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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프로인지는 몰라도 제가 잠깐 한국에 나갔을 때

케이블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서 무속인이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이명박 관상은 '저승사자'상으로 나라에 매우 좋지 않고 나라를 말아먹을 관상이라구요.-_-;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엄청 힘들어질거라고 말했습니다.

 

원체 무속이나 미신에 관한 내용들은 크게 의미를 두고 보는 편이 아니기에

그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어제 노통이 서거하시고 인터넷 끄적이다가 이명박 사진 보고나서

완전 '허걱!' 했습니다. 진짜 저승사자 처럼 생겨서...-_-;

 

게다가 숭례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숭례문이 불타질 않나.....여러모로 암울한 와중에 노통이 가셨네요...

 

노통은 정말 마음이 여리고 국민들을 사랑했죠.

외국에 나가서 각 국 정상들을 만나도 굽신거림 없이 항상 당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에게는 항상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하시며 고개를 숙였죠.

 

그런데 예전에 인터넷 보다가 이명박이 부시를 옆에 태우고

비열하게 웃으며 골프카 직접 운전하는 거 보고 참 할 말이 없더구만요.

 

광우병 소고기 수입 허가하고 국민들 촛불시위 탄압할 때는

대한민국이 공산국가인지 알았습니다.-_- 독재정권 같으니...-_-

 

국민들이 직접 뽑은 대통령을 국회의원 나부랭이들이 탄핵 어쩌구 하면서 쑈를 하는 것도 웃겼지만...

만약 국민들이 '노통 물러나라!' 외치며 시위를 했다면 노통은 분명 물러나셨을 분이네요.ㅠ.ㅠ

그런데 명박이는 대통령 해먹겠다고 경찰들 내세워서 국민들 탄압하는데 기가 막힙니다.

 

전경들은 또 무슨 죄랍니까...역시 돈없고 빽없는 서민들 자식이나 전경 가서 구르지

군 면제자 명박이나 명박이 아들은 뭐......(할 말 잃음;)

 

마음 여리고 깨끗하고 소신있는 정치를 하려했던 노통은 정치적인 파워도 너무 없었고

그의 생각대로 정치를 펼치지 못했던 것도 주위에서 너무 부정하고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이 한 몫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노통 시절엔 엔화로 걱정해본 기억도 없군요...ㅠ.ㅠ 지금은 허리가 휘지만...

 

어쨌든 살아오면서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선거 때 이명박을 뽑지 않았다는 것이랄까....ㅜ.ㅜ

 

아래는 퍼온 글인데...저 글 보고나서 괜히 눈물이 나는 바람에 펑펑 울었네요.

 

저는 자이툰부대 출신자 입니다. 향수를 뿌리치고 멀고 먼 타지 이라크라는곳에서 7개월을보냈죠 해외 다녀오신분들은 누구나 아시겠지만 3개월지나면 향수병에 걸리게 됩니다. 전 그랬습니다. 해외에 놀러간게 아니라 내 한목숨걸고 자랑스러운 태극기 어깨에붙여 나라에서 보내준 파병이었으니까요 근데 4개월쯔음 파병생활을 하고 있을때였습니다. 정말 힘들었죠 부모님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리웠죠 근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저희 자이툰을 방문해주셨습니다. 많은 격려와 찬사를 쏟아주셨죠 그러던 와중 어떤 자이툰 장병한명이 단상으로 올라가 노무현 대통령님께 '아버지!'라고 외치며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래도 일개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군인신분으로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자리입니다. 경호원들도 어쩔줄 몰라했었죠..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는 손짓한번으로 재빠르게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막으시고 그 장병을 꽉 껴안아주시며 '그래 아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군들이 울기시작합니다. 감동으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전 그때를 그순간을 잊을수가없네요. 노무현 전 대통령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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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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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민족주의자 교사 아들로 태어나 4·19의 충격을 맛보고 무기수가 되기까지…올해 교수 정년을 맞는 그에게 한국 현대사와 통혁당 사건의 내막을 듣는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치스러운 장식물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독재 정권이 앞을 내다보고 역할분담을 시켜놓은 것이라고나 해둘까? 밖에서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동안 바깥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차분한 사색과 깊은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분이 있다. 1988년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평화신문>에 그의 사색의 편린이 실리기 시작했다.


△ 신영복 교수가 올해 정년을 맞는다. 20대의 청년 시절에 감옥에 들어가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는 말을 위로로 건네기에는 너무 긴 20년 세월을 뒤로하고서. 20대의 청년 시절인 1968년 생일에 잡혀간 그는 꼭 20년 세월을 보내고 1988년 생일날 석방됐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신영복 교수가 올해 정년을 맞는다.

장래 희망은 조선인 총독?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조그만 기념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서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선생님의 삶을 정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자주 뵙는 사이에 정색하고 마주 앉아 인터뷰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기 싫어하는 부분도 캐물어야 하는 곤란한 순간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살아내신 한국 현대사를 가까이서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근 한명숙 총리의 지명을 계기로 그의 부군인 박성준 교수의 전력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에서 박성준 교수의 ‘상부선’이기도 했다.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몇 년 지난 뒤에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주더란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신영복은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의 사택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유열, 이극로 등 저명한 한글학자들- 모두 월북했다- 도 드나드셨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친구들은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다. 처음에야 이럴 때 아이들은 자기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른들이 바라는 ‘정답’을 말하게 되는 법.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총독이 뭐냐고?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해직교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조기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신영복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다섯 살 꼬마 신영복의 머리에도 해방의 그날은 기억이 또렷하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청년들이 다섯 살 난 어린 신영복에게 왜 일본인 교장의 텅 빈 사택을 지키게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적산의 접수와 보호라는 중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 군 장교 시절의 신영복 교수(왼쪽)와 그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 군 법무사들은 사형을 구형하면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전쟁은 그가 열 살 때 터졌다. 그러나 밀양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 ‘인공’ 치하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의 기억은 끔찍했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20여 개의 머리가 걸려 있다 보니,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못 건너고 우는데, 어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신영복은 무서움 속에서도 머리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실제로 자세히 바라보니, 피가 다 빠져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은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

신영복이 베어진 머리를 유심히 살핀 까닭은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신영복 집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 그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토박이는 아니고, 떠돌이로 다니다 동네로 흘러들어와 궂은일 해주고 밥 얻어먹던 청년이었다. 토끼도 잘 잡고 팽이도 잘 만들어주던 청년, 그러나 늘 천대받던 그가 기세등등해진 모습을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고 사라졌던 친일파들이 다시 나타난 뒤로, 신영복은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고,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 어린 마음에 사라졌던 그가 꼭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 해방과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만큼은 또렷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돼버렸다.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한 것이 1959년이었다.


△ 1968년 11월28일 열린 통혁당 사건 공판. 당시 군 장교였던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의 주요 간부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정도에 약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미된 정도였지만,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16이 왔다. 처음에는 지주 아들 윤보선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혁명재판소 만들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을 사형시키는 등 사태 진전을 보니 박정희는 영락없이 “권총 찬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이 4·19를 누르고 있었다. 4·19의 감동 속에 총알은 우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고 진보적 청년들은 생각했지만, 5·16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깨달았다. 총알은 모자만 뚫고 지나갔다고!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1·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학교 공부만 따라가기 바빴던 신영복은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통혁당 간부들은 만난 적도 없었는데…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예닐곱 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는 150명이나 되었지만, 대학원에는 지금과 달라서 3명만이 진학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 1명은 ROTC로, 다른 1명은 해군장교로 입대해버려 대학원에는 혼자만 남았다. 경제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  1998년 석방된 신영복 교수.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다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보다는 67년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이다 보니 잡지의 필자 풀(Pool) 성격인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런데 나도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지만, 신영복은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자술서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산하단체라 발표된 경제복지회나 경우회, 동학혁명회 등은 각각 역사가 오랜 자생적인 단체로서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고, 김질락 등과의 모임에서 학생운동 동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해했다. 중앙정보부가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 관료집단의 성과주의와 자기 활동을 과장해서 보고한 통혁당 지도부의 합작으로 사건이 확대됐다고나 할까?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리려는 공안당국이나, 통혁당을 북의 지도성이 관철된 조직으로 그리려는 진보 진영 일각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이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 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라고 발표된 김질락, 이진영과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남과 북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일국일당주의를 취해 북이 중앙이 되고 남에 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쪽에 자생적인 운동의 구심이 서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질락이 김종태나 이문규 등과는, 또는 북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족해방전선 모임에서는 북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도 없으며, 북과의 관계는 대등한 혁명의 구심 정도로 이야기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원숭이 똥구멍’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신영복이 수사를 받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도 친구들과 많이 외우며 놀았던 노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빨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수사기관의 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흑백논리도 삼단논법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갖다붙이면 척 붙어버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여!

사형 구형하면서도 “걱정 하지 말라”

당시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의 암호를 해독해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는 등 이 사건의 크기를 부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북에 내왕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격으로 위치지은 신영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당시에는 주로 불고지죄, 즉 김질락이 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중심이었던 것이 기소 단계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가 중심이 되었고, 1심과 2심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 기소 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에 대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기환송. 군 법무사들이 사형을 구형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사형을 구형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놀라운 인도주의와 여유!-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에서 군검찰은 죄목을 구성죄로 바꾸는 공소장 변경 조치를 취했고. 재판부는 정상을 참작해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학생 동아리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나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상고는 포기했다.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됐다-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인식되는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고포기를 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무기징역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만 되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무기징역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보다 더 암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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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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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중계] 노무현과의 ‘영상 대화’ 〈진보의 미래〉

<하니TV>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유고집인 <진보의 미래> 출판을 기념해 열리는 ‘저자와의 대화’를 생중계합니다. <노무현재단>과 <한국미래발전연구원>가 주최하는 출판기념회는 16일(수) 오후 7시부터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 곤자가 컨벤션 홀에서 열립니다.

노 전 대통령은 서거 직전까지 △국민들이 먹고살기에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우리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주제에 진보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등의 주제에 골몰했고, 주제와 관련한 방대한 육성을 남겼습니다. 책의 3분 2분량은 노 전 대통령이 참모들과 나눈 육성을 주제별로 재구성한 내용으로 이번 출판 기념회를 통해 고인의 육성 영상이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저자와의 대화’는 참여정부 인사들과 학자들이 영상 속 노 전 대통령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노 전 대통령과의 대화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 한상진 서울대 교수, 김상근 목사, 김호기 연세대 교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병천 강원대 교수, 정회성 한국환경정책학회장, 박주현 변호사(시민경제사회연구소장) 등이 나섭니다. 특히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권양숙씨가 상경해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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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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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민주당플랜 초안을 읽고
날짜: 2009년 05월 18일
민주당이 뉴민주당플랜 초안을 발표하였다. 당내 토론에 들어간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집안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집안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마을 전체를 다시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기에 한마디 아니할 수 없다.

뉴민주당플랜 초안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는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된 길을 걸어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디로 가야하지도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12월 대선에서 민주당은 한나라당에게 패배하였다. 그냥 패배한 것이 아니라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실시된 대통령선거 중에서 1위 후보에게 가장 많은 표차(580만표)로 대패한 2위가 되었다. 게다가 이 1위 후보가 1987년 이후의 대선에서 1위를 한 후보 중에 전체 유권자 대비 가장 적게 득표한 후보라는 점까지 감안할 때 <역사적인 참패>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진보정당 역시 이 선거에서 참패를 했으며 근본적인 혁신없이 한발자국도 나아가기 힘들다는 반성을 하고 있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참패는 정동영 후보의 잘못이 아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다. 1998년 이래 10년간 정권을 담당한 민주당 노선에 대한 국민적 평가라 보아야 한다.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가? 이 10년 동안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부족하나마 진전을 보았다. 남북관계는 획기적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명박 정부가 이를 폄하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역사는 이 10년 동안 이뤄진 정치적 성과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줄 것을 믿는다.

문제는 경제였다. 특히 서민경제의 파탄이었다. 한국의 노동자, 서민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시간을 강요받고 있지만 이들의 소득은 상위계층과의 격차가 해마다 늘어나는 사회양극화의 희생양이 되어왔다. 민주당 10년 동안 비정규직노동자는 두 배로 늘어났다. 정부예산으로 월급을 주는 폴리텍대학의 비정규직교사들이 정규직 교사 월급의 48% 밖에 받지 못하는 비인간적 차별을 시정하지 않고 방치한 것도 민주당 정권이었다.

약자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강자 위주의 노동시장정책을 <노동시장의 유연화>란 명분 아래 강행한 것도 김영삼정부의 노동시장정책을 계승한 김대중, 노무현정부 아니었는가? 선거 때마다 왼손으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오른 손으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없애온 것이 민주당정부 아니었나?

무분별한 노동시장 유연화정책으로 국가적 차원의 일자리 시스템 붕괴가 일어나자 풍선효과처럼 자영업자가 급증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제 한국의 자영업자는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0% 이상을 차지하면서 OECD 평균의 2-3배, 미국의 6배 이상이라는 위험 수위를 기록하고 있다. 서울에서 신장개업한 음식점의 70%가 일년 이내에 폐업신고를 하고 있는 것처럼 자영업이 한국 중산층 붕괴의 일선 현장이 되어버린 것도 민주당 10년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특히 순금융자산이 백만불 이상 되는 백만장자 증가율이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세계 1위에서 7위 사이를 기록하는 동안 이 나라는 애를 낳고 기르기가 가장 힘든 나라, 노인이 생활고로 가장 많이 자살하는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버렸다.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정부 하에서, 가장 서민적으로 보이는 대통령을 선출하고서도 한국의 가난한 국민들이 받은 선물은 부자를 위한 희생과 고통전담이었다.

민주당이 진정 국민들에게 희망이 되는 새 길을 걷겠다면 서민경제파탄에 대한 대국민 사과와 과거 노선에 대한 철저한 단절을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특히 비정규직 양산을 포함한 일자리 파탄정책, 부와 가난이 세습되게 한 교육양극화정책, 경제주권을 반납한 한미FTA 추진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불행히도 뉴민주당플랜에서 고백하는 반성에서 우리는 진정성을 발견할 수 없다. 과거에 대한 합리화와 현실에 대한 호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부도예정 수표만을 발견할 뿐이다. 이것이 뉴민주당플랜의 실체라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잘못의 반복>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 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뉴민주당플랜은 그래서 깜박이를 모두 끄고 우회전하겠다는 것이다. 노무현정부가 좌파 신자유주의를 추진하였다면 뉴민주당플랜은 중도 신자유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우파 신자유주의인 한나라당에 한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이다. 국산 쥐약이든, 일본 쥐약이든 미국쥐약이든 성능의 차이가 있을 뿐 쥐약이긴 매한가지 아닌가?

더욱 가관인 것은 중도 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보수와 진보의 낡은 이분법>을 뛰어넘겠다고 하는 점이다. 우리는 묻는다. 귀당이 언제 <진보>였던 적이 있었냐고. 이른바 제 3의 길이라 하여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서유럽국가들 조차도 용인하지 않는 비정규직에 대한 심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며 수용한 것이 민주당 10년 이었다. 짝퉁 진보를 팔아 제끼면서 진품까지 의심받게 만든 것도 노무현시대의 일이었다. 진품 진보가 그렇게 주장한 <기회의 균등>을 훼손시킨 당사자들이 반성은 커녕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낡은 진보를 넘어서겠다>고 하니 소가 웃을 일이다.

뉴민주당플랜 초안대로 민주당이 나아가겠다면 차라리 민주당은 둘로 쪼개지는게 국민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기본노선으로 하는 세력은 한나라당과의 보수대연합으로, 신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일자리, 교육, 의료 주택문제에서 서민중심의 복지를 강화하려는 세력은 진보대연합에 가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차피 민주당을 정치적으로 존립 가능하게 한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는 역사적 시효가 소멸되었다. 지역주의로 회귀하여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민주당은 진보와 보수라는 새시대의 경쟁구도 앞에서 자신을 분할하는 것이 옳다.

