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대한민국에는 10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현 이명박 대통령. 이 가운데 현직인 이 대통령을 제외한 9명의 전 대통령 중 재임 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까지 가장 성공적이었던 대통령을 꼽는다면 김대중이 아닐까 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학생들의 유혈 시위 끝에 외국으로 망명해 쓸쓸한 최후를 맞았고, 박정희는 18년 장기 독재 끝에 부하에게 사살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군부 출신의 전두환ㆍ노태우는 퇴임 후 재판에서 쿠데타 주범으로 처벌받는 수모를 겪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년 찾아온 IMF 외환위기로 불명예 퇴임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불과 1년여만에 자신에 대한 부패수사와 관련,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반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3번의 낙선과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숱한 고난과 곤경을 겪었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게다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는 등 성공적인 정치행로를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그리 후한 것 같지 않다. 대체로 해외에 비해 국내의 평가가 크게 인색한 데다가, 그에 대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그의 집권을 시작으로 우리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권시대 10년을 맛보았지만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난 진보개혁정권에서 이루어놓았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발전이 후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남북관계가 역행하며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정권교체가 급선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더 우선적인 과제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부였던 김대중정부의 공과 과, 성과와 한계에서 대해 이제 한번쯤 찬찬히 되짚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시안>은 이런 의미에서 김대중정부로부터 계승할 것은 무엇이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점검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정치인, 시민운동가, 학자, 문화예술인 등 각계 인사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들을 연재하는 것이다. 우선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기념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과의 인터뷰로 이 연재를 시작한다. 이 인터뷰는 지난 2월 21일 오후 김대중도서관에서 있었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맡았다.
앞으로 매주 화, 금요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회고와 평가의 글을 차례로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김대중 도서관의 내력, 그리고 '나와 김대중'
프레시안 : 올 8월이면 김대중 대통령 서거 2주년이 된다. 서거 1주년인 지난해 8월 <김대중
자서전>이 발간되면서 그의 일생이 공식적으로 정리됐지만, 아직 김대중에 대한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의 집권에서 시작된 진보개혁정권 10년 동안(1998-2008년) 진전됐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이명박 정부 이후 크게 후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김대중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그의 성취는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다시 말해 계승과 극복의 과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 인터뷰를 시작으로 각계 인사들은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우선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퇴임하면 재임시절 그의 통치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한데 모아 후세의 학자들이 그의 통치시기를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김대중 도서관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김대중 도서관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전 문화부장관 ⓒ프레시안(손문상) |
김성재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4년
설립한 '아태평화재단'(Asia-Pacific Peace Foundation)이 그 모체다. 대통령은 대통령재임시인 2002년 말,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본래의 정신에서 이 재단을 연세
대학교에 기증했는데, 연세
대학교가 이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퇴임 직후인 2003년에 대통령기념도서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살고 있는 동교동 집 외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고 했다.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내게 일임했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께서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EU 공동체와 평화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것은 그분이 평생 가지고 있던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및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방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영국에서 귀국하신 후 94년 아태평화재단을 만드신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다. 아태평화재단을 만든 재원은 대통령께서 내게 맡긴 그 재산으로 했다. 나는 그 당시 영국에서 안식년으로 연구하던 중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프리오'(PRIO, Peace Research Institute Oslo, 오슬로국제평화연구소)에 초청이 돼 1주일간 방문했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프리오는 세계적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이 세운 연구소로 평화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께 프리오에 대한 소개와 함께 프리오 같은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의 긴 편지를 썼다. 대통령은 이 편지에 대해 아주 흡족해 했다. 대통령께서 구상한 것에 내가 조금 도움을 드린 것이다. 아태평화재단은 처음에 동교동의 한 빌딩에
임대해서 있다가 김대중대통령 사저 바로 옆에 건축되었는데, 이 자리는 중앙정보부가 김대중대통령을 비밀리에
감시하던 안가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연세대학교가 기증받은 건물을 김대중도서관으로 개관하자 매우 기뻐했고, 당신이 애장했던 1만 3000여 권의 도서와 일생동안의 정치활동, 대통령재임시 통치 메모,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민주화와 평화통일 관련자료 10만 여점과 노벨평화상 상금 중 3억 원도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대통령 기념도서관 겸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프레시안 : 김대중 도서관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는가?
김성재 : 김대중도서관은 민주주의, 평화, 빈곤퇴치의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김대중대통령이 퇴임 후 계속 활동한 일들이기도 하다. 김대중도서관은 이 목적을 가지고 크게 다섯 가지
사업을 한다. 첫 번째는 미국의 전직대통령들 기념도서관처럼 전시관을 만들어 김대중대통령의 일생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다.
