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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맥쿼리회사의 숨겨진 영업사원인가?

 

 

불쌍한 코리아! 가 탐욕스러운 한 사람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특정회사의 배부른 먹이감으로 전략해버렸다.

 

이제 한국을 코리아라 부르지 마라! "맥쿼리아"로 불러달라!

 

"코리아(KOREA)가 맥쿼리아(MACQUARIA)로 바뀌는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는 곧 영화로 상영되어집니다. "

 

많은 지지 바랍니다.

 

 

 

 영화 '맥코리아'를 응원해주십시요! http://www.ccej.or.kr/index.php?document_srl=332341

 

 

 

 맥쿼리아사업의 실체와 그 병폐 http://www.ccej.or.kr/index.php?document_srl=335710

 

 

 

★★★★★ 관련 동영상 보기 : 시사매거진 2580 민간에 넘겨라

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1/3120541_6414.html

 

 

 

대한민국! 짜짝짝짝짝!

오 필승! 맥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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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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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이 과거에 침략전쟁에 대해서 사죄 한것을 전면 철회하겠다.

 

2) 정부 각료가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로 풀어야 하는데, 정치적인 문제를 문화적인 감정으로 까지 확대해 발언한 사건 "송일국은 다시는 일본에 입국허가를 하지 않겠다." , "송일국이 나오는 드라마를 잠정 연기한다.", "김태희 퇴출 사건" 등

 

3) 일본은 군이나 정부에서 절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지 않았다.

 

4) 한국과의 통화스와프 축소하겠다는 발언이나 경제적 교류를 가지고 협박하는 발언

 

5) 한국의 대통령은 일본천왕에게 무릎끓고 사죄해라!

 

등등

 

 

정치적인 문제를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종교 등과 결부시켜

국가적 전쟁상황과 대등한 수준의 결례와 무례, 망언을 일본 주요 정권 책임자들이 말하는 것은

총만 안들었지, 실질적인 선전포고이다.

과거 대량학살, 자원침탈, 문화재강탈, 인권유린, 가족말살, 문화말살, 성씨개명, 마루타 실험 등의 지구 최악의 패륜행위 등을 포함하는 '과거의 침략'에 대해서 사과, 사죄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전쟁중이라는 뜻이 된다.

진실을 가리고 역사를 우롱하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히 상당히 무례한 선전포고이다.

과거 침략전쟁을 하기전에도 임진왜란 초기때나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즈음에도 이러한 무례한 짓을 많이 했다.

 

일본은 무책임한 선전포고를 남발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 대만, 홍콩, 필리핀, 러시아, 태국, 보르나이 등과 공조하여 강력한 과거 침략전쟁역사문제를 망각하는 일본의 패륜적인 발언에 대해서 지적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왜 놀고 있는가? 오로지 대선 준비하느라 바쁜가?

일본 주요정치인들의 망언에 대해서 한국은 즉각 좌시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내야하지 않냐?? 이런것도 갈켜줘야 하나?

혹시, 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가카께서 임기 말년 큰 이권을 받기 위해서 일본 지도층과 사전에 공모한 시나리오데로 움직여준 것은 아닌지 ................진짜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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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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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의 논란은 금물!

왜 우리는 힘있는 자의 역사논리가 진실이 되어야 하는가?

 

516혁명이 516쿠데타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

 

 

민중(民中)으로 부터 시작된 봉기는 혁명이오,

민중없이 군부(軍部)로 부터 시작된 봉기는 쿠데타이다.

 

정권장악이 성공하고 실패했다는 논리로 혁명, 쿠데타를 구분해서는 안된다. 민심이 키워드이다. 그러면 동학혁명은 성공해서 혁명인가? 동학혁명은 결국은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 사건을 혁명이라 부른다! 민심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민심에서 시작한 항거로 인해 정권을 쟁취했다면 혁명이라 하지만, 민심 모르게 군대를 동원해 반항으로 인해 정권을 쟁취하였다면 쿠데타이다.

 

역사는 그렇게 기록된다.

 

저 멀리 리비아, 이집트의 민중 봉기를 보아라, 그것을 '쿠데타'라 하지 않는다.

우리처럼 몰래, 군대와 탱크를 이동하여 이끌고와서 청와대, 국회, 방송국, 모든 권력기관을 장악하여 '혁명'이라고 하니 세계가 웃는다.

 

더이상 언론에서도 이 문제로 이상한 논객들 불러다 놓고, 국민들을 우롱하는 토론을 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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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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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지 패밀리 대박났네.

양군이 서태지보다 더 잘나갈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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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맥코리아(MacKorea)'를 응원합니다

 

mackorea1.jpg

혹시, 맥쿼리를 아십니까?


맥쿼리는 세계적인 자산운용회사이고 한국에 지사가 있습니다.

인천공항고속도로, 우면산터널, 서울-춘천 고속도로, 지하철 9호선, 마창대교 등 우리나라의 수많은 SOC 사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내 13여개 민자사업에 투자했으며 자산은 약 2조원에 달합니다.

그러나 참여사업자에게 특혜를 주는 잘못된 민간투자사업 방식에 의해 매년 수천억원의 이자를 챙기는 대표적인 회사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운용중인 국내 '인프라 관리·운영 회사' 12개 중 11개가 자본잠식 상태. 투자한 회사가 엉망인데, 투자자는 막대한 수익을 거둬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국내 최초의 대국민 시사회, 시사다큐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영화는 맥쿼리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민간투자사업의 문제점과 국내 민간투자사업을 무자기로 독식하는 맥쿼리인프라투융자의 실체를 파헤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할 것입니다.


"이익을 얻는 자가 범인이다."

그림1.jpg

맥쿼리의 비밀을 세상에 알릴 영화 맥코리아(MacKorea)를 응원합니다.

미국의 마이클 무어가 한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영화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지하철 9호선, 우면산 터널,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마창대교, 백양 터널, 수정산 터널, 인천대교, 서울-춘천 고속도로, 용인-서울 고속도로, 천안-논산 고속도로, 광주 제2순환도로 1구간, 광조 제2순환도로 3-1구간, 부산 신항만 컨테이너부두 2-3단계, 서수원-오산-평택 고속도로


투자의 신 맥쿼리. 이들의 독주를 반대합니다.

맥쿼리와의 불공정 계약 취소와 재협상을 요구하는데 이 영화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영화 맥코리아에 지지 서명을 보내주세요."


 

이름 생년월일을 댓글로 적어주세요. (비밀글 가능_등록후 본인에게만 보여요!)

서명해주신 분들의 명단은 영화상영후 엔딩크레딧에 올라갑니다.^^*



dk.jpg 시의회.jpg로고(누끼).gif투자감.jpg 참여연대.jpg


 

 


※맥쿼리 관련 경실련 감사청구 내용이 보고 싶으면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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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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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뭐 정치적으로 큰 업적이나 공적은 없지만,

안철수가 정치경험이 없지 않나는 질문에 도올의 생각을 들어본다.

 

도올 : 정치 경험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도 한국의 정치현실에 득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치 많이 한 사람이 더 썩었어요. 그래서 전혀 경험 없는 새로운 인물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을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단순히 안철수 개인에 대해 기대감을 갖는 게 아니에요. 맹자가 말하는 '인정(仁政)의 핵심'은 존현사능(尊賢使能)입니다. 현인을 등극시키고 능력 있는 자를 쓸 줄 아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현능(賢能)의 등용, 이것이 동양정치의 핵심이에요. 인재를 편견 없이 쓰고, 대의를 위해 충성하는 그룹을 형성할 수만 있으면 충분히 정치할 수 있어요. 안철수가 그걸 해내리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또 하나 안철수에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시스템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 잘할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에요. 컴퓨터가 결국 시스템 문제잖아요. 그 시스템적인 두뇌는 안철수가 오히려 어설픈 정치인들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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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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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비검찰 출신이 검찰총장하면 검찰개혁을 잘할것이라 여겨져서 김종빈 검찰총장 시켜줬더니,

잘 삐지네.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에게 일체 간섭을 하지 않는 때인데도.

너무 애정을 안줘서 그런듯

지금 MB정권처럼 장관이나 법무부 간사들이 검찰수사부에 전화해서 수사에 관한 지시와 참견을 너무 안해서 애정이 식어서 그런듯.... 관심과 사랑을 안줬다고

쩝..

소심하고 쪼잔한 분

 

[법무부에 사표를 내러 찾아온 김총장과 천장관]

 

약한자에게는 강하고, 강한자에는 약한 배우지 못한 영웅심리로 무모한 행동을 한 거 국민은 다 안다.

만일, 이명박 정권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여기서도 부당한 압력이라고 언론에 공포하고 영웅심리 갖고 사표냈을까?

ㅎㅎㅎ 모르지 더 잘했을듯 ...견찰총장으로

법으로 존중받는 검찰청법 8조에 의해서 진행된 수사지휘권을 가지고 물밑압력이라고

부조리를 타파한 영웅처럼 생각해서는 안타깝기까지 하는데..

관직에 있는 분이, 자기 생각만 주장하려면, 차라리 대통령을 하던가 ㅋㅋ

결국은 어찌되었던간에, 스스로 불명예 퇴진을 하고서

뒤에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흉보는 행위는 어린아이들이나 해야 하지 않나요?

창피한줄 알아야지. 역사는 다 기록되어지는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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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2 대선주자 탐구|박근혜③ 박근혜와 최태민

지난 40년 가량 박근혜(60)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태민(1912~1994)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자주 따라붙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진 뒤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음봉사단’을 대외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최태민과 함께 운영했던 단체다. 사이비종교 ‘교주’였다는 설도 있어 최태민의 전력이 불분명하던 터에, 아버지 박정희도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외 활동을 재개한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동생 근령(58)과 대립했던 1990년 육영재단 분란의 배경에도,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56)의 전횡 논란이 있었다.

1998년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최태민의 사위(최순실의 남편) 정윤회(57)가 비서실장이란 호칭을 달고 등장한다. 2004년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정윤회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7년 경선 때도, 지금도 그가 박근혜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핵심 측근으로 활약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유신말기 새마음봉사단 함께 운영

교계에선 “사이비” 구설수

“부인 6명·이름 7개”

박 “의혹 제기됐지만 실체 없었다”


■ ‘6명의 부인, 7개의 이름’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부터 생긴 호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를 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최태민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최태민은 1951년 군을 떠나며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엔 김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곧장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고,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씨와 다시 결합했다. ‘수사 자료’는 임씨가 5번째, 김씨는 6번째 부인이라고 표기했으나,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6녀를 두었다며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두고, 이후 몇가지 직책을 지냈다. 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엔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등장해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 박근혜와의 만남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가정조선>(1990년 10월호)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 어쨌건 박근혜는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은 외부 활동을 적극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를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최태민에 대한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봉사단 관계자는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도 했다.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소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는 1977년 9월 직접 최태민을 심문했다. 이른바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이다. 대통령 서재에서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는 설도 있다. 박정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넘긴 뒤 검찰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박정희 친국’ 뒤에도 살아남아

전두환 시절도 육영재단 등 활동

박 “어머니 돌아가신뒤 힘들었을 때

바로설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


■ 10·26 뒤 합수부 조사받고도 박근혜 곁에

10·26 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을 언급한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는다. 전두환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간다. 최태민도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는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3년 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동생 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물러나는 박근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 칩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노환으로 세상 떴으나

5번째 딸의 남편 정윤희씨

박 ‘미래연합’ 창당때 비서실장

최태민, 사후에도 여전히 ‘그림자’


■ 대이은 ‘충성’

최태민 사후에도 그의 그림자는 박근혜 곁에 남았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등장했다. 그는 ‘비서실장’으로 불렸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도 자리를 지켰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2004년 6월~2006년 5월에는 국회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했다. 박근혜의 정치 입문 초기에 정윤회와 여러 차례 직접 만났던 한 전직 기자는 “최순실은 박근혜가 장충동에 살던 시절부터 말동무로 지낸온 것으로 들었다”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박근혜 의원실의 보좌진을 구성한 것도 정윤회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박근혜는 2007년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정윤회의 등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실세의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 대표 때 그만뒀다.”

2007년 7월 이명박 캠프에선 ‘박근혜의 국회 보좌진이 최태민과 친인척 관계다’, ‘박근혜 캠프의 홍윤식 전문가네트워크 위원장과 정윤회가 밀접한 관계다’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전자에 대해선 해당 보좌진이 즉각 부인했고, 후자에 대해선 홍윤식이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정윤회를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늘도 정윤회의 이름은 여의도를 떠돈다. 친박 내부에선 친박끼리 “내가 모르는 보고서가 올라간다”며,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반대파는 박근혜나 친박의 결정이 이상하다 싶어서 또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한겨레>는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6월부터 다양한 경로로 정윤회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7년 경선 시기부터 많은 기자들이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성공한 바 없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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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민 수사 자료?

1980년 전두환 지시로 수사…2007년 한나라 경선서 흘러나와

최태민 1990년 유일한 인터뷰 “이름 7개씩이나? 터무니 없다”


최태민(사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태민의 나이가 69살, 71살, 78살로 들쭉날쭉이다. 그때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재규가 항소이유보충서에서 10·26 사태의 한 동기로 최태민·박근혜씨의 관계를 거론하고, 그의 비행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이 ‘정리’를 권유하자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지금까지 그의 신상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 당시 수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며 최태민의 전력과 박근혜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수사자료’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물위로 떠오른다. <신동아>는 2007년 6월 “중앙정보부가 작성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최태민 관련 수사보고서인 ‘최태민 관련 자료’를 최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같은달 27일에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후보였던 이해찬의 누리집 게시판에 ‘안기부’라는 이용자가 신동아 자료와 같은 제목의 피디에프(PDF) 파일을 올려놓았다.

