘러 예심결정서를 마무리 짓고 그 해 12월 27일 쯤 발표해 이 사건을 연내에 종결지을 만반의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이와 함께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 부상자 30여 명에 대한 심문이었다. 그래서 법원에서는 사전에 각 관할 경찰서에 해당자에 대한 심문을 지시해 놓았으나 그 결과가 제 때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해를 넘겨 1920년 1월 28일에야 비로소 예심종결을 발표했다.

이틀 뒤인 1월 30일자 신문에 예심종결서 전문(全文)이 보도됐는데, 주요 골자는 범행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충분한 만큼 피고 강우규는 ‘폭발물취체(取締)규칙’ 제1조 및 형법 제199조, 동 제54조, 피고 최자남은 폭발물취체규칙 제5조, 피고 허형은 폭발물취체규칙 제8조, 피고 오태영은 폭발물취체규칙 제8, 9조를 적용하여 형사소송법 제167조 제1항에 따라 ‘주문(主文)’ 대로 피고 4명을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부친다는 것이다.

- 거사 보름만에 피체... ‘공범’ 2명도 유죄

이 무렵 강 의사의 감옥생활도 언론에 일부 공개됐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강 의사와 연루자 3명은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여서 미결수 신분으로 서대문감옥 종로 구치감에 구금돼 있었는데, 예수교 신자인 강 의사는 매일 성경을 외우며 간수의 말을 잘 듣는다고 전해졌다. 아울러 장차 강 의사가 재판에서 적용될 법규는 ‘폭발물 취체규칙’이라고 알려졌다. 이 규칙에 따르면, 비록 미수에 그친 자라고 할지라도 무기형이며, 만약 폭발물을 사용했으나 부상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도 사형이 선고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 의사의 경우 2명의 사망자와 3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니 사형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2월 14일 오전 10시 경성지방법원에서 강 의사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강 의사의 장남 중건을 비롯해 방청석에는 내외국인 등 1백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워 이 재판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을 반영했다. 최자남, 허형, 오태영 피고 등이 출정한 후 오노(大野) 간수장의 안내로 강 의사가 회색 무명옷 차림에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출정했다. 재판장의 심문에 대해 강 의사는 당당한 기개로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하였으며, 또 자신의 국가관, 교육관, 세계관 등에 대해서도 솔직담백하게 밝혔다. 이날 재판정에서 폭탄 투척 전후의 상황에 대한 심문내용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재판장
-(폭탄 투척을)기다리고 있을 때의 광경은 어땠나?
강의사-마침 내가 표 파는데 서 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주워들었는데, 총독이 정거장에 들어오면 우선 귀빈실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다기에 정거장 귀빈실 근처로 가서 기다렸다. 처음에는 기병들이 서 있는 근처에서 기다렸는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귀빈실 동편으로 가서 나무가 하나 앞에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이어 많은 인력거가 늘어선 곳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나와 약 5~6간(間) 떨어져 있는 거리에 마차 한 대가 나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내가 그 마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부인 한 사람이 먼저 타는 것을 보았다. 이 부인에 이어 마차에 오른 사람은 총독이었고, 그 다음으로 젊은 청년이 탔다. 나는 매일신보에서 사진을 봐서 총독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금 마차에 오른 사람이 신임 총독이라는 것을 알고 허리에 차고 있던 폭탄을 끄집어내 손수건으로 싸가지고 있다가 고리에 낀 빗장을 뺀 후 곧 던졌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 가운데 총독이 탄 마차가 남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그 때 하느님께 ‘하느님이여,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올렸다.
재판장-폭탄을 어떻게 던졌는가?
강의사-폭탄을 바른손에 잡고 총독이 마차를 타자 가슴을 향해 던졌다.
재판장-그런데 그 폭탄이 총독에게 맞지 않고 어떻게 떨어진 줄 아는가?
강의사-어디로 떨어졌는지는 몰랐다.
재판장-폭탄 조각이 총독의 혁대로 들어가서 구멍이 뚫어지고 신문기자인 다치바나 이외에 36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을 아는가?
강의사-중경상자가 났는지는 모른다.
재판장-(폭탄 투척 후)현장에 한참 서 있었는데도 그걸 모른단 말인가?
강의사-한참동안 서 있기는 했지만 내 앞에 사람들이 겹겹으로 써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재판장-군중들이 모인 곳에 폭탄을 던지면 어떻게 되는 줄 몰랐나?
강의사-나는 오직 총독을 행해 폭탄을 던졌을 뿐 그 밖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고, 또 다른 영향이 미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사 직후 강 의사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담담한 자세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체포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체포하지 않았다. 강 의사의 진술에 따르면, 현장에서 순사 한 사람과 젊은 소년 하나가 자신을 주목하였지만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강 의사는 이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이어서 일부러 묵인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이토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는데 폭발소리도 나지 않고 또 총독도 죽지 않자 강 의사는 이는 하나님이 총독을 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체포당하지 않자 이 역시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곧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굉음을 내며 폭탄이 터진 것이다.

-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가슴 향해 폭탄 투척

  이날 오후 5시 10분경 강 의사에 대한 제1차 공판이 모두 끝났다. 폐정을 앞둔 순간 강 의사는 재판장에게 할 말이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이 이를 허락하자 강 의사는 이 재판은 일본 천황이 시켜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선총독이 시켜서 하는 것인지를 따져 물었다. 이에 재판장은 ‘법률은 천황의 재가를 받을 뿐이고 재판은 재판소 독립으로 한다’고 답하자 강 의사는 ‘그러면 어째서 나만 신문하고 또 귀찮게 구느냐, 저 죄(罪) 덩어리인 총독은 어째서 잡아가두지 않느냐’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제1차 공판이 ‘주범’인 강 의사에 대한 공판이었다면 18일 열린 제2차 공판은 ‘공범’ 최자남, 허형, 오태영 등 3명에 대한 심문이었다. 비록 거사는 강 의사가 단독으로 기획하고 준비하고 또 결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이들의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한편 이들은 공판정에서 예심 때 한 진술내용을 상당수 번복하였다. 그 이유는 경찰조사나 예심 때 혹독한 고문을 받고서 이에 못이겨 할 수 없이 거짓진술을 했다고 털어놨다. 최자남의 경우 부부가 모두 원산경찰서에 붙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최자남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강 의사 등 피고 4인에 대한 심문이 끝나자 검사는 피고 모두에게 실형을 구형했다. 강 의사에 대해서는 살인미수죄를 적용, 형법 제199조 제203조 제54조 및 폭발물취체규칙 제1조 제12조에 의거하여 사형을, 허형에 대해서는 폭발물취체규칙 제8조에 의거하여 징역 1년 6개월을, 최자남에 대해서는 정상(情狀)은 자세하지 않지만 동 규칙 제5조에 의거하여 징역 3년을, 마지막으로 오태영에 대해서는 동 규칙 제9조 제12조에 의거하여 징역 1년을 각각 구형하였다. 이날 검찰의 구형에 대해 강 의사 등  피고 전원은 모두 불복의 뜻을 내비쳤다.

강 의사 등 4명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은 2월 25일 열렸다. 이날 다치가와(立川) 재판장은 강 의사 등 피고 4명을 불러 세우고는 판결문을 읽어내려 갔다. 재판장은 피고들의 진술내용, 목격자 및 피해자들의 증언, 폭탄 감정 결과, 그리고 폭탄 파편 등 여러 증거물을 토대로 판단할 때 유죄가 입증된다며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강우규(姜宇奎)    사 형
최자남(崔子南)    징역 3년
허  형(許  炯)    징역 1년6개월
오태영(吳泰泳)    무 죄

검사의 구형과 비교해볼 때 강 의사, 최자남, 허영 등 3인은 형량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오태영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오태영이 강 의사가 폭탄투척 ‘범인’임을 알고도 이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또 강 의사의 부탁으로 가회동 82번지 장익규의 집으로 은신하도록 도와준 점 등은 인정되나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오태영은 이날로 석방되었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이른바 ‘남대문역 폭발사건’은 이리하여 사건 발생 근 6개월 만에 일제당국의 사법처분을 받고 일단락되었다.

- ‘동지’ 최자남 변호를 위해 공소 제기

한편 1심 판결에 대해 강 의사는 판결 당일 즉시 공소(控訴)를 제기하였다. 강 의사가 공소를 제기한 가장 큰 이유는 ‘동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강 의사는 공소 공판에서 ‘내가 공소를 다시 한 것은 결단코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최자남은 판결 하루 뒤인 2월 26일 역시 공소를 제기하였다. 반면 허영은 1심 판결에 승복하고서 공소 제기를 포기하였다. 강 의사와 취자남의 공소 기록은 3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심 법원인 경성복심(覆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이 사건은 제2막을 맞게 됐다. 4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심 재판이 열렸다. 이날 방청객 속에는 낯선 얼굴이 한 사람 있었다. 남편의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강 의사의 부인이 멀리 중국 땅에서 건너와 아들 중건과 함께 재판을 지켜보았다.

판은 사실 심문, 검사 논고, 변호사 변론 순으로 진행됐다. 먼저 재판장이 강 의사에 대해 연령, 본적지 등을 확인한 후에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재판장은 1심과 유사한 내용, 즉 강 의사의 이력, 거사를 결심한 계기, 폭탄 구입 경위, 거사 당일의 행적 등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강 의사는 대개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 라고 짧게 답했다. 그러나 폭탄의 위력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는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요지는 폭탄의 위력을 자세히 몰랐고, 사이토 총독 한 사람만을 살상하기 위해 던졌을 뿐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재판장의 심문이 끝나자 검사의 논고를 시작했다. 데라다 검사는 강 의사가 백주에 폭탄을 던져 총독을 살해하려한 것은 범죄의 구성요건을 확실히 갖추고 있을뿐더러 폭탄을 던지면 군중에게 피해가 있을 줄 몰랐다고 하나 이는 구실에 불과할 뿐 실지로 수 십명의 사상자가 난 만큼 ‘살인미수범’과 ‘살인기수범’을 범했다고 주장했다. 또 최자남에 대해서는 경찰 및 검찰 조사, 예심, 제1심 등에서 한 진술이 일치하는 점으로 봐 폭탄 건에 대해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아 방조범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라다 검사는 논고를 마친 후 두 사람에 대해 1심 동일한 형량인 ‘피고 강우규 사형’, ‘피고 최자남 징역 3년’을 구형했다. 4월 26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은 강 의사에게는 사형, 최자남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의 형량과 동일한 형량이다. 다만 재판부는 총독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상해치사 또는 상해 범죄에 대해서는 법 적용을 배제시켰다. 최자남의 공소에 대해서는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강 의사는 이날 고등법원에 상고(上告)했다.