출생에서 서거까지 모든 사적 자료와
문서,
사진, 영상 자료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 평화통일 관련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두 번째는 국내외에서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 관련 사료를 발굴, 수집하고,
해제, 연구하며, 중요한 인사들의 구술사
프로젝트도
수행한다. 세 번째는 도서관 목적에 따른 주제별 연구를 국내외 학자들과 함께 한다. 그리고 국제교류와 학술
심포지엄 및
세미나도 한다. 네 번째는 교육 과정인데, 미국의 케네디 스쿨과 같은 학술연구 및
교육과정으로 김대중평화아카데미 과정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고, 연세대 통일연구소와 협력하여 평화통일 관련 석박사 과정도 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지속적으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도서 및 자료를 출판하는 사업을 한다.
프레시안 : 김성재 관장과 김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은?
|
▲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한국신학대학의 명예학장인 장공 김재준목사님이 위원장이었고 김대중의원이 신민당 대표로 참석을 했다. 나는 학생회 대표였지만 이 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고 김재준목사님을 도우면서 김대중의원을 알게 됐는데 개별적인 만남은 없었다. 김재준목사님은 당시 김대중의원을 높이 평가하면서 '김대중선생은 훌륭한 정치인이니 자네들이 민주화운동을 할 때 김대중선생을 도우라'고 했다.
이후 나는 1971년 대선 때 김대중후보를 위해 부정선거를 막는 표지키기 참관인 운동을 주도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신구교 합동으로 드린 3.1절미사에서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을 준비할 때, 나는 문익환목사님 등 재야인사와 김대중대통령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연금 상태였고, 또한 이 일은 비밀리에 성사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복'이라는 암호를 가지고 연락했다. 예를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성명서 초안이 완성되면 '한복이 다됐다'고 연락하는 식이었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내가 교수로 있던 한신대에 김대중대통령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했었다. 1987년 김대중대통령께서 평민당을 만들 때는 나에게 정계에 입문하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이후에도 두 번 전국구 의원을 하라고 기회를 주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부터 사회복지와 교육 분야 등의 사회정책 자문역할은 계속했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고, 문화부장관도 했는데.
김성재 :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대통령자문새교육공동체위원회 상임위원과 일본 대중문화개방 등의 문화정책 자문을 위해 문화관광부자문위원장을 했다. 99년에 국민여론 수렴과 개혁 그리고 공직기장을 위해 신설된 민정수석을 했고, 2000년에는 정책기획수석을 했다. 정책기획수석은 인사, 예산, 정책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는데, 대통령께서 개혁적인 국정수행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했다. 이 때 대통령의 뜻을 따라 정보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고, 국민기초생활보장 등 인권에 의한 국가복지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학술진흥재단이사장을 하다가 문화관광부장관을 했다. 김대중대통령 재임 5년 동안 함께 일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프레시안 : 김 관장은 40년 이상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아 왔고,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내각에도 있었으므로, 그를 매우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겠다. 김대중은 해방 이후 최초의 수평적 권력 교체를 이뤘고,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했으며, 또 최초로 정권을 재창출한 대통령이다. 이 정도면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나?
김성재 : 정말 성공한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과 함께 성공했고, 대한민국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이것을 나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국가부도사태의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국가, 세계 최선두 정보화와 세계10위권 경제발전, 복지국가와 문화국가, 6.15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남북화해협력과 자주적 국제외교, 노벨평화상 수상 등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전세계가 감탄했다. 국민들도 역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고 박수를 보냈다. 지금 이명박정부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를 역주행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다시 방향을 전환할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맛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바람을 보라. 역사는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고, 경제가 발전하고, 인권으로 복지를 보장받고, 남북의 갈등이 고조되어도 평화롭게 살고, 국제사회 주변국에서 중심국으로 위상을 높이고, 우리 국민들이 세계에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국민들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프레시안 : 오랫동안 김 전 대통령을 봐 왔는데, 김대중 리더십,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나?