최태민의 유일한 인터뷰인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에서, 그는 수사자료에 대해 “1977년에 작성된 수사기록이다.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6번의 결혼, 7개의 이름’에 대해서도 그는, “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며, 해방 뒤 38선 이남으로 오면서 호적 정리가 되지 않아 이름과 결혼 기록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최태민 쪽은 1977년 9월 본인이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사실상 병실에 감금된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돼, 기록도 강압에 의해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김외현 기자

 

퍼옴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150104 

 

 

 

사라진 특종!! 김종필 전 총리, 최태민의 자식있는 애가 무슨 정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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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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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62년 동안의 슬픔

 

한 시민운동가가 기원 전 50년부터 현재까지 자그마치 2062년 동안의 한일 관계사를 정리한 책을 펴냈다. 김강열 시민생활환경회의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김 이사장은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지냈고, 5.18기념재단이사와 아시아생활환경회의 공동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중견 시민운동가다.

그는 이번에 펴낸 <2062년 동안의 슬픔>과 22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를 통해 "한국 땅이 분명한 독도가 한일 영유권 분쟁에 휘말리게 만든 주범은 바로 미국"이라며 "미국은 일본의 요청을 받고 독도를 무주지(사람이 살지 않는 땅)로 만들기 위해 세 차례나 폭격했다"고 주장했다.

김 이사장의 주장은 미군의 독도 폭격은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던 미군의 오폭"이라는 그동안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그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협상 추이와 미 국무부 전문, 1948년 일본 정부가 미군에 독도 폭격을 요청한 사실 등을 들었다.

김 이사장은 또 최근 이명박 정부가 독도문제로 대일 강경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과 관련 "역사인식을 토대로 대처해야 하는데 즉흥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며 "전쟁책임자인 일본왕의 사과와 일본의 전쟁책임을 대통령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람직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라도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은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며 "대선 주자들은 한일협정 폐기와 재협정 체결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과의 인터뷰 전문.

"일본의 침략은 2062년 동안 지속되는 현재형"

- 400쪽이 넘게 한일관계사를 정리했다. 집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진보운동가와 시민운동가들이 민족문제와 국제문제에 대해선 건드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난 개인적으로 20년 이상을 일본 생협운동, 리사이클 운동 등 일본과 폭넓게 교류해왔다. 동남아시아나 등 여타 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다. 매년 한차례 이상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을 방문하면서 '우리 역사를 똑바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됐다. 아시아의 많은 지역이 일본 침략사와 얽혀있었다.

해마다 일본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이 몇 차례 생기더라.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고, 8.15나 3.1절이 되면 군 위안부나 근로정신대 문제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그 할머니들의 아픈 가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는데 힘들진 않았나.
"책을 쓰기 위해 2년 동안 준비했다. 대학 때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어능력시험 결과도 꽤 좋은 편이어서 자료를 읽고 정리하는 일이 수월했다. 대부분 한문으로 된 자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많이 있는 역사적 자료와 흐름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지 못했던 것을 난 그저 정리했을 뿐이다. 주변 지인들이 '이런 통사 하나 있어야 했는데 고맙다'고 하더라."

 김강열 이사장이 펴낸 <2062년 동안의 슬픔>
ⓒ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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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2062년의 한일 관계사 중 주목한 사건은 무엇인가.
"일본의 침략은 기원전 50년 전부터 시작돼 2062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현재형이다. <삼국사기>가 왜구의 침략을 기록한 이래 끊임없이 침략해왔다. 고려시대를 보면 거의 60년 동안 고려 전역을 침탈했다. 임진왜란은 아무 것도 아닐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약 4천만 석의 쌀을 뜯어갔다. 조선은 일본의 식량창고였던 셈이다. 많이 주면 잠잠하고 안 주면 협박하고 쳐들어가서 납치, 방화, 약탈, 살생을 반복했다.

근대에 들어서서는 강화도 조약부터 67년 동안 침략해 노략질을 했다. 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치밀하고 잔인하게 우리의 문화와 지하자원을 수탈해갔다. 일제 식민시절 동안 그들이 우리에게서 침탈해간 금만 200톤이 넘는다. 그런데 박정희는 딸랑 5억 달러 받고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잘못된 협정이었다. '5억 달러 주겠다, 그때 가져간 것은 다주라, 피해 다 보상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금 200톤만 계산해도 얼마인가."

- 국가 간 맺은 협정이기 때문에 재협정 체결은 무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무슨 소린가, 국가 간 맺은 협정이기 때문에 재협정 체결이 가능한 것이다. 일본이 한일협정 체결 조건으로 준 5억 달러가 어떤 돈인가. 일본이 패전 후 한국전쟁을 통해 번 돈의 일부다.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네이팜탄을 만들어 한반도를 무차별 폭격해 돈을 벌었다. 그런 식으로 일본이 한국전쟁 때 번 돈이 20억 달러를 웃돈다. 한국전쟁 때 구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공장, 명승지 등 폭격지점을 안내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당시 요시다 일본 수상이 말하길 '한국 전쟁은 신이 내린 전쟁'이라고 했다. 일본이 번 돈 20억 달러는 한국인의 피값이다.  패전 후 극심한 실업률 등으로 일본에서 거의 날마다 폭동이 일어나는 지경이었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기사 회생했다. 한반도에서 죽어간 수백만 명의 목숨값으로 일본은 돈을 번 것이다."

"독도문제에 관한한 미국은 일본과 공범이 아니라 주범"

 미 국무성이 작성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차 초안.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명시했다(빨간 테두리 문장).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되어있으나 6차 초안부터는 독도가 한국 영토에서 제외됐다.

 미 국무성이 작성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차 초안.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명시했다(빨간 테두리 문장).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되어있으나 6차 초안부터는 독도가 한국 영토에서 제외됐다.

 

 미 국무성이 작성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9차 초안.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한국 영토라고 명시하고 독도는 제외했다(빨간 테두리 문장).


 

 미 국무성이 작성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9차 초안.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한국 영토라고 명시하고 독도는 제외했다(빨간 테두리 문장).


-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독도문제가 다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우선 독도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2차 세계대전 후 전범국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있다. 1947년 말에 작성된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일본이 포기해야할 영토에 들어가 있다. 그러다가 1948년 6월 8일 미군이 독도를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부에선 이 사건이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던 미군의 실수 정도로 얘기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군은 일본정부의 요청을 받고 독도를 폭격했다. 일본 정부는 '독도에 마약수송선이 있다'며 미군에게 퇴치요청을 한다. 이 요청에 따라 오키나와에 있던 미 공군 소속 B-29 9대가 아무 경고 없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윌리엄 시볼트는?
독도 문제가 거론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제의 미국인이 있다. 윌리엄 시볼트(William Sebald).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일본 미 군정청(GHQ) 외교국장, 연합국 대일 이사회 미국 대표 겸 의장, 주일 미 정치고문 등 패전 후 일본의 운명을 좌우하는 3개의 핵심 요직을 모두 꿰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자신의 일본문제 전임자였던 버터워스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1949년 11월 14일과 19일 전보와 공식문서를 보내 "독도 문제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며 "이 섬에 대한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으로 정당하니 이 섬을 일본 영토로 기재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압박했다.

그리고 미 국무부는 일본의 패전 책임을 따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6차 초안에서부터 독도를 일본이 포기해야할 영토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부인이 영국계 일본인이었던 윌리엄 시볼트는 은퇴 후 일본에 남아 법률고문회사를 운영했다.

당시 독도엔 우리 어민들이 해산물 채취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미군이 발표한 공식자료에 따르더라도 이 폭격으로 30여 척의 배가 전파되고 150여 명의 어부가 사망했다. 폭격에 사용된 포탄 한 개의 무게가 무려 1000kg이었다. 미군은 또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에 독도를 2차 폭격한다. 그리고 미군은 같은 해 9월 22일 학술조사단이 독도를 방문하려 하자 3차 폭격을 가했다.

미군이 독도를 세 차례에 걸쳐 폭격한 것은 독도를 무주지(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땅)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 치밀하고 치졸한 음모엔 주일본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 시볼트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개입돼 있다. 그는 1949년 11월 14일 미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 독도를 일본이 포기해야할 영토에서 빼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6차 초안부터는 독도가 빠지게 된 것이다. 독도문제에 관한한 미국은 일본과 공범이 아니라 주범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왕의 사과를 요구했는데.
"역사인식을 토대로 대처해야 하는데 즉흥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본왕의 책임에 대해서 대통령이 정확히 애기해야 한다. 일본왕은 패전 선언을 하면서도 반성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왕은 우파 뒤에 숨지 말고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책임자다. 그는 아시아 침략을 반성하기는커녕 '나의 백성이 되어 싸워줘서 고맙다'고 적반하장으로 말했다. 수많은 아시아 사람이 죽고, 전쟁의 질곡으로 그 아픔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책임자인 일본왕의 사과와 일본의 전쟁책임을 대통령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 도대체 일본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바람직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라도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은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 장수가 오사카 가서 협상을 하고 전쟁을 끝냈다. 1965년 한일협정 때도 미국이 끼어서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 없이 한많은 식민시절 종결선언을 해버렸다. 바로 그래서다. 제대로 된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 우리가 주체로 있어야 한다. 그 첫걸음이 한일협정 폐기다. 2012년 대선 주자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기를 자처한다면 한일협정 폐기와 재협정 체결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

- 이 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는가.
"한 지인이 한 회사에 이 책을 교양도서로 추천하니까 회사 관계자가 읽어보고 한다는 말이 '너무 잔인해서 교양서로 못 쓰겠다'고 했다더라. 자기역사를 잔인하다고 외면하는 너무 천박한 역사인식,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대통령부터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지란 의미로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책 한권을 보냈다.

난 이 책을 한국인이라면, 또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인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본이 기원전부터 한반도를 침략하고 괴롭히고 상처를 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까지도 독도 문제나 식민시절 사과거부 등으로 한반도와 아시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당하는 피해자들은 일본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고대, 근대, 현대 구분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학살하고 수탈하고 침략하겠다는 뜻으로 읽히기 마련이다. 일본 사람들도 읽게 하기 위해서 일본어판을 준비하고 있다. 이 책이 일본의 사죄를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은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문의: (062) 234-9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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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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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진실중국 동북공정, 일본 만선사관, 한국 강단사학에 던지는 도전장

 

글쓴이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출처: 신동아20079월호 권말부록 (p611 ~ 658) 

환단고기에 실린 가림토 문자는 원시 한글?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면 천부경도 위서

중국 음양론과 확연히 다른, 3수론 담긴 천부경

단군교를 鬼道로 단정한 가지마 노보루

두 차례 월남하며 환단고기 가져온 이유립

현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가 필사한 것

1979년 환단고기 인쇄했다 파문당한 조병윤

고대 史書 수거령 내린 조선 정부

5공 실세와 군부, 그리고 이유립의 관계

일본 滿鮮사관, 중국 탐원·동북공정에 맞서는 환단고기

무속인 기도처가 된 강화도 단단학회

 

 

   1-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신서인가?

 

 

 

일본 요코하마 출생으로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1925년생)씨가 번역한 것으로 돼 있는 양장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국회도서관에서 접한 순간 기자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실크로드 흥망사란 부제가 붙은 이 환단고기는 서기 1982년인 쇼와(昭和) 57, ‘역사와 현대사(歷史現代社)’를 발행인으로, ‘()신국민사(新國民社)’를 발매인으로 해서 도쿄에서 출간된 일본어 책이기 때문이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기자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밝혀놓은 환단고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위서(僞書)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 때문이다.

한글은 1443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문자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 한자(漢字)만 해도 갑골문에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왔고 알파벳도 북셈문자와 페니키아문자를 거쳐 발전해왔다. 일본의 가나(假名)는 한자 초서 등에서 유래했지만, 일본에는 가나 이전에 고대 문자가 있었고 그것이 가나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조선 세종대에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 ‘원시 한글이라 할 문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시 한글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놀랍게도 환단고기는 그 해답을 제시한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삼성기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란 네 책을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녹도문과 가림토 문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는 환웅이 신지 혁덕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적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사람들은 녹도문은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글자이고, 갑골문에 앞서 한자의 근원이 된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녹도문이 어떻게 생긴 문자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녹도문은 표의(表意)문자일 가능성이 높고, 환단고기는 그 모양을 그려놓지 못했으므로 녹도문을 원시 한글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세 번째 단군인 가륵(嘉勒) 2, 가륵 단군이 삼랑 을보륵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로 된 지금의 한글과 아주 비슷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그 문자의 모양을 보여준다. 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은 단군세기를 인용해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리켜 가림다(加臨多) 문자라고 한다며 앞의 가림토와 같은 모양의 문자를 보여준다.

단군세기에는 가림토, 태백일사에는 가림다로 한 글자가 다르게 표기돼 있지만, 환단고기는 원시 한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은 이 문자를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국민은 모르는 아주 이상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삼척동자를 붙잡고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고주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의 이름이 과연 고주몽일까?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고주몽이다라고 밝혀놓은, 우리 민족이 펴낸 가장 오랜 사서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라고 기록하고, 바로 다음에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주몽은 추모로도 불릴 수 있고 중해로도 불릴 수 있다고 삼국사기는 분명히 밝혀놓은 것이다(원문 : 始祖東明聖王姓高氏諱朱蒙云鄒牟云衆解).