- 우국충절로 넘치는 ‘상고취지서’

앞서 언급했듯이 강 의사는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았으나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재판 준비를 본인이 직접 감당해야 했다. 결국 ‘상고취지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강 의사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 장문의 상고취지서는 총 9개 항을 담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한 배경, 폭탄 입수 및 국내 반입 등 거사의 경위, 최자남과의 ‘공모’ 여부, 상고 이유, 1, 2심 법원의 처사에 대한 비판, 동양 3국의 평화론 등이다. 다시 말해 상고취지서에는 거사를 도모한 배경에서부터 재판 과정에서의 논쟁 및 재판부에 대한 충고 등을 총망라하고 있어 강 의사의 우국충절은 물론 세계관이나 동양평화 사상까지도 엿볼 수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상고취지서 내용 가운데는 강 의사의 언사로 보기 어려운 구절이 몇 군데  없지 않다. 한 예로 일본 천황과 관련하여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 ‘어지(御旨)’ ‘聖旨(성 지)’ ‘성덕(聖德)’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천황주의자들이 천황의 신민(臣民)을 자임하며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밖에도 일황이 ‘천의(天意)에 순종하고 세계 대세인 평화회의에 동의하여’라는 표현 등은 당시 강 의사가 국제정세 등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부족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강 의사에 대한 상고심 1차 공판은 5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 구사바(草場) 검사는 강 의사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폭탄을 던지면 다수의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을 것이므로 이는 범죄성의 의사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 대목과 관련해 유죄를 선고한 1심의 판결을 뒤엎은 복심법원의 판결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다. 상고심 선고 공판은 5월 27일 다나베(渡邊) 재판장 이하 4명의 배석판사, 그리고 구사바(草場) 검사가 열석한 가운데 재판이 열렸다. 다나베 재판장은 피고가 총독 외에 다른 사람을 살해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총독이 탄 마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예견하였고, 또 사람이 밀집한 상황에서 폭탄을 던져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점은 피고가 그 피해를 희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원심 판결, 즉 사형을 수용하였다.


재판부는 또 1심 재판부가 강 의사가 요구한 총독의 법정 출석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사건 자체의 재판 절차에는 하자가 없으므로 원판결의 당부(當否)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점, 또 피고가 주장한 내용들은 정치, 도덕에 관한 논의들로서 상고의 적법(適法)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최종적으로 강 의사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강 의사에 대한 일제 사법당국의 사법적 절차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오직 사형집행 절차만을 남겨 두었다. 중건은 재판 당일 부친을 면회하였는데, 강 의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아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사실상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 나 죽는다고 조금도 엇지않게(언짢게) 생각하지 마라.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실허하는(싫어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 세상에 대하여 한 일이 너무 없어 도로 북그럽다(부끄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내가 죽느니만 못할 것 같다. 즉 이번에 내가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이제 내가 이만큼 애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조선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백인다면(박힌다면) 그만이다. 내가 죽을 지라도 내 가슴에 한이 되는 것은 내가 죽은 후에 조선청년들의 교육이다...”

- 거사 이듬해 순국... 공동묘지에 유해 가매장


운명의 날인 1920년 11월 29일이 마침내 다가왔다. 강 의사는 이날 오전 서대문형무소 내 사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형을 집행하기 전 형리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자 강 의사는 짧은 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남겼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이날 일제 당국은 강 의사의 장남 중건을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시켰다가 강 의사의 형 집행 후에야 풀어주었다. 오후 2시경 장남 중건은 서대문형무소 시체실에서 사각형 궤짝 하나를 인계받았다. 그 속에는 부친의 시신이 앉은 채로 들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중건은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한편 강 의사의 유해는 순국 직후 유족들이 선영으로 모시고자 했으나 일경의 불허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일경은 강 의사의 유해를 내줄 경우 조선인들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결국 빈소 조문은커녕 장례 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만이 강 의사의 유해를 운구하였다. 강 의사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감시 차 일경 2명이 따라오자 중건은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네놈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감시하여야만 속이 쉬원하냐!”며 울부짖었다. 강 의사의 유해는 이날 오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소재 서대문형무소 공동묘지에 임시로 가매장 되었다.

해방 후에도 강 의사의 묘소는 10년 가까지 이곳 공동묘지에 쓸쓸히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가 1954년 봄 유지들의 발기로 이장문제를 논의한 후 마침내 서울 우이동 산록(山麓)으로 이장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일정에 차질이 생겨 당초 계획보다 2년 뒤인 1956년 10월 18일 수유리 산 109번지에 묘지 이장과 함께 육당 최남선이 쓴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우이동에 마련된 강 의사의 묘소는 덕천군민회에서 관리하였는데, 부지 문제를 놓고 서울시 관재국과 송사(訟事)에 휘말리는 등 곡절을 겪다가 1967년 6월 26일 현재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로 이장하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강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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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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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가까이서 본 적이라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998년이던가, 그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 그것도 100여명이 넘는 시민단체 인사들을 초청해서 국정과제를 설명하던 그 때에 악수하느라 본 것 밖에는 없다. 그 때 악수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청와대에서 집으로 보내주었는데, 아버님은 그 사진을 이리저리 이사하면서 사라지기 전까지 한동안 당신의 방에 두고 계셨다. 아버님으로서는 아들로 인해 고통 받던 시절, 학생운동으로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문제를 거론한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굳이 꼽자면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세 번의 간접적 인연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나는 대학시절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이다. 독재정권 시절에 더구나 자식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으니 어느 곳에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여겼던 부모님들은 민가협을 찾았고, 민가협을 통해 야당의 두 지도자인 YS와 DJ를 방문하게 되었다. 석방 이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늘 두 사람을 비교하며 시원시원하게 약속을 한 사람은 YS였고, 그에 비해 DJ는 속 시원한 답을 주지는 않아서 조금 못미더웠다고 하신다. 근데 사실 돌아보면 그 시절 누가 양심수의 석방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DJ의 태도가 옳은 것이긴 하나 애타는 부모 마음에 비추어 보면 썩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난 선고 받았던 징역형을 한 달 정도만을 남겨 두고 나온 셈이니 DJ의 태도가 '현실적'이었던 셈이다.

▲ 1980년 옥중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두 번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던 시절, DJ가 찾는 젊은 피 300인이라며 어느 월간지에 제멋대로 만든 명단이 내 이름올라간 일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소위 386세대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주력으로 주목받았고, 나이로는 그 세대의 앞머리쯤에 있던 필자도 제멋대로인 그 300인 명단에 올라 있었다. 어차피 정치권 진입에 관심 없던 사람으로서 그러려니 했고 실제로도 DJ가 내게 관심 줄 일은 없었던 터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혹시나 DJ와 관련을 맺는 것은 아닌가 하는 눈으로 본 것도 사실이었다. 뭐 특별히 직접적 손해를 끼친 일은 없었으니 딱히 내게 나쁜 일로 기억될 일도 아니지만 그리 즐거운 기억도 아니다.

세 번째는 경실련에서 일하던 시절 경실련 창립기념 행사에 당시 야당 총재로서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시민단체 행사에 찾아 와 축사를 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 전이었으니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날 DJ의 축사는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축사는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연설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연설을 그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YS와 DJ가 민추협을 만들어 재야운동 단체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거리에 나설 수 없었던 그의 육성은 녹음테이프로 집회 장소에서 울려 나오는 것으로 들어야 했다. 물론 87년의 대통령 선거 연설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연설의 내용이 중요했다기보다 갇혀 있던 DJ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던 시절이었고, 대통령 선거 연설 역시 그 내용보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그의 변명으로만 다가오던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경실련 창립기념행사에서의 그의 축사가 온전히 그의 연설 내용만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첫 번째 경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행사에서의 정치인의 격려사나 축사가 대개 그렇듯이 그저 칭찬과 격려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딱히 그런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리 어울리는 일은 아니기도 할 것이라 칭찬과 격려 일색의 격려사나 축사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사 진행자의 일원으로, 찾아오는 손님 안내하기에 여념이 없던 나로서는 별반 귀 기울여 들을 이유가 없었고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러는 순간 자연스레 귀를 열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하는 순간,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나름 자기의 논리적 생각을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이 그저 그런 내용이라면 더 듣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고, 혹 그리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나마 있던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게 되었다. 그의 축사는 내내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철학과 구체적 견해가 잘 정돈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의 말은 시민운동에 대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김대중이란 사람을 단순한 정치인으로 보지 않게 된 시작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왜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중요한가? 시민운동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첫째, 둘째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에 감사하다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이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거나 자발적인 시민들의 노력이 지금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대의나 명분으로만 대중경제론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느 정치인들에 비해 참 영악하게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잘 만들어 가는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DJ가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에 어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비공식적인 자리라 남북관계에 대한 소위 비사를 포함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임장관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 전의 이야기인데,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DJ의 남북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는 데, 정확한 내용은 이제 기억에 없지만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나 일의 성과를 바라기보다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남과 북이 가까워지기를 염원하고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가 담긴 것이었다. 임 장관이 전해주는 기도의 내용은 남북관계에 대한 DJ의 진정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 준 것이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손을 마주잡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묘하게도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견주어 보면 오히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모습이 어떤 사회였나를 알게 해 준다. 현재의 이명박 정부가 펼치는 국정운영이란 거의 상거래 과정의 모습이 오버랩 되지, 정상적인 정치과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본래 의미의 정치도 정책집행도 또 진정성 있는 소신도 아니라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노정했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름의 철학에 기초한 정치와 정책 집행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이 새삼 느껴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같은 정치와 정책집행이라는 것이 그때그때의 대증적 처방이 아니라 일관되게 지녀온 자신의 철학과 정치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이 바탕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역설을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그리 많이 들어 보지 않았던 그의 연설이지만 나는 그가 '분석적'이라고 느낀다. 그만큼 치밀하게 문제를 파고들고 정치한 정책을 만들려는 노력을 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그저 '좋은 일이죠'를 넘어서 시민운동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그의 분석은 진보적 가치라는 지형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물론 그의 정치는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했다. DJP연합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정치가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지금의 연합정치의 본격적 시동도 그가 건 셈이었다. 본격적 의미의 연합정치였는가는 논란이 있는, 거대 정치세력들의 수장들의 합의에 의한, 연합이 이루어지기까지 논의가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그 결정을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시민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연합정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숙련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연합정치를 담론화 한 것은 아니지만 동물적으로 그의 필요와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까?
이런 점들이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가깝게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또한 그의 이런 태도들이 과거에 내가 생각해 왔듯 단순하게 권력욕만을 위한 정치적 행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지만, 돌아보면 앞서 말한 여러 지점에서 그러나 그가 보여준 가치와 그에 대한 그의 진정성은 그의 정치적 결정과 태도들이 단지 권력을 위한 명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우리가 그와 같은 대통령을 가졌었다는 것은 나라의 축복이다. 단지 노벨평화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발표했을 때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진영의 신문들은 우리 정치의 거목이 정계를 은퇴했다며 추켜세웠다. 무엇보다 그로 하여금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아두고 싶은 마음들이 앞선 것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우리 정치를 설명할 때 3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 구분일 정도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위치는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구분과 구분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뒤늦게 알게 된,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기의 정치에 대한 확신과 치열한 고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마련한 추모집회의 사회를 기쁘게 본 이유기도 하다.

본래 정치를 하려고 했던 목표와 이유는 팽개쳐 놓은 채 권력만을 위해 이합집산하고 삼국지 전략 짜듯, 혹은 장사치 장사하듯 정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하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김대중 이라는 정치인은 훌륭한 전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돌아보며 그를 넘어서는 정치인이 나오게 될 때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김대중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다.