|
▲ 5번의 죽을 고비와 20여 년 간의 투옥, 망명, 연금의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분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투철한 신념과 의지를 말하고 싶다. 본래 김대중대통령은 본인도 그렇게 말했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5번의 죽을 고비와 20여 년 간의 투옥, 망명, 연금의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또한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자신을 죽이려했던 박정희,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용서하고 화해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음해한 모든 사람들도 용서했다. 햇볕정책도 이런 화해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대통령 장례식 때 장남 김홍일의원이 고문 후유증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박해는 용서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랑하는 아들에게 한 행위를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너무도 위대하다'고 추모했다. 김대중대통령은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난 직후 아들에게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으로 승리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김대중대통령이 옥중에서 쓴 메모가 있는데, 내용이 이렇다. '용서 없이는 우리 사회,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우리는 오랜 당쟁과, 식민지를 거치면서 원한이 너무 많다. 이것은 용서로 풀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똑똑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발전을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것은 우리 사회에 용서와 화해가 없으면 우리 국민과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대통령께서 서거 한 후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나는 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판했고, 나쁜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 진면목을 알게 되고, 또 여기 와서 보니 내가 (그동안) 잘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면서 더욱 존경을 표하고, 후원에 참여하는 분들도 꽤 많다.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정부에 제기됐던 비판적 지적들
프레시안 : DJ의 재임 5년간 성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관계 등을 그의 업적으로 꼽고 있다. 반면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비판이 경제 분야에서 신자유주의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부분이다. 물론 현재 상황에 대해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기는 좀 그렇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3년을 지내왔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같은 평가에 대해 어떻게 보나?
김성재 : 우리사회 양극화 문제를 잘 못 인식하는 것 같다. 우리사회를 양극화 체제로 만들고 항존하는 빈민계급을 탄생시킨 것은 박정희군사정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제발전은 박정희 대통령, 민주화는 김대중 대통령, 이렇게 얘기하는데, 절반만 맞는 잘못된 인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물론 경제개발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으로 빈민을 의도적으로 양산한 불의한 독재개발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박정희군사정권은 산업기술 집약이 아니라 단순노동집약 정책으로 수출주도형의 경제개발을 하면서 저임금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명분으로 저곡가정책을 했다. 저곡가정책은 농민을 빈민으로 만들었다. 빈민이 된 농민은 농토를 버리고 서울과 공업단지가 있는 도시로 이농해서 저임금노동자와 도시빈민이 되었다. 이미 저임금 노동인데도, 빈민농민이 대거 몰려들자 노동자 공급과잉으로 저임금이 정당화되고 더 낮아졌다. 당시 노동자 임금으로는 살 수가 없어 잔업을 포함해서 16시간씩 코피 쏟으며 화장실도 못가고 일해야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이런 비참한 살인적인 노동현실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런 극한에 처한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알리려고 '우리는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것이다.
박정희군사정권은 경제성장을 빌미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을 희생시켰다. 당시 노조결성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민중들의 정당한 권리와 분배요구는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심지어 빨갱이들의 짓이라고 반공법으로 처벌했다. 반면에 도리어 산업기술과 경제가 일본에 절대적으로 예속당하는 산업 체제를 만들어 일본 경제를 살찌웠다. 이 결과 지금까지도 IT 분야외의 기술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본에 더 많은 로열티를 주어야 한다. 현재도 1년에 수백억 달러의 로열티를 일본에 주고 있다.
또한 군사정권은 권력유지와 부정한 특혜로 재벌과 대기업들을 갑자기 만들어 내었다. 현재 재벌들과 대기업 상당수는 이렇게 군사정권과 유착한 특혜로 된 것이지 정당하게 땀 흘리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마치 자기들이 노력해서 된 것처럼 거짓 성공신화를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지금까지도 특혜, 탈법, 착취의 불의한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군사정권 때의 경제성장은 결코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때 우리나라 경제기반을 만들고, 성장시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것이 우리사회가 빈부로 양극화 된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김영삼정부가 도입했다. 김영삼정부의 최대 슬로건이 '세계화'였다. 1990년을 전후해서 구소련이 해체되고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세계는 국경 없는 단일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른 새로운 세계시장 질서를 만든 것이 세계무역기구(WTO)였다. 미국은 이 WTO를 통한 신자유주의로 세계경제를 지배했다. 이렇게 변화된 세계경제 상황에서 김영삼정부는 OECD에 가입하고 외화자유 정책을 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책도 없이 정치적 과시용으로 성급하게 경제 개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시장에 무작정 편입이 돼 버린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가 초래됐고, 국가 부도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이 때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프레시안 : 양극화 등 현재 드러나고 있는 여러 경제적 문제가 DJ의 잘못이기보다는 YS의 성급한 개방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김성재 : 그렇다. 김영삼정부가 어설픈 세계화를 통해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경제를 파탄 낸 것을 김대중대통령이 조기에