한나라당은 이미 독재라는 문신을 지우고 <국민을 먹여 살릴지도 모르는 보수>로 성형수술을 마쳤다. 이런 <보수> 앞에서 민주당의 <민주>는 국민들에게 철지난 낡은 프레임의 산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MB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이 절대 다수인데도 왜 반MB연합에 국민들이 감동하지 않는지 차분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격이 애매모호한 반MB연합은 국민들에게 철지난 반독재연합을 연상시킬 뿐이다. 시대와 국민은 제대로 된 진보를 요구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뼈를 깎는 자성을 하면서 거듭나야 하고, 정체불명의 민주당은 이질적인 정체성을 분별정립으로 해결해야 한다.

1차선이든 2차선이든 도로에선 차선을 지켜야 한다. 중도랍시고 두개 차선을 걸치고 운행하다가 사고 난 차 한대 때문에 도로가 몇 km씩 정체되는 경우가 바로 오늘 한국 정당정치의 현주소이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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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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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라! 담벼락 쳐다보고 욕이라도...MB정부가 중도? 민심 때문에 궁여지책"
DJ, 6·15 9돌 준비위원 오찬서 이명박 정부 성토... 비폭력 불복종 강조
2009.06.27 18:45 입력 | 2009.07.03 22:16 수정

위의 발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5일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 30여 명과 자택 부근의 한 식당에서 오찬을 하면서 한 말이다. 그날 참석자들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감정에 북받쳐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고, 참석자들은 이를 듣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날 김 전 대통령의 격정에 찬 직설화법 전문 발언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반드시 지는 길'도 제시했다.

"탄압을 해도 '무섭다', '귀찮다',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행동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지고 망한다. 모든 사람이 나쁜 정치를 거부하면 나쁜 정치는 망한다. 보고만 있고 눈치만 살피면 악이 승리한다."


 

김 전 대통령은 특히 최근 정국과 관련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민주주의의 위기가)너무 급해졌다. 기가 막히다"고 탄식한 뒤,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예시로 들었다.


 

"폭력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해도 결과가 나쁘다. 인도의 간디는 영국과 싸울 때 비폭력으로 했다. '비폭력 비투쟁'이 아니라, '비폭력 전력투쟁'으로 했다. 투쟁해야 하지만 폭력투쟁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투쟁을 안 하는 것이 낫다."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


 

그는 이어 "모두가 어떤 형태든 자기 위치에서 행동해서 악에 저항하면 이긴다"며 "많은 국민들을 동원하되 다치지 않도록 해야한다. 때리면 맞고 잡아가면 끌려가고, 여기저기서 그렇게 하는데 (정부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현 시국 극복 방법에 대해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겠지만,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된다"며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이라면서 "싸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고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중도 실용과 서민 행보를 강조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김 전 대통령은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궁여지책으로 그런 것"이라며 "백성의 힘은 무한하고 진 일이 없다, 저항하지 않고 굴복만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머지않아 남북관계는 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으면서도 "정부와 여당 내에서 위험한 소리가 있는데 조상과 후손에 대해 죄를 짓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전문] 김대중 전 대통령의 25일 오찬 발언

  
ⓒ 유성호
김대중

내가 요즘 밤에 잘 때 내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저희 내외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잠을 잔다. 정치·경제·남북관계 위기가 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10년 민주정부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급해졌다. 기가 막히다.
 
나는 이기는 길이 무엇인지, 또 지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반드시 이기는 길도 있고, 또한 지는 길도 있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반드시 지는 길이 있다. 탄압을 해도 '무섭다' '귀찮다'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행동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지고 망한다. 모든 사람이 나쁜 정치를 거부하면 나쁜 정치는 망한다. 보고만 있고 눈치만 살피면 악이 승리한다.
 
폭력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해도 결과가 나쁘다. 인도의 간디는 영국과 싸울 때 비폭력으로 했다. '비폭력 비투쟁'이 아니라, '비폭력 전력투쟁'으로 했다. 투쟁해야 하지만 폭력투쟁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투쟁을 안 하는 것이 낫다.
 
간디는 집회 나갔다가도 폭력을 쓰면 돌아왔다. 폭력을 쓰면 다수가 모이지 못하고 그 자체로서 도덕성도 없다. 영국이 인도 총독부를 통해 소금을 비싸게 팔자 그것에 반대해 해안가로 가서 직접 소금을 구어 자급자족하자 영국이 굴복했다. 영국이 광목을 비싸게 팔자 직접 물레질을 해 베를 짜 옷을 지어 입자 영국이 굴복했다.
 
이렇게 민심이 돌아가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비폭력으로 성공해 미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폭력을 쓰면 더 큰 폭력을 유발한다. 그 책임은 폭력을 쓴 사람이 지게 된다. 자기들 폭력은 적당히 넘기고 우리 쪽 폭력을 쓴 사람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쓰게 된다. 그래서 폭력은 순리의 길도 아니고 계산상으로도 맞지 않다.
 
모두가 어떤 형태든 자기 위치에서 행동해서 악에 저항하면 이긴다. 적당히 하면 진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투쟁에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비폭력 투쟁을 해야 한다. 많은 국민들을 동원하되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때리면 맞고 잡아가면 끌려가고, 여기저기서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최근 보수에서 중도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궁여지책으로 그런 것이다. 백성의 힘은 무한하고, 진 일이 없다. 저항하지 않고 굴복만 하면 안 된다. 농노들이 5-600년 동안 노예로 살았지만 노동자들은 2-300년만에 정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이 각성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이다. 싸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고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젠가는 온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하면 빨리 오고, 외면하면 늦게 온다.
 
내가 나이 먹고 힘도 없어 일선에서 나서서 일할 처지는 못되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지만 마음으로 여러분을 격려하고, 여러분이 잘 할 수 있도록, 성공의 방향으로 가도록 경험을 이야기해 주려고 한다. 여러분은 연부역강(年富力强 :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함) 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민주화, 서민경제, 남북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 남북관계와 경제는 풀릴 것이다.
 
머지 않아 남북관계는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확고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민족끼리 절대 전쟁해선 안 된다는 것을 굳게 지켜야 한다. 정부와 여당 내에서 위험한 소리가 있는데 조상과 후손에 대해 죄를 짓는 일이다. 각별한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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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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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의 아들 호준씨가 박지만에게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박지만씨,

지만씨의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님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낮에는 가게 점원으로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시절, 동창들의 입을 통해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만씨의 이름이
들려지면서 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그리도 잔인했던 1980년 5월을 훈련소에서 보내고 전방에서 사병생활을 하던 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는 지만씨의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고, 한동안 듣지 못했었던 지만씨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되었던 것은 싱가폴에서 마약중독자 상담원으로 일을 하던 당시 지만씨가 마약중독으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만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최근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박지만씨,

지만씨와 나는 너무도 다른 삶의 공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지만씨와는 스쳐 지나갈
기회조차도 없었고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서야 지만씨에게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같은 역사 속을 헤치며 살아야만 했었던 한 사람으로서 역사를 향해 다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고백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지만씨,

나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일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일본군이었고 내 아버지는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군이었다
거나, 지만씨의 아버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고 내 아버지는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 바친
민족주의자였다는, 또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부정한 재산을 남겨 주었지만 내 아버지는 깨끗한 동전 한 닢
남겨준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는 역사가
스스로 평가하도록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있었던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혹자는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인류 역사는 사필귀정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 뿐 아니라 부정한
권력에 의해 조작되었던 인혁당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만씨가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또는 불리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역사를
지우고자 한다면 역사는 지만씨의 이와 같은 행동을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박지만씨,

내 아버님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시기 불과 수 개월 전에 지만씨의 아버지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갔습니다. 그 중에 ‘가장’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되겠는가’하는 걱정을 안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지만씨나 나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민족의 역사는
기록되어 남겨져야 하며 또한 전해져야하는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입니다. 역사가 평가하도록
남겨두어야 할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를 지우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다시 당부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수용소 소장으로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몬 게트(Amon Goeth)의 딸은
‘내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위해 무언가는 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면서 생존자 중 한 사람을 만나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아버지의 과거를 듣고 용서를 빌게 됩니다.

박지만씨,

이제 우리는 살아서 오십대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삶속에서 또한 우리는 지나온 역사가
결코 우리의 손에 의해 바뀌어 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는 지만씨에게 내 아버님께서 평생 가슴에 품었었고 이제는 내 가슴속에 품겨져
있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전해 드립니다. 자식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취소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역사와 후손들 앞에서 지만씨의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 통일을 위해 지만씨의 삶이 쓰여 지기를 빌어봅니다.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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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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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가 말하는 기업가정신이란 무엇일까?

기업가(起業家) 정신이 살 길이다.


미래가 암울하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고, 작은 데서부터 희망을 찾아보자. 그런 의미에서 <시사인>에서 좋은 강연들을 마련했다. 강연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안철수 교수의 강연! 무조건 찾아가 봤다.


지난 9월 21일(월) 저녁 7시. 바지가 흠뻑 젖도록 내리는 비에도 안철수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강연 15분 전부터 의자에 앉아있는 안철수 교수의 모습을 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혀야 했다. 그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이가 인사와 명함을 건넸다. 강연 주제는 ‘2009 기업인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나긋나긋한 안교수의 음성과 함께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연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진정한 기업가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


기업가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세 가지다. 첫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를 뜻하는 기업가(企業家)이다. 둘째는 천을 짜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기업가(機業家). 마지막이 기업가(起業家)로서 새로운 가치나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람이다.


그는 현상 유지를 하기보다 새롭게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마음가짐과 행동력이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핵심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영자 마인드가 아니라 창업과 가치 창조 활동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기업가정신은 국가경제 전체의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성장의 원동력과 일자리 창출에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 주목하라!


기업가 정신을 지닌 기업가들이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 도전해야 한다. 그들이 중요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국가 경제의 포트폴리오를 위해서이다. 주식 투자의 포트폴리오는 여러 주식에 분산 투자해 위험도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국가 경제도 마찬가지다. 마치 주식 한 곳에 투자한 것처럼 대기업만 있는 국가 경제는 위험에 취약하다. 다른 쪽에서 중소기업, 벤처기업이 잘 받쳐줘야 국가경제의 포트폴리오가 완성된다. 그러면 어느 것 하나가 위기에 흔들리더라도 다른 것은 안전하며, 국가 경제가 안정적으로 갈 수 있다.


둘째, 일자리 창출이다. 대기업에서 제공하는 일자리가 계속 줄어든다. 결국 대안은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 국민에게 충분하고 안정적인 일자리, 국민의 학력 수준에 맞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셋째,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은 대기업에 장기적인 생존 기반을 제공한다. 기업을 살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대기업보다 주로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에서 나온다. 한국적 상식으로 보면 구글 같은 기업이 있으면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기업들이 살아남지 못 할 것 같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에 가면 반대다. 오히려 구글이 있어서 다른 기업들이 생겨난다. 구글이 어떤 생태계를 조성해 그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협조하며 공생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중소기업을 죽이는 것이 이득이 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그것은 자기 살을 깎아 먹는 행위다. 대기업은 많은 파트너와 공생하며 나온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며 더 성장할 수 있다. 



기업가 정신 쇠퇴 이유

국내에서 기업가 정신이 쇠퇴하는 이유를 네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사업 기회, 보상, 성공 확률, 재기.

시장이 성숙되면 새로운 사업 기회가 줄어들고 규모의 경제로 인하여 대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남들이 못 보는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바로 기업가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기업가 정신 쇠퇴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위험 대비 낮은 보상을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정한 기업가라면 결과에 욕심내지 않고 과정 자체에 보람을 느껴야 하므로 기업가 정신의 쇠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셋째 가능성은 중소/벤처기업의 낮은 성공 확률이다. 중소/벤처기업 경영진의 실력 부족과 산업 지원 체계 미흡, 대기업, 공공기관과 중소/벤처기업 간의 불공정 거래 관행은 기업가 정신 쇠퇴의 큰 이유가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재기를 할 수 없는 환경이다. 우리나라는 한번 실패한 사람은 재기하기가 너무 힘들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가 우리에겐 성공의 요람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본질은 실패의 요람에 있다. 결과는 사람이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도덕적이어도 실패할 수 있다. 이것이 반복되면 실패의 요람이 된다는 중요한 핵심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가령 대표이사 연대보증제 때문에 회사가 망하면 CEO가 고스란히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그 때문에 CEO는 덤핑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회사를 살리려다 다른 기업들도 함께 몰락하게 만든다. 이른바 '좀비 경제'를 낳는 것이다. 하나의 좀비가 전체를 좀비로 만드는 이 무시무시한 상황이야말로 기업가 정신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해야 할 일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모든 이해 관계자의 문제 인식 및 체계적,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이다. 몇 년 전까지 기회가 있었으나, 이제는 구조가 고착화한 것 같아 안타깝다.  

적절한 보상 구조와 인수합병 시장의 육성, 주식 시장의 투명성 강화 외에 평생 학습 시스템이 중요하다. 공식만 열심히 외우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문제에 공식을 적용하면 비로소 깨닫는 것처럼 실무 중심으로 개선돼야 한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진정한 벤처 캐피탈 육성도 필요한데 기술에 대한 전문성, 경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관련 사업에 대한 인맥을 갖춘 벤처 캐피탈이 나와야 한다. 아울러 불공정 거래 관행 근절을 위해선 감시 강화가 필요하며 구두 계약은 없는지, 계약서 내용대로 이행하였는지 등 가격 협상만 보지 않고 전 과정을 관찰해야 한다.


안철수 교수의 강연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진단하듯 설명해 주어서 인상 깊었다. 강의 후엔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강연에서 지적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정치를 할 의향이 없느냐는 질문이 많이 나왔다. 

그는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이 성적이 좋으면 의대를 가라고 하는데 성적이 좋은 것과 적성은 별개의 문제"라며 
"한 사람이 구조를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간 이유는 나 혼자서라도 바꾸고 싶어서였다. KAIST에서 정년을 보장해 준 것도 사회 활동을 많이 하라는 이유 때문이다. 나 혼자서라도 차이를 만들겠다."라고 답했다. 

강의를 마치고 사람들은 사인을 받거나, 같이 사진을 찍으며 '함께 커피를 마서며 대화하고 싶은 명사 1위'에 뽑힌 안철수 교수와 기억에 남을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나 역시 평소에 존경하던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고 참된 기업가 정신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하루였다.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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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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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박사 집에서 근무했던 고정한 씨 만나다

파워 인터뷰/줌인-OB 2009/04/22 18:31


아직 겨울의 시샘이 가시지 않은 4월 어느 날. 안랩이 탄생하기까지 1등 공신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서울 마포에 자리한 테이크아웃(Take out) 전문점을 찾아갔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고정한씨. 훤칠한 키와 선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상큼한 봄의 향기처럼 그의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표현 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기운이 온몸에 감돌기 시작했다. 그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이 가게에 있다는 증거!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와 함께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OB를 찾아서 고정한 님과의 인터뷰

Q : 지금의 안랩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하는데요 궁금합니다
어떻게 발을 들여놓으 셨나요?

A : 처음 안철수 박사님께서 V3를 만드셨을 때 저는 하이텔, 나우누리와 같은 온라인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컴퓨터학과가 제 전공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컴퓨터를 잘 하는 선배가 있어서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손으로 썼던 레포트를 워드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냈으니까요.

한번은 제가 다니던 학교 전산실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것을 보고
V3를 저장한 5.25인치 디스켓을 가져가서 컴퓨터를 치료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V3의 개발자가 궁금해지더군요. 결국 (1995년초 경) 제가 찾아가게 되었고 함께 일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안 박사님과 연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복이라고 생각해요.

 

Q : 안랩에 처음 들어오셔서 맡으신 업무는 무엇이었나요?