출처 : 하승창 씽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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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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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1967년 서울 수유리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였다.

돌아가신 강원룡 목사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후에 독일 대통령이 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박사를 초대해 당시 소장 국회의원으로 정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김대중 의원과의 만남주선한 것이다. 이보다 3년 전인 1964년, 김대중 의원은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무려 5시간 19분 동안이나 의사진행발언을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바이츠제커 박사를 안내하면서, 젊은 나이에 이 거물들의 역사적인 회동에 배석할 수 있었다.

많은 대화 내용 중 지금도 기억 나는 것은, 북한의 도발에 서울 시민이 한강을 건너지 못해 갖은 고생을 했던 1950년 한국전쟁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한강에 다리를 더 많이 건설해야 한다는 김대중 의원의 말씀이었다. 상당한 신사 국회의원이었던 그가 당시에는 보기 드문 파란색의 미제 승용차를 타고 아카데미 하우스에 매끄럽게 도착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1964년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이 날의 만남이 1994년 가을 독일 본의 대통령 관저에서, 당시 야인이었던 김대중 선생과 독일 대통령이었던 바이츠제커 박사의 면담을 주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연이 이어져 퇴임한 바이츠제커 박사는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 나와 함께 참석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와의 인연은 내가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국장으로 일하던 1983년 미국에서 다시 이어졌다. 당시 그는 미국 워싱턴 D.C에 망명 중이었고, 내가 미국에 출장을 갈 때면 그가 머물고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의 최근 저서인 <WCC 창으로 본 70년대 한국 민주화 인식>에도 편지 사본이 공개되었듯이, WCC의 인권 자금이 당시 곤궁했던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이우정 선생 등의 생계에 보탬이 되면서 WCC와 김대중 대통령은 더욱 긴밀한 협력을 하게 되었다.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몇 가지만 추려서 기술하겠다.

첫째, 노벨 평화상 수상에 관한 사실이다. 내가 스위스 제네바의 WCC에 근무를 시작한 게 1982년 2월부터이다. 나는 그때부터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후보 자격이 충분하며, 잘하면 수상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985년 그가 귀국하고 나서, 내가 동북아 지역에 출장을 올 때면 서울의 동교동 자택을 늘 찾아갔다. 많은 경우 가택 연금의 시기로 기억된다. 그 때,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김대중 옥중 서신> 등을 읽게 되고 몇몇의 번역본은 제네바로 갖고 갔으며 그곳의 동료들에게 일독을 권하기도 하였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스위스 제네바의 에큐메니컬 센터에는 루터교 세계연합체 사무총장이었던 노르웨이 출신 주교 구나 스탈셋 목사가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1983년 이미 노벨평화상 최종 심사위원회의 5명 중 한사람이었고 심사위원회 부의장으로 수고하고 있어서 그 책들은 자연히 그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나는 작년 오슬로의 그의 자택에 초대받아 오랜 시간 당시를 회상하였다. 스탈셋 목사는 오슬로의 대주교를 마지막으로 은퇴해 지금은 동티모르의 민주화 정착에 기여하고 있다. 나 이외에도 많은 국내외 인사들도 김 대통령을 추천했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의 결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7년 8월 최종 3인의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올라 수상자가 될 가능성 매우 커졌다. 그런데 노벨 평화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이에 따라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수상자로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그를 수상 후보(short list) 3인에 넣었고 나는 이 문제를 밝혀야 했었다.

한국에 출장을 왔다. 동교동 조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에게 오랜 숙고 끝에 대통령에 더 뜻이 있어서 평화상은 뒤로 미룬다는 당신의 뜻을 전했고 나는 이를 서울에서 스탈셋 목사를 통해 최종 심사위원회에 통보하였다. 이날이 1987년 8월 14일이었다. 그래서 198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남미 코스타리카의 정치가 아리아스 산체스가 수상하였다. 산체스는 2006년 대통령이 됐으며 오스카르 플랜을 제창하여 남미의 평화 민주주의에 공헌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이유는 아직도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났으며, 금전이 영향을 주었다'는 억측이 남아 있어서다. 노벨상은 로비를 할수록 수상이 멀어지며 금전의 개입은 어불성설로 이러한 근거 없는 억측들은 우리의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이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는 그 후 2000년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2000년 12월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 연설을 하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두 번째 얘기는 체코슬로바키아 하벨 대통령과의 관계이다. 내가 이끌고 있는 WCC 아시아국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하고 영국캠브리지에 와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일행을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에 3박4일 일정으로 초청하였다. 그때가 1993년 6월로 기억된다. 많은 얘기가 오갔는데 특히 김 전 대통령은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과의 만남을 원하셨다. 그래서 나는 WCC 유럽국의 마이라 부라이스 국장을 통해서 하벨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두 분은 그 후 의기가 잘 투합이 되어 민주주의, 평화, 인권 등의 세계적인 프로그램에서 많은 협력을 했다. 특히 두 분이 각각 체코와 한국이라는 무대에서 겪은 고초들이 너무나 비슷하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의 세계적인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모시고 있던 박금옥 총무 비서관(현재 우석대학교 초빙교수)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사흘간의 제네바 방문 계획을 짰다. 당연히 알프스 몽블랑 산을 가보시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 후 다음날 프로그램을 말씀드렸더니 "박 박사는 내가 고소 공포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십니까? 나는 비행기는 타지만 산은 오르지 못합니다"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몽블랑 대신 제네바의 레만 호수 150㎞를 돌아보면서 스위스와 프랑스의 전원 도시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치했던 기억이 난다.

유럽 현대사를 전공한 내 아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여사를 모신 차에 동승했었다. 김 전 대통령에게는 구경이 아니라 공부 시간이었다고 내 아내는 지금도 얘기한다. 스위스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물어보시면서 하나하나를 당신의 수첩에 기록, 본인이 소화하신 일 등은 지금도 즐거운 회상으로 우리 부부에게 남아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둘째 날엔 WCC의 사무총장 이하 간부들과 2시간 동안 간담회를 가졌다. 사무총장 초청 오찬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왼쪽에 당시 보좌관으로 수행한 김상우 박사를 앉게 하고 오른쪽에는 나더러 앉아 혹 당신이 귀가 약하셔서 잘못 알아들으면 도와달라고 하셨고 나에게 통역을 부탁 하셨다. 그런데 처음 서두를 영어로 시작하더니 이후 1시간 동안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영어로 강연하시는 게 아닌가! 모든 간부들이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모임이 끝나고 '선생님은 어디에서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는 나의 물음에 긴 감옥살이 하시면서 영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대답에 나는 놀랬다. 많은 곳에서 인동초(忍冬草)를 좋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노력하는 분, 늘 공부하시는 분, 그리고 한 순간도 헛되게 주어진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세 번째 얘기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투철한 신념이다. 나아가 참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과 행동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발전이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몇몇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정면 승부를 마다하지 않은, 참으로 값지고 위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1994년 3-4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109~126쪽) 당시 싱가포르 수상이었던 리콴유 박사는 '서구에 뿌리를 둔 인권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들지 말라. 왜냐하면 유교의 전통을 가진 아시아의 가치는 서구식 인권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뜻이 깊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에도 국제 사회에서는 늘 있어왔던 주장이었다. 특히 1993년 6월 유엔 인권이사회가 주최한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 인권 특별 총회에서 당시 말레이시아 수상이었던 마하티르 박사가 리콴유 박사와 비슷한 연설을 하여 후진국과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박수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포린어페어스> 1994년 11-12월호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선생은 리콴유 박사 등이 유교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음을 지적하면서 유교의 가르침을 오용하여 인권의 위대한 가치를 경제 발전과 대치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교정하였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모델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경제 발전이 정답임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 웅변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주장으로 전 세계 민주 활동가와 인권운동가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그를 세계적인 지도자로 재도약 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네 번째 얘기는 버마와의 인연이다. 선생은 버마 아웅산 수지 여사의 민주주의를 위한 비폭력 평화운동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아주 중요한 우선순위로 실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수지 여사는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1988년 가족을 영국의 옥스퍼드에 두고 단신 귀국하여 22년을 비폭력 평화 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어 오면서 4000만 버마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그는 작년 11월 18년간의 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제한적 민주주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철저한 확신과 실천을 수지 여사의 고난에 접합시켰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돌아가시기 1년여 전인 2008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남북 6·15 합의문 기념행사를 열면서 한국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지 여사의 동지들을 전원 초청했다. 이날 밤 그는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수지 여사 그리고 그녀의 동지들을 격려 하시면서 그날 밤의 모금액 전부를 전달했다.

대통령 재직 중에는 전 세계 지도자가 참가하는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 국제 회의를 개최하면서. 개회 벽두에 수지 여사의 화상 메시지를 보여줘 참석자 전원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오늘까지 한국 정부는 근 10년 이상 유엔 인권이사회의 '버마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결의안'에 공동 제안국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4000만 버마인들의 민주화 염원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중국, 일본, 그리고 아시아 그 어느 나라도 못하는 일이다.

나 역시 인권대사 재직 중 수지 여사의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 연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당원들이면서 당시에는 학생 신분으로 1988~1989년의 버마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군부의 검거를 피해 지금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버마인 중 열한 사람을 우선 유엔이 인정하는 정치적 난민 지위를 획득하도록 도와주었던 적이 있다. 그 경험을 지금도 난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제네바에서 근무하던 1995년과 1996년 가택 연금 중이던 수지 여사를 두 번이나 만난 사실을 나는 지금도 귀하게 간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직간접으로 그들의 민주화 운동을 돕고 있다. 1970~80년대에 지금의 버마인들처럼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는 버마의 민주화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고 그들을 우리는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은 국가 과제로 한반도의 평화 정착,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평화 통일, 동북아시아 평화 공동체 탄생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경제 성장 하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 모두는 깨달아야 한다. 돈 이외에 자유 평화 인권 환경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대내외에 실천함으로써 선진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국내의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은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훨씬 높이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남아프리카에는 만델라가 있고, 버마에는 앞서 언급한 수지가 있으며, 스위스에는 앙리 뒤낭, 미국에는 링컨이 세계인의 인구에 회자되듯이 한국에는 김대중이 외국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음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업적을 앞서 말한 선진국 도약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본도 중국도 이루지 못한 우리가 만들어 낸 민주주의가 하루하루 뿌리를 내리는 데에 그는 분명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이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그가 평소에 꿈꾸었던 한반도 전체의 민주주의, 평화 통일, 자유, 인권의 발전을 위해 지구상에서 아직도 고생하고 애쓰고 있는 많은 개발도상국들의 고뇌에 동참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우리의 성공 스토리를 전파하면서 지도급 개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중요하듯이 국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 필자 박경서는 1939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 부원장을 거쳐 1982년 2월부터 1999년 12월말까지 18년간 스위스 제네바 소재 세계교회헙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아시아 국장과 아시아 정책위 의장으로 일했으며 초대 대한민국인권대사(2001-2007년)와 국가 인권위원회 상임위원(2001-2004),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2005-2008년), 진실과 화해위원회 자문위원(2007-2010) 등을 역임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박경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전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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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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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한민국에는 10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현 이명박 대통령. 이 가운데 현직인 이 대통령을 제외한 9명의 전 대통령 중 재임 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까지 가장 성공적이었던 대통령을 꼽는다면 김대중이 아닐까 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학생들의 유혈 시위 끝에 외국으로 망명해 쓸쓸한 최후를 맞았고, 박정희는 18년 장기 독재 끝에 부하에게 사살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군부 출신의 전두환ㆍ노태우는 퇴임 후 재판에서 쿠데타 주범으로 처벌받는
수모를 겪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년 찾아온 IMF 외환위기로 불명예 퇴임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불과 1년여만에 자신에 대한 부패수사와 관련,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반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3번의 낙선과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숱한 고난과 곤경을 겪었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게다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는 등 성공적인 정치행로를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그리 후한 것 같지 않다. 대체로 해외에 비해 국내의 평가가 크게 인색한 데다가, 그에 대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그의 집권을 시작으로 우리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권시대 10년을 맛보았지만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난 진보개혁정권에서 이루어놓았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발전이 후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남북관계가 역행하며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정권교체가 급선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더 우선적인 과제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부였던 김대중정부의 공과 과, 성과와 한계에서 대해 이제 한번쯤 찬찬히 되짚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시안>은 이런 의미에서 김대중정부로부터 계승할 것은 무엇이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점검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정치인, 시민운동가, 학자,
문화예술인 등 각계 인사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들을 연재하는 것이다. 우선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기념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과의 인터뷰로 이 연재를 시작한다. 이 인터뷰는 지난 2월 21일 오후 김대중도서관에서 있었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맡았다.

