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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시혁을 노래 콘테스트 대회에
심사의원으로 선정한 것은 무리이며, 어설픈 진행에 따른 미숙함이다.

담당 pd는 방시혁의 주관을 너무나도 존중하는 사람일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주체측의 농간이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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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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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 4집
고은희
이별이야기
............


데이비드 오


세월, 그리고 인생
생명

추억
잉태
사랑
이별

사랑
지루한
사랑
그리고
이별

사랑
인간
......

.......
허무
.....
우주
.....
.....
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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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프로그램 방영을 준비중인 한예슬씨의 소속사가 노이즈마케팅을 시도하였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접촉사고 현장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시키면서 그녀가 왠지 사고 피해자의 공갈에
오히려 피해를 보는거 같다는 동정을 야기시켜 그녀의 잠재되어있던 인기를 끌어올리려는 계산이 깊숙히 깔린
노이즈마케팅이라는 분석도 지배적이다.
 


노이즈마케팅은 인기인, 유명인 등이 선호하는 마케팅이다.
그것은 잃는것보다 얻는것이 더 많을것이라는 계산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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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인터넷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외환위기라는 직격탄이었다. 이는 보수정권이 무너지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연이어 집권하면서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개방과 민주화의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만 해도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기술)산업이나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정보통신기술)산업은 IMF 위기로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소셜로 통하는 요즘의 대부분의 서비스가 이미 10년 전에 다 우리나라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처음으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공짜 전화를 사용하게 해 준 다이얼패드, 채팅 문화를 선도했던 스카이러브,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의 원조 아이러브스쿨, 검색, 전자상거래는 물론 온라인 게임과 게시판 문화 등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최첨단 아이디어 뱅크였다.

  그러나 중도 실용을 들고 집권에 성공하는 MB정부가 등장하면서 사회적으로 조성된 개방화와 민주화가 후퇴하면서 IT산업의 환경,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ITC산업의 환경 역시 후퇴하고 만다. 보수 세력의 영구집권 마스트 플랜에 따라 언론을 장악하는 시나리오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ITC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 이전 정부가 진행하고 있었던 IT 839전략 정책을 폐기해 버린다. 정부부처 통폐합으로 인해 과거 IT산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일반 행정 관료로 바뀐다. 그리고는 재벌로 통칭되는 대기업의 이익의 논리에 따라 재벌에게 해가되는 규제는 철폐하고 재벌에게 이익이 되는 규제는 점점 더 강화하게 되었다.

  『한국 IT산업의 멸망』은 검열과 통제, 대기업에 의한 독점과 쏠림이 강화된 폐쇄적인 ICT 환경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출발한다. 아울러 서비스 질 개선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윤 추구에만 눈이 먼 통신사와 무책임한 정부 정책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현 정부 들어서 불과 몇 년 만에 잃어버린 IT 강국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가 몰랐던 정보통신업계의 음모와 진실,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들어오게 된 배경과 의의 등을 집중 파헤친다.

  책에 따르면 곧 나올 차세대 이동통신인 4G에는 와이브로와 LTE의 채택이 유력시 되고 있다고 밝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본래 참여정부에서는 'IT 839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삼을 여러 기술들을 지원해 국가경쟁력을 높이려 했는데 그 중 가장 핵심 전략이 바로 와이브로였단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정책의 연속성도 사라졌고, 지금은 설비투자 조차 하지 않아 사장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외국에서는 이미 무료로 전환한 음성통화 영역을 끝까지 유료로 유지하기 위해 이동통신사들의 고의적인 투자 지연도 한 몫 한다.

  책을 읽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부분은 아이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변하게 된 것들이다. 그동안 이동통신사에서는 각종 규제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해왔다. 내장된 와이파이와 GPS기능, 그리고 이어폰 단자를 제거하고 데이터의 독점과 패킷제 운영으로 엄청난 요금 폭리를 취한 것이 대표적인 예. 아이폰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규제가 철폐되었음은 물론이고 데이터 통화료의 인하를 가져왔고, 무엇보다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던 MS의 지배에서 벗어나 웹 페이지의 표준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플랫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TGiF(트위터, 구글, 아이폰, 페이스북)로 통칭되는 이러한 업체나 서비스가 유독 국내만 들어오면 맥을 못 추는 것이 바로 이러한 폐쇄적인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결국 해외시장을 개척할 생각은 없고 국내시장에만 매달려 우리 국민들을 속이고 말도 안 되는 애국심에 호소하며 이윤만 추구해왔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휴대폰 요금을 무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같은 제품이 수출용보다 내수용이 오히려 성능은 떨어지고 가격이 비싼 것은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저자가 서문에서 진보적인 논리가 왜 IT에서 나오는 지 주장할만하다. 정치적 보수화가 IT산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답은 자명하다.


[펌]  - 한국 IT산업의 멸망 -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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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 충북 기술창업아카데미 개강이 곧 시작됩니다. 서두르세요!

모집기한 : 2011.5.17일까지 
참 가 비 : 10만원
참가대상 : 창업 및 사업을 준비중인 모든 분들 (남녀노소 누구나)
교육일정 : 2011.5.21~8.25 (매주 토요일만)
교육장소 : 충북대학교 창업지원교육실 205호 세미나실
교육내용 : 아래 포스터를 참조하세요
교육혜택 :  아래 포트서 내용을 참조하세요!
신청접수 : 신청서를 작성하여 이메일과 팩스로 접수중입니다.   신청서

문의전화 : 043-261-3720

* 조기마감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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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학교에서 열리는 전국 창업대전 , 실전창업리그 - 관심있는 분들에게 좋은 정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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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2011년 4월 23일 "그것이 알고싶다" sbs 방송에서 일본의 핵무기 보유가능성을 방송하였고, 그 핵방사능의 치명적 위험성을 보도하였다.
아마, 일본은 핵무기를 써보기도 전에 그 핵으로 자국본토에 악몽을 야기시킬 것이고, 주변국 아니 전세계의 방사능 피폭 피해를 반드시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그로 인해, 다가오는 미래시대에는 방사능 피폭인간인 '프랑켄슈타인들'의 출현을 야기시키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돌연변이의 출현, 기형아의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러시아 체르노빌 지역 여러도시에서 보여지는 아이들의 돌연변이 출생의 모습은 참으로 끔찍하다 못해,
너무 가슴이 슬프다. 아이들의 그 고통! 평생가는 고통이다. 아버지세대와 자식세대, 손자세대 집안이 그냥 불행의 연속이다.


일본은 핵폭탄 제조단계 및 핵폭탄 소유 핵심 증거를 감추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은 그것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설마 기술이 없어서 제조하지 않았겠는가?
핵폭탄을 소유하고 있으면 위험한 국가이기에 일본의 핵무기 소유는 강대국들이 100% 다 반대한다.


이번 지진으로 일본정부가 당황해한 사례를 보면 핵폭탄 보유의 증거는 확실하다.


1) 서방세계의 지원을 전원 거절하였다.
2) 체르노빌처럼 봉압작전은 절대 안되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희생하더라도 살려보겠다는 심산
3) 이미 도시가 폐허가 되었고,방사능이 유출되는 원전인데도 포기하지 않고, 그토록 애지중지 아끼는 진짜 비싼 속내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4) 일본의 동남부 해안 원전지역에서 이번 100여차례 지진이후 플라토늄이 검출되었다는것.
5) 피해상황이 괜찮다! 인체에 해가 없다! 라고 거짓 대국민보고를 강행한 점

이미 중국은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중국도 핵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고,
중국, 북한, 일본 모두 핵폭탄을 가지게 되고, 한국은 그 사이에서 여기저기 밟히는 형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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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돈에만 집착하는 최근의 모습에 참 실망이 극도였다.
그런데, 한 앨범으로 그리 여러번 혼탕, 중탕, 분탕질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되었다.
처자식 먹여살리는 문제가 있었으니 그렇지..

혼자 사는 노총각이 그리 돈을 그토록 밝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내심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쯤되면 이제 배풀때도 됐는데?
월드컵송이라도 무료로 배포해줄 여유와 헌신이 있을텐데?
새로운 장르중 째즈는 왜 안할까?











ㅎㅎㅎ
여자는 현명했다. 돈에, 돈을 위해, 돈때문에 이 사건이 들쳐졌다.
오히려 잘된듯
이 고비가 지나고 나면,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멋진 모습을 기대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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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동영상이 안나오면요,  구글 검색 가면 많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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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대통령이 선거운동시절 반드시 하겠다던 다짐의 공약도 모조리 백지화가 되었는데,

그 당내에, 그 밑에서 있는 분들이 공약 지키겠다고 "한번만 꼭 뽑아달라"는 것은

..............................


왠지 한번만 더 해먹으면 후회없는 기회로 삼겠으니,

제발 소가 넘어가는 것처럼, 저 멀리 언덕을 보듯

그냥 모른척 아무생각없이 찍고, 본연의 삶, 열심히 생활터전으로 돌아가달라는

그리고, 세금이나 열심히 내달라는 우리를 얕보는 소리처럼 들리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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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기술한 교과서는 엄연히 허구의 소설이다.

그것을 아는지 하늘도 괘씸하다. 하여

어제도 지진 7.4대가 발생하였다.

일본은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한, 지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엄연히 천벌이기 때문이다.

[ 일본의 교과서에 명기된 독도를 포함하는 일본의 영토 : 해상 대국을 꿈꾸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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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FBI의 ‘로즈웰 외계인’ 관련 새로운 기록이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의 폭스뉴스는 FBI 전자문서 공개 공식 웹사이트인 ‘더 볼트(The Vault)’에서 최근 2000개의 디지털 파일로 된 새로운 극비 문서가 공개됐으며 여기에는 로즈웰 UFO와 외계인에 대한 기록이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이날 보도에 따르면 지난 1950년 3월22일 FBI 워싱턴 담당 특수요원이었던 가이 호텔(Guy Hottel)이 FBI 디렉터에게 보낸 문서에는 로즈웰에서 UFO와 외계인 발견됐다고 작성돼 눈길을 끌었다.