A : 처음에는 안철수 박사님 집에서 따님의 컴퓨터를 이용해 일을 했였습니다. 당시 안 박사님의 생각은 수익목적 보단 공익을 위한 개념으로 시작 하셨기 때문에 마땅한 수입원이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세분화된 직책은 없었고, 저는 온라인 통신망을 담당하였습니다. 그 이후 고객 지원팀으로 활동 했었죠. 국가 및 금융기업 들의 바이러스들을 체크해주고 사이트를 진단 하는 일이었습니다.

 

 

Q : 힘든 당시에도 재미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것들이 있었을 텐데 몇 가지만 말씀해주세요

A : 당시는 마땅한 수입이 없던 때라 라면을 주로 끓여 먹었어요. 안철수 박사님은 새로나온 과자, 라면은 꼭 사서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셨지요. 이 라면은 맛이 어떻다 저라면은 어떻다 하면서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회사가 조금씩 커나가면서 20~30명 정도의 직원들이 있었을 때는 정말 가족 같았습니다. 가끔씩 안철수 박사님께서 양손 가득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오셔서 나눠먹기도 했구요. 행복과 열정이 충만 했기에 너무 즐거웠습니다.

또 하나는, 2000 12월경 이었어요. 당시 Y2K를 가지고 정부에서 준 샘플 파일이 있었는데 실수로 그걸 회사 컴퓨터에 퍼지는 바람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관제소에서 올라오는 바이러스 보고들을 확인하고 있을 당시 MS. System파일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삭제 했는데 그게 또 한번 난리가 났었죠. 이런 작고 큰 에피소드들이 결국은 안랩이 세상의 모든 악성파일과 바이러스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Q : Ice cream 전문점을 하게 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오히려 주점이 수익 면에서 더 좋을 수도 있을텐데

A : 물론 수익면에서는 술집이 더 잘 되는 것은 당연하죠. 하지만 저는 수입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술집은 기분이 좋건 나쁘건 찾아오게 되지만, 아이스크림을 파는 이곳은 항상 행복한 미소를 띈 사람들이 들어왔거든요. 전 그런 모습들을 보고 싶었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고 받는 것 같아서 선택하게 되었어요. 비록 시작하지 얼마 안됐지만 많은 보람을 느끼고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Q : 직원에서 CEO로 바뀌었는데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공통점은요?

A : 아무래도 주는 돈을 받는 입장과 수익을 관리하는 입장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죠.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어서 마음은 편한 반면,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직원관리, 재고, 식품 관리까지 신경 쓸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체력도 뒷받침 되어야 하구요. 하지만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수익이 달라지고 단골손님들이 많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공통점을 꼽으라면 둘 다 고객과 상대한다는 것이 크죠.

 

Q : 고정한씨께서는 IT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실력자 이신데회사를 그만두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가게를 하시겠다는 이유는요?

A :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정점을 찍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하고자 하는일에 대해 한계를 발견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회사와 사람간의 관계이다 보니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하더라구요. 어릴때 부모님께서 가게를 하셨어요. 그래서 회사생활을 접고 가게를 한다는 것에 큰 두려움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거 같아요. 만족하고 있습니다.

 



Q : 고정한씨 이후에 많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텐데요. 직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 직원들간의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회사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그런 점은 좀 아쉽더라구요. 함께 같은 길을 나아간다는 생각으로 업무에 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항상 고객과 함께 하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일하셔서 더 큰 규모의 안랩이 되었으면 합니다.

Q : 이글을 보고 있는 안랩인들을 위한 한말씀도 부탁 드립니다.


A : 안랩을 사랑하시는 모든분들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 주시는 많은 채찍과 사랑이 지금의 안랩이 있게된 원동력 이었습니다. 저또한 안랩인의 한사람으로써 언제든지 함께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화이팅!
 

Q : 마지막으로 꿈은 무엇인지요?

A : 하하, 이거 무릎팍 도사도 아니고^^;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컷으면 좋겠고, 저의 집사람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물론,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가게도 잘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건강! 제가 예전에 무릎을 크게 다친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에 지금까지도 운동을 안 하면 고생 하거든요. 그래서 틈틈히 시간 나는대로 꾸준한 운동과 취미생활 등등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별 탈없이 잘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이 글 보시는 다른 분들도 건강 꼭 잘 챙기시길 바라겠습니다.

  



처음 만나서 어색할 텐데 약간 썰렁한 농담과 함께 분위기를 잘 이끌어 주신 고정한 님께 다시한번 감사 드린다. <하얀머리 아저씨가 되어서도 사람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퍼주었으면 합니다.>라는 그의 말속에는 항상 고객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 새겨져 있었다. 나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상대방의 입장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필자에겐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기사에 실지는 않았지만, 몇 십년 동안 취미로 즐기고 있는 그의 춤에 대한 열정과 안랩에 대한 사랑은 여느 사람 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비록 안랩과의 인연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는 안랩인으로 남아 있었다.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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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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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 안희정을 말한다 - 노무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입력시각 : 08-01-04 14:55
 
 

우리가 만난 것은 15년 전입니다. 내가 지방자치연구소를 할 때 같이 일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안희정씨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연구소 살림살이가 참 어려웠습니다. 직원은 적고, 일은 많이 하고, 월급도 제대로 못주던 시절인데 그 살림살이를 도맡아서 꾸려갔습니다. 어렵고 안 되는 일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흔들리고 때로는 내부의 갈등이 좀 생기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을 다 추슬러서 아주 훌륭하게 연구소를 꾸려 주었습니다.


그 당시 안희정씨에게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역시 사람관계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갈등을 다독거리고 추슬러 아주 훌륭하게 이끌어 갔습니다. 그때부터 지도자의 자질을 보여준 것입니다.

 

안희정씨는 나한테 오늘이 있게 한 아주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정치적 동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여러 번 낙선하고 그러니까 정치를 하면서 힘든 대목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힘들어서 “이제 정치를 그만 두겠다”고 말할 때마다 항상, 한 쪽으로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고, 한 쪽으로는 젊은 참모들을 전부 다 모아 와서 그만두지 못하게 협박(?)도 했습니다. 그렇게 끌고 밀고 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결국 대통령을 만들어 준 사람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나한테나 같이 일한 동료들한테 한 번도 부담을 준 적이 없습니다. 이 친구가 참 훌륭한 것은 자기가 당했던 고생이나 희생에 대해서 한 번도 생색을 낸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나나 같이 일하는 참모들을 한 번도 부담스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는 친구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떤 능력이란 수준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사람이 능력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의 됨됨이랄까 인품 같은 것이 그 수준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남을 편하게 해주고 또 모두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본인 스스로 자기 이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살겠다는 삶의 목표를 세워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의 성품으로 갖추고 있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안희정씨는 그걸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치지향이나 소신이 분명하고, 용기 있고, 결단력 있고, 자기 일이나 조직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입니다. 안희정씨는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보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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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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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께 청원드립니다
- 노무현 대통령의 '부치지 못한 편지' 전문

(사람사는 세상 / 노무현 / 2009-04-19)



 

 

이명박 대통령님,

어려운 시기에 국정을 수행하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 어려운 시기에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처지를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저와 관련한 일로 대통령께 청원을 드립니다.
청원의 요지는 수사팀을 교체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동안의 수사 과정으로 보아 이 사건 수사팀이 사건을 공정하고
냉정하게 수사하고 판단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검찰이 하는 일은 범죄의 수사이므로, 검사가 머릿속에 범죄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범죄를 구성하는 사실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우선하는 검찰의 의무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검찰은 있는 사실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지,
없는 사실을 만들거나 관계없는 사실을 가지고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서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사실도 찾아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사팀이 하고 있는 모양을 보면
수사는 완전히 균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사팀은 너무 많은 사실과 범죄의 그림을 발표하거나 누설했습니다.
피의사실을 공표하거나 누설해왔습니다.
다음에는 그들이 발표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표하거나 누설해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증거의 신뢰성을 뒷받침하는 사리를 설명해왔습니다.
마침내는 전혀 확인되지 않은 터무니없는 사실까지 발표합니다.

이런 일들은 검찰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불법행위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 문제를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사건 수사팀이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미리 결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발표하거나 누설한 내용을 보면 미리 그림을 다 그려놓고
그에 맞게 사실과 증거를 짜 맞추어 가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수사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수사의 공정성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국민들은 그들이 만든 범죄의 그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미래에 이 사건의 재판을 맡을 사람의 기억에까지
선입견을 심어줄 우려가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수사팀이 끝내 피의사실을 입증할 만한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에도 결론을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려놓은 그림에 빠져서 헤어날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판단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은 발표를 해버린 것 같습니다.

만일 사건이 이대로 굴러가면 검찰은 기소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검찰의 판단이 잘못된 것으로 결론이 나왔을 때,
그리고 검찰의 수사과정의 무리와 불법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대한민국 검찰의 신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황이 이러하니 수사팀은 새로운 증거가 나올 때까지
증거를 짜내려고 할 것입니다.
이미 제 주변 사람들은 줄줄이 불려가고 있습니다.

끝내 더 이상의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건이라도
만들어 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검찰권의 행사가 아닙니다.
권력의 남용입니다.

그동안 참여정부 사람들이나 그들과 혹시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심이 갈 만한 사람들은 조사할 만큼 다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까?

이미 제 주변에는 사람이 오지 않은 지 오래됐습니다.
저도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심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올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권위도 신뢰도 더 이상 지켜야 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그리고 법리대로만 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검찰의 공명심과 승부욕입니다.

사실을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이미 이 사건에 관하여 보고를 받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이처럼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보고를 받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이 사건을 다시 한 번 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통상적인 보고라인이 아니라 대통령께 사실과 법리를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다른 전문가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받아 보실 것을 권고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검찰이 막강한 권능으로 500만 불을 제가 받은 것이라고 만들어내는 데
성공을 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과연 퇴임 사흘 남은 사람에게 포괄적 뇌물이 성립할 것인지,
과연 박 회장의 베트남 사업, 경남은행 사업, 그 밖의 사업에
대통령이 어떤 일을 했는지, 무슨 일을 했다면 그것이 부정한 일인지,
이런 문제들에 관하여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박연차 회장이 2007년 6월 저와 통화를 했다면
검찰은 그 통화기록을 확보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도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도를 보면 통신회사의 기록 보존 기한이 지났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통신 서브를 폐기하지 않은 이상 복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기관은 검찰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통화기록은 반드시 검찰이 찾아서 입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이 기록을 성의 있게 찾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이 이 사건에 관한 단서를 언제 처음 알았는지,
왜 지금까지 수사를 미루어 왔는지,
그동안에 박 회장의 진술이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지,
지금 검찰이 박 회장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권능을
이 사건 수사를 위하여 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사정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 수사가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소하는 방법은 수사팀을 교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로지 대통령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적 절차는 법무부 장관의 소관일 것입니다만,
대통령의 결단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저와 제 주변의 불찰로 국민을 실망시켜 드린 점에 대하여는
이상 더 뭐라고 변명을 드릴 염치도 없습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거듭 사죄드립니다.

이제 저는 한 사람의 보통 인간으로서 이 청원을 드립니다.
형식 절차에서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설사 그가 극악무도한 죄인이거나
역사의 죄인이거나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입니다.

제가 수사에 대응하고, 이 청원을 하는 것 또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라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4월

(cL)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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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두] “다음 세상에서도 DJ 모시겠다”

 


민주화운동 함께한 동교동계, 인동초 삶도 함께 견뎌
모진 고문·수감생활…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동교동계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김 전 대통령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삶을 생생히 목도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김대중’보다 더 따뜻했던, 눈물 많고 정 많은 김 전 대통령을 보았고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한 인동초 삶의 곁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훈도 이들에게는 평소 들어오던 말일 뿐이다. 동교동계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일면들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되새겨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다. 그러나 동교동 사람들 중에서도 ‘동교동계’라 불리는 이들은 좀 더 특별하다.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고 ‘동교동 재야인사’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소통할 때 그와 함께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김옥두 전 의원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김 전 대통령과 같은 곳을 봤고, 죽어서도 김 전 대통령을 모시고 싶다고 말하는 이. 그에게는 김 전 대통령이 인동초 꽃을 피우기까지 살아왔던 모진 겨울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이던 지난 14일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김 전 의원과의 일문일답.



- 국장 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 종종 김 전 대통령의 묘지를 찾고는 한다. 오늘도 다녀왔다. 이희호 여사와 권노갑 고문 등 김 전 대통령을 그리는 이들과 함께 참배를 하고 바로 오는 길이다. 49재는 치르지 않기로 했지만 애도기간으로 여기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아직도 DJ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나.
▲ 일본에서 납치를 당하셨다가 가까스로 돌아오신 후 매년 8월13일은 ‘제2의 생일’로 기념해왔다. 올해도 도쿄 피랍 생환 36주년을 기념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중 입원을 하셨다. 이전에도 입원을 하셨지만 건강을 회복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강건하게 돌아와 행사에 참석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국장을 치르면서 자녀의 손을 잡고 가족끼리 빈소를 찾은 이들을 많이 보았다. 진심으로 슬프게 울더라. 나도 굉장히 많이 울었지만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계신 것만 같다. 동교동 자택 거실에 있으면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곧 들어오셔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주옥같은 말씀을 해주실 것만 같다.

- 동교동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것인가.
▲ 나는 오랜 기간 김 전 대통령의 비서로 있었지만 처음부터 동교동 자택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1965년 초 김 전 대통령이 자비를 털어 운영하던 정책연구실인 한국내외문제연구회에 비서로 들어갔다. 거기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1966년 말 동교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김 동지! 내 그동안 자네를 유심히 지켜봤는데 성실성이 참 마음에 드네. 내일부터는 동교동으로 출근해 일을 하도록 하소. 도와주기 바라네”라고 하셨다.



- DJ가 걸어온 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 김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탄압의 역사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을 받았다. 암울한 시대에는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국민과 민족,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평생을 살아오셨다.
정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으셨다. 말뿐 아니라 실천하셨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인동초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나는 그 역사의 증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 DJ에 대한 탄압은 1971년 대선에서 DJ가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 1971년 대선에서 우리는 수많은 표를 잃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권을 두고 승부를 벌였을 때 동교동의 표는 다 무효가 됐다. 부정선거라는 이유로 김 전 대통령과 그 가족, 동교동 사람들 1600명의 표가 전부 효력을 잃었다. 게다가 영남지역에는 공명선거 감시단 참관인들이 아예 발을 붙일 수도 없었다. 협박해서 쫓아버리거나 술과 밥과 돈으로 매수했다.



- 이후 어떤 고초를 겪은 것인가.
▲ 1972년 박 전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을 선포했다. 그 이튿날쯤이다. 나는 동교동 자택으로 막 들어가다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에게 끌려가야 했다. 광화문 분실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다.
동교동 사람들 대부분이 4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한길을 걸어왔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형무소에 가고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나도 여러 번 겪었는데 1980년 5·18때가 가장 심했다. 두 달간 내란음모죄로 고문을 당했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나쁘다’ ‘김대중과 가까운 군인, 경제인, 학생, 교수, 언론인은 누구냐’ 몰아치듯 질문이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사상이 이상하다는 글만 써 주면 원하는 대로 돈도 주고, 국회의원도 시켜주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 DJ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나.
▲ 오히려 정반대였다. 고문이 극심해지자 “너희들이 내 몸을 찢어발긴다 해도 내 정신을 뺏을 수는 없다. 차라리 죽여라”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을 모셨던 동지, 가족, 친지들이 탄압을 받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자기가 싫어서 나간 사람은 있어도 김 전 대통령을 배신한 이는 없다. 김 전 대통령의 인간성, 정, 행동하는 양심을 그분을 모시며 모두 봐왔기 때문이다.
정권이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온갖 비방을 했지만 모시고 있는 사람이 봤을 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장기집권을 위해 김 전 대통령을 탄압한 것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분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꿈도 못 꿨다. 한길을 걷다 보니 나도 국회의원이 됐다. 김 전 대통령 밑에서 공부했던 비서들은 의원회관에서 날을 새가며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국감스타가 됐고 ‘과연 훌륭한 이에게 배워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 DJ의 감옥생활은 어떠했나.
▲ 1980년 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김 전 대통령도 다른 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이중 감옥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이 머무는 감방 양 옆을 비워서 누구도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면회를 갈 때도 그분만 다니는 길이 따로 있었다.
면회를 하기 위해 어두운 길을 걸어오는데 가족들이 항의해서 겨우 불을 켤 수 있도록 했다. 인터폰으로만 이야기하고 볼펜도 주지 않았다. 하루는 운동을 하다가 못을 하나 구해서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이 있으면 점자식으로 찍어서 표시했다. 그런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밖으로 엽서를 보낼 때는 엽서 한 장에 깨알같이 글자를 써서 수만 자를 적어 보냈다.