앞으로 매주 화, 금요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회고와 평가의 글을 차례로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김대중 도서관의 내력, 그리고 '나와 김대중'

프레시안 : 올 8월이면 김대중 대통령 서거 2주년이 된다. 서거 1주년인 지난해 8월 <김대중 자서전>이 발간되면서 그의 일생이 공식적으로 정리됐지만, 아직 김대중에 대한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의 집권에서 시작된 진보개혁정권 10년 동안(1998-2008년) 진전됐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이명박 정부 이후 크게 후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김대중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그의 성취는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다시 말해 계승과 극복의 과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 인터뷰를 시작으로 각계 인사들은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우선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퇴임하면 재임시절 그의 통치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한데 모아 후세의 학자들이 그의 통치시기를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김대중 도서관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김대중 도서관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전 문화부장관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4년 설립한 '아태평화재단'(Asia-Pacific Peace Foundation)이 그 모체다. 대통령은 대통령재임시인 2002년 말,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본래의 정신에서 이 재단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했는데, 연세대학교가 이 건물리모델링해서 퇴임 직후인 2003년에 대통령기념도서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살고 있는 동교동 집 외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고 했다.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내게 일임했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께서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EU 공동체와 평화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것은 그분이 평생 가지고 있던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및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방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영국에서 귀국하신 후 94년 아태평화재단을 만드신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다. 아태평화재단을 만든 재원은 대통령께서 내게 맡긴 그 재산으로 했다. 나는 그 당시 영국에서 안식년으로 연구하던 중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프리오'(PRIO, Peace Research Institute Oslo, 오슬로국제평화연구소)에 초청이 돼 1주일간 방문했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프리오는 세계적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이 세운 연구소로 평화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께 프리오에 대한 소개와 함께 프리오 같은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의 긴 편지를 썼다. 대통령은 이 편지에 대해 아주 흡족해 했다. 대통령께서 구상한 것에 내가 조금 도움을 드린 것이다. 아태평화재단은 처음에 동교동의 한 빌딩에 임대해서 있다가 김대중대통령 사저 바로 옆에 건축되었는데, 이 자리는 중앙정보부가 김대중대통령을 비밀리에 감시하던 안가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연세대학교가 기증받은 건물을 김대중도서관으로 개관하자 매우 기뻐했고, 당신이 애장했던 1만 3000여 권의 도서와 일생동안의 정치활동, 대통령재임시 통치 메모,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민주화와 평화통일 관련자료 10만 여점과 노벨평화상 상금 중 3억 원도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대통령 기념도서관 겸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프레시안 : 김대중 도서관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는가?

김성재 : 김대중도서관은 민주주의, 평화, 빈곤퇴치의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김대중대통령이 퇴임 후 계속 활동한 일들이기도 하다. 김대중도서관은 이 목적을 가지고 크게 다섯 가지 사업을 한다. 첫 번째는 미국의 전직대통령들 기념도서관처럼 전시관을 만들어 김대중대통령의 일생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다. 출생에서 서거까지 모든 사적 자료와 문서, 사진, 영상 자료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 평화통일 관련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두 번째는 국내외에서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 관련 사료를 발굴, 수집하고, 해제, 연구하며, 중요한 인사들의 구술사 프로젝트수행한다. 세 번째는 도서관 목적에 따른 주제별 연구를 국내외 학자들과 함께 한다. 그리고 국제교류와 학술 심포지엄 및 세미나도 한다. 네 번째는 교육 과정인데, 미국의 케네디 스쿨과 같은 학술연구 및 교육과정으로 김대중평화아카데미 과정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고, 연세대 통일연구소와 협력하여 평화통일 관련 석박사 과정도 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지속적으로 디지털 아카이브구축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도서 및 자료를 출판하는 사업을 한다.

프레시안 : 김성재 관장과 김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은?

▲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한국신학대학의 명예학장인 장공 김재준목사님이 위원장이었고 김대중의원이 신민당 대표로 참석을 했다. 나는 학생회 대표였지만 이 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고 김재준목사님을 도우면서 김대중의원을 알게 됐는데 개별적인 만남은 없었다. 김재준목사님은 당시 김대중의원을 높이 평가하면서 '김대중선생은 훌륭한 정치인이니 자네들이 민주화운동을 할 때 김대중선생을 도우라'고 했다.

이후 나는 1971년 대선 때 김대중후보를 위해 부정선거를 막는 표지키기 참관인 운동을 주도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신구교 합동으로 드린 3.1절미사에서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을
준비할 때, 나는 문익환목사님 등 재야인사와 김대중대통령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연금 상태였고, 또한 이 일은 비밀리에 성사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복'이라는 암호를 가지고 연락했다. 예를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성명서 초안이 완성되면 '한복이 다됐다'고 연락하는 식이었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내가 교수로 있던 한신대에 김대중대통령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했었다. 1987년 김대중대통령께서 평민당을 만들 때는 나에게 정계에 입문하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이후에도 두 번 전국구 의원을 하라고 기회를 주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부터 사회복지와 교육 분야 등의 사회정책 자문역할은 계속했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고, 문화부장관도 했는데.

김성재 :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대통령자문새교육공동체위원회 상임위원과 일본 대중문화개방 등의 문화정책 자문을 위해 문화관광부자문위원장을 했다. 99년에 국민여론 수렴과 개혁 그리고 공직기장을 위해 신설된 민정수석을 했고, 2000년에는 정책기획수석을 했다. 정책기획수석은 인사, 예산, 정책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는데, 대통령께서 개혁적인 국정수행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했다. 이 때 대통령의 뜻을 따라 정보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고, 국민기초생활보장 등 인권에 의한 국가복지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학술진흥재단이사장을 하다가 문화관광부장관을 했다. 김대중대통령 재임 5년 동안 함께 일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프레시안 : 김 관장은 40년 이상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아 왔고,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내각에도 있었으므로, 그를 매우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겠다. 김대중은 해방 이후 최초의 수평적 권력 교체를 이뤘고,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했으며, 또 최초로 정권을 재창출한 대통령이다. 이 정도면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나?

김성재 : 정말 성공한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과 함께 성공했고, 대한민국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이것을 나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국가부도사태의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국가, 세계 최선두 정보화와 세계10위권 경제발전, 복지국가와 문화국가, 6.15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남북화해협력과 자주적 국제외교, 노벨평화상 수상 등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전세계가 감탄했다. 국민들도 역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고 박수를 보냈다. 지금 이명박정부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를 역주행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다시 방향을 전환할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맛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바람을 보라. 역사는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고, 경제가 발전하고, 인권으로 복지를 보장받고, 남북의 갈등이 고조되어도 평화롭게 살고, 국제사회 주변국에서 중심국으로 위상을 높이고, 우리 국민들이 세계에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국민들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프레시안 : 오랫동안 김 전 대통령을 봐 왔는데, 김대중 리더십,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나?

▲ 5번의 죽을 고비와 20여 년 간의 투옥, 망명, 연금의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분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투철한 신념과 의지를 말하고 싶다. 본래 김대중대통령은 본인도 그렇게 말했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5번의 죽을 고비와 20여 년 간의 투옥, 망명, 연금의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또한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자신을 죽이려했던 박정희,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용서하고 화해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음해한 모든 사람들도 용서했다. 햇볕정책도 이런 화해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대통령 장례식 때 장남 김홍일의원이 고문 후유증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박해는 용서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랑하는 아들에게 한 행위를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너무도 위대하다'고 추모했다. 김대중대통령은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난 직후 아들에게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으로 승리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김대중대통령이 옥중에서 쓴 메모가 있는데, 내용이 이렇다. '용서 없이는 우리 사회,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우리는 오랜 당쟁과, 식민지를 거치면서 원한이 너무 많다. 이것은 용서로 풀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똑똑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발전을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것은 우리 사회에 용서와 화해가 없으면 우리 국민과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대통령께서 서거 한 후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나는 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판했고, 나쁜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 진면목을 알게 되고, 또 여기 와서 보니 내가 (그동안) 잘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면서 더욱 존경을 표하고, 후원에 참여하는 분들도 꽤 많다.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정부에 제기됐던 비판적 지적들

프레시안 : DJ의 재임 5년간 성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관계 등을 그의 업적으로 꼽고 있다. 반면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비판이 경제 분야에서 신자유주의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부분이다. 물론 현재 상황에 대해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기는 좀 그렇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3년을 지내왔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같은 평가에 대해 어떻게 보나?

김성재 : 우리사회 양극화 문제를 잘 못 인식하는 것 같다. 우리사회를 양극화 체제로 만들고 항존하는 빈민계급을 탄생시킨 것은 박정희군사정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제발전은 박정희 대통령, 민주화는 김대중 대통령, 이렇게 얘기하는데, 절반만 맞는 잘못된 인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물론 경제개발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으로 빈민을 의도적으로 양산한 불의한 독재개발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박정희군사정권은 산업기술 집약이 아니라 단순노동집약 정책으로 수출주도형의 경제개발을 하면서 저임금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명분으로 저곡가정책을 했다. 저곡가정책은 농민을 빈민으로 만들었다. 빈민이 된 농민은 농토를 버리고 서울과 공업단지가 있는 도시로 이농해서 저임금노동자와 도시빈민이 되었다. 이미 저임금 노동인데도, 빈민농민이 대거 몰려들자 노동자 공급과잉으로 저임금이 정당화되고 더 낮아졌다. 당시 노동자 임금으로는 살 수가 없어 잔업을 포함해서 16시간씩 코피 쏟으며 화장실도 못가고 일해야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이런 비참한 살인적인 노동현실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런 극한에 처한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알리려고 '우리는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것이다.