 

고구려 시조는 주몽인가, 추모인가

주몽추모중해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말은 중국어와 다르다. 신라시대 우리말을 한자로 적기 위해 이두향찰를 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유사한 방법으로고구려 말을 한자로 적었을 것인데, 어떤 이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적고, 어떤 이는 추모로, 또 어떤 이는 중해로 적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세 이름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했느냐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조 때인 서기 1145년 김부식이 편찬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서기 668년이니,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때로부터 477년이 지나 만들어진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또 하나를 살펴보자. 중국 길림성 집안에는 고구려 당대인 서기 414,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비문은 옛날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 당대에 세워진, 삼국사기보다 731년 앞선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이 추모로 기록된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바로 그 책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삼국사기는 조선 태조 3년인 서기 1394년 김거두란 사람이 그때까지 전해진 삼국사기를 토대로 새로 목판을 만들어 찍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삼국사기는 빠진 글자가 있어 완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 중종 때인 1512년 이계복이 김거두의 삼국사기를 개판(改版)해서 새로 찍어냈으며 이것이 오늘날 한글로 번역되고 있는 삼국사기다.

1512년에 인쇄된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사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고구려 당대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사실에 가까운 진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사실(史實)’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조작될 수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조작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광개토태왕릉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하기 위해 세운 것인만큼 시조의 이름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조 이름을 추모로 부르는 것이 옳은데, 현대에 나온 모든 사서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부르고 있다. TV 드라마까지 주몽으로 불러,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란 인식이 고착화된 상태다.

 

한글의 뿌리를 연구해야

추모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첫째, ‘고구려 시조 이름을 당대 이름에 가깝게 바로잡자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고대 우리 민족이 쓰던 말을 한자로 옮기다 보면 다르게 적힐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삼국사기에 북부여 속담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주몽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추모와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뜻하는 고구려 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고구려 말 발음을 한자로 옮길 때 추모로 적을 수 있고 주몽, 중해로도 적을 수도 있다. 추모와 주몽, 중해가 발음이 비슷하듯 원시 한글을 뜻하는 가림토가림다도 발음이 흡사하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고려 말의 이암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고려 말 우리 민족은 가림토와 발음이 비슷한 원시 한글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글자가 조선 세종조의 집현전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훈민정음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

위서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주목받는 것은 정확성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옛날의 사실(史實)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적해볼 수 있는데, 요즘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이 밝혀지는 사실 중에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렇다면 가림토와 가림다 문자도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이 입과 목을 이용해 발음하는 것을 보고 수년 사이에 훈민정음을 만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자는 쉽게 창안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학자들도 무엇인가로부터 힌트를 얻어야 역사적인 창조를 할 수 있다. 한글을 사랑하는 학자라면 한번쯤 환단고기의 진위부터 한글의 시원(始原)까지 모든 것을 연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집현전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제시된 가림토(가림다) 문자를 발굴해 그것을 토대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이 옳은지를 추적해보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치우 등장시킨 환단고기

사실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축구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는 치우천왕이 그려진 엠블럼을 들고 나왔다.

언제부터 우리는 치우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게 됐는가. 치우를 단군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바로 환단고기다.

물론 1911년에 편찬된 환단고기에 앞서 치우를 우리 선조로 규정한 책이 있었다. 1675(조선 숙종 1)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쓴 사람이 펴낸 규원사화(揆園史話)’가 그것이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사서(史書)가 아닌 사화, 역사 이야기책이란 이유로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규원사화에 담긴 내용이 100% 허구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일부는 분명 진실일 텐데 우리의 사학자들은 이를 위서로 단정짓고 아예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규원사화가 살려내지 못한 치우를 환단고기가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그것도 단군에 앞선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치우는 중국인의 조상?

그런데 치우가 우리 조상이 아니라 중국인의 선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다면 치우를 앞세우며 좋아했던 한국인은 정말 우스운 존재가 된다. 문제는 치우를 중국의 선조로 만들려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황제, 염제와 더불어 치우를 중국인의 3대 시조로 꾸미고 있다.

중국인을 가리켜 자칭, 타칭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한족은 진시황에 이어 한()고조 유방이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하고 난 다음에 생겨난 이름이다. 한나라가 등장하기 전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은 하화족(夏華族)’이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화족은 중국을 이룬 전설상의 인물인 35제 가운데 5제의 첫 번째 인물인 황제를 시조로 여긴다. 한민족 하면 단군의 후예를 지칭하듯, 하화족은 황제의 후손을 의미한다. 하나라는 5제 중 한 명인 우()가 세웠다고 한다.

중국인은 황제가 이끄는 황제족과 경쟁을 하다 황제족과 하나가 된 종족을 3황 가운데 마지막인 염제(신농)가 이끈 염제족으로 보고 있다. 염제가 이끄는 염제족을 황제족이 제압함으로써 거대한 황제족이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거대한 황제족을 중국인들은 염황족으로 부르거나 아니면 이들이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하화족으로 부른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을 거론할 때 치우가 이끄는 치우족은 배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사서는 황제(헌원)가 탁록이라는 지역에서 치우와 싸워 이김으로써 패권을 장악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탁록 전투에서 치우가 이끄는 종족이 황제가 이끄는 종족을 이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승패의 결과가 다르긴 하지만 중국 사서와 환단고기 모두 황제족과 치우족이 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흐른 지금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치우가 황제, 염제와 더불어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95, 중국인들은 치우와 황제가 역사적인 결전을 벌인 탁록에 귀근원(歸根苑)’이란 이름의 사당을 만들고 그 안에 황제와 염제, 치우를 모신 삼조당(三祖堂)’을 세웠다. 그리고 치우가 황제, 염제와 함께 중국 민족을 만들었다며 이들을 중화3(中華三祖)’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만일 치우가 중국인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우리는 중국인의 조상을 우리 조상이라고 주장한 바보 같은민족이 된다. 물론 환단고기도 쓰레기 같은 잡서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면

그러나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일컫는 동이족의 선조가 치우라는 주장은 점점 힘을 받고 있다. 환단고기가 없었으면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치우를 우리 조상으로 내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환단고기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이 환단고기가 등장한 후 초··고교 역사교과서에 단군이 실존인물, 단군조선이 실재한 나라로 적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환단고기는 환웅과 단군 시대에 관한 옛 기록이라는 뜻인데, 이 책은 단군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대통령과 같은 자리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밝혔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단군조선을 적시한 우리 교과서도 위서 시비에 빠질 수 있다. 환단고기의 위력은 비단 역사와 문화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종교계와 학계에 두루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림다 문자가 나오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소도경전본훈편이 있는데, 여기에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천부경은, 환단고기와 별도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천부경의 등장으로 한국철학사와 한국종교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철학은 중국에서 생겨난 유학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고 삼국시대에 이 땅에 전래된 불교는 한국화한 종교로 여겨져왔다. 우리 민족이 외래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여 우리화했다는 것이 한국철학과 한국 종교의 큰 줄기였는데, 환단고기와 함께 천부경이 등장하자 천부경이야말로 외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 조상이 만든 철학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양오행론과 다른 천부경적 세계관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환단고기에 실린 또 하나의 경전인 참전계경은 유학이나 불교와 다른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적, 또는 중국적 세계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음양오행론이다. 음양오행론은 다르게 발전해온 음양론오행론이 중국 전국시대에 합쳐짐으로써 생겨났다.

음양론은 전기의 플러스(+)와 같은 양()과 마이너스(-)와 같은 음()으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을 6개로 한정해 모아보면, 6개가 모두 양인 것에서부터 6개 모두가 음인 것까지 모두 64개가 만들어진다(2×2×2×2×2×2=64). 이러한 64괘 가운데 반쪽짜리’ 4괘가 바로 태극기에 들어 있는 ···.

()나라 시절 중국인들은 자연변화를 64괘로 압축했다. 그리고 미래를 살피는 점을 치면서 64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뽑게 했는데, 이때 뽑아낸 괘를 보면서 거꾸로 미래 상황을 펼쳐 보였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한자로는 ()’으로 표현하니, 주나라 때 만들어진 이 인식체계는 주역(周易)’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오행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에너지 원소를 수····토 다섯 가지로 본다. 이 다섯 가지 기운 가운데 물()과 불()처럼 충돌하는 관계도 있지만, ()이 나무()를 잘 자라게 하듯 도와주는 관계도 있다. 물은 불을 꺼버리므로 물은 불과 상극관계이고, 물이 있어야 나무가 잘 자라므로 물과 나무는 상생관계라고 본다.

그러나 상극이라고 해서 무조건 최악은 아니다. 물과 불이 이라는 매체로 분리돼 있다고 가정해보자. 물은 솥에 담겨 있고 솥 밑에 이글거리는 불이 있다면, 불은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해 탈 수 있고, 물은 설설 끓어 음식을 익힐 수 있게 된다. 솥으로 분리된 물과 불은 자기 성질을 극대화함으로써 음식을 익히는 새로움을 창출하니 이때의 물·불은 상극관계가 아니다.

 

   ··인의 3수론 

 

 

오행론은 수화목금토 사이에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어느 것과 어느 것이 어떤 조건으로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음양론과 오행론이 공자를 태두로 한 유교에 흡수됐고, 그러한 유학이 한반도로 유입됐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꽃을 피우는데, 퇴계의 성리학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1567~1618)에 의해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 등에게 전파됐다. 그 영향으로 500여 년에 걸친 내전(전국시대)을 종식한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퇴계의 성리학을 토대로 한 문()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러한 흐름이 있는 만큼 음양오행론은 한··일의 공통된 사유체계로 이해돼왔다. 이러한 사유체계를 거부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음양론이 음과 양 두 개의 수로 만물 변화를 설명한다면, 천부경적 사유체계는 천((() 세 개의 수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론은 두 개로 설명을 하니 대립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천부경적 사고는 변증법의 --(正反合)’ 이론처럼, 3의 방안을 제시해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천부경의 우주관은 불교의 우주관과도 다르다. 주목할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을 뿐 중국이나 인도에서 나온 서적에는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천부경적 사유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학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천부경을 입력하면 김백호 최민자 수월제 이중철 김현두 김백룡 최동환 문재현 유정수 권태훈 조하선 윤범하 등 수많은 학자가 주해한 천부경 관련 서적이 뜬다.

현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에서 비롯됐다. 단군교는 1910년 대종교로 개칭했는데, 이때 나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단군교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떨어져 나갔다. 앞에서 밝혔듯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에 의해 처음 편찬됐으니 천부경은 그때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종교와 단군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지 않았다. 대종교를 이끈 나철은 1916년 자살하고, 이듬해인 1917년 계연수는 대종교에서 떨어져 나간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제가 단군교를 없앰으로써 단군을 모시는 종교는 대종교만 남게 됐다. 이때 단군교를 따르던 많은 신자가 대종교로 넘어왔지만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55년이 흐른 1975년에 이르러서다.

 

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환단고기의 천부경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환단고기가 특정인이 지어낸 위서로 밝혀진다면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최치원은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은 최치원 사후 1000년 이상이 지난 1925, 집안에 전해오던 최치원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최문창후전집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고 한다. 천부경은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데, 최문창후전집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과 74자는 같고 7자가 다르다.

그러나 7자는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다른 한자가 아니라 거의 유사하게 해석되는 한자다. 이 때문에 천부경이 환단고기 쪽으로 전해지는 과정과 최치원 집안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7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조선 말의 기정진(奇正鎭·1798~1879)도 그때까지 구전되는 것을 전해 듣고 천부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천부경은 기정진 선생의 제자의 제자인 김형택씨가 단군철학석의(1957)’란 책에 남겨놓았다.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1자가 다르나, 역시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세 가지 천부경 가운데 정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환단고기의 천부경이다. 대종교도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자의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세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환단고기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최문창후전집에 나오는 천부경과 단군철학석의에 나오는 천부경은 환단고기를 참고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천부경도 위서가 될 수 있다.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와 천부경을 민족철학으로 여겨 해석한 학자들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황인데도 한국 지식인들은 환단고기의 실체를 제대로 추적하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4권의 책을 묶어 펴낸 환단고기는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1920년 중국 도교 전문가인 전병훈(全秉薰·1857~1927)정신철학통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이 책 서문에 천부경 전문을 싣고 해석을 달아놓았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지금 전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천부경을 실은채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계연수는 1911년 환단고기 필사본 30부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전병훈은 이를 보고 출간을 앞둔 정신철학통편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환단고기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출판됐다고 주장했다.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는 없고 그의 제자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출판사를 통해 인쇄해 내놓기 전에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나왔다면 이유립은 거꾸로 일본판 환단고기를 베껴 한국에서 출판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한국 출판사에서 출간된 환단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 김은수씨의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와 임승국씨가 19865월 정신세계사에서 내놓은 겨레를 밝히는 책들-한단고기이다. 임씨는 이유립씨와 함게 국사찾기 운동을 한 사람인데, 그는 환단고기가 아니라 한단고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쓴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환단고기1982역사와 현대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확인됐으니 기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가지마 노보루가 출판한 환단고기가 일본인들이 창작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환단고기를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역사서’ ‘민족의 철학을 밝혀주는 지침서로 흠모했다면 정말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이다. 다급해진 기자는 환단고기를 출간한 국내 출판사를 하나씩 접촉하며 어떤 경위로 이 책을 내게 됐는지 알아봤다.