극복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게 10위권으로 발전시킨 것은 국민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런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 병폐를 막으려했다. 이미 세계화된 시장경제체제에서, 특히 우리나라 경제가 80% 이상 해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 폐해를
막기 위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추진했다. 민주적 시장경제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그리고 무너진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공공, 기업,
금융, 노사 등 4대 개혁을 했다. 당시 이런 개혁적
구조조정을 서서히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개발 이후 30 여 년간 쌓여진 적폐를 청산하는 과정과
준비없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김영삼정부의 실패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김대중대통령은 신자유주의 병폐를 예방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문제들을 해결하고, 국민의 존엄한 생존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생산적복지 정책을 함께 추진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와 중3무상의무교육 완성, 의료, 연금,
고용, 실업 등 4대
사회보험을 실현했다. 미국의 오바마대통령이 의료사회보험을 도입하려고 할 때, 이것은 미국
헌법정신, 곧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 반대한 것을 생각해 보면, 김대중대통령은 결코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은 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시켰다. 신자유주의라면 김영삼정부에서도 불법이었던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특히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시장개입을 못하게 하는데, 김대중대통령은 대통령직속으로 중소기업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직접 중소기업을 챙겼다. 재벌과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 체제를 개혁하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영역에는 진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진입 규제를 노무현정부 때 풀었고, 현 정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벌과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판국이 되었다. 또한 김대중대통령은 하청도, 납품도 다단계나 불공정하게 하지 않도록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해 엄격히
감시하고 수시로 보고 받았다. 그런데 현 이명박정부에서는 재벌들과 대기업들이 권력의 비호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중소기업으로부터 하청과 납품과정에서 몇 배 이상의 이윤을 챙기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자유민주주의도 시장 경쟁 논리도 아니다. 재벌과 대기업들의 막대한 이익실적은 정상적인 경영의 결과라기보다 상당액이 중소기업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중소기업인들과 소상공인들마저 빈민으로 전락시키고, 파렴치하게도 저들이 망하는 것은 무능하고 게으름의 부도덕한 결과라고 말한다.
|
▲ "김영삼정부가 어설픈 세계화를 통해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경제를 파탄 낸 것을 김대중대통령이 조기에 극복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게 10위권으로 발전시킨 것은 국민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런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 병폐를 막으려했다." ⓒ프레시안(손문상) |
프레시안 : 현재의 경제적 곤경에 DJ의 잘못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김성재 : 현재 서민과 빈민들의 고통이 김대중대통령의 잘못된 정책에 근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보수정권과 보수세력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데, 일부 진보진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물론 김대중대통령이 모두 다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대통령의 정책은 분명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내외 상황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책임전가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사실 정부수립 50년만에 자민련과 연합해서 첫 정권교체를 한 상황, IMF외환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정책들도 많았다. 국민과
시민단체들은 강하게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실업을 발생시키는 구조조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개혁과 실업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라는 요구를 했는데, 이런 요구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개혁에 대해 보수기득권세력만 저항한 것이 아니다. 진보개혁세력들도 자신들의 기존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노무현정부가 뒤를 이어 출범했을 때 미진했던 개혁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개혁은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정부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입장에서 새판짜기를 하면서 김대중정부가 이룩해놓았던 근간을 흔들고 무너뜨렸다. 사실 노무현정부를 김대중정부보다 더 진보적이고 심지어 좌파라고 말하는데, 경제와 사회정책만이 아니라 남북관계나, 한미, 한중, 한일 관계를 보면 원칙 없이 상항에 따라 상당히 좌우로 왔다갔다 했다. 노무현정부가 생각은 진보적으로 했지만 정책 추진과정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혼선을 빚었던 측면이 많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김 관장이 보기에 김대중
리더십의 단점이나 아쉬운 점은 없나?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도 사람인데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일반적으로 김대중대통령께 너무 완벽한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 같다. 국가 정책은 어느 한 영역이 아니기에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다양한 국민적 요구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영역 또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 할 것이 있다고 본다. 당시 개혁을 좀 더
시스템적으로 강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개혁 논쟁에서
수술환자가 비유로 등장 했는데, '환자가 체력이 약하면 수술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로 체력을 기르면서 개혁해야 한다. 아니면 기업이 죽는다'는 논리로 개혁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다. 평가는 열려있다.