이 문서에는 “공군 조사관이 뉴멕시코에서 비행접시라고 불리는 3개의 물체를 발견했다고 진술했다”며 “비행물체는 원형으로 중간이 불룩 올라와 있으며 지름은 50피트(약 15m)”라고 설명했다.

또 문서에는 “각 비행물체에는 3개의 인간형태의 생물체가 있다. 키는 3피트(약 91cm) 정도다. 그들은 금속성 물질의 옷을 입고 있는데 고속비행이나 실험비행을 할 때 입은 제복과 비슷하다”고 적혀있어 UFO와 외계인의 실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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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감사합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랑스러운 국민참여당, 제2기 당대표직을 수행하겠습니다.

이병완 창당준비위원장님, 이재정 당대표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당은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천호선 최고위원님, 이백만 최고위원님, 이광철 최고위원님, 김영대 최고위원님, 김충환 최고위원님, 오옥만 최고위원님, 그리고 권태홍 사무총장님과 중앙당 상근당원 동지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열정과 헌신 덕분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여섯 개 광역 시도당 위원장님과 당직자 여러분, 지난해 지방선거에 나섰던 삼백여 출마자 여러분, 여러분의 무모한 도전 덕분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창당준비를 하고 지역위원회를 하면서, 새벽에 플랫카드 걸고 출근하고, 저녁에 아이 데리고 선거운동 나오셨던 당원동지 여러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선출되신 신임 최고위원 여러분, 축하합니다. 힘과 지혜를 모아 국민참여당을 더 크게 성공하는 정당으로 만들어 나갑시다. 저를 믿고 따라 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국민참여당을 부탁합니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참여정부의 정책노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태어난 정당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서거하셨지만, 참여정부의 자산과 부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권력 문화를 민주화했습니다. 남과 북의 화해 협력과 한반도 평화를 진척시켰습니다. 국가균형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국민경제를 잘 관리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확대했습니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에 맞서 싸웠습니다.

국민참여당은 참여정부의 자산을 승계하려는 게 아닙니다. 참여정부의 자산은 대한민국의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국민 모든 정당이 그 자산의 합당한 상속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국민참여당은 오로지 참여정부가 남긴 부채만을 승계할 것입니다. 참여정부가 이루지 못한 것, 실패한 것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비정규직과 소득 격차 문제 등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막지 못했습니다. 복지지출을 확대했지만 대한민국을 토목건설국가에서 복지국가로 바꾸는 데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지역구도 정치를 타파하고 정당을 민주화하는 정치혁신 노력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남긴 부채입니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노 전 대통령이 실패했거나 포기했다고 말하지 맙시다. 그 분이 쓰러지신 그 자리에서 우리가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누군가 그분을 대신해서 참여정부가 남긴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 국민참여당이 그 일을 하겠습니다. 참여정부가 남긴 자산은 다른 사람과 다른 정당에 넘기고, 국민참여당은 오로지 부채만을 인수하여 갚아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옳았다는 것을, 불가능한 꿈을 꾼 게 아니었다는 것을, 성공했다는 것을 끝까지 보여줍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참여정부가 남긴 부채를 갚는 길은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어떤 부당한 특권과 반칙도 용납하지 않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그 누구도 헌법과 국민주권 위에 군림하지 못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와 더불어 시민 한 사람도 결코 버리지 않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그 누구도 생존을 위해 경제적 강자의 자비심에 의존하거나, 인간적 존엄을 포기하고 굴종하는 일이 없도록 보살피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확실하게 지키는 국가, 만인에게 똑같이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국가, 국민의 삶이 풍요로워지도록 애쓰는 국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확고히 세우는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국가를 만들어야 시민의 삶도 훌륭해질 수 있습니다. 훌륭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가 훌륭해져야 하고, 정치가 훌륭해지려면 정당이 훌륭해야 합니다.

국민참여당은 작지만 훌륭한 정당입니다. 앞으로 더 크고 훌륭한 정당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국민참여당에 관심을 주시고, 국민참여당에도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당원으로 참여해 주십시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 앞에는 멀고 험난한 길이 놓여 있습니다.

비상한 각오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한 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실패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위험한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에 도전합니다.

당원들이 서로를 믿지 않으면 국민은 우리당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확신이 없으면 우리당은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당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면 우리당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먼저 포용할 때 남들도 우리를 껴안아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믿고, 역사와 국민을 믿으면서, 함께 멀고 험한 길을 떠납시다.

국민참여당 대표로서, 저는 당원 동지들과 국민 앞에 선언합니다.

4월 27일, 우리 국민참여당은 첫 번째 국회의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012년 4월, 국민들은 진보개혁 정당들을 국회의 압도적 다수파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맞선 야권연대후보들이 국회의석 180석 이상을 차지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압도적인 개혁국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적어도 스무 명의 남녀 당선자들이 노란 넥타이와 스카프를 매고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제19대 국회의원 선서를 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을 사랑하고 참여정부의 부채만을 승계하겠노라 약속했던 국민참여당 당선자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2012년 12월 진보개혁 야당의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제압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하는 제2기 진보개혁 정권 수립을 확정하는 순간을 체험할 것입니다.

진보개혁 진영의 모든 정당들이 손잡고 공동의 정부를 만들어 대한민국을 자유국가, 복지국가, 평화국가의 반석 위에 다시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이루어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해내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당 운영의 기본방침을 정합시다.

첫째, 시민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시민들을 찾아갑시다. 우리의 소망을 말하기보다 국민의 소망을 듣겠습니다. 매주 토요일 이동당사!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만민공동회를 열겠습니다.

거대언론과 조직 뒤로 숨은 정치를 국민 앞으로 끌어냅시다. 한강변을 가득 메우고 독재타도를 외쳤던 민주주의의 꿈, 골목골목에서 즉석연설을 했던 민주주의의 꿈을 다시 꿉시다. 국민참여당 대표와 중앙당은 언제나 길 위에 서서 시민들과 만날 것입니다.

둘째,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 아래 당을 운영하겠습니다. 큰 정당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할 것 없습니다. 흉내 내지 맙시다. 우리방식대로 합시다.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을 다 하기에는, 우리 당의 역량이 너무 작습니다. 정책과 홍보, 조직과 교육을 하이브리드로 엮는 창조적 활동이 필요합니다. 우리 당의 당면과제는 성공적으로 국회의원 총선을 치러내는 것입니다.

일점돌파! 당 활동이 활발하고 당원이 많고 훌륭한 국회의원 후보가 있는 지역부터, 당의 역량과 활동을 집중해서 뚫고 나갑시다. 이길 수 있도록 싸웁시다.

셋째, 다른 정당과 어울리고 뒤섞이는 일에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임하겠습니다. 100% 순금이나 순은은 물러서 세공을 할 수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제대로 만들려면 여섯 일곱 가지 나무들을 섞어야 합니다. 미역국을 끓이는데 간장도 안 넣고 멸치도 안 넣고 쇠고기도 안 넣고 순수한 미역만으로 국을 끓인다면 사양하겠습니다.

진보의 힘은 순수가 아니라 섞임에서 나온다고, 정치는 동기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고 책임지는 활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당은 참여정부의 자산이 아니라 부채를 승계하는 정당입니다.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부채를 당장 갚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참여정부가 부채를 남겼다고 비판해 왔던 진보정치세력과 손잡고 힘을 모아, 국민에게 진 빚을 갚읍시다.

노 전 대통령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고 모색했던 진보의 미래는 소통과 통합, 그리고 폭넓은 연대를 통해서만 열어나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넷째, 장기적 전망과 과제를 소중하게 간직하되 지금 이 시각 국민의 간절한 요구를 먼저 받드는 자세로 활동하겠습니다.

지금 국민은 정권교체를, 한나라당 정권의 종식을, 뒤 돌아가는 역사를 앞으로 되돌릴 진보개혁 정권의 수립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국민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 우리당의 힘을 키우겠습니다.

진보개혁 진영의 모든 정당들이 튼튼하게 연합하여 2012년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선거에 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당대표부터 평당원까지 같은 정세인식, 같은 목표의식을 가지고 함께 실천합시다. 늘 여러분과 소통하면서 당을 운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 3. 19

국민참여당 대표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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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금태양의 세상읽기,통찰력큰사람,지식위지혜실천,과학이종교,무소유가행복,영물인김범,자유정의사랑,파워블로거,풍류선비,올마운틴MTB라이더,대금태양,웹제작 웹디자인 웹마케팅 웹기획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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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가 저 혼자 물러나면 그만인것을


여러 양민들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독재정권을 지속 유지시키기 위한 욕심이 끝이 없군요.

40년 정치해먹었으면 됐지. 국가가 개인소유물인가?


인간은 욕심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자기 인생에 종착지에서 큰 가치와 깨달음을 안겨준다는데요. 공부를 안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리가 없겠죠.

쾌락과 방종, 명령, 협박, 살인, 폭력만 일삼은 자가 과연 욕심을 버리고 평안을 찾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앞으로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서 우리 나라에 다시 독재정치가 발생한다면 본 깨달음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카다피 지금이라도 사임하겠다고 발표해라.

그것이 너와 니 가족과 리비아 국민들, 그리고 아랍, 아프리카를 살리는 길이다.

                                                                  카다피

                                                           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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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YOU FEELING

세계적으로 김정일 패러디 광고가 유행을 타면 참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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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성 폭발로 외계 생명체들 종말

수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구외에 생명체들의 존재 여부를 알 수가 없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거대한 침묵 (Great Silence)”이라 부른다.

최근에 몇명의 천문학자들은 별들이 폭발하면서 발생하는 위력을 견디지 못하여 외계 생명체들이 없어졌다는 주장들을 영국 데일리 메일지가 23일 보도.