환단고기는 참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앞에서 언급한 임승국씨의 한단고기(정신세계사) 외에도, 1987년 고려가라는 출판사가 다섯 권으로 펴낸 대배달민족사1권에 실린 환단고기, 1989년 김은수씨가 주해해서 기린원이 펴낸 환단고기, 1994년 민족문화사 편집부가 출간한 환단고기, 1996년 계연수를 편자로 해서 한뿌리출판사에서 내놓은 환단고기, 1998년 코리언북스출판사가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해서 출간한 환단고기, 2000년 바로보인출판사가 문재현씨의 풀이로 내놓은 환단고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와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원문(한자)과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의 원문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한편으로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해석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했다는 오해를 나을 수도 있으므로 기자의 마음은 다급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위서 시비가 있는 책인데.

조급함은 곧 불안감으로 증폭됐다.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에 접목시켜놓았기 때문이었다. 가지마는 일본 신도의 원류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는 모략위서(謀略僞書)라는 제목을 단 머리글에서 위서 시비가 있는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부인하며 환단고기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신도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교 조선 기치 내건 개화기 일본

가지마는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일본 신도의 정통성을 바로 세운다며 환단고기를 출간한 것일까. 그 답을 찾아준 이는 서울 청운동에 있는 국학연구소의 김동환 연구원이다. 일본 신도를 연구하는 김 연구원은 가지마를 의식 있는 일본의 재야사학자로 정의했다. 김 연구원으로부터 일본 신도의 역사와 가지마 노보루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불교의 절과 신도의 신사(神社)가 함께 있는 것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 퇴계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세계관과의 결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일본이 친()유교(성리학), ()조선이었다면,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의 일본은 반()유교 반()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봉건제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에도 고유한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줘야 했고, 메이지(明治)시절 일본의 엘리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고사기(古事記)’ 등 일본의 고유 자료를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은 성리학을 수용한 막부를 날려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상징하는 천황 중심으로 뭉치자는 주장으로 이어져, 천황 숭배가 강화됐다. 일본 천황의 위패는 대개 신궁에 모시니 신도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불교가 들어온 7세기부터 신사와 절을 공존, 융합시키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전통을 이어왔다. 신사와 절이 함께 있고, 가정에는 신도의 제단인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제단인 불단(佛壇)’이 함께 놓인 것이 바로 신불습합의 전통이다.

신도를 부흥하려 한 일본의 엘리트들은 불교도 봉건적이고 외래적인 것으로 보고 불상과 불경을 훼손하고 거부하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교는 신도만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라 척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엘리트들은 불교 탄압을 중단하고 신불습합을 인정하며 신도 부흥에 매진했다.

이 시기 일본은 총리대신 밑에 전국의 신궁과 신사를 관리하는 신기국(神機局)’을 뒀다. 신기국은 일본서기와 고서기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일본을 한국보다 오래된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로 바꾼 것이다. 신기국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도 일본의 토속신을 모시는 신궁과 신사를 만들게 했다.

 

신국민과 만선사관을 위해 번역

 

 가지마 노보루가 1982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한 환단고기와 서문. 표지에는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러한 운동이 일기 전, 일본 신도를 부흥시킨 인물로 꼽히는 고사기전(古事記傳)’의 저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가 일본 국학 부흥을 부르짖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국민(國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국민은 국가가 결정한 것을 그대로 따르는 민중이다. 이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자 했을 때 일본인들은 이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가지마 노보루는 비판 없는 맹종이 일본인에게 패전과 피폭(被爆)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일본 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패망시키고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다는 원칙에 따라 새로 만든 헌법(평화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을 넣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 신도는 메이지 시대 이전처럼 자력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때 신도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 일본인들은 신도의 위기는 비판 없는 일본인의 근성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이들은 국민이란 단어에는 무비판무조건 수용의 뉘앙스가 담겨 있으니 이제 일본인은 국민이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인민임은 부정할 수 없어 신국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일본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 가지마 노보루다. 다음은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배운 창해출판사 전형배 사장의 의견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일본은 동북아를 무대로 한 역사 주체 가운데 방계에 해당한다. 일본은 동북아 역사 무대의 중심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중심이 되자는 것이 신국민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다.

이는 미국과 영국의 관계와 비슷하다. 미국은 영국에서 갈려나온 방계이지만 지금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중심이 됐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동북아의 주무대에서 갈려 나온 방계이지만 지금부터는 동북아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그 일을 할 주체세력으로 신국민을 설정했다. 한반도와 만주에 살던 형님이 못한 일을 섬에 살던 일본인이 대신해서 하자며, 신국민을 그 일의 중추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중국에 문화적으로 편입돼 있는 조선은 물론이고 아예 중국의 영토가 된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일본과 같은 역사를 만들어온 공간으로 삼자는 만선(滿鮮)사관과 궤를 같이한다. 만주와 조선에 있는 형님이 잃어버린 정신을 일본에 살던 동생이 대신 세우겠다는 것이 만선사관과 신국민에 담긴 의지다. 가지마는 그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환단고기를 번역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영국 대신하듯 일본이 한국을 대신한다 

 

 

신국민은 비판능력이 있어 나라가 결정한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신국민은 메이지 시절의 엘리트가 조작한 일본 고대사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가지마 노보루의 책을 출간한 신국민사.

신국민사는 신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본 재야 사학자와 재야 국학자들의 모임이 됐다. 가지마는 이 모임의 핵심이기에 환단고기서문에 일본서기와 고서기는 모략위서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가지마 노보루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와 일본에는 고유한 종교가 있다고 봤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선도(仙道)라 하는데, 가지마는 일본의 신도와 한국의 선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여겼다. 중국에서는 유교 외에 신도나 선도와 비슷한 도교(道敎)가 생겼는데, 이 셋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게 가지마의 생각이다.

 

鬼道 檀君敎(괴도 단군교)’

가지마는 한··3국의 토속 종교 간의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일본 신도의 이론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초석이라고 여겨 한국인보다 먼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한 것이다. 그 후 가지마는 역시 신국민사를 통해 신도이론대계(神道理論大系)’라는 신도 교과서를 펴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선도를 연구한 속셈을 분명히 밝혔다.

신도이론대계의 제5장은 신교오천년사(神敎五千年史)’란 제목인데 여기에 귀도 단군교(鬼道 檀君敎)’란 문구가 있다. 가지마는 홍암 나철이 만든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단군교는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도 규정했다.

고대에는 일본의 신도가 한반도의 선도나 중국의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만 근대에는 거꾸로 일본의 신도가 한국과 중국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 가지마 노보루의 주장이다. 만주와 조선은 일본인의 역사공간이라는 만선사관으로 무장한 일본의 우익을 우리는 어떤 논리로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또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2-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김동환 연구원에게서 가지마 노보루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취재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밝혀보려던 목적은 잠시 접고,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먼저 번역 출간한 이유부터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란 인물이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유립이 이를 세상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연수와 이유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연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또 다른 일부는 이유립이 우회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극할 요량으로 가지마에게 먼저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유립도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허위로 이유립이라는 인물을 내세웠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 시급했다.

계연수는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911년대의 사람으로 이미 고인이 됐을 것이니 이유립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립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기자는 환단고기를 펴낸 출판사를 상대로 이 질문을 던졌는데, 1996년 환단고기를 출간한 바 있는 한뿌리출판사의 권태흥 대표가 이유립을 알고 싶으면 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을 만나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전형배 사장을 만나면서 이유립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전형배(全炯培·48) 사장은 보성고, 고려대 정외과 79학번 출신의 출판인이다. 전 사장은 1998년 창해출판사의 자회사로 코리언북스를 만들어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한 역주본(譯注本장구본(章句本)’이라는 부제를 단 세 권짜리 환단고기를 내놓은 바 있다(장구본은 환단고기를 장과 구로 나눠 정리했다는 뜻).

 

 5·16 반혁명 사건 연루자 박창암

그는 환단고기와 이유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교 시절 그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지금은 간도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엔 간도가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사시간에 그는 선생님에게 간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가 시험을 앞둔 놈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쥐어박혔다고 한다. 국사 선생도 간도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국사 찾기운동을 펼치는 박창암(朴蒼巖·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가 펴내는 월간지 자유를 접하게 됐다. 박씨는 아호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3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립과 박창암의 만남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씨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그가 생각해온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박창암씨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주제어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1차적인 계기는 그가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 계기는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이유립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이유립씨는 자유지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

이를 계기로 이유립씨는 주요 언론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해 197810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만주 지역 역사와 고토(故土) 회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전형배씨는 1979년 여름 어느날 박창암씨를 찾아갔고 그의 소개로 의정부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자일동에 있는 이유립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전씨는 경주법주를 사들고 갔는데, 그를 맞은 이유립씨는 대뜸 술 사올 돈 있으면 책을 사보거나 책을 사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지 몰라도 전씨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모시는 시봉 노릇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이유립씨를 지원하는 일을 많이 했다.

전형배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유립이 실존인물임을 확인한 기자는 취재 폭을 확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먼저 취재에서 확인된 이유립이란 사람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유립 집안은 환단고기와 깊이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 그와 환단고기, 그리고 계연수, 가지마 노보루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이유립(李裕?·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5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53078;·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선우휘 주필이 국사 문제를 놓고 이유립씨와 대담한 기사를 실은 19781022일자 조선일보.

 

이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의 나라인지라 우리 고유의사상을 공부해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불교식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서경(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묘청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암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의 지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불교와 선도를 공부한 것은 고려 말의 사상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세조·예종·성종 때의 고대 사서 수거령

이러한 사상적 유연성은 성리학만을 숭상한 조선시대로 들어가면서 꽉 막히게 된다. 조선은 세조와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아주 강력한 고대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고대 사서란 성리학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기록해놓은 책으로 추정된다.

1469년의 일을 기록한 예종실록에는 서울에서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10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갖다 바치고, 지방에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의 관가에 바쳐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맥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과 중종 때 암행어사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고조부인 이암의 예로 볼 때 이맥의 집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사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맥은 지금은 실전(失傳)된 발해사 기록물인 조대기등 많은 책을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다. 그는 고대 사서를 관가에 바쳐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이러한 사서를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을 수도 있다.

조선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을 이었다고 자칭한 나라인지라, 평양에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기자 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 것은 그 후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는 한반도였다반도(半島)사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도사관을 형성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대륙)에 저항하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게 된다.

만주 대륙은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니라는 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맥은 일찍이 반도사관을 거부하며 대륙사관을 수용한 인물이다. 태백일사를 남긴 이맥의 손자가 조선 인종·명종 때 활동한 이방(李滂)이다. 이방은 인종 1년인 1545년 국경지방인 평안도 삭주도호부의 부사로 발령받았다. 고성 이씨 종중의 이영규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방이 삭주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것을 좌천성 인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의 문인이었던 계연수 

 

이방은 삭주에 눌러 살며 자손을 잇게 됐는데, 그로부터 20세손이 바로 계연수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아 세상에 내놓는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데는 조선말에 활동한 또 한 명의 고성 이씨인 이기(李沂·1848~1909)가 큰 역할을 했다.

이기도 단군세기를 남긴 고려말 이암의 후손인데, 그의 선조가 전북지방으로 이주해 그는 김제에서 태어났다. 이기는 호남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기는 민씨 정부를 쳐부숴야 한다며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을 만났으나 김개남과 의견이 갈려 떨어져 나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농민군이 양반을 욕보이고 민가를 약탈하자 그는 거꾸로 농민군 토벌에 앞장서 공을 세운다. 1902년부터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국가를 바로잡으려면 민족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 5적을 죽이자는 선언문과 악인(惡人)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적은 참간장(斬姦狀)’을 만들어 돌리다 체포돼 1년간 진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1909년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와 단학회를 세우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러한 이기의 문인이 바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이맥이 쓴 태백일사는 이기에게서 얻었다라고 밝혔다. 계연수는, 자신의 집안에 안함로가 쓴 삼성기가 있는데 이것과 평안도 태천에 사는 백관묵 진사에게서 구한 삼성기를 합쳐 삼성기전(三聖紀全)’을 만들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또한 계연수는 이암이 쓴 단군세기는 태천의 백관묵 진사와 삭주 뱃골에 사는 이형식 진사에게서 얻었는데, 두 책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고 기록해놓았다. ‘북부여기는 범장이 지은 것인데 단군세기를 전해준 태천의 백관묵 진사에게서 얻었다고 밝혀놓았다. 이어 계연수는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자신이 환단고기로 옮겨 적었고, 홍범도와 오동진이 자금을 마련해 환단고기를 인쇄했다고 밝혔다.

 

 

 

··선에 능통했고 단군세기를 지은 고려말의 이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초상화다.