프레시안 : DJ에 대한 비판 중에 하나가 87년 대선 과정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것이다. 민주화가 됐음에도 정권을 군부세력에 내준 것은 물론이고 이후 민주화세력 자체를 분열시킴으로써 우리 정치에 두고두고 해악을 끼쳤다는 비판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은 후에 '그 때 내가 단일화를 양보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은 후보단일화 논의 과정에 2가지 불공정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당시 후보단일화를 위해 재야 모든 단체들은 고려대에서 두 후보를
초청해서 강연을 듣고 결정하기로 했다. 재야단체는 강연 후 거의 절대적으로 김대중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소수 김영삼후보 지지 재야단체의 반대 때문에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김대중대통령은 후보단일화 과정을 공개경쟁으로 하기를 원했는데, 정치적으로 진행된 것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병에 걸려 후보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통령병만으로 그 숱한 박해와 시련을 이기고 3전4기하며 대통령이 되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87년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께서 대통령이 된 후에, 그리고 퇴임 후에도 결코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려 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우리가 87년 후보단일화 실패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이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에 이에 대한 평가는 공정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에게만
역사적 멍에를 씌우는 것은 불공평하다.
남북 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비판들에 대해
|
▲ "물리적 흡수통일은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큰 민족의 비극을 가져 온다. 동서독의 예를 살펴보라." ⓒ프레시안(손문상) |
프레시안 : 김대중대통령은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 가치를 별로 높게 보는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보수 일각에서는 로비를 통해 받은 상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도 있다. 실제 노벨상 수상을 위해 돈이나 뇌물을 건네는 불법적 로비를 했나.
김성재 : 전혀 사실이 아니다. 며칠 전에 노벨위원회 자문인 한영우 박사가 언론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는데, '당시 김한정 부속실장이 와서 김대중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받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사실이 있고, 서양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김 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리기 위해 자료를 번역해서 설명을 하는 등의 활동은 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다 당연히 하는 것이고 로비가 아니다. 도리어 돈이나 뇌물을 건네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노벨위원회를 모독하는 것이고 이 노벨상 제도를 폄하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비판도 정도와 품격이 있고, 금기가 있는데, 시장모리배 같은 사고로 계속 떠드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다른 숨겨진 불순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에서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대통령을 정말 존경하고 있다.
프레시안 : 또 6.15정상회담도 김정일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한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있는데.
김성재 : 이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비아냥은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동서독의 관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독일이 통일된 것을 구서독의 흡수통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구서독과의 협상으로 구소련의 군대가 구동독지역에서 철수하자 구동독에서 촛불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이 결과로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되고 압승을 거둔 기독교민주당 의회가 구서독의 통일 절차에 따른 통합을 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구서독이 흡수한 것이 아니라 구동독주민들이 원해서 통일이 되었다. 구동독주민들이 구서독과 통일하도록 마음을 갖게 한 중요한 원인은 구서독정부의 동방정책 때문이었다. 구서독은 동방정책으로 매년 20억 달러씩 20여년간 구동독에 지원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소원인데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지 않고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나? 물리적 흡수통일은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큰 민족의 비극을 가져 온다. 따라서 남북화해와 협력을 주창한 김대중대통령이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은 동족에 대한 인도적 차원이었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1억달러 보내는 것을 야당과 협의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모들이 이것으로 논란을 하게 되면 정상회담도 불가능하게 되고,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의견을 제시해서 통치적 차원에서 결정했다.
프레시안 : 인도주의적 지원이라고 했는데, 정상회담 하기 직전에 5억 달러가 갔다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대가성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삼는다.
김성재 : 정상회담 전에 5억 달러 주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특검에서 문제된 것도 1억 달러였는데 5억 달러라고 하는 것은 현대아산의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뭉뚱그려 하는 말로 정략적인 것이다. 이런 논리로 말하자면 김영삼정부 때에 북한에 지원한 돈은 이 보다도 훨씬 더 많다.
프레시안 : 이런 비판도 있다. DJ의 남북화해가 이른바 보수세력을 포함한 '전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루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마뜩찮게 생각했던 보수를 등에 업고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완전히 대북정책을 거꾸로 돌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는데?
김성재 : 그런 주장이 아주 합리적이고 멋있는 것 같지만, 사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재와 같은 갈등의 정치상황에서 어떻게 여야가 남북관계에서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나? 또 컨센서스 없는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남남 갈등이 더 불거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책임 전가와 핑계일 뿐이다. 사실 김대중대통령은 정상회담 전에 야당대표와 대화하려고 했고, 정상회담하고 난 후에도 그 결과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야당이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들은 항상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것은 국민적 컨센서스가 분명히 있는 것 아닌가?