특히 백색왜성 초신성 폭발때문에 이들은 꼼짝없이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한다. 이 현상은 큰 백색왜성이 불안정해지면서 폭발하면서 나타나는데 수 만년간 여러 차례 일어났을 가능성을 보면 과학자들의 주장이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지구인들도 이 현상으로 생성되는 감마선 폭발로 위협을 받을수도 있다고 했다. 감마선 방출이 지구의 오존층을 파괴할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만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앞으로 몇 백년 뒤에야 일어날 것이다,”라고 펜실베니아주 Villanova University Edward Sion 박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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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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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고구려 고분 벽화, 내가 사려고 거래한 적 있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도굴된 고구려 벽화의 행방과 아무런 관련이 없나요?” 그와 인터뷰하는 동안 똑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다. 그가 참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핏대를 세웠다.

“조작이고 음해라니까요. 그 일로 지난 한 해 동안 압수수색을 네 번 당했고, 언론에서 10차례나 두들겨 맞았어요. 고구려 벽화가 국내에 있으면 지금 당장 제가 사겠습니다.”

김종춘 회장은 강진청자 고가매입 논란, 사라진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방, ‘증도가자(證道歌字)’ 발견 등 고미술 관련 뉴스의 핵심 당사자로 꼽힌다.|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한국고미술협회 김종춘 회장(63). 서울 인사동에서 ‘다보성’을 운영하는 한국 고미술계의 대표적인 ‘큰손’이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강진청자박물관 유물 고가 매입 논란, 도굴된 중국 내 고구려 고분벽화의 국내 유입설, 세계 최고 금속활자로 추정되는 ‘증도가자(證道歌字)’ 발견 등 문화재 관련 뉴스의 핵심 당사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사이에 일어난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장천(長川) 1호분과 삼실총(三室塚) 고구려 고분벽화 도굴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국 정부가 ‘한국고미술협회 고위 간부’에 의해 한국으로 넘어간 고구려 벽화 반환에 협조해달라며 한국 정부에 보냈다는 공식 서한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고 한다. 물론 ‘협회 고위 간부’는 김 회장을 지칭한다.

- 중국 정부에서 보냈다는 공식 문서가 가짜라니 놀랍다.

“국제적인 망신이다. 나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이번에는 제대로 수사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 범인뿐 아니라 배후세력까지 찾아내야 한다.”

흔히 고미술시장을 ‘복마전’이라고 한다. 특히 지금 고미술계는 고미술 감정을 둘러싼 파벌싸움으로 반목과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김 회장은 이 싸움에서 대체로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다. ‘진실게임’처럼 진행되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관련 의혹과 사활을 건 고미술계 ‘암투’에 대해 당사자의 해명을 들어보고 싶었다.

지난 9일 서울 종로 경운동 수운회관 내 다보성고미술전시관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모든 인물의 이름을 거침없이 밝혔다. 심지어 “기사에 실명을 밝혀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 고미술계의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왜 그렇게 싸우는가.

“모든 것이 강진청자 ‘감정가 부풀리기’와 연결돼 있다. 고미술계 원로 정모씨, 박물관장 최모씨 등이 짜고 고려청자를 비싸게 감정해 강진청자박물관에 팔도록 했다. 2009년 말 한나라당 성윤환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2억원대 청자 두 점을 20억원에 샀다고 문제삼았다. 이때 고미술협회가 성 의원의 의뢰로 시가 감정을 해줬다. 이 일로 정씨, 최씨 등이 협회에 앙심을 품었다. 그들이 인사동에서 가짜를 유통시키는 고미술상들과 똘똘 뭉쳐 나를 집중 공격한다. 나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 그래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국가 공문서까지 위조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 김 회장을 공격해 그들이 얻는 이익이 뭔가.

“옛날에는 고미술협회 감정위원과 고미술상들이 담합해 가짜를 진짜로 감정했다. 내가 협회장이 되면서 가짜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짜 감정서를 끊어달라고 사정하다 끝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니까 척을 지게 됐다. 이 바닥에서 내가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래야 가짜가 활개를 칠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 수사·사정기관의 특별조사만 스물 네 번이나 받았다. 그렇지만 1원짜리 하나도 걸린 것이 없다.”

- 그들이 김 회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구려 벽화 건을 터뜨렸다는 말인가.

“그렇다. 잊을 만하면 수사기관과 언론에 내가 고구려 벽화를 보관하고 있다는 음해성 제보를 했다. 조작된 녹음테이프를 증거물로 함께 보냈다. 그때마다 집과 회사에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했다. 새벽에 가족들을 깨워놓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또 내가 오랫동안 거래해온 박물관에 투서를 보내 거래를 방해했다. 진절머리가 난다.”

- 강진청자 사건은 사법적인 결론이 내려졌나.

“최근 감사원이 청자의 원래 소장자인 이모씨 통장에서 청자 매매를 주도한 최모씨 통장으로 8000만원이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그런데 이씨가 이미 캐나다로 출국한 뒤여서 수사가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 그동안 보도된 내용만 놓고 보면 김 회장이 사라진 고분벽화와 무관치는 않아 보이는데.

“그들은 내가 조선족을 동원해 고구려 벽화 도굴을 사주했고, 돈을 주고 벽화를 국내에 들여왔으며, 국내에서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팔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말 교묘하게 짜맞춰진 소설이다. 내가 벽화를 사려고 했던 것도, 벽화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것은 3년의 사차를 두고 따로따로 이뤄진 일이다.”

- 2000년 여름 중국 옌지(延吉)의 한 호텔에서 김 회장이 벽화를 사고 돈을 건네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2000년 7월에 중국이나 외국에 나간 적이 없다. 그 전에도 옌지에 가본 적이 없다. 이○○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해서 충격받았다. 누군가에게 약점을 잡히고, 협박 공갈을 당하고 금전에 매수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동네가 그렇다.”

-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자. 벽화를 입수하려고 했던 정황을 자세히 듣고 싶다.

“2000년 가을이었다. 10년 넘게 중국 단둥(丹東)에서 골동품을 거래하던 김○○이 전화를 했다. 고구려 벽화를 38상자로 나눠 컨테이너에 실어놨으니 사라고 했다. 그가 30만달러를 요구했다. 가격 흥정을 하느라고 2주일 정도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때 국내에서 장천 1호분이 도굴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사람은 이 보도 때문에 중국 공안에 물건을 모두 압수당했다고 알려왔다. 이것이 내가 본 적도 없는 고구려 벽화 얘기의 전부다.”

- 사진을 가지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뭔가.

“사진은 97년 일이다. 당시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단속반장 김무준씨(사망)가 벽화조각이 든 상자와 사진 몇장을 가져왔다. 현직 공무원 신분이어서 곤란하니 사진을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가져다 보여주라고 부탁했다. 당시 정모 관장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중국에 이런 벽화가 나왔다는데 박물관이 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 정 관장은 사진을 보고 관심을 보였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모르겠고, 이런 건 취급 안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 관장한테 보여준 사진이 딱 표적이 되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히고 있다.”

- 어쨌든 고구려 벽화를 거래하려고 한 것 아닌가.

“당시 사정을 알아야 한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중국을 통해 북한 고미술품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다.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고, 중국 것도 쏟아져 들어왔다. 사찰 벽에 있는 것도 뜯어서 벽화라고 가져왔다. 벽화만도 수십 박스는 들어왔을 거다. 조각이 숱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벽화는 세트가 다 맞아야 한다. 쪼가리는 쓸모가 없다. 김씨가 보여준 사진은 지안시의 벽화가 아니었다.”

- 그렇다면 2000년 김○○씨에게 구입하려고 했던 벽화는 도굴된 고구려 벽화인가.

“그 친구가 확실하게 말한 것은 아니다. 나는 벽화를 중국 정부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중국 쪽에서 문제 제기가 없지 않나.”

- 그렇다면 김씨가 벽화 행방의 열쇠를 쥐고 있을 수 있는데, 그후 김씨를 만났나.

“지금 대구에서 고미술상을 하고 있다. 당시 그 일로 경찰과 문화재청에서 전화로 그 사람을 조사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른 벽화였다고 말을 바꿨다. 싸움에 얽히기 싫은 것도 이해가 간다.”

- 어쨌든 두 번씩이나 벽화를 거래하려고 시도했다. 도굴품을 그런 식으로 거래하는 것은 문제 아닌가.

“그렇게 치면 도굴품 아닌 것이 어디 있나. 이미 중국 단둥까지 유출된 유물이다. 우리가 사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중국 고분을 도굴했는지, 북한에서 나온 것인지, 박물관에 있던 것인지,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문화재니까 당연히 우리가 입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구려 벽화가 제3국으로 유출되기 전에 국립박물관이 사들여서 보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 회장은 그다지 친절하게 설명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조금은 퉁명스러운 말투에 이야기는 자주 건너뛰고, 설명도 부정확했다. 몇번씩 다시 따져물어야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좀 성격이 급한 면은 있다. 원래 숨기거나 꾸미질 못한다. 그런 데다 사람을 쉽게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잘해주고도 손해볼 때가 많다”고 말했다.

- 고미술계에도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최모, 정모, 신모, 공모, 김모, 이모씨가 대표적이다. 가짜 낙관을 1000개나 가지고 있는 고미술상도 있다. 옛날 그림이나 글씨에다 가짜 낙관을 찍는 ‘후낙’으로 가짜를 만든다. 진품을 가짜로 감정해서 귀중한 문화재를 해외로 유출한 경우도 있었다.”