박정희군사정권은 경제성장을 빌미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을 희생시켰다. 당시
노조결성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민중들의 정당한 권리와 분배요구는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심지어 빨갱이들의 짓이라고 반공법으로 처벌했다. 반면에 도리어 산업기술과 경제가 일본에 절대적으로 예속당하는 산업 체제를 만들어 일본 경제를 살찌웠다. 이 결과 지금까지도 IT 분야외의 기술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본에 더 많은 로열티를 주어야 한다. 현재도 1년에 수백억 달러의 로열티를 일본에 주고 있다.

또한 군사정권은 권력유지와 부정한 특혜로 재벌과
대기업들을 갑자기 만들어 내었다. 현재 재벌들과 대기업 상당수는 이렇게 군사정권과 유착한 특혜로 된 것이지 정당하게 땀 흘리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마치 자기들이 노력해서 된 것처럼 거짓 성공신화를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지금까지도 특혜, 탈법, 착취의 불의한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군사정권 때의 경제성장은 결코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때 우리나라 경제기반을 만들고, 성장시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것이 우리사회가 빈부로 양극화 된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김영삼정부가 도입했다. 김영삼정부의 최대 슬로건이 '세계화'였다. 1990년을 전후해서 구소련이 해체되고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세계는 국경 없는 단일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른 새로운 세계시장 질서를 만든 것이 세계무역기구(WTO)였다. 미국은 이 WTO를 통한 신자유주의로 세계경제를 지배했다. 이렇게 변화된 세계경제 상황에서 김영삼정부는 OECD에 가입하고 외화자유 정책을 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책도 없이 정치적 과시용으로 성급하게 경제 개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시장에 무작정
편입이 돼 버린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가 초래됐고, 국가 부도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이 때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프레시안 : 양극화 등 현재 드러나고 있는 여러 경제적 문제가 DJ의 잘못이기보다는 YS의 성급한 개방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김성재 : 그렇다. 김영삼정부가 어설픈 세계화를 통해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경제를 파탄 낸 것을 김대중대통령이 조기에 극복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게 10위권으로 발전시킨 것은 국민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런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 병폐를 막으려했다. 이미 세계화된 시장경제체제에서, 특히 우리나라 경제가 80% 이상 해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 폐해를 막기 위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추진했다. 민주적 시장경제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그리고 무너진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공공, 기업, 금융, 노사 등 4대 개혁을 했다. 당시 이런 개혁적 구조조정을 서서히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개발 이후 30 여 년간 쌓여진 적폐를 청산하는 과정과 준비없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김영삼정부의 실패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김대중대통령은 신자유주의 병폐를 예방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문제들을 해결하고, 국민의 존엄한 생존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생산적복지 정책을 함께 추진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와 중3무상의무교육 완성, 의료, 연금, 고용, 실업 등 4대 사회보험을 실현했다. 미국의 오바마대통령이 의료사회보험을 도입하려고 할 때, 이것은 미국 헌법정신, 곧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 반대한 것을 생각해 보면, 김대중대통령은 결코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은 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시켰다. 신자유주의라면 김영삼정부에서도 불법이었던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특히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시장개입을 못하게 하는데, 김대중대통령은 대통령직속으로 중소기업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직접 중소기업을 챙겼다. 재벌과 대기업문어발식 경영 체제를 개혁하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영역에는 진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진입 규제를 노무현정부 때 풀었고, 현 정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벌과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판국이 되었다. 또한 김대중대통령은 하청도, 납품도 다단계나 불공정하게 하지 않도록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해 엄격히 감시하고 수시로 보고 받았다. 그런데 현 이명박정부에서는 재벌들과 대기업들이 권력의 비호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중소기업으로부터 하청과 납품과정에서 몇 배 이상의 이윤을 챙기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자유민주주의도 시장 경쟁 논리도 아니다. 재벌과 대기업들의 막대한 이익실적은 정상적인 경영의 결과라기보다 상당액이 중소기업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중소기업인들과 소상공인들마저 빈민으로 전락시키고, 파렴치하게도 저들이 망하는 것은 무능하고 게으름의 부도덕한 결과라고 말한다.

▲ "김영삼정부가 어설픈 세계화를 통해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경제를 파탄 낸 것을 김대중대통령이 조기에 극복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게 10위권으로 발전시킨 것은 국민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런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 병폐를 막으려했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현재의 경제적 곤경에 DJ의 잘못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김성재 : 현재 서민과 빈민들의 고통이 김대중대통령의 잘못된 정책에 근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보수정권과 보수세력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데, 일부 진보진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물론 김대중대통령이 모두 다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대통령의 정책은 분명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내외 상황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책임전가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사실 정부수립 50년만에 자민련과 연합해서 첫 정권교체를 한 상황, IMF외환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정책들도 많았다. 국민과 시민단체들은 강하게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실업을 발생시키는 구조조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개혁과 실업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라는 요구를 했는데, 이런 요구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개혁에 대해 보수기득권세력만 저항한 것이 아니다. 진보개혁세력들도 자신들의 기존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노무현정부가 뒤를 이어 출범했을 때 미진했던 개혁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개혁은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정부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입장에서 새판짜기를 하면서 김대중정부가 이룩해놓았던 근간을 흔들고 무너뜨렸다. 사실 노무현정부를 김대중정부보다 더 진보적이고 심지어 좌파라고 말하는데, 경제와 사회정책만이 아니라 남북관계나, 한미, 한중, 한일 관계를 보면 원칙 없이 상항에 따라 상당히 좌우로 왔다갔다 했다. 노무현정부가 생각은 진보적으로 했지만 정책 추진과정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혼선을 빚었던 측면이 많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김 관장이 보기에 김대중 리더십의 단점이나 아쉬운 점은 없나?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도 사람인데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일반적으로 김대중대통령께 너무 완벽한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 같다. 국가 정책은 어느 한 영역이 아니기에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다양한 국민적 요구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영역 또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 할 것이 있다고 본다. 당시 개혁을 좀 더 시스템적으로 강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개혁 논쟁에서 수술환자가 비유로 등장 했는데, '환자가 체력이 약하면 수술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로 체력을 기르면서 개혁해야 한다. 아니면 기업이 죽는다'는 논리로 개혁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다. 평가는 열려있다.

프레시안 : DJ에 대한 비판 중에 하나가 87년 대선 과정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것이다. 민주화가 됐음에도 정권을 군부세력에 내준 것은 물론이고 이후 민주화세력 자체를 분열시킴으로써 우리 정치에 두고두고 해악을 끼쳤다는 비판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은 후에 '그 때 내가 단일화를 양보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은 후보단일화 논의 과정에 2가지 불공정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당시 후보단일화를 위해 재야 모든 단체들은 고려대에서 두 후보를 초청해서 강연을 듣고 결정하기로 했다. 재야단체는 강연 후 거의 절대적으로 김대중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소수 김영삼후보 지지 재야단체의 반대 때문에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김대중대통령은 후보단일화 과정을 공개경쟁으로 하기를 원했는데, 정치적으로 진행된 것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병에 걸려 후보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통령병만으로 그 숱한 박해와 시련을 이기고 3전4기하며 대통령이 되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87년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께서 대통령이 된 후에, 그리고 퇴임 후에도 결코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려 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우리가 87년 후보단일화 실패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이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에 이에 대한 평가는 공정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에게만 역사적 멍에를 씌우는 것은 불공평하다.

남북 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비판들에 대해

▲ "물리적 흡수통일은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큰 민족의 비극을 가져 온다. 동서독의 예를 살펴보라."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김대중대통령은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 가치를 별로 높게 보는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보수 일각에서는 로비를 통해 받은 상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도 있다. 실제 노벨상 수상을 위해 돈이나 뇌물을 건네는 불법적 로비를 했나.

김성재 : 전혀 사실이 아니다. 며칠 전에 노벨위원회 자문인 한영우 박사가 언론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는데, '당시 김한정 부속실장이 와서 김대중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받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사실이 있고, 서양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김 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리기 위해 자료를 번역해서 설명을 하는 등의 활동은 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다 당연히 하는 것이고 로비가 아니다. 도리어 돈이나 뇌물을 건네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노벨위원회를 모독하는 것이고 이 노벨상 제도를 폄하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비판도 정도와 품격이 있고, 금기가 있는데, 시장모리배 같은 사고로 계속 떠드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다른 숨겨진 불순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에서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대통령을 정말 존경하고 있다.

프레시안 : 또 6.15정상회담도 김정일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한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있는데.

김성재 : 이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비아냥은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동서독의 관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독일이 통일된 것을 구서독의 흡수통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구서독과의 협상으로 구소련의 군대가 구동독지역에서 철수하자 구동독에서 촛불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이 결과로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되고 압승을 거둔 기독교민주당 의회가 구서독의 통일 절차에 따른 통합을 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구서독이 흡수한 것이 아니라 구동독주민들이 원해서 통일이 되었다. 구동독주민들이 구서독과 통일하도록 마음을 갖게 한 중요한 원인은 구서독정부의 동방정책 때문이었다. 구서독은 동방정책으로 매년 20억 달러씩 20여년간 구동독에 지원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소원인데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지 않고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나? 물리적 흡수통일은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큰 민족의 비극을 가져
온다. 따라서 남북화해와 협력을 주창한 김대중대통령이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은 동족에 대한 인도적 차원이었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1억달러 보내는 것을 야당과 협의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모들이 이것으로 논란을 하게 되면 정상회담도 불가능하게 되고,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의견을 제시해서 통치적 차원에서 결정했다.

프레시안 : 인도주의적 지원이라고 했는데, 정상회담 하기 직전에 5억 달러가 갔다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대가성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삼는다.

김성재 : 정상회담 전에 5억 달러 주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특검에서 문제된 것도 1억 달러였는데 5억 달러라고 하는 것은 현대아산의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뭉뚱그려 하는 말로 정략적인 것이다. 이런 논리로 말하자면 김영삼정부 때에 북한에 지원한 돈은 이 보다도 훨씬 더 많다.

프레시안 : 이런 비판도 있다. DJ의 남북화해가 이른바 보수세력을 포함한 '전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루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마뜩찮게 생각했던 보수를 등에 업고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완전히 대북정책을 거꾸로 돌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는데?

김성재 : 그런 주장이 아주 합리적이고 멋있는 것 같지만, 사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재와 같은 갈등의 정치상황에서 어떻게 여야가 남북관계에서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나? 또 컨센서스 없는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남남 갈등이 더 불거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책임 전가와 핑계일 뿐이다. 사실 김대중대통령은 정상회담 전에 야당대표와 대화하려고 했고, 정상회담하고 난 후에도 그 결과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야당이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들은 항상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것은 국민적 컨센서스가 분명히 있는 것 아닌가?