 

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계연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전형배 사장은 계연수가 실존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데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란 책을 보여줬다 이 책의 ()’권에 계연수가 등재돼 있는데 이를 옮기면 이렇다(사진참조)

계연수(桂延壽)의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 군데가 틀렸다. 첫째는 무술년에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간행했다는 부분인데,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묶어 환단고기를 낸 1911년은 신해년이다. 둘째, 계연수가 태백유사 등을 간행했다고 했으나 계연수는 태백유사가 아닌 태백일사를 환단고기 안에 집어넣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5) 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 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환단고기는 신해년(1911)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해동인물지에서 계연수가 몸을 의탁한 것으로 돼 있는 이상룡은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는 독립운동가인데, 그 또한 고성 이씨였다. 환단고기는 고성 이씨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

 

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유립씨는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데다 단단학회 대표를 자칭한 조병윤씨에 대해 파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병윤씨는 승려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단을 겪었지만 조병윤씨가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는 1948(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이유립씨는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한자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오자가 있는데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로 이러한 오자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원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이유립 선생이 오자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구한 환단고기의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이 사본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한국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그러나 거기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가지마의 환단고기에서는 원문이 실려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 실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형기씨 본()을 구한 가지마는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풀어준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일까. 이 의문도 전형배씨가 해답을 주었다.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유립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이 원고를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환단고기에는 誤字가 있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시중에는 한때 이유립씨에게서 환단고기를 배운 사람이 이씨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주해한 것과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해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주해본이 나와 있다. 전형배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분명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 선생 필사본의 오자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이유립 선생도 알지 못한 오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씨는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군인 출신과 5공화국의 실세들이 있었다. 이유립이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 서점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80년까지 이유립은 의정부 자일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편을 안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그를 서울 상계동으로 모셨다. 의정부 시절의 이유립씨에 대해 전형배씨는 한겨울 끼니가 없어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집이 워낙 추워서 점심때가 되면 삶은 라면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 선생은 이 얼음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으로 드시며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셨다. 어렵게 사는 것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외풍이 센 방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개천절 때 이유립은 배달문화상을 받고 제자들 덕분에 김포를 거쳐 서울 화곡동에 살게 되었다. 화곡동 시절 이유립은 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자주 강의했는데 그로 인해 군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전형배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씨의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전형배씨가 김낙천(金洛天) 고려가 사장을 만나 부탁을 하자, 김 사장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득실을 따지지 말자며 즉석에서 이유립 문집을 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환단고기는 물론이고 자유지 등 여러 곳에 쓴 이유립의 글을 모아 5권짜리 대배달민족사출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에 강의를 하던 이유립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타계했다(1986418). 그의 타계는 독립유공자 이유립옹 별세라는 제목으로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이석영씨 도움으로 강화도에 단단학회 건물 마련

생전의 이유립 선생과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개천민족회를 이끄는 송호수 박사다. 경신년은 서기로 1980년이다.

일각에서는 조병윤씨도 이 말을 들었기에 1979년 환단고기를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형배씨는 계연수 선생이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고 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어도, 이유립 선생으로부터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생전에 이유립은 5·16 군사정변을 예언한 명리학자이자 사주첩경저자로 유명한 같은 고성 이씨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씨와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유립은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이 산을 마리산으로 불렀다. 그는 이석영씨의 도움으로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간판을 내걸었다.

 

 

이기와 이유립의 스승인 계연수는 단학회를 이끌었다.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는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후 대종교로 나가지 못한 세력이 유지한 단군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제에 의해 폐교 위기에 몰린 단군교를 단학회에 다시 합친다는 뜻으로 광복 후 이유립이 만든 것이 바로 단단학회(檀檀學會). 마리산에 허름하긴 하지만 단단학회 건물을 만든 이유립 선생은 열정을 갖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지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우리말로 개천각을 묘사한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을 인류를 만든 하느님으로, 환웅을 우리 민족의 계조로, 단군은 우리 민족을 토대로 국가를 만든 시조로 그렸다. 이 때문에 이유립은 우리 민족은 환웅부터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이유립은 개천각 중앙에 환웅을 놓고 그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단군을 놓았다.

 

금나라 시조 모신 커발한 개천각

커발한 개천각에 모신 인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다. 중국 정사(正史) 모음인 25() 가운데 하나인 금사(金史)’ 등은 아골타를 고려 사람 또는 신라 사람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원()나라에 패망했다.

이러한 금나라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조선 중기 때 만주에서 후금을 세웠고 뒤를 이은 아들(태종)은 국호를 으로 바꾸고 중국과 조선을 지배해 들어갔다. 최근 재야사학계에서는 금과 후금-청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유립은 일찌감치 금 태조를 커발한 개천각에 모심으로써 금과 후금-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은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아골타가 대금제국 태조인 대성무원(大聖武元) 황제라는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환단고기와 관련된 인물들은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집안 근처 한중 국경선 부근에 살았다. 선천에는 계연수가, 삭주엔 이유립과 단군세기를 계연수에게 준 이형식이, 태천엔 삼성기단군세기’ ‘북부여기를 계연수에게 제공한 백관묵이 살았다.

 

그러나 지금 커발한 개천각과 단단학회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마니산은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고 싶어하나,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기도처를 지을 수 없다. 이러한 무속인들의 사정과 심각한 생활고에 직면한 86세의 신매녀 할머니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단단학회와 커발한 개천각은 무속인들이 거처하며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생전의 이유립 선생은 단군이 무속인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현실은 그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중국의 동북·탐원·단대공정과 일본의 만선사관

이유립을 추적하면서 기자의 머리에서 맴돈 의문은 왜 우리 사회에서 이유립은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을까하는 것이었다. 지금 재야사학계에서 거론되는 주장은 대부분 환단고기와 맥을 같이한다.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무대가 반도와 대륙이었다는 대륙 사관으로 씌어졌다. 반면 일제 때 시작된 과학적인 강단(講壇)사학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한 반도사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제작된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4~20세기에 청동기 문명이 꽃핀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요하 상류에서는 기원전 25~20세기에 만들어진 청동기문명과 그 이전에 꽃핀 신석기 후기문명 유적이 발굴되었다.

중국 문명은 황하문명을 뿌리로 한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은 모두 황하나 황하 중하류의 중원(中原)을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 황하문명보다 500여 년 이상 오래된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역사학계는 요하문명도 중국 문명의 일부이고 황하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요하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치우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국의 조상이라며 중화 3조당을 지었다.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발굴되는 청동기는 황하가 아닌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다. 고인돌의 분포 역시 그곳에서 시작돼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음을 보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모는 매우 비슷하지만 언어는 전혀 다른 것을 쓰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따진다면 한국과 가까운 것은 일본이다. 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인종인데도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갖게 됐을까. 그 이유는 문명의 뿌리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인은 황하를 중심으로 무대를 넓혀갔고 한민족은 요하에서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한민족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족은 만주를 지배했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중원을 넘어 전 중국을 점령하고 티베트(서장)와 위구르(신장)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족과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중국사로 편입될 이유를 만들고 말았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책인데 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이유립과 계연수를 실존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려 하는 것일까.

 

압록강은 고속도로였다

만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중국 문명에 고개를 숙이는 문명을 만들었기에 이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환단고기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계연수와 이유립은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평북)에 살았다. 계연수가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줬다고 한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줬다고 한 이형식도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인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 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전해진 것일까.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의 이영규씨는 조선시대 서울 경기·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평양과 전라 경상 충청까지 한양의 권력이 철저히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리면 그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북 지방은 다르다. 그곳은 국경지역인지라 한양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평북은 귀양도 보내지 않던 곳이니 관가의 영향력이 작아 환단고기 류의 사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유립이 태어난 삭주엔 압록강이 흐른다. 지금은 수풍댐이 있어 압록강이 넓어졌지만 댐이 있기 전엔 그리 넓지 않았다. 댐이 건설되기 전 삭주 지역의 압록강 폭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하구 폭과 비슷했다. 삭주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요녕성의 집안(集安) 지역을 만날 수 있다.

철도나 도로 같은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배를 만들 수 있게 된 신석기 시대 이래 고속도로기능을 해왔다. 평북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배를 저으며 수시로 고구려 유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것을 본 조선인들은 만주를 무대로 한 대륙사관을 갖게 됐을 터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을 심적으로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 문서

중국은 25사를 비롯한 방대한 역사서와 사서오경을 필두로 한 유교 경전, 그리고 음부경을 비롯한 도교의 경전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 ‘풍토기(風土記)’ 같은 수많은 책이 신도의 경전이자 일본 고대사를 적은 역사서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잦은 병란으로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서와 경전이 멸실된 상태다.

교토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로 꼽는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뒤편의 정창원(正倉院)은 고대 일본의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잖은 학자는 정창원에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우리 민족이 만든 자료들도 보관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을까. 문서를 공개하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일본은 100여 년 전 만주와 조선을 그들의 역사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滿鮮) 사관을 만들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만주국을 세웠다. 만선사관으로 압축된 일본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꺾이긴 했지만 일본 우익들은 이를 다시 내세우려고 한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없는 시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펼쳤다. 그리하여 하나라와 은나라는 물론이고 35제 시절까지도 역사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고구려가 있던 만주를 중국의 역사 공간으로 끌고 오는 (세칭)서남공정과 동북공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비롯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탐원(探源)공정도 펼치고 있다.

소중화 사상이 판치던 시절 환단고기 류의 사서는 인쇄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필사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위서 시비를 받는다면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에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기자는 이유립은 실존인물이고 그가 남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는 것, 오형기씨 필사본에는 오자가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전형배씨가 밝히는 이유립 사관영락대통일은 오늘날의 민족통일 사상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사진)은 이기 선생이 만든 단학회를 이끌고 있다. 단군교와 합치기 전의 단학회는 1909년 이기를 회장으로 해 설립됐다고 한다. 2대 회장은 계연수 선생이 맡았고, 3대는 최시흥, 4대는 이덕수, 5대는 이용담, 6대는 이유립, 7대는 전형배씨가 회장이다. 전씨에게서 이유립의 사관에 대해 들어보았다.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은 3개의 조선으로 돼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유립 선생도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그렇다. 신조선과 막조선 불조선이 있었는데, 만주의 신조선이 가장 강력했다. 그리고 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연나라에서 온 위만에게 쿠데타를 당해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했다. 이 기준의 무리가 한강 이남에 삼한을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은 단군조선의 세 조선을 ()삼한’, 기준 무리의 3한을 ()삼한’, 고구려·백제·신라를 ()삼한으로 불렀다. 이 선생은 이러한 3국 체제는 3수론을 가진 천부경 사상과 일치한다고 하셨다.환단고기에 북부여기가 별도의 책으로 들어 있는 이유는.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지역의 우리 민족은 열국시대로 들어가는데 이때 북부여가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본다. 단군조선처럼 전권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것을 북부여로 보는 것이다. 북부여는 여섯 왕이 내려가다가 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바뀐다. 이 때문에 이유립 선생은 북부여를 원시고구려, 고구려를 본고구려, 대진국(발해)을 중고구려, 고려를 후고구려로 보았다. 북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보면 이 나라는 900년을 이어간 것이 된다. 발해라는 이름은 중국이 부른 것이지 우리가 부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진국으로 불렀다.”이유립 선생은 광개토태왕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안다.이유립 선생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광개토태왕을 매우 높게 평가해 영락대통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다. 광개토태왕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고 신라 백제와도 사실상의 통일을 이룩한 군주다. 그러나 3조선 개념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존속시켜주었다.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음에도 백제를 멸하지 않았고, 신라 왕자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 신라를 존속시킨 것이 바로 영락대통일 개념이라고 이유립 선생은 강조하셨다.영락대통일은 지금으로 말하면 연방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고구려는 말갈족과 함께 중국과의 전쟁에 나섰는데 이는 말갈족이 고구려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 속에 있던 연방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영락대통일은 연방제국 개념이유립 선생은 중국인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고 봤나.고구려 제국 안에 있던 우리 민족을 말갈 여진 옥저 읍루 등 별도의 이름을 붙여 기록해놓은 것을 대표적인 왜곡으로 보았다. 말갈은 고구려 말로 강가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중국의 역사서는 이들을 말갈족이라고 적어 놓음으로써, 마치 고구려족과는 별종인 것처럼 묘사했다고 비판하셨다.”이유립 선생의 사관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만일 중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영남인과 호남인이 자꾸 싸운다는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다고 가정해보자. 먼 훗날 이 기록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영남인과 호남인은 종족이 달랐던가 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선생은 중국의 사서들이 옥저 여진 말갈 읍루로 자꾸 나눠서 기록해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지금 우리가 유의할 것은 일본이 우리 민족을 둘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북한 사람은 조선인, 남한 사람은 한국인으로 적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이 쌓이다 보면 남북한 사람은 별개의 종족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 영락대통일은 남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과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까지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거대한 통일 사상이라고 생각한다.”계연수 선생은 묘향산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탁본해 대종교에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이유립 선생께서는 계연수 선생이 약초를 캐서 서울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때 대종교에서는 천부경을 인정하지 않아 계연수 선생이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탁본했다는 말을 약초를 팔면서 퍼뜨렸다고 하셨다. 그런 소문을 내야 대종교가 천부경을 빨리 인정할 것으로 보고 그렇게 했다고 이유립 선생은 웃으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학자들의 임무

 그렇다면 이젠 학자들이 보다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한다. 환단고기 실증 작업은 북한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북한에는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환검(1대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묘향산에는 단군사라는 사당이 있다.

과거 북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요하에 있었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최근에는 평양의 단군릉 건립을 계기로 고조선은 대동강에 있었다는 쪽으로 역사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황하문명이나 요하문명과 구분되는 대동강문명을 만들어, 김일성-김정일 체제 구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의 연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위축된 북한 사학을 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강단(講壇)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환단고기 연구를 피해간다면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만선사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소중화 류의 반도사관이 환단고기 류의 대륙사관을 억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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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사가 있는 북한 묘향산에 단군사란 사당이 있다. 보현사 입구의 안내도 앞에서 단군사를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

 가운데 환웅, 좌우에 치우와 단군을 모신 커발한 개천각. 제단 맨 오른쪽에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를, 맨 왼쪽엔 세종대왕을 그 오른쪽엔 광개토태왕을 모셨다.

 강화도 마니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단단학회의 커발한 개천각. 이유립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이 쓴 태백일사 발문 다음에 오형기씨가 1949년 이유립씨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기록해놓은 발문(오른쪽 사진 중간의 桓檀古記跋이라고 된데서부터 왼쪽 사진 끝까지). 각 글자 옆에 연필로 쓴 글자는 이유립씨가 오자라고 지적한 것을 전형배씨가 받아 적어놓은 것이다.

 1979년 조병윤씨가 출판한 환단고기의 판권 부분. 조씨가 단단학회의 대표로 돼 있다.