김 회장이 들려준 ‘용문양큰항아리’(용충)의 일본 유출 사건은 고미술품 복원 사기극을 다룬 영화 <인사동 스캔들>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2002년 부산의 고미술상들이 조직폭력배를 시켜 일본 도쿄의 고미술 컬렉터 사카모토의 집에서 골동품 18점을 훔쳐왔다. 그중에서 높이 51㎝짜리 국보급 문화재인 용충을 인수한 고미술상이 부산의 유명 고미술 컬렉터에게 18억원에 팔았다. 그런데 정모, 최모씨가 이것을 가짜로 감정해 일본에 밀반출됐다. 이 용충은 다시 원래 주인인 사카모토에게 200억원에 팔렸다. 김 회장은 “내가 이런 뒷얘기로 소설을 써도 몇 권은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운영하는 다보성갤러리는 지난해 9월 “ ‘직지’(1377년) 활자보다 130년 앞서는 금속활자”라며 ‘증도가자’를 공개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짜라는 의혹이 따랐다.

“증도가자 공개에도 역시 악의적인 흠집내기가 있었다. 활자는 개성에서 출토된 것이 틀림없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15년쯤 전부터 한 개, 두 개씩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대구의 컬렉터 등 전국에 흩어져 있던 것을 서지학자인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한자리에 모아 연구결과와 함께 공개했다.”

- 증도가자의 제작 연도에 대해 진척된 연구결과가 있나.

“한국지질연구원에 이어 일본의 한 연구기관에서도 활자에 남아 있는 먹을 탄소 측정한 결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적어도 ‘가짜 의혹’은 벗었다. 이달 말에는 또다른 국내 연구기관의 측정결과가 또 나온다.”

김 회장에 대한 일방적인 인터뷰로 진실을 밝혀낼 수는 없다. 사라진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방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 다만 그가 고미술계의 주도권을 놓고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가짜 중국서한 사건, 고미술계 ‘암투’의 현주소 생생하게 보여줘

중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보냈다는 고구려 고분 벽화 반환 요청 공문서가 ‘가짜’로 밝혀진 것은 고미술계 ‘암투’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지난해 말 한국 측에 보냈다는 공식 서한은 “도굴된 고구려 고분군 벽화가 한국으로 유입된 것으로 드러났다”며 “벽화 도굴꾼 3명은 한국고미술협회 고위 간부로부터 교사를 받아 범행했으며, 이 벽화가 한국으로 넘어갔다고 공통된 진술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15일 “중국 국가문물국 산지샹(單霽翔) 국장이 이건무 문화재청장에게 공식 문서를 보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올해 초 주한 중국대사관 측이 “이런 문서를 보낸 적이 없다”며 “이 서한이 진짜인지 의심된다”는 뜻을 한국 정부 측에 알려왔다.

이 서한은 국제항공 우편 택배를 통해 문화재청장 사무실에 배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중국대사관 측은 중국의 공식적인 외교문서 전달 과정이 다르며 국장 직인, 공문서 양식, 내용 등이 모두 조작됐다고 밝혔다.

국가간 공문서에 대한 진위논란이 불거지면서 문화재청은 민감한 문화재 반환과 관련한 업무 협조 서한을 중국대사관 측에 확인하는 절차도 없이 경솔하게 발표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찰은 문화재청 관계자를 불러 이 공문서의 전달경위 등을 조사하는 등 공문서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문감정인 60여명 활동 고미술협회 회장 5회 연임-
김종춘 회장은

한국고미술협회는 1971년 고미술상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국내 유일의 고미술품 전문 감정기관이다. 현재 회원 700여명, 전문감정인 6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전북 남원 출신인 김종춘 회장은 70년대 초 고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88년 다보성고미술전시관을 개관했다. 97년 한국고미술협회 18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임기 3년의 협회장을 5회 연속으로 하고 있다. 15년째 장기집권이다.

김 회장은 회장 취임 초부터 고미술계 정화를 내세웠다. 당시 고미술계는 위작 만들기, 감정 조작, 가격담합 등의 비리와 부정이 팽배해 있었다. 애호가들은 협회와 고미술상인들을 불신했다. 김 회장은 2002년부터 5년에 걸친 소송을 통해 ‘도난문화재를 무조건 보유자로부터 몰수하도록 한 문화재보호법은 위헌’이라는 헌재 결정을 얻어냈다. 같은해 70만명의 서명을 받아 서화·골동품 양도소득세 폐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6년 고미술품 유통 및 거래 윤리강령을 만들었다. 협회는 ‘진짜와 가짜전’ 등 전시회 개최와 함께 고미술품감정아카데미 등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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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義士의 구국 의열투쟁, 일제 간담 서늘케 해!

written by. 이현오

강 義士 의거 90주년 기념식, 의거 장소인 서울역 광장에서 열려... 추후 동상도 건립돼

  90년 전 오늘(1919. 9.2) 남대문 역(현 서울역)에서 일본 제국주의 치하 새로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 부부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는 물론, 3·1독립만세 운동 후 일제의 강압 등으로 다소 침체에 빠져 있던 국내 독립운동에 기름을 끼얹으며 한민족의 기개를 전 세계에 떨치게 한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의 의거 90주년 기념식이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다.

안중근·윤봉길 의사와 더불어 독립운동 3의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강우규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것은 정확히 90년 전인 9월2일 오후 5시 지금의 서울역 회현 고가 도로 아래에서다.

 ▲ 2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식. 이 날 기념식에서는 강 의사의 애국정신을 후대에 까지 길이 이어나가자고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편 강 의사 기념사업회는 내년 강 의사 동상을 서울역에 건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konas.net

그 날 오후 5시 당시 해군대장이었던 사이토 총독은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 그를 환영 나온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손을 들어 화답하고 마차로 향하던 중 군중 속에서 그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당시 65세의 강우규 의사가 튀어나오며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은 운 좋게도 그가 차고 있던 칼과 혁대에만 파편을 맞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환영 나온 일본 관료 등 37명이 부상을 입고 이후 2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 기념식에 참석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konas.net

2일 오전 10시 그가 의거를 일으켰던 서울역 광장에서 (사)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와 동아일보사 공동으로 기념식이 열렸다. 이 날 기념식에는 김학준 동아일보사 회장을 비롯, 강 의사 동상건립에 힘써운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과 이병구 서울보훈지청장, 남만수 광복회 부회장, 그리고 평안북도 도지사를 위시한 강 의사 출신지역인 평남 덕천군민회 대표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돼 강 의사의 구국의 애국혼을 기렸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지난 달 25일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학술세미나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의사의 출생지가 평안북도(덕천군)인데다 유일한 후손인 손녀마저 지난 1985년 세상을 떠난 이유도 있었다. 그러다 그의 의거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점은 의거 당시 강 의사의 나이가 65세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고령에 해당하는 나이였다는 점이다.

이 날 기념식에서 강인섭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후손으로서 동상하나 제대로 건립하지 못해오다 이번 90주년을 맞아 서울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동상건립을 위한 모든 사업계획이 완료되고 예산까지 확보해 의거 당시의 자리에 폭탄을 투척하는 모습의 역동적인 표현으로 동상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konas.net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기념사에서 강 의사의 구국을 향한 나라사랑정신과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불굴의 민족정신, 그리고 애국혼을 우리들이 이어 받고 후손에게도 길이 물려주자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강 의사님의 아호인 '왈우'에서 느껴지듯이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생각했기에 일제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보내는 역사적 의의를 깨닫게 된다"며 "자기 스스로를 현명하고 뛰어나며, 잘났다고 하는 오만함을 가진 인물은 역사에서 큰일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아호를 들어 겸손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김 회장은, 그 스스로도 어리석고 무지함을 깨닫게 된다며 "서울역 광장에서 기세 등등하게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사님의 독립의 혼이 일제는 물론 전 세계에 알리는 장소였음에도 평소 이를 잊고 지내왔다"고 말하고 "우리는 의사님과 같은 선열들의 애국정신으로 말미암아 지금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룸으로써 (세계의)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예측하지 못해 방침하고 자만하면 새로운 국난은 오게 마련"이라며 "국난을 회피하고 대한민국에 의한 민족의 평화통일 성업을 위해서도 위대한 애국정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후대에도 의사님의 유지를 보내 물질적 풍요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미래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병구 서울보훈지청장도 "의사님의 강인한 민족정신을 기리고 그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자랑스런 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자"며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듯이 위대한 창조의 역사를 위해 힘을 쏟아 나가자"고 말했다.

김영일 광복회장은 광복회 남 부회장이 대신 낭독한 기념사에서 "의사님은 위대한 우리시대의 선각자였다"며 "세월이 흘러도 의사님의 애국정신을 가슴에 새겨 젊은이들에게는 애국혼을, 지도층에게는 사회통합의 기회가 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강우규 의사는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근대화의 요구에 부응해 개화사상을 수용, 기독교에 입교한 근대 지성이다.

한방의술을 바탕으로 인술을 베풀고 재산을 모아 사립학교와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1915년부터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쳤고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9월2일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결행했으나 총독 암살은 무위에 그쳤다.

이후 한인 순사에게 붙잡혀(스스로 자수했다는 내용도 있음)1920년 11월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의사의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 이 날 기념식에 앞서 열린 강 의거를 재연한 퍼포먼스. 사이토 총독과 그 부인이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역 귀빈실에서 나오고 있다. ⓒkonas.net

 ▲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 부부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있다. ⓒkonas.net

 ▲ 폭탄이 던져지자 놀란 사이토 부부와 일 관헌들. ⓒkonas.net

 ▲ 취조하는 일본인 순사에게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강 의사. ⓒkonas.net

 ▲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 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조선 청년에게 나라위해 일심전력 힘을 키우라고 연설하는 강우규 의사.