노무현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특검 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상호주의와 공개주의인데, 이것 때문에 남북관계가 더 발전하지 못했다. 후에 노무현정부도 상호주의와 공개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또 '컨센서스'를 말하는 사람들이 독일의 예를 드는데, 독일의 경우 구서독 사회민주당 정부의 동방정책을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이 보수당이지만 협력하고 자기들이 집권했을 때도 계속 추진한 것은 '하나의 독일' 정책을 국내 정치로 정략화하지 않는 정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은 동서독 간에 전쟁을 하지 않았고, 구서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와 구동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우리처럼 극과 극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비판을 보수세력이 하면 모를까, 소위 진보적인 인사라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책임전가 또는 사이비 진보의 자위의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국내에서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평가가 뚜렷이 대비되는 한편, 국내의 평가에 비해 외국에서의 평가가 훨씬 우호적인 것인 것 같다. 왜 그럴까?

▲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애증과 오해가 많은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그에게 덧씌운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호남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호남차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천형 같은 조작 선동은 정말 사악한 짓이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3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입시키고, 이에 편승한 보수세력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면서 이것이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애증과 오해가 많은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그에게 덧씌운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호남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호남차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천형 같은 조작 선동은 정말 사악한 짓이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3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입시키고, 이에 편승한 보수세력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면서 이것이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이에 반해 국제사회는 김대중대통령에 대해 이해관계를 넘어 객관적 평가를 하지 때문에 세계적인 훌륭한 지도자로 존경한다. 내가 만난 일본과 중국지식인들은 김대중대통령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없는 자기들은 부끄럽고, 한국이 부럽다고 했다.

프레시안 : 요약하면, 한국 국민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고, 그 이유는 김대중에 덧씌워진 군사독재시절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라는 말인가?

김성재 : 그렇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김대중대통령을 국내처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면 김대중대통령 생전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고, 미국, 중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세계주요 국가들의 유명한 대학들이 김대중대통령께 명예박사학위나 명예교수직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김대중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뉴스위크>는 세계와 사회를 변화시킨 11사람의 트랜스포머 중 한 사람으로,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될 36명의 인사 중 한사람으로 추모했는데, 이것도 국내 부정적 평가 기준으로 보면 <뉴스위크>가 잘못된 정보로 선정하고 추모했거나 거짓된 보도를 한 것이 된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해외의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용서와 화해에 바탕을 둔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중동 문제 등 국제적 분쟁에 중요한 해결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 미국의 대북특사인 보즈워스도 북핵문제 해결은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 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보수는 퍼주기라고 비판하고 진보는 컨센서스가 부족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박정희군사정권의 부정한 조작 이미지만이 아니라 김대중대통령에게 배 아픈 사람들이 만든 부정한 이미지도 있다고 본다. 상고 나온 주제에 잘난 척 한다고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다. 김대중대통령 재임 시에 한국의 빠른 발전 모습을 보고 전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인 제프리 존스가 '나는 한국이 두렵다'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이 이런 방향에서 이런 속도로 발전하면 30년내에 미국을 앞지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단한가지 조건을 해결해야 하는데,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병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너무도 뼈아픈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프레시안 : 지난 해 발간된 <김대중자서전>에 대해 일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솔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너무 정당화만 해서 차라리 자서전을 안 쓰는 게 나았겠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는데.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준비하기 전에 저명인사 몇 분들이 김대중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에 그 분에 대한 누명과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약 30여명 정도 글을 쓸 계획을 세우고 대통령께 의논한 적이 있다. 내가 간사 역할을 해서 김대중대통령께 이런 의견을 전했더니 대통령께서 '웃으며, 그런 것은 나 죽은 후에 해야지 내가 살아있을 때 하면 나를 의식해서 좋은 말만 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추진되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께서는 자서전도 사후에 출판하도록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국민과 역사가 자신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해주기를 바랐다.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말했다. 첫째는 신념과 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은 국민에게 솔직하게 자기 일생과 통치기록을 남기는 것이 의무라고 했다. 자서전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진솔하게 써서 매우 감동적이라고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본인이 서자라는 것도 밝혔다. 그러므로 이 자서전이 솔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와의 관계

프레시안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DJ가 권양숙 여사를 붙잡고 통곡한 장면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또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방 후 우리 국민이 가진 두 분의 진보개혁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 두 분은 어떤 관계였나?

김성재 :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김대중대통령은 참으로 좋아했다. 나에게 '이제 내가 마음 편히 청와대를 떠날 수 있게 됐다'고, 기쁜 마음으로 퇴임을 했다. 그런데 노무현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북송금 특검을 강행하자 크게 섭섭해 했다.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평생 헌신적으로 노력한 것이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보수세력에게 빌미를 주어 국가와 민족에게 초래될 불행을 염려했다.

프레시안 : 당시 반응을 들은 것을 말해줄 수 있나?

▲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압박으로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은 아직 젊은데,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라도 검찰로부터 매일 모욕당하고 여론으로 압박당하는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직접적이라기보다, 포괄적으로 얘기하겠다. 대북 특검은 정치적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DJ정부를 딛고 일어서야 된다는 정치적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내부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도 들었다. 처음에는 (대북송금 특검을) 안 할 것이라고 했다. 국무위원도 다 반대했고, 주변 참모들도 다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특검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노대통령 최측근인 청와대 고위인사가 내게 특검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접 말했다. 그래서 내가 김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께서 안심했는데, 뒤집어진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을 분당 했을 때 김대통령께서 정말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속으로 감추고 이렇게 말했다. '김장관, 어쩌면 노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그렇게 분노를 했음에도 '김 장관 그러나 우리가 참읍시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이 큰 틀에서는 결국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갈 거요. 한나라당에서 대통령이 됐다면 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을 거 아뇨. 그걸로 위안을 삼읍시다' 이것이 당시 대통령의 말씀이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자시절에 대통령께 찾아와서 대통령님의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고, 대통령께서는 흡족해했다. 그러나 계승보다 판을 엎어 놓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로 사분오열되고 분당으로 몰려가는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대북특검을 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한나라당은 얼씨구나 하고 뭉쳐서 공격했고, 민주당과 개혁세력은 분열됐다. 결국 이것이 분당으로까지 치달렸고,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을 승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께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믿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할 것을 권유했고, 정상회담 후에는 관계가 좋아졌다. 특히 이명박정부가 민주주의, 남북관계, 민생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힘을 합쳐 이명박대통령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압박으로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은 아직 젊은데,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라도 검찰로부터 매일 모욕당하고 여론으로 압박당하는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 김대중대통령께서 얼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아꼈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내가 정책기획수석을 할 때 노무현 전 의원이 부산 총선에서 낙선한 후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나는 노무현 전 의원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같이 한 친숙한 관계였다. 인사동 음식점에서 만났는데, '김수석 내가 대통령후보로 나가려고 하는데 나를 좀 도와주소'라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 같은데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했더니, '대통령하려면 국정 수행경험이 필요해요' 했다. 이후 대통령께 노무현 당시 전 의원을 만난 보고를 했다. 대통령께서 '노무현 의원은 참으로 정의롭고 소신있는 유능한 정치인이요. 앞으로 기회를 봅시다'고 했다. 얼마 후에 노무현 전 의원은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되었다.

▲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은, 복지를 인권에 의한 국민의 권리로 인식해서 시민권, 사회권으로서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대중정부에서 복지는 분야별 복지와 함께 통합적인 경제사회정책으로 추진되었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요즘 복지가 정치판의 최대 화두가 됐다. 대체로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의 시작은 김대중 정부부터라고 얘기 하는데,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을 확대 계승 했다고 보나?

김성재 : 솔직하게 말하면 노무현정부는 복지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고, 따라서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인가?

김성재 :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은, 복지를 인권에 의한 국민의 권리로 인식해서 시민권, 사회권으로서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대중정부에서 복지는 분야별 복지와 함께 통합적인 경제사회정책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노무현정부는 복지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복지를 국민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로 생각하지 않고 지방정부로 이관했다. 국가의 책무를 방기했고 지역이 경제, 사회, 문화적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정부의 2/3정도가 한나라당 정부라는 것도 간과했다. 그리고 지방의 복지재벌, 토호세력들이 정치권과 결탁하고 정부 지원예산을 거의 독식하고 있다는 현실도 외면했다.

그리고 노무현정부가 복지예산을 많이 증액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복지예산 총액에 당시 건교부 서민
주택 예산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의 일반 예산에서의 복지예산은 줄었고, 기금 등의 특별예산으로 일부 보충됐다. 특별예산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기금 운용에 따라 언제든지 가변적이 된다. 특히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 인권의 원칙에 근거하지 않고 재정의 한계선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장애인 차별에 대한 시정 권리가 축소되어 이 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계는 노무현정부를 비판하고, 이 법이 통과된 직후부터 개정운동을 시작했다. 보육도 시장에 맡겼고, 의료민영화도 추진하려고 했다. 그래서 시민, 복지단체와 장애인계로부터 노무현정부는 복지를 도리어 후퇴시켰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재벌과 대기업중소기업소상공인 업종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한 규제를 풀었고, 한미 FTA도 강행하려 했다. 결국 안타깝게도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길을 닦아 준 셈이 되었다.

프레시안 : 김 관장은 DJ정부 시절 복지와 관련해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복지정책을 놓고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까지 들어와서 갑론을박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코멘트를 하신다면?

김성재 : 박근혜 전 대표가 복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발표된 박근혜 전 대표의 복지정책은 안타깝게도 무늬만 복지이고, 속빈강정 같은 그야말로 포퓰리즘의 전형 같다. 진정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변화된 시대와 우리 현실에서 복지를 말하려면 인권에 의한 복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는 공동체정신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복지는 소득보장 한 분야만이 아니라 의료, 교육, 주거, 일자리 등 통합적인 사회정책으로써의 복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복지인식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 정책팀이 발표한 것을 보면, 재원문제는 둘째치고 여전히 과거적이다. 특히 생애주기별 복지라는 것은, 현재도 영유아복지와 노인복지가 서로 중요성과 재원 면에서 우선순위의 정치적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통합이 아니라 연령별, 세대별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으로 복지보다 반사회정책으로 귀결될 우려를 갖게 한다. 박근혜 전 대표가 국민과 국가를 위해 훌륭한 복지정책을 제시하면 좋겠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시대를 산 정치인인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화시대에 정치를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과의 교감 능력이 탁월했다. 게다가 자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택하면서 일반인들의 정서 속에서 김대중보다는 노무현에 대한 감정이 울림이 훨씬 큰 것 같다. 어떻게 보나?

김성재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극적이고 비극적이어서 국민들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크다고 본다. 또한 소탈했던 인간미에 대한 향수가 있다. 탈권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의 역사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프레시안 : 노무현 재단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고 연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대중 도서관과 상호 협동을 하나?

김성재 : 그렇다. 도서관에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여기서 정책 토론회도 한다.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을 처음 만들 때도 같이했다. 나는 노무현정부의 공과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하려고 했다. 잘 못한 것은 극복하고 잘 한 것은 더 발전시켜 가야 노무현대통령의 역사가 산다. 김대중대통령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찬양가도, 잘못된 비판도 삼가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김 관장과 인터뷰하면서 느낀 느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는 아직 김대중이라는 정치 지도자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가 될 것 같다. 아직도 박정희 시대라는 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일부 민주화 됐지만 박정희 시대를 완전히 극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김대중 도서관이 해야 할 역할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인가?