-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DJ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지 않나.
▲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최후진술에서 “나는 아마도 사형판결을 받고 또 틀림없이 처형당하겠지만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도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기회를 빌어 유언을 남기고 싶다. 내 판단으로는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믿고 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이다”라고 했다.
재판부는 “김대중 사형!”을 선고했다.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일사천리로,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본과 미국 등 전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고 대대적인 석방시위가 벌어졌다. 카터 행정부로부터 김 전 대통령의 제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의사를 매개로 사형이 확정된 김 전 대통령을 구명하고자 애썼다.





- 워낙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았던 DJ였으니 경호도 철저했을 것 같다.
▲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경호를 책임졌었다. 김 전 대통령은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경호에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올 때 누가 뒤에서 밀지 않을까, 식사를 하면 누가 독극물을 넣은 것은 아닌가, 자동차를 타면 타이어에 구멍이 나서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경호원 한 사람 한 사람이 24시간 경호체제로 김 전 대통령을 철통경호했다.
일화도 많다. 오후 7~8시쯤 날이 저물 무렵 김 전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으면 창살이 날아왔다. 옷에 스치면 옷이 찢어질 정도였고 그 창살을 맞고 다친 이도 있다. 식사를 할 때마다 항상 옆에서 은수저를 준비해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전방에 간 일이 있다. 청와대 경호실 책임자가 당선자에게 방탄조끼를 줬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내가 우리 군인을 믿지 않으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끝내 그 방탄조끼를 입지 않았다.

- 대선기간 동안 경호문제뿐 아니라 건강문제에도 크게 신경 써야 했을 것 같은데.
▲ 워낙에 건강하셨다. 대선기간 동안 하루에 19군데에서 유세를 펼쳐 연설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유세를 하고 곧장 다른 장소로 이동하다 보니 제대로 식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차에 군것질거리를 뒀는데 많은 사람들과 악수한 손 그대로 집어 드셨다.
5분간의 토막잠도 그분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대선기간 중 ‘DJ가 쓰러졌다’ ‘유세를 못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당시 대선주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했는데 매주 TV토론회에 건강한 모습이 나왔다. 상대후보 측에서 퍼뜨린 유언비어는 그 TV토론회 때문에 거짓으로 탄로 났다.



- 곁에서 지켜본 DJ는 어떤 사람이었나.
▲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비서에게도 반말하는 일이 없이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손이 따뜻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참 따뜻한 분이셨다. TV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이희호 여사와 산책을 하거나 드라이브를 다니셨는데 꽃을 좋아해 꽃이 많이 핀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시고는 했다.
새도 좋아했지만 키우지는 못했다. 새를 키우려면 가둬야 하는데 그게 철창 아니냐. 김 전 대통령 본인이 철창에 갇혀봤기 때문에 가두는 것을 싫어했다. 자택에 참새들이 모이면 모이를 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 DJ 하면 깊은 학식이 생각난다. 그 학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나.
▲ 워낙 명석하신 분이셨다. 어느날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한 달여 전에 난 기사를 보지 않고서는 이해가 어려운 기사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 달 전 모일에 무슨 신문 몇 면에 이런 기사가 났는데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해당 신문을 찾으면 찾으시는 기사가 분명 있었다. 사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책을 정말로 많이 읽으셨다. 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보니 주무실 때도 책을 보다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글귀를 인용하시고는 했는데 그 말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말씀하셨다.
또한 선거 때 수행을 하다 보면 시간 날 때마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생 공부를 하신 것이다.
예전에 권노갑 고문의 지인 중 한국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이가 있었다. 몇 년 동안 공부를 해왔는데 김 전 대통령을 만나 두 시간여를 이야기하더니 “몇 년간 배운 것을 두 시간 동안 다 알게 됐다. 존경스럽다”고 하더라. 그 정도로 학식이 깊으셨다.

- DJ의 공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임기동안 IMF를 극복하면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IMF를 극복해냈을 뿐 아니라 외환보유고를 최고로 만들었다. 전 세계에 경제위기가 몰아쳤을 때 이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기반이 된 때문 아니겠냐.
정치, 경제 문제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토대도 닦았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해 애썼다. 남북 화해협력시대를 열자고 하셨고 서거 후에는 북한에서 특사가 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남으로써 남북관계 개선에 일조했다.
입원하시기 전에 9~10월경이면 북미간 대화가 이뤄질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았나. 김 전 대통령이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장관에게 대북관련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안다. 이 중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북미간 대화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김 전 대통령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내가 봤을 때 전 세계를 통틀어 김 전 대통령처럼 고통 받고,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람이 없다. 감옥에 가고 사형선고를 당하고 57회의 연금까지.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한번도 굽히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 부르며 진지한 경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포한 퍼트린 유언비어와 그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을 비판하게 된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이제 와서는 그들이 김 전 대통령이 어떤 이였는지 알게 되고 있는 것 같다.

- 시간이 더 흐르면 DJ에 대한 평가가 더 나아질 것으로 보는가.
▲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높이 평가될 것이다. 어떤 직책에 있었느냐가 아니라 과연 ‘행동하는 양심’으로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부분이 평가받을 것이다.

- 정치권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 정치는 노장의 조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당과 시민단체가 잘 뭉치길 바란다. 또한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당이 됐으면 좋겠다. 민주당은 정통 있는 정당인 만큼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해 잘해나갈 것으로 믿는다.
민주주의가 튼튼하고 국민들이 잘사는 세상이 되도록 정치가 잘해야 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김 전 대통령을 모신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었다. 항상 그분의 비서였으며 죽어서도 김 전 대통령을 모실 것이다. 그분의 유업인 국민화합에 만분지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김옥두는 누구?



▲1938년 8월 18일 전남 장흥 출생
▲1985년~1992년 김대중 총재 비서실차장
▲1987년 평화민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 경호실장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비서실장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2000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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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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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못한 추도사를 대신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 당일 끝내 못한 추도사. 김 대통령님께서 그 추도사를 대신한 추모의 말씀을 3일 보내오셨습니다. 동교동에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신간 추천사 형식을 통해 보내주신 추모의 메시지를 공개합니다.” <관리자 주>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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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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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보건복지부장관이 최근 출범한 노무현재단에 부치는 글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삶보다 더 절실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는, 말 그대로 대장부였다"고 말했다.

27일 유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 홈페이지인 '사람사는 세상'에 '사생취의 정신을 기리며'란 글을 올려 "인간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삶과 죽음 전체를 관통해서 흐르는 정신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또는 사리취의(捨利取義)"라며 "이것은 일찍이 맹자가 말한 바,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익을 버리고 목숨도 버릴 수도 있는 호연지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올바른 길을 걷고자 했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홀로 그 길을 갔던 사람"이라며 "자신이 의를 실현하려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고 느꼈을 때 홀연히 부엉이바위에 올라가 생명을 던졌다. 그는 삶보다 더 절실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는, 말 그대로 대장부였다"고 회고했다.

또 그는 "우리는 지금 대통령에서부터 평범한 서민에 이르기까지 너나 없이 이(利)를 말하고 이를 좇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다른 모든 가치를 경시하면서 오로지 물질적 복지, 그것도 GDP 성장률이나 화폐표시 소득과 같은 가장 좁은 의미의 물질적 복지를 최고의 가치로 대접하고 있다"고 쓴소리를 뱉었다.


유 전 장관은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시민의 자유를 자의적으로 제약해도 좋고, 평등과 정의를 외면해도 되며, 한반도 평화와 국가안보를 적당히 훼손해도 괜찮고, 생태계 파괴도 감내해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현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역사는 이런 탁류에 뒤덮인 나라치고 위험에 빠지지 않은 나라가 없음을 되풀이 증명한다"며 "그래서 이로움보다는 의로움을 따랐던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바람이 불면 사물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똑같이 의를 구하는 마음이 있어도 선택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며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 글 잘 쓰는 사람은 글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참여하기를 소망한다"며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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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문성근씨가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문화적 시각에서 본 노무현'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권우성
문성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적인 정신 상태는 분노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분노하는 것이 뭐가 어려운 일인가 생각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돌아가서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배우 문성근씨는 자신이 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이렇게 평을 했다. 22일 저녁 여의도 국민일보사 1층 메트로 홀에서 열린 '노무현 시민주권 강의' 다섯 번째 강사로 나선 자리에서였다. 문씨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추모동영상에 나오는 고인 유서를 낭독한 후 처음이다.

 

문씨는 연기자답게 연기수업을 예로 들며 노 전 대통령을 평가했다.

 

"미국의 예로 들면 4년제 연기학교에 입학하면 처음 1년간은 그냥 둔다. 그리고 3학기 째 들어가면 탈락자들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잘리는 학생들이 하버드나 예일 대학 출신들이다. 이 친구들은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들을 보면서 '아 저분은 머리로 생각만 하는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생각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와야할 반응이 없어지고, (화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온갖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 접근하기 위해선 '분노할 일에 분노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문화적 시각에서 본 노무현'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권우성
문성근

문씨는 노 전 대통령을 '법률가이면서 학자적인 풍모를 가졌던 분'으로 기억했다.

 

"법률가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학자로서 기존의 학설까지 일단 한 번 의심해 보면서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보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단 옳은 것이라 생각되면 실천하겠다라는 자세를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불의와 거짓, 위선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이고, 그 실천에 있어서는 절대 불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용맹성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문 씨는 노 전대통령의 임기 5년간을 '족벌신문들이 국민들이 쟁취한 자유를 이용해 참여정부를 흔들어 댔던 시기'로 평가했다.

 

"'길 닦아 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는 속담처럼 국민이 민주화 운동을 통해 쟁취한 자유를 가지고 민주화 운동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발목을 잡았던 족벌신문들이 지켜야할 자기들의 본분을 벗어나 권력을 더 차지하기 위해 탐욕을 부리는 형국이었다. 열심히 길을 닦아 놓았더니, '길이 왜 왼쪽으로 비뚤어졌느냐'며 무능하다고 욕을 하는 신문들,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세습권력이라는 것이 더 문제다."

 

"2003년으로 기억하는데, 대학 시절 아주 친했던 친구 부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려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그 분이 화가 잔뜩 나서 눈이 시퍼렇더라. 그리곤 다짜고짜 삿대질하며 분노와 저주를 퍼부었다. '노무현이가 어쩌구 하면서', 난 나쁜 신문을 보지 않으니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또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삼각동맹'을 우리 사회 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았다.

 

"최근에 미디어법 통과되는걸 보면서 저게 과연 정당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족벌 신문들이 강요하다시피 한 것 아닌가? 상임위에서 상정되면 본회의에서 반대표 던지겠다던 박근혜 의원은 (신문에서) 2,3일 동안 집중공격 받더니 꼬리를 내리더라. 족벌신문들의 과거를 보면 87년까지는 독재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다가 그 뒤에는 YS 대통령 만들기를 했다. YS는 당선되던 날 신문사 회장 집에 갔다. YS가 잘한 일 중에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 등록제 등이 있는데, 나는 (신문사 사주) 재산공개를 관철시키지 못했던 것이 (정치권력과 언론권력 사이에) 힘의 균형이 변화하는 시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노 대통령 집권 이후 족벌언론은 횡포는 강도나 범위에서 훨씬 강해지기 시작했다. 거의 저주와 야유, 조롱과 능멸 수준이었다."

 

이어 문씨는 우리 사회가 점차 보수화 되어가는 원인으로 '학교에서 현대사 교육이 없었던 것'을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문화적 시각에서 본 노무현'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권우성
문성근

"내가 72학번인데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현대사를 거의 배우지 못했다. 국사교과서를 보면 고조선 이후 해방 전까지는 200페이지, 해방 이후가 불과 5페이지다.

 

2009년 한국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안의 일이 95%를 규정하는데 그것을 교육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박정희 대통령도 그 현대사를 국민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국사에서 현대사가 분리된 것이 국민의 정부 당시의 일인데 아직도 필수과목이 아니다."

 

문씨는 또 전적으로 사견임을 전제로 인터넷 정당 활성화를 통한 정당개혁 등 현실정치에 대한 해법도 제시했다.

 

"민주당은 지금 상태에서는 물갈이를 할 수 없다. 지금 이대로만 가면 수도권에서 상당히 우세할 것이고 아마도 30~40석은 더 얻을 것이 뻔한데, 어차피 대통령하겠다는 후보는 한두 명이고 국회의원 하겠다는 사람은 수백 명 아니냐? 이런 구조라면 많이 당선될 게 뻔한데 굳이 바꾸려고 하겠나? 그렇기 때문에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사모란 정치조직체가 만든 개혁당과 민주당이 중간에서 만난 것이 열린우리당이었다. 이것이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가 당원들의 성향이 너무 달랐다는 점이다.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화학적 결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기존 정당을 50으로 하고 인터넷 정당을 50으로 해서 방 2개짜리 정당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네티즌의 경우는 어떤 한 사람을 놓고 모이기 어렵기 때문에 인터넷 지구당은 4~8개 지구당을 합쳐서 만들고, 당원들은 이들 지구당에서 모두 투표권을 행사하고 이런 식으로 생활정치 구조를 만들어 양쪽이 함께 가는 구조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어 문씨는 부친인 문익환 목사가 1989년 평양을 방문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뜻 변호인이 되어주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참여정부에서 왜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문씨는 "처음에 노무현 후보를 돕겠다고 했을 때 절대 직업을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시작을 했다. 문 목사는 시비거리가 거의 없었던 삶을 사셨는데, 꼭 한 가지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의 분열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그 때 이미 문 목사는 이 세상에 안 계셨지만 내가 아들로서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사과드리고 싶었다. 물론 나와 문 목사는 존재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나로선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한 것이 노 후보를 지원하게 된 동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활동의 결과로서 노 대통령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뒤에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다 사양했다"고 밝혔다.  

 

문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자신은 어떤 배역을 맡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정말 노 전 대통령은 내가 연기할 수 없을 것"이라며 "악역에는 자신이 생겼기 때문에 족벌신문 (사주)역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답변해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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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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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In&Out] 안철수 교수의 아내 김미경 카이스트 교수


수줍은 부부의 대담한 도전… 못말리는 부창부수

둘은 의과대학에서 만났다. 결혼 후에는 남편은 의대에서, 부인은 병원에서 근무했다. 부부의 인생은 그렇게 결정되어진 듯했다. 그러나 군의관을 마친 30대 초반의 남편은 의대로 복귀하지 않았다. 대신 컴퓨터 바이러스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 외도에서 출산된 것이 국내 최고의 보안업체 '안철수연구소'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얘기다. 이 부부 이야기에는 속편이 있다. 속편의 주인공은 아내다. 유능한 의사였던 그녀는 나이 마흔에 유학을 결정했다. 남편은 한국에 남겨둔 채 미국에서 법학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지난해 초 한국으로 돌아온 40대 중반의 아내는 병원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대신 카이스트에서 특허법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새 인생을 선택했다.