노무현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특검 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상호주의와 공개주의인데, 이것 때문에 남북관계가 더 발전하지 못했다. 후에 노무현정부도 상호주의와 공개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또 '컨센서스'를 말하는 사람들이 독일의 예를 드는데, 독일의 경우 구서독 사회민주당 정부의 동방정책을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이 보수당이지만 협력하고 자기들이 집권했을 때도 계속 추진한 것은 '하나의 독일' 정책을 국내 정치로 정략화하지 않는 정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은 동서독 간에 전쟁을 하지 않았고, 구서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와 구동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우리처럼 극과 극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비판을 보수세력이 하면 모를까, 소위 진보적인 인사라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책임전가 또는 사이비 진보의 자위의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국내에서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평가가 뚜렷이 대비되는 한편, 국내의 평가에 비해 외국에서의 평가가 훨씬 우호적인 것인 것 같다. 왜 그럴까?
|
▲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애증과 오해가 많은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그에게 덧씌운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호남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호남차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천형 같은 조작 선동은 정말 사악한 짓이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3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입시키고, 이에 편승한 보수세력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면서 이것이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애증과 오해가 많은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그에게 덧씌운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호남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호남차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천형 같은 조작 선동은 정말 사악한 짓이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3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입시키고, 이에 편승한 보수세력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면서 이것이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이에 반해 국제사회는 김대중대통령에 대해 이해관계를 넘어 객관적 평가를 하지 때문에 세계적인 훌륭한 지도자로 존경한다. 내가
만난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김대중대통령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없는 자기들은 부끄럽고,
한국이 부럽다고 했다.
프레시안 : 요약하면, 한국 국민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고, 그
이유는 김대중에 덧씌워진 군사독재시절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라는 말인가?
김성재 : 그렇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김대중대통령을 국내처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면 김대중대통령 생전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고, 미국, 중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세계주요 국가들의 유명한
대학들이 김대중대통령께 명예
박사학위나 명예
교수직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김대중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뉴스위크>는 세계와 사회를 변화시킨 11사람의 트랜스포머 중 한 사람으로,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될 36명의 인사 중 한사람으로 추모했는데, 이것도 국내 부정적 평가 기준으로 보면 <뉴스위크>가 잘못된
정보로 선정하고 추모했거나 거짓된
보도를 한 것이 된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해외의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용서와 화해에 바탕을 둔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중동 문제 등 국제적 분쟁에 중요한 해결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 미국의 대북특사인 보즈워스도 북핵문제 해결은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 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보수는 퍼주기라고 비판하고 진보는 컨센서스가 부족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박정희군사정권의 부정한 조작 이미지만이 아니라 김대중대통령에게 배 아픈 사람들이 만든 부정한 이미지도 있다고 본다. 상고 나온 주제에 잘난 척 한다고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다. 김대중대통령 재임 시에 한국의 빠른 발전 모습을 보고 전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인 제프리 존스가 '나는 한국이 두렵다'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이 이런 방향에서 이런 속도로 발전하면 30년내에 미국을 앞지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단한가지 조건을 해결해야 하는데,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병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너무도 뼈아픈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프레시안 : 지난 해 발간된 <김대중자서전>에 대해 일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솔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너무 정당화만 해서 차라리 자서전을 안 쓰는 게 나았겠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는데.
김성재 : 김대중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준비하기 전에 저명인사 몇 분들이 김대중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에 그 분에 대한 누명과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약 30여명 정도 글을 쓸 계획을 세우고 대통령께 의논한 적이 있다. 내가 간사 역할을 해서 김대중대통령께 이런 의견을 전했더니 대통령께서 '웃으며, 그런 것은 나 죽은 후에 해야지 내가 살아있을 때 하면 나를 의식해서
좋은 말만 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추진되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께서는 자서전도 사후에
출판하도록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국민과 역사가 자신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해주기를 바랐다.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말했다. 첫째는 신념과 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은 국민에게 솔직하게 자기 일생과 통치기록을 남기는 것이 의무라고 했다. 자서전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진솔하게 써서 매우 감동적이라고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본인이 서자라는 것도 밝혔다. 그러므로 이 자서전이 솔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와의 관계
프레시안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DJ가 권양숙 여사를 붙잡고
통곡한 장면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또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방 후 우리 국민이 가진 두 분의 진보개혁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 두 분은 어떤 관계였나?
김성재 :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김대중대통령은 참으로 좋아했다. 나에게 '이제 내가
마음 편히 청와대를 떠날 수 있게 됐다'고, 기쁜 마음으로 퇴임을 했다. 그런데 노무현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북송금 특검을 강행하자 크게 섭섭해 했다.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평생 헌신적으로 노력한 것이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보수세력에게 빌미를 주어 국가와 민족에게 초래될 불행을 염려했다.