▲ 이야기 나누는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와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프레시안(손문상)

김성재 :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대통령의 진면목을 잘 모르면서 겉으로, 정치적으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김대중대통령의 책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심지어 자서전도 정부여당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김대중대통령 서거 이후 김대중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한 달 평균 1500명 정도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녀들과 함께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방문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시관을 둘러보고 김대중대통령을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역사가는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후 10년이 지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김대중대통령의 진가는 더욱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의 특별기획으로 올해 8월 김대중대통령 서거 2주기 때 학술 심포지엄과 '김대중연보'를 발간할 계획이다. 3년 동안 준비했는데, 항목으로는 약 2만 정도,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연보이다. 김대중대통령이 일생동안 만난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이 연보를 보면 대통령께서 언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준비를 했는데, 김대중전집을 5개년 계획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그동안 나왔던 전집과 30여권의 단행본 그리고 출판되지 않았던 국회발언록, 강연원고, 인터뷰 내용 등과 사진 자료들도 모두 포함시킬 계획이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교류 및 공동연구 제안도 상당수 있어 적극적으로 수행할 계획이다. 김대중도서관의 본래 목적사업인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빈곤퇴치를 위한 김대중평화아카데미 등의 제반 연구, 교육 사업들도 지속적으로 할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 사업을 하는데 국고 지원은 있나?

김성재 :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매칭펀드 방식으로 일부 지원받고 있다. 김대중대통령께서 재임 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화해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위해 200억을 지원했는데, 최근 다행하게 기념도서관이 건립되고 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념관도 지어지고, 노무현 전 대통령 측도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 11월 2일 개관 7주년을 기념해서 전직대통령 기념관, 도서관의 역사적 필요성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많은 관심과 호응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기념관들이 건립되면 대통령 정치문화도 발전되고,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들도 국민과 역사를 의식해서 더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도서관은 연세대 자율운영기관이기 때문에 대학본부에서 건물유지 및 관리비만 지원해주고 모든 프로그램과 사업은 후원금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돈이 없어서 할 일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을 제대로 하면 필요한 재원은 충당된다. 감사한 것은 자발적인 후원회원들이 약 1000명 있고, 직원들도 적은 인원수이지만 김대중대통령의 뜻을 이어서 펼쳐간다는 사명감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관심을 가져준 프레시안에도 감사한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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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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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9월 28일 김정은 후계가 공식화된 무렵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북한 당대표자회 3대세습 어떻게 보시나요?”라고 운을 뗀 후 “국가의 운명을 유전자 재조합이라는 생물학적 우연에 맡기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게 저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가장 두려운 것은 북이 혼란에 빠지고, 권력의 공백을 친중 정권이 채우는 것일 것”이라며 “북한이 중국의 동북4성 중 하나가 된다면 통일은 더 멀어지게 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유 전 장관은 북한의 정권 세습을 기업세습과 유사하게 보는 시각에 대해선 “국가권력의 세습과 기업의 상속은 좀 다르다”며 “기업은 사적 권력이다. 한 기업이 세습 때문에 망하면 다른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대체가 불가능한 공적 권력”이라는 논리로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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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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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째 1위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단어가 유시민 이다.
또한, 그를 알아갈수록 의리있고, 지적이며, 사고적이고, 진취적이고, 정의로운 모습에 매번 반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와 대면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본적은 없다.

그렇지만 다른 여느 유명인이나 정치인보다는 그나마 가장 정겨운 지척에서 본적이 있는 분이기도 하다.
어렵지 않게..

유시민이는 정치적으로는 고달퍼가며 성장해야 하는 인물이다.
그것은 아직 젊고 창창한 나이에 유명세를 얻었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이 그를 조커카드로 사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과 주변에서 그를 평탄하고 평이한 길로 가게 두지를 않는다.

얼마나 큰 인물이 되려하기에 젊어서부터 그리 울퉁불퉁 모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지 ...
앞으로 크게 대성할 분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에게 실망을 했다.
트위터에 들어가서 '내가 팔로잉했으나, 나를 팔로잉하지 않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보니 설마~
이게 아니겠지..

내가 그간 운동해준것도 있는데.. --; 하면서
내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유시민이 나와 팔로워 관계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된것이다. 아니, 유시민이 나를 팔로잉하지 않았구나!
하면서 .. .. 쩝..속상했다.

이거시 무슨 소통인겨~! 한나라당 무식이들은 트위터에 무식한자들의 당이라고 온라인창당식도 했다는데

하긴, 유명인들 얼마나 유명한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의 잡담을 다 듣고 있을려면 본연의 트위터 사용 목적이 제대로 이루어질리 없을듯 싶다.

트위터에 유명하다고 한 사람들 다 팔로잉하지 않더구먼.. ex)김연아, 이외수, 박경철, 여자앵커, 천호선, 그밖에 쩜 이쁜사진 올린 언니들, 등등

그중에서 유시민은 진짜 마음이 아프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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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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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말로써 해결하지 못하고,
사건을 증거로써 해결하지 못하고,
강압적 강제적 법적구속으로 다스리려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국민의 한사람의 의구심을 정치하는자 스스로 도량과 지혜로 다스리지 못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다스리는 무지각, 몰상식은 도체 어디서 나오는 발상인지?
씁쓸한 우인치국이다.


‘천안함 의혹’을 제기한 도올 김용옥씨(62)에 대한 고발사건이 무혐의로 각하됐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신유철 부장검사)는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들이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비난한 혐의로 도올 김용옥씨를 고발한 사건을 무혐의 처리했다고 27일 밝혔다.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이 됐는데 김씨 발언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할 만한 범죄 구성요건을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도올은 지난 5월23일 서울 봉은사 특별강연에서 천안함 사태에 대한 합동조사단 발표와 관련해 “그 결과는 도저히 설득이 되지 않았다”며 “이런 말을 하면 잡혀가겠지만 나는 0.0001%도 설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도올은 “장성들이 앉아서 발표하면서 ‘이것은 전부 빨갱이들이 한 짓이다. 프로펠러를 돌려서 이렇게 와서 빵 터지면’, 세상에 그런 이상한, 북한이 그 정도 기술이 있다고?”라며 “미국 해군 군사력이 총집결해 있고, 가장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이지스함이 두 대나 있었고, 서해 근해에 13척의 함대가 있었다는데, 거기를 뚫고 들어와서 뻥? 이것은 진짜 웃기는 개그올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검찰은 합동참모본부 소속 대령 7명이 천안함 함수와 함미의 분리장면을 담은 TOD(열상감시장비) 동영상과 관련해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은 계속 수사 중이다.



MB와 한나라당은 위법, 법원은 무죄 ==> 독재정치란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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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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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2년, 현재의 관점에서도 진취적이고 다소 파격적인 공약들을 내세우며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때 선거에서 90만 표 차이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지만 당시 발표된 공약들은 그의 국가관과 통일에의 의지, 애민의식 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1971년 3월 24일 발표된 대통령 선거 공약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선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 계획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며 "대통령 3선 조항의 1차 중임제 환원과 부칙에 다시 개정 불가능 조문의 삽입"을 약속했다.

또 '무소속 출마금지 조항 삭제', '완전한 선거공영제 실시', '전국구제의 폐지' 등이 공약 사항으로 올랐다.

현재까지 논란이 되는 검찰 중립 문제와 관련해 '검찰의 엄중중립과 처우의 개선'도 약속했고, '중앙정보부 폐지', '일체의 정치보복과 소급법 제정 금지', '농협의 민주화 단행', '언론의 자유보장을 위한 특별 조치' 등도 눈에 띈다.

특히 '대통령의 단독책임 아래 일정시간 내 부정부패의 일소'라는 공약을 통해서는, 당시 얼마나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이를 척결하기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국회의원을 포함한 고급 공무원 재산등록제 실시'와 '공무원의 생활보장과 제한되어 있는 노조활동의 허용' 등의 공약은 현재 실시 중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 공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 정책으로는 '남북간의 전쟁에 의한 문제해결의 포기와 파괴활동의 지양으로 긴장완화의 실현', '기자교류, 서신교환, 체육교환 등 비정치적 교류의 실시', '미 소 일 중공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에 대한 보장확보' 등을 공약했다.

경제 정책으로는 '경제성장의 결과에 따른 대중 소외와 사회적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과감한 소득재분배 정책의 집행', '부유세, 특별행위세 등의 신설로 새로운 세원의 확보와 소비의 억제', '농가수입의 극대화를 위한 강력조치로 농촌의 부흥과 국민경제 전반의 기초확립 및 식량의 자급자족 실현'과 같은 내용이 약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밖에 호화주택 건설 금지, 노조운동의 자주성 보장, 교민청 설립, 교과서 무상공급 등의 공약도 발표했다.
70년대 DJ "공무원 재산등록·호화주택 금지" 공약


그럼에도 그당시에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북한의 속국으로 전략할까봐! 빨갱이가 그리 쉽게 될까봐! 이 공약을 포기하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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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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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존경하던 인물이지만 그게 다였다. 2004년 “대통령이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어리둥절했다. 자서전 집필을 제안받았을 때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 6년을 이 부담스럽고 벅찬 일에 매달렸다.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회에 걸쳐 김 전 대통령의 구술을 녹취했다. 200자 원고지 5600장 분량의 ‘김대중 자서전’에는 그의 유년시절부터 대통령 퇴임 이후까지 오롯이 담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자(庶子)’로, 두번째 부인의 3남1녀 중 맏이라는 사실도 처음 공개했다.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 경향닷컴



심혈을 기울인 ‘김대중 자서전’은 29일 출간됐다. 제대로 된 ‘정본 자서전’으론 처음이다.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펜으로 되살아난 DJ의 85년 생애는 어떨까. 자서전의 마지막은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는 문장으로 끝맺었다. 김 위원은 “자서전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 자서전 집필을 맡기 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모습이었나. 직접 만나본 느낌은.

“젊었을 때부터 존경하고 흠모하던 분이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의 불굴의 삶, 한번도 꺾이지 않는, 모든 현안에 정면으로 맞서는, 조그만 섬마을에서 태어나 모든 역경을 헤치고 거목으로 거듭난 삶이 감동이었다. 직접 만나보니 인간적이었다. 집에서 청소하는 사람이나 밥하는 사람이나 모두 20년 이상 DJ 곁을 머물던 이들이다. 사람을 내치지 않더라. 측근의 자질논란이 있지만, 그 사람이 진정성을 가지고 행한 일에 대해서는 그랬다.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잘한 일은 칭찬해주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직위를 불러줬다. 나를 꼭 ‘김 사장’이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야기도 어렵게 하지 않고 유머를 구사하려고 했다. 썩 웃기는 유머감각은 없었지만 그러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 김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오열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평소에는 어땠나.