안철수(47) 김미경(46) 부부는 요즘 같이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중이다. 아내를 따라서 지난해 가을부터 남편도 카이스트로 왔기 때문이다. 너무 유명한 남편과 달리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김미경 교수가 지난 주 자신의 연구실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남편과 같이 근무하니까 좋으세요?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저와 남편이 약속을 했어요.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고, 같은 도시에서 살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피하자고. 그동안 너무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우리 가족에게는 같이 사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제가 여기에 없었다면 남편이 카이스트로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새학기가 시작됐는데 어떤 강의를 맡으셨나요?

"월요일마다 3시간짜리 강의가 있어요. 기술경영전문대학원과 의과학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죠. 바이오테크놀로지와 관련된 법과 제도를 가르치는데 특히 특허법이 제 전공이에요. 남편도 같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해요. 창업과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고 있어요."

-왜 마흔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거죠? 의사 생활에 싫증이 났었나요?

"의학에 대한 그리움이 지금도 있어요. 그렇지만 의사로 사는 건 좀 개인적인 것 같아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신문을 봐도 판단기준이 없고. 정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는데, 의약분업이 한참 논란이 되고 있을 때 제가 뭐가 옳은지 모르겠더라구요. 나도 세상에 대해 생각도 하고 시각도 좀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좀 늦었지만 공부를 해 보자, 그렇게 된 거예요."

-법학을 선택한 것도 의외입니다.

"저는 병리의사를 오래 했기 때문에 분자생물학이나 테크놀로지와 굉장히 관련이 많았어요. 지적재산권이나 특허법, 의료법 등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한국에서 공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법대에는 의료법이나 특허법을 특화해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또 새로 만들어지는 법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되는 경향이 있고, 바이오테크놀로지의 가장 큰 시장이 미국이기도 하고,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편인가요?

"두렵기도 했죠. 고민 오래 했어요. 2001년 초에 법대 갈까 처음 생각했고, 이듬해 7월에야 떠났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요, 그래도 가는 게 낫겠다, 그렇게 정리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가 싫지 않았어요. 병원이 고향처럼 익숙하고 좋았고. 그런데 지금 안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많으니까. 이전의 경험에서도 보면 진보적인 방향으로 선택하는 게 항상 후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의학과 법학은 둘 다 매우 어려운 학문입니다. 혹시 공부하는 일에 고통을 안 느끼나요?

"물론 힘들어요. 특히 영어가 어려웠어요. 말하는 것도 잘 안 되는데 법률영어를 해야 하니까. 1학년 때 상당히 고전했어요. 수업이 끝나는 순간부터 복습을 시작해야 했어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집에 와서 음식을 먹으면서, 그리고 잠을 줄이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해야 간신히 다음 날 아침 수업을 따라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깨어있는 동안 계속 공부를 해야 했어요. 그때 커피도 엄청 마셨고. 그렇게 3년간 했어요."

-딸을 키우면서 어떻게 학위를 받을 수 있었나요?

"딸은 제가 항상 데리고 다니고 싶었어요. 그래서 중학생 딸을 데려간 거죠. 딸과 함께 도서관에 다녔던 기억밖에 없어요. 제 딸은 학교로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어요. 그래서 저는 딸을 픽업해서 같이 동네 도서관으로 갔죠."

-따님이 지금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걸로 압니다. 자녀교육법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을 듯 합니다.

"다른 부모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시간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남는 시간을 전부 딸과 같이 보냈어요. 학회 갈 때도 딸을 데리고 다녔고, 단국대 교수 시절 천안으로 강의하러 갈 때도 데리고 갔어요. 집에서 봐줄 사람이 없을 때는 어쩌겠어요, 같이 다녀야지. 조교실에 딸을 맡겨놓고 강의를 하곤 했어요. 딸이랑 같이 고생했던 기억이 참 많아요. 다행히 딸이 엄마 생활이 어떤지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좀 크더니 '엄마가 보통 아줌마처럼 되는 거 싫어요. 학교에 사표 내지 마세요' 그러더군요. 애들은 다 자기 환경에 적응하는 것 같아요. 엄마가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만 느낄 수 있다면 다 참아낼 수 있어요."

-안철수 교수도 그렇고 김미경 교수도 그렇고 너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이뤄내는 듯해서 우리들과는 왠지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40대에 공부를 한 건 남편이 도와줬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고. 운이 좋은 사람들인 거죠. 그런 점에서 감사해요. 그렇지만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뭘 시작하면 끝을 맺으려고 했어요. 일단 시작해 놓고, 힘들어도 그 일을 계속 하면, 일을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아요. 곰처럼 해요."

-혹시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까?

"법대 다닐 때 연방법원 여자 판사를 모시고 인턴을 했어요. 어느 날 애로를 물어보니까 법대 동창들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다들 변호사들인데 너무 가까워지면 판결에 바이어스(편견)가 생길 수 있다고. 미국 연방법원 판사들은 상당히 고립돼 살아요. 심지어 옆방 판사들하고도 사건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아요. 그들의 직업윤리에 감동했어요. 사회봉사에 대한 태도도 인상적이었어요. 그 판사는 평소엔 맹인안내견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어요. 휴가 때는 아프리카에 가서 후진국들의 법제도 만드는 일을 돕고. 또 아주 오래 된 차를 끌었어요. 생활은 검소하면서도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 보냈죠. 전 사람들에게 배우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남편과 관련된 질문을 해보죠. 의사에서 벤처기업가로 변신하더니 회사 설립 10년 만에 경영에서 물러났고, MBA를 하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가장의 이런 변화들이 아내로서 힘들지 않았나요?

"회사 그만둘 때는 남편이 많이 지쳐 있었어요. 그래서 좀 쉴 수 있겠다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남편이 의사 그만둘 때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같은 의대를 나왔어도, 이런 말 낯뜨겁지만, 전 남편이 천재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공부를 하면 노벨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많이 섭섭했어요."

-남편이 정치를 하겠다면 말리시겠습니까?

"서울시장 얘기나 정보통신부 장관 얘기를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남편이 하겠다고 하면 사회봉사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가장 적절한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저희는 다 이과 출신이고 주변에 정치인이 한 명도 없어요. 아마 의사 그만둔다고 했을 때만큼은 반대할 것 같아요. 너무 소모적이지 않을까요? 저는 남편의 이공학도로서의 재능이 항상 아쉬워요. 책을 쓰는 게 보다 남편에게 맞지 않나 생각해요."

대전=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김미경은

병리학 의사로 15년간 일했다. 2002년 성균관대 의대 삼성의료원 부교수직을 던지고,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주립대 법대에 입학했다. 2005년 졸업 후 스탠퍼드 법대의 특별연구원(펠로)으로 뽑혀 2년간 ‘생명과학과 법 센터(Center for Law and the Bioscience)’에서 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땄고, 2006년에는 스탠퍼드 의대에서 조교수 겸직 발령도 받았다. 국내에서도 유명 사립대학들에서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2008년 4월 카이스트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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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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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를 읊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잔인한 달'의 아픈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다투고 헤어졌거나 영영 잃었을 경우가 그러하다. 한반도 평화통일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2009년 봄과 여름은 '잔인한 계절'로 다가왔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8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가뜩이나 "한국엔 존경할만한 원로가 많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한탄이 들리는 한국사회에서 두 인물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인물의 공통점은 이 땅의 억눌린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특히 민족화해와 평화적 통일의 길을 닦기 위해 힘썼다는 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잡고 내놓은 두 개의 선언(2000년 6.15선언, 2007년 10.4선언)은 지구상의 유일분단국가를 60년 넘게 살아온 우리 한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반통일 냉전수구세력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하면서 6.15선언과 10.4선언이 지닌 의미를 깎아내려 해도 어려운 일이다. 훗날 민족통일이 이뤄져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들어서는 날, "한반도를 전쟁의 살얼음판에서 구해내고, 나아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젖힌 역사적인 선언"이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저 아저씨들 왜 그래요?"

문제는 이 땅의 일부 극우보수들이 김대중-노무현을 보는 눈길이 너무나 싸늘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6.15와 10.4 남북공동성명을 '반역적인 선언'이라고 매도해왔고,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깎아내렸다. 두 정치지도자의 죽음을 맞아 많은 이들이 슬퍼하는 마당에, 일부 극우보수 인사들은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전직교수 A는 노무현의 죽음 뒤 김대중을 향해 "뒷산에 올라가 투신자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언론인 B는 지난 5월엔 "왜 국민장으로 국민세금을 낭비하느냐"고 딴죽을 걸었고, 8월엔 "국장이 국가 분열의 촉발제"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국장이 치러지던 날도 조용히 넘어가질 않고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는 김대중 정권의 국가반역혐의 50개 항목'이란 글을 내놓았다.

또 있다. 자칭 군사평론가 C는 "두 빨갱이 수장(首長)이 3개월 차이로 운명했다"고 두 사람의 죽음을 규정하면서, "역적이자 빨갱이, 역적 간첩을 현충원에 보내면 그 순간부터 국가는 소용돌이 칠 것"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땅의 극우보수들은 북한 조문단이 서울로 오는 것조차 반대했고, 김포공항여의도 국회로 몰려가 목청을 높였다.

이들의 돌출발언과 행동을 뉴스로 보면서 자라나는 세대들도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다. 고교 1학년인 이웃집 학생은 골목길에서 나를 붙들고 "저 아저씨들 왜 저래요?"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왼쪽에 선 사람은 모두 좌파?

생전에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죽은 뒤엔 고인의 명복까진 빌지 않더라도 조용히 보내주는 것이 한국적인 미덕이자 인지상정이라 들었다. 그런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를 갖추길 이 땅의 극우보수에게 바라기란 애당초 무리일까. 그저 "너 죽고 나 살자"는 강퍅함만이 남은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향한 극우보수들의 공격은 이 두 인물이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평화롭게 풀어나가려 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북한과의 대화=빨갱이 동조'라는 비뚤어진 인식이 깔려 있다. 극우보수파들의 왜곡되고 꽉 막힌 답답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의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모두 좌파일 뿐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색깔 공세다.

앞의 B씨가 한 보기다. 그는 올해 7월 박근혜 의원이 미디어법 강행처리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자, 그녀에게까지 색깔 공세를 폈다. "박 의원이 2002년 초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온 뒤로 북한정권의 만행에 대한 본질적 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박 의원이) 김정일을 만난 뒤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걱정을 하는 애국투사들이 지금도 많다"고 했다.
▲김대중 전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국장에서 어린이들이 그림으로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아냈다. ⓒ김재명

미국에선 매카시 광풍이 사라졌으나…

이쯤 되면 지난 1950년대 초 미국 정치판을 얼음장처럼 만들었던 '마녀 사냥꾼'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망령이 태평양을 넘어 60년 뒤 한반도에 출현한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매카시는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수백명의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몰아붙이면서 한껏 기세를 올렸었다. 그러나 곧 정치판에서 왕따를 당했고, 술로 아픈 속을 달래다가 끝내는 알코올 중독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로 미국에선 매카시즘의 극우광풍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한국에선 지금까지도 색깔공세가 힘을 쓴다.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도 대통령에 오르기 전부터 색깔공세로 마음 고생들을 많이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남북화해정책은 극우보수세력으로부터 "북한에 수천억원을 퍼주었다"느니, "북한의 핵무기개발 자금을 대주었다"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정치적 공세에 시달렸다.

진실을 알고 보면 '퍼주었다'는 그 금액은 비료와 식량을 비롯한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 민간기업이 북한과 정상적인 상거래, 남북경협의 안정적 추진을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기반시설 건설비용이다. '퍼주었다'는 말보다는 '투자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민족화해와 평화통일로 가려는 투자다.

지금 고인이 된 김대중-노무현 두 분의 생각도 그러했기에, '두 빨갱이 수장' 운운하는 극우보수의 비난을 의연하게 흘려 넘겼을 것이다. 물론 투자는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 어려울 때 조금 나누는 것을 퍼주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행태다.

"저놈, 빨갱이야!"라는 한마디

돌이켜 보면, "저놈, 빨갱이야!"라는 한마디는 좌우와 남북이 갈린 분단시대를 60년 넘게 살아온 우리 한국인에게 큰 힘을 발휘해왔다. 1945년 8.15 광복 뒤 좌우가 갈려 싸우던 해방정국(1945-48년)에서 민족분단을 막고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사람들을 가장 미워한 것은 남한의 극우보수세력이었다.

많은 경우 친일이라는 감추고 싶은 더러운 과거를 지녔던 그들은 '부자들(지주와 자산가)의 정당' 소릴 들었던 한민당을 신변보호막 삼아 뭉쳤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추진'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이승만과 손을 잡고는 좌파와 중도파(통합파)를 싸잡아 "저놈, 빨갱이야!"라고 공격했다.

역사는 늘 약삭빠른 현실주의자들에게 선점당하는 탓에 진통을 겪는 것일까. 1948년 5.10 총선거를 거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한 보기다. 이미 동서냉전의 첨예한 실험장으로 떠오른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에게 단정 수립은 하나의 '현실적인' 노선으로까지 여겨졌다.

5.10 선거가 한반도의 항구적인 민족분단 상황을 가져올 것으로 걱정한 백범 김구가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피끓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당시 한독당을 이끌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의 우사 김규식을 비롯, 김성숙 김창숙 원세훈 장건상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등 여러 지사들이 이른바 '남북협상'을 추진하며 평양으로 갔던 것은 그 시대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테면 우사 김규식을 보자. 1948년 4월21일 아침 일찍 서울 서대문 무악재 고개를 넘어선 김규식은 임진강나루와 개성을 거쳐 11시50분쯤 38선에 이르렀다. 자동차에서 내린 그는 따라나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짚고 있는 38선 푯말을 뽑아버려야만 하겠소.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요. 온 겨레가 합심만 한다면 곧 뽑아버릴 수가 있을 것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납북협상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2년 뒤 한반도는 피를 나눈 같은 형제끼리 총을 겨누는 엄청난 전쟁을 겪어야 했다.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얼굴을 맞대는 데 5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것도 전쟁으로 깊이 패인 갈등과 미움 탓이었다.

투옥 당하고 가난에 시달리고

그 50년 동안 남쪽의 민족통일운동가들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들과 부딪쳐야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게 '빨갱이'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 했고,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요행히 살아남았다 해도 대부분 가난에 시달렸다(이에 대해선 김재명,『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년 선인, 참조 바람).

일제시대에 의열단 고문으로 활동하다 잡혀 모진 옥고를 치른 탓에 하반신이 마비된 심산 김창숙(1879-1962)이 한 보기다. 심산은 1948년3월 이른바 '7거두 공동성명'(김구ㆍ김규식ㆍ김창숙ㆍ조소앙ㆍ조완구ㆍ조성환ㆍ홍명희)을 통해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지지했기에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받았다. 유족의 증언대로라면, 그는 말년에 '숫벼룩 한 마리 꿇어앉을 땅도 없이' 궁핍한 삶을 살았다.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김성숙(1898-1969)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평양의 남북협상을 다녀온 뒤로 줄곧 혁신정당운동에 몸 담았던 그는 이승만과 박정희정권의 탄압으로 감옥에 갇혔고 풀려난 뒤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살다 갔다.