프레시안 : 당시 반응을 들은 것을 말해줄 수 있나?
|
▲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압박으로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은 아직 젊은데,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라도 검찰로부터 매일 모욕당하고 여론으로 압박당하는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성재 : 직접적이라기보다, 포괄적으로 얘기하겠다. 대북 특검은 정치적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DJ정부를 딛고 일어서야 된다는 정치적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내부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도 들었다. 처음에는 (대북송금 특검을) 안 할 것이라고 했다. 국무위원도 다 반대했고, 주변 참모들도 다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특검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노대통령 최측근인 청와대 고위인사가 내게 특검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접 말했다. 그래서 내가 김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께서 안심했는데, 뒤집어진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을 분당 했을 때 김대통령께서 정말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속으로 감추고 이렇게 말했다. '김장관, 어쩌면 노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그렇게 분노를 했음에도 '김 장관 그러나 우리가 참읍시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이 큰 틀에서는 결국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갈 거요. 한나라당에서 대통령이 됐다면 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을 거 아뇨. 그걸로 위안을 삼읍시다' 이것이 당시 대통령의 말씀이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자시절에 대통령께 찾아와서 대통령님의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고, 대통령께서는 흡족해했다. 그러나 계승보다 판을 엎어 놓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로 사분오열되고 분당으로 몰려가는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대북특검을 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한나라당은 얼씨구나 하고 뭉쳐서 공격했고, 민주당과 개혁세력은 분열됐다. 결국 이것이 분당으로까지 치달렸고,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을 승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께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믿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할 것을 권유했고, 정상회담 후에는 관계가 좋아졌다. 특히 이명박정부가 민주주의, 남북관계, 민생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힘을 합쳐 이명박대통령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압박으로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은 아직 젊은데,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라도 검찰로부터
매일 모욕당하고 여론으로 압박당하는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 김대중대통령께서 얼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아꼈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내가 정책
기획수석을 할 때 노무현 전
의원이 부산 총선에서 낙선한 후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나는 노무현 전 의원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같이 한 친숙한 관계였다.
인사동 음식점에서 만났는데, '김수석 내가 대통령후보로 나가려고 하는데 나를 좀 도와주소'라고 했다. 나는 '
좋은 생각 같은데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했더니, '대통령하려면 국정
수행경험이 필요해요' 했다. 이후 대통령께 노무현 당시 전 의원을
만난 보고를 했다. 대통령께서 '노무현 의원은 참으로 정의롭고 소신있는 유능한 정치인이요. 앞으로 기회를 봅시다'고 했다. 얼마 후에 노무현 전 의원은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되었다.
|
▲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은, 복지를 인권에 의한 국민의 권리로 인식해서 시민권, 사회권으로서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대중정부에서 복지는 분야별 복지와 함께 통합적인 경제사회정책으로 추진되었다." ⓒ프레시안(손문상) |
프레시안 : 요즘 복지가 정치판의 최대 화두가 됐다. 대체로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의 시작은 김대중 정부부터라고 얘기 하는데,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을 확대 계승 했다고 보나?
김성재 : 솔직하게 말하면 노무현정부는 복지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고, 따라서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인가?
김성재 : 김대중정부의 복지정책은, 복지를 인권에 의한 국민의 권리로 인식해서 시민권, 사회권으로서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대중정부에서 복지는 분야별 복지와 함께 통합적인 경제사회정책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노무현정부는 복지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복지를 국민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로 생각하지 않고 지방정부로 이관했다. 국가의 책무를 방기했고 지역이 경제, 사회, 문화적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정부의 2/3정도가 한나라당 정부라는 것도 간과했다. 그리고 지방의 복지재벌, 토호세력들이 정치권과 결탁하고 정부 지원예산을 거의 독식하고 있다는 현실도 외면했다.
그리고 노무현정부가 복지예산을 많이 증액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복지예산 총액에 당시 건교부 서민주택 예산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의 일반 예산에서의 복지예산은 줄었고, 기금 등의 특별예산으로 일부 보충됐다. 특별예산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기금 운용에 따라 언제든지 가변적이 된다. 특히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 인권의 원칙에 근거하지 않고 재정의 한계선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장애인 차별에 대한 시정 권리가 축소되어 이 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계는 노무현정부를 비판하고, 이 법이 통과된 직후부터 개정운동을 시작했다. 보육도 시장에 맡겼고, 의료민영화도 추진하려고 했다. 그래서 시민, 복지단체와 장애인계로부터 노무현정부는 복지를 도리어 후퇴시켰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재벌과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업종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한 규제를 풀었고, 한미 FTA도 강행하려 했다. 결국 안타깝게도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길을 닦아 준 셈이 되었다.