 1984년 이유립씨가 수상한 배달문화상 상패를 들고 촬영에 응한 이유립씨 부인 신매녀 할머니. 강화도 마니산의 단단학회 건물에 거주하고 있다.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는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사진까지 전하는 실존인물이다. 오른쪽은 이기의 문인으로 태백일사등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의 초상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고성 이씨와 환단고기 사이의 관계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에 실린 계연수에 대한 기록. 그러나 이 책자에 실린 계연수 기록엔 틀린 부분이 있다.

이유립씨가 쓴 고대사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1970년대의 월간 자유.

반혁명사건으로 법정에 선 박창암씨와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

 월간 자유를 창간해 국사 찾기 운동을 벌인 고() 박창암 장군.

 이유립 선생이 타계한 후인 1987년에 출간된대배달민족사’(5).

 치우를 엠블럼으로 한 대형 깃발을 내세운 붉은악마 응원단.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등에 실려 있는 가림토 문자. 원시 한글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의 이름을 추모로 밝히고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환단고기를 전한 이유립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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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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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과거 역사적으로 여러번 따먹힌 것은 늘상 일본침략에 대한 무반응과 비웃음이였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정부나 국민들에게 '일본이 침략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다' 라고 하면 다들 한심한 놈, 또라이, 정신나간 놈 취급을 받는 것이 한국이다. 그러면서도 여러번 린치를 당해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한국은 일본에게는 참 너그럽다. 이유는 우리사회에 너무 밀접하게 뿌리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 침략으로 인해 사회의 계층, 병폐가 아직까지 곪아 썪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다.

현재 천왕(賤王)과 이성잃은 총리가 하는 발언을 보고, 일본 정치인들의 태도를 보면 과거 조선시대 때와 매우 흡사하다.

 

 

[3번째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도 있는 범죄국가]

 

일본 또 침략전쟁을 그래서 다시 하겠다는 것인가?

 

천한 발언을 하는 천왕과 이성을 잃은 총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엎드려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범죄행위를 해놓고도 전쟁심판으로 사형을 안시켰더니 그것도 입이라고 범죄자가 오히려 피해자에게 적반하장 패륜 발언으로 일본과 한국 국민들의 갈등을 조장하는 범죄정부로 전략하고 있다. 범죄정부로 전략하면, 자기들 주장에 반하는 국가는 모두 적이된다.

 

 

                [일본은 정치인들이 바뀌어도, 국가 100년 시나리오데로 움직인다]

 

일본은 지금의 과오로 그 나라 스스로 패망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일본을 패망시키기 위한 100년 계획을 세워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기적 전략과 계획은 여야간의 당파싸움을 초월하는 내용으로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성공하는 대한민국으로 가기위한 필수 지침서이다. 이 대한민국의 미래 비젼과 전략, 계획없이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험난한 바다가에 지도한장 없이 파도를 향해 나아가라는 것과 똑같다.  

이 참에 일본을 한국이 접수하고, 만주와 간도지방도 한국이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모든 정치인들이 갖게끔 대통일대한민국 시나리오를 정비해야한다.

일본은 스스로의 나라를 패망시키고 한국이 통치해주기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아무리 외교력을 남발하고 현재 외교력으로 이득을 보는것 같지만, 국제사회도 그것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현재 이득이 되기에 수용하는 것이다. 국제사회도 버드나무 잎새귀처럼 그 태도는 수시로 바뀐다. 현재의 상황 이후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대통령 한번 대강해먹고 나는 모른다고 퇴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잘하면 또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하는 미국과 같은 대통령 4년 5년 연임제 도입이 대한민국 발전에 필요하다.

강한자에게는 꼬리 내리고, 약한자에게는 도발하는 그 습성을 영원히 버리지 못하는 이중인격자 정신으로 일본은 다시한번 부활하고 있다.

욱일승천기가 세계인들에게 큰 결레가 되는 것을 전혀 간섭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본 스스로가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그마한 섬나라가 세계에 우리는 전범국가가 아니고 세계를 발전시킨 근대화 시킨 해가뜨는 나라라고 선포하는 어떻게 보면, 세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무대로 전략한 올림픽, 올림픽이 이제 전에 비해서 가치가 크게 훼손되어졌다. 우리나라의 대응전략도 한심하다. 욱일승천기로 깨끗한 스포츠정신을 그리고 있는 올림픽에서 그 깃발을 흔드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 패권에 대한 정치적 홍보를 건전한 스포츠행사를 버리는 행동이라는 것을 IOC에 문제제기를 이웃나라들과 강하게 해야한다. 그러나 바쁘고 귀찮다고 정부는 가만히 있다. 조금 있으면 정권이 바뀌니까 굳이 나설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침략 제국주의 시절의 깃발을 부활시킴 - 독일이 나치깃발 들고 나오는거와 같음]

 

 

대마도, 일본, 쿠릴열도, 센카쿠열도, 댜오위다오 등으로 일본은 과거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 않고, 또한번의 분쟁이 전쟁이 되더라도, 군국주의로서의 이행을 하겠다는 결의는 그들 나라의 100년, 아니 1000년 시나리오인 것이다. 몇백년이 지난후에는 미국의 하와이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것이다. 그 근거는 자기들이 2차 세계대전때 진주만 공습으로 하와이 땅을 점령했다고 지금과 같이 떠무니없는 논리로 우길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 일본은 국가의 패망 아니면, 그냥 막나가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해양영토와 일본의 해양영토]

 

일본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 나라가 패망할때까지 절대로 반성과 사죄는 없다. 단지, 자신들의 나라가 누군가에게 먹혀야 이 문제는 끝난다.

한일전쟁을 대비하자! (전쟁이라니까 총을 드네 --; 사이버 및 경제, 외교, IT전쟁이 더 무서운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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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지금 종북논란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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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악마의 전자발찌는 발목에 찬 목욕탕 열쇠고리에 불과했습니다."

22일 오후 7시쯤 서울 중랑구 면목동 아파트에서 만난 박귀섭(39)씨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이틀 전 전과 11범의 성범죄자 서진환(42)에게 살해당한 아내를 납골당에 안치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그는 "그런 악마가 전자발찌를 차고 돌아다니는 걸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 있느냐. 우리나라가 썩었다, 정말로 썩었다"면서 흐느꼈다.

―서진환의 전자발찌는 아무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차를 타고 제주도를 가든, 칼 들고 옆 동네를 오든 위치만 파악하는 수준 아닌가. 사람이 죽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서진환은) 발찌를 액세서리로 생각한 거다. 발목에 차는 목욕탕 열쇠고리라고. '잡히면 교도소에 가면 된다'고 했다지 않은가."

―변이 생긴 것은 언제 알았는지.

"아이들 유치원에서 '당신 아내가 칼에 맞았다'고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누구와 싸워서 칼에 찔린 줄만 알았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다. 지하철을 타고 병원까지 가는데, 자리가 비어 있어도 앉을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쏟아졌다. 미친 듯이 뛰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미안하다'고 하더라. 아내는 어찌나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서 목이 보이지 않았다. 형사가 '강간범이 들어와서 살해했다'고 하는데 무슨 소릴 하는지 웅웅거렸다. 장인어른이 연로하셔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 전화 걸어서 그 안 들리는 양반에게 '아버지, ○○이가 죽었습니다. ○○이가 죽었습니다'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본 것은?

"우리는 매일 저녁 식탁에 네 식구가 모이는 그런 집이었다. 그날은 마침 회의가 있어서 오전 5시 30분쯤 아이들이 깰까 봐 몰래 일어났다. 자고 있던 아내가 '지금 갈 거야?'라고 물었다. 그렇게 나왔는데…. 마지막 모습이었다."

지난 20일 전과 11범 성범죄자에게 살해당한 주부 이모씨의 남편 박귀섭씨가 22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 한 아파트에서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심경을 털어놓고 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나?

“같은 직장에서 우연히 알게 돼 2007년 결혼했다. 서글서글하고 참 밝게 웃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되겠다, 평생 같이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내가 참 겁이 많아서 벌레가 들어와도 ‘좀 잡아달라’면서 기겁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악마가 칼을 들고 와서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찍고, 수십 번이나 가격하고 칼로 찌르고. 도대체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그런 생각이 가슴을 친다. 살 수가 없다. (가슴을 치면서) 여기가 지금 아예 없어진 것 같다.”

―범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꼭 한마디 해주고 싶다.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 전과 11범? 12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줬겠나. 고통을 주는 법만 알았지, 이런 고통을 당해본 적이 있겠는가. 성폭행이라는 거 당하면 온 가족이 고통받는다. 가족이 고통받는 세월을 합하면 몇 백년은 될 거다. 서진환은 우리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줬다. 꼭 고통스럽게 죽으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뉴스를 보면 만날 제2의 김길태, 제2의 강호순 떠드는데 그런 악마들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아내가 뉴스 보면서 ‘엄마 없는 아이들은 얼마나 불쌍할까. 나는 저렇게 키우지 말아야지’ 그런 말도 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한 주 전에 안면도에 휴가를 다녀왔다. 온 가족이 함께 떠난 첫 여행이었다. 술을 못하는 아내가 기분이 좋아서 한잔하기도 했다. 내년에도 휴가를 오자, 그런 이야기 하며 아이들과 함께 한참 웃었다. 그렇게 행복했는데, 악마가 칼을 들고 우리 집 안방에 들어오리라는 생각을 어떻게 했겠나.”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있나.

“이런 참담한 일을 어떻게 말 할 수 있겠느냐. 아내의 관이 화장될 때 36개월 된 막내딸을 안고 ‘엄마 하늘나라 간다’고 하니까, 그 어린 게 뭘 아는지 막 울었다. (엄마의 관이) 들어가고 사람들이 다 나왔는데도, 딸은 ‘저길 가자, 저기, 저기 ’ 하면서 계속 울었다. 그래서 다시 데려가니 ‘엄마 이 안에 있다. 엄마 이 안에 있다. 엄마 이 안에 있다’ 그러면서 또 울었다. 아이 마음을 딴 데 돌려보려고 장난도 치고 해봤는데…. 앞으로 이 아이들 어떻게 키우느냐. 막막하다.”

―범인은 현재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한다. 그럼 아내가 죽은 나는, 엄마가 사라진 유치원 다니는 우리 딸아이의 인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런 악마에게 얻어맞고 죽은 우리 아내는 그럼 뭔가. 이 나라는 어떻게 사람을 죽인 사람만 인권이 있는가.”

 

 

 

 

 

 

 

성폭행범이 자기의 성적만족을 위해서 살인까지 한다면, 보통 사회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전자발찌는 다 걷어내고, 화학적 약물 주사로 왕성한 성욕을 낮추어 보통인간으로 살아가게 해줘야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할 수가 있다.

전자발찌는 사건전에 예방을 위해서 도입되었지만, 시행후 결과를 보니,

사건후 사건처리용밖에 제 역할을 못한다. 성폭행범이 법이 무서워서 성폭행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발찌로는 해결이 안된다.

보통 초등학교때 예방접종 주사 맞듯이, 인권 왈가왈부 하지말고,

이제 화학적 약물주사를 본격 시행하여, 가해자와 피해자 서로에게 일상생활에 도움을 서로에게 줄수 있는 길로 나서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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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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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 수중에 넣은 도서목록

 

노무현대통령연설문집 1~5

르네젤러의 쌩떽쥐베리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리영희평전

장준하문집 1권 민족주의자의 길

장준하문집 2권 돌베개

장준하문집 3권 사상계지수난사

안철수의 생각

주기자

국민판사 서기호입니다.

조경태의 지역주의는 없다.

조경태 세상과의 소통

돌아오지않는 다리에 서다 -박희도-

미쳐야 미친다 정민-

버리고 떠나기 법정 수상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유인을 위한 책읽기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라 -박영선-

안철수의 힘 - 강준만-

기타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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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쿼리는 이명박 가족 회사이다.

맥쿼리는 대한민국 사회간접자본 투자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다.

시사매거진 2580에서 '민영화로 넘겨라' 라는 방송이 나왔다.

공부를 안한 사람들은 정말 민영화로 넘겨야 좋은걸로 안다.

제목이 민영화로 넘겨라 이지, 실제 민영화로 넘겨야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공기업에서 민영화로 넘어온 건실한 사회간접플랜트는 투자하면 절대 안망한다.

실제 소유자는 거기에 투자한 회사가 실소유자가 된다.

땅집고 헤엄을 치면서 돈을 벌겠다는 심산이다.

대통령이 되어가지고, 나라 자산을 개인 회사의 이익 창출의 도구로 삼겠다는 발상이 1960대가 아니고, 2012년도에 통해서야 되겠는가?

이명박은 모든 건실한 공기업을 민영화하라고 지시한 상태이다.

 

수자원공사

인천공항

ktx

등등

 

그걸 민영화해야 맥쿼리가 투자할 수 있다.

특정기업에게 몰아주기를 할 수도 있다. 물론, 조건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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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가 일본땅은 일본땅인가보다.

 

대한민국에서 대마도가 한국땅이라고 하면 썰렁해진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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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사진.

 

 

 옛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의 딸 스베틀라나 스탈리나씨가 지난해 11월 22일 미국 위스콘신주 사설 요양원에서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의 딸은 죽기 전 자신의 아버지를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그 독재에 침묵했던 나는 공범자다. 아버지의 모든 과오를 안고 남은 여생을 속죄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

여기에 비교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이렇게 말했다.