김성숙과 같은 통일노선을 걸어온 소해 장건상(전 중경임시정부 국무위원, 제2대 국회의원, 1883-1974)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서울 정릉의 오두막집에서 눈을 감았을 때, 유가족들은 시신을 모실 관을 살 돈조차 마련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뒤 시민들이 남긴 추모리본. 고문과 탄압이 없는 곳에서 영면하시길 바란다는 글귀가 보인다. ⓒ김재명

김대중과 노무현이 남긴 귀한 자산

이렇듯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정치신념으로 삼아온 이 땅의 양심적 지사들은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정치인 김대중-노무현도 지난날 마찬가지로 극우보수세력으로부터 '빨갱이 공세'에 시달렸다.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안에 따라 비판받을 대목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양심세력의 계보를 잇는 지도자들이란 점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두 사람은 한국 평화통일운동의 큰 줄기를 이으면서, 한국전쟁 뒤 남북 사이를 흐르던 미움과 불신의 강물을 막고 평화와 화해의 댐을 세웠다. 6.15선언과 10.4선언이 그런 평가의 바탕이다. 김대중-노무현이 21세기에 일구어낸 민족화합 통일정신은 우리 모두가 앞으로 더욱 키워내야 할 한반도의 귀한 자산이다. 그들의 전해준 자산을 어찌 잘 살려야 하는가는 뒤에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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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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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화 / 진행  :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의 삶 속에는 굴곡 많았던 우리 정치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은 내란음모 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벌어진 구명운동 덕분에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에 1982년 미국 망명길에 오르는데요. 이 시간에는 이 아픈 시절을 故 김대중 前 대통령과 함께 했고 또 국민의 정부에서 초대 교육부총리로 함께 일했던 한완상 前 부총리 연결해서 정치인으로서 또 지도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의 모습, 추억해 보겠습니다. 한완상 선생님 나와 계시죠?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예.


☎ 김미화 / 진행  :

참 마음이 아프셨을 것 같아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그렇습니다. 아주 어렵게 돌아가셔서 당신께서 꿈꾸던 남북 간의 평화와 우리 한국의 민주화, 이것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이런 시점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픕니다.


☎ 김미화 / 진행  :

네, 1980년대 초에 내란음모 사건을 한완상 전 부총리께서 이제 함께 겪으셨고 故 김대중 前 대통령께서 사형선고 받으실 때도 함께 계셨고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그렇죠.


☎ 김미화 / 진행  :

당시 상황을 회상해주시겠어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그렇습니다. 제가 그때 그 사건에 휘말려서 같이 군사재판을 받으면서 가장 마음속에 감동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요. 사형구형 받고 나서 최후 진술을 하셨어요. 최후 진술하셨을 때 그 최후 진술은 정치인의 진술이 아니고 역사와 미래를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한 경륜가라고 할까, 한 사상가라고 할까, 한 종교인이라고 할까, 이런 높은 차원의 간디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최후 진술을 했는데 마지막 제가 기억나는 건 그런 말이에요. 내 죽음으로써 다시 정치 보복은 이 땅에서 끝장나길 바란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때 나는 문뜩 아, 저런 장엄한 말씀은 정치인의 입에선 절대 나올 수가 없다. 책략가 입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저것은 간디 같은 그런 높은 수준의 경지에 올라가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딱 최후 진술하고 나서 전부 다 눈물 흘리면서 애국가를 부른 기억이 납니다.


☎ 김미화 / 진행  :

그러셨군요. 미국 망명 시절에도 故 김대중 前 대통령과 가까이 계셨던 걸로 아는데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으실까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제일 기억이 남는 것은 82년 10월 23일 날 워싱턴에 도착하시고 곧 첫 번째  일요일 날 워싱턴에 있는 큰 가톨릭 성당에 미사 드리러 갔어요. 제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사를 드리는 중에 일본 기자들 카메라맨들이 와서 사진을 찍으니까 그때 선생님이 벅차오르는 그 감동, 슬픔, 여러 가지 섞여서 아주 정말 목 놓아 우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러니까 그 울음 속에는 자유롭게 됐다고 하는 단순하게 해방의 울음보다도 아직도 나는 워싱턴에 왔지만 이 조국에는 민주주의가 아직도 꽃피지 못하고 고생하는 많은 동지들과 우리 백성들을 생각해서 우신 것 같아요.


☎ 김미화 / 진행  :

그러면 그 시절에 故 김대중 前 대통령께서는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이겨내셨을까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그것은 이런 거겠죠. 이제 김대중 대통령 몸은 워싱턴에 와 있지만 민주화를 바라는 조국에 있는 많은 백성들의 성원과 기도가 있었을 것이고요. 미래에 반드시 우리나라가 정치 선진국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겨냈던 것 같아요.


☎ 김미화 / 진행  :

故 김대중 前 대통령과는 국민의 정부에서 초대 교육부총리로 함께 일을 하셨는데 가까이서 본 지도자 김대중, 어떤 분이셨나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그때 교육부총리를 했는데 세계에서 최초로 학교, 보통교육, 학교의 모든 정보화 실시를 다 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먼저 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을 예를 들면 남북관계 개선에도 공헌을 했지만 정보화로 정보화를 잘 이뤄 내가지고선 세계 선진 참여 정치국가로 만드는데도 참 큰 공헌을 했습니다.


☎ 김미화 / 진행  :

인간 김대중 前 대통령을 기억하신다면 어떤 분으로 기억하세요? 인간적인 면.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인간적인 면을 보면 굉장히 센티멘털 하고요.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 겉으로 보면 아주 근엄하고 그런데요. 보면 굉장히 따뜻한 정이 많이 흘러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워싱턴 큰 성당에서 아주 복받쳐 우시던 모습,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그때 경복궁 가셨을 때도 그 우시던 모습이 내가 바로 워싱턴에서 본 우시던 모습이거든요. 그만큼 대통령까지 되신 분인데 어떤 분은 그걸 못 참느냐 그러는데 그거 아니에요. 그분 굉장히 인간적인 분이에요. 그런 인간적인 뜨거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늘 이렇게 넘쳐흐르는 것이죠. 그래서 잘 숨기는 게 정치를 잘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굉장히 비인간적인 존재죠.


☎ 김미화 / 진행  :

김대중 대통령께서 만나는 사람들 이름하고 얼굴을 절대 안 잊어버리신다고 그만큼 인간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이런 거겠죠?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그런 게 있는데 제가 겪은 건 뭐냐 하면, 대개 대통령 된 사람이나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어른은 감옥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틈이 있으면 책을 읽으시는데 한번은 1970년 중턱에 감옥에 갔다 오셔서 저하고 이야기를 할 때 내가 감옥에서 한 박사의 무슨 무슨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을 정치인이니까 그저 기분 좋게 하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 후에 몇 달 후에 동교동에 가서 서재에 들어가서 내 책을 빼 보니까요. 책에 여백 있지 않습니까? 책 여백에다가 깨알처럼 막 쓰셨더라고. 내 글에 대해서 비판도 하시고 그거 보고 이 분은 정말 학자 이상으로 책을 사랑하고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좋은... 그런 분이구나 하는 걸 내가 느꼈어요. 정치인들 그렇게 안 하거든요. 껍데기만 책 제목이나 보고 슬쩍슬쩍 넘어가는데 그 어른은 참 그런 점이 뛰어난 분이에요. 사람 기억하는 건 말할 것도 없겠죠.

☎ 김미화 / 진행  :

그러시겠죠. 故 김대중 前 대통령과의 수십 년 인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지금 한번 추억하신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제일 추억에 남는다면 역시 아까 말씀드린 사형구형 받고 최후 진술이 제일 남고요. 제가 개인적으로 참 가슴이 아픈 것은 미국 망명 시절 저희 집에 와서 한국 음식 먹고 싶다고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육개장을 잘 끓여놨는데 저하고 국내 문제 가지고 이렇게 좀 설왕설래 하다가 내가 좀 김대중 대통령을 섭섭하게 해서 비판했거든요. 그래서 육개장 다 못 잡수시고 워싱턴 가신 것 그게 마음에 늘 부담으로 남아 있어요. 그런 건 마음이 아픕니다.


☎ 김미화 / 진행  :

예, 이미 늦긴 했지만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을 다시 만나신다면 어떤 얘기를 좀 해드리고 싶으세요?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선생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위로 드리고 싶고요. 특히 우리 김대중 선생님께서는 남북관계 평화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보화를 앞당겨서 정치 후진국에서 막 두 단계 뛰어서 정치 선진국으로 발전시킨 것에 대해서 정말 치하 드린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 김미화 / 진행  :

예,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한완상 / 前 교육부총리  :

네, 감사합니다.


☎ 김미화 / 진행  :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완상 前 부총리였습니다. 
출처 ; MBC FM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인터뷰전문보기 http://www.imbc.com/broad/radio/fm/worldnus/interview/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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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만화책

[스포츠서울닷컴ㅣ장 민기자]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뜻밖에도 만화책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박시백 화백이 그린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침대 머리 맡에 두고 틈틈히 읽었다. 이 책은 대하역사만화로 김 전 대통령은 총 14권 중 4권 ‘세종-문종실록’부분을 62페이지까지 읽고 일기에 "재미 있고 참고가 된다"는 소감을 적었다.

사단법인 김대중 평화센터는 8월 28일 이같은 내용이 담긴 '故 김대중 前대통령 생애 마지막 순간들'을 주제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 자료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하고 서거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비서실 일정기록, 경호실 근무일지, 담당 비서들과 행사 참석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주제별로 정리했다.

김대중 평화센터는 "김 전대통령께서 <마지막 일기>에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인생과 발전하는 역사'를 위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오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며 자료공개의 의미를 부여했다. 다음은 공개 내용 전문이다.

1. 비서관들의 마지막 업무보고
- 비서관들은 매주 월요일 오후 주요 업무보고를 한다. 마지막 업무보고는 입원하시던 당일 7월 13일 오후 월요일 병원으로 출발하기 전 2층 침실에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는 박지원 비서실장, 김선흥 국제의전비서관, 윤철구 총무비서관, 최경환 공보비서관이 참석했다.
- 이 때 김 전대통령께서는 다음날(14일)로 예정된 주한 유럽연합상공회의소 초청 연설에는 “참석할 수 없다. 빨리 연락하라”고 말씀하시고 “국영문 연설문을 보내 주최측이 참고하도록 하라”고 비서관들에게 지시했다.
- 또 5월 중국 방문시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 탕자쉬엔 전 국무위원에게 보내는 서신에 “金 大 中”이라고 서명했다.

2. 마지막 연설
- 6월 11일(목)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를 주제로 연설하였다. 이것이 생애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이날 행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당초에는 참석이 어려웠으나 5차례나 의사들의 진료를 받고 행사 중간에 참석했다.

※ 미발표 연설문
- 입원하신 다음날인 7월 14일(화) 하얏트호텔에서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초청 연설이 예정되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연설문 제목은 ‘9.19로 돌아가자’였고, 연설문은 완성돼 있었다. 9.19는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된 ‘9.19 공동선언’을 말한다. 이 연설문은 이후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고, 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다.

3. 마지막 국내언론과의 인터뷰
- 6월 27일 토요일 오전 동교동 사저 응접실에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약 1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는 국내언론과 가진 마지막 인터뷰였다.
- 당시 인터뷰에서 김 전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하지 못했던 추도사를 말씀했다. 또 민주주의의 위기, 읽어버린 10년, 정치인의 자세, 행동하는 양심 등에 대해 말했는데 이 인터뷰 내용은 <오마이뉴스>가 펴낸《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의 서문으로 실렸다.

4. 마지막 해외언론과의 인터뷰
- 병원에 입원하기 3일 전인 7월 10일(금) 동교동 자택 응접실에서 영국의 국영방송 의 존 서드월쓰(John Sudworth) 서울 특파원과 인터뷰를 가졌으며 북핵문제, 햇볕정책,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상 등을 주제로 대담을 나누었다. 1시간 동안 녹화 대담을 마친 김 전대통령은 “힘든 회견이었다”고 말했다.
- 이 인터뷰 내용은 7월 17일 BBC World의 Asia Today에서 방송되었다. 인터뷰 내용 전문은 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다.
- 이 인터뷰가 생전에 김 전대통령께서 하신 마지막 공식일정이다.
※ 김 전대통령께서는 퇴임 후 6년 6개월 동안 총 100여차례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5. 마지막 해외여행
- 5월 4일부터 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 시진핑 국가부주석, 탕자쉬엔 전 국무위원 등 중국 고위인사들을 만나 한중문제, 한반도 동북아문제, 6자회담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또 베이징대학에서 ‘북핵해결과 동북아의 미래, 중국에 기대한다’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사회과학원을 방문해 한반도 및 동북아문제 전문가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 대통령님께서는 5월 5일자 일기에서 당시 시진핑 국가부주석과의 회담에 대해 “북핵문제(절대 불용), 6자회담 계속, 남북관계 잘 되기를, 미국도 좀더 협력해야 등 많은 문제 의견 일치, 만족스러운 회담이었음”(미공개 부분임)이라고 적었다.
- 탕자쉬엔 전 국무위원은 이번 대통령님 영결식에 중국 정부의 조문 사절단 대표로 방한했다.

6. 마지막 국내여행
- 4월 24일(금) 고향 하의도를 14년만에 방문했다. 하의도에서 선영을 둘러보고,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하고 모교인 하의초등학교와 덕봉서당, ‘큰바위 얼굴’ 등을 둘러보았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KTX 열차를 타고 왕복했다. 이 고향방문이 생애 마지막 국내여행이었다.
- 이날 일기장에는 “14년만의 고향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이다.

7. 마지막 보낸 서신
- 지난 5월 중국 방문 후 시진핑 국가부주석과 탕자쉬엔 전 국무위원에게 당시 환대에 대한 감사와 북핵문제에서 중국의 역할 등을 담은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병원 입원 당일날(7월 13일) 대통령의 친필서명을 받아 주한 중국대사관을 통해 각각 전달했다.

8. 마지막 외부 만찬
- 5월 18일 저녁 김 전대통령은 방한한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하얏트호텔 양식당에서 만찬을 했다. 김 전대통령은 클린턴 전대통령에게 북핵문제의 본질과 해결방안 등을 정리한 글을 별도로 전하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도 전달할 것을 요청했다.
- 당시 만찬에 대해 대통령께서는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이 남기셨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 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게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 지난 8월 23일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 전대통령 서거 후 이희호 여사에게 위로의 전화를 해서 “당시에 김 전대통령께서는 저에게 미국의 정책을 좀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9. 마지막 외부 오찬
- 6월 27일 토요일 신촌의 거구장에서 양성철·조찬형 전 의원 부부와 오찬을 하셨다. 대통령께서는 참석한 분들의 자제들의 근황을 묻는 등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10. 마지막으로 수여한 위촉장
- 김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시면서 혹은 아태재단이나 김대중평화센터 직원들에게 꼭 형식과 예를 갖추어 임명장 혹은 위촉장을 수여하였다. 이를 통해 각자의 책임과 역할에 사명감을 갖고 일하도록 하셨는데 마지막 위촉장 수여식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다.
- 7월 9일 연세대 동문회관 이라는 중식당에서 제3차 김대중평화센터 이사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께서 김 전대통령을 대신해서 김선흥 사무총장, 김택근 자서전 편집위원, 장옥추 자서전 편집위원보, 변주경 통역보좌역에게 각각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김대중’ 이름으로 위촉장을 수여했다.

11. 내외분이 함께한 마지막 드라이브
- 평소 꽃 구경과 드라이브를 즐기시는 대통령님은 여사님과 함께 7월 5일 일요일 오후 약 50여분간 서강대교에서 행주대교까지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이것이 김 전대통령 내외분이 즐기던 마지막 드라이브였다. 김 전대통령은 이렇게 한강변 드라이브를 즐기셨는데 “언제봐도 한강은 좋다”고 자주 말씀하곤 했다.
- 이에 앞서 5월 10일 결혼기념일에는 지인 몇 분들과 63빌딩에서 결혼 47주년 축하 오찬을 한 후 한강변 드라이브를 했다.
- 또 4월 2일 오전에 연세대 뒷길의 진달래꽃과 여의도 윤증로를 드라이브하며 벚꽃 등을 보셨는데 이날 일기장에는 “여의도에 벚꽃이 만발했다. 아내와 같이 드라이브하며 구경했다.”(미공개 부분임)라고 기록되어 있다.