프레시안 : 김 관장은 DJ정부 시절 복지와 관련해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복지정책을 놓고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까지 들어와서 갑론을박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코멘트를 하신다면?
김성재 : 박근혜 전 대표가 복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발표된 박근혜 전 대표의 복지정책은 안타깝게도 무늬만 복지이고, 속빈강정 같은 그야말로 포퓰리즘의 전형 같다. 진정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변화된 시대와 우리 현실에서 복지를 말하려면 인권에 의한 복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는 공동체정신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복지는 소득보장 한 분야만이 아니라 의료, 교육, 주거, 일자리 등 통합적인 사회정책으로써의 복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복지인식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 정책팀이 발표한 것을 보면, 재원문제는 둘째치고 여전히 과거적이다. 특히 생애주기별 복지라는 것은, 현재도 영유아복지와 노인복지가 서로 중요성과 재원 면에서 우선순위의 정치적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통합이 아니라 연령별, 세대별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으로 복지보다 반사회정책으로 귀결될 우려를 갖게 한다. 박근혜 전 대표가 국민과 국가를 위해 훌륭한 복지정책을 제시하면 좋겠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시대를 산 정치인인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화시대에 정치를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과의 교감 능력이 탁월했다. 게다가 자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택하면서 일반인들의 정서 속에서 김대중보다는 노무현에 대한 감정이 울림이 훨씬 큰 것 같다. 어떻게 보나?
김성재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극적이고 비극적이어서 국민들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크다고 본다. 또한 소탈했던 인간미에 대한 향수가 있다. 탈권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의 역사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프레시안 : 노무현 재단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고 연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대중 도서관과 상호 협동을 하나?
김성재 : 그렇다. 도서관에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여기서 정책 토론회도 한다.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을 처음 만들 때도 같이했다. 나는 노무현정부의 공과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하려고 했다. 잘 못한 것은 극복하고 잘 한 것은 더 발전시켜 가야 노무현대통령의 역사가 산다. 김대중대통령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찬양가도, 잘못된 비판도 삼가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김 관장과 인터뷰하면서 느낀 느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는 아직 김대중이라는 정치 지도자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가 될 것 같다. 아직도 박정희 시대라는 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일부 민주화 됐지만 박정희 시대를 완전히 극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김대중 도서관이 해야 할 역할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인가?
|
▲ 이야기 나누는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와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프레시안(손문상) |
김성재 :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대통령의 진면목을 잘 모르면서 겉으로, 정치적으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김대중대통령의 책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심지어
자서전도 정부여당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김대중대통령 서거 이후 김대중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한 달 평균 1500명 정도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녀들과 함께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방문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시관을 둘러보고 김대중대통령을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역사가는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후 10년이 지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김대중대통령의 진가는 더욱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의 특별기획으로 올해 8월 김대중대통령 서거 2주기 때 학술
심포지엄과 '김대중연보'를 발간할 계획이다. 3년 동안 준비했는데, 항목으로는 약 2만 정도,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연보이다. 김대중대통령이 일생동안 만난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이 연보를 보면 대통령께서 언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준비를 했는데, 김대중전집을 5개년 계획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그동안 나왔던 전집과 30여권의
단행본 그리고
출판되지 않았던 국회발언록, 강연원고, 인터뷰 내용 등과
사진 자료들도 모두 포함시킬 계획이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교류 및 공동연구 제안도 상당수 있어 적극적으로 수행할 계획이다. 김대중도서관의 본래 목적사업인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빈곤퇴치를 위한 김대중평화아카데미 등의 제반 연구,
교육 사업들도 지속적으로 할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 사업을 하는데 국고 지원은 있나?
김성재 :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매칭펀드 방식으로 일부 지원받고 있다. 김대중대통령께서 재임 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화해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위해 200억을 지원했는데, 최근 다행하게 기념도서관이 건립되고 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념관도 지어지고, 노무현 전 대통령 측도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 11월 2일 개관 7주년을 기념해서 전직대통령 기념관, 도서관의 역사적 필요성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많은 관심과 호응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기념관들이 건립되면 대통령 정치문화도 발전되고,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들도 국민과 역사를 의식해서 더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도서관은 연세대 자율운영기관이기 때문에
대학본부에서
건물유지 및 관리비만 지원해주고 모든 프로그램과 사업은
후원금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돈이 없어서 할 일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을 제대로 하면 필요한 재원은 충당된다. 감사한 것은 자발적인 후원회원들이 약 1000명 있고, 직원들도 적은 인원수이지만 김대중대통령의 뜻을 이어서 펼쳐간다는 사명감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관심을 가져준 프레시안에도 감사한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