"5.16 군사혁명은 구국의 결단이었으며 아버지의 올바른 결단이었다. 나는 이제 대통령이 되어 아버지의 유업을 이 땅에 다시 한번 이어가고 싶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딸과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에 딸 같은 상황의 다른 대답이다. 트위터에서는 스탈린의 딸과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후보를 비교하는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제헌절에 쯔음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4·19 민주정신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이 민주정신을 짓밟은건 5·16 쿠데타다. 잘못을 되돌아보지 않는 대통령은 언제든지 그들만의 '최선의 선택'으로 우리의 헌법을 짓밟을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516쿠데타,

민주화학생운동 간첩누명으로 사형선고,

통일혁명당사건,

장준하선생 의문사사건,

정수장학회 강탈사건,

박정희 정부와 기업재벌간의 부정축재,

재야 민주인사 탄압

등등

수없이 많은 리비아, 이집트, 튀니지, 시리아 에서 보여지는 군부독재 장기집권 시리즈가 다 있다.

대국민 안정을 가장한 독재 종합선물세트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들 정권으로부터, 그들 가족으로부터 죄송하다'라는 말한번 들어본적 없다.

박근혜는 모든 것에 다 정당하다는 변명만 된다.

사과, 죄송, 미안 이란 단어는 절때 쓰지 않는다. 왜? 독재자의 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인드에서 대통령이 되면, 이명박과 도찐 개찐이다. 오십보 백보란 말이다.

 

 

 

[ 성숙된 대한민국 국민들이 생각하는 대통령의 자격]

1. 밑바닥부터 고생을 해봐야 정치를 아는 것이고,

2. 연예를 해봐야 자기의 실체와 자신의 본능적 본질을 아는 것이다.

3. 군대를 가봐야 조직과 시스템을 안다.

4. 남도움 없이 혼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스스로 자수성가해야 연민을 알고,

5. 부정부패와 부정탄압에 맞서 최루탄은 안먹어봤어도 항거는 해봤어야 참된 정치가 나온다.

6. 1만권 목표의 독서량을 가져서, 남이 써준 시나리오나 읽는 형태의 연설보다는 즉흥적이지만 논리적, 설득적인 입담을 가진 사람만이 대통령 자격이 있다.

7. 정치생활을 하면서 공공의 이득이 되는 공적과 업적이 있어야 한다. (자기 당 이익을 위한 업적은 아니다.)

8. 땀흘려보는 막노동 경험은 꼭 있어야 하고, (신이 주신 신성한 노동의 댓가를 알아야 한다.)

9. 자식과 어린 애기를 키워봐야 한다.

10. 봉사활동, 사회기부, 재산기부, 무보수헌신활동은 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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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검색어 조작의 대명사!

네이버 정권의 하수인

 

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포털이 이제 제대로 철이 들려고 한답니다.

그것도 형제들(다음, 네이트 등) 덕분에 그렇게 철이 들려고 한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지는 가봐야 합니다.

 

 

 

 

네이버와 다음, 야후 등 국내 주요 포털업체들이 연관 검색어나 자동완성 검색어를 인위적으로 생성하거나 조작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국내 주요 포털을 회원으로 보유한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는 지난달 25일 정책회의를 열고 회원사들 검색어 서비스에 대한 새 공통 운영 기준을 마련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기준에 따르면 주요 회원사들은 앞으로 연관검색어와 자동완성검색어를 인위적으로 생선하거나 변경해서는 안된다.

또 해당 검색결과가 특정인을 식별하는 개인정보를 노출하거나 공공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허위사실을 게재해 피해자가 삭제를 요구한 경우, 법원의 결정 내려진 경우 등 7가지 경우가 아닌한 삭제나 제외할 수 없게 된다.

회원사들은 그동안 회사별로 기준이 달랐던 삭제 및 제외기준을 이번에 통일했다.

이번 조치는 일부 주요 포털업체들이 검색 결과를 용이하도록 관련 단어를 함께 보여주는 연관검색어를 임의 조작했다는 항간의 의혹을 불식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네이버는 지난달 새누리당 정우택 최고위원과 관련된 주요 검색어가 보이지 않는다며 일부 사용자들에게 검색어 조작 의혹을 받기도 했다.

KISO는 건강한 인터넷 생태계 유지를 목표로 출범한 비영리 민간기구로 다음커뮤니케이션과 야후코리아, NHN, KTH SK커뮤니케이션즈 등 국내 주요 포털 업체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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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 가진 첫 연두 기자회견(1949년 1월7일)에서 “대일(對日) 배상 청구는 임진왜란 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섬 곳곳에 항일 의병 전적비

더 의미 깊은 증언도 있다.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 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다. 대마도의 일본명인 ‘쓰시마’의 유래와 맞물려 깊이 살필 만한 증언이다.

모든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연원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동쪽의 서울’이란 뜻을 가진 도쿄(東京),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결의를 담아 이름지은 ‘나라(奈良)’ 등 지명(地名)의 유래와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유독 ‘쓰시마’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유래를 찾지 못해왔다.

‘쓰시마’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됐는지, 일본 학자들도 답을 찾지 못하던 수수께끼를 쾌도난마로 풀어낸 사람은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였다. 원래 영문학자였지만, 차음(借音)문자인 향찰로 쓰인 신라시대 향가 연구와 해석을 일본인 학자들이 도맡아 온데 분개하며 향찰 연구로 방향을 튼 분이었다.

'두 섬'의 일본식 발음이 '쓰시마'

양 교수는 “쓰시마의 뜻풀이는 복잡할 게 없다. 한국어의 ‘두 섬’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한 것뿐, 대마(對馬)라는 한자는 아무 뜻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차음”이라고 딱 부러지는 설명을 내놨다. 이 해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라고 언급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유서 깊은 일본 도시 ‘나라’와 마찬가지로 ‘쓰시마’도 한국어에서 유래됐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한국의 옛 조상들은 지명을 외형적 특성을 살려 지은 경우가 많았다.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련의 섬들을 ‘어떤 때는 다섯개로, 때로는 여섯개로 보인다’고 해서 ‘오륙도’로 이름붙인 식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섬을 같은 방식으로 ‘두 섬’으로 부른 게 ‘쓰시마’로 둔갑했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대마도가 왜 한국 땅인지를 이런 식으로 파고들면 끝이 없지만,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어쨌건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섬이기에 그렇다. 유사 이래 한국의 땅이었고, 지금도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에 대해 일본이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 한국경제 http://news.hankyung.com/201208/2012081637801.html?ch=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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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 선거인단모집을 지금 모집중이랍니다.

 

1688-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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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은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한 분이다. 국가가 국민을 솎이고 있는 내용등을 소상히 사실데로 글로 써서, 국민들을 깨우치는 신문도 발행하고, 여러 활동을 하다가, 빨갱이로 몰리고 좌빨이라고 손가락질도 받게 하고, 평소 평탄한 삶은 애초부터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장준하 선생이 어느날 우연찮게 등산을 하다가 발을 잘못 딛여, 실족사 했다고, 박정희 군사정부는 그렇게 언론에 보도해버렸다.

국민들은 소중한 목숨 그냥 생매장 된줄 모르고, 그렇게 잊혀졌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과 끄나풀들은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쳤던 것이다.

그의 자식들이 이번에 묘를 이장하면서 유골을 검시해보니, 타살 증거가 확실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박정희가 쿠테타로 나라를 쟁취하고, (군부의 힘을 빌려 강제적으로 하극상)

국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무리, 북한하고 대치를 하기위해서는 군사정권이 필요하다고 합리화한다고 해도,

사람을 죽여가면서,

언론을 장악하고,

독재정치에 부당성을 알리는 시위나 행동를 하면 무조건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으로 몰아서 사형시키고,

판사와 검사, 경찰들을 모두 대통령의 입맛데로 조종하고,

독재폭압정치를

단 한번만 했다고 하더라도

그 정권은 패륜아 정권이 되는것이다.

저 이집트나 리비아, 시리아처럼 민주화운동을 하는 시민을 죽이는거와 똑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과거 독재정권에 항거하듯이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 시리아 등등 우리의 전처를 밟는 단계이다.

그들 국민들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불쌍하게 보고 있지 않았던가?

 

얼마전 연쇄살인범이라고 잡힌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와 아동성폭행살인범인 김길태, 김점덕 등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평소 그들은 친절한 이웃이고, 삼촌이고, 친절하고 인사성 밝은 젊은이였다.

착한일도 많이 해서 실제 연쇄살인범이라고는 도저히 못믿는다는 이웃들의 반응이였다.

그래도 그들은 평소 좋은일을 많이 했어도, 한번 살인으로 살인범은 살인범이다.

박정희도 독재살인범이다. 아니,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다.

지금의 중동지방이라면 카다피처럼 능지처참당할 수 있다.

 

1975년 8월22일 5일장으로 치러진 장준하 선생 장례식에서 영구 행렬이 김수환 추기경의 추도를 받으며 명동성당을 떠나고 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장준하 선생 두개골서 6cm 뻥뚫린 구멍”…타살 의혹 재점화

 


추모공원 이장 과정서 유골 첫 검시…머리뼈도 금가
서울대 법의학 교수 ‘인위적인 상처로 보인다’ 1차 의견
장선생 아들 “귀 뒤쪽 망치같은 것에 맞아 함몰흔적”

유신 시절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다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고 장준하 선생에 대한 검시가 숨진 지 37년 만에 처음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머리 뒤쪽에 6㎝ 정도 크기의 구멍과 머리뼈 금이 발견돼, 검시한 의사가 ‘인위적인 상처로 보인다’는 1차 의견을 냈다. 장 선생이 숨진 1975년 당시 검찰은 ‘등산중 실족에 의한 추락사’라고 발표했으나, 재야 및 야권 인사들은 ‘정치적 타살’이라고 주장해왔다.

14일 장준하 선생 유족과 장준하추모공원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된 장 선생의 유골을 지난 1일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 조성중인 ‘장준하공원’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골에 대한 검시가 이뤄졌다. 장 선생의 주검은 사망 당시 간단한 검안만 실시된 뒤 서둘러 매장됐으며, 본격적인 검시가 이뤄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검시에는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선생의 아들 장호권(63)씨는 “과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유골 감정 등을 검토했으나 ‘두 번 죽인다’는 반대 여론 때문에 못하다가 묘를 이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검시가 이뤄졌다”며 “검시 결과 오른쪽 귀 뒷부분 후두부에 망치 같은 것으로 맞아 동그랗게 함몰된 흔적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는 “실족 등 자연적인 사고로는 발생할 수 없는, 인위적으로 만든 상처인 것으로 검시한 의사가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장씨는 이어 “하지만 정치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므로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념사업회가 17일 장준하공원 제막식 때 공식 발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장준하추모공원추진위원회 김종래 사무총장 등 관계자들도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검시한 결과, 오른쪽 귀 뒷부분에 6~6.5㎝가량 원형으로 뻥 뚫린 흔적과 45도 각도로 머리뼈에 금이 간 게 발견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71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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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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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지지율을 기반으로 18대 대통령을 노리고 있는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지만 초조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박 전 위원장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의혹 제기에 대해 법적 대응을 불사하는 등 갈수록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신에 대해 공세를 높이거나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은 물론이고 야당대표와 기자 등 에게도 소송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갖가지 흑색선전과 루머들이 기승을 부릴 조짐이 보이자 아예 박 전 위원장 캠프 측에서는 "근거없는 네거티브에는 소송취하 없이 끝까지 갈 것"이라며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대선을 앞두고 저질적이고 근거없는 네거티브 공세를 차단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박 전 위원장의 고소 퍼레이드를 두고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는 '고소공주'라는 비아냥까지 들리고 있다. 박 전 대표의 법적 대응은 과연 정당방위일까.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재갈 물리기'의 의도는 없는 것일까.





감히 내게 '디스'를? 박근혜 전 위원장의 고소 퍼레이드를 두고 정치권의 시각이 그다지 곱지 않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7월 29일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내 예맥아트홀에서 열린 '3040 정책토크 함께'에 참석한 박 전 위원장은 뼈 있는 발언을 했다. '동료 정치인들 중에서 꿀밤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정치인이 있는가'라는 복불복 퀴즈 질문에 "꿀밤보다 더 심한 거, 한 대 딱 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느냐"고 대답한 것이다. 웃음 섞인 발언이었지만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자신에 대해 비방 수위를 높여가는 정치인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박 전 위원장은 자신에게 불편한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법적 대응으로 응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이 다가옴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때문일까. 최근 들어서는 그 강도가 더욱 심해진 느낌이다. 박 전 위원장의 태도를 보면 '꿀밤' 정도가 아니다. 미확인 루머는 물론이고 의혹을 제기한 이들에게는 가차없이 고소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 원내대표.

박 전 위원장의 본격적인 고소행보에 물꼬를 튼 사람은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였다. 박 전 위원장은 5월 21일 자신과 부산저축은행 로비스트 박태규 씨의 만남을 주장하는 박 원내대표를 허위사실 유포에 인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박 원내대표가 "박 전 위원장이 박태규 씨와 여러 차례 만났는데 이 만남이 저축은행 로비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의혹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즉각 반응한 것이었다. 이에 박 원내대표도 사흘 후 박태규 씨와의 연루설을 주장한 친박계 측근 2명을 고소, 일명 박태규 회동설을 둘러싼 양측의 치열한 진실공방이 불가피해졌다.