 ▲ 평상시 흰색 두루마기 그 차림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의열투쟁으로 일생을 살다 돌아가신 강우규 의사. ⓒkonas.net

 ▲ 이 날 기념식에서 색동예술단 어린이 회원들이 '반달'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konas.net

 ▲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만세삼창.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을 맞아 오늘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 주최로 강 의사의 항일투쟁 의거와 애국적 삶을 되돌아보는 학술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독립운동 사학계의 원로이신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강우규 의사의 생애와 의거'를, 김형목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강우규 의사의 계몽활동과 현실인식'을, 그리고 제가 '강우규 의사의 서울역 폭탄투척 의거와 재판'을 각각 발표하였습니다. 토론자로는 박환 수원대 교수, 양성숙 경찰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참석했습니다. 제가 발표한 내용은 올 가을에 출간한 <강우규 평전>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앞서 8월 15일 실은 글과 유사합니다만, 여기 자료용으로 실어둡니다.... (필자 주)  

강우규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윤병석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총독부의 식민통치가 10년째로 접어드는 1919년 8월 하순, 일제의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3.1만세의거로 타오른 독립운동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경성(京城, 현 서울)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가게 문을 닫고 무언의 항의시위를 벌였다. 9월 1일, 이날 경성(서울)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정보계통의 경찰들은 물밑에서 숨가삐 움직였다. 2일 신임 총독이 경성에 도착할 즈음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신임 총독 환영행사에 참가한 후 경성 서쪽에 있는 인왕산에 올라가 항의의 표시로 만세를 부르기로 한다는 ‘불온문서’가 시내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경찰은 심지어 상해 임시정부에서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파견한 암살단이 경성 시내에 잠입했다는 정보도 입수한 상태였다. 이 정보에 따르면, 암살단은 1차로 부산에서 거사를 결행한 후 실패할 경우 대구에서 다시 결행하고 최후에는 경성 남대문역에서 거사를 치르기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과는 별개로 경성시내 학생, 종교계 등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청년중앙단’ 명의로 조선은 3.1만세시위를 통해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새로 부임하는 총독은 즉시 도쿄(東京)로 되돌아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신임총독 부임을 앞둔 경성의 풍경

조선에 새 총독이 부임할 것이라는 얘기는 앞서 7월 5일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이 3.1만세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고 도쿄로 물러간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후임으로는 무단통치 대신 새로운 식민통치 전략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온건한 성향의 인물이 예상되었다. 마침내 8월 12일 일본 정부는 하세가와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예비역 해군대장을 임명, 발표했다. 당시 사이토는 이른바 ‘시멘스 사건’ 이후 예비역 상태였는데, 일황은 사이토를 ‘특별히 현역에 복귀’시켜 총독에 임명했다. 이 소식은 신문을 통해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항일 민족운동 진영에도 곧바로 알려졌다.

한편 8월 29일 도쿄를 출발한 사이토 총독 일행은 이튿날 오사카(大阪)을 거쳐 31일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다. 시모노세키에는 이들을 조선으로 태워갈 특별선(船)인 신라환(新羅丸)이 기다리고 있었다. 8월 31일 오후 9시, 사이토 총독 일행은 일본땅 시모노세키항을 출항해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향하였다. 이 배에는 신임 사이토 총독 다음으로, 총독부 내 제2인자인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신임 정무총감 일행도 같이 타고 있었다. 9월 1일 오전 8시 30분경 부산에 도착한 사이토 일행은 이날 부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오전 7시 30분 부산역에서 임시특별열차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다.

9월 2일 오후. 이날 경성의 날씨는 무더웠다. 부산과 달리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더더욱 찌는 듯 했다. 이날 군 당국은 신임 총독의 경성 입성 환영식을 위해 기병 1개 중대를 의장대로 편성하였으며, 보병 제78연대 장굴전(長堀田) 대좌(현 대령)가 지휘하는 보병 2개 대대 병력을 도열병으로 동원하였다. 또 인근 한양공원에서 예포 19발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군 당국과는 별도로 경찰은 이날 아침부터 남대문역 주변은 물론 인근 남산 중턱 총독부 청사에 이르는 남산 주변 일대에 걸쳐 탐문과 삼엄한 경계를 폈다. 그리고는 출영객들에게 아래 다섯 가지 ‘주의사항’을 별도로 발표했다.

1. 출영자는 제 위치를 지킬 것
2. 출영자는 당일 오후 4시 50분까지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정차장 왼편 화물 반출 입구로부터 입장할 것
3. 출영자는 입장하기 전에 접수대 직원에게 명함을 교부할 것  
4. 플랫폼에서는 각자 지정한 위치에서 출영할 것
5. 출영자 일동은 총독 일행이 출발한 후에 이를 따라 퇴장할 것

이날 당국이 지정한 남대문역 출영자 배치도를 보면, 역장실 앞에는 총독부 본부 및 소속관서 직원들과 조선귀족들을, 그리고 귀빈실 앞에는 군인, 일반인 및 여성들을 배치하였다. 일반인들과 여성 출영자들은 접수대를 통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사전에 신분확인을 하려고 한 것이다. 경찰 당국은 이밖에도 이날 출영자들에게 예복을 착용하고, 또 각 가정에서는 경축의 의미로 국기(일장기)를 내걸라고 지시하였다. 3.1만세의거 이후 조선인들은 각종 기념일에 일장기를 잘 내걸지 않아 당국으로서는 별도의 독려가 필요했었다. 

오후 5시 정각이 되자 121호 기관차가 이끄는 임시 특별열차가 사이토 총독을 태운 채 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흰색 해군대장 복장에 군모(軍帽)를 쓰고, 가슴에는 훈(勳)1등 욱일장(旭日章) 부장(副章)을 패용한 사이토 총독은 출영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귀빈실을 거쳐 호위 경찰과 신문기자 등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남대문역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에는 사이토 총독 내외가 타고 갈 마차와 그 뒤에 미즈노 정무총감 내외가 타고 갈 마차가 각각 한 대씩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토 총독 내외는 앞 마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고 앞좌석에는 이토(伊藤) 비서관이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남산 왜성대(倭城臺) 총독 관저로 갈 예정이었다.

- 천지를 진동시킨 폭탄 소리

마부가 말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발을 내디뎌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마차가 겨우 몇 바퀴를 구른 순간 역 광장 내 다방 인근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마차 근처로 날아들었다.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는 현장에서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촬영하던 한 사진기자 바로 옆에서 폭발하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순간 역 광장 일대에는 비산(飛散)한 파편에 맞아 나뒹구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허벅지를, 또 어떤 사람은 가슴에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역 광장은 다친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마치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정작 폭탄의 표적이었던 마차에 타고 있던 사이토 총독 내외는 이런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나자 사이토 총독의 부인 하루코(春子)는 이 소리를 예포 소리로 착각한 채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 사이토 총독이 작은 소리로  ‘맞았소, 맞아!’ 하며 두 번이나 연거푸 마차가 폭탄을 맞은 사실을 알려주자 그 때에도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사이토 총독은 아내에게 ‘폭발탄!’이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루코는 의아한 나머지  시선을 마차 바깥으로 돌렸다. 순간 하루코의 눈에 흰옷을 입은 사람과 일본인 복장을 한 사람 서너 명이 쓰러지면서 시뻘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서야 하루코는 자신들이 탄 마차 주변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알아 차렸다.    

날 폭발사고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은 없었지만, 다수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필시 신임 사이토 총독을 노린 것이었으나 사이토 총독은 오히려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굳이 피해라면 그가 탄 마차에 대여섯 조각의 파편이 박힌 것이 발견되었고, 그의 혁대에서 파편 몇 조각이 발견되었다. 사이토 총독이 폭탄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순전히 군복 덕분이었다. 해군복의 혁대는 다른 군복과 달리 유독 두터워 엔간한 물체도 뚫기가 어려웠다. 만약 그가 이날 해군복을 입지 않았다면 복부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강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이날 현장에서 신문기자,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경상자 가운데는 미국인 여성 1명도 포함돼 있었다. 중상자 가운데 2명은 나중에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경기도 순시(巡視) 스에히로(末弘又二郞)는 좌(左)대퇴부에 뚫고 들어간 탄편(彈片)으로 인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발생 9일만인 9월 11일 오전 9시에 사망했으며,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 경성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는 복부를 뚫고 들어간 탄편으로 장관(腸管)이 손상당해 부작용으로 복막염, 폐렴이 발병해 그해 11월 1일 오전 9시에 각각 사망했다.

한편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현장에서 범인 색출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범인 검거에는 실패하였고 아무런 증거물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초동수사에 실패한 경찰은 본정(本町)경찰서에 수사본부를 구성하여 현장에서 체포한 용의자를 대상으로 범인 색출에 나섰다. 일황을 대리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조선 내 최고권력자인 조선총독에 대한 일대 ‘불경(不敬)사건’이 발생한 만큼 경찰로서는 명예와 직(職)을 걸고 사건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던 중 사건발생 한 달 5일만인 10월 7일자 신문에 당국이 폭탄사건의 ‘범인’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당국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남대문역 폭탄투척사건의 ‘범인’은 65세의 강우규(姜宇奎)로, 지난 9월 17일 경성 시내 누하동에서 본정(本町)경찰서 경찰관이 체포하였으며, 그간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검사국으로 넘겼다고 밝혔다. 조선 최고통치권자인 총독을 겨냥해 폭탄을 던져 일제 당국과 세인을 놀라게 했던 폭탄사건의 전모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 ‘범인’은 65세의 노인 강우규

세인들은 특별히 주목한 점은 폭탄사건의 ‘범인’이 환갑을 넘긴 64세의 노인이라는 점이었다. 이 날짜 신문에는 강 의사의 얼굴사진이 처음 공개됐는데, 흰 두루마기 차림에 머리칼과 수염 모두 흰 색이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60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남자가 51.1세, 여자가 53.7세였으니 의거 당시 강 의사는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일자 <매일신보>가 전한 일제 당국의 발표내용 몇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강 의사의 간략한 이력사항 부분이다.