12. 마지막으로 쓴 휘호
- 김 전대통령께서는 생전에 지인들과 여러 곳의 요청으로 많은 휘호를 쓰셨다. 주로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인여천(事人如天)’, ‘실사구시(實事求是)’, ‘行動하는 良心’ 등의 글귀를 한자로 썼는데 미국 망명 중에는 휘호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휘호를 써 넣은 도자기를 만들어 국내외 인사들에게 선물로 사용했다.
- 마지막으로 쓰신 휘호는 4월 24일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에 보낸 휘호다.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을 한자로 써서 보냈다. 이 휘호는 지금 하의도 기념관 건물 전면에 새겨져 있다. 이것이 생애 마지막 쓴 휘호다.
- 이에 앞서 올해 3월 비서관으로 근무하다 주이라크 대사로 부임하는 하태윤 국제의전비서관(김대중평화센터 사무총장 겸임)에게 “만방일가(萬邦一家)”, 또 최경환 공보비서관에게는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휘호를 써 주며 비서관들을 격려했다.

13. 마지막으로 읽으신 책
- 독서가이신 대통령님께서는 건강이 여의치 않고 눈도 침침해 지셨지만 서재나 침실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다음의 3가지 책을 주로 읽었다.
① 제국의 미래(에이미수나, 비아북)
② 오바마 2.0(김홍국, 나무와 숲)
③ 조선왕조실록(박시백, 휴머니스트)
-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대하역사만화로 총 14권 중 4권 ‘세종-문종실록’부분을 62페이지까지 읽었다. 4월 4일자 일기에는 “박시백 화백이 만화로 그린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고 참고가 된다.“(미공개 부분임)고 적었다.

14. 마지막 저서 친필 서명
- 김대중 전대통령은 <옥중서신>,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21세기와 한민족> 등 자신의 저서에 직접 서명을 해 지인들에게 선물해 주시기를 좋아했다.
- 6월 29일 동교동 사저 경비를 지원하고 있는 마포경찰서 이상정 총경에게 <옥중서신>에 서명해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이 생애 마지막으로 저서에 서명해 준 책이다.

15. 마지막 도서관 집무실 출근
- 김 전대통령의 집무실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건물 5층에 마련돼 있다. 김 전대통령은 4월 16일 영국에서 온 <국제사면위원회(AI, Amnesty International)>와 인터뷰를 위해 집무실에 출근했다. 이것이 김 전대통령이 집무실에 출근해 업무를 본 마지막 일정이다.
- 이날 인터뷰는 영상 녹화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됐다. <국제사면위원회>는 김 전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삶, 특히 사형제 폐지를 위한 노력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전세계 사형제 폐지 캠페인을 위해 이 인터뷰를 사용할 예정이다.

※ 병원 입원과 서거로 실행하지 못한 일정

① 비서실 격려오찬 : 중복을 맞아 비서실·김대중도서관 직원과 경호실·경찰 간부 등 전 직원과 함께 7월 23일 거구장에서 격려오찬이 예정되었다. 김 전대통령님께서는 해마다 복날이 오면 직원 격려오찬을 해 왔다.

② 36주년 생환기념행사 : 8월 13일 동경납치사건에서 생환한 날을 기념하여 매년 열리던 생환기념 미사와 행사는 취소되었다. 당일 행사는 중환자실에서 서교성당의 신부님과 이희호 여사님과 가족들이 함께 기도와 찬송을 하고 케익의 촛불을 끄는 것으로 대신해야만 했다.

③ 미국방문 : 9월 18일로 예정된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NPC) 연설과 9월 23일 뉴욕에서 열리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 행사도 끝내 참석하지 못했다. 5월 18일 하얏트 호텔에서 클린턴 전대통령과 만찬 때 김 전대통령께서는 “꼭 참석하겠다. 9월 뉴욕에서 만나자”고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약속하셨다.

④ 여름휴가 :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강원도 양양 솔비치 호텔로 3박 4일 일정으로 여름휴가가 예정되었으나 가지 못했다.

⑤ 언론회견 : , 월간지 <민족21>,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 시사 주간지 <시사IN>, 영국의 지, 독일의 <슈테른>지 등과의 회견도 약속을 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연기되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진제공=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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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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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응징"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오마이뉴스 | 입력 2003.12.03 11:08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권중희 선생의 꿈★은 이뤄진다
2일 현재 후원금 815만6천원

▲효창동 백범 묘소 참배 후 권중희 선생.
박도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과연 이뤄질 것인가. 한평생을 ‘백범 김구’ 암살 배후 추적에 바친 권중희 선생에 대한 독자들의 지지와 성원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백범 김구 암살 진상규명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고 싶다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권중희 선생의 꿈은 차츰차츰 ‘현실화’되고 있다. 11월28일, 권 선생의 사연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된 뒤 수십명의 독자들이 1인당 적게는 1만원부터 많게는 100만원까지 후원금을 보내와 12월2일 오후6시 현재 815만6천원을 기록했다. 또 독자의견 란에는 70여개의 후원 및 지지 의견이 올라왔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민족반역자에게는 시효가 없다. 반드시 반드시 매듭을 져야한다.”-세방울(lovebackho) "권중희, 박기서 이런 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혁명가다. 왜냐면 이 분들은 정의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며, 악은 언젠가 반드시 응징 당한다는, 소박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원칙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수호하려는 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이 분들은 그러한 세상의 부조리와 운명에 맞서 인간의 선함과 의지를 반드시 관철하고 증명하려는 분이다. 그래서 이 분들은 위대하다." -아침(eumatae) 미국 현지교포들은 ‘쪽지보내기’를 통해 구체적인 도움방안들을 제안해왔다.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제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북버지니아에 살고 있으니 도움을 주겠다”고 알려왔으며, 뉴저지에 사는 김아무개씨는 이동시 숙소와 식사를 해결해 주겠다며 개인연락처를 보내왔다. 또 임아무개씨는 자신의 항공사 마일리지로 권 선생의 비행기표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신아무개씨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돈은 없지만 통역가이드 등 몸으로 봉사하겠다”고 요청했다. 워싱턴 버지니아 학생인 권아무개씨는 “지역 학생들과 연결하면 통역과 체류비 등이 절약된다”며 도움을 약속했다. 촛불 하나가 광화문과 시청 앞을 밝혔듯이, 이 촛불의 불씨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권중희 선생의 소원, 이것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함께 풀어야할 과제다. / 박도
네 발의 총성으로 허물어진 민족정기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30분 무렵, 서대문 네거리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에서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탄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지도자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운명했다. 그 총소리와 함께 민족정기도 허물어져 버렸다. 범인은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 그는 달려드는 비서들과 경비순경들에게 여유 있는 태도로 “선생은 내가 죽였다”며 권총을 든 채 손을 들었다. 잠시 후 안두희는 헌병대로 연행됐다. 암살범 안두희는 줄곧 단독 우발 범행을 주장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했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 안두희를 폭행한 죄로 수감생활을 했던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권중희 씨
ⓒ2003 박도
권중희. 1936년 경북 안동 태생으로 안동 경덕중학교 재학시절 <백범일지>를 수차례 읽고 김구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어른들로부터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는데, 정작 그 범인은 활개치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 의분이 하늘에 치솟았다. 서울로 와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중 안두희가 몰래 미국으로 이민가려 한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그때부터 생업도 팽개치고 백범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히고 그를 응징하고자 추적 길에 나섰다. 권중희 선생은 마침내 1987년 3월 27일 서울 마포구청 앞 대로에서 몽둥이로 안두희를 응징하다가 폭행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35일만에 출소)을 받았고, 1991년 그리고 1992년 9월 23일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으로 데려가 범행 일부를 자백받았다. 권중희 선생은 이 일로 다시 폭력행위 위반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6개월 처벌을 받고 70일만에 풀려났다. 백범 김구 암살 진상규명,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범 선생이 돌아가신 지 54년이 지났다. 안두희가 박기서씨에게 몽둥이로 맞아죽은 지도 7년이 지났다. 안두희 입에서 쏟아져 나온 암살 지령 지휘 계통에 있었던 사람도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 암살배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권중희 선생은 아직도 암살배후 진상 규명에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권 선생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어디엔가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비밀문서에서 김구, 안두희라는 이름이 나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동행해 미국에 가서 그 비밀문서를 속시원하게 파헤쳐 보는 것이다. “돈이 마련되면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동행해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관계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 보고 싶다. 그러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얘기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이다. 그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필자는 지난 10월 27일부터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12년간 추적 응징한 권중희 선생을 취재한 후 <오마이뉴스>에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기사를 8회에 걸쳐 썼다.
"권중희 선생님을 미국으로 보냅시다"
독자의견에 쏟아진 지지와 후원

권중희 그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자 우리의 역사가 치욕스러운 것은 우리가 30여 년간 일제의 압박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해방 후 지금까지도 그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치욕의 역사 속에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범법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조국 나는 그런 조국을 원하지 않는다. 권중희 선생을 위해 그가 우리의 치욕스런 역사를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치욕스런 역사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다>- 조성준(독자의견에 올려주신 글입니다.) 생업도 팽개친 채 12년간이나 이어온 권중희 선생의 끈질긴 추적에 담긴 의로움 때문이었는지 많은 독자들이 권 선생에게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독야청청"이라는 아이디의 독자는 “권중희 선생 마지막 소원인 미국 보내드리는 여비 모금 운동을 전개하라"고 했고, "아줌마"라는 아이디의 독자는 ”희망돼지 성금을 만들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권중희 선생을 위한 모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권중희 선생에게 이런 생각을 밝히고 계좌번호를 물었더니 권 선생은 극구 사양했다. 혹시나 돈 문제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여태 당신 이름으로 된 통장 한 개 조차 없는 상태였다. 나는 권 선생에게 수차례 권고한 뒤에야 권 선생이 통장을 개설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50여 년이 지나도록 속 시원히 밝혀지지 못한 독립지도자 김구 선생 암살 배후. 권중희 선생의 암살배후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사람은 아래의 계좌번호로 후원하면 된다. 조흥은행 579 - 04 - 410340 (예금주 : 권중희) (기부자는 박도의 <의를 좇는 사람> 게시판을 통해 공개할 예정입니다. 익명기부를 요청하실 분은 "쪽지보내기"를 통해 알려주시면 됩니다.) /
솔직히 나는 권중희 선생의 함자는 알고 있었지만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만나뵌 적이 없었다. 외국에 있는 한 독자 분께서 권중희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다면서 취재를 부탁했고, 마침 중국 항일유적지 답사때 만나 형님처럼 모시는 이항증 선생과 권 선생이 동향이어서 어렵지 않게 만남이 이뤄졌다. 올해 춘추가 68세라는 권 선생은 네댓 시간의 대담 내내 꼿꼿한 자세로 논리 정연하게 말씀하셨는데 특히 비상한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다. 권 선생은 해방 후 현대사를 꿰뚫다시피 했으며 특히 안두희의 전력, 그리고 백범 암살 사건에 관련된 인물의 신상명세는 줄줄 욀 정도였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의를 좇는 분들을 취재하다 보면 한결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분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권 선생도 곤궁해 보였다. 하지만 권 선생은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당당했다. 나라가 할 일을 대신해 안두희를 응징했던 권중희 선생에게 나라는 치하나 훈장은커녕 쇠고랑을 채웠다. 국민마저 그런 분들을 외면한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의인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범 김구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하는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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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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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배 여러분, 뒷일을 잘 부탁합니다"
 DJ가 '마지막 인터뷰'에 남긴 한마디
[오연호리포트] 그가 진 무거운 짐, 우리 모두가 나눠 지자
09.08.20 12:08 ㅣ최종 업데이트 09.08.20 16:44 오연호 (oyh)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낸 한 시민의 말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불과 몇 달 만에 우리는 두 민주개혁 정권의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묻습니다. 포스트 김대중, 포스트 노무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기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혹 남겼을지도 모를 유언을 찾기 위해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 매일 기록했다는, 한자로 쓰인 '김대중 메모'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그곳에 유언이 남겨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언'(遺言)이 무엇인가요? 죽음에 이르러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이미 분명하게 유언을 몇 차례 남기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제가 지난 6월 27일 그분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동교동 자택에서 약 한 시간 동안 단행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대한 추천사를 구술받기 위해 뵀을 때입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몸도 이렇고…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세요.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 DJ 마지막 인터뷰 "후배 여러분, 잘 부탁합니다"
ⓒ 김윤상
김대중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85세. 천수를 다 사셨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조금 더 사셔서 큰일을 더 할 수 있었는데 우리와 이렇게 작별했기 때문입니다. 국내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가 된 그 자리에서 제가 느낀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구나, 한 번 병원에 가게 되면 쉽게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오시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는 불규칙했습니다. 인터뷰 중간에 우리에게 수박을 내주시면서 함께 드실 때에도 손이 떨렸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전까지는 식사도 잘하시고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는데  그 후에 왜 그렇게 갑자기 기력이 떨어졌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인터뷰 자리에서 저는 그것이 일종의 화병이구나 싶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꿈만 같다"고 했습니다.

      

그 화병은 자신의 내부를 다스리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국민이 불쌍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왜 계속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이로 보나 현재 내가 정치권 외에 있다는 것으로 보나, 한마디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바람직하진 않는데, 한마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불쌍해서 안 할 수 없어서 합니다. 국민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국민이 불쌍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렇게 "국민이 불쌍"하게 된 상황에 대해 "분하다, 참으로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주에서 얼마나 죽었고 박종철, 이한열 학생들하고 또 얼마나 죽었습니까. 그런 사람들 죽은 일 생각하면, 그래가지고 50년 만에 겨우 민주주의를 이뤄서 이제 좀 그런 일이 없겠다 하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어요.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고, 꿈 같애. 꿈 같애."

 

그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후배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제 그것은 유언이 되었습니다.

 

"내가 몸도 이렇고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 아니냐. 그런 얘기를 간혹 하는데,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세요. 내가 자랑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 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제가 덧붙여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맙시다. 나는 몸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도 요즘 내 몸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기 바랍니다,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살아남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자랑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 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 안홍기
김대중

이날 '마지막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상당히 허전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다음 대선 때 민주 정권을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려면 국민 사랑받는 정치인들이 하나 둘 커가야 할 텐데. 정치인들이 사랑받는 거목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생각해야 돼요. 행동하는 양심은 손해를 볼 때가 많아요. 그 손해를 보면서 행동할 때 국민들이 알아준단 말이에요. 국민은 바보가 아니에요. 속지 않아요. 가령 내가 사형선고 받은 뒤 '살려줄테니 우리하고 협력하자'고 했을 때, 내가 '나라를 위해 협력하고 국가 안전을 위해' 뭐 이런 식으로 했다면 국민들이 나를 대통령 시킬 사람으로 생각했겠어요? 국민에게 지지받고 싶으면 자기 양심이 하라는 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때 그 말씀은 비단 정치계의 거목으로 성장하고픈 정치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양심이 하라는 대로 해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바르게 살았다면 그것만은 무덤에 갈 때도 자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태도를 갖고 살았다'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에요. 그게 성공이고, 나쁜 일 하면 출세는 하겠지만 죽을 때는 '내가 이 나쁜 짓도 하고 저 나쁜 짓도 했는데' 하면서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 아니에요. 또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도 될 것이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산다는 것은 "일생동안 실천해야 하는 것이어서 참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대중의 눈높이를 생각하는 그답게 일반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행동하는 양심'을 예로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은 꼭 모험을 하면서, 감옥 가면서, 고문당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하면 됩니다. 투표부터 잘하세요."

 

그 무거운 짐, 우리가 나눠 지겠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은 꼭 모험을 하면서, 감옥 가면서, 고문당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투표부터 잘하세요."
ⓒ 안홍기
김대중

그날 저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기의 양심이 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 인생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육신은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졌는데 그가 짊어진 짐은 젊었을 때의 무게 그대로였습니다.