대선가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박 전 위원장은 강경대응을 이어 나갔다. 박 전 위원장은 확실히 뿌리를 뽑으려는 듯 박태규 회동설을 주장한 인터넷 방송 < 나는 꼼수다 > 의 출연진 김어준, 주진우 씨와 박태규 씨의 측근인 A 씨 등도 무더기로 고소했다. 나꼼수는 5월 초 방송에서 박태규 씨의 측근 A씨의 육성증언을 토대로 박 씨와 박 전 위원장이 만났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결국 5월 22일 민주통합당 이규의 수석부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박 전 위원장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박 전 위원장이 정치적 공세에 대한 차단책으로 고소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등 도를 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부대변인은 "정치적 의문의 표시가 검찰 고소로 이어지는 것이 박 전 위원장이 강조해온 법치인가 묻고 싶다. 이러다 박 전 위원장에게 '수첩공주'에 이어 '고소공주'라는 새로운 별칭마저 생길 것 같다. 아마도 고소공주라고 했다고 이마저도 고소할 듯싶다"고 비꼬았다.

문제는 박 위원장의 강경대응이 정치인들이나 일개 개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 전 위원장은 자신을 겨냥한 언론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 미디어오늘 > 은 6월 18일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은 청와대에 남아있던 불법적인 자금인 이른바 '통치 자금' 중 현재 시가로 수백억 원에 달하는 돈을 박근혜에게 줬다고 했다"는 내용이 담긴 이상호 MBC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역시 박 전 위원장 측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박 전 위원장의 비서실장 출신인 이학재 의원은 같은 날 자신의 트위터에 "금일 모 언론에 게재된, 박근혜 대표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고, 불법통치자금 수백억원을 받았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며,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하는 기사이므로 해당 언론사에 정정을 요구하였고 법적인 조치도 검토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박 전 위원장의 고소는 해외 소재한 언론사를 상대로도 이어졌다. 7월 26일 박 전 위원장은 고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 숨겨둔 자식에 대한 루머 등이 담긴 기사를 보도한 < 선데이저널USA > 의 기자 등 2명을 고소했다. 현재 < 선데이저널USA > 홈페이지에는 문제의 기사가 삭제됐지만 박 전 위원장의 동생 지만 씨도 '19대 총선 공천에 박 씨가 막후 실세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육영재단 분쟁 중 5촌 형제들의 살인사건에 관여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이 매체를 지난 5월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해 수사가 진행 중이다.

박 전 위원장을 지칭해 비방한 인터넷 언론사 대표도 가차없이 응징을 당했다. 박 전 위원장 측은 지난 7월 초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언론사 게시판 등에 박 전 위원장을 지칭, 북한에서 성접대를 받았다는 글을 네 차례 게시한 오 아무개 씨를 고소했고, 최근 오 씨는 구속됐다.

추가 고소도 예고돼 있다. 박 전 위원장 캠프 측은 '출산설'을 제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에게도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다.

문제는 이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박 전 위원장의 고소행보를 지켜보는 정치권의 시각이 그다지 곱지 않다는 점이다.

야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건 털끝만 건드려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 아닌가. 누가 겁나서 입이라도 뻥긋하겠나"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다.

여권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여당 한 관계자는 "나라를 끌고 나가겠다는 사람이 복장 터지고 억울한 소리 좀 들으면 어떤가. 듣기 거북하거나 껄끄러운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네거티브 운운하며 고소고발 해대면 누가 좋아하겠나. 그런 점들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신공포정치에 대한 두려움을 안기고 유신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박 전 위원장의 고소 퍼레이드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 사실 이는 박 전 위원장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법무법인 한별의 김용원 변호사는 정치인들의 고소 남발이 너무 심하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출간한 자신의 저서 < 천당에 간 판검사가 있을까 > 라는 책을 통해 판검사들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반대파를 물어뜯는 동물농장의 개들'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정치인들의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명예훼손 관련법규가 잘못돼있기 때문이다. 공인에 대해 진실을 얘기해도 명예훼손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당한 비판이나 순수한 의혹제기에도 재갈이 물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나라는 없다. 악의적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했을 경우에만 명예훼손이 성립되도록 법 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이 가까워 올수록 박 전 위원장에 대한 공세 수위가 높아질 것은 불보듯 뻔하다. 박 전 위원장의 과도한 '꿀밤 놓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박 전 위원장 측에서 네거티브 공세에 현재와 같은 강경 대응을 고수할지도 주목되고 있다

 

 

[출처 : 일요신문] 

 

 

 

박근혜,

고소의 여왕 등극

대한민국 대통령을 하겠다는 분이, 양민들을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무차별적 고소!

국민들이 보기에는 눈쌀 찌푸릴정도로 심한 상태

사실이듯, 사실이 아니듯 표현의 자유는 잊지 않은가?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면,

문재인과 박근혜의 대결에서 얼마전, 박정희가 독도를 폭파하겠다는 발언을 한것을

박근혜는 사실이 아니다. 명예훼손으로 문재인을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문재인은 증거를(미국비밀문서) 제시했고, 박근혜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해당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고소보다는 관련 증거로 설명을 하거나 설득을 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전혀 없다.

박근혜는 무조건 입을 다문다. 그리고 말이없다. (평소 난 항상 더 큰것만 바라보고 있다는 듯 설정한다.)

그냥 협박과 겁을 준다. 너 한번 고소와 소송으로 마음고생 당해봐라.

이 부분은 이명박과 같다.

ㅎㅎㅎㅎ

박근혜 曰 "말이 필요없어 무조건 고소로 집어 쳐넣어요! "

이런것도 아부지 영향을 받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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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한민국을 (노)怒래한다

 

1.가혹하고 이기적인(이정열)

(용산참사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2.사람이 사람으로(한동준,김영국)

(이세상 소외받는 서민들-비정규직,소외되는 소시민-을 위한 노래입니다)

 

3.빈 둥지(폰부스)

(입시에 찌들린 학생들과 맹목적으로 사교육시장에 목얽매어야 하는 그들의 가정에 대한 노래)

 

4.흐르는 강물처럼(오소리)

(4대강개발에 관련한 우리 서민들의 느낌을 표현한 곡)

 

5.a monster(블랙신드롬)

(거대 언론의 여론 장악에 대한 우려를 표현)

 

6.이상한 나라(The Bird&앨리스)

(무언가 이상한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곡)

 

7.거짓말 또 거짓말(시베리안허스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그들의 입장)

 

8.mute(Zeenan)

(오늘날 일부언론의 가치관에 정직한 여론이란 없는것이다)

 

9.포기할 수 없는 신념(봉니나)

(무기력한 세대들에게 신념을 바탕으로 우리들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10.콘크리트 버블(김우섭)

(부동산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과연 어떨까..?)

 

11.흐르는 강물처럼 ver2.01(시민가객2.01)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불리어진 곡)

 

 

 

 

(대)大한민국을 (노)怒래한다 (화나거나 혹은 슬프거나)

'밥 딜런'의 가사는 미(美)연방대법원이 판결문에 가사를 인용할 만큼 깊이 있고 철학적인 가사로 유명하다. 특히 인종차별 반대와 반전 등 정치적이고 사회성 짙은 음악을 끊임없이 발표하며 사회적 화두를 던져왔다. 브루스 스프링스턴은 노동자와 소외된 인권들의 위한 메시지를 항상 노래하며 대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많은 음악인들이 자신들의 음반에 일부 수록곡으로 사회를 풍자하거나 비판한 노래는 있었지만 음반의 전 곡을 시사성이 강한 메시지로 표현한 일은 드물었다.

지난 70-80년대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는 음악인들의 저항의식이 가득한 음악과 90년대를 풍미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반에 이어서 이번에는 좀 더 강하고 혹은 대중가요적인 음반이 나온 것이다 참여하는 음악인들도 결코 낯설지 않다 한동준, 이정렬, 블랙신드롬 등등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한번쯤은 들어 봤을 만한 이름들이니 우선 기대감을 가져도 좋을 듯한 출연진이다

앨범의 수록곡들을 살펴보면 강한 락스타일의 첫 곡 ‘가혹하고 이기적인’더 클래식의 박용준 작곡, 가사는 이 음반의 프로듀서인 엄현우씨가 썼다. 노래는 현재 뮤지컬배우로 활동영역을 넓힌 가수 이정열이 불렀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인데 꽤 세련되고 강한 음악 속에 2009년 1월 20일 새해부터 우리에게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을 용산참사에 관련한 내용을 노래한다

두 번째 곡으로는 감미로운 사랑노래를 주로 불러서 히트시킨 가수 한동준씨가 소외된 서민과 비정규직들을 위한 노래 ‘사람이 사람으로’를 후배 뮤지션 김영국씨와 듀엣으로 불렀다

세 번째 곡으로는 홍대인디씬에서 탄탄한 기본기와 가창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룹 폰부스가 입시생들의 어둡고 외로운 현실과 그들 가정에 대한 애환을 노래했다.

그 외에 4대강 개발에 관련한 서민들의 느낌을 표현한 ‘흐르는 강물처럼’, 거대 방송권력의 왜곡된 시선을 노래한 ‘a monster’, 부동산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콘크리트버블’ 등 이 음반에 수록된 모든 곡들이 각기 다른 하나의 주제를 골라서 아픔과 분노 슬픔을 노래했다.

미국이나 영국의 음악계에서는 이런 음악의 사회참여가 비일비재하다
밥 딜런을 시작으로 브루스 스프링스턴, 트래이시 채프먼, U2, muse등 많은 음악인들은 항상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대중들은 그런 그들에게 열광했다. 부조리하고 상식에 어긋난 현실에 대한 일종의 견제역할로서 음악은 아주 훌륭한 창구였던 것이다. 이 음반에 참여하는 많은 뮤지션들이 그런 의미로서 한군데 모인 것이다. 프로듀서 엄현우씨의 기획 아래 다소 험난한 길이 될지라도 문화적 의견 표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지금, 보다 더 건강한 대한민국이 될 거라는 확신에서 작업한 그들의 노래와 메시지는 대중들에게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1. 가혹하고 이기적인 (이정열)
2. 사람이 사람으로 (한동준,김영국)
3. 빈 둥지 (폰부스)
4. 흐르는 강물처럼 (오소리)
5. a monster (블랙신드롬)
6. 이상한 나라 (The Bird&앨리스)
7. 거짓말 또 거짓말 (시베리안허스키)
8. mute (Zeenan)
9. 포기할 수 없는 신념 (봉니나)
10. 콘크리트 버블 (김우섭)
11. 흐르는 강물처럼 ver2.01 (시민가객2.01)

 

 

 

노래 정말 좋습니다. 추천드립니다.

재즈, 락, 발라드, 메탈, 얼터너티브 등 다양한 장르 다 있습니다. 한 앨범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취할수 있습니다.

맛배기 듣기 가능합니다. 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199337

 

- "가혹하고 이기적인" 노래 정말 좋습니다. 러시아의 빅토르최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 "A Monster" 노래도 기가막힙니다. 이런 멋진밴드가 이곳에 참가를 했군요. 카리스마가 음악에서도 풍겨나옴

- 아침이 오는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  너를 사랑해를 부른 한동준씨도 참가

- 콘크리트버블을 부른 김우섭씨 목소리는 문득 신승훈이 생각나더군요.

- "흐르는 강물처럼" 기타 인트로가 참 기가막힙니다. 전체 연주실력이 이제 미국도 안부러울만큼 아주 환상적입니다.

-  퓨전재즈의 달콤한 연주가 일품인 "이상한 나라" 재즈풍 가득한 섹스폰연주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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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현재 국민들의 지지율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수 없다.

지지율이 곧 득표이기 때문이다.

안철수가 국민들의 뜻을 묻고싶은 내용은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민주통합당에 입당해서 곧 선출될 대선후보와 안철수가 최종 경선을 통해서 대선후보로 나오는 길

 

2) 강기갑, 유시민, 심상정, 노회찬이 새로운 신당을 창당할때 함께 창당해서 대선후보로 나오는 길

 

 

현실적으로 가능한 두 방법중에서 국민들의 뜻은 어떠한지 안철수는 국민들에게 묻고자 한다.

국민들은 올바른 판단과 합리적인 의견으로 신속히 뜻을 전달해줄 필요가 있다.

안철수는 국민들이 바라는 뜻으로 움직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문재인이 이번에 대통령이 되고, 안철수는 차기대통령으로는 확실하다.

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 생각하면 대한민국입장에서는 발전적· 거시적안목으로 위대한 투자이다.

반드시 성공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문제는 위에 1번, 2번에 대한 과정으로 야기되는 결과이다.

그가 2번의 길을 선택한다면,

아마도 아래와 같은 시나리오도 예상할 수 있다.

 

 

 

1)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

2) 안철수가 대선후보로 등장

3) 민주통합당과 新진보당이 대선승리를 위해서 대선 후보 단일화

4) 연합 정부 구성

5) 민주통합당과 新진보당 대통합

6) 박근혜 침몰 --> 정계 은퇴

7) 대한민국 통한의 군부, 기득, 친일역사의 종결

8) 미래로 진전하는 대한민국의 발판

9) 세계의 중심국가, IT초강대국

10) 남북대통일국가로 도약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음 정권을 맡을 대통령은 불쌍한 대통령이다.

현 이명박정부가 상당한 금액으로 부풀려놓은 대외채무금액 때문에

어떠한 눈에 보이는 국책사업을 하기가 무섭다는 것이다.

일단, 나라 빚 갚는 내실을 기하느라,

국민들은 대통령 뽑아줬더니 하는일 없이 놀고 있네? 라고 비판과 무능을 대책없이 날릴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화끈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좋아하는 가시성있는 국책사업 즉, 4대강사업, 중동 원자력발전소 차관건설 등등과 같은 무대포사업을 하지 못하면

과거 노무현대통령과 같은 처지와 같이

내실은 보지못하고, 겉만보고 역시, 뽑아줬더니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렇다고, MB 처럼 빚을 갚지 않고, 더 빚을 진다면 아주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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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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