“폭발탄을 던진 범인 강우규는 당년 65세의 노인으로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한 이외에는 아무 학력이 없으며, 중년에 예수교 장로교회에 입교(入敎)하여 지금까지 그 종교를 믿는 중이며, 삼십 여 년 전에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거주하다가 그 후, 즉 십년 전에 북간도 도두구(道頭溝)로 이사하였다가 4년 전에 다시 지나(支那, 중국) 길림성 요하현(饒河縣)으로 이사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청년자제를 교육하며 한편으로는 예수교를 전도하였으며,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근방으로 돌아다니며 오로지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고취하기로 일을 삼았으며, 항상 과격한 조선인과 서로 교제하며 오랫동안 벽지(僻地)에 있어서 조선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자이라”

다음은 강 의사가 거사를 도모한 배경설명 부분이다.

“금년 봄 3월에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소요를 일으키자 이에 응하여 사방에서 일어나자 강우규의 거주지인 길림성 요하현 부근에 있는 조선이 이미 독립된 줄로 믿었다가 그 일이 허사임을 알고 통분함을 마지 아니 할 때 당시 해삼위에 거주하던 완고한 노인들이 조직한 소위 노인단(노인동맹단)에서 이동휘(李東輝) 부친 이발(李撥) 이하 7명이 대표자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왔으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경성 종로에서 제 목을 제 손으로 찌르고 관헌에게 붙들린 후 경찰서에서 독립운동이 무모함을 깨닫고 무사히 돌아가매 강우규는.....(일부 내용은 인쇄불량으로 독해 곤란) 늙은 팔을 뽐내며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한번 던져서 이름을 천하에 드러내리라 하고는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장곡천(長谷川) 총독이 갈린다는 말을 듣고 새 총독이 부임하는 때 한번 큰일을 해 보면 일이 만일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이름은 세상에 드러나리라 하고 결심을 한 모양이더라”

마지막으로, 의거 당일 상황과 피체 경위에 관한 내용이다.

“강우규는 지난 9월 2일 오후 5시에 새 총독이 남대문(역)에 도착하자 이보다 먼저 환영하는 사람과 구경꾼 틈에서 구경꾼인 체 하고 미리 준비한 폭발탄을 가지고 남대문역 귀빈실 현관에서 인력거와 구경꾼이 늘어선 곳에 가까이 서서 신문에서 본 총독의 얼굴을 기억하고 새 총독이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를 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폭발탄으로 총독을 겨눠 던졌으나 총독이 무사하였음을 보고 낙심천만하여 그곳에서 도망하여 잠시 경성 시내에 잠복하려고 수염을 깎고 복식을 고치고 이름을 강영일(姜寧一)이라고 가칭(假稱)하고 이곳저곳으로 교묘히 피하여 다니다가 드디어 9월 17일 누하동에서 체포되어 본정경찰서에서 취조중이더니 이번에 검사국으로 넘어 갔다더라”

한편 강 의사 사건은 검사국 및 법원의 취조 등 사법기관 내부에서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던 관계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노출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에서는 공범 혐의자 11명 가운데 8명을 체포하여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대정(大正) 8년(1919년) 10월 5일자 고경(高警, 고등경찰) 제28453호(‘총독에 대한 흉행(兇行) 범인 체포 건’) 비밀문서에는 강 의사를 비롯해 공범 혐의자 8명의 인적사항과 사건 관련내용이 나와 있다. 이들 가운데 최자남, 허형(일명 허일영) 두 사람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나머지 6명은 풀려났다.

의사 사건의 예심을 맡고 있던 나가시마(永島) 판사는 서둘러 예심결정서를 마무리 짓고 그 해 12월 27일 쯤 발표해 이 사건을 연내에 종결지을 만반의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이와 함께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 부상자 30여 명에 대한 심문이었다. 그래서 법원에서는 사전에 각 관할 경찰서에 해당자에 대한 심문을 지시해 놓았으나 그 결과가 제 때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해를 넘겨 1920년 1월 28일에야 비로소 예심종결을 발표했다.

이틀 뒤인 1월 30일자 신문에 예심종결서 전문(全文)이 보도됐는데, 주요 골자는 범행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충분한 만큼 피고 강우규는 ‘폭발물취체(取締)규칙’ 제1조 및 형법 제199조, 동 제54조, 피고 최자남은 폭발물취체규칙 제5조, 피고 허형은 폭발물취체규칙 제8조, 피고 오태영은 폭발물취체규칙 제8, 9조를 적용하여 형사소송법 제167조 제1항에 따라 ‘주문(主文)’ 대로 피고 4명을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부친다는 것이다.

- 거사 보름만에 피체... ‘공범’ 2명도 유죄

이 무렵 강 의사의 감옥생활도 언론에 일부 공개됐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강 의사와 연루자 3명은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여서 미결수 신분으로 서대문감옥 종로 구치감에 구금돼 있었는데, 예수교 신자인 강 의사는 매일 성경을 외우며 간수의 말을 잘 듣는다고 전해졌다. 아울러 장차 강 의사가 재판에서 적용될 법규는 ‘폭발물 취체규칙’이라고 알려졌다. 이 규칙에 따르면, 비록 미수에 그친 자라고 할지라도 무기형이며, 만약 폭발물을 사용했으나 부상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도 사형이 선고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 의사의 경우 2명의 사망자와 3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니 사형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2월 14일 오전 10시 경성지방법원에서 강 의사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강 의사의 장남 중건을 비롯해 방청석에는 내외국인 등 1백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워 이 재판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을 반영했다. 최자남, 허형, 오태영 피고 등이 출정한 후 오노(大野) 간수장의 안내로 강 의사가 회색 무명옷 차림에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출정했다. 재판장의 심문에 대해 강 의사는 당당한 기개로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하였으며, 또 자신의 국가관, 교육관, 세계관 등에 대해서도 솔직담백하게 밝혔다. 이날 재판정에서 폭탄 투척 전후의 상황에 대한 심문내용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재판장
-(폭탄 투척을)기다리고 있을 때의 광경은 어땠나?
강의사-마침 내가 표 파는데 서 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주워들었는데, 총독이 정거장에 들어오면 우선 귀빈실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다기에 정거장 귀빈실 근처로 가서 기다렸다. 처음에는 기병들이 서 있는 근처에서 기다렸는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귀빈실 동편으로 가서 나무가 하나 앞에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이어 많은 인력거가 늘어선 곳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나와 약 5~6간(間) 떨어져 있는 거리에 마차 한 대가 나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내가 그 마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부인 한 사람이 먼저 타는 것을 보았다. 이 부인에 이어 마차에 오른 사람은 총독이었고, 그 다음으로 젊은 청년이 탔다. 나는 매일신보에서 사진을 봐서 총독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금 마차에 오른 사람이 신임 총독이라는 것을 알고 허리에 차고 있던 폭탄을 끄집어내 손수건으로 싸가지고 있다가 고리에 낀 빗장을 뺀 후 곧 던졌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 가운데 총독이 탄 마차가 남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그 때 하느님께 ‘하느님이여,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올렸다.
재판장-폭탄을 어떻게 던졌는가?
강의사-폭탄을 바른손에 잡고 총독이 마차를 타자 가슴을 향해 던졌다.
재판장-그런데 그 폭탄이 총독에게 맞지 않고 어떻게 떨어진 줄 아는가?
강의사-어디로 떨어졌는지는 몰랐다.
재판장-폭탄 조각이 총독의 혁대로 들어가서 구멍이 뚫어지고 신문기자인 다치바나 이외에 36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을 아는가?
강의사-중경상자가 났는지는 모른다.
재판장-(폭탄 투척 후)현장에 한참 서 있었는데도 그걸 모른단 말인가?
강의사-한참동안 서 있기는 했지만 내 앞에 사람들이 겹겹으로 써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재판장-군중들이 모인 곳에 폭탄을 던지면 어떻게 되는 줄 몰랐나?
강의사-나는 오직 총독을 행해 폭탄을 던졌을 뿐 그 밖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고, 또 다른 영향이 미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사 직후 강 의사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담담한 자세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체포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체포하지 않았다. 강 의사의 진술에 따르면, 현장에서 순사 한 사람과 젊은 소년 하나가 자신을 주목하였지만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강 의사는 이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이어서 일부러 묵인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이토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는데 폭발소리도 나지 않고 또 총독도 죽지 않자 강 의사는 이는 하나님이 총독을 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체포당하지 않자 이 역시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곧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굉음을 내며 폭탄이 터진 것이다.

-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가슴 향해 폭탄 투척

  이날 오후 5시 10분경 강 의사에 대한 제1차 공판이 모두 끝났다. 폐정을 앞둔 순간 강 의사는 재판장에게 할 말이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이 이를 허락하자 강 의사는 이 재판은 일본 천황이 시켜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선총독이 시켜서 하는 것인지를 따져 물었다. 이에 재판장은 ‘법률은 천황의 재가를 받을 뿐이고 재판은 재판소 독립으로 한다’고 답하자 강 의사는 ‘그러면 어째서 나만 신문하고 또 귀찮게 구느냐, 저 죄(罪) 덩어리인 총독은 어째서 잡아가두지 않느냐’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제1차 공판이 ‘주범’인 강 의사에 대한 공판이었다면 18일 열린 제2차 공판은 ‘공범’ 최자남, 허형, 오태영 등 3명에 대한 심문이었다. 비록 거사는 강 의사가 단독으로 기획하고 준비하고 또 결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이들의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한편 이들은 공판정에서 예심 때 한 진술내용을 상당수 번복하였다. 그 이유는 경찰조사나 예심 때 혹독한 고문을 받고서 이에 못이겨 할 수 없이 거짓진술을 했다고 털어놨다. 최자남의 경우 부부가 모두 원산경찰서에 붙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최자남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강 의사 등 피고 4인에 대한 심문이 끝나자 검사는 피고 모두에게 실형을 구형했다. 강 의사에 대해서는 살인미수죄를 적용, 형법 제199조 제203조 제54조 및 폭발물취체규칙 제1조 제12조에 의거하여 사형을, 허형에 대해서는 폭발물취체규칙 제8조에 의거하여 징역 1년 6개월을, 최자남에 대해서는 정상(情狀)은 자세하지 않지만 동 규칙 제5조에 의거하여 징역 3년을, 마지막으로 오태영에 대해서는 동 규칙 제9조 제12조에 의거하여 징역 1년을 각각 구형하였다. 이날 검찰의 구형에 대해 강 의사 등  피고 전원은 모두 불복의 뜻을 내비쳤다.