“삶을 서술하면서 눈물을 흘리신 적은 없다. 그런데 현실정치적인 발언을 많이 하니까 일각에서 원로로 대접받고 살지 왜 그러냐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울면서 ‘나는 민주주의를 위하고 민주주의 때문에 살았는데 민주주의가 위기에 닥쳤을 때 내가 당연히 말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 지하에 있는 의사, 열사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니 나는 당연히 죽을 때까지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DJ는 사실 ‘눈물의 대통령’이다. 지지자들의 눈물의 강을 타고 다시 올라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어느 시에도 그러더라. 대통령이 안 되니까 그렇게 안돼서 눈물이 나고, 대통령이 되니까 또 짠해서 눈물이 난다고.”

- 1부 집필을 끝내고 2부 집필을 맡은 시기에 김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자서전은 크게 출생~대통령 취임 직전까지 다룬 1부와 대통령 재임기~퇴임 이후까지를 담은 2부로 나뉜다. 1부를 끝내고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불러 ‘자서전 편집위원’ 임명장과 만년필을 주셨다. “마무리 하라”면서. 나흘 후에 병원에 입원해 다시 못 나오셨으니 DJ가 지상에서 준 마지막 임명장이었다.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만약 그런 절차가 없었다면 자서전이 정통성의 문제도 있고, 일정이 표류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모두 정리하고 돌아가신 거다.”

- 자서전을 본 이희호 여사의 반응은.

“며칠을 잠 안자고 읽은 것으로 안다. 측근들이 저러다 병나면 어쩌나 걱정했을 정도였다. 이 여사가 자서전을 보면서 “살아계신 것 같아요, 살아계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많이 했다더라. DJ도 1부 원고를 보고 굉장히 좋아했다. 일기에도 “김택근 사장은 글을 잘 쓴다”고 써 있다. 내가 한 인터뷰에서 이 글씨를 동판으로 만들겠다고 했더니 김대중 평화센터에서 제작해주겠다고 하더라.”

- 최근 남북관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출간된다.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DJ는 평생 두 가지 신념으로 살았다. 민주주의와 남북통일. ‘햇볕정책’이라는 건 튼튼한 안보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에 포용정책을 펴는 거다. 오늘날 우리 국력의 1/30밖에 안 되는 북한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면서 한반도에 긴장감으로 몰고 전쟁위험을 고조시키는 것은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니다. DJ는 한반도가 외세들의 각축장이 돼선 안 된다고 했다. 자서전은 냉전으로 해결하려는 모든 세력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민족이 나아가야 할 지침을 주는 것이다. 그가 남긴 게 뭔지 따져볼 때 참으로 평화로운 길이 담겨있다.”

- 김 전 대통령이 자서전을 통해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나.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후보단일화 결렬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 쓴 것에 대해 당시 YS 측에서 대통령 후보와 총재를 독식하려고 했던 전말을 제대로 써달라고 했다. 또 대통령 재임기간 중 구속된 아들들에 대한 아픈 마음과 억울한 심정 등을 ‘이렇게 이렇게 표현해달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개헌 등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써달라고 했다. 미래에 우리 정치나 국민들에게 ‘개헌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로드맵을 밝히고자 했다.”

- 김 전 대통령의 구술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나.

“6.25 전쟁이 나서 서울에서 목포까지 피난을 가서 목포형무소에 갇혔다가 탈출해 첫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를 밤늦게 만나는 장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담판을 벌이면서 혼신의 힘을 다한 대목이 감동스러웠다. 특히 사형선고를 받고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하며 재판장의 입술모양(‘무기징역’이면 입술이 모아지고, ‘사형’은 입술이 찢어지는)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순간을 이야기할 때는 가슴이 먹먹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자서전 집필이 힘들다가도 ‘이렇게 산 사람도 있는데 이걸 제대로 옮기지도 못하나’라는 생각으로 채찍질 했다.”

- 김 전 대통령은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을 직설적으로 했다. 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어땠나.

“처음엔 이명박 대통령을 좋아했다. ‘실용정부’라는 말에 기대를 많이 했다. 그래서 더 많이 실망했다. ‘이명박 정부는 철학이 없다’고 했다. 서민경제, 남북관계, 민주주의 등 ‘3대 후퇴’를 이야기했다. 또 오늘을 먹고 살고 오늘과 내일을 책임질 것들을 없앴다. 대표적인 게 정보통신부다. DJ가 1981년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세계최강을 만들겠다’고 구상했던 거다. 경제위기에도 지식정보화 사회를 붙여 IT강국을 만든 것이다.”

- 김 전 대통령의 삶은 용서와 화해로 압축된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납치를 당하고도 박정희 기념관을 추진하고 내란음모죄로 내몬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자서전을 읽으면 이런 궁금증들이 해소되나.

“DJ는 옥중에서 많은 사색을 하며 내일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악한 일을 안 했는데 왜 악인들의 손에 죽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용서하는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았다. 또 용서하는 삶이 이긴다는 것을 배웠다. 영국에서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이 일어났는데 보복정치를 했을 땐 또 다른 독재자가 나왔다. 하지만 용서하는 정치를 했을 때는 독재자가 출연하지 않았다는 거다. 김 전 대통령은 한 번도 희망을 꺾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감옥에서도 공부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거다.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지면 또 다음 4년을 준비하고. 늘 도전하는 자세,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 이게 대단한 거다.”

- 사람들이 자서전을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나.

“우선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자서전을 통해 평화와 사랑의 기운이 한반도에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서전에도 표현돼 있지만 미래에 이 땅의 새로운 주인들이 왔을 때는 DJ가 가장 평화스럽고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던진 위대한 민주투사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미래를 위해서도 이번 자서전은 소중한 민주주의 유산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 김대중 평전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진이 다 빠져서 추스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우선 자서전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 못 다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더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평전을 쓸 계획이다.”



- 경향신문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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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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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정권에 이러한 희생이 일어났다면 전국민 시민운동이 전개되었겠지만,

이명박정권에서는 촛불시위 촛불도 못 들게 하고, 촛불 켜면 입으로 끄고, 모이면 전경버스로 위협하고 하니, 본래 사람들이 불의를 보고도 행동하려 하지 않는구나.

이 정권들어 우리 국민들은 모두 한나라당 지지자들 처럼 아주 강인하고 잔인하게 변해져서 어떤 것이 인간다운 건지도 망각하게되어, 더이상 사람죽는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하긴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2분씩이나 죽이고, 국민들 여러명 죽었는데, 한사람 화염에 휩싸여 죽은이를 그토록 가슴아파 하겠는가?

너무도 무뎌진 한민족아! 그래도 이것은 아니된다.

4대강 사업은 우리나라 땅의 정기를 도륙내는 작업이다. 생태계의 재앙도 뒤따르고, 더욱 더 큰 대홍수가 일어날 것이며, 천문학적인 부채를 고스란히 우리나라가 떠앉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이명박정권들어서 외국 부채가 참여정부때보다도 훨씬 폭발적으로(비교도 안될만큼) 증가하였는데도, 국민들은 그가 무서운지 이를 쉬쉬하고 있는 것이 참 이상하다. 과거 노무현시절에는 다 누구탓이니 하면서 참 욕도 많이 한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또한, 일본의 배를 부산에서 출발해서 서울의 한강까지 접근하게 하는 친일본 사업이라는 숨은 속내도 들어있다.

이러한 자신의 희생으로 4대강 사업을 막고자 했던 국민의 염원을 전달한 문수스님에게 다시한번 삼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 국민의 이름으로 4대강사업 그리고 세종시 수정안을 다시한번 반대합니다. " 

이것도 무시하고, 그대로 강행해서는 문수스님과 같은 여러명의 희생이 또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문수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저 몇천도 되는 뜨거운 불길속에서도 오른팔 불끈 쥐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전달해주는 초인적 능력은 불교를 감히 억압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감명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아직도 이런 세상이라는게...

적어도 저래 돌아가신분한테 유감스럽다고 인사나 좀 하면 안되겠습니까? 나라의 대표라는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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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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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동, 영운동, 용정동, 지북동, 운동동, 월오동, 방서동 등의 시의원 후보 엄경출

- 돈 쓰지 않는 선거운동으로 깨끗한 선거운동을 몸소 실천,
- 알바도 필요없다.
- 나를 지지하는 분이라면 일(업무) 끝나시고 자발적으로 나오세요! 

그 동안 엄경출은 혼자서 저렇게 자전거를 타고 한손으로는 마이크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자전거 조정하고, 발은 페달 열심히 구르고, 머리는 시민들의 마음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알리는데 온 몸을 다 사용했다.

그는 이번 시의원에 출마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정말 타협하지 않는 시의원이 되겠다.
싸우더라도 이 지역 동민을 살리고, 부정 부패라면 몸으로도 막겠다는 것이다.
진짜 시의원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 패러다임을 보여주겠다.
사회적 소외계층 여성, 어린이, 노인분들을 위한 보살핌의 시활동을 주도하겠다.

엄경출은 이제 40의 나이이다.
그가 단 하루만 자전거를 타도 온몸에 알이 베고, 다리와 허리가 아프며, 엉덩이가 짓물르며,
목도 쉬고, 얼굴도 시꺼멓게 타는 이 자전거를

처음부터 선거투표일 전날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한시간도 게을리지 않게
그래도 열심히 달렸던 것은 한표한표의 성원을 아낌없이 주는 이 지역 동민과의 
뜨거운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 노무현대통령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

아마도, 하늘의 계신 그분이 기운을 주시는거 같다.


이 날은 토요일이였다. 저는 토요일, 일요일 2틀간 자발적으로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단 2틀 타고, 다리가 너무 후달렸고, 기운이 없었다.
이것을 매일같이 한 엄경출후보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 진짜 독사다! 이런 사람이 정말 정치를 해야하겠구나!"


엄경출 시의원 후보의 블로그 : http://blog.daum.net/2000won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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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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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의 명연설을 잠시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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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투표하시기전에, 경기지사 유시민후보가 말하는 공약과 출마 배경을 반드시 들어보고 투표소에 선거하러 가시기 바랍니다.


http://asx.kbs.co.kr/player.html?title=특집&url=1TV$20100525$special20100525_02_00_00_m&type=201&chkdate=20100530041254&kind=300_2week


사이트를 클릭하시면 kbs 홈페이지에서 직접 보실수 있습니다.
클릭과 동시에 자동으로 시작이 됩니다.

(단, kbs 방송국 운영상 광고를 2편을 봐야만 본 동영상을 시청하게끔 되어있습니다.)

다음 티스토리에 동영상을 업로드 하려고 해도 업로드 실패가 계속 뜨기에 일단 링크를 걸어두었고요, 다시 업로드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수정하여 동영상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5월 25일 KBS 1 방영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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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을 강조한 노무현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
양장본은 한정수량 기념판으로 발매되었고, 보급판은 위 사진처럼 제작되어 친히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도서 판매수익금은 노무현재단의 발전기금으로 쓰여질 예정이며,
살아생전의 저서와 노무현대통령의 메모, 그리고 가족과 측근들이 알고 있는내용, 그가 꿈꾸던 민주주의의 이상을 토대로 유시민씨가
정리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읽고 진정한 정치와 민주주의, 국민의 참여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깨우치는 지혜를 얻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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