 

그보다 젊으면서도 그보다 더 가벼운 짐을 지고 있었던 저는 그의 죽음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함)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달라."

 

"후배 여러분, 뒷일을 부탁합니다".

 

오마이TV가 녹화한 그 말씀 다시 보는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인터뷰 중간에 내주셨던 수박 참 맛있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당신께서 주신 수박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텐데, 어떡하지요?

 

마지막까지 당신께서 지셨던 그 짐 우리 모두가 나눠 지겠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짐 내려놓고 이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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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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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DJ의 서거가 억울하고 분하다"
손석춘 새사연 원장 칼럼 "성찰없는 MB정권·조중동"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와 관련해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이 19일 "결코 조용히 보낼 수 없는 까닭은 고인의 마지막이 '편안'하지 못하게 한 이명박 정권에 있다"며 "고인이 이 땅에 남긴 숙제는 '화해'가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밝혔다.

손 원장은 이날 새사연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 '조용히 보내드릴 수 없는 까닭'에서 고인을 조용하고 편안히 보내드렸다는 세브란스 병원측의 주장에 대해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떠오른 고인의 마지막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이라며 "여든 다섯 살의 전직 대통령이 국민장으로 치른 영결식장에서 흐느낀 오열은 고인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입증해준다. 고인의 마지막이 '편안'하지 못했던 직접적 원인은 이명박 정권에 있다"고 강조했다.

손석춘 "고인의 마지막이 편안치못했던 건 이명박 정권 때문"

   
  ▲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치열 기자  
 
손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이 대결주의적 대북정책을 노골화할 때부터 분노를 표출했다"며 발언을 소개했다.

"민주주의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에 직면했다."(지난해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 강연)
"우리가 균등하게 평화롭게 정의롭게 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한다. 행동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이다. 독재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고, 이런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노 전 대통령의 서거 뒤인 지난 6월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식' 발언)

손 원장은 "고인의 말에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그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어떻게 반응했던가"라며 "대통령에 당선 전까지 줄곧 '전라도'와 '빨갱이'라는 굴레에서 살아온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의 마지막 가는 길 또한 '험악'했다"고 지적했다.

"DJ 마지막 가는길 또한 험악…억울하고 분해"

손 원장은 "이제 저들이 다시 고인의 영전을 찾아가 사뭇 진지하게 '추모'하더라도 나는 저들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고인의 서거 앞에서 언죽번죽 '화해'를 들먹이는 풍경은 더욱 그렇다"며 "(김 전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억울하고 분하다'고 토로한 고인의 심경을 짚어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 ⓒ새사연  
 
손 원장은 "노정치인의 마음을 억울하고 분하게 만든 이명박 정권과 수구언론이 아무런 성찰도 보이고 있지 않아 더 그렇다"며 "나는 고인의 서거가 억울하고 분하다. 고인이 이 땅의 정치-경제-통일에 남긴 '숙제'는 이제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 됐다. 그 길은 '화해'가 아니다.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했다.

말년에 이제 힘이 없고 정신도 혼미한 김대중대통령이 더욱 싸우고 싶었지만 이미 힘에 부쳐
그가 죽기전에 그를 대신해서 우리가 해야할 과제를 남기고 그분은 가셨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김대중대통령의 일생을 함축하는 말이며,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격 명언일듯 싶다.

독재정치, 군사정치, 보수정치, 기득세력, 친일정치 의 묵은 때를 그 혼자서 평생 일생을 바쳐서
변화시키고 바로 잡아 드디어 바꾸었는가 했더니 ?
김대중대통령 말년에 다시 그것들이 고개를 빼꼼하고 들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 절망적이시다 하시거늘
이제는 그가 지쳐서 이룰수 없거늘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라 여겨진다.
김대통령의 말년에는 '화해'를 실천해왔지만, 죽기 얼마전에 강연에서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것은
젊고 아직 활동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실천하고 움직이라는 마지막 부탁이 되는 것입니다.

故 노무현대통령도 같은 말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 실천하는 양심인이 되어야 한다고................"

두 분을 희생하면서 우리가 배우고 실천할 것은 [양심으로써 실천하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끝으로 김대중대통령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여러분들에게 고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몸도 이렇고…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맡아서 뒷일을 잘해주세요. 후배 여러분들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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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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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김대중 전 대통령 6.15 기념행사 발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6·15로 돌아가자!'(Let's Return to 6.15)의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유성호
김대중

존경하는 선배 동료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이 나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6.15와 10.4 선언, 이것을 생각할 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과 저만이 북한을 가서 정상회담을 한 그 사건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제가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노 대통령은 부산상고, 나는 목포상고를 나왔습니다(웃음). 노무현 대통령은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가고 나도 돈이 없어 대학 못 갔습니다(웃음). 노 대통령은 대학 못간 뒤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고, 나는 열심히 사업해서 돈 좀 벌었습니다(웃음). 그 후로 나는 이승만 정권, 노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독재에 분개해 본업을 버리고 정치 들어간 것입니다.

 

정치 들어가서 다시 또 반독재투쟁 같이 했는데, 이렇게 해서 노 대통령과 저는 참으로 연분 많습니다. 당도 같았고, 그리고 국회의원도 같이 했고, 그리고 북한도 교대로 다녀왔고, 가만히 보니까 전생에 노 대통령과 나하고 무슨 형제간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형님은 내가 되고요(웃음). 해서 제가 노 대통령 서거를 듣고 내 몸이 반쪽으로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간 과거만 봐도 여간한 인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대통령 할 때 노 대통령을 해수부장관을 시켰어요. 지금... (메모를 뒤적임). 오늘 6.15 선언 9주년을 맞이해서 먼저 이명박 대통령과 또 북한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 싶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국민이 얼마나 불안하게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금강산관광 철수 소리가 나왔습니다. 북한은 매일같이 남한이 하는 일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 무력 대항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이렇게 60년이나 이러고 있는 나라가 어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강력히 충고하고 싶습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합의해 놓은 6.15와 10.4를 이 대통령은 반드시 지키십시오. 그래야 문제가 풀립니다.

 

그리고 금강산관광 우리가 일방적으로 철수한 것을 다시 복구시켜야 합니다. 개성공단에 우리가 노동자를 위한 숙소를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따라서 나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6.15와 10.4의 약속을 지키고, 금강산에서 일방적 철수한 것(을 철회하는 것)과 개성공단 숙소 설치를 약속한 것 등 의무사항은 우리가 이행하겠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박수).

 

다음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에게 말씀드립니다. 나는 북한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94년 제네바협정을 해 가지고 북한은 핵을 포기했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경수로 지어주고 경제원조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클린턴이 해 놓은 것을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불신 생겨났고, 또 아까 말씀 나왔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에 선거운동 도중에 자기가 당선되면 북한과 이란의 수반들 직접 만나서 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선되고 나서 나의 대북한 정책은 부시 정책이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 하던 정책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의 기대가 아주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중동, 러시아, 심지어 쿠바까지 대화하겠다고 손 내밀면서 북한에 대해 한마디 안 한다는 것은 북한으로서 참으로 참기 어려운 모욕이고 다시 한번 속는 것 아니냐는 생각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북핵)을 극단적인 것까지 끌고 나간 것은 절대로 지지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6자 회담에 하루 빨리 참가해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해 한반도 비핵화를 해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중국 가서 쉬진핑 부주석을 만나 1시간 얘기했는데, 중국 지도자 누구를 만나도 북한 핵을 반대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저는 상당히 반대한다고 했더니 핵실험 하니까 중국이 상당히 엄격한 비난을 냈고, 지금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결의안이) 합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억울한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핵을 만들면 누구에게 쓰느냐, 거기에는 우리 남한 사람도 포함돼 있습니다. 1300년 통일국가,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우리끼리 (동족)상잔하고 전멸시키는 전쟁을 해서 되겠습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계속해서, 아직 오바마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발표 안했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 있습니다. 물론 초조한 심정은 알겠지만, 그러나 오바마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클린턴 정책을 따라가겠다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번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와서 만찬을 했는데, 같은 시대의 햇볕정책, 그것을 클린턴 대통령은 실천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도 북한 핵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고, 그러나 상대방에 대해 상응하는 댓가를 주면서 상대방 기분도 챙겨가면서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건의 했는데, 자기가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여사에게 전달하겠다는 말도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서, 북한이 요구할 것은 안전보장과 경제 재건. 미국과 일본과의 국교 재개, 이런 굉장한 요구에 대해 미국은 이를 존중하고 지켜주면서, 또 이미 북한 핵 문제를 1994년 제네바 협의에서 설정됐고. 2005년 10월 9일 합의에 의해서, 6자 회담 합의에 의해서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열고 한반도는 평화협정을 맺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교섭과 인내심 가지고 연구하면서 해야지, 핵 문제를 갖고 들고 나온다는 것은 안 된다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강력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국 제가 말한 것은 외교는 윈-윈으로 해야 합니다. 당신도 좋고 나도 좋아야 그래야 외교가 성공합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장거리 미사일까지도 포기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랬으면 줄 것은 줘야 합니다. 그래서 외교도 해주고 경제원조도 하고 한반도 평화협정 맺고, 다 돼 있는 얘기를 (미국이 실천) 안 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당선, 내가 당선 된 것처럼 기뻤습니다. 또 힐러리가 클린턴 대통령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제네바 합의에서 비핵화가, 핵 포기가 결정됐고, 그리고 6자 회담 합의에 의해서 북한 핵 문제가 다 합의됐는데, 클린턴 대통령이 무엇이 안 되냐, 북한도 합의했고, 미국도 합의했으면, 부시하고 다른데, 왜 북한에 대해서도 안심하고 북한도 기다릴 수 있는 준비한 기회를 안 주고 이런 데 까지 왔느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가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특별강연을 경청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 유성호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께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민주주의극 역행 시키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에 전국에서 500만이 문상한 것을 보더라도 지금 우리 국민들의 심정이 어떤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국민이 걱정하는, 과거 50년간 피 흘려서 쟁취한 10년간의 민주주의 위태롭지 않느냐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불안합니다. 민주주의는 나라의 기본입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죽었습니까. 광주에서, 또 인혁당 등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대통령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여야 정권교체를 해서 국민의 정부가 나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 모든 민주주의적 정치가 계속됐습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박수).

 

나는 오랜 정치 경험으로, 감각으로, 만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현재와 같은 길로 나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하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리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큰 결단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더불어서 여러분께도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백 수십명 죽이고, 인혁당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 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위해서 우리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 행동할 때 누구든지 사람은 마음 속에 양심이 있습니다. 행동하면 그것이 옳은 일 인줄 알면서도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프겠습니까.

 

나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게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그리고 독재자에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간 화해 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가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그렇게 해서 온 국민들이 바른 생각도 갖고, 표현이나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디서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어디서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핵실험과 미사일 반대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는 어디까지나 6자회담에서, 미국과의 회담에서 반대해야지, 절대로 전쟁의 길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통일을 할 때 100년, 1000년 걸려도 전쟁으로 해서 하는 통일은 안 됩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 서민경제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 지키는 이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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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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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위원회 군나르 베르게는 아직도 한국민에게 묻고 있다. "

" 왜 노벨상을 주라, 주지마라 라고 함부로 로비했는가? "  한국은 그런식의 것들이 통하는 나라이며 민족인가?



노벨 위원장이 반국가적 반이성적 수구보수 패권세력들의 이러한 행태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한국'이라면서 "나는 한국인에게 노벨상을 주지 말라고 한국인들로 부터 로비 시도를 받았다.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고 로비를 하려고 하면 더 엄정하게 심사한다. 한국인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편지 수천통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내가 노벨 위원회에 들어온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나라에서 반대 편지가 대량 전달된 것이 경상도라는 특정지역에서 날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지역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노벨상 중에서도 가장 노벨의 염원을 담고있는 평화상이 로비를 받아낼 수 있는 상이라면 과연 세계 제일의 평화상으로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편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묻고싶다.


 


노벨상은 로비를 통해 수상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상이 얼마나 가치를 유지할수 있을까. 그러기에 더더욱 그 가치가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 왜 다수의 한국인들이 김대중의 위대함과 그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에 감명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며 통탄을 금치 못하였다. 라고 말하였다.



자고로, 좌익, 우익하는 용어는 세계적으로 이제는 쓰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몸통에서 왼팔과 오른팔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서로 다른 역할과 방향으로 따로의 길을 가지 않는다. 항상 같이 다니며 좌측팔과 우측팔은 상호 보완관계이며, 서로 협력관계이다. 한국에서만 좌측, 우측을 서로 갈등과 반대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이상한 나라이다. 몸통이 있어야 좌측과 우측이 성립되는데, 몸통이 없고서는 좌측, 우측은 있을 수가 없다. 결론은 몸통에서 보는 좌측, 우측은 항시 따라다니는 것들이기에 갈등과 반대개념이 아니라 협력과 상호보완하며 동반하는 관계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에서 거대한 기득권을 갖고있는 보수세력들은 좌익, 우익이라는 용어로 국민들을 교묘히 이간질하고 있으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공산주의로 오해하게 만드는 교묘한 작전으로 대대로 흔들리지 않는 집권계층으로 남으려하는 지식층들이 대우를 받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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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통역사가 지켜본 김前대통령

 

"배려 넘치는 따뜻한 분…영어 수준급"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기자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외국 조문객의 통역을 도맡는 여성이 있다. 바로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통역사 변주경(36.여)씨다.

그는 지난 1년여간 해외든 국내든 주요 일정이 있을 때마다 고인과 동행하며 늘 한 발짝 뒤에 서 있었고,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한 뒤에는 이희호 여사 등의 통역을 맡기 위해 병원을 자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기 나흘 전인 지난달 9일 영국 BBC 방송과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통역을 맡았던 이도 변씨였다.

그는 고인의 마지막 언론인터뷰였던 당시 상황에 대해 "(김 전)대통령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들었고 피곤하신 모습도 자주 봤는데 이날은 건강이 좋아 보이셨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무척 기뻐하셨는데 그게 마지막 자리가 될 줄은 몰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신 이후 (김대중평화센터)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마음을 졸였다"며 "서거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땅이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변씨가 가장 큰 감명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의 성품은 `노력하는 자세'였다.
작년 9월 노벨위원회 국제회의 참석 때 김 전 대통령은 통역 없이 원고를 직접 영어로 읽으면서 기조연설을 했는데 그 뒤에는 엄청난 숨은 노력이 있었다고 변씨는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변씨에게 연설문을 읽어 녹음해 달라고 부탁한 뒤 억양과 숨 고를 부분까지 상세히 표시한 원고를 들고 반복해서 연습하는 등 철저히 준비했다.

변씨는 "(김 전) 대통령께서 회의장에서 전달력 있게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께서 적으신 메모 중에 `내 인생에 미흡한 부분도 있지만 힘껏 살았기에 후회는 없다'는 부분이 있는 걸로 안다"며 "인생에서 닥치는 어려움을 숙제라 생각하고 잘 해치우신 것 같다"고 말했다.

변씨는 김 전 대통령을 "배려심 넘치는 따뜻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영어가 수준급이었던 (김 전) 대통령께서 통역을 듣고 있다가 내가 빠뜨린 부분이 있으면 무안하지 않게 배려하며 지적해주시곤 했다"고 고인의 온화한 성품을 떠올렸다.

김 전 대통령은 오찬ㆍ만찬에 배석해 통역하느라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던 변씨에게 늘 "밥을 못 먹어서 어쩌니. 미안하다"며 일이 끝나자마자 식사를 하도록 배려하고 "수고했다. 잘 했다"는 말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건넸다고 한다.

변씨는 "다른 통역사들에 비해 (김 전) 대통령을 모신 기간이 길지는 않은 편이지만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도 내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이 생기게 해 주셔서 존경심이 들었다"며 "내게는 정말 고마운 분인 대통령께서 하늘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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