강 의사 등 4명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은 2월 25일 열렸다. 이날 다치가와(立川) 재판장은 강 의사 등 피고 4명을 불러 세우고는 판결문을 읽어내려 갔다. 재판장은 피고들의 진술내용, 목격자 및 피해자들의 증언, 폭탄 감정 결과, 그리고 폭탄 파편 등 여러 증거물을 토대로 판단할 때 유죄가 입증된다며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강우규(姜宇奎)    사 형
최자남(崔子南)    징역 3년
허  형(許  炯)    징역 1년6개월
오태영(吳泰泳)    무 죄

검사의 구형과 비교해볼 때 강 의사, 최자남, 허영 등 3인은 형량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오태영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오태영이 강 의사가 폭탄투척 ‘범인’임을 알고도 이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또 강 의사의 부탁으로 가회동 82번지 장익규의 집으로 은신하도록 도와준 점 등은 인정되나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오태영은 이날로 석방되었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이른바 ‘남대문역 폭발사건’은 이리하여 사건 발생 근 6개월 만에 일제당국의 사법처분을 받고 일단락되었다.

- ‘동지’ 최자남 변호를 위해 공소 제기

한편 1심 판결에 대해 강 의사는 판결 당일 즉시 공소(控訴)를 제기하였다. 강 의사가 공소를 제기한 가장 큰 이유는 ‘동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강 의사는 공소 공판에서 ‘내가 공소를 다시 한 것은 결단코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최자남은 판결 하루 뒤인 2월 26일 역시 공소를 제기하였다. 반면 허영은 1심 판결에 승복하고서 공소 제기를 포기하였다. 강 의사와 취자남의 공소 기록은 3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심 법원인 경성복심(覆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이 사건은 제2막을 맞게 됐다. 4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심 재판이 열렸다. 이날 방청객 속에는 낯선 얼굴이 한 사람 있었다. 남편의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강 의사의 부인이 멀리 중국 땅에서 건너와 아들 중건과 함께 재판을 지켜보았다.

판은 사실 심문, 검사 논고, 변호사 변론 순으로 진행됐다. 먼저 재판장이 강 의사에 대해 연령, 본적지 등을 확인한 후에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재판장은 1심과 유사한 내용, 즉 강 의사의 이력, 거사를 결심한 계기, 폭탄 구입 경위, 거사 당일의 행적 등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강 의사는 대개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 라고 짧게 답했다. 그러나 폭탄의 위력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는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요지는 폭탄의 위력을 자세히 몰랐고, 사이토 총독 한 사람만을 살상하기 위해 던졌을 뿐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재판장의 심문이 끝나자 검사의 논고를 시작했다. 데라다 검사는 강 의사가 백주에 폭탄을 던져 총독을 살해하려한 것은 범죄의 구성요건을 확실히 갖추고 있을뿐더러 폭탄을 던지면 군중에게 피해가 있을 줄 몰랐다고 하나 이는 구실에 불과할 뿐 실지로 수 십명의 사상자가 난 만큼 ‘살인미수범’과 ‘살인기수범’을 범했다고 주장했다. 또 최자남에 대해서는 경찰 및 검찰 조사, 예심, 제1심 등에서 한 진술이 일치하는 점으로 봐 폭탄 건에 대해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아 방조범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라다 검사는 논고를 마친 후 두 사람에 대해 1심 동일한 형량인 ‘피고 강우규 사형’, ‘피고 최자남 징역 3년’을 구형했다. 4월 26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은 강 의사에게는 사형, 최자남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의 형량과 동일한 형량이다. 다만 재판부는 총독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상해치사 또는 상해 범죄에 대해서는 법 적용을 배제시켰다. 최자남의 공소에 대해서는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강 의사는 이날 고등법원에 상고(上告)했다.

- 우국충절로 넘치는 ‘상고취지서’

앞서 언급했듯이 강 의사는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았으나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재판 준비를 본인이 직접 감당해야 했다. 결국 ‘상고취지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강 의사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 장문의 상고취지서는 총 9개 항을 담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한 배경, 폭탄 입수 및 국내 반입 등 거사의 경위, 최자남과의 ‘공모’ 여부, 상고 이유, 1, 2심 법원의 처사에 대한 비판, 동양 3국의 평화론 등이다. 다시 말해 상고취지서에는 거사를 도모한 배경에서부터 재판 과정에서의 논쟁 및 재판부에 대한 충고 등을 총망라하고 있어 강 의사의 우국충절은 물론 세계관이나 동양평화 사상까지도 엿볼 수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상고취지서 내용 가운데는 강 의사의 언사로 보기 어려운 구절이 몇 군데  없지 않다. 한 예로 일본 천황과 관련하여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 ‘어지(御旨)’ ‘聖旨(성 지)’ ‘성덕(聖德)’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천황주의자들이 천황의 신민(臣民)을 자임하며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밖에도 일황이 ‘천의(天意)에 순종하고 세계 대세인 평화회의에 동의하여’라는 표현 등은 당시 강 의사가 국제정세 등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부족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강 의사에 대한 상고심 1차 공판은 5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 구사바(草場) 검사는 강 의사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폭탄을 던지면 다수의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을 것이므로 이는 범죄성의 의사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 대목과 관련해 유죄를 선고한 1심의 판결을 뒤엎은 복심법원의 판결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다. 상고심 선고 공판은 5월 27일 다나베(渡邊) 재판장 이하 4명의 배석판사, 그리고 구사바(草場) 검사가 열석한 가운데 재판이 열렸다. 다나베 재판장은 피고가 총독 외에 다른 사람을 살해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총독이 탄 마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예견하였고, 또 사람이 밀집한 상황에서 폭탄을 던져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점은 피고가 그 피해를 희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원심 판결, 즉 사형을 수용하였다.


재판부는 또 1심 재판부가 강 의사가 요구한 총독의 법정 출석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사건 자체의 재판 절차에는 하자가 없으므로 원판결의 당부(當否)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점, 또 피고가 주장한 내용들은 정치, 도덕에 관한 논의들로서 상고의 적법(適法)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최종적으로 강 의사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강 의사에 대한 일제 사법당국의 사법적 절차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오직 사형집행 절차만을 남겨 두었다. 중건은 재판 당일 부친을 면회하였는데, 강 의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아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사실상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 나 죽는다고 조금도 엇지않게(언짢게) 생각하지 마라.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실허하는(싫어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 세상에 대하여 한 일이 너무 없어 도로 북그럽다(부끄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내가 죽느니만 못할 것 같다. 즉 이번에 내가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이제 내가 이만큼 애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조선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백인다면(박힌다면) 그만이다. 내가 죽을 지라도 내 가슴에 한이 되는 것은 내가 죽은 후에 조선청년들의 교육이다...”

- 거사 이듬해 순국... 공동묘지에 유해 가매장


운명의 날인 1920년 11월 29일이 마침내 다가왔다. 강 의사는 이날 오전 서대문형무소 내 사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형을 집행하기 전 형리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자 강 의사는 짧은 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남겼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이날 일제 당국은 강 의사의 장남 중건을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시켰다가 강 의사의 형 집행 후에야 풀어주었다. 오후 2시경 장남 중건은 서대문형무소 시체실에서 사각형 궤짝 하나를 인계받았다. 그 속에는 부친의 시신이 앉은 채로 들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중건은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한편 강 의사의 유해는 순국 직후 유족들이 선영으로 모시고자 했으나 일경의 불허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일경은 강 의사의 유해를 내줄 경우 조선인들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결국 빈소 조문은커녕 장례 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만이 강 의사의 유해를 운구하였다. 강 의사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감시 차 일경 2명이 따라오자 중건은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네놈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감시하여야만 속이 쉬원하냐!”며 울부짖었다. 강 의사의 유해는 이날 오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소재 서대문형무소 공동묘지에 임시로 가매장 되었다.

해방 후에도 강 의사의 묘소는 10년 가까지 이곳 공동묘지에 쓸쓸히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가 1954년 봄 유지들의 발기로 이장문제를 논의한 후 마침내 서울 우이동 산록(山麓)으로 이장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일정에 차질이 생겨 당초 계획보다 2년 뒤인 1956년 10월 18일 수유리 산 109번지에 묘지 이장과 함께 육당 최남선이 쓴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우이동에 마련된 강 의사의 묘소는 덕천군민회에서 관리하였는데, 부지 문제를 놓고 서울시 관재국과 송사(訟事)에 휘말리는 등 곡절을 겪다가 1967년 6월 26일 현재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로 이장하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강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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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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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주변의 지각판 구조입니다.
일본부터 시작하여 필리판판까지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지각판입니다.
지각이 조각조각 깨져있다는 말입니다.



아래 이미지에서 일본 땅 밑에 지각판 라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흰색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땅은 여러 지각판이 조각조각 맡물려 있는 위험한 지형입니다.


이번 지진이 일본에서 발생한후 일본에서 몰아친 쓰나미가
일본 땅에 충돌하고 튕겨져 나와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연안에 각종 쓰레기나 부유물들이 칠레쪽으로 많이 떠내려 갔을듯 싶군요.


아래 그림은 일본에 방사능 노출로 대기권을 타고 오염물질이 날아가는 경로를 알아본 사진입니다.
방사능 피폭으로 일본전체는 물론 하와이, 캐나다, 미국 까지 그 치명적인 방사능이 날아가겠군요.
어떻게든 일본의 결사대가 막아야하겠군요.



자! 세계적으로 원자폭탄과 맞먹는 수준으로 위험한 국가가 일본입니다.
지형적으로 지진발생국이 빈번한 국가라는 것은 전세계의 초등학생들도 잘 알죠.
그렇게 위험한 국가인것을 알지만,  일본은 원자력발전소나 방사능시설물이 전세계에서 두번째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도 원자력발전소를 계속해서 짓는 이유는?
지진으로 망하나, 원자력발전소의 피폭사고로 망하나 한마디로, 지진으로 망하면 전세계가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모아준 성금으로 지진복구하고 다시 원자력발전소 건설할까봐 걱정입니다.
일본은 정말 생각이 깨어있다면 원자력은 없애야하고 수력, 태양력, 화력, 지열, 풍력 등으로 발전소를 늘려야 하는 나라입니다.

이번에 일본에게 보내준 성금들을 보아하니  참으로 우리나라 사람들 정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자체 행위는 감동적인것입니다.
고물가로 만들어놓아서 요즘 경기들이 너무 안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적, 인륜적으로는 참 멋진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도 아직 판자촌 생활에서 아무리 발버둥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부끄러울정도로 말이죠.
몇몇 분들은 한국에서 천안함폭파, 연평도 폭격, 가스사고, 대형참사, 아이티 지진참사가 생겨도 성금을 내지 않던 유명인들이
일본이라고 하니까 가장 먼저 성큼 거액을 기부하는 분들이 많으시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쇼맨쉽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할듯 합니다.

일본은 정말 우리에겐 독도를 달라고 으름장을 늘어나도 너그러워야할 나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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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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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가까이서 본 적이라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998년이던가, 그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 그것도 100여명이 넘는 시민단체 인사들을 초청해서 국정과제를 설명하던 그 때에 악수하느라 본 것 밖에는 없다. 그 때 악수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청와대에서 집으로 보내주었는데, 아버님은 그 사진을 이리저리 이사하면서 사라지기 전까지 한동안 당신의 방에 두고 계셨다. 아버님으로서는 아들로 인해 고통 받던 시절, 학생운동으로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문제를 거론한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굳이 꼽자면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세 번의 간접적 인연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나는 대학시절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이다. 독재정권 시절에 더구나 자식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으니 어느 곳에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여겼던 부모님들은 민가협을 찾았고, 민가협을 통해 야당의 두 지도자인 YS와 DJ를 방문하게 되었다. 석방 이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늘 두 사람을 비교하며 시원시원하게 약속을 한 사람은 YS였고, 그에 비해 DJ는 속 시원한 답을 주지는 않아서 조금 못미더웠다고 하신다. 근데 사실 돌아보면 그 시절 누가 양심수의 석방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DJ의 태도가 옳은 것이긴 하나 애타는 부모 마음에 비추어 보면 썩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난 선고 받았던 징역형을 한 달 정도만을 남겨 두고 나온 셈이니 DJ의 태도가 '현실적'이었던 셈이다.

▲ 1980년 옥중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두 번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던 시절, DJ가 찾는 젊은 피 300인이라며 어느 월간지에 제멋대로 만든 명단이 내 이름올라간 일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소위 386세대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주력으로 주목받았고, 나이로는 그 세대의 앞머리쯤에 있던 필자도 제멋대로인 그 300인 명단에 올라 있었다. 어차피 정치권 진입에 관심 없던 사람으로서 그러려니 했고 실제로도 DJ가 내게 관심 줄 일은 없었던 터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혹시나 DJ와 관련을 맺는 것은 아닌가 하는 눈으로 본 것도 사실이었다. 뭐 특별히 직접적 손해를 끼친 일은 없었으니 딱히 내게 나쁜 일로 기억될 일도 아니지만 그리 즐거운 기억도 아니다.

세 번째는 경실련에서 일하던 시절 경실련 창립기념 행사에 당시 야당 총재로서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시민단체 행사에 찾아 와 축사를 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 전이었으니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날 DJ의 축사는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축사는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연설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연설을 그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YS와 DJ가 민추협을 만들어 재야운동 단체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거리에 나설 수 없었던 그의 육성은 녹음테이프로 집회 장소에서 울려 나오는 것으로 들어야 했다. 물론 87년의 대통령 선거 연설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연설의 내용이 중요했다기보다 갇혀 있던 DJ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던 시절이었고, 대통령 선거 연설 역시 그 내용보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그의 변명으로만 다가오던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경실련 창립기념행사에서의 그의 축사가 온전히 그의 연설 내용만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첫 번째 경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행사에서의 정치인의 격려사나 축사가 대개 그렇듯이 그저 칭찬과 격려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딱히 그런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리 어울리는 일은 아니기도 할 것이라 칭찬과 격려 일색의 격려사나 축사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사 진행자의 일원으로, 찾아오는 손님 안내하기에 여념이 없던 나로서는 별반 귀 기울여 들을 이유가 없었고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러는 순간 자연스레 귀를 열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하는 순간,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나름 자기의 논리적 생각을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이 그저 그런 내용이라면 더 듣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고, 혹 그리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나마 있던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게 되었다. 그의 축사는 내내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철학과 구체적 견해가 잘 정돈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의 말은 시민운동에 대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김대중이란 사람을 단순한 정치인으로 보지 않게 된 시작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왜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중요한가? 시민운동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첫째, 둘째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에 감사하다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이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거나 자발적인 시민들의 노력이 지금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대의나 명분으로만 대중경제론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느 정치인들에 비해 참 영악하게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잘 만들어 가는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DJ가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에 어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비공식적인 자리라 남북관계에 대한 소위 비사를 포함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임장관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 전의 이야기인데,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DJ의 남북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는 데, 정확한 내용은 이제 기억에 없지만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나 일의 성과를 바라기보다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남과 북이 가까워지기를 염원하고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가 담긴 것이었다. 임 장관이 전해주는 기도의 내용은 남북관계에 대한 DJ의 진정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 준 것이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손을 마주잡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묘하게도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견주어 보면 오히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모습이 어떤 사회였나를 알게 해 준다. 현재의 이명박 정부가 펼치는 국정운영이란 거의 상거래 과정의 모습이 오버랩 되지, 정상적인 정치과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본래 의미의 정치도 정책집행도 또 진정성 있는 소신도 아니라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노정했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름의 철학에 기초한 정치와 정책 집행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이 새삼 느껴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같은 정치와 정책집행이라는 것이 그때그때의 대증적 처방이 아니라 일관되게 지녀온 자신의 철학과 정치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이 바탕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역설을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그리 많이 들어 보지 않았던 그의 연설이지만 나는 그가 '분석적'이라고 느낀다. 그만큼 치밀하게 문제를 파고들고 정치한 정책을 만들려는 노력을 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그저 '좋은 일이죠'를 넘어서 시민운동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그의 분석은 진보적 가치라는 지형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물론 그의 정치는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했다. DJP연합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정치가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지금의 연합정치의 본격적 시동도 그가 건 셈이었다. 본격적 의미의 연합정치였는가는 논란이 있는, 거대 정치세력들의 수장들의 합의에 의한, 연합이 이루어지기까지 논의가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그 결정을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시민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연합정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숙련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연합정치를 담론화 한 것은 아니지만 동물적으로 그의 필요와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까?
이런 점들이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가깝게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또한 그의 이런 태도들이 과거에 내가 생각해 왔듯 단순하게 권력욕만을 위한 정치적 행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지만, 돌아보면 앞서 말한 여러 지점에서 그러나 그가 보여준 가치와 그에 대한 그의 진정성은 그의 정치적 결정과 태도들이 단지 권력을 위한 명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우리가 그와 같은 대통령을 가졌었다는 것은 나라의 축복이다. 단지 노벨평화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발표했을 때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진영의 신문들은 우리 정치의 거목이 정계를 은퇴했다며 추켜세웠다. 무엇보다 그로 하여금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아두고 싶은 마음들이 앞선 것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우리 정치를 설명할 때 3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 구분일 정도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위치는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구분과 구분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뒤늦게 알게 된,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기의 정치에 대한 확신과 치열한 고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마련한 추모집회의 사회를 기쁘게 본 이유기도 하다.

본래 정치를 하려고 했던 목표와 이유는 팽개쳐 놓은 채 권력만을 위해 이합집산하고 삼국지 전략 짜듯, 혹은 장사치 장사하듯 정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하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김대중 이라는 정치인은 훌륭한 전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돌아보며 그를 넘어서는 정치인이 나오게 될 때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김대중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다.


출처 : 하승창 씽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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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양 金太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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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은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면서 유서에 꼭 부탁한 내용이 있었다.

" 꼭!  복수해달라고 "



 
아니뗀 굴뚝에서 연기날까?

장자연이 단순한 우울증 환자였고, 아무도 그녀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단 말인가?

변태같은 짓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그들이 악마였고, 변태라고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인가?




장자연 리스트는 결국은 공개되어질 것이고, 공개되어야 한다. 

일제시절 일본 쪽바리들보다 사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 위안부사건만큼 잔인한 현대판 이코노믹 위안부사건!

이 사건은 이권과 실세가 연루되어 있어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종결되어야만 하는가?
이걸 경찰과 검찰에서 감싸주는 사연은 무엇인가?

 이미 장자연은 자신의 유서에서 해당 기업 및 악마들 이름을 공개하고 있다.


[ 출처 ]   http://blog.naver.com/sobbang8?Redirect=Log&logNo=90108733059



" 고인이 된 그녀는 내가 죽은후 복수가 안되면 하늘에서 고인(장자연)이 직접 복수하겠다고 글을 남길정도로 그 악마들을 혐오스러워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것이 또 있더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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